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쌍마협 제 5 권 **
차 례 ....................................
작가 소개 [목차 1]
풍운의 낙양성 [목차 2]
어처구니없는 죽음 [목차 3]
본의 아닌 싸움 [목차 4]
초야의 묘지 [목차 5]
살인청부 [목차 6]
위장 [목차 7]
꿈에서 깨어나니 [목차 8]
천하 일색 때문에 [목차 9]
괴성의 주인공 [목차10]
녹의의 묘녀 [목차11]
공동묘지를 찾은 세 사람 [목차12]
강시괴인 [목차13]
인간 부호 [목차14]
위기즉면 [목차15]
공주에서 들려 온 소리 [목차16]
흑마왕의 정체 [목차17]
소녀 잔양신공 [목차18]
작가 소개
와룡생 (臥龍生)
그는 김용(金庸) 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무협소설의 대가로서 우리에게
는 아주 친숙한 이름이다.대표작으로는 무림성, 불야성, 금검지, 중원지,
무유지 등이 있다.
풍운의 낙양성
이때 묘녀는 돌연 백발노파의 품 속에 파고들었다.
"할머니, 독문단(毒蚊丹) 두 알만 주세요. 저는 그걸 이분들에게 주기로
약속했어요."
백발노파는 왼손으로 묘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상하게 말했다.
"수아야, 이분들은 누구냐? 무엇 때문에 독문단을 주겠다고 약속을 한 거
지?"
묘녀는 어리광을 부렸다.
"할머니, 이유는 묻지 마세요. 제가 이미 약속을 한 것이니 꼭 주어야 돼
요. 할머니 빨리 주세요, 네?"
백발노파는 묘녀를 애지중지하는지 그녀의 말에 연신 대답했다.
"그래, 그래라......암 주고 말고."
말을 하면서 백발노파는 품 속에서 흰 자기 병을 꺼내 빨간 단환 두 알을
쏟아 묘녀에게 주었다.
묘녀는 단환을 받자 곧 몽천악에게 내밀며 상냥하게 말했다.
"이 독문단을 잡수시고 곧 이곳을 떠나도록 하세요."
몽천악은 단환을 받자 사의를 표하려고 했다. 그러자 그 묘녀는 백발노파
의 손에 끌려 그 외눈박이 남녀와 함께 정원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몽천악은 가볍게 한숨을 내쉰 후 조전신과 각기 독문단 한 알씩을 삼켰
다. 독문단이 입 안에서 녹자 향긋한 냄새가 입 안에 퍼지면서 정신이 번
쩍 들고 가슴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때, 조전신은 몽천악의 손을 끌고 발길을 돌렸다.
몽천악이 물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바로 이 객잔의 방 하나를 빌리는 거네."
이렇게 하여 몽천악과 조전신 두 사람은 마침내 만흥객잔에서 묵게 되었
으며 그들이 묵는 방과 묘녀 등이 묵고 있는 곳과는 정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조그만 별채에는 동서 양쪽으로 방이 있었고 중간은 아담하고 조그만 객
청이 있었다.
이때, 조전신은 잠시 객잔을 떠났고 방안에는 몽천악 혼자 남아 있었다.
밤새껏 시달리고 나자 몽천악은 밀려오는 피로를 이기지 못해 막 잠자리
에 들어 눈을 붙이려고 했다.
돌연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더니 인영이 번쩍하며 어느 틈에 문 앞
에 백의의 서생 한 명이 서 있었다.
몽천악은 흠칫하며 고개를 들고 물었다.
"누구를 찾습니까?"
이 백의의 서생은 극히 영준했다. 칼날 같은 눈썹에 맑고 큰 두 눈, 오뚝
솟은 코와 윤곽이 뚜렷한 붉은 입술, 관옥 같은 얼굴, 정말 여인들의 마음
을 설레게 할 미남자였다.
그는 손에 부채를 들고 있었으며 등에는 장검 한 자루를 메고 있었다.
백의의 서생은 두 눈에서 번개같은 빛을 쏘아대며 몽천악을 훑어보고 입
가에 오만한 냉소를 흘리며 드높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귀하가 잔결서생이오?"
몽천악은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소이다. 무슨 일이 있으시오?"
"소생은 용오운이라 하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몽천악은 이 뜻밖의 불청객에게 의혹과 기이함과 놀라움이 있기는 했으나
짐짓 환영하는 소리로 말했다.
"아, 그렇습니까, 어서 들어오십시오."
백의의 서생 용오운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객청 한가운데 있는 있는 의
자에 가서 앉았다.
몽천악은 차를 권하면서 물었다.
"용형께서는 소생을 찾아 오셨소?"
백의의 서생 용오운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소생은 몽대협에게 몇 가지 드릴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찾
아왔습니다."
몽천악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인지 말씀해 보십시오."
"예, 처음 뵙는 몽대협에게 이런 말씀을 드려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몽천악은 가볍게 웃었다.
"천만의 말씀이오, 나는 천애를 이웃 같이 사해를 형제 같이 생각하고 있
는 사람입니다."
백의의 서생 용오운이 돌연 음성을 낮추었다.
"몽대협, 소생이 말씀 드리려는 것은 몽대협과 묘가수와의 관계에 대해서
입니다."
"그 묘녀 말입니까?"
용오운은 미소를 지었다.
"듣자하니 몽대협께서 그녀의 시위라고요?"
몽천악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물었다.
"용형은 왜 그런 것을 묻습니까?"
백의의 서생 용오운은 건성으로 웃었다.
"저는 몽대협이 그녀의 시위인가 아닌가를 알고 싶습니다."
몽천악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정녕 묘가수의 시위가 아니시라면 무엇하러 이곳에 남아 위험을 당하고
계십니까?"
몽천악은 얼굴에 미소를 떠올렸다.
"내가 이 객잔에 묵는 데 무슨 위험을 당한단 말입니까?"
용오운은 정색했다.
"많은 무림 고수들은 몽대협께서 이미 묘가수와 손을 잡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몽대협께서 이곳에 계시면 중인들의 과녁이 됩니
다."
몽천악이 돌연 물었다.
"귀하는 무형장 무성과 같은 사람이오?"
"그렇습니다. 무성영감은 소생 휘하의 일개 대장이오."
그 말에 몽천악은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무형장 무성이 이 사람의 수하라니? 그렇다면 이 용오운이란 자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
무형장 무성은 이미 사십여년 전에 무림에 그 명성을 떨친 대인물인데 아
직 나이 어린 용오운의 수하라니.......
이렇게 보면 백의의 서생 용오운의 내력은 대단한 것이 분명하리라.
몽천악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가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귀하는 묘가수에게 복수를 하시려는 겁니까?"
용오운은 가볍게 웃었다.
"그렇다고 볼 수도 있소."
"보아하니 묘가수는 만만한 존재가 아닌 것 같습니다. 더구나 그녀의 신
변은 기인 고수들이 옹호하고 있는 모양이니 꽤나 심기를 써야 될 것 같
습니다."
용오운은 건성으로 웃었다.
"바로 그런 점이 있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몽대협을 찾아와 우리의 시비
에 말려들지 마십사고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몽천악은 미소를 지었다.
"좋습니다, 이 몽천악은 은원이 분명한 사람입니다. 나는 은혜가 있는 분
에게는 은혜를 갚을 줄 알고 원한이 있는 자에게는 역시 그 원한을 갚아
야 직성이 풀리지요. 저와 아무 구원이 없는 일엔 절대 간섭을 하지 않겠
습니다."
"하하하, 몽대협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럼 소생 안심하고 물러가겠습
니다."
그는 말을 마치자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일어나 포권의 예를 취하고 몸을
돌려 떠나갔다.
몽천악은 백의의 서생이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저 용오운이란 자는 도대체 어떤 인물일까...... 첫인상은 별로 탐탁치
않은 인물 같은데 그가 정녕 무서운 대인물이란 말인가.....?"
그때 마검신군 조전신이 밖에서 들어왔다.
조전신은 객청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물었다.
"몽노제, 누가 왔었는가?"
"의혹과 신비에 싸인 불청객 한 분이 다녀갔습니다."
"어떤 사람인데?"
"대개 스물여덟 정도 되어 보이는 백의의 서생인데 자칭 용오운이라고 하
더군요."
순간 조전신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용오운? 서역에 이름을 떨친 옥안서생(玉顔書生) 용오운이란 말인가?"
몽천악은 옥안서생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물었다.
"조방주, 그는 가공할 만한 인물인가요?"
조전신은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몽노제는 그 옥안서생 용오운에 대해 잘 모르겠지만, 그는 이미 심팔년
전 옥안서생이란 이름으로 서역을 진동시킨 일이 있던 사람일세......"
몽천악은 깜짝 놀랐다.
"십팔년 전이오? 그는 이제 겨우 스물여덟쯤 되었겠는데, 그럼 그가 열
살 때 무림을 진동시켰단 말입니까?"
조전신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네, 비록 나이는 젊게 보이나 그는 이미 마흔이 넘었을 것이네. 그
러나 그는 진기한 영약인 천년 묵은 하수오를 복용하였기 때문에 젊음을
유지할 수 있어 이십대의 젊은이로 보이는 것이네. 더구나 그는 용모가
워낙 준수하여 옥안서생이란 별호를 얻게 된 것이네."
몽천악은 그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천하에 그런 불로 장생 할 영약이 있단 말입니까?"
"조금 전 나는 폐방의 낙양 분타에 다녀왔는데 거기서 나는 이 낙양성에
천하 각지의 고수들이 운집하여 곧 경천동지할 큰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미를 느꼈네."
몽천악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 용오운이 하던 말을 생각해보니 무림의 고수들이 낙양성에 운
집한 것은 그 묘가수 때문일 가능성이 짙군요."
몽천악은 조금 전, 옥안서생 용오운이 한 말을 그대로 얘기했다.
조전신은 조용히 듣고 나서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몽노제, 우리는 지금 흑마왕 하나도 힘에 겨운 판이니 구태여 옥안서생
의 원수까지 될 필요가 어디 있겠나?"
"묘가수는 우리를 구해준 생명의 은인인데 그녀가 당하는 걸 어찌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조전신은 침중하게 말했다.
"몽노제, 우리가 누구의 암산으로 폐혈문에 물렸는지 물렸는지를 생각해
보았나?"
"흑마왕이 아닙니까?"
조전신은 고개를 저었다.
"흑마왕이 아니고 묘가수일 것이네."
"묘가수는 우리와 아무 원한도 없는데 어디에 근거를 두시고 하시는 말씀
이십니까?"
"만약에 흑마왕이 우리를 암산했다면 고작 폐혈문 몇 마리로 끝나지 않았
을 뿐만 아니라 또한 묘가수가 우리를 구해주도록 그냥 두지도 않았을 것
이네. 지금 낙양에는 수많은 무림 고수들이 묘가수를 목표로 삼고 운집해
있으므로 묘가수등은 이미 사면초가에 처해 있네.
비록 그녀에게 백발노
파와 두 애꾸 남녀 고수가 있다고는 해도 옥안서생 용오운 등의 고수들을
당해 내기는 힘든 노릇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그 교활한 묘가수는 우리
두 사람의 뒤를 밟아 폐혈문을 방출하여 암산을 한 뒤 우리에게 그녀의
시위가 되라고 협박을 하게 된 것이네, 어떤가? 내 말이 틀렸다고 보나?"
몽천악은 한숨을 내쉬었다.
"만일 조방주께서 흑마왕이 우리를 암산한 것이란 말씀을 안했다면 저도
그렇게 추측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릅니다. 묘가수가 정
말 폐혈문을 방출하여 우리를 해치려 했건 안했건 그런 것은 조금도 마음
에 두고 있지 않습니다."
조전신은 침중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가 오늘 이곳 낙양성에 머무는 목적은 팔검비상 진삼청의 소식을 알
기 위해서이네. 그런데 묘하게 묘가수와 옥안서생 용오운 두 파의 싸움을
보게 되었군. 그러나 몽노제가 용오운에게 은원이 없는 일엔 개입하지 않
겠다고 했다니 우리는 그저 옆에서 구경이나 하세."
몽천악이 돌연 물었다.
"조방주, 저는 지금 극히 의혹을 느끼고 있습니다. 무림도상에 정말 흑마
왕이란 인물이 존재하고 있습니까?"
"몽노제가 그 일에 대해 의혹을 품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현 무림도상에
서 흑마왕이란 이름 석 자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네.
무아진교 사람들이 무림을 휩쓸고 있으나 그들 하나 하나가 도저히 추측
할 수 없는 신비한 인물들이기 때문일세."
몽천악이 물었다.
"조방주께서는 그 흑마왕에 대해 네 명의 가상(假想) 인물을 꼽으셨는데
그 네 명이 누구입니까?"
조전신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 네 명의 의심이 가는 자는 팔검비상 진삼청, 절진신의 윤천초, 옥안
서생 용오운 그리고 독비절도 유기 등일세. 왜냐하면 그들의 무공실력으
로 볼 때 능히 흑마왕의 이름을 감당할 만하기 때문이지."
몽천악은 그 말을 듣자 가볍게 놀라며 물었다.
"조방주께선 귀방의 부방주인 독비절도 유기까지 용의자로 보십니까?"
조전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네, 나에게는 충분한 근거가 있기 때문일세. 유기는 비록 폐방의 부
방주로 있기는 하지만, 그의 행동이라든가 무공, 기지 등등 충분히 흑마
왕이 되고도 남을 조건을 갖추고 있네."
몽천악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조방주께서 지목하신 네 분에 대해 저는 잘 알지 못해 의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윤천초란 사람도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했으므로 그 생
김새도 모르는데 제가 어떻게 의심하겠습니까?"
"흑마왕의 정체가 드러날 시각도 이제 멀지 않았네. 왜냐하면 그가 두려
워하고 염려하던 자들이 차례로 거의 다 제거되었기 때문에 그가 정체를
드러낼 날도 멀지 않은 거라네."
"조방주, 저는 지금까지 무아진교 제일총교주의 신세 내력을 모르고 있습
니다. 그러니 좀 자세히 말씀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조전신은 그 말을 듣자 가볍게 안색이 변하더니 의혹에 찬 눈초리를 굴리
며 한숨을 내쉬었다.
"몽노제, 나는 이미 그녀의 신세 내력을 영원히 밝히지 않기로 굳게 맹세
를 했네. 강호무림에서는 장부의 일언을 중천금으로 삼고 있네. 내 비록
그녀와 원수지간이라고 할지라도 일단 한 번 약속한 것은 어길 수가 없
네."
몽천악은 그 말에 어리둥절했다.
"조방주께선 정녕 그 맹세를 지키시려는 겁니까?"
"몽노제, 이 늙은이가 입을 열 수 없는 난처한 입장을 이해해 주게."
"후배는 조방주께서 말씀을 해 주지 않는다고 해서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일총교주의 면목만은 잘 알고 있습니다."
조방주는 깊은 한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제일총교주의 존재는 그 흑마왕이란 자와는 다소 견제력을 가지고 있네.
그래서 내가 지금까지 그녀와 정면 충돌을 피해 온 것도 바로 그런 미묘
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네."
몽천악은 그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흑마왕은 무아진교의 막후 수뇌로서 그는 제일총교주를 지휘할 수 있는
데 어떻게 되어 제일총교주가 흑마왕을 견제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건 바로 내가 독비절도 유기를 의심하고 있는 점과 비슷하지. 제일총
교주가 비록 흑마왕의 수하이기는 하지만 제일총교주는 우두머리 자리를
빼앗을 가능성도 있네."
몽천악은 그의 말을 알 듯 모를 듯 아리송하여 탄식을 발했다.
"자고로 얼마나 많은 신하들이 왕후 장상들을 몰아내고 군왕의 자리를 빼
앗았습니까? 그런데 무림의 효웅들이 어찌 그런 짓을 안하겠습니까? 아!
인간의 욕망이란 끝이 없는 법, 천하의 그 많은 비극과 애상이 다 그런
인간들의 졸연한 근성의 소산물이 아니겠습니까?"
조전신은 몽천악의 말에 크게 감탄했다.
"흑마왕만 제거한다면, 나는 무림에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을 만천하에
선서할 것이며 영원히 인간 세상사에 간여하지 않겠네."
몽천악은 가볍게 탄식했다.
"후배 역시 강호무림을 제패해 보겠다는 욕심을 품어 보지 않았습니다.
오직 스승의 원수를 갚는 날이면 저도 깊은 산속에 은거하여 속세와 인연
을 끊을 생각입니다."
"몽노제, 우리 이제 그만 방에 들어가 쉬세. 오늘 밤 아주 멋있는 구경거
리가 생길지도 모르니 쉬었다가 구경을 가야지."
몽천악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호무림은 대낮이 휴식을 하는 시각이니 우리는 들어가 쉬는 게 좋겠군
요."
마침내 두 사람 각자 자기 방으로 들어가 쉬었다.
조전신과 몽천악 같은 절고한 무림의 고수들을 좌선만으로도 수면을 대신
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조전신은 그 기초가 심후한지라 매일 네 시간의 좌선만으로 하룻밤
의 수면을 대신했던 것이다.
좌선에 들어가자 네 시간은 바람처럼 지나갔다.
몽천악은 무아지경에 돌입하여 전신의 혈액이 순조롭게 순환하고 있었다.
이때였다. 창밖에서 인영이 번뜩이더니 녹의의 소녀 한 명이 창문을 통해
제비처럼 날아들었다.
몽천악은 달마강기신공을 완전히 터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무아지
경에 돌입해 있었으나 삼각(三覺)은 극히 예민하여 녹의의 소녀가 창밖에
서 어른거릴 때 이미 알아차리고 있었다. 몽천악은 눈을 번쩍 떴다.
녹의의 소녀는 가볍게 기침을 하더니 쪽지 하나를 던져주고 교구를 날려
다시 창문으로 빠져나가 급히 사라져 버렸다.
몽천악은 잠시 멍청한 표정으로 침상 위에 떨어져 있는 쪽지를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여자는 누굴까...... 무엇 때문에 쪽지를 나에게 주었을까?'
그는 손을 뻗쳐 쪽지를 집어 조심스럽게 펼쳤다.
파란 종이 위에 세 줄의 검은 글씨가 수려하게 씌어 있는 것이 첫눈에 여
자의 필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잔결서생 몽천악께 드립니다.
저의 시녀에게 편지를 보내오니, 상공께서 받아보시는 대로 곧 성 서쪽
삼 리쯤 되는 곳에 있는 신묘(神廟)에 가셔서 녹의의 부인을 만나주시기
바랍니다.
묘가수 올림 '
몽천악은 잠시 생각하다가 편지를 찢어 버리고 속으로 탄식을 하며 중얼
거렸다.
"내 이미 그녀에게 생명의 구원을 입었으니 그 정도의 부탁은 받아들여야
지."
그는 천천히 침상에서 내려왔다.
어처구니 없는 죽음
이때였다.
돌연 객청에서 조전신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몽노제, 일어났나?"
"예."
몽천악은 대답을 하고 객청으로 나왔다.
조전신은 이미 객청에 나와 앉아서 몽천악을 쳐다보며 물었다.
"몽노제, 누가 우리 별채에 들어오는 것 같던데 보았나?"
몽천악은 가슴이 섬뜩하여 급히 대답했다.
"예, 녹의의 소녀가 왔었는데 즉시 떠나갔습니다."
그때 조전신은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 천천히 품속에서 흰 편지 봉투를
꺼내 몽천악에게 건네주며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흑마왕이 우리에게 고루장을 보내왔네."
몽천악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고루장이라니요?"
"그 봉투 안에 들어 있으니 꺼내 보게."
몽천악은 봉투를 뜯었다. 안에는 흰 종이 두 장이 들어 있었고 그 앞면에
'잔결서생 몽천악 앞, 마검신군 조전신 앞' 이란 커다란 글씨가 씌어 있어
서 눈에 확 띄었다.
몽천악은 자기 앞으로 보내 온 편지를 뜯었다. 그 안에는 다시 붉은 글씨
한 줄이 씌어 있었다.
'잔결서생 몽천악은 신축년 팔월 팔일 자정에 죽으리라.'
그 밑에는 검은 해골이 그려져 있었다.
몽천악은 그것을 보자 가볍게 웃었다.
"조방주의 고루장에는 뭐라고 씌어 있습니까?"
"역시 같은 글이네만 꼭 하루 차이가 나는 팔월 구일 자정이네."
몽천악은 웃었다.
"하하하, 오늘이 팔월 초닷새 오정이니 우리의 생명은 앞으로 사흘 열두
시간밖에 남지 않았군요."
조전신은 매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몽노제, 흑마왕의 고루장을 우습게 볼 게 아니네. 지난 수십 년 동안 흑
마왕에게 고루장을 받은 사람은 그 약속시간을 넘기지 못하고 모두 죽어
갔네."
몽천악은 껄껄 웃었다.
"하하하, 조방주께선 언제 이 고루장을 받으셨습니까?"
"이 객청에 나왔다가 탁자 위에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네."
몽천악이 물었다.
"그럼 우리는 날짜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군요?"
조전신은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몽노제는 이 고루장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모양이군."
"흑마왕의 이 고루장을 받기를 저는 학수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 흑마왕이 도대체 어떻게 생긴 괴물인지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전신은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흑마왕은 자기의 정체를 드러내고 사람을 죽이는 법이 없네. 노제가 만
일 그를 보았을 때는 생명이 끊어지고 있는 찰나일거네, 그러므로 현 무
림에서 흑마왕에 진면목을 본 사람은 하나도 없네."
몽천악은 미소를 지었다.
"후배는 지금 잠깐 나갔다 와야겠습니다. 그 동안 조방주께서는 그 대책
을 좀 생각해 보십시오."
"어디 가려나?"
"예, 잠깐 성안을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조전신은 침중하게 말했다.
"흑마왕은 고루장을 내림과 동시에 우리 뒤를 감시하며 호시탐탐 손 쓸
기회를 노리는 것이네. 그러니 별로 중대한 일이 아니면 문 밖 출입을 삼
가는 것이 현명하네."
"그렇다면 우리는 그 기간 동안 한발작도 밖에 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
까?"
"우리가 이 고루장의 경고를 무사히 넘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지금부터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먹지도 마시지도 말고 또한 휴식도 잠
도 자지 말고 고루장에 기재된 날짜를 넘기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네."
몽천악은 고개를 저었다.
"후배는 결코 사도(邪道)를 믿지 않습니다."
"흑마왕의 살인 수법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독물을 사용하는 것이네. 나
는 십여년 간을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흑마왕을 상대해 낼 수 있는 방법
을 연구해 왔으나, 아직 뾰족한 수를 생각하지 못했네."
몽천악은 조전신의 이러한 심중과 근심하는 빛을 보자,
'흑마왕이 정녕 그토록 무서운 존재란 말인가.....?' 하고 생각했다.
이때, 조전신이 처량하게 탄식하며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팔검비상 진삼청이 그 흑마왕만 아니라면, 나가 이 문을 잠그고 기다리
는 방법은 흑마왕을 나타나게도 할 수 있지."
"후배는 조방주보다 하루가 빠르니 제가 정말 생명을 잃는다면 조방주는
그래도 하루 간의 여유가 있으니 그때까지 충분히 그 대책을 강구할 수
있을 텐데, 왜 벌써부터 서두르십니까?"
조전신은 한숨을 내쉬었다.
"몽노제가 내 말을 믿지 않다가는 흑마왕에게 당할 염려가 있네."
"후배 조방주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그러나 문을 걸어 잠그고 죽음을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고 혹시 팔월 팔일 자정 전에 제가 흑마왕을 처치
할는지도 모르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말을 마치자 몽천악은 만흥객잔을 떠나 성 서쪽을 향해 질주해 갔다.
만흥객잔을 떠날 때 감각이 예민한 몽천악은 미행하는 자가 있음을 발견
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고 곧장 성 서쪽을 향해 내달았다.
잠시 후 그는 이미 서쪽 성문에 다다랐다.
몽천악은 성물을 나와 성벽을 따라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아니나 다
를까, 십여 장 뒤에서 미행하는 그림자가 따르고 있었다.
그는 내심 냉소를 날리고 달리는 속도에 가속하여 삼 장 밖의 성벽 모퉁
이로 바람처럼 돌아갔다. 이어 그는 다시 성벽 안으로 몸을 날려 왔던 길
로 되돌아가 다시 성 밖으로 몸을 날렸다.
몽천악은 마치 천신(天神)과 같이 한 치의 차이도 없이 미행자 앞에 날아
내렸다 .
이 미행자는 숨막힐 듯한 긴장으로 미행을 하고 있다가 예상치 못했던 그
림자가 돌연 앞을 가로막자 기절초풍할 듯 놀라 "아이쿠!" 하는 소리를
내며 뒤로 한걸음 물러나 만면에 경악의 빛을 띠고 몽천악을 바라보았다.
몽천악은 재빨리 상대방을 훑어보았다. 머리나 얼굴 생김새가 영락없는
원숭이 상이었으며 비쩍 마른 중년의 인으로 병기라고는 아무것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귀하가 만흥객잔에서부터 나를 미행하고 있다는 것을 난 이미 알고 있었
소. 당신은 도대체 누구의 명을 받고 내 뒤를 밟고 있소?"
이렇게 말을 하는 몽천악은 속으로,
'이런 자는 시정의 불량배에 지나지 않으니 구태여 손을 써서 제압할 필
요는 없다.' 하고 생각했다.
원숭이 상의 중년의 인은 작은 눈을 부라리며 묘하게 물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몽천악은 코웃음을 쳤다.
"왜 나를 미행하느냐고 물었소."
원숭이 상의 중년의 인은 헤헤거리고 웃었다.
"헤헤헤...... 무슨 말씀을, 이 탄탄 대로에 사람이 걷는 게 잘못이라도
된단 말입니까?"
몽천악은 그 말에 어리둥절해졌다.
'말솜씨 한 번 대단한 놈이구나!'
이렇게 생각한 몽천악은 냉소를 날렸다.
"그렇군요, 그럼 가 보시오."
그 말에 원숭이 상의 중년의 인은 대머리가 훌렁 벗어진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북쪽을 향해 갔다.
몽천악은 그 자리에 서 있다가 그가 삼사십 장 밖 꺾어진 길을 돌아가는
것을 보고서야 급히 경공을 전재하여 교외로 질주해 갔다.
몽천악은 자기가 절고한 경공을 발휘하면 그 원숭이 같은 중년의 인이 다
시는 뒤따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몽천악은 그 원숭이 같은 중년의 인이 강호에서
이름이 쟁쟁한 천리후 주총(千里帿 朱聰)이라는 것을 알 리가 없었다.
몽천악은 질주에 질주를 거듭하여 한 시간 후에는 이미 삼리를 달렸다.
단풍나무 숲 속에 자그만 사당 한 채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사당은 난석사이에 우뚝 세워져 있었고 땅 위에는 단풍낙엽과 잡초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이 사당은 오래 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몽천악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당 정원에 이르렀다.
전당(殿堂)은 거미줄 투성이고 먼지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안은 텅 비어
있고 어느 곳에서고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묘가수가 설마 장난이야 치지 않았겠지...... 아마 상대방이 아직 당도
하지 않은 모양이구나......'
몽천악이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돌연 숲 속에서 낙엽을 밟고
가볍게 걷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몽천악은 재빨리 소리나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풍만한 자태에 요염하게 생긴 녹의의 부인이 사뿐사뿐 몽천악이 있는 곳
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몽천악이 낭랑한 음성으로 자기를 소개했다.
"소생 몽천악, 묘가수의 명으로 이곳에 녹의의 부인을 뵈러 왔는데 귀하
는......"
녹의부인은 몽천악의 말이 끝나기 전에 아름다운 음성으로 말을 가로챘
다.
"당신은 어째서 이렇게 늦게 왔나요? 혹시 도중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
나요?""내 개인적인 일이 좀 있어서 약간 지체했으니, 부인께서 양해해
주시오."
녹의의 부인은 돌연 손을 품속에 넣더니 녹색 헝겊으로 싼 한축의 물건을
꺼냈다.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책과도 같고 그림축과도 같았다.
녹의의 부인은 심중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걸 아가씨에게 전해 주세요. 절대 잃어버려선 안돼요."
몽천악은 그 물건을 받아 한 번 살펴보고 물었다.
"이것은 혹시 책이 아니오?"
녹의의 부인은 몽천악을 한 번 쳐다보더니 무겁게 말했다.
"어서 품속에 간직하세요. 아가씨 이외의 어떠한 사람에게도 이 물건을
보여서는 안돼요."
몽천악은 낭랑하게 말했다.
"안심하시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묘가수에게 전해 주겠소."
말을 하면서 그는 즉시 그 책을 품속에 간직했다.
녹의의 부인은 사방을 둘러보더니 음성을 낮추었다.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 있을수록 위험이 늘어나니 어서 떠나세요."
"부인께선 달리 전할 말씀은 없습니까?"
"없어요."
"그럼, 소생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다음에 다시 뵐 기회가 있겠지요."
몽천악은 외팔로 포권의 뜻을 표하고 즉시 떠나갔다.
몽천악은 되돌아가며 가만히 생각했다.
'이것은 아마 귀중한 기서(奇書)일 것이다...... 그런데 묘가수는 왜 자
기가 직접 가지러 나오지 않았을까? 또 녹의의 부인은 자기가 친히 갖다
주지 않았을까......?'
몽천악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묘가수가 왜 신비스럽게 자기로 하여금
책을 받아오게 했는지 도대체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누구에게 부탁을 받은 이상 그 일을 충실히 이행해 주는 게
도리인 것이다.
몽천악은 이 책을 묘가수에게 안전하게 넘겨주기로 작정했다.
갑자기 몽천악은 걸음을 멈추었다.
다름이 아니라 앞쪽 길 위에 비쩍 마르고 원숭이 상을 한 회의의 중년인
이 극히 득의한 웃음을 만면에 띠고 서 있는 것이었다.
몽천악은 그 사람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아차! 내가 저 자를 잘못 봤구나. 저 사람의 무공이 비상하구나......'
번개같이 생각을 굴리며 몽천악은 냉랭히 말했다.
"당신을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소."
"흐흐흐......"
그 원숭이 상의 중년의 인은 징그러울 정도로 소름이 끼치는 웃음을 날
리고 업을 열었다.
"땅덩어리가 둥글다 보니 다시 만나게 됐소."
몽천악은 다시 냉소를 흘렸다.
"아까는 정말 내가 사람을 잘못 봤소만, 귀하는 뉘시오?"
원숭이 상의 회의의 인은 건성으로 웃었다.
"천리후 주총이라 하오."
"어?"
몽천악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과연 놀라운 인물이셨군!"
"흐흐흐......"
천리후 주총은 데설궂게 웃었다.
"나는 할 말은 세상이 두 쪽이 나도 하는 사람이지 우물쭈물 하는 성미가
아니오. 귀하가 방금 녹의의 부인에게 받은 물건을 이리 내놓으시오."
몽천악은 내심 놀랐다.
'그는 모든 것을 다 보았구나, 그걸 왜 내가 몰랐을까?'
이렇게 생각한 몽천악은 가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군요."
천리후 주총은 안색을 굳혔다.
"귀하는 이 일에 하등의 상관도 없는 사람인데 왜 이 소용돌이에 뛰어 들
려는 거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더욱 납득이 안 가는군요."
천리후 주총은 음산하게 웃었다.
"방금 저쪽 단풍나무 숲에서 녹의의 부인에게 받은 책만 내놓는다면 모든
것을 불문에 붙이겠소."
몽천악은 모든 상황을 상대방이 보았다는 것을 알자 즉시 냉소를 쳤다.
"당신은 안력이 대단하군요, 그러나 그 책은 몸에 있는 물건이오. 당신이
정녕 그것을 원한다면 마음대로 가져가 보시오."
이때야 몽천악은 녹의의 부인이 당부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는 절대 이 사람을 그대로 보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만일에 상대방이 힘으로 뺏으러 든다면 당장 쳐죽여 버리리라고 작정했
다.
천리후 주총은 작은 눈동자를 교활하게 굴렸다.
"귀하는 그 물건에 대해 알고 있소?"
몽천악은 담담히 대꾸했다.
"모르오. 그러나 알고 싶지도 않소. 다만, 부탁 받은 대로 전해줄 뿐이오."
"묘가수에게 넘겨주겠다는 거요?"
"물론이오."
천리후 주총은 껄껄 웃었다.
"핫하하...... 귀하는 그 책을 내놓기 전에는 낙양성안에 단 한발자국도
들여놓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있소?"
"글쎄올시다. 그거야 가봐야 알겠지요."
말을 마치자 몽천악은 앞으로 걸어 나갔다.
"잠깐!"
돌연 주총은 벼락같이 소리치며 번개 같이 몸을 날려 몽천악의 앞 약 세
걸음쯤 되는 곳에 막아섰다.
몽천악은 냉랭히 웃었다.
"청천 백일하에 귀하는 강탈이라도 하겠다는 거요?"
천리후 주총은 음산하게 웃었다.
"살인, 방화, 강탈은 강호상에 흔한 일이오. 내 한가지 미리 알려두겠는
데 지금 낙양성 삼 리 사방에 무림 고수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있으니
당신이 요행히 여기서 내 손을 벗어난다고 해도 얼마 못 가 다른 고수에
게 걸리고 말 거요."
몽천악은 이마를 찌푸렸다.
"당신이 신호를 보내기라도 했단 말이오?"
천리후 주총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소, 단풍나무 숲에서 이미 전서구로 소식을 띄웠소."
몽천악은 입가에 냉소를 흘렸다.
"난 본래 당신을 해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는데 일이 이쯤 되었으니 할 수
없게 됐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몽천악의 외팔은 상대방의 목덜미를 향해 전공 석
화처럼 쳐나갔다.
해일과 같은 장풍이 휘몰아치자 천리후 주총의 조그만 체구는 허공에 떠
올라 마치 실이 끊어진 연처럼 곤두박질을 하며 날아가 아무렇지도 않게
삼 장 밖에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그의 신색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
몽천악은 일 장이 실패하자 차갑게 웃었다.
"귀하의 경공은 과연 소문 대로군. 나의 일 장을 피해내다니."
주총은 낄낄 괴소를 터뜨렸다.
"히히히...... 귀하의 웅휘한 장력은 과연 무성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소.
그러나 나를 죽이기엔 좀 힘들 거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는 쏜살 같이 몽천악을 향해 덮쳐갔다.
몽천악은 이 한차례의 동작으로 상대방의 절고한 무공을 환히 알았으므로
날카로운 수단을 쓰지 않고는 상대방을 제압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몽천악은 상대방이 비호처럼 덮쳐 오는 기세를 보고도 피하려고 하지 않
았다. 상대방의 쌍장이 가슴에 석 자 정도에 이르렀을 때 천하독보인 발
검쾌참지술을 전개했다.
벽혈검은 전공 석화와 같이 검집에서 벗어났다.
검광이 지나간 곳에서 처절한 비명이 공중에 울려 퍼졌다.
천리후 주총의 작은 몽둥이가 허공에서 떨어져 내려 새빨간 선혈을 사방
에 뿌리고 꿈쩍을 하지 않았다.
현 무림에서 가장 검을 빨리 뽑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
아마 몽천악의 일검을 당해 낼 자는 없을 것이다.
몽천악은 검을 뽑아 천리후 주총을 가볍게 처단한 후 몸을 돌렸다.
바로 이 순간 몽천악의 시야에 기백이 당당하고 풍류의 멋이 흐르는 백의
의 서생이 삼 장 밖에 서 있는 것이 들어왔다.
본의 아닌 싸움
백의의 서생은 서릿발 같은 눈초리로 선혈을 뿌리고 죽어간 시체를 한참
동안 주시하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무림에서 경공이 가장 뛰어나기로 이름난 천리후가 잔결서생의 검을
피하지 못하다니 정말 놀랍고 놀랄 일이군!"
몽천악은 백의의 서생을 보는 순간 안색이 변했다.
백의의 서생은 중얼거린 후 돌연 포권을 하며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몽대협, 다시 만났습니다. 몽대협의 장쾌한 검술에 정말 탄복했소."
몽천악은 가볍게 웃음을 머금었다.
"용선생, 빨리도 오셨습니다."
백의의 서생은 가벼운 목소리로 하하 웃었다.
"몽대협, 솔직히 말하겠소. 나는 주총의 전서구로 서식을 받고 달려왔소."
몽천악은 짐짓 놀라는 척하며 말했다.
"아! 천리후와 용선생께서 같은 문파의 사람이라는 것을 미처 몰랐습니
다."
옥면서생 용오운은 안색을 굳히고 담담히 말했다.
"천리후 주총은 내 휘하의 한 대장이오. 정말 저렇게 죽기에는 너무나 아
까운 사람이오."
"용선생께서는 지금 복수를 하시러 왔습니까?"
옥면서생 용오운은 가볍게 미소를 머금었다.
"이번에 몽대협이 이 용모를 어떻게 하려는지 두고 봐야겠소."
"그게 무슨 말씀이오?"
"천리후 주총의 죽음은 밀종문의 귀곡록(鬼谷錄)이라는 기서(奇書)때문이
오. 만약 몽대협께서 그 귀곡록을 내놓으신다면 천리후는 죽었지만 한은
없을 것이오."
몽천악은 놀라 물었다.
"묘가수는 밀종문의 문하입니까?"
"나 역시 밀종문의 문하요, 묘가수는 이 용모의 사매라고도 할 수 있소."
몽천악은 그제야 그들의 문파 내력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
은 왜 동문끼리 싸우지 않으면 안되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용선생은 묘가수와 동문이시니 이 귀곡록이 그녀에게 가나 용선생에게
가나 똑같은 게 아니겠습니까?"
"나는 이미 우리의 내력을 설명해 드렸고 나와 묘가수와의 다툼은 오직
우리 밀종문의 사사(私事)이니 나는 외부 사람인 몽대협께선 이 소용돌이
속에 뛰어들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데요?"
"그야 물론, 당신들 문중의 사적인 일을 외인들이 뭐라고 간섭할 권리가
없겠지요, 또한 저는 그 일에 간섭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몽대협께서는 속히 명철한 결정을 지으십시오."
"용선생께선 소생의 난처한 입장을 십분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저는
절대 이 귀곡록을 내드릴 수가 없습니다."
옥면서생 용오운의 안색이 확 변하더니 금방 평정을 되찾아 온화한 표정
을 지었다.
"몽대협께선 그 귀곡록이 어떠한 책이라는 것을 모르시겠지요?"
"그렇습니다. 저는 그 내용을 추호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만일 몽대협이 그 책이 어떠한 책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나에게 돌려
줘야 옳을 것이오."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돌연 옥면서생 용오운이 처량하게 탄식을 했다.
"만일 몽대협이 그 귀곡록을 묘가수에게 전해 주게 된다면 우리 말종문의
무수한 사람들이 참변을 당하게 됩니다."
몽천악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건 본문의 비밀이라 외인에게는 밝힐 수가 없소."
이때, 몽천악의 마음속에서 일말의 의혹이 일기 시작했다.
만일 용오운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귀곡록을 그에게 내주어야 당연한 일
이다. 그러나......
옥면서생 용오운은 몽천악의 마음을 훤히 알고 있기라도 한듯 한숨을 내
쉬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몽대협께서 그 귀곡록을 나에게 넘겨준다 해도 몽대협께는 별로 손실이
없을 것이오. 그러나 그것을 무형 중에 몽대협은 우리 밀종문의 수많은
제자들의 생명을 구하게 되는 것이니 그 공덕(功德)은 한량없을 것이며
밀종문의 제자들은 그 은혜를 영원히 잊지 않고 기릴 것입니다."
소근거리듯 하는 말에 무한한 유혹의 힘이 들어 있었다.
몽천악은 외팔을 들어 천천히 품속에 간직해 둔 귀곡록을 꺼내려고 했다.
바로 이때였다.
"상공은 남의 부탁을 충실히 지키시는 분인데 어찌 경솔하게 본서(本書)
를 남에게 내주려고 하는 거지요?"
돌연 비단 폭을 찢는 듯한 여인의 앙칼진 음성이 귓전을 때렸다.
몽천악은 고개를 돌렸다.
바로 그 아름다운 녹의의 부인이 급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한 줄기 향긋한 향내음이 코 끝을 스치는가 했더니 어느새 몽천악 곁에
이르러 있었다.
옥면서생 용오운은 그 녹의의 부인을 보는 순간 분노를 느끼는 이상야릇
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에 그녀만 나타나지 않았다면 몽천악이 귀곡록을 내놓았을 것이 아닌
가.
용오운은 서릿발 같은 눈초리로 녹의의 부인을 쏘아보며 코방귀를 뀌고
차갑게 말했다.
"녹의의 단주, 당신은 나에게 반기를 들 작정이오?"
"제가 어찌 용총호법에게 반기를 들겠어요."
용오운은 차갑게 웃었다.
"지난 십여년 간 나는 백방으로 녹의의 단주를 찾았는데 당신이 낙양에
있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소."
"용총호법께서는 그 귀곡록 때문에 저를 찾았겠지요?"
몽천악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쌍방은 동문인으로서 아주 가까운 사이
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몽천악은 그들 밀종문이 무엇 때문에 싸우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자기
자신이 괜한 소용돌이 속에 말려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용오운은 차갑게 웃었다.
