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분 | 부야 | 접수번호 | 성 명(주소) | 제 목 |
대 상 | 시 | 92 | 박윤근 - 전북 익산시 부송동 | 「안녕, 피쉬맨」외 4편 |
우수상 | 시 | 43 | 김유섭 - 경남 진주시 서장대로 | 「너에게 나라는 질량」외 4편 |
시 | 151 | 김도형 - 노원구 공릉로 | 「입술」외 4편 | |
수필 | 15 | 김응숙 - 경남 양산시 소주동 | 「백열전구」외 1편 | |
수필 | 19 | 박경대 - 대구시 남구 대명6동 | 「까치밥」외 1편 |
< 심사위원 프로필 >
시부문
손택수(孫宅洙)시인
1970년 전남 담양출생, 부산대학교 대학원 현대시 석사.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98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동시 당선.
저서, 시집-『호랑이 발자국』(창비), 『목련전차』(창비), 『나무의 수사학』(실천문학사) 산문집 『바다를 품은 책 자산어보』와 『교실 밖으로 걸어나온 시』(실천문학사), 시해설집 『선천성 그리움』등. 수상- 제22회 신동엽창작상, 2008 오늘의 젊은예술가상(문학부문), 제 5회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제 3회 임화문학예술상 등. 현재- 중앙대, 한남대 등에서 현대시와 아동문학 강의, 실천문학사 주간을 거쳐 대표이사.
정끝별 (鄭끝별)시인
1964년 나주출생,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국문학박사
1988년 『문학사상』시 당선 1994년 『동아일보』신춘문예 평론 당선
저서- 시집 『자작나무 내 인생』, 『흰 책』, 『삼천갑자 복사빛』, 『와락』 등, 그 외 평론집 시론집이 여러 권 있음. 수상- 2008년 제23회 소월시문학상, 2004 만해사상실천선양회 유심작품상. 현재 명지대학교 국어국문과 교수
최성각소설가
1955년 강릉출생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 및 동 예술대학원 졸업.
1976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198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당선으로 등단. 저서, 소설집- 『잠자는 불』, 『택시 드라이버』, 『부용산』, 『사막의 우물 파는 인부』 등, 생태소설집-『거위, 맞다와 무답이』, 『쫓기는 새』 등. 또한 에세이- 『달려라 냇물아』, 『날아라 새들아』 등, 생테서평집- 『나는 오늘도 책을 읽었다』도 있음.
중앙대 명지대 강사, 건양대 겸임교수를 역임, 수상- 제2회 가천환경문학상, 제30회 요산문학상. 현재 풀꽃평화연구소 소장.
이순원소설가
1958년 강릉출생 1985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소> 당선. 1988년 문학사상 신인상 수상,
저서, 창작집- 『그 여름의 꽃게』, 『얼굴』, 『말을 찾아서』 『그가 걸음을 멈추었을 때』 『첫눈』 등, 장편소설-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 『수색 그 물빛무늬』, 『아들과 함께 걷는 길』 『19세』『나무』- 1996년 제27회 동인문학상, 1997년 제42회 현대문학상, 2000년 제1회 이효석문학상, 2000년 제 7회 한무숙문학상, 2006년 제1회 허균문학작가상, 2006년 제2회 남촌문학상. 등이 있다.
시흥문학상 심사평 - 손택수(孫宅洙)시인 / 정끝별 (鄭끝별)시인 / 최성각소설가 / 이순원소설가
올해로 14회를 맞는 ‘시흥문학상’에는 총 시 부문에 210여 분의 작품 1520편과 수필 부문에 197분의 작품 475편이 응모되었다. 예심을 거쳐 올라온 본심 대상작들은 시 29분, 수필 29분의 작품이었다. 시의 경우 시적 발상, 호흡, 이미지 구사, 적절한 잠언, 그리고 시의 길이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의 작품을 보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비슷비슷했다. 낯익은 서정과 풍경과 구조에 기대고 있는 작품들이 많았고, 작품의 완성도의 측면에서는 딱히 흠 잡을 데는 없으나 작품의 열도(熱度) 혹은 에너지를 내뿜고 있는 작품은 드물었다. 수필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적절한 묘사와 인용, 그리고 회상과 현재적 성찰의 적절한 안배는 안전하되 새롭지는 않았다.
