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는 강원도의 동해 바다를 끼고 돌며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새벽부터 시작한 여행이어서 그럴까, 나도 모르는 사이 깜빡 잠이 들었다. 갑자기 조용해져서 주위를 둘러보니 운전을 하던 사진작가가 고개 마루에 차를 세운 채 사진을 찍고 있었다. 마침 새로 건설한 도로가 있었는데, 길을 내느라 가파른 고개를 V자 모양으로 절개하여 도로 양쪽에 3단으로 계단을 만들어 잔디를 심어놓았다. 그리고 그 가운데 시멘트로 된 계단이 도로에서 하늘이 보이는 공제선까지 가파르게 놓여 있었는데, 사진기자는 그 계단을 찍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차를 몰고 고개를 넘을 때 나는 또 잠시 졸았다. 그 바람에 공양왕릉이 바로 그 고개 밑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우리는 한참이나 지나쳐갔다. 주유소에서 길을 물어 다시 되돌아오니, 오른쪽(고개에서 내려올 때는 왼쪽편임) 마을버스정류장 앞 아주 작은 표석에 ‘공양왕릉 입구’이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그 화살표를 따라 얼른 오른 편을 바라보니 큰길에서도 능이 보였다.
공양왕릉은 초라하기 그지없어서, 주차장 오른편에 삼척시에서 세운 안내판이 없다면 그냥 이름 없는 무덤으로 생각하고 지나치기 쉬울 정도였다. 전에는 더 초라했을 터인데, 그래도 삼척시에서 돌계단을 만들고 봉분을 정비해서 보통 무덤보다 월등히 크기 때문에 한눈에 보아도 예사 무덤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해준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aromabooks.com%2Fimage%2Fno05%2FS3500004.jpg) 삼척시에서 공양왕릉 입구에 세워놓은 안내판.
마침 마을 사람이 가까이에 있어 큰길에 안내판 하나 제대로 없어 지나쳤다가 다시 돌아왔다고 했더니, 얼마 전까지 새로 만든 안내판이 있었는데 트럭이 들이받아 없어졌다고 하였다.
공양왕릉에는 네 개의 봉분이 있었다. 이 능은 그 전까지 궁촌 사람들이 벌초 정도나 해주던 것을 1977년 당시 삼척 군수와 근덕 면장이 주선하여 새롭게 단장하였고, 매년 3월 근덕면 봉찬회에서 날짜를 잡아 제사를 올리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공양왕릉은 제법 봉분이 크게 조성되어 있었다. 그 옆으로 다시 세 개의 봉분이 있는데, 바로 옆의 봉분은 공양왕의 정비인 순비(順妃) 노씨(盧氏), 또 하나는 세자 석(奭), 그리고 나머지 가장 봉분이 초라한 것은 시녀나 말(馬)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aromabooks.com%2Fimage%2Fno05%2FS3500019.jpg) 삼척시에서 새로 조성한 공양왕릉. 계단석을 만들고 봉문 밑에 돌을 쌓아 제법 면모를 갖춘 묘가 되었다.
고려 마지막 왕으로 비참하게 최후를 마친 공양왕은 유독 눈물이 많은 왕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최영 세력을 축출하고 우왕(禑王)과 창왕(昌王)을 차례로 폐위시킨 뒤 꼭두각시로 앉힌 왕이 바로 공양왕이었다.
이성계는 우왕을 폐위하고 그의 아들 창왕을 세웠으나, 곧 두 부자가 사실은 공민왕(恭愍王) 아닌 당시 정치권력을 좌지우지하던 승려 신돈(辛旽)의 핏줄이라 하여 폐위시킨 것이다. 이때 고려 20대 신종(神宗)의 7세손인 왕요(王瑤)를 찾아내 34대 왕위를 계승케 하였다.
역사 기록으로 볼 때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핏줄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다. 왜냐하면 우왕은 신돈의 비첩(婢妾)인 반야(般若)의 아들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공민왕은 노국공주가 죽고 나서 혜비(惠妃), 익비(益妃), 정비(定妃), 신비(愼妃) 등을 두었다. 그가 이처럼 많은 여자를 비로 둔 것은 대를 이을 아들을 얻기 위해서였다. 자신의 능력을 믿지 못한 그는 홍륜, 한안 등 측근의 신들로 하여금 비밀리에 그녀들을 능욕하도록 명령하였을 정도였다. 그래도 아들이 태어나지 않자, 당시 개혁을 주도하던 권력자 신돈이 자신의 비첩 반야를 공민왕에게 바쳤다. 반야는 공민왕의 사랑을 받아 아이를 잉태하였고, 마침내 아들을 얻었는데 그 아이는 신돈의 집에서 자라났다.