"녹의의 단주께선 나에게 귀곡록을 내놓기 싫어서 십여년 동안 나를 피해
왔지만, 오늘은 정녕코 당신 손으로 친히 그 귀곡록을 나에게 돌려주도록
해야겠소."
"호호호...... 총 호법께선 이미 한 발 늦었어요. 귀곡록은 지금 나에게
없으니까요."
"나는 녹의의 단주에게 그 책을 몽대협께서 다시 돌려 받도록 명하오."
"호호호...... 귀곡문주가 다시 살아나기 전에는 나에게 명령 할 사람은
없다고 알고 있어요."
용오운은 가볍게 웃음을 머금었다.
"당신은 내가 명령을 할 수 없다고 믿소?"
말을 마치자 그는 품속에서 백옥혈룡장(白玉血龍杖) 하나를 꺼내 높이 치
켜들고 외쳤다.
"녹의의 단주, 이것이 무엇인지 알겠지요?"
녹의의 부인은 옥룡장을 보는 순간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며 힘없이 꿇
어앉아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문주의 신물...... 백옥혈룡장."
몽천악은 호기심이 찬 시선으로 옥장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한 자 반 정
도의 길이에 굵기는 어린 아이 팔뚝만했고 또한 복장에는 승천하는 용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한 번 보아서도 그 옥룡장은 귀중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몽천악
은 녹의의 부인이 땅에 꿇어앉을 정도로 옥룡장의 권위가 그처럼 대단하
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옥면서생 용오운은 옥룡장을 높이 치켜든 채 매섭게 외쳤다.
"녹의의 단주, 어서 귀곡록을 돌려달라고 하지 않고 무얼 하고 있소?"
몽천악은 그 말을 듣자 가슴이 철렁했다.
바로 이때, 녹의의 부인이 벌떡 일어나며 손을 들어 몽천악은 가슴을 향
해 곧장 쳐왔다.
그 일 장은 번개와 같아 몽천악은 황급히 왼발을 뒤쪽 옆으로 옮겨서야
겨우 피했다.
"부인, 정말 귀곡록을 다시 뺏으려는 거요?"
녹의의 부인의 대답이 들렸다.
"그래요, 귀곡록을 다시 돌려주셔야겠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는 조급하고 괴로운 표정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녀는 다시 왼손을 휘둘러 몽천악을 쳐갔다.
몽천악은 이때,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는 녹의의 부인의 표정으로 원치 않는 공격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때, 옥면서생 용오운의 날카로운 고함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녹의의 단주, 나는 십 초 이내에 그를 제압하도록 명하오."
"네, 명을 따르겠습니다."
그녀의 장법이 돌연 변했다. 마치 벌, 나비가 이 꽃에서 저 꽃으로 꿀을
찾아 날듯 일 장을 교차시키며 연거푸 공격을 퍼부었다.
일순간 녹색의 장영이 온 하늘을 뒤엎고 날카로운 공격을 계속하여 몽천
악은 계속 후퇴를 거듭했다.
몽천악은 뜻밖에 상대방의 고강하고 괴이한 초식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
다. 순식간에 녹의의 부인은 구 초의 공격을 퍼부었다.
돌연 그녀는 멈추었다.
그러나 쌍장을 앞뒤로 하여 공수(攻守)를 겸한 자세를 취했다.
몽천악은 녹의의 부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원래 요염하고 아름다운 얼
굴에 홍조를 띠고 있었으며 수심에 가득찬 눈길로 몽천악을 바라보고 있
었다.
마치 몽천악에게 어서 이곳을 떠나 달라고 애원하고 있는 듯 했다.
이때, 다시 옥면서생 용오운의 날카로운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녹의의 단주, 절공을 운집하고 있는 이때, 왜 공격을 중단하오!"
몽천악은 그 말을 듣자 크게 외쳤다.
"용오운, 어서 손을 멈추게 하시오, 우리 할 말이 있으면 좀 더 의논해
봅시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녹의의 부인은 가볍게 소리를 내며 오른손으로 몽
천악을 향해 공격해갔다.
그 일 장은 마치 한 줄기 훈풍처럼 가볍게 스쳤다.
몽천악은 흠칫 몸을 떨며 뒤로 한 발 물러났다.
그러자 녹의의 부인은 전신의 힘이 쑥 빠졌는지 허탈한 상태로 풀 위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는 완전히 사라지고 흡사 병자처럼 표
정이 바뀌었다.
그녀가 십초를 공격하는 동안 몽천악은 단 일초도 반격하지 않았다.
옆에서 관전하던 용오운이 극히 득의에 찬 미소를 흘리며 천천히 입을 열
었다.
"몽대협, 당신은 이미 그녀의 소양신공(少陽神功)에 적중했소."
몽천악은 소양신공이란 말을 듣자 안색이 돌변하여 녹의의 부인을 바라보
았다.
녹의의 부인의 아름다운 눈동자 속에서 수정 같은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
고 큰 죄를 지은 듯한 비애에 찬 표정이었다.
몽천악은 처량하게 탄식했다.
"소양신공은 무림에서 가장 무서운 절학으로 전문적으로 사람의 기경팔맥
만을 상하게 하는 것으로 격중되면 스물네 시간을 견뎌내지 못하는 것으
로 그렇다면 나는 이제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옥면서생 용오운은 가벼운 음성으로 껄껄 웃었다.
"하하하, 몽대협은 천명이 다 한 것을 알고 있으면서 어찌하여 귀곡록을
내놓지 않는 거요?"
몽천악은 안색을 무섭게 굳히며 냉랭하게 말했다.
"내가 지금 귀곡록 기서를 당신에게 내준다면 나의 죽음은 한 푼의 가치
도 없는게 아니겠소."
용오운은 박장대소했다.
"그래 당신은 내 손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소?"
몽천악은 이때, 미간에 은은하게 살기를 띠고 차갑게 말했다.
"용선생께서 내 몸에 있는 귀곡록 기서를 뺏어갈 자신이 있다면 한 번 시
험해 보시오."
옥면서생 용오운은 머리를 돌려 녹의의 부인을 쳐다보며 물었다.
"녹의의 단주, 당신의 소양신공이 저 사람의 기경팔맥에 격중 했겠지요."
녹의의 부인의 고통스럽게 대답했다.
"용총호법께서는 저와 아무런 원한도 없는 무림 고수 한 분을 상하게 하
셨습니다."
옥면서생 용오운은 통쾌하다는 듯 박장대소했다.
"녹의의 단주는 잔결서생을 격파했다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충분히 우
리 밀종문의 영웅이 되었는데, 무엇 때문에 그토록 비통해 하며 자책하는
거요?"
옥면서생 용오운은 말을 하면서 몽천악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다가갔다.
그는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일단 소양신공에 기경팔맥을 격중당한 사람은 명문의 기혈이 산만해져서
정력이 소실되오. 몽천악, 당신은 이제 다시는 단정의 진기를 끌어올리지
못할 것이오."
돌연 옥면서생은 팔을 번쩍 들어 몽천악을 향해 곧장 쳐갔다.
장풍이 쏟아져 나오자, 동시에 몽천악의 벽혈검도 무지개 같은 싸늘한 검
기를 하늘에 가득히 쏟아져냈다.
어느 무림 고수일지라도 이 검기 하나만으로도 몽천악이 소양신공에 상처
를 입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녹의의 부인은 얼굴에 한 줄기 회색을 떠올렸다.
용오운은 "아!" 소리를 발하며 놀란 토끼처럼 검기에서 빠져 나와 삼사
장 밖으로 물러나 껄껄 웃었다.
"썩 좋은 검법이오, 이 용모는 안계가 좀 더 넓어졌소."
몽천악은 자기의 반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재빨리 자세를 바로 잡고 차갑
게 말했다.
"귀하는 다시 제이검도 시험해 보시겠소?"
용오운은 미소를 지었다.
"그야 물론이오."
"쨍!" 몽천악의 벽혈검은 다시 검집에 들어갔다.
몽천악은 낭랑하게 말했다.
"용서하시오, 다음 날 또 뵙겠습니다."
말을 마치자 몽천악은 쏜살같이 날아갔다.
"하하하......"
용오운은 길게 웃더니 마치 천마(天馬)가 하늘을 날 듯 허공을 날아 바짝
뒤쫓았다.
몽천악은 용오운이 추격해 오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허공
에서 몸을 돌림과 동시에 검을 뽑아 용오운을 향해 전공 석화같이 배어갔
다.
용오운을 허공에서 소매 자락을 떨쳐 한 줄기 무형강기를 노도같이 쳐냈
다.
그러나 몽천악의 그 일 검은 허초였다.
그는 용오운이 날카로운 장풍을 쏟아내는 찰나, 검을 거두어 들이고 그
기세를 이용하여 칠팔 장 밖으로 날아갔다.
용오운의 장풍을 이용하여 몸을 날린 것인 만큼 그 속도는 말할 수 없이
빨랐고 거리도 굉장히 멀었다.
몽천악은 땅에 발이 닿기가 무섭게 다시 몸을 날려 수십 장 밖으로 날아
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옥안서생 용오운은 상대방의 계략에 속은 것을 알자 기가 올라 발을 구르
며 소름이 끼칠 정도로 징그러운 웃음을 흘리며 이를 갈았다.
"좋다. 이 녀석, 나 용오운이 오늘 어이없이 병신 녀석의 잔꾀에 넘어가
다니, 흥...... 나는 네 놈이 귀곡록을 묘가수에게 무사히 넘겨줄 수 있
는가 두고 보겠다."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더니 싸늘한 눈초리로 녹의의 부인을 쳐다보고는
몸을 날려 낙양성을 향해 급히 추격해 갔다.
몽천악은 용오운이 만홍객잔 주변에 물샐틈 없는 배치를 펴 놓았으리라
생각하고 성안에 들어서자 곧장 객잔으로 들어가지 않고 성 남쪽으로 향
했다.
그는 성 남쪽 문을 나와 황량한 묘지의 나무 그늘 밑에서 사방에 사람이
있는지 살펴 본 다음 인적이 없자 무릎을 개고 앉아서 중얼거렸다.
"소양신공에 다쳤으니 내 목숨도 이제 다 한 모양이구나...... 기경팔맥
증 이미 두 곳의 혈도에 은은히 통증이 일기 시작하는구나......"
묘비 앞에 앉아 있는 몽천악은 눈을 들어 하늘에 뜬 구름을 쳐다보니 감
개가 무량했다.
'아! 귀곡록에 도대체 어떤 것이 기록되어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자 그는 돌연 품속에서 귀곡록을 꺼내 들었다.
그러나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품속에 집어넣었다.
해는 점점 서쪽으로 기울어져 갔다. 몽천악이 이 묘지 위에 앉아 있는 지
도 벌써 두 시간이 경과했다.
이 두 시간 동안 그는 십이주천을 운공 행기했다.
그러나 괴이한 것은 체내 경맥에 부상을 찾지 못한 것이다. 진기가 상통
하고 은은한 통증도 차츰 사라져 가는 것이 아닌가.
너무도 기쁜 나머지 몽천악은 벌떡 일어나 자기도 무르게 중얼거렸다.
"나는 소양신공에 상한 데 하나없이 거뜬히 받아냈구나......"
홀연히 뒤에서 얼음장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비록 소양신공이 너를 격패시키지 못했으나 소녀 잔양장만은 너의 목숨
을 끊어놓고 말 것이다."
몽천악은 그 소리에 감정이라도 된 듯 고개를 돌렸다.
그는 얼떨떨했다.
약 삼 장쯤 뒤쪽에 있는 큰 무덤의 비석 앞에 교태가 넘쳐흐르는 마치 선
녀와 같은 아름다운 남의의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는 다름 아닌 섭혼마
녀 대군이었다.
섭혼마녀 대군 옆에는 청의의 인 한 명이 서 있었다.
청의의 인의 얼굴은 혈색 한 점 찾아볼 수 없고 생기도 하나 없이 창백했
다. 몽천악은 첫눈에 청의의 인이 인피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
었다.
'저 사람은 누구일까?'
몽천악은 경이와 의혹에 쌓였다. 그가 어찌하여 섭혼마녀와 같이 있단 말
인가?
몽천악은 눈동자를 굴려 사방을 훑어보았다. 석양의 황금빛 햇볕 만이 묘
지 위에 뿌려지고 있을 뿐 사람이라고는 그들 셋 이외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몽천악이 회혼단 한 알을 얻은 순간부터 마음 먹어
온 것은 지금 눈앞에 있는 섭혼마녀를 한시라도 빨리 찾아 회혼단을 복용
시켜 대군의 본래 제정신을 찾아주겠다는 것이었다.
지금 눈앞에도 그렇게도 찾던 대군이 나타난 것이다.
이제 그녀가 회혼단만 먹게 된다면 모든 일이 원만하게 되는 것이다. 그
것은 극히 간단한 일인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이 큰 대가를 치러야 될지도 모
르며 경우에 따라선 생명까지 바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눈 앞에 있는 청의의 인이 너무나 무서운 인물 같았기 때문이었
다.
혹시 그가 흑마왕이 아닐까?
초야의 묘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몽천악은 온 신경을 곤두세워 청의의 인의 일거일
동을 주시했다.
청의의 인은 차갑게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생명이 조금이라도 아까운 생각이 든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
귀곡록을 내놓는 게 현명할 것이다."
몽천악은 그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당신도 밀종문의 귀곡록이 필요하단 말이오?"
청의의 인은 표정 하나 나타내지 않고 대답했다.
"귀곡록의 비밀을 아는 사람이라면 천하에 그것을 싫다고 할 사람은 하나
도 없을 것이다."
몽천악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도대체 당신은 뉘시오?"
청의의 인은 차갑게 말했다.
"너는 지금 오직 사느냐, 죽느냐 두 가지만을 선택할 수 있지 내가 누구
라는 걸 물어 무엇 하려는 거냐?"
몽천악이 물었다.
"귀하는 어떤 무공으로 나를 사지로 몰아 넣겠소?"
"섭혼마녀의 공격과 나의 저격으로 너 하나쯤은 간단하다."
몽천악은 입가에 웃음을 흘렸다.
"귀하는 내 목숨을 뺏을 자신이 있단 말이군요?"
"만일 내 마장을 피할 수만 있다면 그 귀곡록을 내놓지 않아도 되겠지."
몽천악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돌연 물었다.
"귀하는 섭혼마녀를 지휘도 하고 혼미케 할 수도 있습니까?"
"그건 무엇 하러 묻느냐?"
"그건 내 개인적인 비밀인 동시에 교환 조건이오."
"자세히 말해 봐라."
"나는 이 귀곡록을 귀하에게 내드릴 수 있소, 그러나 단 섭혼마녀를 혼미
상태에 빠지게 한다면."
"너는 섭혼마녀가 혼미상태에 빠지면 나를 당해 낼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
는 모양이지?"
"한 번 해 볼 만하겠지요."
"지금 귀곡록이 네 몸에 있으니 나는 손을 써서라도 뺏을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염려되는 일이 있겠지요?"
"염려라니?"
"실패요."
청의의 인은 차갑게 웃었다.
"그런 염려는 추호도 없다."
"무슨 말씀을 만일 그런 염려가 없었다면 귀하는 벌써 손을 써서 뺏어갔
을 거요."
청의의 인은 음산한 소리로 말했다.
"그렇다. 그러나 내가 염려하는 것은 네가 우리와 싸우게 되면 그 귀곡록
기서를 없애 버리지 않을까 그게 걱정이 되어 손을 쓰지 않은 것이다."
"아, 그런 수도 있다는 것을 몰랐군요. 아무튼 가르쳐 주어서 고맙습니
다."
청의의 인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나는 여러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니 어서 결정해라."
"내가 결정을 해야 합니까, 아니면 당신이 결정을 해야 합니까?"
"좋다, 그럼 내가 결정하도록 하겠다. 네 말대로 섭혼마녀를 혼미상태에
빠지게 할 테니 그와 동시에 너는 그 귀곡록을 칠 장 밖으로 던져라."
"그것 참 좋은 제안입니다."
"또 한가지, 너는 그 귀곡록을 들춰 봤느냐?"
"안 봤소."
"그럼 지금 내가 열을 셀 테니 귀곡록을 던져라."
"나는 섭혼마녀가 혼미상태에 빠지는 것을 보는 순간 던지겠소."
"내가 열까지 셀 동안 섭혼마녀는 혼수상태에 빠질 것이다."
몽천악은 대군을 구할 일념으로 묘가수와 약속을 저버리기로 했다. 지금
비록 귀곡록을 내 준다고 해도 다시 빼앗아 올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그
러나 오늘 섭혼마녀를 놓친다면 구해 내기가 더욱 어려워 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묘가수와의 약속을 저버리게 된 것이다.
홀연히 청의의 인의 눈에서 음산하고 차가운 빛이 쏟아져 나오더니 천천
히 불렀다.
"섭혼마녀......"
그 부름에는 음산하고 신비한 기운이 가득했다.
그 소리를 들은 섭혼마녀는 귀신에 홀린 듯 천천히 소리를 따라 머리를
돌렸다.
그녀의 초점 잃은 눈빛이 청의의 인의 눈빛과 접촉하는 순간 그녀는 혼을
잡힌 듯 꼼짝을 못했다.
이때, 청의의 노인은 가벼운 음성으로 천천히 수를 헤었다.
"하나...... 둘...... 셋...... 넷......"
바로 이때였다. 묘지 위에 돌연 또 하나의 인영이 나타나 바람처럼 청의
의 인의 등 뒤로 다가갔다.
몽천악의 예리한 시각은 이미 나타난 사람이 누구라는 것을 대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자기에게 귀곡록을 맡긴 녹의의
부인이었다.
그녀의 돌연한 출현은 몽천악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이거 정말 난처하게 되었구나......'
미처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청의의 인의 수를 헤아리던 소리가 뚝 그쳤
다.
그는 번갯불 같이 빠른 신법으로 몸을 돌리며 일 장의 강렬한 경풍을 쳐
나갔던 것이다.
매섭고 날카로운 장풍은 한 치도 틀림없이 정확하게 녹의의 부인에게 격
중되었다.
비단 폭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비명 소리와 함께 녹의의 부인의 교구는
마치 실이 끊어진 연처럼 비틀거리며 날아가 삼장 밖에 있는 무덤 앞의
풀 위에 나동그라졌다.
몽천악은 급히 몸을 솟구쳐 녹의의 부인 앞에 내려섰다.
이때, 녹의의 부인은 안색이 노랗게 변하더니 "왝!" 하며 시뻘건 선혈을
분수처럼 토해 냈다.
몽천악은 재빨리 그녀를 안아 일으켜 등 뒤의 명문혈을 안마했다.
그러자 한 줄기 뜨거운 내력이 녹의의 부인의 명문혈을 통해 주입되어,
소용돌이치던 체내의 기혈이 잠잠해졌다.
녹의의 부인은 처량하게 말했다.
"몽상공, 그 귀곡록은 절대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어서는 안됩니다......
약속을 지켜 꼭 묘가수에게 전해 주셔야 합니다......"
몽천악은 가볍게 한숨지었다.
"나를 용서해 주시오."
이때, 몽천악은 부끄러운 마음으로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였다.
녹의의 부인은 그를 쳐다보며 뜨거운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몽상공, 저는 이제 천운이 다 한 것 같군요. 상공은 내가 죽기 전에 귀
곡록을 묘가수 이외의 사람에게 절대 넘겨주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만일 그렇지 못할 경우 그 귀곡록을 없애 주세요."
녹의의 부인은 창백한 얼굴에 거의 애원에 가까운 눈빛으로 몽천악을 쳐
다보았다.
그녀는 몽천악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눈앞에 있는 젊
은이가 머리를 끄덕여 응낙만 해 준다면 천지가 개벽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약속만을 꼭 지켜 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몽천악은 시종 무겁게 침묵만 지킬 뿐 대답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지금으로써는 어떻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기 때문
이었다.
대군을 구해 내는 일은 더욱이 필생의 대사이며 이번이야말로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이며 이때를 놓치면 언제 다시 이런 기회가 올 지도 모르니 결
코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녹의의 부인의 실의에 찬 눈에서는 눈물만이 주르르 쏟아지고 있었다.
처절한 비명 소리와 함께 녹의의 부인은 한 모금의 피를 토해 내고 곧 숨
을 거두고 말았다.
몽천악은 녹의의 부인의 죽음을 보자 극히 상심했다.
이때, 돌연 뒤에서 청의의 인의 얼음같이 차가운 음성이 들려 왔다.
"그녀는 죽었다, 누구든지 나의 일 장에 격중되면 일각을 넘기지 못하고
죽고 만다."
몽천악은 천천히 몸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귀하의 장력은 실로 대단하오. 그러나 귀하는 나도 단 일 장에 꺾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청의의 인은 담담하게 말했다.
"귀곡록을 내 손에 쥐기 전에 나는 너와 다투지 않으리라."
몽천악이 차갑게 말했다.
"난 이제 생각을 달리했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귀곡록을 내놓을 수
없소."
청의의 인은 데설궂게 웃었다.
"흐흐흐...... 그건 스스로 죽기를 원한다는 말과 같지."
몽천악은 돌연 팔을 들어 벽혈검을 뽑아 들었다.
"우선 이 검을 시험해 보고 나를 죽이든지 살리든지 하시오."
말을 하며 몽천악은 성큼 한걸음 내딛고 일검을 베었다.
검은 영롱한 빛을 허공에 뿌렸다.
청의의 인은 그 자리에 버티고 서서 피하지 않았다. 그러나 옆에 있던 섭
혼마녀가 마치 도깨비와도 같고 유령과도 같은 신법으로 청의의 인 앞을
가로막고는 희고 청결한 손을 들어 베어오는 검을 향해 맹렬히 떨쳐냈다.
몽천악은 방향을 바꿔 단검에 그녀의 손을 베어버릴 수 있었으나 재빨리
검을 거두어 들였다.
섭혼마녀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몸을 떨쳐 몽천악의 왼쪽을 파고
들며 곱고 포동포동한 손으로 몽천악의 왼쪽 어깨를 쳐갔다.
몽천악은 섭혼마녀를 만나게 되자 공력이 크게 감소된 것 같았다. 이때,
그는 슬쩍 옆으로 피하며 내려 그을 수도 있었지만 뒤로 훌쩍 대여섯 자
물러나 일 장을 피했다.
이때, 섭혼마녀의 왼손이 소녀 잔양장을 쳐낼 줄을 누가 알았으랴!
한 줄기의 무기 같은 광망이 번쩍 하는 듯하더니 소녀 잔양신공의 세력이
노도와 같이 회오리쳐 드는 것이 아닌가!
몽천악은 돌연 벼락 같이 외치며 벽혈검으로 두터운 검막을 형성하며 이
번에는 뒤로 물러나기는커녕 앞으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소녀 잔양신공은 무림을 독보(獨步)하는 절학인지라 청의의 인은 몽천악
의 검막이 신공이 무서운 진동을 막아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
다.
그러나 눈 앞에 벌어지고 있는 광경은 그의 예상을 여지없이 뒤엎고 말았
다. 소녀 잔양신공의 예리하고 강한 힘이 몽천악의 검기에 완전히 와해되
어버리고 마는 것이 아닌가!
그뿐인가, 몽천악은 섭혼마녀의 면전에 바싹 파고들어 오른쪽 팔을 날려
곧장 그녀의 옆구리에 있는 마혈을 걷어찼다.
정말 신묘한 보법이었다.
"악!"
짤막한 비명 소리와 함께 섭혼마녀의 교구는 잡초 위에 나가 뒹굴었다.
이때, 몽천악은 벽혈검을 내던지고 왼손 다섯 손가락을 뻗쳐 섭혼마녀의
왼팔 맥문을 짚었다.
몽천악은 섭혼마녀의 잔양신공은 왼손으로 단련된 것을 익히 아는지라 왼
팔의 맥문을 거머쥐게 되자 그녀는 모든 행동의 자유를 잃고 만 것이다.
몽천악이 일진의 검막을 형성하고 날아들어 섭혼마녀의 옆구리를 걷어차
고 왼팔 맥문을 짚기까지 일편의 동작은 전공 석화와 같은 순간에 일어났
다.
청의의 인이 섭혼마녀가 당했다는 생각이 들 즈음은 그녀는 이미 왼팔 맥
문을 몽천악에게 잡힌 뒤였다.
청의의 인은 화가 솟구쳐 고함을 지르며 일 장을 쳐냈다.
그러나 몽천악은 섭혼마녀를 데리고 무덤들을 넘어갔다.
"펑!" 하는 굉음이 일어났다. 청의의 인의 장력이 묘비에 맞아 뿌연 먼지
와 돌가루가 난비했다.
청의의 인은 일 장이 실패하자 마치 유령과도 같은 신법으로 몸을 날려
몽천악의 약 일고여덟 자 앞 쪽에 내려서 오른손으로 공격을 가할 자세를
취했다.
몽천악이 막 땅에 내려서 몸의 중심을 잡은 찰나, 상대방이 어느 틈에 앞
에 와 있는 절쾌한 신법에 약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청의의 인은 소름이 오싹 끼칠 만큼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네가 그 자리에서 한치라도 움직인다면 나의 장력이 용서없이 너를 격중
시키고 말 것이다."
몽천악은 섭혼마녀의 맥문을 움켜쥔 채 차갑게 대꾸했다.
"글쎄올시다, 아마 이 섭혼마녀가 당신 장력의 목표가 되겠지요."
청의의 인은 몽천악에게 가려운 곳을 찔린 듯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너는 그녀를 어떻게 할 작정이냐?"
"생명을 빼앗겠소."
"그녀가 죽는다면 너 역시 온전치 못할 것이다."
"그야 물론이겠지요, 그러니 우리 조건부로 합시다."
"어떤 조건?"
몽천악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우선 잠시 뒤로 물러서시오. 절대 그녀의 생명엔 손을 대지 않겠소."
"흐흐흐....... 나의 장력은 이미 장심에 집중되어 있으니 위협을 받는
건 바로 너야."
"당신의 장세는 예리하기는 하나 꼭 나를 상하게 할 수 있다고는 볼 수
없소."
"내 장력은 일단 발출하면 결코 실수하는 법이 없다."
"섭혼마녀의 소녀 잔양신공 역시 오늘날까지 아마 단 한 번의 실수도 없
었을 것이오만, 나를 어떻게 하지는 못했소."
청의의 인은 차갑게 웃었다.
"네가 아까 일으킨 검막이 어떻게 소녀 잔양신공을 파했는지 모르겠다."
몽천악은 미소를 지었다.
"그거야 간단한 거요. 나는 이미 소녀 잔양신공을 제압하는 무공을 연마
했기 때문이오."
청의의 인은 돌연 무엇이 생각났는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네가 조금 전에 운용한 것이 바로 달마강기신공인가?"
몽천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달마신공이오. 그래서 내 얘기는 당신의 장력이 아무리 강할지
라도 나를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거요."
"달마강기를 연마했다고 해서 결코 천하무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
"그러나 당신의 일 장에 맞아 죽을 정도는 아니오."
"지금 나는 선제 공격을 할 생각도 없을 뿐더러 그렇다고 너를 그냥 놓아
줄 생각도 없다."
지금 몽천악에게 있어서 가장 쓰라린 것은 외팔이라는 것이었다. 오른손
만 있다면 품속에서 회혼단을 꺼내 섭혼마녀의 입속에 얼마든지 넣어줄
수 있으련만......
서쪽 하늘을 붉게 태우던 저녁놀이 사라진 지 오래되어 황량한 묘지에는
정막한 어둠이 차츰차츰 깔리고 있었다.
돌연 묘지에 또 하나의 다른 음성이 들려왔다.
"만약 더 이상 버틴다면 잔결서생은 싸움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패
하고 말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몽천악은 마음이 섬뜩했다.
청의의 인이 날카롭게 외쳤다.
"누구냐?"
이때, 삼 장 밖 묘비 위에 흑의의 장삼을 입은 사람이 우뚝 서 있었는데
그 역시 오른팔이 없는 외팔이었으며 허리에 한 자루의 장도(長刀)를 차
고 있었다.
몽천악은 그 외팔이를 보는 순간 놀라움과 기쁨이 교차했다.
'독비절도 유기가 나를 도와만 준다면 대군의 영혼을 구할 수가 있을 것
이다.'
독비절도 유기의 출현으로 몽천악은 무한한 희망으로 충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찰나에 불과했다. 몽천악은 골이 울리고 현기증이 일어나
는 것을 느꼈다.
몽천악은 속으로 외쳤다.
'이크!'
그는 섭혼마녀를 데리고 독비절도 유기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몽천악이 움직이는 찰나 청의의 인의 장식이 쏟아져 나갔다.
"윽!"
가벼운 신음 소리와 함께 몽천악과 섭혼마녀의 몸뚱이는 마치 나뭇잎처럼
공중에 떠올랐다가 땅에 떨어졌다.
청의의 인의 장력은 몽천악의 몸에 응결되어 있던 달마강기를 모두 흩어
지게 할 뻔했다.
거의 혼미한 상태에서 몽천악은 재빨리 섭혼마녀의 맥문을 놓아주고 왼손
을 품속에 넣어 회혼단을 꺼내 거의 덮치는 기세로 손에 든 회혼단을 그
녀의 입에 집어넣었다.
이때, 몽천악은 목덜미가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큰 갈고리가 잡아당기
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곧 이어 벼락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흑마왕 내 칼을 받아라!"
독비절도 유기의 천하에서 제일 빠른 요도가 칼집에서 빠져 나왔다.
청의의 인은 도광(刀光)이 번뜩이는 가운데 성큼 물러났다.
독비절도 유기의 폐도가 다시 칼집에 들어갔을 때 그는 놀라 외쳤다.
"네가 내 칼을 피하다니."
청의의 인은 데설궂게 웃었다.
"흐흐흐...... 아주 대단한 도법이군. 하마터면 애매한 팔 하나만 달아날
뻔 했잖아."
유기가 냉랭하게 웃었다.
"귀하가 흑마왕이오?"
청의의 인은 역시 음험하게 웃었다.
"흐흐흐...... 어떤 점으로 나를 흑마왕이라고 보는가?"
살인 청부
독비절도는 검은 속셈이 빤히 드러나는 미소를 머금더니 청의의 인을 힐
끗 노려보면서 말했다.
"흐흐흐...... 너는 내가 삼 일 동안 밤낮으로 뒤를 따랐다는 사실을 아
느냐? 너에게 격사당한 시체를 조사해 본 결과, 한결 같이 심장이 파열되
어 죽어 있었다. 다만 흑고루 표시 하나만 부족했었다."
"흥! 유기! 네가 내 뒤를 따르고 있는 것을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 그 쯤
도 모르고서야 어찌 강호에 나와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
"핫핫핫...... 그러나 너의 열여덟 명의 졸개들은 모두 내 칼 아래 목 잘
린 귀신이 되어 버렸지. 하하하......"
"너무 통쾌해 할 것 없다! 너는 그 인과응보를 받을 날이 있을 것이다.!"
"핫핫핫......"
독비절도가 계속 통쾌하게 웃어 젖히자 청의의 인은 주먹을 불끈 움켜쥐
고 낮게 신음 소리를 냈다.
"음...... 어떻든 너의 절도의 빠름은 전혀 상상 밖이었다!"
"하하, 천만의 말씀! 너의 장풍의 위력도 나의 절도에 결코 뒤지지 않는
다."
"무슨 뜻이냐?"
유기는 땅 위에 누워 있는 몽천악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심하게 얼굴을
찡그리더니 말했다.
"너는 이 잔결서생의 무공이 우리들보다 절대로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너의 장풍이 그를 적중시켜 이 꼴로 만들어 놓
았으니 그것을 보고 어찌 나의 머리털이 쭈뼛하게 일어서지 않겠느냐?"
이 무렵, 몽천악은 온몸의 기운이 완전히 빠져 널브러져 있었으나 정신까
지 잃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유기와 청의의 인이 주고받는 이야기
를 똑똑히 듣고 있었다.
그 대화를 듣고 있던 몽천악은 새로운 사실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
다. 그것은 청의의 인이 바로 흑마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자 녹의의 부인을 일 장으로 격중시킨 청의의 인의 솜씨가 떠올랐다.
녹의의 부인은 결코 약자가 아니었다. 그런 녹의의 부인을 단 일 장으로
쳐죽였으니 청의의 인의 은근한 내력에 몽천악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독비절도 유기와 청의의 인의 결투에 과연 유기가 승리할 수 있을 것인지
조차 의심스러웠다.
몽천악은 자기의 공력이 회복될 때까지 만이라도 유기가 청의의 인을 막
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은근히 바랐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대군과 자기는
재앙을 면치 못할 것이다.
대군은 회혼단을 복용한 이후 끝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죽은
사람처럼 꼼짝하지 않고 몽천악의 몸에 눌려 있었다.
청의의 인이 살기를 띤 음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유기! 그래 너는 어쩔 셈이냐?"
독비절도는 대답을 않고 예리한 눈초리로 청의의 인의 아래 위를 훑어보
다가 말했다.
"먼저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
"무엇이냐?"
"네가 흑마왕인지 묻고 싶다!"
"그것은 네가 판단할 일이다. 내가 내 정체를 쉽게 알려 주려면 이 귀찮
은 인피가면을 무엇 때문에 뒤집어쓰고 다니겠느냐? 상식적인 얘기이다!"
"교묘하게 회피하지 마라! 네가 흑마왕인지 아닌지 그것만 분명히 가리자.
오직 그 둘 중의 하나만을 선택하라!"
"......"
청의의 인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만 불꽃 튀기는 네 눈동자만이 서로
상대방을 향하여 고정되어 있을 뿐이었다. 잠시의 침묵이 흘러갔다.
"정녕 대답을 못하겠단 말이냐?"
이윽고 유기가 먼저 침묵을 깨며 약간 노기가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흥! 어떻게 생각하든 너의 자유이지만 아무튼 나는 먼저 대답할 수는 없
다!"
유기는 더욱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드디어 그는 도전적인 언사를 내뱉었
다.
"한판 겨루어보지 않고는 나를 우습게 알겠다는 말이군. 네가 얼마나 자
신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이긴다는 보장은 없다."
청의의 인은 가소롭다는 듯 멸시하는 눈초리로 유기를 훑어보더니,
"그럼 이번엔 내가 묻겠다. 네가 흑마왕을 찾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
냐?"
그러자 독비절도는 드디어 기회를 잡았다는 듯 희색을 띠며 화살처럼 말
을 되쏘았다.
"너는 유기의 한 가지 비밀을 알고 있지?"
"하하하...... 겨우 그 얘기냐? 물론 알고 있다. 천하 강호무림에 신비막
측한 살인 청부업자가 하나 있는데 그는 돈에 눈이 어두워서 정사(正邪)
를 가리지 않고 돈만 내면 요구하는 대로 누구든지 죽여주는 자지."
"핫핫...... 알기는 아는구나. 그 살인 청부업자가 바로 독비절도 유기라
는 말이지?"
청의의 인은 유기의 면상을 손가락질하며 통쾌하고 우렁차게 소리쳤다.
"그렇다! 바로 너, 유기다!"
몽천악은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또한 신기함까지 느꼈다.
신기하다는 것은 이 강호무림에 살인 청부업자가 있었다는 말을 이제 처
음 들어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살인마가 바로 독비절도라니!
마검신군 조전신이 몽천악에게 했던 말이 있었다. 즉 유기를 의심한다는
것이었다.
몽천악은 남을 의심하는 조전신을 좀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
나 이제 생각해보니 조전신은 오히려 예리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조전신은 과연 강호의 경험이 풍부해서 유기의 비밀을 벌써부터 눈치채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몽천악은 계속 귀를 기울였다. 무슨 비밀이 그들 입
에서 또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독비절도 유기는 신음을 하듯 흐흐 웃더니 허망하게,
"흐흐...... 정말 무섭구나, 강호에 나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줄 알았는데."
"네게 다시 묻겠는데 네게 돈을 주고 흑마왕을 살해해 달라고 청한 사람
이 있지?"
"그렇다! 유기는 돈만 받으면 어떠한 청탁이라도 받는다."
그러자 청의의 인은 돌연 앙천대소하더니 유기를 손가락질했다.
"이 어리석은 자야! 흑마왕이 보통 사람들처럼 너의 칼 아래 굴복할 것
같으냐? 사람을 골라서 청탁을 맡아야지 오히려 네가 흑마왕에게 당하는
꼴이 될 것이다!"
그러자 유기는 뜻밖의 말을 내뱉었다.
"흑마왕을 살해하는 대가는 금은보화로 따질 성질의 것이 못된다."
"그렇다면 돈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단 말이냐?"
"그렇다 그러니 나는 기필코 흑마왕의 목을 베고야 말 것이다."
"흥! 좋다, 얼마든지 날뛰어라. 나는 네가 흑마왕을 살해하리라곤 믿지
않으니까. 그래 어떤 사람이 흑마왕을 죽여달라고 너에게 부탁했는지 좀
알 수 없느냐?"
"하하하...... 나의 내장까지 들여다보려 하는구나. 자기 내장을 스스로
베어서 너의 입에 처박을 바보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하하....
.. 꼴 사납게 굴지 마라!"
그러자 청의의 인의 손이 번개처럼 품속으로 들어갔고 찰나 유기의 외팔
이 오른쪽 허리춤의 칼자루를 거머잡았다.
유기는 싸늘한 표정이 되어 외쳤다.
"흐흐, 독기를 발휘할 생각은 포기하는게 좋을 걸. 나는 이곳에 오기 전
에 이미 일종의 벽독단을 복용했으니까. 어떠한 독이라도 내 몸에 침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청의의 인은 왼손을 품속에 넣은 채로,
"나는 네가 만독불침의 몸인 줄 미리 알기 때문에 물론 그런 바보 같은
짓은 않는다."
"너의 왼손이 품 안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나의 칼이 검집에서 퉁겨 나올
테니 서투른 짓은 하지 마시지!"
그러자 청의의 인은 문득 고개를 들고 밤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불쑥,
"이것 봐, 유기! 사람 하나를 죽여달라고 청하고 싶은데 들어 주겠나?"
유기는 청의의 인이 암수를 쓰는 수작이 아닌가 잠시 살펴보다가,
"흥! 이거 이런 데서 난데없이 장사를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는걸. 좋아,
그러나 무조건 맡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 무슨 일인지 그것부터 말해 보시
지. 그리고 죽일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아야 되겠고 또 보수도 생각을 안
할 수 없구먼."
청의의 인은 담담하게 내뱉었다.
"마검신군 조전신을 죽여 달라."
유기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조전신은 흑마왕 못지않게 살해하기 어려운 상대야."
"너는 궁한방 방주니까 조석으로 그와 함께 지내지 않나? 그를 죽일 기회
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럼 그 대가로 내게 어떻게 하겠느냐?"
"돈을 꼭 지불해야 하나?"
"돈이 아니라도 좋지."
"그럼 너를 도와 궁한방 용두방주 자리를 맡게 해주지."
"그것뿐인가?"
"만 량의 황금과 보석을 주지."
유기는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흥! 내가 그 정도의 대가를 받고 위험 속을 헤매 다닐 만큼 무모한 줄
아느냐?"
청의의 인은 유기가 의외로 욕심이 많은 것을 보고 내심 놀랐다. 그는 좀
울화가 끓어올랐으나 꾹 눌러 참았다.
"그렇다면 너는 어떤 대가를 원하는지 말해 보아라."
독비절도는 정색을 했다.
"밀종문의 귀곡록이다!"
이때, 몽천악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내 몸에 있는 이 한 권의 귀곡록에 도대체 어떤 기독의 수법이 적혀 있
기에 만나는 사람마다 이것을 탐내는 것일까?'
청의의 인이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으하하하...... 내 그 말이 나올 줄 알았지. 너는 귀곡록에 따르는 위
험을 잘 알고 있겠지. 네가 귀곡록을 가진다면 장차 밀종문문이 파견한
고수들에게 추살(追殺)을 면치 못할 텐데, 어째서 귀찮음을 자초하려느냐
?"
"하하하...... 그건 너도 마찬가지지. 네가 귀곡록을 빼앗을 경우 밀종문
의 추격을 벗어날 무슨 특권이라도 가진 건 아닐 텐데. 그런 당치않은 수
작으로 나를 조롱하지 마시지!"
청의의 인은 얼굴을 붉히며,
"여봐! 너는 나와 지금 장사를 할 거냐, 안할 거냐?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
는 거야! 나는 귀곡록 만큼은 줄 수 없다. 자, 내 청을 들어줄 텐가 아닌
가 둘 중에 하나만 택해라!"
"네가 제시한 청을 받아들이지 못함이 유감이다!"
그들의 말이 다시 거칠어졌다.
청의의 인은 모멸의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정 죽고 싶다면 죽여주지, 오늘 밤이 너의 제삿날인 줄 알아라!"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먼저 손을 써 보시지, 흥!"
"후회하지 않겠느냐?"
"나는 네가 귀곡록을 뺏어 가는 것을 눈을 뜨고 볼 수 없으니 싸움을 내
쪽에서 청해야 겠다."
청의의 인은 이미 공격의 자세를 취하며 고함을 쳤다.
"네가 싸움을 걸어온다면 먼저 출수해 보아라!"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흥! 아마 장차 영원히 기회는 없을 것이다."
"으랏차, 받아라! 이래도 기회가 없다는 것이냐!"
