어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긴 골목길을 빠져 나갔다
학교 다닐 때 달리기를 했기 때문에 웬만한 남자 쯤은 따돌릴 수 있는 어님이다.
실제로 체육대회가 있으면 중거리를 뛰었고 상도 탄 일이 있었다.
어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긴 골목길을 빠져 나갔다.
그 사내가 어님이 때문에 적지 않은 돈을 썼다고 소리쳤지만 어님으로서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행히 골목은 곧장 큰 도로로 나가게 돼 있었다.
큰 길로 나오자 바로 눈에 띄는 곳에 손님을 기다리는 빈 택시들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어님은 숨을 가쁘게 몰아 쉬며 그중 맨앞에 서있는 택시를 향해 뛰어 갔다.
젊은 택시 기사가 어님의 뛰는 모습이 심상치 않아 보였던지 택시의 앞문을 열어 주며 뒷쪽을 손가랄질해 보였다. 뒤를 보았다.
지름길로 질러 왔는지 어느새 그 눈이 불거진 사내가 보도 위에 보였다.
사내도 뛰는 품이발이 느린 편은 아니었다.
“빨리요, 저 사람이 잡으려고 해요. 빨리 출발해 주세요!”
택시가 급히 출발했다.
“스톱! 택시! 스톱!”
뒤쫓아 오던 사내가 소리치며 팔을 휘젓는 것이 뒷 유리로 보였다.
“더좀 빨리요!”
사내가 뒷 택시에 급히 오르면서 어님이 탄 택시를 손으로 가리키는 것이 보였다.
뒤쫓으라고 지시를 하는 모양이다.
“뒷 차 타고 따라오고 있어요.”
백미러로 뒷차를 살핀 기사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흘리더니 급히 기어를 바꿔 넣고 깊숙히 액세레이터를 밟았다. 어님을 태운 택시는 금방 뒷차를 멀찍이 떼어 놓고 쑥쑥 앞으로 달렸다.
이제 그만 하면 쫓아오는 뒷차도 따라 붙지 못 할듯 싶어 마음이 놓이려는터인데
젊은 기사가 별안간 차를 급정거 시켰다.
“아저씨, 왜 세워요? 빨리 가요!”
기사가 핸들 위에 얹고 있던 한 손을 들어 빨간 신호등을 가리켰다.
불이켜져 있었다.
“그럼 어떡한대요?”
기사가 어님을 돌아보았다.
“예, 아저씨! 아까 그 사람, 저는 첨 보는 사람인데, 절 가뒀단 말예요!”
“가둬요? 어디다요?”
“이상한 곳이에요. 그래서 도망쳐 나왔는데….”
어님은 뒤를 돌아보고 반쯤 시트에서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따라 붙었어요.”
사내가 탄 베이지색의 택시가 승용차 한 대를 사이에 두고 바로 뒤에 바싹붙어 있었다.
백미러로 그걸 보고도 기사는 별로 서두르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저 붙잡히면 안 되는데요. 저 사람이 절 방에 가둬 놓고 나쁜 짓 하려했거든요. 아저씨, 어떻게 할수 없을까요?”
기사는 아무 말이 없었다.
대신 입가에 흐르던 미소를 거두고는 다시 택시를 출발시켰다.
신호등이 노란 불에서 파란 불로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어님을 태운 택시는 쏜살처럼 우회전을 했다.
그리고 길이 넓은 육차선으로 접어들자 경주차처럼 바람을 가르기 시작했다.
차체에 부딪치는 바람 소리가 윙윙거리는 것이었다.
차선을 바꿔 가며 앞차를 앞질러 가는 것을 보니 젊은 기사도
뛰쫓아오는 택시와 겨뤄 보자는 생각을 굳힌 것 같았다.
기사의 눈은 이따금 날카롭게 백미러를 향했다.
뒤쫓는 차를 감시하고 있었다.
교차로를 여러 개 통과하고 다시 몇 차례 방향을 바꾼 후에야
택시는 외곽도로로 보이는 큰 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어님은 뒤를 돌아보고 외곽도로로 접어든 후로 뒤따라오던 택시가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했다.