신돈이 역모죄로 유배되었을 때, 공민왕은 백관이 모인 자리에서 신돈의 집에서 기르고 있는 반야의 아들이 바로 자신의 핏줄이라고 공개하였다. 이때부터 그 아들은 ‘우(禑)’라는 이름으로 세자가 되어 왕실에 들어왔으며, 나중에 공민왕은 자신이 살해되기 직전에 세자의 어머니가 사실은 반야가 아니라 익비 한씨(韓氏)라고 번복하였다. 그러나 신하들 중 누구도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실제로 조선 세종의 명으로 정인지, 김종서 등이 지은 <<고려사>>에 보면 우왕과 창왕의 이름을 ‘왕우’나 ‘왕창’이 아닌 ‘신우’나 ‘신창’으로 지칭하고 있다. 이것은 어쩌면 조선왕조에서 태조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한 전략적 차원에서 그렇게 지칭한 것으로 보이지만,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한 정황으로 볼 때 우왕이나 창왕은 공민왕의 핏줄이라기보다는 신돈의 피를 이어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아무튼 이성계는 공민왕 이후 두 번에 걸쳐 왕씨가 아닌 신씨가 왕위에 올랐다는 것을 문제삼아 다음 욍위에 공양왕을 앉혔다. <<고려사>> 기록에 보면, 공양왕은 공식적으로 왕위에 오르기 전 날 밤 너무 근심이 되어 밤이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날 왕위에 오르고 나서 그는 눈물을 흘리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일평생 입을 것 먹을 것과 시중할 사람이 모두 풍족하였다. 그런데 지금 와서 이렇게 중대한 책임을 지게 되니 어떻게 할 바를 모르겠다.”
공양왕은 매우 우유부단한 성격이었으며, 그래서 그 많은 왕씨 핏줄 중 이성계 세력에게 꼭두각시 왕으로 선택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성계 일파인 신흥 사대부들은 공양왕 3년에 토지개혁을 실시했는데, 그것이 이른바 ‘과전법(科田法)’이다. 이는 기존 권력자들, 즉 기득권 세력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신흥 세력들이 경제 기반을 닦는 요체가 되었다.
과전법을 시행하기 전인 공양왕 2년에 공사전적(公私田籍)을 모두 몰수하여 불태웠는데, 산더미 같은 문서들이 사흘 밤낮 동안 타올라 개성 하늘이 연기로 가득하였다고 한다. 이때 공양왕은 그 연기를 보며 고려왕조의 몰락을 예감하고 남몰래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결국 나이 45세에 왕위에 오른 공양왕은 재위 2년 8개월만에 이성계에게 양위하였다. 역성혁명으로 고려왕조가 막을 내리고 이때부터 조선왕조가 시작된 것이다. 고려왕조가 멸망하자 왕(王)씨들은 후환이 두려워 전(全), 옥(玉), 용(龍), 전(田) 씨 등으로 성을 바꾸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공양왕은 왕비와 세자, 시녀들과 함께 강원도 원주로 유배되었다가 나중에 간성으로 옮겨지면서 공양군(恭讓君)으로 봉해졌다. 그리고 3년이 지나서 삼척으로 다시 유배지를 옮긴 지 한 달 만에 살해당했다.
이러한 공양왕의 최후를 생각하며 양지바른 능 곁에 쪼그려 앉아 있으려니, 바로 등 뒤의 바닷가 쪽에서 소금기가 밴 비릿한 냄새와 함께 어떤 기척이 들렸다. 돌아보니 언덕 위에 시누대가 무성한 숲을 이루어 수런거리는 바람소리를 내고 있었다.
공양왕릉 언덕 위에서 본 바다가 저 멀리 수평선으로부터 밀려들었다. 그렇게 소리 없이 밀려든 파도소리가 어느새 모래밭에 하얀 물거품을 토해내며 밭은기침처럼 재채기를 하고 있었다.