유기의 신형이 번쩍 움직이는가 싶더니, 예리한 검광이 청의의 인의 복부
를 파고 들어갔다.
유기의 신법의 신속함은 정녕 전공 석화와 같았다. 어떤 상황 아래 어떤
고수라도 이러한 그의 동작을 보면 담박 당황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청의의 인은 "흥!" 하고 코웃음을 쳤을 뿐이다. 그는 품 속에 넣
고 있던 왼손을 잽싸게 휘둘러 유기의 칼을 마중해 나갔다.
과연 그는 맨손으로 일 장을 쳐갔을 때는 천하 그 어디에 맨 손으로 칼을
맞아 가는 인물이 있을 수 있을까?
"쨍강!" 찰나 번갯불이 번쩍 일고 불똥이 사방으로 퉁겨져 나갔다. 유기
는 멈칫하는 듯하다가,
"야압!"
기합 소리와 함께 온몸을 수평으로 뒤집은 청의의 인의 가슴을 후려쳐갔
다.
"아하!"
청의의 인이 쌍장을 엇갈려 가슴에 댔다가 그대로 앞으로 격출해냈다.
"쨍!" 안개가 터지며 유기의 발목에 무엇인가 강렬한 압력이 짓눌려 왔고
유기는 그것을 뚫지 못하리라는 것을 순간적으로 깨달았다.
"으랏차!"
유기는 즉시 몸을 거꾸로 돌려 팽그르 허공에서 돌아 삼 장 밖에 내려섰
다.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종전과 같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로
노려보고 서 있었다. 세찬 바람이 불어와 두 사람의 옷자락을 날렸다.
두 사람은 서로 상대가 예상 외로 강하다는 사실에 은근히 놀라고 있었
다.
이윽고 독비절도가 침묵을 깨뜨렸다.
"당신은 무슨 무기를 사용해서 이 일 검을 받아낸 것이오?"
청의의 인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별 것 아니오. 장갑에 불과하오."
독비절도는 상대방을 은근히 칭찬하는 말투로,
"나의 칼날의 예리함은 천하에 받아 낼 병기가 없을 정도요, 그런데 당신
의 장갑이 받아 냈다니 놀랍소. 그러나 장갑은 이미 갈라졌을 거요."
"그렇소, 나의 장갑은 천하에 어떤 예리한 물건으로도 가를 수 없는 것인
데 과연 당신의 칼은 예리하오. 나의 장갑에 한가닥 틈이 생겼기 때문에
당신으로 하여금 무사히 돌아가게 한 것이오."
그들의 대화는 여유작작하기 짝이 없어 칭찬하는 듯하면서 비꼬고 비꼬는
듯 칭찬하는 것이었다.
유기가 껄껄 웃었다.
"허허허...... 만약 당신이 조금 전 내 칼날을 낚아채려고 생각했다면 그
손은 이미 떨어져 나갔을 것이오."
그러나 이때 청의의 인이 음산하게 언질을 주었다.
"유기, 큰소리 치지 마시오! 당신은 이미 나의 한 줄기 암경에 격중되어
있소!"
그러자 독비절도의 안색이 금시 흙빛이 되었다.
"허허, 어림도 없는 말을. 당신의 그 경력 정도로는 결코 나의 몸을 격타
하지 못할 것이오."
청의의 인은 약간 오만해진 기색으로,
"설명을 해야 알아듣겠다는 말이로군, 조금 전 내가 격출해 낸 두 줄기
경력 장풍 중, 하나는 무형이고 하나는 유형이었소. 당신이 피한 것은 나
의 오른손이 쳐낸 유형 경력에 불과했소. 당신이 땅에 내려앉는 찰나 나
는 무형 경력으로 당신의 몸을 격중시켰소.
믿지 못하겠다면 어디 진기를
돋구어 시험해 보시오. 아미 허리 뒤 현관지문이 시큰거리고 결릴 거요."
독비절도는 즉시 운기조식하여 시험해 보았다. 과연 현관지문이 시큰거리
고 결리는 것이 아닌가!
"읍!" 하고 유기는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과연 매섭소. 정말 나는 당신의 암산에 당하고 말았소. 그러나 당신의
그 무형 암산을 삼 장이나 먼 거리에서 출수한 것이기 때문에 나를 부상
시키기에는 미처 부족하다는 것을 아시오!"
"앗핫핫핫......"
청의의 인은 통쾌하게 앙천대소하더니 한걸음 앞으로 나서며 매섭게 상대
를 쏘아보았다.
"그래도 기가 꺾이지 않는군, 그럴 줄 알았다면 아예 살수를 쓸 것을. 나
는 당신을 아직 부상시키고 싶지 않았을 뿐이오. 그냥 기만 꺾어 놓으려
고 했는데 실패군."
그 말을 들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음, 나를 조롱할 셈이군. 정녕 나의 제이 초를 받으려 한단 말인가?"
유기는 번개 같이 칼자루에 손을 댔다.
"잠깐!"
청의의 인이 손을 들어 유기의 행동을 저지시켰다.
"이제 와서 무슨 볼 일이요. 우리들이 다시 싸워보았자 승부는 쉽사리 가
려질 것 같지 않소, 당신이 나를 이기리라 곤 믿지 않고, 사실 나 또한
당신은 어려운 상대요. 그러니 이번 승부는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십
시다."
유기는 이 말을 듣고 어깨를 으쓱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나는 당신이 그 귀곡록을 그냥 뺏어가게는 내버려두지 않겠소,
아니 용납치 않을 것이오!"
그러자 청의의 인이 뜻밖의 선언을 했다.
"당신이 정말로 그 귀곡록을 갖고 싶다면 내가 양보하리다."
"무엇이?"
이때, 청의의 인은 신형을 번쩍 움직이더니 미련없이 그 자리를 떠나가는
것이 아닌가?
"잠깐!"
유기가 손을 내밀어 그를 저지하려고 했으나, 이미 청의의 인의 모습은
눈 앞에 없었다.
너무 쉽사리 청의의 인이 떠나갔기 때문에 유기는 마치 무엇에 속아넘어
간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
고 또 암수를 당한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정말 귀곡록을 포기했단 말인가? 결코 그럴 리가 없다. 귀곡록이 내 손
에 들어온 뒤 네가 다시 뺏으러 온다한들 두려워할 줄 아는가?"
그가 몸을 돌렸을 때 상다리를 하고 무덤 앞에 앉아 있는 몽천악을 발견
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앉아 있는 모습이 그지없이 편안해 보였다.
몽천악의 옆에는 섭혼마녀가 누워 있었으며 그녀의 얼굴은 마치 한송이의
복숭아꽃처럼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독비절도 유기는 한걸음 한걸음 몽천악 앞으로 다가갔다.
이때, 몽천악이 눈을 번쩍 떴다.
"유선생! 귀곡록을 꼭 가지실 작정이십니까?"
"허어, 자네 깨어 있었군, 그래, 자네가 살아날 줄은 미쳐 생각지 못했는
걸."
"나는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습니다. 아마 나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독비절도 유기는 싸늘하게 얼굴을 굳히며 말을 뱉었다.
"잔결서생! 드디어 우리 둘의 승부를 결판 지를 기회가 왔네."
그러나 몽천악은 엷은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유선생! 지금의 당신은 나의 적수가 아니오! 만약 내 말을 믿지 못하겠
거든 그 자리에 앉아 진기를 돋구어 보시오."
유기는 냉소를 치며,
"흥, 그렇다면 자네는 내가 청의의 인에게 암산을 당했다는 말이로군?"
몽천악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분명히 그의 암산을 당했소. 다만 그가 부상을 아주
미약하게 하여 당신으로 하여금 발견치 못하도록 했을 뿐이오. 따라서 당
신이 누구와 격렬한 격투라도 벌여서 힘을 소모하게 된다면 상처는 금방
커지고 말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당신은 끝장이오!"
"흥, 만일 내가 부상을 당했다면 청의의 인은 그렇게 쉽사리 물러서지 않
았을 것이다. 그자만큼 교활하고 간교한 자가 눈앞에 다리 부러진 토끼를
잡아먹지 않을 리가 없다."
몽천악은 충고하듯 팔짱을 끼고 눈을 감은 채 나직이 말했다.
"그의 간교한 계략은 유선생이 생각하는 정도 그 이상이오. 그는 당신과
내가 싸움이 붙어 서로 기진맥진할 때만 바라고 있소. 그는 지쳐 있는 우
리를 간단히 처치하고 귀곡록을 손쉽게 얻으려하는 것이오."
그러자 유기는 즉시 놀라는 표정이 되더니,
"으음!"
하고 침통한 신음 소리를 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잔결서생! 나는 자네처럼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를 굳이 해치고 싶지는
않네. 하지만 자네가 나에 대한 한 가지 비밀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손을
쓰지 않을 수가 없네. 내 입장을 이해해 주기 바라네."
"유선생이 살인 청부업자라는 사실은 확실히 놀라운 비밀입니다."
"하하하...... 나를 이해해 주겠다는 소리군. 고맙네. 정말 자네 같은 젊
은이는 아깝네만......"
유기의 손이 이미 허리춤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잠깐!"
몽천악은 황급히 유기의 행동을 가로막았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거든 해 보아라. 내 그쯤 들어주지 못
하겠느냐?"
"저를 그냥 내버려두신다면 저는 절대로 당신의 비밀을 폭로하지 않겠습
니다."
유기는 잠시 망설이다가,
"좋다. 사나이로서 한 번 믿어 보자. 그러나 귀곡기록 만큼은 네게 내놓
을 수 있겠지? 그런 조건도 없이 그냥 물러서기엔 이제까지 쌓았던 나의
노력이 너무 허망해진다!"
"귀곡록은 내 것이 아닙니다. 남의 것을 내가 놓는다 할 수는 없습니다."
유기의 얼굴에 금새 노기가 떠올랐다. 돌연 그는 우렁차게 고함을 질렀다.
"이놈! 감히 날 우롱할 셈이로구나. 너는 내가 아무 소득도 없이 돌아가
기를 바라고 있단 말이냐? 이치도 모르는 놈! 자, 내 공격을 받을 준비
를 해라!"
몽천악의 표정도 일시에 굳어지고 말았다. 그도 약간 노기 어린 음성으로,
"마음대로 공격하십시오!"
유기의 칼은 천하 제일쾌로 불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상다리를 하고
앉은 데다가 적수공권으로 그 칼을 막아낸다는 것은 정녕 계란으로 바위
를 부수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몽천악은 두 눈을 지그시 내려감고 손을 다리 위에 늘어뜨리고 있었다.
마치 입정한 승려의 모습과 같았다.
유기는 좀 떨떠름하게 생각되었다.
'저 녀석이 무엇을 믿고 저렇게 태연자약할까? 내 일 검을 받아낼 수 있
을까?'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깐!
"이야하!"
고함이 떨어지자 유기의 칼은 휘익 허공을 가르며 몽천악의 머리통을 향
해 후려쳐갔다.
바로 이 순간이었다.
몽천악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이어 눈동자가 하얗게 변하더니 마치 옥처
럼 빛나며, 그 빛이 사방으로 눈부시게 쏘아나갔다.
"엇!"
유기는 눈이 부셔 질끈 감았으나 후려치는 기세는 멈추지 않고 그대로 내
리 찍었다.
"야하!"
몽천악의 기합 소리가 들리고 부드득 비단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쨍강!" 칼이 바위를 후려치자 바위가 사방으로 퉁겨나갔다.
이때, 몽천악은 상다리를 한 채로 허공에 떠올라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소매를 찢기고 허공으로 떠오른 것이다.
유기는 칼이 빗나가자 제 힘에 못 이겨 일 장쯤 뒹굴어 주저 앉았다.
유기가 정신을 차리고 앞을 바라보니 몽천악은 아까처럼 그 자리에 상다
리를 하고 앉아서 자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유기는 보기에도 으스스 몸이 떨려 장검을 든 채로 얼떨떨한 얼굴이 되어
몽천악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땀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숨을 헐떡이면서,
"내가 이렇게 무력하게 자네를 피하게 하다니. 자넨 어떻게 나의 무공을
피해냈는가? 나를 반격한 그 무공은 무엇인가?"
"그것을 물을 때가 아니오. 당신의 상처는 이미 가중되어 있소. 이대로
내버려두면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
니 치료해 보십시오. 어쩌면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겁니다."
"으음, 분하다. 나는 내 칼이 이렇게 무기력해졌다는 것이 분할 뿐이다."
"아닙니다. 유선생의 절도는 과연 무섭습니다. 만일 내가 당신의 칼날에
조금이라도 상처를 입었다면 팔 하나쯤은 잘려 나갔을 겁니다.
사실은 나
는 이번에 달마강기신공 수법을 썼습니다. 달마강기신공 조차도 당신의
예리한 절도를 원만히 막을 수 없다니 나는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그러나 놀라는 사람은 오히려 유기였다.
"자네가 이미 달마강기신공을 연마했단 말인가? 참으로 대단한 젊은이일
세. 어쩐지 나의 칼이 쳐나갔을 때 속도가 줄어든다 느꼈지. 강기는 대단
한 힘을 가지고 있다. 소림의 고라신승의 달마강기신공이 자네에게 전수
되었다는 사실을 미쳐 몰랐었군."
그때였다. 몽천악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아, 그가 나타났습니다!"
위장
유기는 깜짝 놀라 앞을 바라보았다. 수십 장 밖에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
거리더니 비호 같이 달려와 묘지 위에 내려서는 자는 과연 신비스러운 청
의의 인이었다.
청의의 인은 몽천악과 독비절도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흐흐흐......"
간장을 쥐어뜯는 듯 소름이 쭉 끼치는 음산한 웃음이 두 사람의 귀를 때
렸다.
"흐흐흐...... 잔결서생, 나는 자네를 우습게 보고 있었는데, 이제 보니
그렇지도 않군. 자네는 정말 무림의 기재일세. 무림의 살인 청부업자조차
도 자낼 살해할 수 없다니 말일세, 하하하......"
몽천악은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귀하는 대체 누구십니까?"
그러나 청의의 인의 인피가면 위에 표정이 나타날 리 없었다. 청의의 인
은 아무런 감정도 나타내지 않는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
"자넨 내가 누구라고 생각되나?"
"흑마왕이 아니십니까?"
"흥! 자네는 무엇을 근거로 내가 흑마왕이라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지껄이
는가?"
몽천악은 찔끔하여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유기가 냉랭히 코웃음을 치며 끼어 들었다.
"솔직히 말해 당신이 흑마왕인지 아닌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흑마왕으
로 의심을 받는 사람 중의 하나임은 틀림없지 않소?"
"혐의를 받는 사람 중의 하나라고? 그렇다면 무림의 누가 또 흑마왕으로
혐의를 받고 있단 말이오?"
"핫핫핫...... 얼렁뚱땅 넘기려 하지 마시오! 누가 의심을 받는가는 누구
보다도 당신이 잘 알고 있을 것이오."
"흥! 그렇다면 당신은 내가 누구인지 빤히 알고 있다 그 말이로군."
"아마 십중팔구는 틀림없을 거요."
"그럼 말해 보시오, 내가 누군지."
유기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귀하는 바로 절진신의 윤천초요!"
몽천악은 깜짝 놀랐다.
'정진사태께서 나에게 준 글에 절진신의를 죽이라고 했는데 뜻밖에 여기
서 맞닥뜨리다니, 그렇다면 흑마왕이 바로 절진신의였단 말인가?'
이때, 청의의 인은 크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핫핫핫핫...... 상상력은 좋은데 정확하지 않아서 탈이군. 유기! 당신은
도대체 절진신의를 본 적이나 있으시오?"
"흐흥, 아무렴 생판 모르는 사람을 대겠소. 십팔년 전에 한 번 본 일이
있지."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도 그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단 말이오?"
"핫핫...... 나는 그가 재가되는 한이 있다해도 알아볼 수 있을 것이오."
"그래요? 그렇다면......"
청의의 인은 돌연 손을 내밀어 자기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세차
게 잡아 당겼다. 부드득하는 소리와 함께 청의의 인의 진면목이 몽천악과
유기 앞에 드러났다.
"아!"
"앗!"
몽천악은 탄성을 지르며 소리쳤다.
"귀하는 팔검비상 진삼청이 아니십니까?"
청의의 인은 몽천악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냉랭하게 유기를 향해,
"내가 절진신의 윤천초요, 아니오?"
청의의 인은 또 다시 인피가면을 썼다.
유기는 멍청히 그를 바라보다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내가 잘못 본 것 같소이다. 나는 아무 변명도 하지 않겠소."
청의의 인은 유기를 손가락질했다.
"유기! 만약 내가 당신을 흑마왕이라고 지적한다면 당신을 어떻게 변명하
겠소?"
"허허허...... 무슨 엉뚱한 말을 하는 거요? 당신이 흑마왕을 본 사람이
라면 결코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이오."
"어째서?"
"아니, 몰라서 묻소? 흑마왕이 나처럼 외팔이라고 생각하시오?"
청의의 인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유기를 쏘아보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몽천
악에게 말했다.
"나는 이미 내 진의를 노출시켰고 섭혼마녀도 회혼단을 먹여 간단히 처치
할 수 있으니 자네는 이제 그 귀곡록을 두말없이 내게 넘겨줄 수 있겠
지?"
그 말을 들은 몽천악은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아니 그렇다면 진삼청 노선배님께서는 그녀가 회혼단을 복용한 사실을
벌써부터 알고 계셨단 말씀입니까?"
"섭혼마녀는 정신을 상실하여 미라가 된지 오래네. 남의 임의적인 지휘구
사를 받는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 여자지. 지금 그녀는 깊은 잠에 빠져
어느 누구의 명에도 움직일 줄 모르니 분명히 회혼단을 복용하고 있는 것
일세."
"진삼청 노선배님, 저는 선배님에 대해서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도대체 선배님께서는 어떻게 섭혼마녀를 찾으셨습니까? 혹시
선배님께서는 무아진교의 제일총교주 휘하가 아니십니까?"
"자네는 또 엉뚱하게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 작정인가?"
"분명히 알고 싶습니다. 저로서야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자네는 반드시 제일총교주 휘하만이 섭혼마녀를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
하는가?"
"......?"
"섭혼마녀는 미라야. 구혼술을 아는 사람이면 모두 그녀를 지시할 수 있
어!"
그러나 몽천악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그래도 저는 노선배님의 행동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자네는 그것까지 알 필요 없네. 이것만 알면 그만이야. 섭혼마녀의 목숨
을 구하겠는가, 아니면 귀곡록을 내놓겠는가?"
청의의 인의 말투는 낮고 느꼈으나 무서운 위협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따위 위협에 말려들 몽천악은 아니었다. 아니 그럴수록 그의 용
기를 부채질하는 셈이었다.
몽천악은 단호히 잘라 거절했다.
"내 힘 다하는 데까지는 선배님 뜻대로 하실 수 없습니다. 나는 양자를
모두 보존하겠습니다."
청의의 인은 잠시 대답이 없었다. 밤 바람이 차갑게 스쳐갔다. 이윽고 청
의의 인은 여전히 낮고 느리게 위협적으로 내뱉었다.
"자네의 결심이 그렇다면 나는 나대로 힘을 쓸 수밖에 없네. 내가 독수를
쓴다고 해서 원망은 말게."
청의의 인은 즉시 자세를 취했다.
"잠깐!"
청의의 인은 멈칫했다.
"후배는 노선배님께 한 가지 더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슨 일인가? 빨리 말해 보게!"
"노선배님께서는 저를 적으로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친구로 생각하십니
까?"
"핫핫핫...... 순진한 녀석, 적인지 친구인지는 자네가 결정하기에 따른
다는 것을 모르는가? 귀곡록을 내놓으면 친구가 될 것이요, 나로 하여금
섭혼마녀의 목숨을 거두어 가게 한다면 적이 될 것일세."
몽천악은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조전신의 수고가 이렇게 허망하게 끝날 줄을 미처 몰랐습니다. 조전신이
당신을 다시 강호에 불러들인 것이 놀랍게도 호랑이를 집 안에 끌어들인
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솔직히 말해 선배님께 실망했습니다."
"흐흐흐...... 그것을 이제야 깨달았단 말이냐, 애송이 놈. 나는 쓸데없
는 이야기를 하고 있을 만큼 여유 있는 자가 아니다. 자 결정을 하게, 섭
혼마녀를 죽여도 좋은가?"
청의의 인은 오른손에 한 줄기 암경을 모아 땅 위에 쓰러져 잠에 빠져 있
는 섭혼마녀를 겨냥하는 것이었다. 청의의 인이 다시 소리쳤다.
"귀곡기록을 내놓게. 섭혼마녀뿐만 아니라 자네의 목숨도 온전치 못할 것
이네!"
몽천악은 깊은 곤혹에 빠졌다. 큰소리는 쳤으나 청의의 인의 예리한 장력
아래 섭혼마녀를 허망하게 죽일 수는 없었다.
울분이 끓어올라 온몸이 부르르 떨렸으나 그는 눌러 참으며,
"좋습니다. 귀곡록을 드리겠습니다."
마치 성난 표범이 하늘에 대고 포효하듯 몽천악은 고래고래 소리쳤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두십시오. 너는 반드시 이 원한을 갚을 것입니다.
귀곡록을 반드시 되찾고야 말 것입니다."
"앗핫핫핫...... 그거야 자네 뜻대로 하게, 핫핫핫......"
청의의 인의 통쾌한 웃음 소리는 밤 하늘을 타고 메아리가 되어 한없이
흘러갔다. 몽천악은 어쩔 수 없이 손을 품에 넣어 귀곡록을 꺼내려고 했
다.
바로 이 순간이었다.
"잠깐! 멈춰요!"
돌연 한 가닥 날카로운 고함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그는 팔검비상 진삼청이 아니에요!"
말소리가 떨어지자마자 한 줄기 돌풍이 불어오더니 하나의 날씬하고 교태
스러운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림자는 마치 날렵한 제비가 물을 차듯 날아오더니 그들 앞에 내려섰다.
향수 냄새가 물씬 풍겨와 그들의 코를 자극했다.
달빛아래 백옥처럼 흰 얼굴을 드러낸 묘령의 아가씨, 그녀는 다름 아닌
묘녀 묘가수였다.
몽천악은 묘가수의 더욱 아름다워진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낭자는 그가 팔검비상이 아니라는 무슨 뚜렷한 증거라도 가지고 계시
오?"
청의의 인은 묘가수의 난데없는 출현에 약간 당황하는 몸짓을 했다. 그러
나 정광이 쏟아지는 날카로운 눈으로 묘가수의 고운 얼굴을 쏘아보면서
냉소를 쳤다.
"네가 바로 묘산의 여우냐?"
"제 말이 틀렸단 말예요?"
"요, 방자한 것! 함부로 지껄이다가 큰코 다칠 줄 모르느냐?"
"호호호...... 그렇다면 진짜 팔검비상이 누구인지 직접 보셔야하겠다는
말씀이군요?"
그녀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아서였다.
휘익 불어오는 돌풍에 감싸여 묘지 위로 날아드는 한 검은 그림자가 있었
다.
사람들은 일제히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검은 수염의 선풍도골, 몽천악은 이 도사를 보자마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는 삼청관에서 보았던 팔검비상 진삼청, 확실히 그 사람이었는데, 청의
의 인이 보였던 그 얼굴과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닮은 얼굴이었다.
나타난 그림자는 팔짱을 끼고 당당히 버티고 서서 청의의 인을 향해 낭랑
히 소리쳤다.
"귀하는 도대체 누구시오? 누구신데 빈도의 속명을 빌어 내 행세를 하고
계시는 거요?"
"귀하야말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팔검비상 진삼청은 한번도 삼청보전
에 들어온 적이 없으니 나는 오히려 귀하가 왜 나의 이름을 가장하였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소이다."
이때, 몽천악이 기가 막히다는 듯 청의의 인을 쏘아보았다.
"허허, 보자하니 선배님은 정녕 모를 위인입니다. 진짜 진삼청께서 나타
나셨는데, 선배님은 그래도 변명을 늘어놓으십니까? 정말 우스울 지경이
오. 나는 이제 선배님을 믿지 않겠습니다. 다행히 내가 이미 진삼청 도장
님을 알고 있었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선배님의 술수에 넘어
갈 뻔 했습니다."
그러자 청의의 인은 어깨를 들썩거리며 몽천악을 노려보았다. 적지않게
노한 눈빛이었다. 그는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잔결서생, 자네가 언제 팔검비상 진삼청을 알았단 말인가?"
"바로 어제죠."
"어제라구? 어디서 보았는가?"
"그야 삼청관 안에서이죠."
청의의 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자네는 진삼청을 보기 전에도 그를 알고 있었는가?"
그러자 몽천악은 비웃음이 가득 담긴 얼굴을 하고 힐끗 상대를 노려보았
다.
"나를 유도심문하지 마십시오,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당신
이 남의 이름을 가장해서 악행을 저지르고 다니는 악인이라는 사실이 밝
혀진 이상, 당신과 이야기해 보았자 잔소리가 될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청의의 인의 눈빛에 살기가 나타났다. 그는 벽력과 같은 고
함을 질렀다.
"젊은 놈이 진상을 끝까지 캐보지도 않고 함부로 남을 의심하다니! 그런
식으로 세상을 살다가 큰 봉변을 당하기 알맞은 놈이로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신이 인피가면을 쓰고 다니는 의도가 무엇이오?"
"당신의 그 인피가면은 타인으로 하여금 의심을 하게끔 되어 있소!"
"좋다! 진삼청의 유일한 표적은 팔검비상이니 그것으로 진부를 판별한다
면 두말하지 못할 것이다. 잔결서생! 소원이라면 팔검비상을 전학시켜 주
겠다!"
몽천악은 그래도 싸늘하게 미소지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 소매속에 있는 여덟 자루의 비검이 일단 쳐나가기만 한다면 사람의
머리가 땅위에 떨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비검을 피해낸 사람
이 아직까지 있는 줄 아는가?"
"그런 위협에 제가 고개를 숙일 줄 아십니까? 목숨을 아깝게 여긴다면 애
초부터 그런 대답은 안 드렸습니다."
청의의 인은 분노에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는 즉시 자세를 취하며 서
서히 팔을 치켜들었다.
"잠깐!"
이때, 돌연 독비절도 유기가 외쳤다.
"몽소협, 잠깐만 참게."
몽천악은 여전히 땅 위에 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청의의 인의 공격을 맞이
하려다가 고개를 들었다.
"유선배님, 무슨 일이십니까?"
"몽소협, 그들 두 사람 중 팔검비상 진삼청이 누군지 우리들과 무슨 관계
가 있는가? 진짜 가짜를 판별하는 일은 그들 자신의 문제이지 자네가 그
렇게 나서는 것도 우스운 일일세."
이 말을 들은 몽천악은 움찔했다. 그리고 낯이 벌겋게 물들었다.
'유기의 말이 옳다. 내가 어째서 이렇게 멍청할까? 내가 한가롭게 남의
일에 참견할 입장인가?'
머뭇거리는 몽천악의 모습을 본 청의의 인은 빙글빙글 웃으면서 말했다.
"잔결서생, 자네 이번 도전을 거두어들일 수 있겠는가?"
몽천악은 쑥스럽게 웃으며 즉시 자신의 고집을 꺾었다.
"저는 거두어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자 묘가수가 불쾌한 표정으로 앙칼지게 소리쳤다.
"흥! 무슨 남자가 그리 골기가 없담! 일단 말을 했으면 행동에 옮기는 남
자가 아니었군요. 정말 사람을 잘못 보았어요."
몽천악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벌겋게 얼굴을 상기시켰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 삼청도장이 화가 치민 얼굴로 몽천악을 쏘아보면서 묘가수에게 말
했다.
"묘낭자, 낭자는 차라리 그의 귀곡록을 빼앗으시오. 잔결서생은 호걸인줄
알았더니 믿을 만한 사람이 못된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소."
그러자 몽천악은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묘낭자! 내 말을 잘 들으시오. 낭자가 그렇게 나온다면 나는 낭자 뜻대
로 맡기겠소, 내가 당신에게 귀곡록을 받으러 간다고 응낙한 것은 당신이
전날 도와준 은혜를 보답하기 위한 것이었소. 사실 나는 그 동안 당신에
게 진 빚 때문에 마음에 부담이 있었는데 잘되었소. 자, 가져가시오!"
몽천악은 왼손으로 품에서 귀곡록을 꺼내어 묘가수에게 내밀었다.
녹건(綠巾)으로 곱게 싼 귀곡록을 본 묘가수는 잠시 머뭇거렸다.
삼정도장이 소리쳤다.
"묘낭자, 무엇을 머뭇거리시오! 어서 그것을 받아요?"
"......"
이때, 청의의 인이 휘익 신형을 날리더니 몽천악 앞으로 나아가 가로막았
다. 그리고는 벽력과 같은 고함을 지르는 것이었다.
"누가 감히 이 귀곡록을 가져갈 수 있단 말인가? 만약 누구라도 이쪽으로
다가온다면 그보다 먼저 나의 소매 속에 있는 비검의 아픈 맛을 보아야
할 것이다!"
마치 그것이 자기의 생명이라도 된 듯 기세를 올리는 청의의 인의 거동에
아무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밤바람이 싸늘하게 피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몽천악은 잠시 멍청히 섰다가 더듬거리는 말로,
"귀하의 소매 안에는...... 정말로 비검이 숨겨져......"
청의의 인이 몽천악을 획 돌아보았다. 그리고 굳어진 음성으로 외쳤다.
"자네는 아직도 내가 팔검비상이 아니라고 믿고 있는가?"
몽천악은 쑥스럽게 웃었다. 그러나 솔직담백하게,
"죄송합니다. 그러나 강호무림에는 온갖 계략과 음모가 사람을 해치고 있
으니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을 이해하여 주십시오."
"좋다. 이해해 주겠다. 그렇다면 노부도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하여 진실을
폭로하는 수밖에 없다. 당신들에게 알려주겠는데 저 도사로 가장하고 있
는 자가 바로 흑마왕이오!"
"무엇?"
"아!"
유기나 몽천악은 그 말에 깜짝 놀랐다. 도무지 이렇게 어지러이 눈 앞이
변해가니 누가 진실이고 누가 가짜인지 구분하기가 더욱 어려워지고 말았
다.
청의의 인의 말을 들을 삼청도장은 돌연 눈을 크게 뜨고 멍청히 앞을 바
라보더니 이윽고 기가 막히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흥, 이제는 별 모함을 다 받겠군. 빈도가 강호무림에 수십년 동안 은거
해 있다가 오늘에서야 나타났는데 나오자마자 봉변을 당할 줄을 미처 몰
랐소. 나는 별로 뛰어난 인물이라고는 스스로 생각지 않는데 나의 속명
을 사칭하며 다니는 자가 있다니 봉변 중에도 영광이라 할까? 핫핫핫....
.."
청의의 인은 삼청도장의 웃음 소리가 끝나기를 묵묵히 기다리고 있다가
다시 주위가 조용해지자 간장을 에이는 듯한 음산하고도 위협적인 목소리
로 낮게 쏘아 붙였다.
"자, 다 웃었소? 그러나 그 따위 여유 있는 웃음으로 이 장면을 모면할
수 있다면 오해지, 귀하가 팔검비상 진삼청이라고 자처하는 마당이라면
당신은 비검절기를 한 번 발휘해 보실 수 있으시겠지?"
그러자 삼청도장은 아무 거리낌없이,
"그거야 당연한 일이 아닌가? 당신이야말로 비검절기를 발휘 할 수 있는
지 의심스럽소!"
두 사람은 즉시 결투의 자세를 취하며 일정한 간격을 유지했다.
몽천악, 유기 등은 이 싸움의 승부가 곧 진삼청이라는 인물의 전부를 가
리는 것이므로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었다.
청의의 인이 소리쳤다.
"진삼청의 비검절기는 묘절 천하이므로 설마 당신이 이 절학을 배웠으리
라고는 믿지 않소!"
"믿건 안 믿건 한 번 출수하면 그만 아니오. 자, 공격하시오!"
쌍방은 서로 노려보면서 서서히 돌기 시작했다.
"야하!"
청의의 인이 왼손 옷소매를 가볍게 들썩였다.
휘-익!
한 줄기 백광이 번개처럼 무지개를 그리며 상대방에게 격출 되었다.
찰나, 삼청도장은 번쩍 뒤로 물러나가는가 싶더니 허공에서 그의 소매가
한 번 휘둘러졌다.
"휘-익!" 그러자 역시 한 줄기 흰 백광이 번개처럼 무지개를 그리며 격출
되는 것이 아닌가?"
"쨍!"
"쨍강!" 쇠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번갯불이 사방으로 퉁겼다.
이어 두 줄기 백광은 허공에서 원을 한바퀴 그리더니 놀랍게도 각자의 손
안으로 날아드는 것이었다.
실로 절기절묘한 초식이 아닐 수 없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군호들은
등에서 식은 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몽천악은 청의의 인의 손 안으로 날아든 것이 한 자루의 세치 정도의 소
검인 것을 똑똑히 목격했다. 뿐만 아니라 삼 장 정도 떨어진 삼청도장의
손 안에 날아든 것도 거의 비슷한 소검이었다.
몽천악은 이들의 일 초식으로 진부를 판별할 수가 없었다.
청의의 인이 의외라는 몸짓을 하며,
"귀하는 절묘한 꾀를 가지셨군요. 나의 비검을 피해 낼 줄은 미처 몰랐
소."
삼청도장도 지지 않고 껄껄 웃으며 맞장구쳤다.
"허허허...... 나 또한 당신이 비검절기를 알고 있을 줄 미쳐 생각지 못
했소."
"귀하는 나머지 칠 검을 사용해 볼 생각이 있으시오?"
"당신에게 또 몇 자루의 비검이 있는 줄은 모르지만 더 겨루고 싶거든 사
용해 보시오!"
그러자 청의의 인이 상대방을 유도했다.
"너무 거리가 머니 일 장 앞으로 다가서 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승부가
늦어질 것 같소."
그러나 삼청도장은 쉽사리 말려들지 않았다.
"다가서는 것이야 귀하가 다가서도 되는 것. 자아, 가까이 오시오!"
"흥! 그것도 괜찮다!"
청의의 인의 일 장 앞으로 솟구쳐 나갔다.
"받아라!"
청의의 인이 움직이자마자 삼청도장은 즉시 쌍장을 앞으로 격출 했다.
그러나 청의의 인은 사실상 앞으로 솟구쳐간 것이 아니었다. 옆으로 몸을
움직이는 척하면서 재빨리 몸을 비스듬히 낮추어 종잇장처럼 상대방의 발
끝으로 쌍장을 쳐냈다.
"엇!"
상청도장은 즉시 허공으로 솟구치자 청의의 인은 한마리 독수리처럼 날렵
하게 상대방을 추격해 올라갔다.
휙! 휘-익!
한 줄기 흰빛이 마치 가죽띠처럼 삼청도장을 감싸고 말았다.
"으하야!"
삼청도장은 위협을 느끼자 전력을 다하여 쌍장을 마구 휘둘렀다.
"쨍! 쨍강! 쨍!" 무딘 쇳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번갯불이 퉁겼다.
"야하!"
"쨍!"
"쨍! 쨍강!"
허공을 종횡무진으로 날아다니며 두 사람은 매와 독수리처럼 칼을 휘둘렀
다.
순간, 두 사람은 허공에서 좌우로 갈라졌다.
"야하!"
삼청도장이 사력을 다하여 격한 장풍을 격출 했다.
"우르릉!"
마치 커다란 바위가 굴러가듯 장풍이 크게 소용돌이치며 청의의 인을 향
해 날아갔다.
"으얏!"
청의의 인 역시 벽력과 같은 기합 소리를 냈다.
"우르릉!"
파도가 밀려나가는 듯한 돌풍이 굴러오는 장풍을 맞아갔다.
"펑!" 폭풍우가 물기둥처럼 하늘로 치솟아 오르며 두 사람은 그속에 완전
히 가려져 버렸다.
"받아라!"
별안간 누군가의 고함 소리가 들리자.
"억!"
하는 비명 소리와 함께 하나의 그림자가 힘없이 땅으로 굴러 떨어졌다.
나무를 뒤흔들던 폭풍우가 가라앉고 당당히 버티고 있는 그림자와 땅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그림자의 모습이 서서히 나타났다.
"아!"
몽천악은 깜짝 놀랐다. 땅에 떨어져 꿈틀거리고 있는 사람은 바로 삼청도
장이었다.
상청도장의 왼쪽 어깨에는 한 자루의 소검이 꽂혀 있었다. 삼청도장은 이
윽고 비틀거리고 일어났다.
"으으으......"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토해내던 그는 추악한 얼굴로 청의의 인을 쏘아
보면서 비틀비틀 몇 걸음 앞으로 걸어오더니 어깨에 꽂혀 있는 소검을 확
뽑아들었다. 소검에서는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청의의 인의 인피가면에는 한 가닥 표정도 나타나 있지 않았다. 그는 얼
음처럼 싸늘하게 외쳤다.
"흑마왕! 너의 비검절기가 나보다 뒤떨어져 있는 것을 이제야 알겠느냐?
너는 조금 전에 고루장을 쳐내 나를 죽일 기회가 있었거늘 어째서 출수하
지 않았느냐?"
삼청도사는 고통에 새파래진 얼굴을 더욱 찡그리며,
"흥,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소."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느냐? 너는 흑마왕이지 팔검비상이 아니라는 사
실을 스스로 증명하라는 말이다!"
그러자 삼청도장은 입 속에서 음산한 웃음 소리를 냈다.
"흠흠...... 만약 내가 정말 흑마왕이라면 이 대결에서 암수를 썼을 것이
고 그렇게 되면, 당신은 삼 일을 살아 넘길 수 없었을 거요."
"누가 할 소리냐? 오늘 밤 네가 귀곡록을 빼앗으려면 우선 흑마왕이라는
사실부터 밝혀라! 그리하여 정정당당히 겨루어 이기는 자가 귀곡록을 차
지하자!"
이때였다.
갑자기 묘가수가 번쩍 움직이더니 곧장 몽천악의 등 뒤로 달려가 귀곡록
을 낚아채갔다.
청의의 인은 선뜻 놀라 소리쳤다.
"잔결서생! 귀곡록을 빼앗기지 말게!"
이어 그가 소매를 획 내두르자 한 개의 소검이 곧장 묘가수의 팔목을 향
해 격출되었다.
꿈에서 깨어나니
몽천악은 귀곡록을 묘가수에게 넘겨주기로 벌써부터 작정하고 있었기 때
문에 묘가수의 옥장(玉掌)이 뻗쳐오자 피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손을 내밀어 재빨리 묘가수의 손에 귀곡록을 넘겨주었다.
"휘-익!"
소검이 묘가수의 귀여운 팔목을 꿰뚫을 찰나,
"얍!"
몽천악은 재빨리 식지 중지로 소검을 낚아채 버렸다.
청의의 인은 아연한 몸짓을 하더니,
"에에잇, 발칙한!"
휙 몸을 솟구쳐 곧장 묘가수를 덮쳐갔다.
"오호호호......"
묘가수는 요염하게 웃으며 이미 삼 장 밖으로 빠져나가 있었다.
"받아라!"
청의의 인이 지풍을 몇 줄기 격출했다.
"호호호......"
그러나 그녀의 솜씨는 민첩절쾌하여 아무리 청의의 인의 지풍이 빠르고
예리하였으나 모두 빗나가고 말았다.
"어디로 가느냐?"
청의의 인은 계속 그녀를 추격했다.
몽천악은 묘가수가 청의의 인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
기 때문에 급히 소리쳤다.
"귀하! 저의 소검을 받으십시오!"
외침과 함께 몽천악의 두 손가락에 끼어 있던 소검 한 개가 번개처럼 청
의의 인의 등 뒤를 향해 격출 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청의의 인은 즉시 신형을 멈추고 날아오는 몽천악의
소검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엽!"
"탁!" 소검을 가볍게 받아 쥔 청의의 인은 무서운 눈초리로 몽천악을 쏘
아보았다.
"잔결서생! 자네가 이렇게 나올 줄을 미처 몰랐네. 노부는 자네의 사지를
갈기갈기 찢을 날이 있을 것일세!"
그는 숨을 씩씩 몰아쉬다가 획 몸을 돌려 질풍처럼 묘가수를 쫓아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묘가수와 청의의 인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또한 수장 밖에서 피가 흐르는 어깨를 감싸쥔 삼청도장도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유기와 몽천악을 쏘아보다가 이내 몸을 돌려 사라져 가고 말았다.
찰나의 순간에 묘지에 다시 무거운 정적과 괴괴한 귀기만이 가득 잠들고
있었다.
"몽소협!"
이윽고 유기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몽소협, 자제는 누가 진짜 팔검비상이라는 생각이 드는가?"
몽천악은 낭랑한 음성을 대답했다.
"상황을 보면 잘 구분이 안되는 것 같지만 제가 애초부터 생각했던 대로
그 도장이 진짜 팔검비상 삼청일 것입니다."
유기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천만에, 자네는 잘못 보았네. 그 청의의 인이야말로 진짜 팔검비상일세."
"저는 삼청관 안에서 진삼청 노선배님을 뵌 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아무
리 얼굴이 비슷하고 검법이 비슷하다 하더라도 제가 그만한 것쯤 구분하
지 못하겠습니까?"