손에 땀이 배어 있었다.
“이젠 안 보여요. 따돌렸나 봐요.”
기사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여기서 내린다면 벌판에 혼자 버려지는 거나 다를 것이 없다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짓고 있는 기사를 보자 어님은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따돌린 거죠?”
“그런 거 같소. 그런데….”
기사가 속력을 늦추며 어님을 돌아보고 물었다.
“어디로 갈까요?”
별안간 말투가 달라졌다.
조금 전까지는 경주에 나선 선수, 그러나 지금은 손님을 태운 택시 기사로 돌아간 말투로.
어님은 얼른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벌써 먼 거리를 달려왔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막연했던 것이다.
“저, 도와 주신 거 너무 고맙구요, 사실은….”
기사는 흘깃 어님을 돌아보더니 차를 갓길 쪽으로 붙였다.
택시는 고장난 차 처럼 아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어디로 태워다 주면 되겠소?”
“지리를 전혀 모르는 걸요.”
“지리는 내가 아니까 걱정 말고 갈곳만 어딘지 대 봐요.”
“갈 곳이 없어요.”
“친척이나 아는 사람이 없단 말요?”
“예.”
“한 사람도?”
“예.”
“허, 큰 일 났군.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이오?”
“모르겠어요. 그냥 막막해요.”
“집은 어디요?”
“멀어요, 섬….”
“바다에 있는 섬 말요?”
“예.”
“그럼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요?”
“그냥 왔어요.”
기사는 혼자서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어쩌자고 이런 도시에 아무 연고도 없이 무작정 왔느냐고 나무라고 있는 것 같았다.
기사는 택시를 갓길 차선 밖에다 세웠다.
난처한 표정이었다.
미터기를 보고 있던 그는 어님의 표정을 살피더니,
“요금 낼 돈은 있소?”
하고 물었다. 이미 8천원을 넘겨 있었고 차를 세운 뒤에도 계속 올라가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 나온 정도는 낼 수 있어요. 그렇지만 가진 게 많지 않아서 더 많이 나오면 곤란해요.”
기사는 미터기를 세워버렸다.
“그럼 여기서 내릴 수 밖에 없는데….”
어님은 새삼스럽게 밖을 두리번거렸다.
시 외곽 쪽이라 그런지 큰 건물은 그다지 보이지 않고 황량한 느낌이 들었다.
여기서 내린다면 벌판에 혼자 버려지는 거나 다를 것이 없다.
“여기서 내려야 되나요?”
“그래야 될 것 같소. 자가용 같으면 손님을 태우고 돌아다녀도 되지만 영업하는 차라.
또 5시까지는 교대도 해야 되고.”
어님은 앞이 캄캄해졌다.
어떻게 해야 할까.
사정해 볼 수도 없고 매달릴 수도 없는 처지다.
뒤쫓던 사내를 따돌려 준 것만도 고마운 일이다.
“그럼 요금 8천원 내고 내려야겠네요?”
“사정이 딱하니 절반만 내고 내려요.”
품안에서 천원짜리 네 장을 꺼내 기사에게 건네 주고
어님은 별안간 왈칵 쏟아져 나오는 울음을 삼키며 택시에서 내렸다.
기사가 오던 쪽을 손으로가리키며,
“시내로 다시 들어가려면 오던 길로 가시오.”
그 말 한마디를 남기고 떠나 버렸다.
택시의 뒷 모습을 넋나간 듯이 바라보고 있던 어님은
뺨으로 타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고 나서 오던 길로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넓은 도로 위에는 달리는 자동차만 무거운 굉음을 내지르며 쏜살 처럼 달리고 있을 뿐
보도 위를 걷고 있는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해를 보니 얼마 안 있어 날이 저물 것 같다.
남은 돈 몇 푼 가지고는 어디 가 요기하기 조차 힘들 것이다.
맥없이 터벅터벅 시내 쪽을 향해 걷고 있는데 쏜살 처럼 달려오던 차 한대가
어님이 앞에서 급제동을 걸면서 멈춰 서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방금 내렸던 그 택시였다.