특히 이번 심사는 난항이었다. 시와 수필 모두, 대상으로 선정한 작품들을 선자 스스로가 번복해야 했다. 선정 작품들에 대한 표절 및 기발표 여부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시의 경우는 표절로 판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시적 소재, 시어 사용, 이미지 전개, 구조의 측면에서 기성 시인의 작품과 너무 흡사했다. 수필의 경우도 전형적인 당선용 기획 작품(!)이라는 혐의가 짙었다. 둘 다 자격 미달로 탈락시킬 수밖에 없었다. 부끄럽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했던 이 심사과정을 굳이 공개하는 것은, 글 쓰는 우리 모두에게 경종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우리가 왜 글을 쓰는지, 글을 쓴다는 게 우리 삶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그 초발심과 진정성을 다시 새겨봐야 할 것이다.
대상으로 시 부문의 ‘안녕, 피시맨’ 외 4편과 ‘입술’외 4편이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숙고 끝에 선자들은 ‘안녕, 피시맨’ 외 4편의 손을 들어주었다. 완성도보다는 열도(熱度)를, 안전보다는 가능성을, 감각보다는 사유를, 이미지의 조탁(彫琢)보다는 통찰의 음역을 더 높이 평가했던 까닭이다. 또 다른 시의 우수작으로 뽑힌 ‘너에게 나라는 질량’외 4편은 요즘 시 답지 않게 낮고 소박한 목소리를 가졌다. 그래서 언뜻 보면 지나치기 십상인 작품이다. 그러나 선자들은 그 겸손함과 진정성을 높게 평가했다. 나직한 목소리로 거느리고 있는 시의 깊이가 결코 녹록치만은 않다. 수상작의 시적 개성들이 각각 다르기에, 선정 순위와 무관하게 시를 감상하는 기쁨이 있을 것이다.
수필 우수작으로 뽑은 ‘백열전구’는 가난하던 시절 백열전구에 얽힌 추억과 함께 우리 주위에 따뜻한 것들이 자꾸만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그린 작품으로, 무엇보다 문장이 반듯하며 어떤 사물을 통해 지난 삶과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이 따뜻하다. 이제 정부시책에 의해 백열전구는 사라지더라도 이 세상의 다른 따뜻한 부화기에서 따뜻한 불빛이 쏟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대로 느껴진다. 또 다른 우수작으로 뽑은 ‘까치밥’은 감나무에 매달려 있는 홍시 이야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자판기에서 자신의 커피만 뽑는 것이 아니라 혹 동전이 없을지도 모를 다음 사람을 위해, 자기 주머니의 잔돈을 전부 자판기에 넣어두고 가는 할머니를 통해 사랑나눔 실천으로서의 까치밥 이야기를 한다. 두 작품 다 따뜻함과 건강함이 수필문학의 향기와 함께 느껴진다.
대상
시 부문
안녕, 피쉬맨/ 박윤근
이 도심 주위로는 굵직한 어군이 형성돼 있다
수심의 저점을 읽은 누리꾼
솟아오르는 작은 고기, 민감한 입질도 놓치지 않는다
파도의 중간쯤에 구겨 앉은 남자 주위로
빠른 어족의 등락으로 물결이 친다
사내의 손이 마우스에 푸른 등을 켠 채
해저의 기억 안팎을 오가며 포인트를 찾지만
몇 시간 째 미끼만 갈아 끼우고 있다
밀물과 함께 고기 떼가 몰려든 온 객장은
상한가를 치고 빠져나갔지만
객장의 전광판에는 잡히지 않는다
불안해지는 일기예보 속
장세의 흐름이 하락 쪽으로 기울자
저울 위 생선처럼 저 남자
비릿한 땀 냄새를 풍기며 기우뚱거린다
팽팽하던 낚싯줄이 수면 아래로 풀려간다
증시 막장, 깜박이던 전광판 불빛도 꺼지자
어둠이 남자의 의자에 해초처럼 감긴다
저 깊은 바닷속으로 끌려가고 있다
오랜 시간 아가리를 벌리고 있던 통발 하나
파닥이는 고기 한 마리 입에 문다
이곳에서는 철 지난 바다의 풍경을 묻지 않듯
도시에서 떨어져 나간 버그*처럼
사라진 남자의 행방에 대해 아무도 묻지 않는다
*버그: 시스템 오동작의 원인이 되는 프로그램의 잘못.