"자네는 너무 고집이 세군. 나타난 결과를 보면 모르겠나? 그 도인이 정
말로 삼청이라면 그의 비검철기가 청의의 인에게 당할 리 만무하네. 우리
는 도장의 비검철기가 청의의 인의 것보다는 약간 뒤졌다는 것을 분명히
느꼈지 않은가?"
그러나 몽천악은 단호히 그의 말을 부정했다.
"유선배님께서는 팔검비상의 얼굴을 전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그러자 유기가 무릎을 탁 쳤다.
"아, 그렇군. 사실 진삼청을 모르고 있었네. 온 천하에 진삼청을 알고 있
는 사람은 오직 조전신 한 사람 뿐일세. 그러니까 그 사람이라면 누가 진
짜인지 단번에 가려낼 수 있을 것일세."
몽천악의 얼굴도 밝아졌다.
"그렇겠군요, 그렇다면 우리는 조방주에게 가서 이 수수께끼를 풀어 달라
고 합시다."
"몽소협은 조전신이 어디에 있는지 혹시 알고 있는가?"
몽천악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예, 알고 있고 말고요. 조방주는 낙양성안의 만흥객점에 있습니다."
이때, 유기는 돌연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밑을 내려다보고 잠시
생각하더니 물었다.
"몽소협, 한 가지 알고 싶은 것이 있는데 대답해 주겠나?"
"제가 아는 데까지는 말씀드리겠습니다."
"조전신이 혹시 자네에게 내 말을 하지 않던가?"
몽천악은 잠시 망설였다.
'조전신이 그를 의심했다는 말을 솔직히 이야기한다면 그가 어떻게 생각
할까......'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한마디로 일축했다.
"그것을 쓸 데 없는 우려에 지나지 않으십니다. 그가 유선배님을 대하는
데 그런 적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유선배님이 그를 솔직하게 대하
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몽천악은 아무 말도 못하는 유기를 그윽이 바라보다가 한마디 충고를 했
다.
"어찌하여 친분이 두터운 사이에 서로 의심하고 지낼 수 있단 말입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사귀지 않는 것이 더 편안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유기는 냉랭히 코웃음을 쳤다.
"흥! 몽소협, 자네는 아직도 어리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소리를 하는 것
일세, 지금 무림에서 어느 그 누구가 형, 아우 하는 사람이 있고 수족과
같이 행동을 같이하며 한날 한시에 죽기를 맹세하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오히려 서로 믿지 못하고 모함을 할 뿐 아니라 상대방을 제거하여 자기
혼자 득세하려는 무서운 풍조가 만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직도 모르고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뚜렷한 이유가 있어서인가요, 혹은 세상 풍조가 그냥 그렇다는
이야기입니까?"
"거기에는 이유가 있네, 사실 불신 풍조가 만연하는 이유는 그 수수께끼
때문이지."
"어떤 수수께끼 때문입니까?"
유기는 처량히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에게 쉽사리 가르쳐 줄 수는 없는 수수께끼일세. 거기에는 많은 무
림 인물들의 명예가 관련되어 있네. 나뿐만 아니라 누구에게 물어본다 할
지라도 가르쳐 주는 사람은 없을 것일세.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모든 무림 중인들이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것
일세."
몽천악으로서는 새로운 사실이었다. 그는 속으로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몽천악은 친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어떤 방법으로 그 수수께끼를 풀려 하고 있단 말입니까?"
그러자 유기는 뜻밖의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의외로 간단하지. 단지 진짜 흑마왕을 찾기만 하면 되는 것일세.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쉬운 것 같아도 그것이 그렇게 용이하게 풀릴 것
같지는 않네."
몽천악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렇다면 선배님께서는 아직 흑마왕을 찾지 못하셨단 말입니까?"
"......"
"청의의 인과 진삼청 둘 중에 누가 진짜인가만을 밝히면 되지 않을까요?"
"핫핫......" 그렇게 일은 단순하지만은 않네. 의심스러운 사람은 두 사
람뿐만 아니라 더 있는 것일세, 물론 두 사람 중 한 사람일지도 모르지만
두 사람 다 아닐 수도 있는 것일세. 사실은 나도 의심스러운 사람들을 모
두 조사하고 있는 중일세."
몽천악은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잠시 후 번쩍 고개를 치
켜들며,
"선배님께서는 의심스러운 사람들을 제게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글쎄......"
"말씀해 주십시오. 혹시 제가 도움이 되어 드릴지 누가 압니까? 제가 알
아서 악영향을 끼치지 않는 한 말씀입니다."
그러자 유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자네가 알아서 악영향을 끼칠 리는 없네. 좋아 말해주지."
"도대체 의심을 받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됩니까?"
"죽은 사람, 살아 있는 사람을 모두 포함하여 모두 아홉 명이지."
몽천악은 뜻밖으로 생각되었다.
'아니, 삼청도장과 조전신은 네 명이 의심스럽다고 말을 했었는데 유기는
아홉 명이라니 알 수 없구나.'
"그 사람들은 누구누군가요?"
유기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작고한 사람들은 셋이 있는데...... 소림신승 고라화상과 철장건곤권 호
창부 그리고 밀종문의 문주 귀곡선생일세."
몽천악은 세 사람의 이름을 듣자 안색을 일변시켰다. 그는 즉시 냉랭하게
쏘아 붙였다.
"선배님께서는 무슨 근거로 그분들을 의심하십니까?"
"그렇게 화부터 내지 말게. 물론 그들을 의심하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
가 있기 때문일세. 소림신승과 호창부가 자네의 선사라는 사실을 나는 알
고 있네. 그러면서도 서슴없이 말한 것은 결코 허무 맹랑하게 모함코자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자네는 이해해야 할 것일세."
"그렇다면, 그 증거될 만한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나 유기는 쓴 웃음만 지을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왜 아무 말도 못하십니까? 그분들을 의심할만한 증거가 있다면 떳떳이
말씀해 보십시오!"
"허허...... 곤란하군. 만약 그 증거를 자세하게 설명한다면 결국 나는
그들의 명예를 더욱 더럽히는 입장이 되고 말 것이니......"
"그럼 말씀하실 수 없으시다는 뜻인 가요?"
"......"
"흥,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의심만 하시고 계시다 그런 말씀이시군
요. 설사 선배님이 그럴만한 이유로 의심하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말씀해
주시지 않는 이상 저는 절대도 믿지 않겠습니다. 오히려 나로 하여금 화
를 내게 해서 내게서 무슨 단서를 잡을까 하는 간교한 술책을 쓰고 있다
고 저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자 유기는 얼굴을 굳히며 약간 노기 띤 음성으로 쏘아붙였다.
"몽소협, 말이라고 함부로 하면 되는 줄 아는가? 젊은 혈기를 내가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방자한 꼴이 되고 마는 것일세!"
"고라화상과 호맹주님은 이미 돌아가셔서 말씀을 하지 못하는 분들이지만
그분들은 생전에 청렴한 품성을 지니고 있던 분들입니다. 남이 헐뜯을 그
런 분들은 결코 아닙니다. 유선배님은 어디서 뜬소문을 듣고 하시는 말씀
같은데 제가 직접 그분들을 대한 이상 제 말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자네가 정 그렇게 흥분한다면 하는 수 없군. 좋네, 말해 주지 오늘날 육
십 무림 인물들이 온통 불안하고 피비린내 나는 살기를 지니고 다니는 이
유가 무엇인지 한 번쯤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유선배님께서 상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모든 화근의 첫째 원인은 한 여인 때문일세."
"여인이라고요?"
이것은 정말 날벼락 같은 사실이었다. 한 여인 때문에 이렇게 온 무림이
술렁거리고 있다니!
"도대체 그 여인이 누굽니까?"
몽천악은 갑자기 호기심이 치밀어 올랐다.
"아마 자네도 잘 알고 있을 걸세. 그 여자는 다름 아닌, 아직도 속세에 살
고 있는 무아진교의 제일총교주일세."
"그래요?"
몽천악은 고개를 뒤로 뺄 정도로 크게 놀랐다.
"그녀가 설마......"
이때, 몽천악의 머리속으로 번개처럼 스쳐 가는 것이 있었다. 이어 머리속
이 조금은 맑아지는 듯했다. 만일 유기가 지금 말한 것이 전부 사실이라
면 머지않아 많은 무림 고수들의 명예가 낙엽처럼 땅에 떨어질 것은 확실
한 사실이었다.
몽천악은 고개를 숙이고 점점 복잡하게 얽혀 가는 사태를 천천히 정리해
보았다. 그러나 실마리는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유기는 몽천악의 그런 심사를 환히 들여다보는 듯한 눈초리로 그윽이 그
를 쏘아보다가,
"소림신승, 호창부 그리고 귀곡선생등 세 사람은 생전에 그 여자와 교분
이 있었고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지, 이제야 좀 깨닫겠는가? 이래도 나
의 말이 터무니없다고 공박할텐가?"
몽천악은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
다.
무아진교 제일총교주라는 여자는 도대체 어떤 매력을 지니고 있는 여자일
까? 그녀의 무엇 때문에 무림 고수들이 혼돈 속에서 서로 살기의 눈초리
로 겨루고 있단 말인가?
요부일까? 그 요성(妖性) 때문에 사나이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일
까?
아니면 그보다 더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원인이 있단 말인가? 소림신승이
나 호창부 그리고 귀곡선생의 인품을 봐서 여자의 요성에 쉽사리 말려들
위인들 같지는 않은데.......
모든 것은 불확실했다.
엉키는 모든 실마리가 그러했다. 차라리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모
든 것을 눈으로 직접 목격하기 전에는......
몽천악이 한참 동안을 묵묵히 앉아 있자 유기 쪽에서 말을 꺼냈다.
"자네는 아홉 명 중 나머지 인물들이 누구인지 알고 싶지 않은가?"
"......"
"여섯 명인데 그 중 두 사람은 지금까지 행방불명일세. 그 생사조차 알지
못하겠는걸."
"그 두사람은 누구입니까?"
"무림정려 송연(宋淵)부부일세."
몽천악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저는 금시초문입니다."
"자네는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그것은 송연부부가 원래 강호무림을 별로
돌아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소문이 나지 않았을 뿐이지. 그러나 수십년 전
강호무림 중에서 그들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지. 자네 혹시 지
난날 열 명의 강한 고수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분들이 그 열 명 안에 들었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지. 그 열 명의 이름을 들으면 우는 아기도 조용해진다는 말이 나돌
만큼 당당한 위세를 가지고들 있었지. 송연부부도 그들 열 사람 중에 끼
었었네."
"그 열명의 고수의 순위는 누가 말한 것입니까?"
"그야 한 사람의 의견이고 비록 공인된 순서 배열은 아니었지만 그 열거
를 한 사람은 바로 마검신군 조전신이었고 그가 지난날 검 한자루를 의지
하고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경험으로 알아내 것일세."
몽천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조전신이 열거한 열 사람의 고명은 어떻게 됩니까?"
"바로 밀종문의 귀곡선생, 총호법 옥안서생 용오운, 소림신승 고라화상,
철장건곤권 호창부, 송연부부, 절진신의 윤천초, 팔검비상 진삼청, 강남
제일 미인 후난향 그리고 나 유기 모두 열 사람일세."
이때, 몽천악이 "아!" 하고 탄성을 질렀다. 그는 고개를 쑥 내밀며,
"강남 제일 미인 후난향이라면 혹시 저의 선사 호창부의 누님이 아니십니
까?"
유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지, 후난향은 호창부와 같은 사문일세."
"유선배님께서는 혹시 후난향의 행방을 아시고 계십니까?"
"그것은 왜 묻는가?"
"제가 알아서 안된다는 말씀이십니까?"
독비절도 유기는 이 말을 듣자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알아서 안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녀의 행방은 물론 똑똑히 알고 있네. 그러나 나는 그녀에게 약속을 한
적이 있지. 그녀에 관한 일을 다른 사람에게 절대로 털어놓지 않겠다고
말이야. 그러니 내가 대답할 수 없음을 몽소협은 이해해 주게."
몽천악은 유기의 표정을 보고 안색이 돌변했다. 그리고 더듬거리며 외치
는 것이었다.
"알았습니다...... 그녀가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이때, 유기는 부산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몽소협, 물을 말이 또 있나? 없으면 나는 이만 작별을 고해야겠네."
몽천악은 다급히 간청했다.
"선배님, 흑마왕으로 의심하고 있는 나머지 네 사람을 말씀해 주십시오."
"팔검비상 진삼청, 마검신군 조전신, 절신의 윤천초 그리고 옥안서생 용오
운일세."
"선배님 의심스러운 사람들 중에 어느 분을 가장 의심스럽게 생각하고 계
십니까?"
유기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누구를 꼬집어 말할 수 없을 만큼 서로 대등한 의심을 받고 흑마왕을 찾
고 있는 사람들일세."
"무아진교 제일총교주는 흑마왕이 누군지 모를까요? 당신네들은 어째서
그녀에게 묻지 않습니까?"
유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도 사실은 누가 흑마왕인지 모르고 있네."
"사실입니까?"
"왜, 또 내가 거짓말을 한 것처럼 생각이 드는가? 살인 청부업자라는 잔
인한 직업을 가진 사람은 믿을 수 없다는 말이지?"
몽천악은 속으로 움찔했다.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누구든지 그 직업에 대해 듣는 사람이라면 놀라
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제가 알고 싶은 것은 어떤 사람이 유선
배님을 초빙하여 흑마왕을 죽이도록 청부했는지 그걸 알고 싶을 따름입니
다."
유기는 엷은 미소를 짓더니 낮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바로 무아진교의 제일총교주일세, 이제 시원한가?"
"무엇이라고요?"
몽천악은 크게 놀랐다. 그는 고개를 내두르며,
"유선배님께서 오늘 밤 제게 많은 도움을 줄 이야기들을 하셨는데 저는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천하 무림을 휩쓸고 있는 이때, 소용돌이는 원래가 너무 복잡하고
이해하기 힘들게 엉켜 있지. 누구든지 이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든다면 자
기도 모르게 폭풍에 휩쓸려 다니는 괴뢰의 꼴이 되고 마는 것일세, 그런
데......"
이때였다. 유기는 돌연 말을 뚝 그쳤다. 사방을 돌아보는 그의 눈빛에는
공포의 빛이 역력히 나타났다.
그는 낮게 말했다.
"몽소협, 오늘 우리는 일단 여기에서 말을 끝맺도록 하세. 그럼 나중에
만나세."
유기는 번쩍 신형을 움직이더니 비호처럼 어둠속으로 사라져 갔다.
"잠깐!"
몽천악이 팔을 내밀어 그를 저지하려고 하였으나 그때는 이미 그의 모습
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알고 싶은 것이 많은데 왜 갑자기 그런 표정을 하고 사라져 갔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세찬 바람이 묘지 위로 음산하게 불어왔고, 나무를 스쳐 가는 소리는 마
치 귀신의 신음 소리 같았다.
몽천악은 유기가 무슨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끼고 도망쳐 간 것이 아닌가
하여 주위를 살펴보았다. 달빛 아래 모든 물체는 희미하게 드러나 처량하
고도 음산한 고요가 흉칙하게 기어다니고 있었다.
몽천악은 은근히 두려워졌다. 그는 땅에 쓰러져 달콤한 잠에 빠져 있는
섭혼마녀 대군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세상 모든 것을 잊은 듯한
편안한 얼굴이었다.
몽천악은 서서히 일어났다. 그리고 가벼운 걸음걸이로 섭혼마녀 곁으로
다가가 처량히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의 곁에 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섭혼마녀는 회혼단을 복용하기는 했지만 그녀가 반드시 깨어나리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힘으로 어쩔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연거푸 한숨을 내쉬고 밤 하늘의 달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들기 시
작했다.
가장 뚜렷하게 떠오르는 의심은 역시 무아진교 제일총교주가 누구일까 하
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제일총교주는 다름 아닌 강남 제일
미녀 후난향이라는 사실을.
그러나 몽천악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 강호무림을 들끓게 하는 원흉
괴수의 정체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어쩌면 그들이 찾는 흑마왕이 그 괴수가 아닐는지도 모른다. 혹시 후난향
일지도 모른다.
흑마왕이라는 자는 도대체 누구일까?
이때였다.
"으음...... 음......."
신음 소리가 몽천악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섭혼마녀의 살포시 감겼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고 몸을 꿈틀거렸
다.
"대군!"
이윽고 속눈썹이 움직이더니 그녀의 아름다운 두 눈동자가 나타났다.
"대군, 나요. 정신이 드오?"
섭혼마녀는 눈을 꿈벅이며 몽천악을 몽롱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는 일어나려는 몸짓을 했다.
몽천악은 그녀를 부축하여 일으켜 앉혔다.
섭혼마녀는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히고 앉아 사방을 둘러보더니 몽천악의
얼굴 위에 눈길을 멈추었다.
"대군, 드디어 정신을 회복했군. 나요, 날 알아보겠소?"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녀의 얼굴에는 딱딱한 나무조각처럼 표정 하나 나타
나지 않았다. 그저 두 눈만 꿈벅이고 있을 뿐 마치 바보의 얼굴과 같았다.
'이런! 아직 정신이 회복되지 않은 모양이구나. 하기야 일시에 정신이 들
리는 만무하지.'
몽천악은 맥이 탁 풀려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돌아앉아 무릎에 얼굴
을 괴고 어둠을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돌연 그의 어깨에 와 닿는 것이 있었다. 섭혼마녀가
그의 어깨를 흔들고 있는 것이다.
몽천악은 뒤돌아 앉으며,
"이제는 정신이 드오? 나요 몽천악이요!"
그러자 그녀는 드디어 첫마디를 토해냈다.
"제가 어째서 이런 곳에 있나요? 여긴 어디지요? 그리고 당신이 나를 구
했나요?"
"대군! 당신은 정말 정신이 들었군. 반갑소. 당신이 이렇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섭혼마녀의 어깨를 거머잡았다.
"어머나, 왜 이러실까. 이거 놓으세요, 점잖지 못하게."
그녀의 거부에 몽천악은 얼굴을 벌겋게 붉히면서도 의아하지 않을 수 없
었다. 그녀는 마치 생판 모르는 타인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대군, 나를 모르겠소?"
"나는 당신을 알지 못합니다."
몽천악은 섬뜩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일순간 몽천악은 번쩍 고개를 쳐들며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그렇군, 당신은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오. 그렇지만 당
신은 고봉이라는 이름은 알고 있을 것이오."
몽천악은 환희에 감싸였다. 그야말로 섭혼마녀는 이제 정신을 차린 것이
기 때문이었다.
천하 일색 때문에
몽천악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한 개의 무덤 앞으로 걸어가 조금 전 청
의의 인에게 격락된 벽혈검을 집어 가지고 돌아왔다.
"대군, 당신은 이 검을 알아보겠소?"
삼년 육 개월의 시간은 결코 짧을 세월은 아니다. 더군다나 이성을 완전
히 상실하고, 꼭두각시 노릇을 했다면 그 사람으로서는 삼년이라는 세월
을 보낸 것보다 훨씬 길 것이다.
대군은 삼년 전 자기가 제일총교주의 수중에 들어간 것만을 기억하고 있
을 뿐 지금까지의 행각에 대해서는 전혀 기억하고 있지를 못했다.
그녀는 물론 벽혈검을 모르고 있을 리 없었다. 이 검은 그녀와 정진시태
가 일년이라는 긴 시간과 많은 약물을 허비하여 만들어 낸 것이다.
대군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 검이 어찌하여 이 외팔의 청년 수중에
들어갔다는 말인가.
대군은 눈썹을 가볍게 찡그렸으며, 암암리에 한 줄기 진력을 모아 냉랭히
소리쳤다.
"이것은 벽혈검인데, 당신은 어디서 이것을 얻으셨나요?"
몽천악은 그녀가 검 이름을 똑똑히 말해 내는 것을 듣자 더욱 기뻐하며,
"대군, 내가 고봉이요. 모르겠소?"
그러자 대륙의 뇌리 속에 무엇인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의 그림자,
그의 음성, 모습 그러나 대군의 기억에 의하면 고봉은 이미 죽은 사람이
었다. 더군다나 지금 눈앞에 보고 있는 외팔청년의 모습은 결코 지난날의
고봉이 아닌 것이다.
대군의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몽천악의 두 눈동자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당신이 고봉이라고요? 흥! 고봉은 이미 죽었어요!"
몽천악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소. 당신의 말대로 나는 고봉이 아니라 몽천악이라는 사람이요. 그
러나 그간의 경과를 들어보면 당신은 나를 기억하게 될 것이오. 당신은
실혼단을 복용하고 삼년 칠 개월 동안 이성을 잃었던 것을 알고 있소."
그러자 대군의 안색이 일변했다.
"내, 내가 실혼단을 복용했었다니......"
그녀는 고개를 푹 꺾더니 한참 동안 깊은 고뇌에 빠져 들어갔다. 이윽고
그녀는 잠꼬대처럼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그래요. 나는 사부님이 첫번째 실혼단을 내 입에 넣는 것을 기억하고 있
어요...... 그랬었군요."
몽천악은 긴 한숨을 내쉬며,
"그 동안 당신은 정말 남의 힘에 놀아난 인형에 불과했소."
"당신은 누군가요? 어떻게 절 구하신 거요? 그리고 제가 어떻게 정신을
되찾게 되었죠?"
"대군! 당신은 삼년 전 고봉과 함께 낙양 취운봉 산 아래로 절진신의 윤
천초를 찾아갔던 일을 기억하고 있소?"
대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몽천악은 마주 고개를 끄덕여 주며 설명했다.
"내가 바고 고봉이었소. 그러나 그 이름은 화명에 불과하고 당시 나는 얼
굴을 변장하고 있었소. 때문에 당신은 지금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오.
그러나 잘 보시오. 어딘가 닮은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대군은 이미 눈에 안신을 집중시켜 날
카롭게 뜯어보고 있었다.
그녀는 몽천악의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서서히 왕복해 가며 한동안 살폈
다. 그러나 이내 실망의 표정을 떠올리며 애처롭게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
다.
"당신은 어째서 팔이 하나 잘려 나갔는가요? 말소리도 훨씬 늙은 것 같아
요."
대군의 아름다운 눈동자에는 어느덧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었다.
몽천악은 부드럽게 물었다.
"그렇다면 나는 알아본다는 것이오?"
"사형......"
대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주루루 흘렸다.
"대군!"
몽천악이 그녀를 확 껴안았다. 대군도 몽천악의 가슴속에 파고들었다. 그
녀는 끓어오르는 격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어깨를 들먹거리며 통곡을 했
다.
몽천악은 한팔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그녀의 귓전에 속삭였다.
"울어요. 마음껏 울어요. 삼년 칠 개월 동안 받았던 모든 설움을 이 자리
에서 모두 풀어버려요!"
대군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오히려 몽천악을 위로하기 시작했다.
"사형, 저는 원한 때문에 울고 있는 것이 아니어요. 사형을 이렇게 뵙는
것이 꿈만 같아요. 정말 이렇게 다시 만날 줄을 몰랐어요. 제일총교주가
당신이 이미 죽었다고 말했을 때, 저는 간장이 토막토막 끊겨져 나가는
것 같았어요."
몽천악은 눈물을 글썽이며 떨리는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렇소. 삼년 전 나는 정말 죽을 고비에 서 있었소."
"어떻게 다시 사셨어요? 제게 모든 것을 말씀해 주세요. 알고 싶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몽천악의 품속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물론 이야기 해주어야지. 모든 것을...... 이야기하자면 길어지니까 우
선 마음부터 가다듬읍시다."
두 사람은 깨를 나란히 하고 한 개의 무덤을 둘러싸고 있는 담에 기대어
앉았다.
몽천악의 입에서는 삼년 칠 개월 간의 모든 파란만장했던 사건들이 쏟아
져 나오기 시작했다.
모든 경과와 사건마다 대군으로 하여금 경탄케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몽
천악의 품속에서 연방 탄성을 질러댔다.
"그래서 대군을 구하게 된 것이고, 이렇게 대군을 알아보게 된 것이오."
몽천악은 다시 깊은 감회에 젖어들어 눈 앞에 귀여운 모습을 하고 있는
대군의 머리칼을 쓰다듬는 것이었다.
"정말 일 장의 꿈같군요. 꿈이 깨고 나니 모든 것이 허망해요, 사형, 나
는 이제 어쩌면 좋죠, 어디로 가야 하는 거예요?"
그녀는 비록 감상에 젖어 있었지만 들뜬 목소리만은 아니었다. 정말 이제
그녀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것일까?
몽천악은 그녀의 한숨 소리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몽천악은 그녀의
허리를 힘껏 끌어안으며 굳게 맹세했다.
"대군, 내가 있지 않소. 당신이 가는 곳에는 내가 있소. 나는 영원히 당
신의 곁을 떠나지 않겠소. 그리하여 무림기업을 창달 하겠소!"
그 말을 들은 대군의 눈동자에는 감격의 눈물이 주루루 흘러 내렸다.
"줄타강호 오소무림적 웅심은 이미 시간을 따라 가버렸어요. 나의 마음속
에는 이제 평화를 갈구하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몽천악은 깜짝 놀랐다.
"대구! 그게 무슨 말이오? 어째서 그런 약한 말을 하는 것이오? 당신은
이제 다시 생명을 얻었지 않소? 용기를 내어 다시 재출발을 해야만 하
오."
그러나 대군은 쓰게 미소지었다.
"몽사형, 사형은 여자와 남자의 위치가 다르다는 것을 왜 모르세요? 여자
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바치고 평범한 아내
로서 일생을 바치는 것이에요. 저는 이제야 그것을 깨달았어요. 저는 정
말 바보였어요."
몽천악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군은 그의 눈을 그윽이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오늘날 저는 이미 잔화패류에 지나지 않아요. 저의 소망은 이제 완전히
파멸되었고, 이제 바라는 것이라곤 한 여자로서의 처신밖에 남지 않았어
요."
몽천악은 약간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생겼단 말이오?"
그러자 대군은 나지막하게 웃었다.
"사형, 사형은 너무나 저를 모르세요. 저는 사년 전에 이미 사랑하는 사
람을 찾았어요. 오직 그분만을 사랑하고 있을 뿐이에요. 다만 제가 아직
그 분께 사랑을 고백하지 않았을 뿐이에요."
이 말을 들은 몽천악은 일순 어떻게 처신해야 좋을지 몰랐다. 갑자기 눈
앞이 어지러워지고 뭐가 뭔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는 고통스러운 눈으로 하늘의 밝은 달을 쳐다볼 뿐 좀처럼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아, 대군이 사랑한 사람은 결코 내가 아니었구나. 내가 사년동안이나 그
녀를 짝사랑하고 있었을 줄이야. 아, 이 멍청이 같은 놈아!'
몽천악은 완전히 대군을 외면하고 있었다. 어쩐지 알 수 없는 분노가 물
밀듯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는 이제서야 비로소 자신이 대군을 깊이 사
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았다.
그의 이상한 표정을 보자 대군은 의아한 눈초리로 그의 얼굴을 살펴보았
다.
"사형, 왜 그러세요? 무엇을 그리 생각하세요?"
몽천악은 서서히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녀의 맑은 눈동자
를 바라보았다. 자기가 이 여자를 짝사랑하고 있다고 해서 그리고 이 여
자가 자기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고 해서 경원할 필요는 없다.
몽천악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매, 이 세상에 근심이 있는 사람들이 어찌 우리들뿐이겠소. 당신이 근
심이 있다 하는 데 나라고 없을 수 있겠소?"
대군은 여전히 그의 품에 안긴 채 교태스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사형이 슬퍼할 이유가 무엇이에요? 저같이 천한 여자나 근심이 있지 사
형에게 무슨 거리낌이 있겠어요?"
몽천악은 고개를 흔들며 다시 달을 쳐다보았다.
"우리 아무 말도 하지 말기로 합시다."
"몽사형께서는 설마 사랑 때문에 근심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
"송영혜는 순결하고 아름다운 여자예요. 그녀는 옥 같이 순결한 마음을
모두 당신에게 바쳤어요. 당신은 그 여자를 외면해서는 안돼요, 당신에겐
그 여자가 있지 않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대군은 연방 몽천악의 눈초리를 살피는 것이었다.
몽천악은 미처 그 눈초리를 깨닫지 못하고 자기대로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 내가 어찌 송영혜를 잊을 수 있고 저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나
는 그녀를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아, 그러나......'
남녀 사이의 애정이란 미묘한 것이다.
사년 전 누각 안에서 대군이 잠자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몽천악은 이
미 가슴에 심한 충격을 받았었다.
그후로 그는 대군의 모습을 가슴에서 한시도 지워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그에게 등대와도 같이 피로할 때나 즐거울 때나, 밝은 빛으로 가슴속을
비춰 주고 있었다.
몽천악이 다시 강호에 나와 돌아다닌 목적은 오직 대군의 생사를 알기 위
한 것이었다.
몇 달 동안이나 그는 대군을 위해 회혼단을 찾아 돌아다녔으며 결국은 그
녀를 구해내지 않았던가!
총명 절세한 대군이 어찌 이러한 몽천악의 마음을 알지 못하랴, 그녀는
그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빤히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 입장을 밝히려 하지
않았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당신뿐이라고 고백하고 싶은 그녀의 심정을
불붙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대군에게는 고결한 인품이 있었다. 그녀는 몽천악이 심산 절곡속
에서 송영혜를 얻은 것을 알고 심한 충격을 받았었다. 그러나 그녀는 진
정으로 그를 사랑한다면 자기가 물러서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자기는 손에 피비린내가 가득한 참혹하고도 잔인한 여자라는 죄책
감 때문에 그들을 가까이할 수가 없었다. 이와 같은 죄악의 과거를 가지
고 어찌 그에게 기쁨을 줄 수 가 있단 말인가!
이때, 그녀의 귀에 몽천악이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송영혜는 나의 아내이므로 나는 그녀를 영원히 책임져야 한다. 아, 그러
나...... 그러나 첫사랑의 여인을 잊지 못하는 죄악을 떨쳐 버릴 수가 없
구나. 하늘이시여! 이 가련한 죄인은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대군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았다.
'아, 오늘에 와서야 나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구나. 첫
사랑이라는 것은 정녕 신비스럽고 오묘하며 영원히 사람을 암흑 속으로
집어넣는구나. 아, 나는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그의 말을 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는 대군은 드디어 고개를 번쩍 치켜들
고 물었다.
"사형의 첫사랑의 여인은 누구예요?"
몽천악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긴 한숨을 한없이 내쉬며,
"남을 사랑하나 남에게 사랑 받지 않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오. 게다가
그 사람의 이름을 말하는 것은 더욱 고통스러운 일이오, 대군, 묻지 않길
바라오."
대군은 다시 눈물을 글썽였다. 그리고 애처롭게 몸을 돌리며,
"몽사형, 우린 마음에 상처를 입은 입장이긴 하지만 어쩌면 당신보다 내
슬픔은 더욱 큰건지도 몰라요."
이윽고 그녀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눈물을 주르륵 떨어뜨렸다.
몽천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따지고 보면 나는 당신보다 행복하다고 할 수 있소."
대군이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몽사형, 우리 이런 사사로운 이야기 그만하기로 해요."
"그렇소. 더 이상 이런 괴로운 이야기 그만 두기로 합시다. 당신에게 최근
며칠 동안의 경과를 알려 주리다."
이어 몽천악은 이 며칠 동안 자기가 마검신군과 함께 삼청관에 간 일이라
든가 묘지에서 발생했던 일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대군은 그의 말을 다 듣고는 눈살을 찌푸리고 심각하게 물었다.
"몽사형, 사형은 흑마왕의 고루사망첩을 받으셨단 말씀예요?"
몽천악은 쓰게 미소를 지었다.
"고루사망첩에는 내가 죽은 날짜가 팔월 팔일 자시라고 적혀 있었소."
"팔월 팔일? 흑마왕이 대담하게 조전신에게 사망첩을 보내왔다는 것은 무
림 호걸에게 도전해 왔다는 말과 마찬가지예요."
그러자 몽천악은 의외의 표정을 지으며 다급히 물었다.
"아니, 그럼 사매도 흑마왕의 일을 알고 있단 말이오?"
"저는 오래 전부터 무림에 흑마왕이라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들어 왔어요.
그러나 누군지는 자세히 알지 못해요."
"유기의 말을 들으니 흑마왕은 무림 십걸 중 한 사람이라고 하던데 당신
은 그 사실을 믿으오?"
"그래요. 바로 십걸 중에 한 사람이에요."
"당신은 누가 흑마왕인지 짐작하오?"
"글쎄요......"
"나는 십걸 중에 절진신의 윤천초가 흑마왕이 아닐까 생각하오. 당신은
절진신의를 잘 알고 있는 모양인데 그런 생각이 들지 않소?"
대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몽사형께서는 무슨 근거로 절진신의를 흑마왕이라고 단정하세요?"
몽천악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진사태의 죽음으로 추측할 수 있지 않소? 절진신의가 좋은 인물이라면
정진사태가 한알의 회혼단을 훔쳐 총채 속에 몰래 감추어두고 있지는 않
았을 것이오."
그러자 대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추측엔 일리가 있어요. 사실은 나도 벌써부터 절진신의를 의심하
고 있었어요. 그가 흑마왕인지도 모르죠. 그러나 확실한 것은 아니에요.
우리가 그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누가 흑
마왕인가 하는 것보다 일단 흑마왕이 있는 장소를 알아야만 할 것 같아
요."
몽천악은 조금 전의 상황을 생각해 보았다.
"조금 전 청의의 인과 삼청도장이 싸움을 할 때 서로 흑마왕이라고 윽박
지르던데 그들 두 사람 중 하나가 아닐까?"
대군은 "아!" 하고 탄성을 질렀다.
"정말 그럴는지도 모르겠군요, 그들의 정체를 알기만 한다면 쉽사리 판단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신은 그들 두 사람 중 누가 흑마왕일 것 같소?"
"아마 그 삼청도장이 아닐까요? 당신의 말씀을 들으니 청의의 인은 어쩐
지 진실한 데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삼청도장은 계속 그 귀곡록을 빼
앗으라고 충동질했다니 그가 수상한 생각이 드는군요."
"그야 귀곡록을 갖고 싶은 심정이야 청의의 인도 마찬가지였지. 그것만
가지고 판단할 수는 없소."
이때, 대군은 깊은 우려의 표정을 하며,
"어쨌던 그들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흑마왕이 분명하다면 당신과 조전신
은 벌써 흑마왕의 암산을 당했을 거예요."
몽천악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게 무슨 말이오?"
"당신들은 삼청관의 지하도 안에서 삼청도장과 매우 오랜 시간을 접촉한
적이 있어요. 만약 삼청도장이 흑마왕이라면 그가 당신들을 곱게 버려 두
었겠어요?"
몽천악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머릿속으로 그때의 상황을 더듬어 보고 있
었다.
"그리고 청의의 인이 흑마왕이라도 당신을 그대로 버려 두려고 하지 않는
심리는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사매의 말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때의 상황으로서는 불가능
한 일이었소. 조전신은 팔검비상 진삼청을 전부터 알고 있었소. 삼청도장
이 만약 가짜 진삼청이라면 조전신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을 리 있겠소.
내가 보니 조전신은 조금도 의심하는 눈초리는 없었소."
"어쨌던 빨리 조전신을 만나는 일이 가장 급선무예요. 그를 찾으면 이 의
문의 수수께끼는 어느 정도 풀릴 거예요. 또한 만일 당신들 두 사람이 이
미 흑마왕의 암산을 당했다면 빨리 무슨 조처를 취해야 해요."
몽천악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먼동이 터 오고 있었다.
"하룻밤이 또 속절없이 지나가는구나. 흑마왕의 고루사망첩의 기한도 단
지 이틀밖에 남지 않았으니...... 자,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소. 빨리 이
곳을 떠납시다."
몽천악은 대군을 이끌고 신속히 묘지를 빠져나갔다.
아침 안개가 넓은 들판에 온통 자욱히 뒤덮여 있었다. 마치 그들의 새로
운 앞길을 축복하는 듯 안개는 신선하고 공기는 맑았다. 찬바람이 불어와
그들의 머리를 식혀주었다.
그들이 막 몸을 솟구쳐 달려가려 할 때.
"휘-익!" 한 줄기 미풍이 불어와 그들의 얼굴을 때렸다. 그러나 그 바람
은 결코 들판 쪽에서 불어오는 것이 아니었다.
미풍에서는 가벼운 향수 냄새가 풍겨 왔다.
몽천악과 대군은 안색이 돌변하여 즉시 신형을 멈추고 사방을 둘러보았
다.
네 줄기의 형형한 눈빛이 자욱한 안개를 헤쳐 보자 이내 전방에서 세 줄
기 검은 그림자를 발견했다.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이 방금 도착한 그림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분명히
오랫동안 두 사람을 기다린 모양이었다.
대군은 그들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매우 놀랐다. 그리고는 낮게 속삭였다.
"제일총교주와 이교주, 그리고 제일호시위대장 형중구예요!"
몽천악의 얼굴에는 이미 비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핫핫핫...... 나도 알고 있소. 나는 누구신가 했지, 핫핫......"
이 무렵 쌍장의 그림자는 서로 십여 장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쌍방은
모두 돌비석을 깎아 놓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아침의 짙은 안개가 그들의 발 밑으로 어깨로 얼굴로 뭉클뭉클 피어 올라
가고 있었다.
이때, 돌연 몽천악이 외팔을 번쩍 치켜들었다.
"후난향! 내게 목숨을 바쳐라!"
이어 한 줄기 분홍빛 검광이 사방을 가득 뒤덮더니 겹겹이 쌓인 안개를
뚫고 격출 되었다.
검광은 가운데 한그림자를 향해 곧장 날아갔다.
몽천악의 검술로 말하자면 이미 천하에 그 위명이 떨쳐 있었고 실제로 예
리한 검광을 막아 낼 수 있는 자는 별로 없었다.
"야하!"
"야오!"
"이얍!"
세 줄기의 그림자가 각각 좌우로 그리고 허공으로 튀어 올랐고 몽천악의
검광은 의외로 힘없이 빗나가는 듯했다. 그러나 그의 검광의 위력은 과연
무서운 것이었다. 알고 보니 가운데 위인의 발 근처의 옷자락이 이미 잘
려서 나풀나풀 땅위에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재빨리 그의 검을 피하기는 했지만 세 사람의 고수는 간담이 서늘해
지고 말았다.
이때, 대군은 재빨리 몽천악의 옆으로 달려가며 상대방이 반격해 올 기회
를 막고 있었다.
쌍방의 거리는 불과 삼 장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그들은 서로 상대의 얼
굴을 똑똑히 알아볼 수가 있었다.
과연 면전의 세 사람은 청의의 유사 이교주, 흑의의 독수 노인 형중구,
그리고 구슬과 보물로 화려하게 온몸을 치장하고 있는 요염한 얼굴의 부
인 무아진교 제일총교주였다.
제일총교주는 놀라움과 분노가 범벅이 된 표정으로 비할데 없이 아름다운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군아야! 너는 버릇없이 내 이름을 함부로 말했겠다!"
대군은 처량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매서운 얼굴로 돌변하여 앙칼지게 소
리쳤다.
"흥, 무슨 고귀한 이름이라고 그렇게 으시댄단 말이에요. 나는 당신의 더
러운 이름을 다시는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아요. 당신을 갈기갈기 찢어 죽
여도 시원치 않아요!"
"호호호...... 네 마음대로 하려무나! 잔결서생, 군아가 내 이름을 가르
쳐 주더냐?"
"흥! 과연 소문대로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군. 강호무림 안에 많은 고수들
이 당신의 이름과 내력을 알고 있는데, 어째서 그들이 당신의 이름을 입
에 올리기를 꺼리는지 알 수가 없소! 무엇으로 그들을 사로잡았소? 당신
의 미모란 말이오?"
그러자 제일총교주의 얼굴이 약간 붉어지는 듯하더니 대노하여 소리쳤다.
"젖먹이 애송이가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이놈, 내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렸다가는 어떻게 되는지 너는 소문도 듣지 못했단말이냐?"
"핫핫핫...... 다른 사람들을 위협하는 식으로 나를 위협할 작정이오?
나는 당신의 독계가 무엇인지 이미 모두 견식 했기 때문에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소. 이제 보니 당신은 좀 유치하군. 사람을 누르는 밑천이 그래
제 얼굴 그 따위 졸렬한 위협밖에 없소?"
제일총교주는 아름다운 얼굴이 추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녀는 얼굴이 붉으
락푸르락해지며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는 산천이 떠나갈 듯 고함을 질렀다.
"잔결서생! 이 흉악무도한 애송이! 이 후레자식 놈아! 본교주는 삼사년
동안 남과 싸워 본 적이 없지만, 나는 오늘 기필코 네놈 목의 피를 빨아
먹고야 말리라!"
그녀의 무서운 독설에 몽천악은 몰골이 송연해졌다. 큰소리를 치긴 했지
만, 그녀의 실력이 비할 데 없이 고강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
었다.
"잔결서생, 자, 나의 일 장을 받아보아라!"
그녀의 옥장이 대수롭지 않게 휘둘러지는가 했다.
그러자 몽천악도 벽혈검을 휘두르며 기세 좋게 상대방의 공격을 맞이해
갔다.