유배시절 공양왕도 저 바다를 보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더 가까이 다가가 바다를 느껴보기 위해 '궁촌'으로 향했다. 공양왕릉에서 언덕을 넘으면 바로 마을이지만, 길이 없어 차를 타고 돌아서 바닷가에 닿았다.
‘궁촌(宮村)’이란 마을은 공양왕과의 인연에서 비롯된 이름이라고 했다. 왕이 잠시나마 머물던 촌이라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임시로 왕이 거주하던 궁궐이 있던 촌이라는 뜻이다.
‘궁촌해수욕장’으로도 잘 알려진 바닷가 모래밭에는 다른 동해안 해수욕장과는 달리 수천의 갈매기들이 내려앉아 조용히 읍(揖)을 하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왜 동해안 갈매기란 갈매기들은 다 몰려와 작은 궁촌리 앞바다 모래사장에 머리를 박고 있는 것일까. 그때 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이지만, 고려가 멸망할 때 죽은 충신들의 원혼이 저 갈매기들로 환생하여 공양왕릉을 향해 어깨 흔들며 온몸으로 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aromabooks.com%2Fimage%2Fno05%2FS3500032.jpg) 궁촌 앞바다와 모래사장에 내려앉은 갈매기들.
그래서 다시 공양왕릉이 있는 곳을 올려다보니, 그곳이 바로 궁촌 뒷동산이었다. 바다를 향해 바라볼 때 왼쪽으로 궁촌 해변을 끼고 돌아가면 숨어 있는 절경이 나오는데, 산 아래 깎아지른 절벽 밑에서는 흰 이빨을 으르렁대며 바위를 물어뜯는 성난 파도가 눈길을 휘어잡는다. 조용한 궁촌해수욕장과는 달리 이곳에선 파도가 잠시도 쉬지 않고 절벽에 자신의 몸을 내던지고 있었다. 아마 공양왕도 시름에 겨우면 이곳에 와서 저 깎아지른 바위 절벽과 시도 때도 없이 앙탈을 부려대는 파도소리를 듣고 있었을 것이다. 저 절벽과 파도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으므로 공양왕이 느끼던 숨결을 나 또한 저 하얗게 일어서는 포말에서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분노였다. 밖으로 표출하는 분노가 아니라 애써 안으로 삭이느라 가슴만 타들어가는 안타까운 그 무엇이었다. 그래서 저 바다의 포말은 절벽을 타고 기어오르지 못하고, 그 절벽의 발끝만 물어뜯으며 앙탈을 부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aromabooks.com%2Fimage%2Fno05%2FS3500031.jpg) 궁촌 인근의 절경. 바위 절벽 아래로 펼쳐진 풍광이 숨은 비경을 연출하고 있다.
나는 발길을 돌려 공양왕이 살해되었다고 해서 그곳을 ‘살해재’로 부른다는 고개를 찾아가보기로 하였다. 궁촌에 사는 마을 사람들에게 물으니, 바로 공양왕릉에서 바라다 보이는 아스팔트 도로가 난 고개가 ‘살해재’라고 한다. 도로를 만드느라 고개를 V자 협곡으로 만든 바로 그 고개를 말하는 것이다.
궁촌으로 넘어오기 전에 사진작가가 잠시 차를 멈추고 사진을 찍었던 바로 그 고개를 향해 우리는 다시 차를 몰았다. 고개 위에 차를 세우고 바라보니 살해재를 넘어오는 차들이 속도를 늦춘 채 힘겨운 운행을 하고 있다. 옛날 조선왕조를 연 태조 이성계의 명에 의하여 이 고개에서 공양왕 일가가 살해당하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너무 많이 변해 있었다. 당시는 오솔길이었을 것이며, 산이 험하여 거의 아무도 다니지 않던 고개였을 것이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aromabooks.com%2Fimage%2Fno05%2FS3500046.jpg) 공양왕 일가가 죽임을 당한 살해재. 지금은 새로운 아스팔트 도로가 생겼다.
나는 당시 살해당한 공양왕 일가의 시신을 궁촌 사람들이 몰래 옮겨다 마을 뒷산에 장사지내는 장면을 상상 속에서 떠올리며 고개를 뒤로 하고 다시 차에 올랐다.