“타요.”
젊은 기사가 조수석의 앞문을 열어 주면서 어님에게 어서 타라고 고개짓을 해 보였다.
너무 반갑고 고마웠다.
어님은 택시에 오르면서 젊은 기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뺨에 남아 있는 눈물 자국을 얼른 손등으로 훔쳐냈다.
택시는 다시 외곽 도로를 달렸다.
기사는 한동안 옆에 태운 어님을 잊어 버린듯 말이 없었다.
어님 쪽에서 먼저 무슨 말이든 꺼내야 될 것 같았으나 입이 열리지 않았다.
택시가 외곽 도로를 벗어나자 비로소 기사가 어님을 한번 돌아보고 나서 먼저 말문을 열었다.
“내가 다시 돌아온 걸 이상하게 여길지 몰라 설명을 하겠소.
다른 뜻은 없소. 지리도 모르고 갈 곳도 없는 사람을 길바닥에 내려놨다는 생각을 하자 마음이 편치 않았소.
그래서 영업을 못 하더라도 우선 어디로든 데려다 줘야 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오.”
“고마워요.”
“아니, 고맙단 말을 듣기엔 아직 이른 것 같소. 나도 지금 딱히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이 있는 건 아니니까.”
기사는 어님을 돌아보고는 새삼스러운 듯 물었다.
“울었소?”
어님은 부끄러워 고개를 떨궈 버렸다.
“울고 싶을 땐 우는 것도 좋아요. 마음이 개운해지 거든요.”
“울어 보셨어요?”
“그럼요. 나도 여기 처음 왔을 때는 더러 운 일이 있지요.”
기사는 소리없이 웃었다.
“여기 오신 지는 몇 년이나 되셨어요?”
“십여년 되는 것 같은데….”
도로가에 손을 들고 있는 여자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합승을 바라는 눈치인데 기사는 손을 저어 보이고는 그대로 지나쳐 버렸다.
“태울 걸 그랬나 봐요. 저 때문에 이러시면 안 되는데.”
“그런 건 아니오. 손님 태울 시간이 없어요. 다섯 시까진 차고로 가서 아저씨 하고 교대를 해야 하거든요.”
미터기 아래 붙은 전자 시계가 다섯 시 십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럼 시간이 다 됐네요.”
“그래서 차고로 갈 생각이오.”
“멀어요?”
“아니, 거의 왔어요. 5분이면 가요.”
“운전하신지는 오래 됐어요?”
“얼마 되지 않아요. 2년 정도. 아저씨가 매일 계속할 수 없으니까 내가 가끔 교대를 해드리는 거죠.”
“아저씨가 그럼 이 택시….”
“개인 택시지요.”
“그분 하고 친척 되세요?”
“아니, 나 있는 동네 사시는 분인데 좋은 분이지요. 운전도 그 아저씨한테 배우고.”
차가 도로가에 있는 주유소로 들어갔다.
“아저씨와 여기서 교대를 하지요. 나와 계실 거예요.”
어님은 기사를 쳐다보았다.
여기서 교대를 한다면 이제 더 이상 택시에 앉아 있을 수는 없다.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주유소 사무실 쪽에서 약간 몸집이 커 보이는 남자가 나오더니 세워 놓은 택시를 향해 걸어왔다.
바로 그 아저씨인 모양이다.
“내려요.”
기사는 어님을 먼저 내리도록 하고 차에서 돈주머니를 들고 내렸다.
“오늘은 석장 못 채웠습니다. 별론데요.”
“이상 없고?”
아저씨라는 사람이 돈주머니를 받으면서 어님이 쪽을 힐끔 돌아보고 왠 여자냐고 묻고 있는 눈치다.
“브레이크 라이닝이 좀 뻑뻑한데 그런대로 괜찮은 것 같아요. 마침 여기까지 오는 손님이 있어서….”
“그래 수고했다. 내일 보자.”
아저씨가 택시를 몰고 도로로 나갔다.