몽천악의 검초가 중간쯤 쪼개갔을 때였다.
"으윽!"
얕은 비명소리가 몽천악의 입에서 튀어 나왔다.
후난향을 향해 날아가던 검광이 돌연 빛을 잃고 그대로 땅바닥에 동댕이
쳐졌다.
대군은 대경실색하여 외쳤다.
"몽사형, 왜 그래요?"
괴성의 주인공
몽천악은 이때, 안색이 창백해지면서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나는 장력에 맞았으니, 당신은...... 당신은 빨리 도망가시오."
이렇게 말을 마치고 몽천악은 두 다리를 축 늘어뜨리며 땅 위에 주저 않
았다.
대군은 몽천악이 일초 사이에 패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이것은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제일총교주의 무공이 대적할 사람이 없는 심오한 경지에 다다
랐단 말인가?
제일총교주도 매우 의외인 듯한 표정을 지으며, 조용히 몽천악을 바라보
면서 넋을 잃고 있었다.
대군의 두 눈에는 한 줄기 놀라운 살기가 번쩍였으며, 제일총교주를 한
번 바라본 뒤, 담담하게 물었다.
"총교주, 당신은 무슨 무공으로 그를 상하게 하셨나요?"
제일총교주는 담담하게 말했다.
"이 계집애야! 네가 정신을 다시 회복했다는 사실은 절진신의가 이미 회
혼단을 만들어 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대군은 냉랭하게 웃으며 말했다.
"총교주의 장공은 매섭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러나 소녀 잔양장을 대적
해 낼 수 있는지의 여부를 모르겠군요."
제일총교주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이 계집애야! 나는 너를 어려서부터 이제까지 부양해 왔다. 그런데 감
히 네가 끝내 나를 배반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지난번에 네가 처음
으로 잘못을 저질렀으므로 나는 참작을 해서 가볍게 처벌하고, 너를 죽
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너는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살 생각을 말아야
겠다."
이렇게 말을 마치자 그녀는 왼손을 한 번 휘둘러 엄숙하게 외쳤다.
"형대장, 이교주, 당신들은 힘을 합해 이 반역자를 처리하시오."
형중구와 이교주는 이미 자세를 취하고 명령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
러므로 이 소리를 듣자 좌우에서 곧장 대군을 향해 덤벼 갔다.
대군은 이미 형중구와 이교주의 매서움을 알고 있었다.
왼손을 일단 들어올리고 소녀 잔양신공으로 쳐나갔다.
그녀가 쳐나간 방향을 바고 형중구를 향해서였다.
그들 세 사람은 모두 상대방의 무공 내막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대군이 막 출수하자 형중구는 이미 옆으로 아홉 자쯤 뛰어나갔
다. 그리고 매섭고 절쾌하기 이를 데 없는 소녀 잔양신공을 피해 냈다.
바로 이와 동시에 싸우는 승부는 머리카락 하나 차이의 속도에 달려 있는
것이다.
대군의 무공으로 과연 이와 같은 두 사람의 절정 고수를 상대해서 이겨
낼 수가 있을 것인가.
대군은 이미 이교주의 일검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러므로 왼손을 쳐내자
이미 방향을 이동해 버려 이교주의 검식을 허탕을 쳤다.
그러나 형중구와 이교주가 먼저 죽이려고 작정한 사람은 대군이 아니었
다.
두 사람의 대군의 몸이 방향을 바꾸는 동시에 곧장 땅 위에 주저앉아 있
는 몽천악을 향해 덮쳐 가는 것이 보였다.
대군은 이것을 보자 대경실색 하였으며, 다급한 음성으로 외쳤다.
"당신들은 그를 상하게 하지 말아요!"
그러나 그녀가 미쳐 덮쳐 가기 전에 귓가에 제일총교주의 날카로운 음성
이 울렸다.
"너희들 두 사람은 저승에 가서 만나라."
화함권, 제일총교주의 한쪽 손이 절쾌하게 대군의 등 한복판을 눌려 가는
것이었다.
이 위기 일발의 찰나......
"모두들 손을 멈추시오!"
형중구와 이교주, 그리고 제일총교주는 이 음성을 듣자 어찌 된 일인지
세 사람 모두 심신이 움찔하면서 마치 전류에 감전 된 듯 팔에 힘이 쭉
빠졌다.
대군은 이 찰나의 순간 이미 몽천악의 옆으로 뛰어갔다.
이 무렵 들판 잔디 사이에는 안개가 뿌옇게 피어나고 있었다.
주위에는 여전히 사람의 그림자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제일총교주
와 이교주, 형중구 등 세 사람의 얼굴에는 놀라고 두려운 기색이 가득차
있었다.
이윽고 제일총교주가 다급히 묻는 소리가 들렸다.
"흑마왕입니까?"
몽롱한 흰 안개속에 다시 그 괴이하게 맴도는 소리가 울려 나왔다.
"흑마왕을 제외하고 이 속세에 전광장을 지닌 사람이 또 있다는 말이오?"
몽천악과 대군은 조금 전 두 사람의 목숨을 그 신비스럽기 이를데 없는
흑마왕이 구한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는 어째서 우리 두 사람을 구했을까?
전광장은 어떤 장공일까?
놀랍게도 세 절정 고수는 그 장력에 맞은 뒤 전류에 감전된 것 같이 중도
에서 경력을 잃었다.
몽천악과 대군의 눈동자는 몽롱한 안개 속에서 사면 팔방을 향해 살펴보
았다.
그러나 한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자 묵묵히 앞으로 벌어질 일을 기다
릴 수밖에 없었다.
제일총교주는 돌연 깔깔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정녕 흑마왕이라면, 어째서 내가 저들 두 사람을 살해하는 것을
제지하는 것이오?"
신비스럽고 괴이하게 감도는 소리가 다시 전해왔다.
"잔결서생은 이미 고루장을 받았으니, 그의 목숨을 흑마왕만이 죽일 수
있으며, 어느 누구도 그를 살해할 수 없소. 설마 총교주는 나의 이 습관
을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요?"
제일총교주는 깔깔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저 계집애는요?"
흑마왕의 말소리가 다시 들렸다.
"삼년 전에 본 마왕은 잠시 대군의 목숨을 살해하지 말도록 명령을 내린
적이 있었습니다. 설마 총교주는 이것을 잊었소?"
대군은 고개를 돌려 몽천악을 한 번 바라본 뒤 얼굴에 어리둥절한 기색을
가득 띠었다.
그녀는 흑마왕이 어째서 자기의 목숨을 살려 두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제일총교주는 애교있게 웃으며 말했다.
"본교주는 흑마왕이 어째서 대군의 목숨을 살려 두는지 정말 모르겠소."
흑마왕의 음성이 들려오며 대답했다.
"그것은 내가 아직 대군의 신분을 조사해 내지 못했기 때문이오."
대군은 이 말을 듣자, 속으로 움찔하고 소스라치며 물었다.
"흑마왕이 무엇 때문에 나의 신분을 조사한단 말이예요?"
그러나 신비스럽고 괴이하게 감도는 말소리는 이때, 울려 나오지 않았다.
분명히 흑마왕은 이 문제의 대답을 피하고 있는 것이다.
제일총교주는 물었다.
"흑마왕은 떠났소이까?"
맴도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직 떠나지 않았소."
제일총교주는 말했다.
"무슨 지령이 있나요?"
흑마왕의 음성이 또다시 들려왔다.
"제일총교주는 이미 자객 하나를 초빙해 나를 모살 하려고 하지 않았소이
까?"
몽천악은 이 말을 듣자,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 대단한 흑마왕이구나. 그가 어떻게 이 일을 알았을까? 제일총교주
는 어떻게 대답하려는지 모르겠구나.'
그러자 제일총교주가 깔깔 웃으며 말하는 것이 들렸다.
"그 자객 하나 뿐만이 아니라 천하의 모든 고수들이 거의 다 당신을 죽이
려 하고 있소."
흑마왕은 서서히 말했다.
"무림에서 유일하고 진정한 자객은 독비절도 유기요. 나는 당신의 계략에
걸려들지 않을 것이오."
제일총교주는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흑마왕은 말했다.
"온 천하에 단지 독비절도 유기만이 당신과 사사로운 정이 없을 것이오."
제일총교주는 교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나 유기도 당신이 꺼려하는 사람이오."
흑마왕은 이번에는 잠시 머뭇거린 뒤 또다시 입을 열었다.
"본 마왕은 당신들 네 사람에게 빨리 물러가도록 명령하는 바요."
제일총교주는 말했다.
"만약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면 어쩌시겠어요?"
흑마왕은 말했다.
"당신은 본왕의 명령을 따를 것이요."
제일총교주는 깔깔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우리들의 약속한 기한이 수일 전에 이미 지나갔다는 것을 기억하
고 계시겠지요, 본교주는 더 이상 당신의 지휘 명령을 들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흑마왕은 냉랭한 소리로 말했다.
"지금 당신들은 아직 나의 전광장을 격파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소.
그러니 당신은 빨리 나의 말을 들어야 할 것이요."
제일총교주는 말했다.
"그렇소. 지금 본교주는 아직 당신의 명령을 듣고 있어요. 그러나 당신
흑마왕이 언제고 내손에 죽을 날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두시오."
흑마왕은 약간 짜증이 난 듯 위협적으로 말했다.
"당신들이 조금만 더 머물러 있다가는 내가 다시 전광장을 쳐내 습격하는
것을 원망하지 마시오."
말소리가 일단 떨어지자 제일총교주는 왼손을 휘둘러 몸을 돌려 뒤로 후
퇴해 갔다.
이교주와 형중구도 대적을 만난 듯이 천천히 제일총교주를 따라 자욱한
안개속으로 사라져 갔다.
황야의 초원에 돌연 다시 고요와 정적이 가득 흘렀다.
대군은 한참동안 기다린 뒤 더 이상 흑마왕의 음성이 들리지 않자 자신도
모르게 소리내어 물었다.
"흑마왕은 떠나간 모양이지요?"
갑자기 음산한 음성 한 가닥이 돌연 칠 장 밖에서 울려 왔다.
"아직 가지 않았소."
몽천악과 대군은 속으로 움찔하며, 고개를 돌리고 바라보았다. 그러자 칠
장 밖에서 돌연 유령과 같은 사람의 그림자 한 가닥이 나타난 것이 보였
다.
대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귀하는 조금 전 바로 그곳에 서 있었나요?"
흑마왕은 말했다.
"그렇소, 본왕은 줄곧 이곳에 있었으며, 한걸음도 움직이지 않았소."
대군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러나 우리 두 사람이 조금도 당신의 그림자를 발견하지 못했는데요?"
흑마왕은 말했다.
"바로 당신의 앞에 서 있다 해도 당신들은 나의 그림자를 발견하기 어려
울 거요."
대군은 물었다.
"귀하는 은신술을 할 줄 압니까?"
흑마왕을 말했다.
"은신술이 아니고, 장안법이오."
대군은 말했다.
"무슨 장안법인지 우리들에게 알려줄 수 없겠어요?"
흑마왕은 말했다.
"이것은 본왕의 비밀이니 물론 알려줄 수가 없소이다."
대군은 돌연 애처롭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귀하는 우리들 두 사람에 대해 조금도 적의가 없는 것 같군요. 당신이
몇 걸음 더 다가와 우리들로 하여금 좀 진지하게 대화를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흑마왕은 말했다.
"명령을 따르기가 어렵소이다."
대군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듣자하니, 귀하는 나의 신분과 내력을 조사한다는데 약간의 단서를 알아
냈는지 모르겠군요."
흑마왕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말했다.
"이미 약간의 단서를 잡았소이다."
대군은 말했다.
"무슨 단서인지 알려 주시오."
흑마왕은 돌연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본왕이 알기에는 당신은 버림받은 아이였소. 삼십년 전 서호동안 구곡교
호반에서 한 중년 어부에게 구원받아 이 개월 동안 부양되었소. 그러나
그 중년 어부는 제일총교주가 잘못해서 죽여 버렸소. 그래서 양려명에게
안겨가 드디어 제일총교주의 수중에 들어간 것이오."
대군은 처량하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경과는 정진사태 양려명이 이미 나에게 알려 주었어요."
흑마왕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말했다.
"말은 비록 그렇지만, 내가 이 일은 알아낸 것은 결코 손쉬운 일이 아니
었소. 그러나 이 정도의 단서로 나는 이미 당신의 신분 내력을 조사 해냈
소이다."
대군은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인지요?"
흑마왕은 말했다.
"시간, 장소, 인물, 성별(性別)은 이미 거의 다 들어맞은 셈이오."
대군은 속으로 움찔하며 물었다.
"귀하는 혹시 어린아이였던 나를, 버린 인물을 아는 것이 아닌지요."
흑마왕은 말했다.
"물론 알고 있소."
대군은 물었다.
"누구인지요?"
흑마왕은 말했다.
"잠시 동안은 알려 줄 수 없소이다."
대군은 실망하여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나는 이미 나의 출생 내력을 알고 싶지 않아졌어요."
흑마왕은 말했다.
"어째서요?"
대군은 말했다.
"알고 난 뒤 더욱 마음속에 상처를 받을 까 두려운 거예요."
흑마왕은 이 말을 들은 뒤 다시 침묵을 지키고 말을 하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겨우 말했다.
"잔결서생은 이미 나의 암산에 걸렸소. 독기가 팔월 팔일 자시쯤에서야
겨우 발작을 할 것이오. 그러나 그가 조금 전 운공을 해 현관 진기로 검
을 쳐내 제일총교주를 습격했으므로 독기로 하여금 용미골에 스며들어가
게 해서 상반신이 축 늘어지도록 만들었던 것이오. 지금 내게 알약이 있
으니 가져다 복용하면 곧 진기가 자유자재로 돌아갈 것이오."
이 말을 마친 뒤 흑마왕은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였다.
그러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탄환 크기의 병 속의 알약 하나가 이미
대군의 두 발 앞에 떨어졌다.
대군은 재빠르게 이 알약을 주워 들고 물었다.
"그가 이 알약을 복용한 뒤에는 팔월 팔일 자시에 죽지 않겠습니까?"
흑마왕은 말했다.
"물론 죽을 것이오."
대군은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그가 하루라도 빨리 죽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로 하여
금 이 알약을 복용시키지 않을 거예요."
흑마왕은 냉랭하게 물었다.
"당신은 본왕으로 하여금 고루장을 거두어들이도록 위협하는 것이오?"
대군은 말했다.
"나는 잔결서생이 당신에게 별로 원한이 없는 걸로 생각해요. 당신이 굳
이 고루장을 그에게 낼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
흑마왕은 말했다.
"잔결서생이 이대로 심산유곡으로 은거하여 강호무림 속세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상, 비참한 죽음을 당하는 운명은 벗어나기 어려운 거예요."
대군은 처량하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강호무림에서 십여년 동안을 뛰어다녔지만 사실 무림에는 이미 우리들이
미련을 남길만한 일이 없어요. 이대로 심산유곡에 은퇴하지 못할 게 무엇
이 있겠어요? 몽천악도 강호에서의 생활에 이미 혐오증을 느꼈어요. 그가
다시 강호에 나온 목적은 나를 위해 원수를 갚으려고 한 것이에요. 오늘
나는 무사히 소원을 달성했으니, 더 무슨 걱정할 일이 있겠어요?"
흑마왕은 서서히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잔결서생, 지금 당신은 절세 가인 한 분을 소유하고 있소. 심산유곡에
은거하여 인륜(人倫)의 기쁨을 맛볼 수 있으니, 인생에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소? 단지 당신이 무림에서 물러나겠다고 응낙만 하면 본왕도 절대로
당신들을 난처하게 하지 않겠는데, 당신 생각은 어떻소?"
몽천악은 고개를 들고 대군을 한 번 바라본 뒤 물었다.
"그의 말을 믿을 수 있겠소?"
대군은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흑마왕은 무림 안에서 이미 삼사십년 동안 몸을 담아 왔어요. 그리고 무
림에선 그가 신비스럽고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만이 알려져 있어요. 그러
므로 그의 말을 믿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나는 별로 자신이 없어요. 또
한 한 가지 내가 의심을 가지는 것은 그가 어째서 우리들로 하여금 무림
을 물러나가게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예요."
흑마왕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시간이 없소. 만약 당신들이 무림에서
물러가기로 결정했다면 팔월 팔일 자시 전에 낙양을 떠나시오."
말을 마치고 흑마왕은 몸을 한 번 움직이자 그림자가 자욱한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대군은 처량하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만약 오늘 그가 우리들을 구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들은 또 한 번 제일총
교주에 피해를 입을 뻔했군요."
몽천악은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흑마왕이 당신을 구하려고 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드오. 그리고 어쩌
면 당신과 관계가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대군은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를 조금도 알지 못하는데요."
몽천악은 말했다.
"만약 나의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면 당신의 신세는 그와 분명히 깊은 관
계가 있을 거요."
대군은 애처롭게 말했다.
"사형, 그런 얘긴 그만하고 빨리 이 알약이나 드세요."
이렇게 말하며 대군은 이미 알약의 병을 깨뜨렸다.
안에는 진주 같은 새하얀 알약이 담겨져 있었다.
일진의 맑은 향기가 코에 스며들었다.
몽천악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나에게 약간의 우려가 있소. 나는 이 알약이 바로 한 알의 만성독약일까
걱정되는 것이오."
대군은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인지요?"
몽천악은 말했다.
"나는 흑마왕의 암산에 당했다고는 아직 믿지 않소이다."
대군은 "아!" 하는 소리를 내고 말했다.
"그 말이 옳아요. 그러나 당신 몸의 질환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겠는지
요?"
몽천악은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나도 어째서 갑작스럽게 반신이 축 늘어졌는지를 알지 못하겠소이다."
대군은 말했다.
"적을 방어하는 마음이 없어선 안돼요. 더욱이 흑마왕이 우리들에게 대하
는 태도가 약간 상상 밖이니 이 알약을 잠시 먹지 말기로 해요."
몽천악은 말했다.
"마검신군이 성안 만흥객점 안에 있소. 만약 내가 이미 흑마왕의 암산에
걸려들었다면 조전신도 분명히 암산을 당했을 테니 우리 가서 빨리 그에
게 물어보고 난 뒤 다시 말합시다."
대군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래요, 제가 부축해 드리겠어요."
"사매에게 귀찮음을 끼칠 도리밖에 없겠소."
대군은 오른 팔로 몽천악의 허리를 부축해 일으킨 뒤 한걸음 한걸음씩 성
안을 향해 걸어갔다.
오늘 아침 안개는 유난히 자욱한 듯하여 도처가 온통 하얀 안개로 뒤덮였
다.
십 장 밖의 초목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방향을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대군은 몽천악의 말대로 만흥객점의 담 밖에 당도해 왔다. 이무렵, 날이
막 밝았으나 아침 안개는 채 가시지 않았다.
두 사람은 담을 넘어 들어가 그 조그만 뜰 앞에 당도했다. 그러자 갑자기
그림자가 빠르게 번쩍이며, 한 줄기 빠른 인영이 몽천악과 대군 앞을 가
로막았다.
몽천악은 첫눈에 그가 바로 마검신군 조전신인 것을 똑똑히 보았다. 자신
도 모르게 놀란 음성으로 나직하게 외쳤다.
"조방주님!"
마검신군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떠오르며 물었다.
"그녀는 섭혼마녀가 아닌가?"
몽천악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녀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이성을 회복하여 이제
는 섭혼마녀가 아닙니다."
녹의의 묘녀
"몽천악은 앞으로 어떻게 할 셈인가?"
몽천악이 말했다.
"조방주님 이곳은 얘기할 곳이 못됩니다. 혹시 안에 다른 사람이 있는지
요?"
마검신군은 그제야 깨닫고 가볍게 "오!" 소리를 지르고 말했다.
"빨리 들어오시오!"
세 사람은 재빠르게 청 안으로 들어갔다.
조전신이 등불을 키자 대군은 몽천악을 의자 위에다 앉혔다.
몽천악은 조전신을 한 번 바라보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배는 조방주님을 떠난 반나절과 하룻밤 사이에 평범치 않은 일들을 많
이 겪었습니다."
그리고 몽천악은 그 반나절 하룻밤 동안에 발생한 모든 일을 조전신에게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마검신군 조전신은 양 눈썹을 살짝 찌푸리고 말했다.
"자넨 이미 그 알약을 복용했는가?"
몽천악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직......."
마검신군 조전신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나도 흑마왕에게 알약 한 알을 받았네."
이렇게 말하며, 그는 품 안에서 눈 같이 새하얗고 투명하며 진주와도 같
은 알약 한 알을 꺼냈다.
그러나 대군도 재빠르게 그 알약을 꺼냈다. 두 개의 약이 똑같고 일진의
기이한 맑은 향기가 폐부를 시원하게 했다.
몽천악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물었다.
"흑마왕이 어떻게 조방주님께 이 알약을 보내왔는지요."
조전신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흑마왕이 이 약을 보내 온 것은 객점 안의 점원에게 송달토록 명한 것이
오. 안에 편지 한 통이 동봉되어 있었소. 역시 나에게 강호무림에서 물러
나도록 명령하는 것으로 조건을 삼았더군."
몽천악이 물었다.
"그럼 이 알약은 해약일까요? 그렇지 않으면 독약일까요?"
조전신을 말했다.
"나는 이미 시험을 해 보았으나, 독성이 담겨져 있지 않았네."
몽천악은 물었다.
"독약이 아니라면 조방주님께선 어째서 복용하지 않으셨습니까?"
조전신은 말했다.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흑마왕의 암살에 빠진 줄을 몰랐기 때문이었네.
여하튼 이 약은 독성이 발작하기 전까지는 복용해도 괜찮을 것 같군."
몽천악은 말했다.
"만약, 우리들이 정말 이미 암기에 걸렸다면 흑마왕이 누구인가 하는 수
수께끼는 곧 풀리겠군요."
조전신은 서서히 물었다.
"몽노제, 자넨 혹시 팔검비상 진삼청이 흑마왕이라고 추측하는 것이 아닌
가?"
몽천악은 말했다.
"삼청관 안에서 흑마왕에게 암살 당할 수 있는 기회를 제외하고는 나는
더 이상 우리들이 어느 곳에서 남의 암살을 당했는지 생각해 낼 수가 없
습니다."
조전신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몽노제, 자넨 혹시 우리들 두 사람이 패혈문에서 한 번 물린 적이 있는
일을 기억하고 있는가?"
몽천악은 말했다.
"패혈문의 독은 묘가수가 이미 약을 주어 제거하지 않았습니까?"
조전신은 말했다.
"내가 알고 싶어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패혈문을 풀어 우리들을 상하게
했느냐는 것이네."
몽천악은 말했다.
"그 사람은 묘가수입니다."
조전신은 말했다.
"자넨 어떻게 그녀라는 것을 증명하는가?"
몽천악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나는 증명할 수 없습니다만, 그러나 우리들은 묘가수에게 물어 볼 수 있
습니다."
이때, 갑자기 뜰 밖에서 은방울 같은 음성이 울려 왔다.
"잔결서생, 당신이 나에게 무엇을 물어 본단 말인지요?"
이 소리와 함께 청문 입구에 아름답고 요염한 녹의의 낭자 하나가 서 있
는 것이 보였다.
바로 가냘프고 약삭빠른 묘녀 묘가수였다. 몽천악은 고개를 돌리고 그녀
를 보자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묘낭자, 앉으시오. 그런데 몸이 불편하여 공손히 영접하지 않는 것을 양
해하시오."
묘가수는 사뿐히 걸어와 아름다운 눈으로 중인들을 한 번 훑어 본 뒤 서
서히 앉았다.
그러자 애교 있게 깔깔 웃은 뒤 말했다.
"잔결서생, 당신은 정말 신통력이 대단하군요. 놀랍게도 선수쳐 회혼단을
손에 넣었으니까요."
이 말을 듣고 있던 조전신은 마음속이 움찔했다. 곧이어 "아!" 소리를 내
고 물었다.
"그렇군, 나는 오히려 노제에게 어떻게 회혼단을 얻었는지 묻는 것을 깜
빡 잊을 뻔했군."
몽천악은 속으로 움찔하며 생각했다.
'나는 정진사태가 어떻게 회혼단을 남겨 놓았는지를 이들에게 알려 주어
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구나.'
돌연 대군이 웃으며 말을 잇는 것이 들렸다.
"당신들은 나의 이성이 회복된 게 바로 절진신의의 회환단을 먹어서 그렇
다고 생각하십니까?"
몽천악은 이 말을 듣자 멍청해지며 생각했다.
'대군이 어째서 회혼단을 복용한 일을 부인하는 것일까?'
묘가수는 대군을 한 번 바라보고 나자 냉랭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회혼단을 복용하지 않았나요?"
대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회혼단을 복용했는지 안했는지 하는 것은 당신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예요?"
묘가수가 냉랭하게 말했다.
"내가 알려고 하는 것은 누가 당신에게 회혼단을 주었느냐는 거요?"
대군은 말했다.
"몽천악도 아니고, 절진신의도 아니예요."
묘가수는 차가운 음성을 물었다.
"그럼 누구지요?"
대군은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알려 줄 수 있어요. 그러나 조건이 하나 있어요. 당신은
우리들에게 이일을 추궁하는 의도를 주어야 할거예요."
그러자 몽천악은 이때서야 언뜻 깨달았다.
이제 보니 대군이 회혼단을 복용한 것을 부인한 이유는 바로 묘가수의 묻
는 말에 의심스러운 점이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묘가수는 눈썹을 찌푸리고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회혼단은 무림 지보이자, 인간의 선단 묘약이오. 그러니 천하 무림에서
어느 누가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지 않겠어요."
대군은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도 세 알의 회혼단을 찾고 있는 것이군요."
묘가수는 냉랭하게 말했다.
"나는 이미 내 의도를 당신에게 알려 주었어요. 그러니 당신은 빨리 동지
에게 회혼단을 준 사람을 말해 주세요."
대군은 서서히 말했다.
"정진사태 양려명예요."
묘가수는 다급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녀는 지금 어디 있나요?"
대군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녀는 이미 돌아가셨어요."
묘가수는 눈썹을 치켜올리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터무니없는 소리 말아요. 만약 당신이 솔직하게 그녀의 전방을 말해 준
다면 나는 결코 섭섭히 대하지 않을 거예요."
몽천악은 돌연 처량하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묘낭자, 정진사태는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조방주님께서도 그녀의 법체
를 본 적이 있어요."
마검신군 조전신은 침울한 음성으로 말했다.
"정진사태는 삼천관의 미혼구동천 안에서 죽었소. 누가 그녀를 해쳤는지
는 지금까지 여전히 수수께끼요."
그러자 묘가수의 얼굴에 돌연 한 가닥 살기다 떠올랐다. 갑자기 대군의
가슴팍을 향해 곧장 일 장을 쳐갔다.
대군은 미소를 짓고 손을 가볍게 뒤집었다. 그리고 그녀의 장식을 풀어
버리고 말았다.
"우리들은 아무런 원한이 없습니다. 그러니 갑자기 당신이 독수를 쓴다는
게 이상하군요."
묘가수는 냉랭하게 말했다.
"만약 지금 내가 당신을 죽이지 않으면 삼년 후 당신은 무림의 제일 고수
가 될 거예요."
이렇게 말하는 묘가수의 몸이 탁자를 떠나 위로 솟구치더니 쉭쉭하는 소
리와 함께 극도로 괴이하고 번개 같은 삼 장을 연속 공격해 냈다.
몽천악과 조전신은 그녀의 장식을 보자, 안색이 약간 변했다. 이때서야 그
들은 겨우, 이 묘녀의 무공이 악랄한 수법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결코 대군도 약과가 아니었다.
그녀의 버드나무 같은 허리가 단지 몇 번 번쩍 번쩍 움직이자 묘가수의
공격을 전부 피해 냈다.
대군은 애교있게 웃으며 물었다.
"당신의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설마 대수롭지 않은
회혼단 한 알이 나를 초인으로 만들 수 있단 말입니까?"
묘가수는 삼 장을 공격해 낸 뒤 돌연 공격 자세를 거두어들이고 한걸음
물러선 채 냉랭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의 무공은 과연 훌륭하오, 그러나 감히 나의 일 장을 다시 받아 내
지 못할 거요."
몽천악은 묘가수의 이번 출격이 분명히 매서운 살수임을 알았기 때문에
다급하게 외쳤다.
"묘낭자, 잠깐만. 내가 할 말이 있습니다."
조전신도 침울한 음성으로 말했다.
"낭자, 잠깐만 멈추시오. 내게도 물어볼 말이 있소이다."
묘가수는 말했다.
"당신은 패혈문의 일을 물으려고 합니까?"
조전신은 말했다.
"그렇소. 우리들은 패혈문을 물어 우리들을 상하게 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려고 하오."
묘가수가 말했다.
"나예요."
조전신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만약 당신이라면 우리들은 마음을 놓았소이다."
묘가수는 냉랭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들은 누가 나에게 패혈문을 풀어 당신들을 상하게 하도록 부탁한지
아십니까?"
몽천악이 놀라며 물었다.
"누구입니까?"
묘가수가 대꾸했다.
"바로 흑마왕입니다. 내가 당신들로 하여금 두 알의 패혈문 해약을 복용
케 한 것도 흑마왕이 나에게 주었던 것이오. 당신들 두 사람은 이미 흑마
왕의 암산에 빠져 당신들의 목숨은 완전히 그의 수중에 있다고 말할 수
있어요."
이와 같은 말을 듣고 있던 조전신과 몽천악은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대군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흑마왕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 같군요? 흑마왕은 도대
체 누구인지요?"
묘가수는 냉랭하게 말했다.
"물론 나는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어요. 그러나 나는 당신에게 알려 주지
않은 거예요."
대군은 한 줄기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은 흑마왕이 누구인지 모를 거요. 만약 알았다 해도 가짜 흑마왕일
거예요."
묘가수는 움찔하며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가짜란 것을 알 수 있는지요?"
대군은 말했다.
"나는 이미 당신이 오늘 한 말들이 모두 거짓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묘가수는 말했다.
"거짓말이건 사실이건, 여하튼 당신들 세 사람은 죽을 날이 멀지 않았어
요."
몽천악은 돌연 냉랭하게 말했다.
"죽음은 결코 두려운 일이 아니오. 사람이란 언제고 한 번은 죽어야 하니
까."
묘가수는 고개를 돌려 그를 한 번 바라보고 말했다.
"만약 당신이 나를 믿을 수 있다면 나는 당신들을 구해 줄 수 있어요."
대군은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무슨 교환 조건이라도 있나요?"
묘가수는 냉랭하게 웃으며 말했다.
"생명을 구해주는 사람은 부모와도 같은 거요. 어찌 내가 아무 조건 없이
남을 구해 주겠어요."
대군은 말했다.
"무슨 조건인지 말해 보세요."
묘가수는 말했다.
"다만 당신들이 나를 대신해서 옥안서생 용오운을 죽이면 되는 거예요."
대군은 말했다.
"이런 일이라면 당신 말을 따르겠어요. 그러나 지금 잔결서생은 반신불수
가 되어 있어요. 그러니 당신은 우선 그를 고쳐 놓고 볼 일이 아니에요?"
묘가수는 말했다.
"그가 반신불수가 된 것은 바로 한 줄기 진기가 죽고 사는 혈맥으로 막혀
버리게 했으니 다만 가볍게 일 장을 쳐내 미용혈을 격중시키면 이 병은
곧 치료될 거예요."
이렇게 말을 하자, 묘가수는 갑자기 한쪽 발을 날려 일으켰다. "팍!" 하는
소리와 함께 몽천악의 몸이 곧장 퉁겨 일어나도록 걷어찼다.
내려앉은 뒤 몽천악은 이미 정신이 상쾌하고 사지가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대군은 물었다.
"사형, 이젠 괜찮아요?"
몽천악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괜찮소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살인을 하러 가지 않으면 안될거요."
대군과 조전신은 묘가수의 귀신과 같이 정통한 의술 진단에 놀라움을 금
치 못했다.
그들은 묘가수가 거짓말을 한 줄 알았었다. 또한 그녀가 발로 가볍게 한
번 걷어차 몽천악의 병을 고칠 줄은 생각지 못했다.
조전신은 돌연 처량하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낭자의 뛰어난 의술에 정말 감탄하는 바요. 우리들 두 사람의 몸에 정말
로 흑마왕의 독이 중독 되어 있는지 낭자께서 명확한 판단을 내려 줄 수
있기를 바라오."
묘가수는 웃으며 말했다.
"물론 당신들은 흑마왕의 독물 암산에 빠졌소. 그러나 고루장의 기한이
되기 전에는 결코 발작하여 목숨을 잃지 않을 거예요."
몽천악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건 때가 되면 알게 되겠지요. 묘낭자에게 묻겠는데, 옥안서생 용오운은
지금 어느 곳에 있습니까?"
묘가수는 말했다.
"오늘밤, 용오운은 낙양교 부근에 출현할 거예요. 당신들은 바로 그곳에서
그를 저격하세요. 그리고 명심하세요. 당신들 몸에 잠복해 있는 독은 나
한 사람만이 치료할 수 있어요. 절대로 자신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 마세
요. 나는 이만 가 보겠어요."
대군은 그녀가 가려는 것을 보자 다급하게 불렀다.
"잠깐!"
묘가수는 말했다.
"무슨 일이 있나요?"
대군이 말했다.
"옥안서생, 용오운은 결코 보통 무림 고수가 아니오. 그러므로 만일 우리
들이 그를 죽일 수 없다면?"
묘가수는 냉랭하게 말했다.
"물론 그들은 결코 약자가 아니에요. 그러나 적을 해치지 못하면 자신이
곧 피해를 입을 것이오."
대군은 말했다.
"또 한 가지, 당신은 정말 그들 몸에 잠복해 있는 독을 치료할 능력이 있
어요?"
묘가수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믿고 안 믿고는 마음대로 하세요. 나는 이만 작별을 고하겠어요."
말을 마치자 그녀는 재빠르게 청당을 걸어 나와 떠나갔다.
조전신은 처량하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장강의 뒷 물결은 앞 물결을 밀고 일대의 신인이 구인을 대치하니 노부
는 이미 확실히 늙은 것을 느꼈네."
마검신군 조전신은 지난날 자기가 강호를 휩쓸고 다니던 누구도 대적할
수 없었던 영웅시절이 떠올라 감개 무량함을 느꼈다.
대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조방주님, 어째서 한숨을 쉬십니까? 지금도 무림도에서 과연 몇 사람이
당신 수중의 그 마검을 이겨 낼 수 있겠어요."
조전신은 처량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당신들 같은 젊은 사람의 높은 무공을 보니 자신도 모르게 감개 무
량하는 바요. 아, 도소호나 무명검 한소룡이 만약 부상을 입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렇게까지 쓸쓸하고 외로운 생각이 들지 않았을 거요."
몽천악은 낭랑한 소리로 말했다.
"조방주님, 나와 대군이 조방주님쪽에 서 있소. 그러니 앞으로 어떤 심부
름이라도 우리들은 전력을 다할 것입니다."
조전신은 수염을 쓰다듬고 웃으며 말했다.
"몽노제의 이 말은 노부로 하여금 다시 영웅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는구
려."
몽천악은 돌연 물었다.
"조방주님, 후배는 오늘날 무림의 혼란한 정세에 임해 너무나 어리둥절함
을 느꼈습니다. 나는 흑마왕이라는 사람이 무림을 전복시키려는 음모가
도대체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습니다."
조전신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몽노제, 독비절도 유기는 자네에 대해 이미 약간의 진상을 말해 주었을
것이네. 그러니 이런 은원의 진상에 관해 똑똑히 아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는 것일세. 그 원인은 흑마왕이 도대체 누구인지 조차 아는 사
람이 없기 때문일세."
몽천악은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기는 조방주님도 어쩌면 흑마왕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던데, 조방주님
께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조전신은 고개를 끄덕이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렇네. 노부도 어쩌면 흑마왕일 것일세. 그러나 그것은 가짜 흑마왕이
며......"
여기까지 말을 하자 그의 말소리가 약간 머뭇거려졌다. 그러자 고개를 들
고 한참 생각을 한 뒤 말을 계속했다.
"가짜 흑마왕이 열거한 무림 십대 고수의 사람들은 모두 가짜 흑마왕의
혐의를 받고 있지. 이유는 삼십년 전에서부터 얘기를 해야 할 것일세."
조전신은 여기까지 말을 하자, 안색이 약간 변했다. 말소리를 갑자기 멈춘
뒤 냉랭하게 외쳤다.
"밖에 누구요? 어째서 좀도둑 같이 행동하는 것이오?"
외침 소리가 막 떨어지자 문 앞에 사람의 그림자가 번쩍이면서 독비절도
유기가 이미 청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가볍게 껄껄 웃은 뒤 말했다.
"조방주께선 언제 낙양에 오셨소이까?"
유기의 출현을 보자 몽천악은 속으로 움찔하며 생각했다.
'그들이 충돌을 일으켜 싸울지도 모르겠구나."
마검신군 조전신은 신색이 엄숙했으며 대담하게 대답했다.
"노부는 도소호와 한소룡이 부상당해 목숨이 경각에 달했다고 보낸 당신
의 편지를 받았소. 그래서 곧 낙양에 당도하여 절진신의 윤철초를 찾아갔
소. 그래서 용아와 호아를 위해 상처를 치료해 줄려고 하였소이다."
독비절도 유기는 물었다.
"방주께선 절진신의를 찾았소이까?"
조전신은 말했다.
"찾지 못했소."
유기는 물었다.
"나는 이미 절진신의 윤천초를 찾았습니다."
그의 당당한 말은 중인들로 하여금 속으로 움찔하게 만들었다. 몽천악은
선수를 써서 다급하게 물었다.
"절진신의는 어느 곳에 있습니까?"
독비절도 유기는 가볍게 몽천악의 옆에 놓여 있는 의자에 가서 앉았다.
공동묘지를 찾은 세 사람
그리고 나서 느릿느릿하게 말했다.
"그는 바로 낙양에 있네."
대군은 물었다.
"낙양, 어느 곳에 있는지요?"
유기는 그녀를 한 번 바라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은 이미 정신을 회복했구려."
이때 중인들이 모두 알고 싫어하는 일은 물론 절진신의의 행방이었다. 그
런데 유기는 고의로 화제를 돌려 엉뚱한 말을 해 버린 것이다.
그러자 대군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유선배님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동시에 또한 유선배님께서 빨리 절진
신의의 주소를 알려 주길 바라겠습니다."
독비절도 유기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만약 내가 절진신의의 주소를 알려 준다면 오늘 당신과 우리들은 이곳에
서 한걸음도 떠날 수 없을 것이오."
유기는 말을 하면서도 그의 두 눈은 시종 마검신군 조전신을 주시하였다.
몽천악이 이러한 상황을 보자 속으로 가만히 생각했다.
'유기가 갑작스럽게 칼을 빼어 들까? 만약 칼을 빼어든다면 조전신이 그
한 칼을 피해 낼 수가 있을까?'
조전신은 엄숙한 안색으로 앉아 있다가, 가장 엄하고 침울한 목소리로 말
하기 시작했다.
"유기, 듣자하니 당신은 무림의 자객이라 하더군요."
독비절도 유기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것은 방주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오."
조전신은 침울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나 당신은 노부가 어째서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줄 아시오?"
유기는 냉랭하게 웃으며 말했다.
"방주는 세 번이나 나를 상대하려고 한 적이 있소. 그러나 모두 성공하지
를 못하였소이다."
조전신은 담담하게 말했다.
"당신도 세 번이나 노부를 모살 하려고 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유기는 가볍게 웃음을 짓고 말했다.
"하나는 부하를 불신하고 하나는 상사에 불충했으니 우리들은 서로 없던
일로 해둡시다."
몽천악은 그들의 이와 같은 말을 듣자, 갑자기 처량하게 탄식을 하고 말
했다.
"유대협과 조방주님께서는 후배의 권고를 들어주시겠는지요. 지금 무림강
호에는 혼란이 극에 달해 있습니다. 만일, 당신들 두 분이 서로 신임하고
손을 잡는다면 이 기회에 궁한방은 분명히 천하에 위세를 떨치고 이름을
남길 것입니다."
독비절도 유기는 몽천악을 한 번 바라본 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자네에게 절대로 남한테서 이용을 당하지 말라고 일러 주고 싶네."
몽천악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이 물었다.
"누구한테서 이용을 당한단 말입니까?"
유기는 서서히 말했다.
"흑마왕일세."
몽천악은 말했다.
"흑마왕이 나를 이용해서 무엇을 한단 말입니까?"
유기는 말했다.
"자네와 대군을 이용해 옥안서생 용오운을 살해하려는 것일세."
몽천악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묘가수가 흑마왕이란 말입니까?"
유기는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그녀는 흑마왕이 아니라 흑마왕의 졸개일세."
몽천악은 더욱 놀라며 물었다.
"그 말이 정말입니까?"
유기는 말했다.
"절대로 거짓이 아니네."
대군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조금 전 우리들과 묘가수의 대화를 당신은 전부 들었겠지요. 기왕에 그
렇다면 당신은 아마 우리들이 살인을 응낙한 것이 어쩔 수 없었다는 것도
알 것입니다.
독비절도 유기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두 분이 만약 나를 믿는다면 오늘밤 낙양교에 가지 마시오."