여기서 부기할 것은 공양왕릉은 경기도 고양시 원당에도 있다는 것이다. 문화재 당국은 <<세종실록>>에 나오는 “안성군 청룡에 봉양했던 공양왕의 초상을 고양군의 무덤 곁에 있는 암자로 옮기라고 명령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하여 원당에 있는 ‘고릉’을 공양왕릉으로 공식 인정하고 있다. 공양왕은 태종 16년에 다시 왕으로 복위되었는데, 이때 궁촌 뒷산에 묻혀 있던 시신을 원당으로 옮겨 고릉을 조성한 것인지, 아니면 살해 당시 증거로 삼기 위해 목을 잘라서 상부에 보인 뒤 원당에 묻고 몸은 궁촌 뒷산에 묻히게 된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공양왕 고려 제29대 충목왕 원년(1345)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요(瑤)다. 위화도 회군으로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 일파에 의해 우왕과 창왕이 폐위되고 나서, 그는 불혹을 넘긴 45세의 나이에 제34대 왕으로 추대되었다. 어려서부터 성질이 유순하고 결단성이 없었다고 하며, 재위기간 2년 8개월 동안 꼭두각시 노릇을 하다가 이성계에게 왕위를 물려줌으로써 고려 마지막 왕이 된 비운의 인물이다.
*여행안내 경부나 중부를 이용하여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강릉까지 가서 동해안 국도를 따라 계속 달리면 삼척이 나온다. 삼척에서 공양왕릉이 있는 궁촌까지는 약 17킬로미터. 새로 단장한 도로를 따라 고개(살해재)를 넘으면 왼쪽에 조그만 바닷가 마을(궁촌)이 보인다. 삼척 정라진항에는 미수 허목이 삼척 부사로 왔을 때 세웠다는 ‘척주동해비’가 있으며, 또 삼척 시내의 오십천 절벽 위에 서 있는 ‘죽서루’가 아름답다. 삼척에서 도계 쪽으로 가다보면 ‘천은사’가 들어가는 길이 나오고, 도계 쪽으로 계속 더 가면 ‘환선굴’이 있다. 삼척에서 하룻밤 자고 나서 일출을 보고 싶으면, 아침 일찍 추암해수욕장으로 가보는 것이 좋다. 촛대바위를 배경으로 한 일출 장면이 장관이다. 등산을 하려면 무릉계곡의 경치가 빼어나고, 좀 긴 코스를 택하려면 두타산 등정을 해보는 것도 좋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aromabooks.com%2Fimage%2Fno05%2FS3500052.jpg) 미수 허목이 삼척 부사로 왔다가 해일을 막기 위해 세웠다는 '척주동해비'로, 원래 두 개를 만들었는데 먼저 세운 것은 허목 다음으로 온 정치적으로 반대파인 부사가 비석을 없애버렸다고 한다. 그러자 다시 해일이 일어 마을이 큰 손실을 보게 되자 전에 허목이 만들어둔 다른 비석을 찾아내어 다시 세우자 그 다음부터 해일이 마을을 덥치는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았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aromabooks.com%2Fimage%2Fno05%2FS3500076.jpg) 삼척시내에 있는 죽서루. 관동팔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아름다운 누각이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aromabooks.com%2Fimage%2Fno05%2FS3500121.jpg) 삼척에서 가까운 추암해수욕장에서 바라본 동해 일출이 장관이다. 이곳의 촛대바위는 절경으로 꼽힌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aromabooks.com%2Fimage%2Fno05%2FS3500125.jpg) 삼척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알려진 '환선굴' 입구. 양쪽 산을 사이에 두고 저 뒤에 보이는 바위들이 범상치 않다. 그 바위 언저리에 선녀가 환생했다는 '환선굴'이 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aromabooks.com%2Fimage%2Fno05%2FS3500128.jpg) 환선굴 속의 종유석. 자연이 만든 뛰어난 예술품이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aromabooks.com%2Fimage%2Fno05%2FS3500153.jpg) 늦가을로 접어든 산색이 겹겹으로 층을 이루며 아름다운 정취를 자아낸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aromabooks.com%2Fimage%2Fno05%2FS3500162.jpg) 삼척의 등산로로 유명한 무릉계곡의 병풍바위. 특히 이 계곡은 암반 위로 흐르는 물길이 아름답다. 그야말로 무릉도원을 연상케 하는 풀경들이 등산로 좌우로 계속 이어진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aromabooks.com%2Fimage%2Fno05%2FS3500169.jpg) 무릉계곡의 절경으로 손꼽히는 용추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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