그때까지 어님은 자신이 마치 일행처럼 서있었던 것을 깨닫고 흠칫하며 기사를 쳐다보았다.
“갑시다.”
기사가 어님을 돌아보고 말했다.
주유소 사무실로 걸어가는 젊은 기사의 뒤를 따라 어님은 좀 서먹한 기분으로 걸었다.
어디로 데려다 주려는 걸까?
기사가 사무실 문앞에서 어님을 돌아보고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요.”
어님을 밖에 세워 놓고 안으로 들어간 기사는 조금 뒤에 다시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더니 들어 오라고 했다.
어님이 안으로 들어가자 책상 앞에 앉아 있던 30대 후반의 남자가 고개를 돌리며 기사와 어님을 번갈아 보았다.
“많이 닮았구나. 유선우한테 이런 동생이 있는 줄은 몰랐다. 몇 살이냐?”
어님에게 묻는 말이었다.
“열 여섯입니다.”
“음, 오빠도 미남이지만 동생도 미인이군.”
그러고는 혼자서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나서 이번에는 유선우에게 물었다. “오늘 벌이 어떻던?”
“어제만 못 한것 같던데요.”
“그렇지? 여기도 오후 내내 파리 날렸다. 그럼 데리고 가 봐. 넌 또 강의 있잖니?”
“예.”
유선우가 나가자고 어님의 팔을 당겼다.
어님은 책상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유선우를 따라 사무실을 나왔다.
“지금 그분이 이 주유소 총무야. 난처할 것 같아서 그냥 동생이라고 소개한 거니까 오해하지 마.”
유선우가 사무실 뒷쪽에 딸린 방으로 어님을 데리고 가면서 설명을 했다.
“오해 안 해요. 잘 됐어요. 이제부턴 말 낮추세요. 그래야 동생 행세를 하지요.”
“그래, 말 낮추자.”
유선우가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넓은 방이지만 세간이라곤 아무것도 없고 한쪽에 담요 두어 장만 깔려 있었다.
“숙직실이야. 낮에는 늘 비어 있고 밤에 직원들이 쓰지. 밖에 서있지 말고 들어와라.”
어님은 방으로 들어갔다.
“그럼 오빠도 이 방 같이 쓰셔요?”
“아니, 나 있는 곳은 주유소에서 한참 들어간 뒷동네야. 아까 교대한 사준일 아저씨도 그 동네 사셔.
앉아라. 나도 가끔 이 방에서 자는 일이 있지만 그건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뿐이야.”
“오빤 여기 일도 하세요?”
어님은 앉으면서 물었다.
“날마다 하는 건 아니고 가끔. 직원중에 야근할 수 없는 사람이 생기면 대신 하는 거야.”
“야근을요?”
“그래, 주유소는 문 닫는 일이 없으니까.”
“참 그렇겠네요.”
“그런데, 너 이름도 아직 말하지 않았어.”
“죄송해요. 어님이에요.”
“어님?”
“이름이 촌스럽죠? 전 제 이름이 싫어요.”
“어님이 어때서? 성은?”
“오가예요.”
“오어님, 오, 어, 님 … 참, 내 이름을 안 가르쳐 줬구나. 난 ….
“알아요. 유선우 오빠.”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았니?”
“아까 총무님이 얘기중에 말씀하셨잖아요.”
“그래? 넌 기억력도 좋다.”
유선우는 싱긋 웃었다.
“근데 오빤 몇 살이에요?”
“내년 돼야 투표권 생겨.”
“그럼 스물 못 된 거죠?”
“못 된 게 아니라 안 됐지.”
유선우는 벽 한가운데 걸려 있는 커다란 벽걸이 시계를 쳐다보았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유선우가 일어났다.
좀 난처한 표정이었다.
“강의 있다면서요?”
어님이 물었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니?”
“아까….”
“넌 한번 들으면 뭐든 아는구나. 실은 나 야간 다니 거든.”
“대학요?”
“응. 그러니 어쩜 좋냐. 너, 여기서 기다릴 수 있겠어?”