시 부문 우수
너에게 나라는 질량/김유섭
너를 만날 때마다
무게의 눈금이 보고 싶지만
바람에 날리는 옷자락을 따라 사라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단다
이곳이 아름다운 별이라 하더라도
확신 없이 떠돌아야 하는 궤도
함께 웃고 떠들고 집으로 돌아와 백지처럼 증발해버린
너를 마주하게 되는 날들이 눈부셔
나는 자꾸만 허공 쪽으로 고개를 꺾고
허리마저 비트는 버릇이 생겼단다
가슴을 열어 펼쳐 보이는 그 짓
한 줌 부스러기 같아서
다가가 덥석 껴안았던 그 어색한 눈빛
나는 형틀에 묶인 얼굴로
내동댕이쳐져서 흘러 다닌단다
얼마나 자주 낯선 질량 속으로
나를 던져 넣어야 했던지
한 치 오차도 없는 저울의 계산법으로
너는 휘파람 불며
이 광활한 세계를 잘도 오가는구나
시부문 우수
입술/김도형
우리가 떨어져 있는 순간
이 계절이 지나가면 나만의 種을 가질 수 있을까
예기치 못한 표정은 머리카락처럼 자라나지
우리는 결국 누군가의 모방일 뿐
서로 붙어있을 때 침묵을 배워
지평선과 수평선이 키스할 때
구름은 자꾸 노을을 밀어내지
밤이 노을의 등에 실려 찾아오면
우리는 또 다른 기원이 될 수 있을 거야
마침내 다르다는 것을 알아버린 순간
완전한 種이 될 수 있겠지
이곳의 반대극점에선 바람의 껍질도
조금씩 떨어지고 있어
바람도 새로운 種이 되려는 중인 걸까
아직 다가오지 않은 계절을 생각하며
우리는 함께 새로워지기 위해
서로 메마르기만을 기다리지
바람은 노을이 사라지는 곳에서
달빛과 짧은 입맞춤을 하고 있어
우리가 완전하게 합쳐질 때야 비로소,
하나의 種이 될 수 있을 거야
언제나 같은 모습의 누드가 선명해지고
수필부문 우수
백열전구 /김응숙
조심조심 책상 맨 아래 서랍을 열자 노란 불빛이 새어 나온다. 동시에 냉랭한 사무실의 공기를 밀어내는 따스한 기운이 느껴진다. 인큐베이터처럼 환하고 따뜻한 서랍 속에는 탁구공보다도 작은 오골계 알들이 한가득 들어 있다. 서랍 위에 달려 있는 백열전구는 어미닭인양 끊임없이 알들을 향해 밝고 따스한 기운을 내뿜고 있다. 이미 부화하기 시작한 알들의 내막에 생긴 실핏줄들이 환한 불빛에 힘줄처럼 도드라져 보인다. 그리고 서랍 깊숙이 갓 깨어난 병아리 한 마리가 체액에 털이 흠뻑 젖은 체 삐약삐약 힘차게 울어댄다.
지난겨울 친구가 책상 서랍을 이용해 병아리를 부화시키겠다는 계획을 이야기 했을 때 나는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간혹 화면이나 사진을 통해서 어미닭이 알을 품고 있는 장면을 보기는 했지만 인공 부화기에 대한 지식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책상 서랍에서 병아리를 부화시키겠다니. 하지만 그 착상의 기발함에는 절로 탄성이 나왔다. 친구는 병아리 부화에 관한 온갖 정보를 수집해 서랍 부화기를 완성했다. 열을 감지하는 온도계와 그에 따라 작동하는 타이머, 알을 굴려 주는 장치 등이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부화기의 중요한 장치는 백열 전구였다.
백열전구는 이름 그대로 열을 내는 전구이다. 텅스텐으로 된 필라멘트에 전기가 흐르면 온도복사에 의해 대부분의 에너지는 열로 바뀌고, 단지 5% 남짓만이 빛을 낸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열로 인해 불빛이 노르스름해 지는 것이란다. 다시 말하자면 백열전구의 빛은 밝기 뿐 만이 아니라 따뜻함을 품은 빛인 것이다. 어미닭이 제 품의 따뜻함으로 잠든 알을 깨웠듯이 백열전구의 따뜻한 빛이 생명을 잉태시키는 것이리라.