대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의 사형은 이미 흑마왕의 고루장을 받고 몸에 독이 퍼져 있소. 유대협
께선 저의 사형이 며칠 안에 발작하여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아시는지요?"
유기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말했다.
"만약 나의 추측이 틀림없다면 지금까지 몽노제는 아직 흑마왕의 독물 암
산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오."
대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나 중독될 가능성은 있겠지요."
유기는 돌연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렇소. 중독될 가능성이 있소이다."
"그렇다면 유대협께서 절진신의를 모셔와 그로 하여금 한 번 검사하도록
해 보시오. 그러면 몸에 중독된 흔적이 있는지 없는지를 증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독비절도 유기는 고개를 흔들고 한숨을 길게 내쉰 뒤 말했다.
"절진신의는 이미 죽었소이다."
몽천악은 이 말을 듣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물었다.
"죽었다고요?"
몽천악은 마음속으로 지금 강호무림에서 흑마왕의 혐의가 가장 큰 사람이
절진신의 윤천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몽천악은 절진신의가 이미 죽었다는 말을 듣자 도저히 믿어
지지 않았다.
유기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는 매우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만약 당신들이 믿지 않는다면 나는 두
분을 데리고 가서 그의 시체를 보여 줄 수도 있소."
몽천악은 중얼거렸다.
"그가 만약 흑마왕이 아니라면 그녀가 어째서 글을 남겨, 나로 하여금 그
를 죽이도록 명하였을까...... 이건 정말 이상한데...... 이 일은 정말
아무리 생각을 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구나."
몽천악이 말하는 그녀란 물론 정진사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삼청관 안에 있는 미혼구동천의 비실 안 정진사태의 시체 밑에서 발견
된...... 절진신의를 죽여라...... 하는 글이 생각난 것이다.
그러므로 몽천악의 마음속에 줄곧 절진신의가 어쩌면 바로 그 신비스러운
흑마왕일 것이라고 의심했었다.
대군은 처량하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갑자기 절진신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정말 믿어지지가 않는군요.
아, 그 노인장은 생전에 나에게 잘 대해 주었어요. 그러므로 나는 응당
가서 그분의 영전에 제배를 한 번 올려야 겠습니다."
대군이 이렇게 말하자 유기는 그들을 절진신의 무덤으로 데리고 가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렇다면 두분은 나를 따라오시오."
마검신군 조전신이 돌연 말했다.
"몽노제, 자네들은 역시 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일세."
몽천악은 물었다.
"어째서 입니까?"
"사람은 죽으면 다시 살아나지 못하니 자네들이 간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
나?"
대군은 처량하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절진신의는 무림 십대 고수 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
공이 심후하므로, 후배는 정말 그 노인장이 죽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
습니다."
조전신은 담담하게 말했다.
"철장건곤권 호창부도 무공으로 이름을 떨쳤으나, 역시 살해를 당하지 않
았소?"
몽천악은 속으로 움찔하며 말했다.
"조방주님께선 아마 대강 범인이 누구인지 알고 게시겠지요?"
조전신은 서서히 말했다.
"어쩌면 흑마왕일 것일세."
독비절도 유기는 냉랭하게 웃으며 말했다.
"두 분은 나를 따라가겠소, 안 가겠소. 나는 곧 작별을 고하겠소이다."
대군이 재빨리 대답했다.
"유대협 길을 인도해 주세요."
이렇게 말하며, 그녀는 이미 유기를 따라 대청을 걸어 나갔다. 몽천악은
하는 수 없이 조전신을 향해 공수를 하고 말았다.
"조방주님, 후배는 갔다 곧 돌아오겠습니다."
이렇게 말을 마치자 몸을 돌리고 뒤따라갔다.
조전신은 혼자 청 안에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마 자네들은 돌아오지 못할 것일세.'
독비절도 유기와 몽천악, 대군 세 사람은 만흥객점을 떠난 뒤, 곧장 성 밖
을 향해 걸어갔다.
이때, 아직 새벽인 탓인지 길에는 행인이 적었다. 세 사람은 나는 듯이 빠
른 걸음으로 서쪽 성문을 걸어 나왔다.
그제야 유기는 겨우 길게 한숨을 내쉬고 몸을 세우며 말했다.
"두 분은 조전신과 같이 지낸 지 얼마나 되었소?"
몽천악은 눈썹을 찌푸리고 물었다.
"왜 그것을 물으십니까?"
독비절도 유기는 그를 한 번 바라보고 다시 물었다.
"당신들은 조전신이란 사람이 어떻다고 느끼시오?"
몽천악은 유기의 말속에 이간질시키는 뜻이 담겨져 있는 것을 느껴 자신
도 모르게 담담하게 대답했다.
"조방주님은 다른 사람들이 상상한 것처럼 그처럼 접근하기는 어렵지 않
습니다."
대군은 웃으며 말했다.
"유대협께선 조방주의 위인에 대해 아마 매우 익숙하겠지요."
독비절도 유기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나는 궁한방에 꼭 십년 동안 잠복해 있었소. 그렇지만 여전히 조전신의
속셈과 사람됨을 똑똑히 분간하지 못하고 있소이다."
몽천악은 이 말을 듣자 움찔하며 물었다.
"유대협께서 궁한방 안에 잠입한 것이 설마 조전신의 사람됨을 조사하기
위해서는 아니겠지요."
독비절도 유기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렇다네. 내가 궁한방에 들어간 것은 복잡하고 수수께끼에 싸인 한 가
지 무시무시한 내용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네."
대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떤 무시무시한 내용인지 알려 주실 수 있겠는지요?"
유기는 돌연 걸음을 옮겨 교외의 들판을 향해 걸어가면서 말했다.
"이 무시무시한 내용은 삼십여년 전의 일이며...... 아!"
여기까지 말을 하자 그는 돌연 한숨을 내쉰 뒤 말을 이었다.
"이 무시무시한 내용은 무림도의...... 수많은 무림 고수들의 명예에 관
계 되는 일이오. 그러므로 확실한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오늘날 나는 감
히 입을 열지 못하겠소."
유기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흑마왕이 이미 낙양에 나타났소. 진상은 곧 밝혀질 것일세."
몽천악은 말했다.
"또 흑마왕이군요. 도대체 그는 어떤 인물입니까?"
그러나 유기가 입을 다물고 있자 대군이 말했다.
"유대협, 절진신의의 시체가 어느 곳에 있어요?"
유기는 말했다.
"성 서쪽 삼 리 밖에 있는 공동묘지 안에 있네."
대군은 말했다.
"공동묘지라고요? 그곳은 타향 사람들로 하여금 잠시 영구를 기탁하는 곳
이 아닙니까?"
유기는 말했다.
"절진신의는 죽은 뒤, 어떤 사람에 의해 관에 담겨져서 공동 묘지로 옮겨
져 온 것이오."
대군은 갑자기 물었다.
"유대협께선 절진신의의 얼굴을 알고 있습니까?"
독비절도 유기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내가 낭자를 데리고, 공동묘지에 가는 목적은 바로 당신으로 하여금 죽
은 사람이 절진신의가 분명한지 확인하려는 것이오. 그것은 당신과 무아
진교 제일총교주, 그리고 정진사태 등만이 윤천초의 얼굴을 알고 있기 때
문이오."
대군은 가볍게 "아." 소리를 내고 말했다.
"그렇다면 유대협께선 그런 목적으로 만흥객점에 있는 절 찾아오신거군
요?"
유기는 말했다.
"또 한 가지 일은 당신들로 하여금 조전신에게서 멀리 떠나도록 하려는
것이오."
몽천악은 말했다.
"어째서 입니까?"
유기는 말했다.
"조저신에게 흑마왕의 혐의가 있기 때문일세."
몽천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유대협께도 흑마왕의 혐의가 있지 않습니까?"
유기는 말했다.
"그렇네, 나는 어젯밤에 이미 무림 십걸에 열거된 사람은 모두 흑마왕의
혐의가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지. 내가 지금 자네들을 데리고 절
진신의의 시체를 확인하러 가는 의도를 아는가? 그것은 바로 점차적으로
혐의가 있는 사람을 제외시켜 전정한 원흉의 정체를 밝히는 데 있지."
대군은 돌연 물었다.
"무림 십걸 중의 몇 사람이 흑마왕의 협의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유기는 말했다.
"이미 다섯 분이 있소이다."
대군은 말했다.
"다섯 분이란 누구인지요?"
유기는 말했다.
"고라신승, 호창부, 귀곡선생, 그리고 무림정려, 송연부부 등 다섯 사람이
오."
대군은 말했다.
"만약 유대협 자신과 절진신의를 포함시킨다면 일곱 분이겠군요."
유기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렇소이다. 나머지 혐의가 있는 세 사람은 바로 조전신과 팔검비상 진
삼청 그리고 옥안서생 용오운이오."
대군은 고개를 들고 전방의 푸른 대나무 수풀을 한 번 바라 본 뒤 말했
다.
"공동묘지에 이미 당도했어요."
몽천악은 이 말을 듣자, 고개를 들고 사방을 훑어보았다. 이십여 장 밖에
대나무 수풀이 나타났다.
그 푸른 대나무 수풀속에 희미하게나마 장원 한 채가 보였다.
독비절도 유기는 앞장 선 채 첫번째 별채의 담장 밖에 당도하자 걸음을
멈춘 뒤,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당신들은 이곳에 온 적이 있소?"
대군은 말했다.
"낙양의 공동묘지는 바로 천하에서 이름난 명승 고적이오. 나는 세 번 온
적이 있소."
몽천악은 이때 전방의 경치에 마음이 쏠린 듯 두 눈으로 멍청히 죽림 아
래의 관 하나 하나를 바라보면서 넋을 빠뜨렸다. 이제 보니 이 공동묘지
는 뜰 밖 푸른 대나무숲 아래 여기 저기에 놓여져 있었다.
이때, 눈길을 들고 바라보니 첫번째 별채의 뜰에는 사방으로 푸른 대나무
가 빽빽하게 심어져 있었다. 붉은 칠을 한 관들이 대나무 숲의 그늘 아래
가득히 수백 개나 놓여져 있는 모습이 음산하고 처량하며 불안스러웠다.
공동묘지는 전부 열일곱 개의 별채가 있었다. 죽림은 이 리 정도나 뻗어
나가 있었다.
그렇다면 죽림 아래에 놓여진 관도 수없을 것이다.
유기는 몽천악을 한 번 바라보고 말했다.
"몽노제는 공동묘지에 온 적이 없으니 결코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게. 잘
못하면 길을 잃으니."
이렇게 말하며, 유기는 두 사람을 데리고 곧장 첫번째 별채를 향해 걸어
갔다.
이제 보니 공동묘지의 열일곱 별채의 한 채마다 열여덟 사람의 화상이 관
리하고 있었다.
유기는 첫번째 별채에 들어선 뒤 한 사람의 주지 화상에게 온 뜻을 설명
했다.
그리고 대군과 몽천악을 대동한 채 아홉 번째 별채에 당도했다.
아홉 번째 별채의 주지 화상은 몸집이 비대한 사십 전후의 사람이었다.
목에 염주를 걸고, 황색의 가사를 입고 있었다.
그는 유기와 이미 친숙한 듯했다. 유기가 다가오자 맞이하러 나와서 두
손으로 합장을 하고 말했다.
"유시주, 어떻게 이처럼 일찍 오셨습니까?"
독비절도 유기는 고개를 끄덕이고 답례한 뒤 말했다.
"나는 돌아가신 분의 옛 친구를 데리고 제배하러 왔습니다. 대사께서 나
를 위해 약간의 향과 초, 그리고 지전을 좀 준비해 주시오."
황의의 가사 화상은 합장하고 말했다.
"세 시주께선 잠깐 앉으십시오. 빈승이 곧 사람을 시켜 준비토록 하겠으
니까요."
뜨락 한 가운데가 바로 손님을 모시는 청당이었다. 유기와 몽천악, 대군
세 사람은 청당 옆의 의사에 잠시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에 화의 화상이 손에 조그만 바구니를 든 젊은 황의의 화상을 데
리고 와서 말했다.
"오랫동안 기다리셨습니다. 빈승이 두 제자를 시켜 세 분의 시중을 들도
록 하겠습니다."
몽천악은 두 화상이 들고 있는 바구니 속의 물건이 바로 지전과 향, 초등
의 물건임을 알았다.
유기는 품 안에서 은 부스러기를 약간 꺼내 뚱뚱한 황의의 화상에게 건네
주고 말했다.
"그럼, 젊은이 두 분에게 수고를 끼치겠소이다."
뚱뚱한 황의의 화상은 은부스러기를 받아들고 말했다.
"유시주의 희사에 감사드립니다."
이때, 젊은 화상은 유기 등 세 사람을 데리고 대청으로 걸어 나가 푸른
대나무 무덤 수풀 안으로 들어갔다.
이때는 바로 아침 여섯 시쯤 이어서 밖은 이미 찬란한 햇빛이 높은데서
내리 비쳤다.
그러나 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수풀 안은 황혼 무렵과 같아 시종 태양을
볼 수가 없었다.
몽천악은 두 사람의 화상을 바싹 따르며 푸른 대나무 수풀 안을 가로지른
조그만 길을 걸어 나갔다.
그러자 오래된 관이 무수하게 놓여져 있는 것을 보았다. 한 곳의 흙더미
앞에 당도하니 두 화상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강시 괴인
몽천악은 눈빛이 예리하여 단번에 흙더미 앞의 높이 석 자 넓이 두 자의
비석 위에 글자 몇 개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았다.
'윤천초 안식지소(尹千草 安息之所).'
대군은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비석 위에 써 있는 글은 누가 새긴 것이오?"
유기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관을 맡긴 사람이 이곳의 주지에게 분부하여 새긴 것이오."
그들이 말을 하고 있는 동안 두 젊은 화상은 이미 힘을 합해 그 비석을
옮겨 놓았다.
이제 보니 흙더미 속은 하나의 동굴이었다. 붉은 칠이 된 커다란 관 하나
가 동굴 안에 놓여져 있었다.
대군은 가볍게 "아!" 소리를 내고 말했다.
"두 분 사부님께선 향, 초, 지전을 남겨 두고 돌아가 주세요.
이곳엔 할 일이 없으니 두 시간 뒤에 다시 데려가 주세요."
두 젊은 화상은 대군의 분부를 받들어 조그만 바구니 두 개를 남겨 두고
물러갔다.
이때, 대군은 향, 초 등 제사에 쓰는 물건을 꺼내면서 말했다.
"유대협, 당신께선 어떻게 절진신의 시체가 이곳에 놓여져 있는 것을 발
견했는지요?"
유기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나는 흑마왕의 한 수하의 입을 통해서 알아낸 것이오."
대군은 다시 물었다.
"그 사람은 어디 있는지요?"
유기는 말했다.
"죽었소, 괴이하게 독이 발작하여 죽었소이다."
대군은 말했다.
"유대협께선 이미 이곳에 와 본 적이 있는지요?"
유기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어제 한 번 와 보았소, 또한 관속의 시체도 살펴보았소이다."
대군은 말했다.
"시체는 어떠한 모양이던가요?"
유기는 말했다.
"머리카락은 흐트러졌고, 얼굴의 일곱 구멍에서 피가 흘러나와 보기 흉하
고 징그러웠습니다. 시체의 가슴팍에는 고루자국이 나타나 있었소."
대군은 다시 물었다.
"유대협께선 죽은지 며칠이나 됐는 지를 알 수 있었습니까?"
이 물음에 유기는 가볍게 "오!" 소리를 내고 말했다.
"흐르는 피가 새빨갛고 피부에 얼룩이 없어 금방 죽은 사람 같았소이다."
여기까지 말하자, 그는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이상하다. 피가 흘러나온 시체를 볼 때 잠시만 지나도 혈색이 곧 자홍색
으로 변하는데 그러나 그 피는 마치 방금 흘러나온 것처럼 새빨갛던 것
같군."
대군은 눈썹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대협께서 관을 열 적에 어떤 향기를 맡았는지요?"
유기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알았소! 한 줄기 향기를 맡았는데, 당신이 어떻게 그것을 아는지요?"
대군은 갑자기 처량하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잠시만 지나면 흘러나오던 혈액이 곧 변색하는데 그것이 오히려 새빨갛
다니 이상하군요. 그렇다면 분명히 관속에 방부제를 넣은 거예요. 대협께
서 관을 열 때 흘러나온 그 향기가 바로 방부제의 냄새였을 거예요."
유기는 말했다.
"내가 다시 관을 여는 게 어떻겠소?"
대군은 말했다.
"여세요!"
독비절도 유기는 손을 내밀어 관을 매놓은 밧줄을 잡아 당겨서 관을 굴에
서 끌어내었다.
그리고 나서 천천히 관 뚜껑을 열었다. 징그럽고 무서운 시체 한 구가 일
곱 구멍에서 피를 흘리고 눈을 무섭게 뜬 채 관 속에 누워 있는 것이 보
였다.
관 뚜껑이 일단 열리자 과연 담담하고 이상한 향기가 한 줄기 흘러 나왔
다.
대군은 대담하게 관에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시체를 훑어보았다. 한참 동
안 어떠한 낌새나 말소리가 보이거나 들리지 않았다.
유기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
"죽은 사람은 절진신이요?"
대군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얼굴 모습이 이미 변해 한 번에 확인해 낼 수가 없군요."
이때 갑자기 수장 밖에서 돌연 "꺽 꺽-꺽." 하는 괴음이 울려왔다.
몽천악의 눈빛이 극도로 예리하게 칠장 밖의 푸른 대나무 숲 아래 오래된
관 하나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관 뚜껑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꺽 꺽-꺽."
이러한 괴음은 바로 관 뚜껑이 움직일 때마다 들려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속으로 냉기가 스쳐 가는 것을
느꼈다.
다행이 그들 세 사람은 모두 싸움에 경험이 풍부한 무림 고수들이었기 망
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정말 놀래 도망쳤을 것이다.
관 뚜껑은 네 번을 뛴 뒤,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고요해졌다.
독비절도 유기는 갑자기 냉소를 짓고 외치며 물었다.
"관 속에 누가 숨어 있는냐? 만약 빨리 나오지 않으면 나는 정말 관속에
네가 시체가 되도록 만들 것이다."
대군은 이때, 안색이 매우 심각해진 채 서서히 말했다.
"유대협, 우리들은 이미 적에게 포위된 것 같습니다."
유기는 말했다.
"나는 주위의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느꼈습니다."
몽천악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도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유기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귀신이건 유령이건 혹은 천군만마이건 간에 독비절도와 잔결서생, 그리
고 섭혼마녀 세 사람이 힘을 합치면 모든 돌변에도 족히 응수할 수 있을
것이네."
그의 이 한마디 말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지금 천하무림에서 어느 누가 그들의 힘을 당해 낼 수가 있겠느냐?"
바로 이때, 멀리 떨어져 있는 죽림속에서 돌연 "삭삭삭......" 하는 낙엽
을 밟는 발자국 소리가 울려 왔다.
그 소리는 사면 팔방에서 바짝 다가오는 것 같았다. 유기와 몽천악, 대군
등 세 사람은 이때서야 겨우 적이 사방에 잠복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더욱 이상한 것은 "삭삭삭." 하는 낙엽 밟는 소리가 계속되는 데
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었다.
유기는 돌연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리며 외쳤다.
"적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빨리 모습을 나타내라. 더 이상 어떤 잔재주를
부리지 말아라. 우리들은 절대로 속아넘어가지 않을 것이니까."
말소리가 일단 떨어지자 "삭삭삭......" 하는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
멈추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시 그 관의 뚜껑이 "꺽꺽...... 꺽." 하며 위를 향해
뛰었다.
그 관이 괴상한 소리를 내자 갑자기 많은 관의 뚜껑이 모두 "꺽꺽...
...꺽." 하고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몽천악 등 세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모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
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때가 대낮이었기에 망정이었지 만약 저녁이었더라면 상황은 더욱
놀랍고 놀라웠을 것이다. 유기의 안색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의 두
눈은 앞서 뛴 적이 있던 관을 번개처럼, 한 번 훑어보고 나서 말했다.
"전부 열세 개의 관속에 귀신 유령이 숨겨져 있구나."
이렇게 말을 하자 독비절도 유기는 번개와 같이 재빠르게 제일 먼저 뚜껑
에 뛰고 있는 하나의 관을 향해 덤벼들었다.
그의 신법은 매우 빨랐다. 그러나 그의 절도는 더욱 빨랐다. 그러자 칼빛
이 번쩍이는 듯이 보이면서 허리춤에 매어져 있던 괘도가, 뛰고 있는 관
뚜껑을 찌르고 들어갔다.
관뚜껑은 더 이상 뛰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닥의 신음 소리나 비명도 들
리지 않았다.
독비절도 유기의 몸은 질풍노도와 같이 빠르고 칼은 번개와 같이 빨랐다.
그의 절도가 이미 연속 일곱 개의 관은 찌르고 들어갔다.
그러자 갑자기 한바탕 늑대의 울음과도 같고, 귀신의 곡소리 같은 괴상한
웃음과 함께, 동굴 입구의 관뚜껑들이 회오리바람처럼 날아가 버렸다.
그러자 여섯 개의 도깨비와도 같고 시체 같은 괴물들이 일제히 관 앞에
출연하였다.
유기는 한바탕 득의양양하고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고 말했다.
"너희들은 어째서 계속 관속에 숨어 있지 않느냐?"
이렇게 말하며 유기의 칼날이 한 번 휘둘러지자 눈 같이 희고 차가운 절
도가 이미 칼집 안으로 다시 들어가 버렸다.
그와 동시에 유기는 몽천악과 대군 곁으로 물러났다.
대군은 유기의 날카롭고 매서운 칼쓰는 법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놀라며 찬사를 올렸다.
"유대협의 칼쓰는 법은 확실히 천하에서 독보적이오. 칼이 번뜩이기만 하
면 사람은 물론 귀신 조차도 간담이 서늘해집니다."
독비절도 유기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몽천악을 향해 말
했다.
"몽노제, 저 여섯 사람을 자네의 절검을 이용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
게나."
몽천악은 눈썹을 찌푸리고 낭랑한 소리로 말했다.
"그들이 만약 우리를 향해 덤벼 오지 않는다면 쓸모없이 살생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유기는 말했다.
"거의 사람과 같지 않은 저들의 꼴을 보더라도 좋은 사람이 아님이 분명
하오. 그런데도, 자네는 저들에게 무슨 자비를 베풀려 하는가?"
이렇게 말하자마자 유기의 몸이 다시 날아갔다.
그러자 그 여섯 명의 도깨비와도 같고 시체와도 같은 괴인들은 일제히 한
바탕 괴상한 고함을 지른 뒤, 갑자기 각자 팔을 벌려 옆에 놓인 빈 관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흉악스럽고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며, 유기를 향해 덮쳐 갔다.
몽천악과 대군은 이것을 보자 깜짝 놀랬다. 그들 여섯 개의 도깨비와도
같고 시체와도 같은 괴인들은 힘이 비할 데 없이 컸다.
놀랍게도 각자 엄청난 관을 통째로 들어올려 무기로 대신할 줄을 생각지
못했다.
이때, 무게가 백근정도나 되는 여섯 개의 관이 일제히 유기의 몸을 향해
날아갔다.
유기가 어찌 막아낼 수 있겠는가?
독비절도 유기는 이 광경을 보자 두 눈을 부릅뜨고 산전도 쩌렁쩌렁 울리
는 외마디의 커다란 휘파람 소리를 지른 뒤, 그의 절도 절기를 전개했다.
그러자 그의 허리춤에서 긴 칼이 쳐나가자 허공에서 칼을 휘두르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태산과 같은 힘에 의해서 여섯 개의 관이 썩고 말라 비틀어진 나
무조각처럼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동시에 칼빛이 번개 같이 번쩍였다. 칼의 흰빛과 피의 붉은 그림자의 하
나는 기울어 졌다. 여섯 명의 도깨비와도 같고 시체와도 같은 괴인들이
이미 머리가 잘려져 나가 일제히 유기 주중의 칼 아래에 원혼이 된 것이
다.
유기가 이 일초의 절기를 발휘하여 여섯 사람을 쳐죽인 뒤 막 칼날을 돌
려 핏자국을 닦으려고 할 무렵이었다.
멀리서 갑자기 한 줄기 괴이한 말소리가 울려왔다.
"유기, 오늘에서야 나는 겨우 네가 그 광풍이 불어 뼈를 가루로 만드는
무시무시한 칼쓰는 법을 보았구나. 하하하...... 유기의 절기가 일단 노
출되었으니 이미 죽음이 멀지 않았구나."
유기는 말을 듣자, 안색이 돌변했다. 그리고 침울한 음성으로 외쳤다.
"귀하는 흑마왕이요?"
몽천악과 대군은 이 괴이하게 맴도는 말소리에 대해 이미 귀에 익은 것
같이 느꼈다.
"이 말소리는 바로 흑마왕의 것이 아니고 누구이겠느냐?"
그러자 독비절도 유기가 마치 대적을 만난 듯이 침중히 왼팔로 칼을 하늘
로 향해 들어올렸다.
그리고 두 눈에는 날카로운 빛을 번쩍이며, 사면 팔방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몽천악과 대군도 각자 자리를 옮기자 두 사람과 유기 세 사람은 적의 돌
습을 방어할 수 있는 삼각형의 위치에서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분위기는 일시에 긴장되고 공포에 휩싸여 버렸다.
괴이하게 맴도는 말소리가 한참 동안 멈추었다가 다시 울려 나왔다.
"그렇다. 나는 흑마왕이다. 매우 오래 전부터 나는 너에게 손을 쓰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너의 도법의 일 초의 오묘함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머뭇거리며, 너에 대해 손을 쓰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오늘 내가 훈련해 낸 여섯 명의 수하가 조금 전에 너를 향해 관을 들어서
던지자, 너는 광풍이 불어 뼈를 가루로 만드는 무시무시한 도법을 발휘
했던 것이다. 유기, 너의 수법은 바닥이 드러났다. 하하하......"
독비절도 유기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흑마왕, 네가 나의 절도를 피해 낼 수 있다고 한다면 어째서 모습을 나
타내어 일격을 부딪쳐 보지 않느냐?"
흑마왕의 우렁차게 맴도는 얻음 소리가 멈춰지자 냉랭하게 말했다.
"너의 신변에는 아직 잔결서생과 대군이 있다. 본왕이 나타나 일격을 가
할 경우 아직 단 한 번에 세 사람을 쳐 죽일 수 있는 자신이 없다. 그러
므로 본왕은 잠시 출수하지 않는 것이다."
몽천악은 갑자기 커다란 소리로 외치며 물었다.
"흑마왕 절진신의는 혹시 당신이 죽인 것이 아닌 지요?"
그러자 흑마왕이 담담하게 대답하는 것이 들렸다.
"가슴팍에 고루인은 찍은 것은 나말고도 또 다른 사람이 이러한 특기무기
로 했는지도 모르지."
몽천악을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죽은 사람은 정말 절진신의 윤천초입니까?"
이 물음은 흑마왕으로 하여금 마음속이 움찔케 한 모양이었다.
잠시 머뭇거리고 나서야 겨우 말소리가 들렸다.
"물론 진짜 절진신의일세."
몽천악은 말했다.
"나는 절진신의가 그처럼 쉽사리 당신에게 피살되었다고는 믿지 않소이
다."
흑마왕은 말했다.
"그는 이미 관 속에 죽어 있으니, 자넨 믿지 않아도 믿어야 할 결세."
대군은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
"흑마왕, 나는 이미 당신이 어느 곳에 숨어 있는지 알겠어요."
대군의 말 소리가 막 떨어지자 옆에 있던 독비절도 유기가 고개를 들고
외마디 길다란, 휘파람 소리를 울렸다.
마치 몸이 새가 하늘을 나르듯이 칠 장 밖의 푸른 대나무 하나를 향해 날
아갔다.
이것을 본, 대군은 대경 실색하며 외쳤다.
"사형, 우리 빨리 유대협을 엄호해 드려요."
이렇게 말하며 그녀는 앞장서서 날아나갔다.
몽천악도 검을 뽑아든 뒤 허공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러자 와르르하고 한바탕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유기가 손 안에 쥐고 있던 긴 칼이 허공을 가로지르면서 한 묶음의 푸른
대나무를 잘라 놓은 것이다.
이 한 묶음의 푸른 대나무는 한그루 한그루가 모두 대접만큼이나 굵은 것
이 일고여덟 개나 있었다.
그런데 유기는 한칼로 놀랍게도 단번에 여덟 그루를 짤라 놓았다. 그 칼
날의 날카로움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금치 못하게 했다.
유기의 한 칼은 결코 허탕을 치지 않았다. 와그르르 쓰러진 대나무 기둥
속에서 한 줄기의 피가 샘물처럼 뿜어 나왔다.
유기의 허공에 뜬 몸이 가지런히 허공을 가로 저으며 잘려진 대나무 위에
내려앉았다.
"휙! 휙!" 하는 소리와 함께 몽천악과 대군도 동시에 대나무 위에 내려앉
았다.
여섯 개의 눈이 동시에 여덟 그루 대나무 한가운데에 끼어 있는 머리가
없어진 피투성이의 시체 한구를 주시했다.
그들의 마음속에 각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흑마왕이 이처럼 한 칼에 목숨이 끊어졌단 말인가?'
그들은 흑마왕이 이처럼 쉽사리 피살되리라고는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쿨럭...... 쿨럭."
이 피투성이의 시체에서 뿜어 나오던 혈액은 이미 멎어 버렸다.
그러자 유기는 돌연 극도로 득의 양양한 듯 한바탕 광소를 터뜨리고 말했
다.
"죽었다! 흑마왕이 드디어 죽었다!"
그러나 이 말소리가 채 끝나기 전에 괴이하게 떠도는 말소리가 다시 울려
나왔다.
"유기, 본왕은 아직 죽지 않았소. 죽은 사람은 본왕의 한 유력한 조수였
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것은 너의 절도가 확실히 매서운 사실이다.
그렇지만 너는 이번에 다시 몇 수의 도식을 써서 너의 심오한 수법을 누설
시켜 너의 수법의 바탕이 드러난 것이다."
이와 같은 말을 들은 유기는 안색이 크게 변하며 노한 음성으로 외쳤다.
"흑마왕, 이리 나와서 나와 오백여 번이라도 대전해 보자. 그렇지 않으면
너는 망할 놈이다."
흑마왕은 음흉스럽게 냉소를 짓고 말했다.
"유기, 살인은 네놈이다 했다. 어째서 너는 직접 출수하지 않고, 남을 시
켜 칠팔 명의 무림 고수를 죽이지 않았느냐? 마검신군 조전신은 너를 찾아
따질게다. 하하하."
갑자기 대군은 아 소리를 내고 놀랜 듯이 외쳤다.
"시체와 관이 사라졌어요!"
인간 부호
몽천악, 대군, 유기 등은 일제히 그 언덕 위로 날아 내렸다.
그러나, 그 언덕의 동굴은 텅 비어 있었으며, 관(棺)과 함께 절진신의의
시체는 온데간데가 없었다.
대군은 가볍게 한숨을 지었다.
"시체가 없어졌으니 죽은 사람이 정말 절진신의인지 믿을 수가 없군요."
몽천악이 큰소리로 말했다.
"시체가 들어 있는 관은 상당히 무거워 그들은 별로 멀리 가지 못했을 테
니, 우리 나누어 수색해 봅시다."
유기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리 사방은 대나무밭이오. 만약 그들이 영구를 다른 관에 감추었다면
그걸 어떻게 찾을 수가 있겠소."
대군이 말했다.
"사실이에요. 여기에는 만여 개나 되는 많은 무덤이 있는데, 어떻게 그 시
체를 찾을 수가 있겠어요."
몽천악은 탄식을 발했다.
"적은 순식간에 시체를 관에 옮겨 버렸으니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오."
대군이 돌연 입을 열었다.
"절진신의의 시체가 사라져 버린 상황을 보면 그는 아직도 죽지 않은 것
만 같아요."
유기가 말했다.
"시체의 가슴팍에 고루인이 나타나 있었으니 이는 흑마왕의 손에 죽은 게
분명하오."
대군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흑마왕이 만약에 절진신의를 죽였다면 그는 절대 비석 위에다 윤천초의
이름을 새겨 놓지 않았을 거예요."
유기가 말했다.
"그럼 아가씨의 말은 그 시체는 흑마왕이 죽이지 않은 것이란 말이오?"
대군이 말했다.
"그야 당연하지요. 만약에 그 시체가 흑마왕이 죽인 거라면 그는 오늘 이
처럼 애써 시체를 관 채로 훔쳐 가지 않았을 거예요."
유기가 물었다.
"그럼 아가씨는 죽은 사람을 누구라고 보시오?"
"그건 이름 없는 시체에 지나지 않아요."
유기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에게 해를 당한 것일까요?"
"그 사람을 살해한 흉수야말로 진짜 절진신의 본인이에요."
몽천악은 묵묵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자 크게 깨닫고 즉시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그 흉수는 바로 절진신의입니다. 그가 가짜 시체를 만든 의도
는 무림 사람들에게 그가 죽었다는 것을 퍼뜨리기 위한 것입니다."
유기는 깊은 한숨을 내뿜었다.
"일리가 있는 말이오. 당금 천하 무림도에서 절진신의의 행방을 찾으려는
사람이 흑마왕 한 사람뿐만이 아니니까요."
몽천악이 갑자기 말했다.
"나는 절진신의 자신을 바로 흑마왕으로 간주합니다."
대군이 말했다.
"오늘 발생한 사건을 합리적으로 판단할 때 윤천초는 절대 흑마왕이 아니
예요."
유기가 말했다.
"절진신의가 흑마왕일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오."
몽천악이 물었다.
"사매는 어떻게 윤천초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지?"
대군은 처량하게 한숨을 지었다.
"이 리 사방의 대나무밭......, 공동묘지는 소름끼칠 영구와 동굴로 충만
되어 있어요. 제가 만약 원수의 추적을 피하려 한다면 이 공동묘지를 택
하겠어요."
유기는 감탄했다.
"아가씨는 생각하는 것이 치밀하고 총명하오. 나 역시 벌써 절진신의가
이 공동묘지에 숨어 있을 거라고 판단했소.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아무도
모르게 이 공동묘지에 네 번씩이나 왔었소."
대군은 돌연 유기를 바라보며 물었다.
"유대협은 지금 솔직히 무엇 때문에 절진신의를 찾는지 말씀 해 주실 수
없나요?"
유기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가볍게 탄식을 하며 입을 열었다.
"나는 일찍이 어떤 사람의 초청을 받아 흑마왕을 제거하려는 일에 종사했
었소. 무려 삼십여년간을 흑마왕이 누구냐 하는 것을 조사했으나 끝내 그
단서를 잡지 못했으며, 그 임무는 오늘날까지 완수되지 못하고 있소. 그러
나 최근에 와서야 나는 겨우 절진신의를 찾아 그로부터 흑마왕의 내력을
알려고 한 것이오."
몽천악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유대협께서 부탁을 받았다는 사람이 혹시 강남 제일 미인 후난향이 아닌
가요?"
유기는 미소를 지었다.
"무아진교의 제일총교주도 일찍이 나에게 흑마왕을 제거해 달라고 부탁했
소. 그러나 그녀는 결코 삼십여년 전에 나에게 부탁했던 사람이 아니오."
대군이 물었다.
"삼십여년 전에 유대협께 부탁했던 사람이 누구라는 것을 말씀해 주실 수
없어요?"
"그 사람의 이름을 말한다고 해도 당신들은 알지 못할 거요."
"말씀해 보세요."
"그렇다면 말해 주겠소. 그는 장금각이라는 사람이오."
"어머!"
대군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이어 물었다.
"대부호 장금각! 유대협께서는 천하 제일 부자라는 장금각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유기는 약간 놀라는 표정을 짓고 물었다.
유기는 장탄식을 하며 말했다.
"아가씨는 아직 나이도 많지 않은데 어떻게 장금각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
소?"
"대부호 장금각이라면 아직도 항간에서 말을 하고 있는데 왜 모르겠어
요."
몽천악이 말을 받았다.
"강남의 부호 장금각의 이름은 나도 어렸을 때 많이 들었소."
유기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들은 장금각이 부자라는 것 외에 그에 대해서 도대체 아는 것이 무
엇이오?"
대군이 말했다.
"그 사람은 협의를 사랑하고 선한 일은 많이 한다더군요."
유기는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뿜어냈다.
"지금 나는 당신들에게 장금각의 일을 소개해 주겠소. 삼십여년 전 장금
각은 사람들로부터 도주공(陶朱公 : 戰國時代 越나라 宰相으로서 대부호)
에 비교되었으며, 또한 사람을 사귀기 좋아하여 맹상군(孟嘗君 : 戰國時代
齊나라 公子로 교제가 넓었음) 이라고도 불리었소.
장금각은 금나라에서
제일 가는 부호로서 널리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강호무림에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며, 흑백 양도, 정사 양파의 고수들이라면 어느 누구
와 교분을 맺지 않은 사람이 없었소. 심지어는 관(官)의 대인(大仁)들 까
지도 그와 호형 호제하는 처지였소.
그때의 장금각이야말로 강남 칠성(七
省)의 황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소. 그의 말한마디면 하늘을 나는 새
도 떨어질 정도였으니까."
몽천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들도 일찍이 들은 적이 있습니다."
유기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다시 말을 계속했다.
"인간의 욕망이란 한이 없는 법이오. 그 당시 장금각의 권위로 말하면 세
상 부러울 게 하나도. 없었소. 그러나 뜻밖에도 서른여덟 되던 해에 무
공을 익히더니 불로장생할 수 있는 법을 찾으려 했소."
몽천악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가 무공을 익혀 불로장생하려는 일이 뭐가 잘못입니까?"
유기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대답했다.
"장금각이 무공을 익히는 일에 종사한 것이 결국 그에게 비참한 종말을
가져오게 된 것이오."
대군이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유기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장금각이 천하 무학의 종사(宗師)를 구하던 중 강남 제일 미인 후난향을
만나게 되어, 부부가 되었소!"
몽천악은 깜짝 놀랐다.
"뭐라고요? 무아진교의 제일총교주가 바로 장금각의 부인일 줄이야."
유기는 몽천악과 대군을 한 번 쳐다보고 나서 다시 말을 계속했다.
"후난향은 장금각의 아내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무학교 사도가 되었
소. 그러나 놀랍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시작하자, 그 진전이 극히 빨라
석 달이 채 못되어 후난향의 무학을 절반 이상이나 터득한 것이오......
장금각은 후난향 한 사람의 무공만으로는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었던지 널
리 무림 명사를 구하게 되었소...... 장금각의 명망으로 명사를 구하는 것
이 무슨 문제겠소......"
그는 깊이 숨을 내쉬고 다시 말을 계속했다.
"반년도 안되어 그는 정사 양파 흑백 양도의 백여 명 고수를 초빙하여 그
의 무공 사부로 삼았소. 그 당시 가장 이름 있던 열 분의 무림 고수는 바
로 소림의 고라신승 철장건곤권 호창부, 무림정려(情 ), 송연(宋淵)부부,
밀종문의 귀곡선생과 옥안서생 용오운, 절진신의 윤천초, 마검신군 조전
신, 팔검비상 진삼청, 그리고 바로 나 이렇게 열 명이었소......"
몽천악과 대군은 들으면 들을 수록 놀라웠다. 그것은 장금각이 이렇게 무
서운 신통력을 가지고 천하 각 문파의 유일 무이한 십대 고수를 초빙해다
가 자기의 스승을 삼았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몽천악이 탄식하며 물었다.
"장금각이 무림의 십대 고수를 초빙하여 스승을 삼았고 거기에 자신의 뛰
어난 자질을 더했으면 그 무공의 성취는 놀라울 정도였겠군요......"
유기는 한숨을 지었다.
"그렇소. 장금각은 불과 삼년 만에 일개 문약한 서생에게 일약 한 사람의
무림 절정 고수로 변했소. 그러나 그와 같은 눈부신 무공의 성취가 큰 화
를 초래하게 되었소."
몽천악이 물었다.
"큰 화라니요?"
"살신지고(殺身之稿)요."
몽천악은 깜짝 놀랐다.
"누구에게 화를 입었습니까?"
"흑마왕이오."
대군은 가볍게 "아." 소리를 내고 말했다.
"유대협, 장금각이 죽음을 당하게 된 자세한 내막을 말씀해 주세요."
유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내가 설명을 해드릴 테니 두 분은 내 얘기를 잘 들어보고 나
를 도와 흑마왕이 누군가 생각해 보시오."
유기는 침을 삼키고 나서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삼십삼년 전 나는 장금각의 부름을 받고 협서로부터 급히 호남
낙양에 있는 장가원수중루로 달려갔소. 장가원은 장금각의 저택에서 제일
높은 누각으로서 호수 가운데 세워져 있으며 석교가 호수 위에 높이 걸려
있소. 그 규모는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워 그 유례를 볼 수 없는 건축이었
소.
천하 제일 부호인 장금각이므로 그러한 수중 누각을 건축할 수가 있
었을 거요. 수중 누각은 모두가 일곱 채로 이 일곱 채의 누각에 장금각이
초빙한 백여덟 명의 절정 고수를 수용했으며, 그들 위사를 제외하고 장금
각 부부의 비녀와 종들이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을 뿐, 다른 사람은 일체
출입을 할 수가 없었소."
