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오늘도 나는 주님을 나타내는 그릇으로 살아갑니다.”
-오늘의 말씀-
주님의 기쁨으로 고난을 극복하라
07/05금(金)살전 5:16-18/ 빌3:1 /빌 4:4-7 / 시 118:23-24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살전 5:18).
이 세상은 하나님이 다스리지만,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사단이 불법으로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둠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미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와 있지만,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already but not yet’ 우리에게 고난이 있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에게 은혜를 주셔서 고난을 기쁨으로 받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그리스도를 위한 특권, 즉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특권도 주셨습니다”(빌 1:29). 고난을 이길 때 영광의 가치가 있습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고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입니다”(롬 8:17).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합니다”(행 14:22).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우리는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험을 허락하시지만, 반드시 피할 길을 주십니다. 우리가 시험을 이기면 하나님 나라가 커지고 상급이 쌓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모두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딤후 3:12). 사단은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자를 핍박합니다. 사단은 죄악의 기쁨을 줍니다. 술, 쾌락은 죽이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님의 기쁨, 살리는 기쁨을 주십니다.
행위로 기쁨을 찾는 것은 성서적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고난을 이기는 기쁨은 주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주님 자신이 기쁨의 원천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기쁨입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이것이 가장 안전한 기쁨입니다. 기도할 때 기쁨이 옵니다. 세상의 기쁨은 ~을 행할 때 오는 기쁨으로 죄를 끌고 옵니다. “끝으로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주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내가 같은 말을 되풀이해서 쓰는 것이 나에게는 번거롭지도 않고, 여러분에게는 안전합니다”(빌 3: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주님께서 몸소 생명의 길을 나에게 보여 주시니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삶에 기쁨이 넘칩니다. 주님께서 내 오른쪽에 계시니 이 큰 즐거움이 영원토록 이어질 것입니다”(시 16:11). 주 앞에는 충만한 기쁨, 영원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고난을 피하지 말고 극복해야 합니다. 피하면 더 큰 고난이 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요 15:11). 극락의 기쁨이 최고의 기쁨이고 천국의 기쁨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할 때 완전한 기쁨을 누리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고난을 주신 것은 충만한 기쁨을 주기 위함입니다.
And...
앨프리드 월리스의 자연과학 수필 중에 나오는 고전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누에나방이 번데기에서 고치를 뚫고 나와 나비로 변하는 과정입니다. 고치에는 바늘구멍만큼의 틈이 나 있습니다. 그 틈으로 나방이 나오기 위해 꼬박 한나절을 애를 쓰고 그 힘든 과정을 치르고 나와 화려한 나비가 되어 날아갑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좁은 구멍을 통과한 나비는 영롱한 빛을 비추며 날아가는데, 구멍을 벗어난 나비는 날지 못하고 떨어져 죽게 됩니다. 그 이유를 알아보니 좁은 구멍을 통과하기 위해 발버둥과 몸부림을 치는 동안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즉 힘든 고난이 날개 근육을 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대만에는 10개의 소수 민족이 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세력이 약화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기 때문입니다. 학비 면제 등 여러 보조금이 있기에 그들은 약해지고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북미 인디언들도 같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충분히 자립할 수 있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그 사람을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하며 그들이 자립하기를 지켜보는 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아들이 외국에 나가면 당연히 망할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이 쥐엄 열매를 먹으며 얻어낼 수 있는 가치와 힘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지켜보며 기다린 것입니다. 그래서 탕자의 회복과 성장을 끌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도우려고 할 때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절제하며 지켜보는 사랑에는 깊은 기도의 사람이 됩니다. 기다림과 지켜봄이 성숙과 열매를 제공합니다.
어느 시골에 사는 자매가 몹시도 힘들게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믿음으로 이겨가고 있었지만,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주여, 너무도 힘듭니다! 주여 너무 힘듭니다!”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어느 날 꿈을 꾸는데 그녀가 커다란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주님 너무 힘듭니다. 주님은 목수이시지 않습니까? 이 십자가를 잘라주세요.” 이에 주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십자가를 잘라주셨습니다. 자매는 꿈속에서 세 번씩이나 자기의 십자가를 잘라 달라고 하였습니다. 한결 가볍고 편안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눈앞에 요단강이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뒤에 오던 다른 사람들은 커다란 십자가를 강에 턱 놓더니 그 십자가를 다리 삼아 하늘나라로 건너갔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의 십자가는 이미 손아래 들어올 정도로 너무 작았습니다. 자매는 너무 서러운 나머지 강가에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며 예수님을 찾았지만 이미 소용은 없었습니다. 그때 그 자매가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주님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쫓아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지니라” 그 자매는 이에 “아멘! 아멘!” 소리쳤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고난은 필수입니다. 예수님이 몸소 그것의 본을 세우셨습니다. 고난은 축복의 기회입니다. 고난이 힘들어 십자가를 잘라 달라고 한 자매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그러나 고난은 하나님이 내게 다가오시는 사랑의 방편입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손을 잡을 때 나비가 되어 훨훨 날게 됩니다.
때로는 화분을 어둠으로 덮어 둘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뿌리를 더 깊이 내리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은 우리가 더 성숙해지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서 고난을 기쁨으로 극복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혼자 걷지 않을 거예요
https://youtu.be/l39mrz4-WSg?si=l_jWf3Ye48DQ9kj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