어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선우는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유선우가 강의가 있다고 나간 후 어님은 혼자 주유소 숙직실에 앉아 있었다.
사무실에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았으나 숙직실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우두커니 앉아 있자니까 긴장이 풀리면서 일시에 피로가 몰려 들었다.
게다가 점심을 못 먹은 터라 시장기도 들었다.
벽시계는 아직 6시를 가리키고 있으나 해가 길지 않은 때라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강의가 몇 시간 들었는지 모르나 유선우가 돌아오려면 앞으로도 몇 시간은 이 숙직실에 앉아 있어야 할 것이다. 답답했다.
등을 벽에 기대고 두 다리를 세워 무릎에 깎지를 끼었다.
눈을 감자 금방 밀물 처럼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어님은 그런 자세로 조을기 시작했다.
주유소로 들어오는 자동차의 소음이 이따금씩 해조음처럼 멀리 가까이 들리다가 멀어져 갔다.
그런 가운데 어님은 터미널을 빠져 나오다 만난 그 허풍도란 사내의 순박해 보이던 웃음을
잠깐 머리 속에 떠올렸고, 뒤를 쫓아오던 가무잡잡한 사내의 불거진 눈퉁이도 떠올리곤 했다.
두 얼굴이 파노라마처럼 자꾸 스쳐가면서 그래도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님은 유선우 같은 사람을 만난 것이 정말 행운이라는 생각을 하다가 깜박 잠이 들고 말았다.
그렇게 한 시간 쯤 지난 뒤 인기척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문밖에 사람이 와 있었다.
“잤니?”
총무라는 사람이 방안을 들여다 보며 물었다.
“그랬나 봐요. 죄송해요.”
“죄송할 일이 따로 있지. 거기서 조은 건 미안할 것 하나도 없다.건 그렇고,
우리 저녁 먹을 텐데 넌 뭘 시켜 주련?”
“예?”
어님은 무슨 말인지 얼른 알아 듣지 못해 다시 물었다.
“너 저녁 안 먹었지?”
“예.”
“뭘 먹고 싶으냐? 요 옆 식당에다 시킬 건데.”
“저어 …”
“백반 괜찮겠니?”
“예. 그렇지만 저까지.”
“선우 동생이 왔는데 저녁 한 끼 대접 못 하겠느냐.”
총무는 껄껄 웃고는,
“네 오빤 사람이 됐어. 요즘 젊은애들 치고 선우 같은 애는 만나기 어렵지. 그래 내가 좋아한다.”
“고맙습니다.”
어님이 할수 있는 말은 그것 뿐이었다.
총무가 돌아간 후 좀 있자니까 식당에서 큰 양푼에 백반 한 상을 이고 와 언님 앞에 내려놓고 갔다.
잔뜩 시장하던 끝이라 앞뒤 가리지 않고 밥그릇을 비웠다.
빈 그릇을 헌 신문지로 덮어 문밖에 내 놓고 나자 총무가 얼굴을 내밀고 물었다.
“그 집 반찬이 좀 짤 게다. 그렇지? 늘 말해도 솜씨가 그런 걸 어떻겠니.”
“잘 먹었습니다.”
“그래? 잘 먹었다니 됐고. 선우 올 때까지 기다리려면 좀 지루하겠구나.”
“괜찮습니다.”
“그 동안 이거나 봐라.”
총무가 만화책 몇 권을 줬다.
“여기 애들이 심심할 때 보지. 나도 가끔 뒤적거리지만.”
총무가 돌아가자 어님은 만화책을 펼쳤다.
여러 사람이 보던 건지 표지가 닳아서 떨어진 것도 있고
중간중간 낱장이 찢어진 것도 있었으나 시간을 보내는데는 괜찮았다.
만화책을 다 보고 나서 시계를 보니 열한 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꽤 늦게까지 강의를 하는 모양이다.
일어나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문이 열리면서 유선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래 기다렸지?”
반가웠다. 그런데, 어님은 그 반가움이 불안감으로 바뀌는 것을 알았다.
오늘 처음 만난 유선우다. 이 시각에 그를 따라서 어디로 간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