대군이 물었다.
"유대협께서는 수중루에 들어가실 수 있었나요?"
유기는 미소지었다.
"장금각의 열 분 사부는 물론 수중루에서 기거했소."
대군이 다시 물었다.
"그 날 황혼 무렵 유대협께서 수중루에 당도하셨을 때 거기에 이미 무슨
변고라도 발행해 있었나요?"
유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수중루에는 이미 변고가 일어나 있었소. 장금각을 비롯하여 백여
덟 명의 시위, 비녀 총복등 모두 백팔십칠 명의 남녀가 죽어 있었소. 그리
고 그들은 하나같이 가슴 위에 고루인이 찍혀 있었고 마룻 바닥에는 흑마
왕이 죽였다 라고 선혈로 쓰여 있었소."
대군은 몸을 떨었다.
"정말 잔인 무도하군요."
몽천악이 돌연 물었다.
"후난향은요? 그녀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수중루에 없었습니까?"
유기가 말했다.
"내가 수중루에 이르렀을 때, 그 강남 제일 미인 후난향은 그곳에 있었을
때뿐만 아니라 장금각의 열 분 스승...... 소림 고라신승, 호창부, 귀
곡선생...... 등도 수중루에 있었소."
몽천악이 물었다.
"그들은 참변이 일어난 후에 온 겁니까, 아니면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와
있었습니까?"
유기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모두 사건이 일어난 뒤에 당도했다는 거요."
몽천악은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수중루에 제일 먼저 온 사람이 누굽니까?"
"수중루에 제일 먼저 당도한 사람은 다섯 명이었소. 고라신승, 호창부, 그
리고 무림정여, 송연부부......"
"또 한 사람은 누구지요?"
"바로 후난향이오. 원래 후난향과 고라신승 등 다섯 분은 반달 전 화남,
소실봉에서 소림 선배 대원화상이 폐관하는 대례에 참석했다. 가장 가원
수중루에 돌아왔기 때문에 그녀가 남편을 살해했다는 혐의는 없는 겁니
다."
"그리고 귀곡선생, 옥면서생, 절진신의, 마검신군 등은 어떤 식으로 수중
루에 왔습니까?"
"그들 네 사람은 고라화상 등 다섯 사람의 뒤를 따라 왔소. 그리고 그들
네 사람도 하남 소실봉에서 돌아온 거요. 그러므로 그들 아홉 사람은 흉
수가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었소."
대군이 돌연 물었다.
"팔검비상 진삼청은 어떻게 되었나요?"
"진삼청은 내가 수중루에 당도한 다음날 아침에야 왔소."
대군이 말했다.
"그렇다면 유협과 팔검비상 두 사람이 장금각을 살해한 흑마왕이라는 혐
의를 받았겠군요."
"그렇소. 그때 당시 나와 진삼청은 증인들로부터 조사를 받았었소."
대군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상하군요. 그렇다면 장금각이 유대협에게 흑마왕을 죽여 달라고 부탁
하셨다는 건 어떻게 된 거지요?"
유기는 장탄식을 했다.
"장금각은 죽기 전에 이미 무슨 기미를 알았던 것 같소. 그러니까 그러한
참변이 일어나기 석 달 전에 장금각을 은밀히 나와 고라화상, 호창부, 귀
곡선생...... 그리고 그의 아내 후난향 등 열 사람 중에 그 흑마왕이 있
으니, 그를 찾아낸 후 아무도 모르게 처치해 달라고 부탁했소......"
"그래서 유대협은 줄곧 바로 그 열 사람 중에 흑마왕이 있다고 해 왔었군
요."
유기가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장금각은 위인됨이 선량하고 어질어 일생 남에게 은혜를 베풀었을 뿐 원
한은 사지 않았소. 사람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는 녹림의 신도나
후도의 호웅들 까지도 그의 하늘 같은 은혜에는 머리를 숙였소.
더구나
그의 열 분의 스승은 천하 무림에서 가장 매서운 고수들인데 어느 누가
감히 그를 해치려 해치려 하겠소?"
몽천악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흑마왕은 무엇 때문에 그를 죽여야 했을까요."
유기는 격동된 음성으로 말했다.
"장금각의 피상을 그의 무공 진전이 너무나 신속(迅速)하여 후일 그가 천
하 무적의 고수로 성장하여 혈겁(血劫)을 일으키고 세상을 어지럽게 할까
봐, 그게 두려워 일어난 것이오."
대군이 그 말을 받아서 중얼거리듯 입을 놀렸다.
"세상에서 제일 부자가 거기에 또 무림의 제일 고수가 되고, 또 다시 삼
교 구류(三敎 九流)의 인물들까지 포섭하여 혹시 빚나간 생각을 품고, 그
야말로 일대 패왕으로 군림한다면 작으면 한 지방을, 크면 온 천하 장생
들을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 몰아 놓을 수가 있을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장금각의 죽음은 그의 열 분 사부에게 그 혐의가 있기 마
련이오."
몽천악은 그 말을 듣더니, 돌연 한숨을 내 쉬었다.
"소림의 고라화상이라든가, 호창부는 모두가 정의의 인사들인데 감히 그
들이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참혹한 일을 저지를 수 있을 까요?"
유기는 쓸쓸하게 웃었다.
"내가 그들을 의심하는 것은 여러 가지 수상한 것을 종합해서 판단을 내
렸기 때문이오."
대군이 말했다.
"어떤 점이 수상한지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위기즉면
유기는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강남 제일 미녀 후난향은 성품이 음탕하여 남자들을 자주 유혹하는 일이
있었소......"
대군이 물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장금각의 스승들 가운데 누구와 가까이하기라도 했다는
말씀인가요?"
유기의 음성은 격동되었다.
"이건 무림에 떠도는 추문(醜聞)이라 확실한 것을 조사해 보기 전에는 나
는 함부로 지적할 수가 없소."
"그것 외에 또 무슨 수상한 점이 있나요?"
"또 한 가지 있소. 장금각 등 백팔십칠 명의 생명을 앗아간 이 참사는 강
호무림의 정의 인사라면 마땅히 이 흉수를 색출 해내는 일에 발벗고 나서
야 되는 것이오. 그러나 뜻밖에도 고라화상, 호창부 등 소위 정의파라고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이 일을 덮어두려고 했소.
그때 당시 사람들은 이
흉수를 비밀리에 조사하고 장금각이 죽었다는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말고
그는 심산대천으로 무공을 수련하러 갔다고 하자고 결의했소."
대군과 몽천악은 이와 같은 무리의 비밀을 듣고 나자 도무지 어떻게 된
영문이지 알 수가 없었다.
장금각의 죽음은 고라화상 등이 획책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대군이 돌연 물었다.
"장금각의 시체는 어떻게 처리했나요?"
"백 팔십 칠 구의 시체는 후난향이 무림 십걸과 함께 비밀리에 호수속에
수장(水葬)시켰소."
대군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유대협의 말씀으로 미루어 본다면 고라화상 등이 흑마왕의 이름을 빌어
장금각을 죽인 것 같아요. 그러나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흑마왕이
무엇 때문에 고라화상 등 사람들을 죽였을까요? 그렇다면 그 당시에는 흑
마왕이란 이름뿐이었으나 오늘날 그 흑마왕이란 실제 인물이 무림도상에
나타난 것 같군요."
유기는 대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거기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소. 그러나 한 가지 해석할 수 있는 것은 바
로 현재의 흑마왕은 장금각의 참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을 차례로 하나씩
모조리 없애버리려는 것이오."
대군은 돌연 생긋 웃었다.
"조전신이나 후난향이 생각하고 있는 흑마왕은 틀림없이 유대협 당신일
거예요."
유기는 안색을 가볍게 바꾸며 물었다.
그건 어떻게 하는 말이오?"
"흑마왕이 고라화상이나 호창부 등 사람들을 죽인 목적은 바로 장금각의
원수를 갚는데 있어요. 장금각이 죽었을 당시 하남 소실봉에 가지 않은
사람은 유대협과 진삼청 두 분 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조전신 등은 오늘날의 흑마왕은 바로 당신들 두 사람 중에
하나라고 추측할 수가 있는 거예요."
유기가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소. 나는 삼십삼년을 하루같이 장금각의 원수를 갚는 일을 생각지
않은 날이 없었소."
대군이 물었다.
"유대협께서 바로 그 흑마왕이지요?"
유기는 씁쓰레 웃었다.
"당신들은 나를 흑마왕이라고 보오?"
대군은 미소를 지었다.
"유대협은 장금각과 특별한 우정이 있어 그의 참사에 대해 오직 유대협
한 분만이 원수를 갚아주려는 것만 같아요."
유기는 씁쓸하게 웃었다.
"잘못 보았소, 나는 흑마왕이 아니오."
몽천악이 말을 받았다.
"당신이 흑마왕이 아니라면 그럼 진삼청인가요?"
유기는 머리를 저었다.
"진삼청 역시 흑마왕이 아니오."
"그렇다면 누구요?"
유기는 무거운 음성으로 천천히 말했다.
"그건 조전신이 아니면 절진신의 윤천초요."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무거운 음성이 들려왔다.
"유기, 너는 이 늙은이를 오늘날의 흑마왕으로 인정하느냐!"
동시에 몇 장 밖 대나무밭에서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 사람은 등에 괴괴한 장검 한 자루를 메고 있었다.
몽천악은 고개를 돌려 그 노인을 보고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조방주, 언제 오셨습니까?"
홀연히 나타난 사람은 바로 마검신군 조전신이었다.
유기는 껄껄 웃었다.
"하하하, 조전신, 너는 결국 그 마검을 지니고 왔구나."
조전신은 삼 장 밖에서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말했다.
"마검이 집을 벗어나면 반드시 피를 보게 마련이다. 나는 벌써 삼십여년
이나 이 마검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두 제자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는 갖고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말을 들은 몽천악과 대군은 문득 한 시간 전 흑마왕이 떠나면서 남긴
말을 생각해 냈다.
조전신은 정말 왔다.
그는 흑마왕의 말과 같이 유기를 찾아 계산을 하러 온 것이다.
그들은 도대체 어떤 계산을 할 것인가?
유기가 차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의 출현은 네가 흑마왕이라는 심증을 더욱 굳혀 주었다."
조전신은 안색을 굳히며 소리쳤다.
"유기야, 초식을 받을 준비를 해라."
돌연 몽천악이 앞으로 나서며 두 사람 사이에 막아서서 큰소리로 말했다.
"조방주, 잠깐 진정해 주십시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조전신의 얼음장 같은 음성이 들려왔다.
"몽노제와 대군 낭자는 강호무림에서 물러나 장금각의 은원시비에 끼여들
지 않는 게 좋을 거네."
몽천악이 큰소리로 말했다.
"장금각의 죽음은 강호무림에 일대 혼란을 빚어냈으며 얼마나 많은 무림
고수들이 비명횡사했는지 모릅니다. 오늘 두 분의 싸움도 어느 누구의 함
정에 빠진 것입니다."
조전신이 말했다.
"누구의 함정에 빠졌단 말인가?"
몽천악은 담담히 말했다.
"후난향입니다. 그녀는 무림 십걸들을 서로 죽이게 하여 가만히 앉아서
어부지리를 얻으려는 겁니다."
조전신을 냉소를 흘렸다.
"몽노제가 무얼 아나? 여기 이 유기가 바로 흑마왕이네. 그는 후난향과
결탁하여 무림 십걸을 없애버리려고 생각하고 있는 걸세. 지금 무림 십걸
중 고라화상, 흑창부, 귀곡선생 등 세 사람이 죽었으며 송연부부는 강호에
서 실종된 지 벌써 오래되어 그들은 아마 해를 입었을 것이네.
현재 제거
대상은 나지만 그 계획은 유기가 벌써 후난향과 함께 치밀하게 세워 놓은
지 오래 되었네. 그러나 자신이 없기 때문에 주저하여 감히 노부에게 독
수를 쓰지 못하고 있는 거네. 그래서 유기는 먼저 노부의 힘있는 두 조수
도소호와 한소룡을 죽인 거네."
몽천악을 이 말을 듣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유기에게 물었다.
"도소호와 한소룡을 죽인 게 사실입니까?"
유기는 냉소를 흘렸다.
"조전신이야말로 진짜 흑마왕이오. 그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서 나도 그들
두 사람과 스물네 명의 궁한방 제자들을 죽였소."
몽천악은 가볍게 한숨을 지었다.
"유대협께서 잘못 생각하신 겁니다. 조방주는 절대 흑마왕이 아닙니다."
유기는 싸늘하게 웃었다.
"나는 다년간 궁한방에 잠복해 있었기 때문에 조전신의 행동을 잘 알고
있소. 설령 그가 흑마왕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는 장금각을 살해하는 일
에 참여했기 때문에 나는 그 원수를 갚지 않을 수가 없소. 조전신의 말이
옳소. 당신과 대군 아가씨는 장금각의 은원시비에 뛰어들지 마시오."
대군이 돌연 깊은 한숨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사형, 어서 물러나세요, 지금 그들 두 사람은 각자 공력을 몰래 운용하고
있으니 곧 포화(飽和) 상태가 될 거예요. 만약 둘이 결투를 벌이게 된다면
가운데서 견딜 수 없을 거예요."
몽천악은 그들 두 사람은 오해가 깊어 생사결판을 내지 않고는 결코 순순
히 물러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길게 한숨을 지으며 재빨리 한쪽으로
물러나 관전했다.
조전신과 유기는 삼 장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들 두 사람은 처음 만났을 때 이미 각자의 전신 진기를 모아 발동을 기
다리고 있었다.
이때, 두 사람의 진기는 점점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돌연......
조전신이 천천히 바른손을 들어 등 뒤의 장검에 손을 가져갔다.
그가 손을 움직이자 유기의 왼손도 허리춤의 칼에 손을 댔다.
유기가 칼을 뽑아드는 속도는 매우 빨랐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와 정반대
로 굉장히 느렸는데 오히려 조전신보다 더 느렸다.
"쨍! 쨍!" 두 마디의 금속성이 일어났다. 마검과 절도(絶刀)가 집에서 나온
것이다.
유기의 절도는 사 척의 장도였고 조전신의 마검 역시 사 척 길이였다.
속도 상으로 조전신의 마검이 먼저 검집에서 뽑아져 나왔다. 한 줄기 푸
른빛을 내뿜는 것이 실로 예외한 병기였다.
두 무림 절정 고수의 도검이 모두 집을 벗어났다.
그야말로 전공 석화의 찰나지만......
느리던 동작이 순간 빨라졌다.
조전신의 장검이 신룡과 같이 상대방의 가슴을 찔러 나갔다.
유기의 절도는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비스듬히 쳐 올라갔다.
두 사람의 신형이 세 치 정도 허공으로 솟았다.
"쨍! 쨍!" 가벼운 금속성을 일으키며 도검이 접촉했다.
제일 초의 접촉은 우열을 가릴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몸을 돌리며 제이 초를 겨루었다.
도광(刀光)과 검영(劍影)이 두 사람의 몸을 에워쌌다. 그들이 손을 쓰는
수법이나 보법은 알 수가 없었다.
몽천악과 대군은 이 장 밖에서 관전했다. 싸늘한 한기가 엄습하여 뼈를
에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두 사람은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하여 급히 몸을 날려 오 장 밖으로 물러
났다.
음산한 묘지는 풍운이 변색할 만한 격전이 벌어졌으며 칠 장 원근(遠近)
의 대나무 잎이 마치 흩날리는 눈처럼 떨어져 날았다.
이것이야말로 공정절후의 결투인 것이다.
사십여년 전 강호무림에서 천하 십대 고수를 공인한 이후 오늘날까지 무
림 십걸은 단 한 번도 대결을 해 본 일이 없었다.
조전신과 유기가 그 무림 십걸 가운데 제일차로 결투를 벌인 것이다.
천하 십대 고수 중에서 누구의 무공이 비교적 좋을까?
지난 옛날 조전신은 철장건곤권 호창부의 일 장에 대한 쓰라린 경험이 있
기는 하나 호창부나 중인 고라화상은 모두 조전신이 양보할 뜻이 있었음
을 알아 차렸던 것이다.
당시 조전신이 호창부를 만약에 이긴다면 그는 다시 고라화상의 도전을
받게 되며 그때 가서 도저히 패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기 때문에 우정패
한 것으로 가장하여 생명을 보존했다는 말이 있다.
몽천악과 대군은 이 박투를 보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들 두 사람의 무공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높구나."
이때, 대군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몽사형, 저는 흑마왕이 누구라는 것을 알았어요."
몽천악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물었다.
"그게 누군가?"
"조전신도 아니고 그렇다고 유기도 아니에요."
몽천악은 계속 안력은 모아 관전하고 있었으나 이 말을 들은 순간 반사적
으로 고개를 돌렸다.
"앗!"
그는 고개를 돌리는 순간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대군 뒤에 한 청의의 인
이 서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 청의의 인은 묘지 위에서 만났던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는 청의의
인이었다.
이때, 그 청의의 인은 손에 단검을 들고 대군의 등을 노리고 있었다.
대군은 땅이 꺼질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흑마왕 말이에요?"
청의의 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냉랭하게 웃었다.
"화(禍)는 입으로부터 나온다고 했다. 목숨이 아깝거든 입을 닥쳐라."
몽천악은 그 청의의 인의 대군의 등심을 노리고 있기 때문에 함부로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는 다급한 마음으로 물었다.
"당신은 그녀를 어쩔 셈이요?"
청의의 인은 싸늘한 눈초리로 조전신과 유기의 싸움을 관전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그녀를 죽일 생각이오."
대군이 언약한 음성으로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후난향의 수중에 빠진 나를 묘지 위까지 구해 오고 또한 공교롭
게도 잔결서생을 만나게 되어 나를 섭혼마녀의 몸으로부터 본래의 나로
변할 수 있게 만들었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 나를 죽이겠다는 건가요?"
청의의 인은 극히 냉담한 어조로 말했다.
"네가 살고 싶다면 살려 줄 수도 있다. 그러나 너는 저들 두 사람 중에
누가 흑마왕인가를 지적해야 한다."
"그들 두 사람은 모두 흑마왕이 아니에요."
"네가 말을 않는다면 나는 그들이 싸워 둘 다 지치기를 기다렸다가 한꺼
번에 죽여 버리겠다."
"그게 바로 당신이 마음속으로 원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청의의 인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지금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너는 왜 내가 누군가를
보지 않는 거냐?"
"볼 것도 없이 당신은 흑마왕이니까요."
청의의 인은 어리둥절하는 것 같았다.
"무얼 보고 내가 흑마왕이라는 것이냐?"
대군은 생긋 웃었다.
"만일에 조전신이나 유기가 흑마왕이라면 팔검비상 흑마왕일 테니까요."
청의의 인은 몹시 놀란 듯한 음성으로 물었다.
"너는 어떻게 내가 진삼청이라는 것을 알았느냐?"
"나는 잔결서생으로부터 묘지 위의 그 일단의 경과를 들은 뒤 당신이 바
로 팔검비상 진삼청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정말 무서운 계집이로군. 그래 너는 내가 손을 써서 저들의 싸움을 말리
도록 하려는 거냐?"
"당신은 속으로 항상 조전신과 유기가 바로 흑마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
에 차라리 그들끼리 치고 받고 싸우다가 죽게 할지언정 다른 사람이 그들
의 싸움을 말리는 것은 원치 않는 거지요.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리겠지만
당신 진삼청이 흑마왕이 아닌 것을 물론 조전신과 유기도 흑마왕이 아니
에요."
청의의 인은 차갑게 말했다.
"그래서 나는 네 입으로 흑마왕이 누군가를 들으려는 거다."
"현재로서는 말할 수 없어요."
"왜?"
"그건 그 흑마왕이 우리 신변에 가까이 있기 때문에 말을 꺼내면 우리는
모두 액운을 면하기 어렵기 때문이에요."
몽천악은 묵묵히 그들의 말을 들었으나 도무지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
었다. 그는 지금 대군이 무슨 연극을 꾸미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청의의 인은 냉랭하게 말했다.
"발칙한 년, 뭘 그렇게 횡설수설이냐. 나는 네 말을 믿지 않겠다."
대군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몽사형, 무슨 방법을 생각하여 그들의 결투를 멈추게 하세요."
청의의 인이 냉소를 흘렸다.
"조전신과 유기는 지금 전력을 다해 싸우고 있다. 잔결서생이 무공이 아
무리 높다고 해도 그들의 싸움은 중지시킬 수 없다."
대군이 웃으며 말했다.
"잔결서생이 운공하여 사자후(獅子吼)로 당신을 흑마왕이라고 지적한다면
그들은 즉시 싸움을 중지할 거예요."
청의의 인은 그 말을 듣자마자 돌연 외쳤다.
"잔결서생, 만약에 당신이 조금이라도 그런 소리를 입밖에 내는 날이면
나의 이 단검이 사정없이 그녀의 등을 찌르고 말 것이니 알아서 하도록
하오."
몽천악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조전신과 유기가 싸우다 죽는다해도 나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소. 그러
나 나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그녀의 머리털 하나라도 건드리는 걸 용납
하지 않을 거요."
이때, 독비절도 유기와 마검신군 조전신의 박투는 극히 긴박한 관두에 이
르고 있었다.
공중에서 들려온 소리
조전신과 유기는 각기 도검을 세워 들고 허공으로 솟아올라 날카로운 파
공성을 일으키며 맹렬하게 덮쳐갔다.
"쨍!" 밝은 금속성이 일어나며 도검이 부딪쳤다. 이번에 두 사람은 거의
전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들이 들고 있던 도검은 상대방의 내공에 견디지 못하고 손에서 벗어나
허공에 찬란한 무지개를 그리며 공중으로 날아갔다.
"얏!"
조전신은 장검이 손을 벗어나자 크게 고함을 지르며 왼손을 번개 같이 쳐
냈다.
그 일 장은 독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유기는 외팔이었다. 그는 왼손의 장도가 손에서 벗어나자 즉시 초식을 바
꾸어 장력을 받아내려고 했으나 이미 늦었다.
"음......"
신음 소리가 일어났다. 유기는 오른쪽 가슴에 일 장을 얻어맞고 허공에
뜬 몸이 뒤로 젖혀졌다.
유기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절초를 펴냈다. 그는 몸이 뒤로 밀치는 순간
두 발을 구부렸다가 차냈다. 마침내 조전신의 오른쪽 허리를 걷어찬 것이
다.
두 사람은 마치 실이 끊어진 연처럼 땅 위에 떨어졌다.
그들이 허공에 너무나 오래 떠 있었기 때문에 끌어 모았던 진기가 모두
흐트러져 매우 심하게 나동그라졌다.
그러나 두 사람의 고절한 무공이라든지 강인한 인내력은 사람을 적잖이
놀라게 했다.
그들은 이미 오장 육부에 중상을 입었건만 그래도 마지막 남은 진기를
끌어 모아 최후로 초식을 펴냈다.
두 차례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일어났다.
그들은 벌떡 땅위에서 일어나 솟아올라 공중에서 날아 내려오는 도검을
받아들고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공격해 갔다.
쨍!
이번에는 도검이 단 한 번 부딪쳤을 뿐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몸을 지
탱하지 못하고 땅위로 떨어졌다.
"왝! 왝!"
독비절도 유기는 시뻘건 선혈을 두 번 토해냈으며 장도는 이미 땅에 떨
어졌다.
마검신국 조전신은 오른손에 푸른빛이 발산하는 마검을 굳게 잡고는 있
었으나 다리가 후들거려 천천히 땅위에 꿇어앉았다.
유기와 조전신의 싸움은 내공을 운용한 것이었다. 이 일장의 박투를 치
른 그들은 정기가 극도로 소모되었다. 그들은 더 이상 일초 반식도 펴 낼
수 없음을 알았다.
말할 기력조차 없는 것 같았다. 숨을 가쁘게 몰아 쉬었고 땀이 비오듯 흘
러내렸다.
정기를 상실한, 초점 잃은 네 개의 눈동자가 회의의 빛으로 상대방을 주
시했다.
그것은 마치, 나는 네가 일어나 다시 손을 쓸 힘이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때였다. 인영이 번쩍하더니 조전신과 유기 사이에 그 얼음장같이 차갑
고, 죽은 사람같이 표정하나 없는 그 청의의 인이 유령처럼 나타났다.
유기와 조전신은 손에 단검을 든 청의의 인을 보는 순간 마치 꿈에서 깨
어난 듯 눈 앞에 공포를 느꼈다.
몽천악은 이때, 쾌속하게 장검을 뽑아들고 발동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는 청의의 인이 유기와 조전신을 해치려는 행동을 보이면 즉시 벽혈검
을 펴내 청의의 인을 저격하려고 생각했다.
청의의 인도 몽천악이 뒤에서 검을 들고 공격할 태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
을 안 모양이었다.
그는 천천히 머리를 돌려 몽천악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당신은 검으로 기습하려는 거요?"
몽천악은 담담히 말했다.
"지금 당신이 단검으로 그들 중 어느 누구에게라도 찌른다면 이 장검도
동시에 당신 몸속에 깊이 박힐 거요."
청의의 인은 냉소했다.
"당신은 남의 일에 간섭하기를 좋아하는 모양이군요."
몽천악은 힘주어 말했다.
"남의 위기에 빠져 있는 틈을 노린다는 것을 결코 영웅 호걸의 행동이 아
니오."
청의의 인은 얼음장 같이 차갑게 웃었다.
"내가 만약 그들을 죽일 생각을 했다면 그들은 벌써 시체로 변했을 거
요."
"귀하께서 정녕 그들을 살해할 생각이 없다면 한쪽으로 비켜 주시기 바랍
니다."
청의의 인은 차가운 어조로 물었다.
"잔결서생, 당신은 내가 누군지 아시오?"
"당신은 자칭 팔검비상 진삼청이라고 하지만 내가 만났던 진삼청은 도사
(道士)였소."
마검신군 조전신은 이 말을 듣자 안색을 변화시키며 물었다.
"당신이 정말 진삼청이오?"
청의의 인은 입가에 싸늘한 냉소를 흘렸다.
"조전신, 너는 내 인피가면을 벗겨 내 진정한 얼굴을 보지 않겠느냐?"
마검신군 조전신의 얼굴에 가벼운 경련이 일었다.
"지금 나는 당신의 일 초 반식도 받아낼 힘이 없소."
청의의 인이 차갑게 외쳤다.
"조전신, 내가 오른손을 써야 하느냐 안 써야 하느냐?"
마검신군 조전신은 쓸쓸하게 한숨을 지으며 대꾸했다.
"쓰시오."
청의의 인은 고개를 돌려 몽천악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나 저 사람이 막을 것이다."
조전신이 돌연 처량한 음성으로 말했다.
"몽노제, 이건 나와 저 사람과의 개인적 은원의 청산이니 방해하지 말게."
몽천악과 대군은 그들 두 사람의 얘기를 듣고 내심 괴이한 생각이 들었
다.
왜 조전신은 청의의 인을 보자 손을 묶고 죽기를 원하는 것일까?
그들 사이에 도대체 무슨 원한관계가 있는 것일까?
돌연 대군이 웃으며 말했다.
"저는 귀하에게 조전신을 죽이지 말기를 권고합니다."
청의의 인이 물었다.
"무엇 때문에?"
대군은 거침없이 말했다.
"그분을 죽이면 당신은 더욱 흑마왕을 처치하기가 어려울 테니까요."
청의의 인이 담담하게 말했다.
"조전신이 흑마왕일 가능성이 있다."
대군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조전신은 결코 흑마왕이 아니며 유기나 당신도 흑마왕이 아니
에요."
"그럼 흑마왕이 누구냐? 나는 그들을 해치지 않을 테니 말해주기 바란
다."
대군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흑마왕은 바로 그 가짜 진삼청이에요. 또한 삼청관의 그 삼청도장이기도
해요."
몽천악을 비롯하여 군협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속으로 부르짖었
다.
'그가 흑마왕이라니?'
청의의 인이 잠시 주저하다가 물었다.
"너는 무엇으로 봐서 그가 흑마왕이라고 하느냐?"
대군은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과연 팔검비상 진삼청이라면 그가 무엇 하러 당신의 이름을 사칭
하겠어요? 그것 한 가지만으로도 그가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이
증명돼요."
청의의 인은 돌연 무슨 생각이 미친 듯 놀라 소리쳤다.
"정말 그가......"
그러나 그는 곧 머리를 흔들었다.
"불가능한 일이다. 절대 그가 아니다."
대군이 청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불가능한 일이 때에 따라서는 가능한 일로 변하기도 해요."
청의의 인은 흠칫하며 물었다.
"너는 내가 그라고 말한 사람이 누구라는 걸 알겠느냐?"
대군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물론이지요, 당신이 사람을 잘못 본 것을 제외하고는요."
청의의 인은 돌연 대군 앞으로 다가가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말해 봐라, 흑마왕은 도대체 누구냐?"
대군은 눈을 깜박거렸다.
"당신이 해를 입을까 두려워 막상 입을 열기가 무서워요."
청의의 인이 말했다.
"그나 네가 말을 하지 않는다해도 흑마왕은 네가 내막을 알고 있다는 것
을 아니, 너를 처치하여 입을 봉해 버릴 것이다."
대군은 하늘이 무너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사실이에요. 그는 나를 죽여 입을 봉해 버릴 거예요. 말을 안해도
죽고 해도 죽어요. 음...... 좋아요. 말을 하겠어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중으로부터 돌연 괴이한 음성이 들려왔다.
"대군, 살고 싶다면 입을 닥쳐라."
이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바싹 긴장하며 사방을 두루 살펴보았다.
흑마왕, 바로 흑마왕의 음성이었다. 정말 그는 도깨비나 유령 같았다. 목
소리는 들리지만 사람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몽천악이 가볍게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흑마왕의 목소리는 천리회음으로 한 소리이기 때문에 음성만 들릴 뿐 소
리의 방향을 분간할 수가 없습니다. 그의 천리회음 공부는 그 연성이 극
히 정심하여 약 이십 장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고수들은 무림에 이와 같은 천리회음 절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독비절도 유기가 돌연 입을 열었다.
"무림에서 가장 천리회음 절기에 정통한 사람으로는 밀종문의 귀곡선생을
꼽을 수 있소. 그는 혹시 밀종문의 문하라도 된단 말인가?"
대군이 돌연 깔깔 웃었다.
"호호호, 흑마왕, 나는 당신이 나를 죽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나는 이제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하겠어요. 당신은 해약을 내놓아 조전신과
몽천악에게 복용토록 해주세요."
조전신과 몽천악은 이 말을 듣자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몽천악이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사매, 조방주와 내가 정말 흑마왕의 독암산에 걸렸단 말인가?"
대군을 정색했다.
"그래요. 사형과 조방주는 이미 흑마왕의 만성독약을 먹었어요."
몽천악이 안색이 크게 변했다.
"흑마왕이 언제 독약을 먹게 했단 말인가?"
대군이 말했다.
"당신과 조방주는 일찍이 묘가수가 보내온 환약 한 알을 먹지 않았나요?"
몽천악은 기절할 듯이 놀랐다.
"뭐라고? 그렇다면 묘가수가......"
대군은 이어 천천히 말했다.
"묘가수는 흑마왕의 심복이에요."
조전신과 몽천악은 이 말을 듣자 놀라움을 금치 못해 멍청해졌다.
이때, 다시 공중으로부터 흑마왕의 음성이 들려왔다.
"참으로 무서운 계집이로구나, 본왕은 네가 본왕의 내력을 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었는데......"
대군이 외쳤다.
"이제는 믿는단 말이지요?"
흑마왕의 음산한 음성이 들렸다.
"아직도 믿지 않는다."
대군이 외쳤다.
"믿고 안 믿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오직 당신이 해약만 보내준다면 나
는 당신의 내력을 밝히지 않겠어요. 그리고 또 나와 몽천악은 당신의 요
구를 받아들여 강호무림에서 물러날 수도 있고요."
대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청의의 인의 단검이 그녀의 가슴을 핍박하고
있었다.
대군은 청의의 인이 돌연 이런 수법을 쓸 줄은 몰랐으므로 어리둥절한 표
정으로 물었다.
"왜 이러는 거지요?"
청의의 인은 냉소했다.
"흑마왕의 내력을 밝혀라."
몽천악이 돌연 걸음을 옮겨 가만히 다가갔다.
문득 청의의 인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당신이 만약 한걸음이라도 더 나온다면 나는 곧 그녀를 찔러 죽이겠소."
몽천악은 그 말을 듣자 흠칫 걸음을 멈추고 냉소를 흘렸다.
"당신은 너무 비겁하오."
청의의 인은 차갑게 말했다.
"이해 관계에 있어서 때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수도 있소."
대군은 생긋 웃었다.
"진삼청 노선배님의 이와 같은 행동은 자신에게 해는 있을지언정 이익은
없어요."
청의의 인은 냉소를 날렸다.
"내가 너를 죽인다면 조전신이나 전결서생도 자연히 죽게 된다. 그래도
나에게 이득이 없다고 보느냐?"
대군이 말했다.
"진삼청 노선배님은 흑마왕이 무엇 때문에 떳떳이 나타나지 못하는지 아
세요? 흑마왕은 우리 여러 사람이 손을 잡고 그를 대항할까 봐 두려워서
그러는 거예요. 지금 만약 진삼청 노선배가 나를 죽인다면 당신은 결코
살아서 이 공동묘지의 대나무밭을 나가지 못할 거예요......"
"......"
청의인은 아무 말이 없었다.
대군은 다시 말을 이었다.
"또 한가지, 나는 지금 당신에게 경고하겠어요. 당신은 그 단검으로 반드
시 나를 찔러 죽일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어요. 그리고 설령 당신이 나
를 찔러 죽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당신이 단검을 뽑아내기 전에 당신 역
시 우리 사형의 장검에 죽게 될 거예요."
"......"
"그래도 찌르겠어요?"
청의의 인은 그녀의 말을 듣자 한참 동안 망설이더니 돌연 단검을 거두었
다.
"노부는 흑마왕이 너의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이때, 몽천악은 비호 같이 대군 곁으로 옮겨가서 장검을 비켜 들고 경계
했다.
홀연 대군이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맞아요. 흑마왕이 꼭 나의 조건을 받아들일 것이라고는 볼 수 없어요.
그러나 저는 당신들에게 한 가지 일을 알려 드리겠어요. 흑마왕은 당신
들 세 사람 사이에 풀 수 없는 개인적인 깊은 원한이 있다는 것을 잘 알
기 때문에 그는 계략을 써서 당신들이 싸워 서로 죽인다면 그것은 바로
흑마왕의 계략에 멋지게 넘어가는 거예요.
무엇 때문에 흑마왕이 이간질
을 하여 당신들끼리 서로 죽이게 만들고 자신이 직접 정변에 나서서 당신
들을 제거하려고 하지 않을까요? 그건 바로 당신들 세 사람이 각기 절기
한 가지씩 지니고 있으므로 자신의 고루인심장 한 가지로는 당신들을 도
저히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
"......."
장내는 그녀의 말에 압도되어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대군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당신들을 이 공동묘지로 유인하여 서로 싸움을 붙여
놓고 자기는 한쪽에 숨어서 당신들 초식의 허점을 관찰하며 당신들을 죽
일 수 있는 초식을 연구하고 있는 거예요......"
조전신과 유기, 진삼청은 그녀의 말을 듣자 생각했다.
'옳은 말이다. 흑마왕은 정면으로 공격하려 들지 않으리라......'
대군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다시 말을 계속했다.
"...... 또 한 가지 있어요. 그건 흑마왕은 바로 무공광(武功狂)이에요.
그러므로 그는 한 사람의 절기를 모두 자기 것으로 만들기 전에는 결코
그를 죽이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당신들 세 사람이 흑마왕의 독수에서
벗어나려면 가급적이면 무공 초식을 감추어 두고 적게 나타내는 거예요."
독비절도 유기가 갑자기 물었다.
"흑마왕이란 도대체 누구요?"
대군은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흑마왕이 누구라는 건 조만간 알게 돼요. 지금 내가 말을 한다고 해도
당신들은 아무도 내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나
는 당분간 그가 누구냐는 사실을 밝히지 않겠어요."
유기, 조전신, 진삼청은 대군의 이같은 말에 반신반의했다.
진삼청이 냉랭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의 논법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대군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믿지 않겠다면 나는 어쩔 수 없어요. 그러나 우리가 멍청히 여기에 있다
는 건 극히 위험한 일이에요. 어서 여기를 떠나는 것이 현명할 거예요."
말을 마치자 그녀는 몽천악을 불렀다.
"몽사형, 우리 떠나요."
대군은 몸을 돌리는 순간 수십 장 밖 대나무 꼭대기에서 흰 깃발이 펄럭
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흰 깃발은 이제 막 걸린 것이다. 대군은 몸을 돌리다가 우연히 녹색
인영 하나가 급히 대나무밭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되었다.
조전신과 유기 그리고 몽천악 등도 그 흰 깃발을 발견했다.
"흥!"
청의인 진삼청이 차갑게 코웃음을 치고 마치 보라매처럼 날아갔다.
세 군데 대나무 숲을 뚫고 녹색 인영이 사라진 쪽을 향해 쏜살같이 추격
해 갔다.
대군은 깜짝 놀라며 외쳤다.
"진삼청 노선배님, 가지 마세요."
팔검비상 진삼청의 경공비행술은 쾌속절륜하여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
고 말았다.
대군이 급히 말했다.
"조방주, 그리고 유대협, 공력이 회복되셨나요? 우리 빨리 쫓아가요."
이때, 마검신군 조전신과 독비절도 유기는 이미 일어나 있었던 것이다.
돌연......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진삼청의 노한 음성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흑마왕......"
단 한 번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을 뿐 천지는 태고의 침묵 속에 깊이 빠져
들어갔다.
"쉭쉭쉭쉭!" 몽천악, 대군, 조전신, 유기 등이 번개처럼 몸을 날렸다.
흑마왕의 정체
문득 그들은 대나무 숲 밑 낡은 관앞에 한 녹의의 장발여인이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의 가슴에는 단검이 꽂혀 있었으며 그녀의 등 뒤로 뚫고 나온 단검
끝을 타고 선혈이 흐르고 있었고 부근의 대나무는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
다.
단검이 심장을 꿰뚫어 그녀는 이미 죽어 있었으나 눈을 크게 뜬 채 앞의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 맞은편 사람은 바로 그녀를 죽인 흉수 진삼청이었다. 이때, 진삼청
은 눈을 굳게 감고 있었으며 입가에 피를 흘린 채 다리를 뻗고 앉아 미동
도 하지 않았다.
이 돌발적인 사건에 사람들의 마음은 얼어 붙었다.
몽천악이 먼저 진삼청 앞으로 다가가 낮은 음성으로 불렀다.
"진삼청 노선배님, 진삼청 노선배님......"
한마디 말도 없었다.
문득 조전신의 무거운 음성이 들려왔다.
"몽노제, 그를 건드리지 말게 그는 지금 운공으로 치료하고 있네."
이때, 유기가 머리를 들어 대나무 위에 걸린 흰 깃발을 쳐다 보았다.
흰 깃발에 새빨간 글씨와 소름끼칠 해골 바가지가 표기되어 있었다.
"고루장! 독비절도 유기는 팔월 칠일 자시 이전에 죽을 것이다."
"흥!"
유기는 냉소를 치면서 그는 즉시 몸을 솟구쳤다.
돌연 대군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유대협, 경솔히 행동하지 마세요. 적의 계교에 넘어가는 일이 있어서는
안돼요."
흑마왕의 잔교는 실로 사람을 두렵게 했다.
유기는 비록 화가 불같이 타올랐으나 진삼청이 이미 중상을 입은 것을 본
지라 가슴이 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조전신과 몽천악 등도 흰 깃발의 글을 읽어보았다.
대군이 가볍게 한숨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흑마왕이 마침내 유대협에게 고루장을 보내 왔군요."
유기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팔월 칠일이라면 바로 오늘이오. 도대체 그가 나를 어떻게 하려는지 똑
똑히 봐야겠소."
대군이 탄식했다.
"흑마왕이 어느 한 사람을 지적해서 고루장을 보내왔다는 것은 곧 그가
상대방의 무공 초수를 파악하여 목숨을 빼앗을 수 있다는 걸 표시한 거예
요. 아...... 만약 오늘 유대협께서 조방주와 결투만 하지 않으셨다고 해
도 흑마왕이 감이 당신에게 고루장을 띄우지 못했을 거예요."
조전신이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아가씨는 흑마왕에 대해 꽤 잘 알고 있는 모양이구려."
대군이 말했다.
"흑마왕의 내력에 대해서 저도 오늘에야 알게 되었어요."
몽천악이 돌연 낭랑한 음성으로 드높게 웃었다.
"하하하, 흑마왕은 이미 나와 조방주, 유대협에게 고루장을 보내왔소.
하하하 금후 우리 세 사람은 사흘 동안 한곳에 모여서 흑마왕이 도대체 우
리를 어떻게 죽일 것인지 좀 봅시다."
대군이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조방주와 몽사형께서는 이미 흑마왕의 독약 암산에 걸려 있어요. 시간이
되면 곧 독성이 발작하게 돼요. 흑마왕이 다시 몸을 나타내 당신들을 죽
이려 들지는 않을 거예요."
대군의 말을 듣는 조전신과 몽천악은 안색이 굳어진 채 입을 굳게 다물고
말았다.
대군은 두 사람의 표정을 살펴보고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안심하세요. 저는 두 눈을 멀쩡하게 뜨고 두 분이 참혹하게 죽어
가는 것을 결코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니까요."
조전신이 물었다.
"아가씨는 우리를 구해 줄 방법이 있소?"
"당신들은 다시 흑마왕이 보내 온 그 진주알 같은 환약을 먹지만 않는다
면 독성이 발작하여 생명을 잃는 일은 없어요."
몽천악이 물었다.
"그 환약도 독약이란 말인가?"
대군이 대답했다.
"그건 독약은 아니에요. 그러나 그것을 먹게 되면 먼저 먹은 독약의 독성
을 유발시켜 목숨을 잃게 돼요."
몽천악이 말했다.
"대군 사매, 어떻게 그런 내막을 잘 알고 있소?"
대군이 대답했다.
"이 세상에서 약물 조제에 가장 정통한 사람은 절진신의 윤천초이며 지금
흑마왕이 약물로써 사람을 해치는 재주는 다 윤천초에게 배운 거예요. 저
는 일찍이 윤천초가 약술로써 사람을 해치는 재주를 배웠기 때문에 자연
흑마왕의 그와 같은 재주에 대해서 잘 아는 거예요."
조전신이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가씨의 말에 대해 나는 납득이 가지 않는 점이 있소. 흑마왕이 다시
보내온 진주 단환은 우리 체내에 잠복해 있는 독성을 유발시킨다고 했는
데, 의심스러운 것은 우리가 어떻게 그 두알의 진주 단환을 먹은 것을 알
고 있을까 하는 거요."
"흑마왕이 당신들에게 두 알의 진주 단환을 보내올 때 이건 해약이라고
했을지라도 당신들은 그 말을 곧이 듣지 않고 먹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
나 체내에 잠복해 있던 독약이 발작할 시기가 오면 체내에 고통이 크게
마련이에요. 그렇게 되면 당신들은 정말 독성이 발작하는 줄 오인하고 그
생명을 재촉하는 가짜 해약을 생각해 내어 그걸 먹게 될 것을 당연할 거
예요. 결과 당신들은 그의 암산에 정말 넘어가고 마는 거예요."
조전신은 그 말을 듣자 크게 깨닫고 가볍게 한숨을 지었다.
"참으로 잔인한 방법이군요. 만일 오늘 아가씨의 자세한 설명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의 암산에 감쪽 같이 넘어갈 뻔했소."
대군은 처량하게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만일 내가 오늘 흑마왕의 내력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나도 절진신의도 약
물로써 사람을 해치는 술법을 생각해내지 못했을 거예요."
몽천악은 마음이 철렁함을 금치 못하며 물었다.
"흑마왕이 바로 절진신의란 말인가?"
대군은 그를 바라보며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절진신의는 흑마왕이 아니에요. 때가 되면 알려드릴께요."
조전신과 몽천악은 대군의 말을 들은 후 생명의 위협에 대한 걱정이 사라
졌다.
두 사람은 정신이 새로워졌다.
그러나 유기만은 마음이 무거워 찌푸려진 눈썹을 펴지 못했다.
대군은 유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흑마왕이 무슨 수단으로 유대협을 해치려는지 저도 얼른 생각이 나지 않
는군요. 지금 유대협에게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유대협께서는 우
리들 곁에서 떠나지 말라는 거예요. 흑마왕의 음모가 제아무리 무섭다고
하더라도 우리 몇 사람이 손을 잡고 방비를 한다면 그는 결코 뜻을 이루
지 못할 거예요."
이때, 군호들은 대군의 치밀한 생각과 귀신같은 판단에 이미 마음속으로
그녀의 뜻에 복종하고 있었다.
조전신이나 유기는 하나같이 오만하기 그지없는 위인들이었으나 대군의
지휘에 순종하기로 작정했다.
바로 이때였다.
돌연 "왝!" 하는 소리가 들렸다.
팔검비상 진삼청이 연거푸 세 번이나 선혈을 분수처럼 토해 냈다.
그러나 선혈을 토해낸 진삼청은 입을 열 수가 있었다.
"정말 위험했소, 하마터면 노부는 아까운 목숨을 잃을 뻔했소."
대군이 재빨리 다가가 물었다.
"진삼청 노선배님, 흑마왕과 싸워보셨나요?"
팔검비상 진삼청은 돌연 손을 들어 인피가면을 잡아 벗기고 입가에 흐른
피를 닦아 그의 청수한 진면목을 드러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싸워봤소."
대군이 말했다.
"어떻게 싸우셨어요? 말씀해 주세요."
진삼청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천천히 말했다.
"흑마왕은 정말 교활하기 이를 데 없었소...... 아까 내가 그놈의 여인을
추격할 때 돌연 관속으로부터 하나의 인영이 솟아오르는 것과 동시에 처
절한 비명소리가 일어났소. 그건 녹의의 여인이 그 사람의 일 검에 가슴
을 뚫린 거요. 이런 돌변에 나는 정신이 흩어졌으며 그 순간 번개처럼 그
사람의 일 장이 내 가슴을 눌렀소.
그 빠른 속도가 흑마왕이란 것을 생각
케 했소. 나는 화가 치밀어 고함을 지르며 극히 정심하면서도 신묘한 수
법으로 단검을 던졌소. 그 일 검이 상대방을 적중시켰는지 모르겠으나
이때, 왼쪽 가슴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고 하마터면 정신을 잃고
쓰러질 뻔했소. 이와 때를 같이하여 입으로부터 선혈이 터져 나왔소.
억
지로 정신을 가다듬고 눈 앞의 광경을 살펴봤을 땐 그 마영은 이미 종적
이 묘연했고 내 단검까지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없었소."
대군은 이 일단의 경과를 듣고 나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녹의의 여인의 행적이 드러나자 자신의 정체를 감추기 어렵게 되어 흑마
왕은 그녀를 죽여 입을 봉한 거예요. 그리고 흑마왕이 너무나 뜻밖에 출
현했기 때문에 진삼청 노선배님은 정신이 분산되어 노선배님의 그 무서운
검초도 흑마왕의 고루장인에 패하고 만 거예요. 그러니 흑마왕이 다시 고
루장인을 쳐낸다면 아마 진삼청 노선배님은 막아내지 못할 거예요."
이 말을 들은 진삼청은 속으로 불복하는 마음이 들어 냉소를 날리며 입을
열었다.
"노부의 일 검은 산천 초목을 떨게 만드오. 나는 흑마왕이 단 한 번에 나
의 오묘한 검식을 깨달았으리라고는 믿지 않소. 흥, 모르기는 해도 흑마
왕도 내 일 검에 맞았을 것만 같소."
"네, 그래요. 흑마왕도 분명히 진삼청 노선배의 일 검에 맞았는데 그것
도 깊이 맞았어요. 그렇기 때문에 땅에 떨어뜨리지 않고 찔린 채 가지고
갔어요. 그러나 찔린 부위는 요해는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흑마왕은
그곳에 쓰러지지 않은 거예요. 그러나 흑마왕의 안하무인하는 콧대는 크
게 꺾였을 거예요."
팔검비상 진삼청은 그 말을 듣게 되자 마음이 기뻤다.
"아가씨의 판단은 극히 정확하여 감탄을 금할 수가 없구려."
대군은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노선배님은 흑마왕이 또한 한 번에 오묘한 검식으로 깨닫지 못했
을 것이라고는 안심하지 마세요. 흑마왕의 초인적인 안력은 무공을 터득
하는 일에 있어서는 보통 사람의 능력을 훨씬 능가하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는 천하 각문 각파의 무학을 모조리 배울 수가 있었던 거예
요......"
팔검비상 진삼청은 큰소리로 파안대소했다.
"하하하, 이 하늘 밑에서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오직 옛날
의 장금각 한 사람 뿐이요......"
말이 여기에 이르자 진삼청은 돌연 어떤 가공할 일에 생각이 미친 듯이
표정이 싹 변하며 말이 중단되었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생각에 젖어 들
었다.
다른 사람들도 어떤 큰 일에 생각이 미친 것처럼 일제히 "앗!" 소리를 발
하고 대군에게 눈길을 던졌다.
대군은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입을 열었다.
"당신들은 생각이 그에게 미친 거지요?"
독비절도 유기가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흑마왕이 바로 그 사람이란 말이오?"
"네, 맞았어요. 바로 장금각이 흑마왕이에요."
이 말에 군호들은 기겁할 듯 놀라고 말았다. 조전신이 침중한 어조로 말
했다.
"장금각은 죽은 지 벌써 삼십여년이 지났는데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시
오?"
대군이 천천히 말했다.
"노선배님에게 한 가지 묻겠는데 혹시 옛날에 누구에게 비검절기를 전수
해 준 일이 있나요?"
조전신이 말했다.
"장금각에게 전수해 준 일이 있소."
대군은 지삼청을 향해 천천히 말했다.
"성 밖 묘지 위에서 노선배님의 명호를 사칭하고 삼청도장이 펴냈던 팔검
비상수법이 노선배님의 비검과 꼭 같지 않아요?"
진삼청은 큰소리로 말했다.
"맞소, 실력이 좀 달랐을 뿐 수법을 똑 같았소."
"또 한 가지 비슷한 일을 물어보겠어요. 흑마왕은 말할 때 철리회음 절공
으로 하는데 천하에 그런 공부에 정통한 사람은 오직 귀곡선생뿐이에요.
만약에 귀곡선생이 장금각에게 전수해 준 것이 아니라면 어느 누가 전수
해 주었을까요? 흑마왕이 지니고 있는 독술을 보더라도 절진신의를 빼놓
고는 그보다 더 정숙(精熟)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리고 흑마왕의 변
장 이용술은 무림정여 송연부부가 가장 정통해요......
흑마왕은 이런 기
이한 재주와 비술(秘術)을 한 몸에 지니고 있어요. 생각해 보세요. 장
금각 이외에 누가 그처럼 많은 절학을 배울 수가 있겠어요?"
대군은 증인들의 얼굴을 천천히 쓸어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자고 이래로 극악무도한 사람이 윤리 도덕을 무시하고 어떤 일을 하는
데에는 그대로의 무슨 목적이 있기 때문이에요."
흑마왕의 무림 십걸을 향해 도전하는 것은 그 동기가 어디에 있을까?
강호무림에서 패권을 다투고 오직 나만을 높이려는 것일까?
물론 그런 건 아니다.
그는 원수를 갚으려는 것이다!
그것을 무림 십걸이 그의 아내와 통정(通情)을 했고 그와 그의 수하 일백
여 명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복수하여 무림 십걸을 하나하나 죽여갔다.
대군의 말을 들은 군호들은 마음이 서늘해지고 모골이 송연해졌다.
어디까지나 합리적이고 정확한 판단이었다.
장금각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흑마왕이 될 가능성은 없다.
그러나 장금각은 죽은 지 벌써 삼십여년이 지났고 시체는 호수 속에 수장
했던 것이다.
그가 어떻게 다시 살아났단 말인가?
그러므로 조전신과 유기 그리고 진삼청은 장금각이 흑마왕이라는 것을 믿
으려고 하지 않았다.
조전신이 처량하게 탄신을 하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의 추측은 일리가 있소. 그러나 장금각은 죽은 지 벌써 삼십여년
이 지났고 그 시체는 호수 속에 가라 앉혔소. 이건 엄연한 사실이며,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정말 믿을 수가 없는 일이오."
대군이 천천히 말했다.
"장금각이 어떻게 살아났는지 나도 알 수 없어요. 그러나 나는 장금각의
부활은 절진신의 윤천초와 관계가 있다고 확신해요. 여러분께서 만약 장
금각이 과연 흑마왕인지 아닌지를 밝혀 보실 생각이 있다면 절진신의만
찾아내면 모든 지상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거예요."
유기가 말했다.
"대군 아가씨는 절진신의가 바로 이 공동묘지에 숨어 있다고 하지 않았
소?"
대군을 머리를 끄덕였다.
"네, 절진신의는 바로 이 묘지에 숨어 있어요."
유기는 힘있는 어조로 말했다.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 우리는 기필코 절진신의를 찾아 내야 하오."
대군은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지금은 오정이 가까워 졌어요. 우리 사방으로 손을 나누어 수색해 보기
로 해요. 만일 강적을 만나던가 윤천초를 발견하면 길게 휘파람을 세 번
불어 신호를 하기로 해요. 아시겠지요? 그리고 찾던 못 찾던 우리는 일몰
전에 이 묘의 동쪽 산 입구에 모여야 해요."
조전신, 유기, 진삼청 등 세 사람은 오늘 이처럼 일개 소녀의 지휘를 받
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비록 달갑지는 않았으나 묵묵히 그녀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조전신, 유기, 진삼청 세 사람은 동, 서, 남 세 방향으로 달려 갔다.
몽천악과 대군은 북쪽으로 향해 갔다.
공동묘지...... 보이는 것이라고는 음산하고 공포스러운 분묘, 동굴, 여
기저기 희끗희끗 보이는 낡은 관......
몽천악과 대군은 한패가 되어 백여 장을 나갔다. 이때, 나무 그늘에 세
명의 황의의 화상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대군의 안광(眼光)은 매우 예리했다.
그녀는 첫눈에 그 가운데의 뚱뚱한 중년화상이 바로 아홉 번째 건물에서
일을 보던 화상임을 알아 차렸다.
그는 왼손에 염주를 들고 오른손은 가슴 앞에 세우고 있었다.
두 눈은 가볍게 감고 있었으며 태도는 극히 엄숙하고 위엄이 있었다.
그리고 좌우의 두 화상은 하나는 키가 크고 하나는 작았으나 모두가 비쩍
말랐으며 그들 역시 손에 염주를 들고 있었다.
이 두 화상은 두 눈에서 신광을 쏟아내며 대군과 몽천악을 바라보고 있었
다.
몽천악은 이런 상황에 접하자 가슴이 뜨끔했다.
'이 세 화상의 눈길이나 태도로 보아 무림 인물임에 분명하다. 이 묘지
안의 화상이 무공을 지니고 있을 줄이야......'
"아미타불, 두 분 시주께서는 어디로 가십니까?"
가운데 뚱뚱한 중년화상이 돌연 눈을 번쩍 뜨고 쩌렁쩌렁한 음성으로 물
은 것이다.
대군이 웃으며 말했다.
"저는 대사님의 태도가 보통 사람과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정말이었군요.
대사께선 무림 고수였군요."
뚱뚱한 화상이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미타불, 이곳을 극히 조용한 곳이요. 빈승은 두 분 시주께서 이곳에서
간과(干戈)를 움직여 싸우는 일이 없기를 바라오."
대군은 생긋 웃었다.
"지당하신 말씀이에요, 우리는 이 묘지에서 옛친구 한 명을 찾고 있는데
갈피를 못 잡고 있으니 대사님께서 그를 빨리 찾을 수 있도록 도와 주세
요."
"두 시주께서 빈승의 권고를 받아들여 떠나지 않는다면 여기 다시 두 개
의 무덤이 늘 거요."
대군이 냉소했다.
"무덤이 두 개만 더 늘어나지 않을 거예요."
이때, 좌우에 서 있던 크고 작은 화상이 얼굴에. 분노와 살기를 떠올렸다.
뚱뚱이 화상이 차갑게 말했다.
"여시주께서는 제구 묘지에서 소란을 부린 것을 아직도 지나쳤다고 생각
하지 않소?"
돌연 대군은 안색을 싸늘하게 변화시키며 말했다.
"우리가 제구묘지에서 한 일을 대사께서 이미 다 알고 계시군요. 대사께
서 총명하신 분이라면 어서 절진신의 윤천초에게 대군이란 사람이 찾아왔
다고 전해 주세요."
뚱뚱한 화상의 안색이 갑자기 변했다.
"시주의 말씀은 밑도 끝도 없어 알아듣기가 어렵구려."
"절진신의 윤천초가 이 묘지에 숨어 있다는 것을 거짓이 아니죠. 우리가
찾지 않아도 흑마왕이 그를 찾아, 죽이고 말 거예요. 우리가 그를 찾는
것은 흑마왕을 대항할 방법을 의논하려는 거니 대사께서 빨리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소녀 잔양신공
뚱보 화상은 돌연 안색을 급변시키더니 차갑게 외쳤다.
"당신들이 그래도 이 만인 묘지를 물러가지 않으면 빈승이 손 속에 정을
두지 않는 다고 원망하지 마시오."
몽천악은 마치 벙어리처럼 시종 한마디도 않고 옆에 묵연히 서 있기만 했
다. 그러다가 문득 앞으로 성큼 나서더니 대군의 좌전방을 막아서며 차가
운 냉소를 던지면서 말했다.
"귀하께 무슨 절초가 있으시다면 얼마든지 펼쳐 내어 보시오."
그러자 뚱보화상은 분노를 터뜨렸다.
"그래도 깨닫지 못하다니 죽어 마땅하구나. 두 사제, 우리는 그만 물러가
도록 하자."
그가 호령을 내리자 좌우의 크고 작고 야윈 화상들은 몸을 돌렸다. 뚱보
화상도 그들과 함께 몸을 돌려 나갔다.
그때였다.
"멈추어라!"
몽천악은 차가운 고함 소리와 함께 몸을 솟구쳐 추격해 나갔다.
몽천악이 몸을 솟구치는 바로 그 찰라 세 명의 화상들도 잽싸게 몸을 솟
구치더니 각자 세 방향으로 흩어졌다.
대군은 이 광경을 보고 세 화상들이 도주하려던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고함을 질렀다."
"그들의 반격을 조심하세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과연 뚱보화상을 몸을 홱 돌리고 냉랭히 내뱉었
다.
"너무 늦었다!"
말소리와 거의 동시에 "휙!"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일어나더니 뚱보화상
의 왼팔에 걸고 있던 염주가 돌연 앞으로 급속하게 날아왔다.
"쉭! 쉭!" 그러나 크고 작은 두 명의 화상도 재빨리 자기의 염주를 한 알
씩 세차게 내던졌다.
절정한 무공을 간직한 몽천악이었으므로 보통의 암기로는 도저히 그를 해
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순간 대군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세 개의 염주는 몽천악의 몸이 아니라 공중의 한 초점을 향해서 서로 충
돌을 하려는 듯 날아갔다. 신비스럽다기보다 괴이할 정도였다.
대군이 성급히 외쳤다.
"몽사형, 빨리 후퇴하세요. 암기에는 속임수가 있어요."
그러나 이때 각기 다른 세 방향으로 날아온 세 개의 염주는 전공 석화처
럼 서로 맞부딪치고 있었다.
"쾅!"
한차례 벼락 같은 폭음 소리가 일어났다.
세 개의 조그만 염주알은 세 개의 화포(火砲)로 변하여 몽천악의 세 자
가량 앞에서 폭발했던 것이다.
한 줄기 강렬한 화염이 폭음과 함께 사면 팔방으로 흩어졌다.
그와 함께 한차례 비명 소리와 함께 몽천악의 몸은 삼 장 밖으로 날아갔
다.
몽천악의 몸은 피투성이가 되어 고목처럼 힘없이 땅 위에 쓰러지고 말았
다.
이것을 본 대군은 깜짝 놀라며 그에게 덮쳐갔다.
"몽사형......"
이때, 세 명의 화상이 승복의 자락을 날리며 수장 밖에서 덮쳐왔다. 그들
의 오른 손에는 또 다시 염주 한 알씩 들려 있었다.
그것은 염주가 아니라 인화탄이었던 것이다.
이때, 몽천악은 고목처럼 땅 위에 쓰러진 채 날카롭게 고함을 질렀다.
"사매, 나는 아직 죽지 않았으니 빨리 물러가거라. 인화탄은 매우 무서
운......"
몽천악은 이미 벽혈검을 뽑아 들고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 일어섰다. 그
리고는 몸과 검을 하나로 하여 뚱보화상을 향해서 날아갔다.
"쉭! 쉭! 쉭!" 세 명의 화상의 수중으로부터 인화탄이 또다시 날아왔다.
몽천악의 검법의 속도는 그 빠르기가 결코 유기(柳奇)의 절도에 비해 뒤
지지 않았다.
한 줄기 검광이 세차게 날아가자 뚱보화상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허리
가 두동강이 나 버렸다.
"쾅! 쾅!" 천지를 진동할 듯한 폭음 소리가 일어나더니 인화탄은 몽천악의
일곱 자 뒤에서 폭발했다.
몽천악은 뚱보화상을 죽인 후 땅에 내려서더니 몸을 다른 방향으로 옮겨
섰다. 그러자 다시 날카로운 검광이 대나무처럼 비쩍 마르고 귀가 홀쭉하
게 큰 화상에게 날아갔다.
키가 작은 두 명의 화상은 뚱보화상이 몽천악의 장검에 맥없이 요절되어
버림을 보자 질겁을 하고는 성급히 뒤로 물러섰다.
동시에 동서 양쪽에서 또다시 몽천악을 향해 두 개의 인화탄이 날아들었
다.
그러나 몽천악의 몸은 이미 조금 전의 자리에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 그
는 잽싸게 몸을 날려 그것을 피했던 것이다.
인화탄은 몽천악의 뒤에서 폭발했고 이미 그를 해칠 뻔한 위력은 잃어버
리고 난 뒤였다.
몽천악의 장검은 다시 키가 큰 화상의 몸을 향해 날아올랐다.
몽천악의 일검에 키가 큰 화상은 안녕을 고했던 것이다. 키가 작은 화상
은 허겁지겁 죽림 쪽으로 달아났다.
몽천악의 벽혈검은 일곱 장 밖으로 내던졌다. 검광이 허공을 가르며 유성
처럼 날아갔다.
몽천악의 비장한 고함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키고, 그와 함께 늑대의 울음
소리가 깊은 정적을 깨뜨렸다.
작은 화상은 죽림 속에서 몽천악의 장검을 맞고 도로아미타불이 되어 버
린 것이다.
몽천악은 세 명의 화상을 죽여버리자 기진맥진해져서 그 자리에 털썩 쓰
러지고 말았다.
그는 기괴하고 전공 석화 같은 수법으로 단숨에 세 명을 죽였으나 이미
인화탄에 맞은 상처로 인해 긴장이 풀리자 쓰러져 버린 것이다.
대군은 급히 달려가 쓰러져 있는 몽천악을 부축해 일으켰다.
몽천악은 신음을 내면서 입을 열었다.
"사매, 인화탄 속엔 숱한 세침(細針)이 숨겨져 있었소. 내 몸엔 많은 세침
이 박혀 있어 나는 아마 달아나지 못할 것이니......"
그의 가슴이 혈육이 범벅이 되자 대군은 눈물을 흘리며 한탄했다.
"사형, 세침에 독만 없으면 구출할 수 있어요......"
몽천악은 쓸쓸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세침에 독이 없어도 그것이 너무나 가늘기 때문에 혈관을 찔리면 혈액의
순환을 따라 흐르니 신선이라도 살아나지 못할 거요."
세 화상의 염주가 이렇듯 흉측한 봉망(蜂芒) 인화탄일 줄은 꿈에도 생각
하지 못했다. 이 암기는 사천당씨(四川唐氏) 가문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
진 것으로, 그야말로 끔찍스러운 살인 무기였던 것이다.
대군은 비오듯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사형은 더 이상 말씀을 하지 마세요. 만일 지금 자석을 찾기만 하면 사
형은 충분히 살 수 있어요."
몽천악은 거듭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나를 살릴 수는 없소. 사매, 그러니 아직 말할 수 있는 동안 꼭 해
둘 얘기가 있소."
"무슨 얘기인지 해 보세요, 사형."
몽천악은 쓸쓸하게 웃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소."
대군은 순간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떨구었으나 잠시 후 결심한 듯 몽천악
을 쳐다보았다.
"나도 마찬가지로 사형을 연모하고 있었어요."
"거짓이 아니오?"
"아니에요, 내가 이제껏 아무에게도 알릴 수 없이 혼자서만 사모하던 사
람은 바로 당신이에요. 그러나 당신에겐 이미 송영혜가 있기 때문에 나는
당신을 속인 거예요."
몽천악은 그 말을 듣자 갑자기 애끓는 한숨을 쉬었다.
"나는 이제 죽을 수가 없소, 살고 싶소......"
대군은 이말을 듣자 그만 참을 수 없이 대성통곡을 터트리고 말았다. 몽
천악이 이미 죽음의 사신에게 붙잡혀 끌려가고 있는 것으로 느껴졌기 때
문이었다.
"아! 나는 이 사람을 어떻게 구한단 말인가?"
대군은 미칠 듯이 괴로워했다.
이때, 난데없이 한 가닥 차가운 웃음 소리가 들려왔지만 대군을 너무나
비통한 나머지 모든 지각을 상실하고 냉소 소리를 듣지 못했다. 아니, 그
소리를 들었다해도 그녀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대군은 지금 다만 두 손으로 몽천악만을 안고 그를 구해 낼 생각에 빠져
있었다.
오히려 몽천악은 자기 옆에 네 명의 사람이 우뚝 선 채 묵묵히 내려다보
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백발이 성성한 노파 하나와 두 명의 애꾸눈 장부(壯婦), 장한(壯漢), 그리
고 나머지 하나는 예쁘게 생긴 여랑이었다.
몽천악은 소스라쳐 놀라면서 외쳤다.
"묘가수!"
대군은 몽천악의 외침을 듣고 비로소 깊은 꿈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듯 네
사람을 돌아보고 천천히 말했다.
"당신들은 정말 때 맞춰 잘 왔군요. 이제 우리를 죽이려면 힘 하나 들이
지 않아도 될 거예요."
묘가수가 냉소를 던지면서 물었다.
"그는 인화탄의 봉미독침에 맞았지?"
대군은 처량하게 탄성을 질렀다.
"봉미침에 독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그녀는 탄식을 한 후 돌연 입을 굳게 다물어 버렸다.
묘가수가 다시 냉랭히 말했다.
"누구든지 당가문의 봉미독침에 맞은 사람은 세 시간 후면 독이 심장을
침범하기 때문에 어떠한 신선 묘약도 생명을 구하기는 어렵소."
돌연 대군의 영기가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당신은 구할 수 있어요?"
"나는 다만 그의 몸에 꽂힌 독침만을 뽑을 수 있소. 그렇지만 독을 제거
할 수 없소."
그러자 대군의 얼굴은 회색이 감돌았다.
대군은 상대방 앞에 공손히 머리를 굽히며 애걸을 했다.
"묘낭자, 부탁이에요. 당신이 이분을 구출해 주기만 한다면 어떠한 조건이
든지 나는 쾌히 승낙하겠어요."
그러나 묘가수는 냉소를 던졌다.
"사천 당가문의 봉미침의 독은 예사의 독은 아니오. 설사 내가 독침을 모
두 뽑는다고 해도 그는 죽음을 면치 못할 거요. 더욱이 그는 오래 전에
한 번 흑마왕의 독에 중독 되었던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더욱 구
하기가 힘들 것이오."
대군은 거듭 애걸을 했다.
"묘낭자, 나는 당신이 이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또한
흑마왕의 독은 당신이 그에게 사용한 것이 아녜요? 흑마왕이 비록 천하
무림 고수들을 미워하긴 하지만 밑에도 채무자가 있으니 잔결서생은 그
사람과 아무런 원한도 오해도 없어요. 그런데 당신은 정말 이분을 죽일
작정이세요?"
이말을 듣자 묘가수는 안색이 일변했다.
"너는 그가 흑마왕의 독에 중독된 것이 나와 관계가 있다는 과거의 일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
"그것은 당신이 흑마왕의 수하이기 때문이지요."
묘가수는 싸늘해졌다.
"넌 항상 자기가 총명하여 신처럼 예측을 잘한다고 자부하지만 이번에는
틀렸다. 나는 흑마왕의 수하가 아냐!"
대군은 몽천악의 몸을 샅샅이 살펴 독침을 찾아냈다.
재빨리 자석으로 봉미침을 뽑은 후 그녀는 계속해서 상처 부분에 독침이
또 없는가 여기저기 들여다보고 만져 보곤 하였다.
거의 일각이나 걸려 대군은 몽천악의 상처로부터 모두 열세개의 독침을
뽑아내었다.
대군은 가벼운 탄식을 내었다.
"이침은 매우 작기 때문에 다행히 위력이 크지 못했고 깊이 박히지 않았
어요. 그렇지 않고 독침이 혈관을 뚫고 들어가기라도 했다면 큰일날 뻔했
어요."
그러자 몽천악은 벌떡 일어나 앉더니 씁쓰레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그러나 침에는 독이 발려져 있어 그것이 피 속에 들어갔을것이니 조만간
나는 죽음을 면치 못할 거요."
대군은 자석을 깨끗이 닦은 뒤 품속에 넣었다.
이윽고 그녀는 몽천악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 감각이 어떠세요?"
몽천악은 다시 한번 전신을 부르르 경련 시키더니 대답했다.
"상처부분이 뜨거우며 중독된 감각이 있소."
대군은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가 부축해 드리겠어요. 우리 빨리 절진신의를 찾으러가요."
몽천악은 고개를 내저었다.
"찾을 필요 없다. 너는 나와 함께 세 시간 동안 얘기나 마음껏 하자."
대군은 더욱 부드럽게 말하였다.
"사형, 나는 사형 없이는 살 필요가 없어요. 만일 당신이 죽으면 나도 혼
자 살고 싶은 마음이 없으니 당신은 반드시 살아야 해요."
몽천악은 탄식을 했다.
"하찮은 개미도 죽음을 두려워하는데 하물며 사람이야 오죽하겠나, 아! 그
러나 망망한 천지에 절진신의를 어디 가서 찾는단 말이냐. 그가 이 만인
분묘속에 있다 하여도 어떻게 그분을 찾을 수 있느냔 말야? 설사 그분을
찾았다 하더라도 나를 치료 해 준다는 승낙을 받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
다. 세 시간이란 매우 짧은 시간이며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갈 터이고 어
쩌면 나도 곳 졸도해 버릴지 모르겠다."
대군이 퍼뜩 고개를 쳐들었다.
"사형, 지금 내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데 절진신의는 바로 좌측 가까운
근처에 있으니 우리는 곧 그분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몽천악은 돌연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엉뚱한 소리를 했다.
"이상하구나. 내가 세 명의 화상을 죽일 때 세 차례나 큰 고함 소리를 질
렀는데 어찌하여 아직까지 조전신 등이 달려오지 않지?"
대군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나는 지금 그 일을 생각할 여유가 없어요. 사형은 이렇게 앉은 채로 죽
을 때를 기다리겠다는 거예요?"
몽천악은 가볍게 탄식을 했다.
"좋다. 너와 함께 그분을 찾으러 가자."
그러면서 그는 대군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일어서니 몽천악은 전신이 벌벌 떨리었다.
"아악!"
몽천악은 백짓장처럼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고통스러운 경련을 일으키며
고함을 쳤다.
대군을 깜짝 놀라며 물었다.
"사형, 왜 그러세요?"
몽천악은 떨리는 목소리로,
"나...... 벌써 죽음이 가까웠나 보다......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어
지러워...... "
하고는 주저앉았다.
대군은 그의 몸을 두 팔로 안아 일으켰다.
"사형, 내가 당신을 안고 나무 그늘로 가겠어요."
대군은 몽천악을 끌어안고 수장까지 달려가서 언덕 위의 풀밭에 앉았다.
몽천악은 그녀의 품속에 전신을 내맡긴 채 신음을 토하고 있었다.
여전히 창백하게 질려있는 얼굴은 계속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서늘한 바람이 소리 없이 불어오고 있었다.
주위는 쥐죽은 듯 고요한 정적에 둘러싸여 있었다. 간혹 나뭇잎 떨리는
소리만이 살랑살랑 들리고 있을 뿐 그야말로 소름이 끼칠 듯한 정적이었
다.
몽천악은 심하게 신음 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사매, 나는...... 사지백해가 아프고 쓰리고...... 전신이 찢어지는 것
만 같구려......"
몽천악은 한숨을 길게 내뱉고 말했다.
"두 가지 독이 동시에 발작을 하니, 나는 이젠 살아나기는 틀렸다."
잠시 말을 쉬더니 계속 이었다.
"사매, 나는 네게 몇 가지 부탁할 일이 있다...... 내가 죽으면 너는
나의 시체를 취운봉 망산 산맥의 절곡으로 운반하여 묻어다오. 나의 아내
송영혜는 바로 그곳에 살고 있다. 또 한 가지 부탁할 일은 너는 호창부의
딸 호천옥을 구출하여라. 그녀는 무아진교 총교주 호단향에게 잡혀갔는데
어디에 갇혀 있는지 모르겠구나......"
몽천악의 음성은 정말 임종 전의 유언처럼 비장하고 처량했다.
대군은 그의 말을 듣고는 눈물을 비오듯 흘렸다. 그러면서 떨리는 목소리
를 가다듬어 말했다.
"사형, 죽어선 안돼요. 당신은 반드시 굳게 살아야 해요. 당신은 몇 번
이나 위험을 겪고도 이제까지 살았는데 왜 이번엔 살지 못한단 말이에요?"
몽천악은 목이 타는 듯 침을 한 번 삼키고는 길게 이야기를 했다.
"이번에는 그런 요행이 없나 보다...... 아! 나는 지금 죽어도 한이 없다.
본래 내가 굳게 살려고 한 것은 첫번째 사부(師父)인 호창부의 원수를 갚
으려는 계획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호창부 사부가 흑마왕의 손에 죽었
음을 알았고 또 그들은 여전히 원한이 순환되어 서로 죽이고 복수하고 하
니 나는 이미 이 소용돌이속에 휩싸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대군,
본래부터 나는 부모가 없는 고아였으니...... 이십년 전에 벌써 배고파
죽어야 했다...... 그런데 이십년 동안을 살았으니 이제 죽어도 아무런
한이 없다. 대군, 너도 너무 슬퍼하지 마라. 인생은 본래부터 일장춘몽
이다. 나는 황천에 먼저 가서 너를 기다리겠다."
여기까지 말한 후 몽천악은 음성이 점점 작아지더니 정신을 잃어버렸다.
대군은 애통하게 울부짖었다.
"사형! 사형!"
대군이 손을 내밀어 그의 코 앞에 대어보니 숨결이 몹시 미약했다.
그는 다시 심장을 짚어 보았다. 그러나 심장은 아직 멈추지 않고 가늘게
나마 뛰고 있었다.
대군은 다소 안심이 되었다.
그녀는 내심 곰곰이 생각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는 절진신의를 찾아야 한다. 천하에 몽천악을 구
출할 수 있는 사람을 그분밖에 없다. 몽천악은 사천당 가문의 인화탄 봉
미침의 독에 중독 되었으나 본래는 세 시간 후에 기독이 심장을 침입하여
죽게 됐는데 지금은 흑마왕의 독을 발작시켜 두 독이 동시에 발작을 하니
언제까지 지속될지도 모르겠구나.......'
이때였다.
갑자기 언덕 위에서 몇 개의 그림자들이 번뜩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이십여 명의 황의 화상들이 나무숲 뒤에서 나타나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들의 얼굴은 개기름이 주르르 흘렀고 눈은 흉광을 발산시켰으며 손에는
단장 등의 병기를 들고 있었다.
그들 황의 화상들은 나무 숲에서 나온 후 몽천악이 죽인 세명의 화상의
시체들을 보고는 놀란 빛을 얼굴에 띄우며 걸음을 멈추었다.
대군은 이들은 보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절진신의를 찾으려면 이들을 고문하는 도리밖에 없겠구나.'
대군은 눈앞의 이 화상들이 무공이 고강하지 못하기 때문에 몽천악에게
죽음을 당한 세 명의 화상의 시체를 보고 마음속으로 겁을 집어먹을 것임
을 알았다.
왜냐하면 죽음을 당한 세 명의 화상은 만인묘지 중에서 일류 고수 인물이
었기 때문이다.
다들 안면이 흉악한 화상들은 잠시 망설이더니 돌연 단장을 들고 언덕 쪽
으로 접근해 오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이쪽이 두 사람뿐이고 남자는 이미 중상을 입은데다 남은 것
은 하나 뿐임을 알고 담량이 커졌던 것이다.
황의 화상들은 서서히 접근해 오고 있었다.
대군이 이때 돌연 날카롭게 외쳤다."멈추어라!"
서서히 접근해오던 황의 화상들은 이 외침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며 발걸
음을 멈추었다.
대군은 우선 몽천악을 풀밭 위에 눕혔다.
그리고 언덕 앞에 선 채 도저히 침범할 수 없는 위엄을 얼굴에 띄우고 화
상들을 응시했다.
화상들은 그제야 비로소 기미를 알아차리는 듯했다.
이 천사같이 예쁜 여자가 힘이 약한 것이 아니라 알고 보니 암호랑이임을
알았던 것이다.
화상들은 서로 자기 동료들의 거동을 살피며 잠자코 있었다.
"흐흐흐......"
그들 중 제일 몸집이 뚱뚱하고 얼굴색이 검은 화상이 돌연 음침하게 웃었
다.
아마도 그들의 두목인 것 같았다.
"계집애야, 넌 죽음을 자초하지 마라. 내가 묻는 말에 네가 얌전히 대답
만 하면 나는 절대로 너를 난처하게 하지 않겠다."
그 말에 대군은 냉랭히 대꾸했다.
"내가 오히려 네게 물을 말이 있으니 얌전히 묻는 말에 대답을 하라. 그
러면 죽음을 면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은 죽어도 시체가 묻힐
장소가 없는 줄 알아라."
황의의 황상들은 굶주린 이리떼처럼 덤벼들 기세를 보였다.
"흐흐흐...... 이 요망한 계집 같으니라구. 잡아먹어도 시원찮을 계집 같
으니라구......"
화상들은 손을 벌리고 일제히 달려들었다.
대군은 잠시 가만히 서서보고만 있더니 돌연 왼손을 뻗어내어 허공을 향
해서 일 장을 날렸다.
무서운 일 장이었다.
세 명의 황의의 화상들이 아무런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이 소녀 잔양장에
맞아 죽어 버렸다.
대군은 그 세 명의 황의의 화상들이 신음 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죽어
나자빠지는 것을 보자 마음속으로 깜짝 놀랐다.
'나의 공력이 언제 이렇게 강해졌을까? 칠 장 밖에서 허공으로 일 장을
날렸을 뿐인데 사람을 죽이다니...... 정말 꿈만 같구나.......'
대군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대군은 놀람과 기쁨이 범벅이 되었다.
본래 그녀는 일 장을 펼쳐내어 그들을 다만 놀라게 하려고 했는데 자신도
모르게 그들을 죽여 버렸던 것이다.
일 장의 공력을 예전보다 두 배나 고강해진 것 같았다.
'아...... 나의 소녀 잔양신공은 이제 최상의 경지까지 도달한 것이로
구나...... 나는 이제 제일총교주를 죽일 수 있게 되었다.'
대군은 재차 또 일 장을 펼쳐 내었다.
그러자 숨어있던 남쪽 숲속의 일곱 화상이 또 땅바닥에 쓰러졌다.
이와 함께 떠들썩한 소리가 들리더니 살아 남은 화상들은 겁에 질려 싸우
지도 않고 도망을 치기 시작하였다.
대군은 날카롭게 소리쳤다.
"어딜 가느냐?"
그녀는 가볍게 몸을 날렸다.
순간 수장 밖으로 날아간 그녀는 오른손을 내밀어 제일 뚱뚱한 화상의 목
덜미를 잡았다.
그 화상은 몸집도 뚱뚱하고 몸무게가 백 근 이상은 되었지만 대군의 손에
번쩍 들린 채 허공에서 두발만 바둥거릴 뿐이었다.
그러면서 겁에 질린 비명을 지르면서 애원을 했다.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대군은 싸늘하게 냉소를 던지며 그를 땅 위에 살짝 내동댕이쳤다.
"내가 묻는 말에 얌전히 대답하면 너를 살려주겠다."
검은 얼굴의 화상은 겁에 질려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는 땅바닥에 꿇어앉아 연방 큰 절을 했다.
"여신선(女神仙)께서 묻는 말에 조금도 거짓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대군은 냉랭한 일소를 던지고 재촉했다.
"너희들의 소령은 누구냐?"
검은 얼굴의 화상은 굽신거리며 대답했다.
"우리들의 수령은 제칠중묘원(第七重墓院) 주지이신 자금강(紫金剛)화상이
십니다"
대군은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저기 세 화상을 누구냐?"
"여신선께선 손에 염주를 들고 있는 세 분 화상을 말하시는 것입니까? 그
들은 모두 묘원의 주지 화상으로 수령인 자금강 화상과 함께 십대 화상이
라 불리고 있습니다."
대군은 그의 말을 비꼬듯 말했다.
"자금당 화상은 모양이 어떻게 생겼느냐?"
이때였다.
돌연 음침한 음성이 들려왔다.
"본인께서 오셨으니 어떻게 생겼는지 네가 직접 보아라."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돼지 멱따는 날카로운 소리가 검은 얼굴의 화
상 입에서 터져 나왔다.
검은 얼굴의 화상은 갑자기 땅 위에서 빙그르르 세 바퀴 구르더니 움직이
지를 못했다.
<제6권에 계속>
첫댓글 감사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