서랍에서 나오는 따뜻하고 노란 백열전구의 빛이 문득 나를 사십여 년 전으로 데리고 간다. 나지막한 슬레이트 지붕 아래로 손바닥만 한 크기의 작은 들창이 하나 있었다. 포장이 되지 않은 흙길에 면해 있어서 창에는 항상 먼지가 뽀얗게 앉아있었다. 그 창은 밖을 내다보기에는 흐리기도 하거니와 너무 작았다. 게다가 들창이라 바람이 불면 받혀놓은 작대기가 굴러 떨어지면서 저절로 닫히곤 했다. 한 낮에도 반쯤 감긴 졸린 눈으로 희뿌연 잔광만을 여과하던 창이 그 존재의 이유를 밝히는 것은 밤이 되어서였다. 그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문패도 없는 길가 단칸방을 집으로 인식하게 해주는 유일한 표식이었다.
당시 나는 야간 중학교 학생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나면 밤 열시가 가까워져 마지막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고 줄달음치기도 일쑤였다. 그 시절 부산의 변두리 지역이었으니 가로등이 없는 것은 당연했다. 버스에서 내려 그나마 알록달록한 불빛이 내비치는 시장거리를 벗어나면 달빛만이 발 앞을 비추어주었다. 시장 뒤편 주택가를 거쳐 보리밭을 지나고, 언덕으로 난 흙길 신작로를 한참이나 올라가야 슬레이트 지붕들이 이마를 맞대고 있는 동네가 보였다. 그 중 불 켜진 들창이 보이는 맨 앞집이 우리 집이었다.
그 불빛은 언덕을 반쯤 올라갔을 때부터 별빛처럼 보이다가 언덕 위에 올라서고 나면 방금 뜬 달처럼 나지막하게 걸려 있었다. 노르스름하고 따뜻한 불빛이었다. 그제야 괜히 총총거리던 걸음이 느긋해지고 어둠에 눌려있던 가슴도 펴지곤 했다.
하루 벌어 하루를 먹고 사는 사람들이 모여 살던 가난한 동네였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밤이 되면 전기세 한 푼이 아까워 책을 읽는 자식의 머리 위 전등도 꺼버렸다. 어둠보다 더 어둡게 가라앉은 동네에서 오직 우리 집 들창만이 마치 등대처럼 노란 빛을 내뿜고 있었다. 어두운 밤길을 더듬으며 돌아올 딸을 위해 어머니는 온 식구가 잠든 뒤에도 전등을 끄지 않으셨던 것이다. 월말마다 집주인으로부터 억울한 전기세 풀이를 당할 것을 뻔히 알고 계시면서도 말이다.
조심조심 문을 열고 들어서면 얼굴에 침과 콧물이 얼룩덜룩 묻은 동생들이 머리를 맞대고 깊은 꿈나라에 들어 있었다. 하루치의 양식과 맞바꾼 노동으로 피곤하신 아버지와 어머니도 가늘게 코를 골며 잠들어 계셨다. 식구들은 따뜻하고 노란 백열전구 불빛 아래서 마치 한 둥지의 새들처럼 그렇게 몸을 부대끼며 곤히 잠들어 있었다.
얼마 전 신문에서 백열전구의 생산과 사용이 금지된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형광등이나 LED등처럼 밝고 효율이 높은 등을 사용해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한 정부시책인가 보았다. 수긍은 가지만 왠지 마음이 쓸쓸해진다.
주위에서 따뜻한 것들이 자꾸만 사라져가는 것 같다. 털신, 벙어리장갑, 군고구마, 삶은 계란, 난로, 그 위의 도시락, 아궁이, 따뜻한 음색의 LP판, 그리고 백열전구까지. 무엇이든 가까이 두면 닮기 마련이다. 예전 그 어렵고 궁핍했던 시절에도 이런 것들이 곁에 있어서 따뜻한 가슴을 잃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울어대던 병아리는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연습을 하고 있다. 그사이 알 하나에 가는 금이 그어진다. 병아리들의 부화가 계속되고 있다.
어쩌면 백열전구의 따뜻한 불빛이 노랗게 새어나오던 들창이 있는, 그 아래 서로서로 머리를 맞대고 곤한 잠을 자던 작은 단칸방이 나와 동생들의 부화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백열전구의 따뜻한 불빛 아래서 저녁밥을 먹고 책을 읽으면서 세상에 나갈 꿈을 꾸었었다. 그 불빛 아래에서 머리를 굴리고 머리가 커지면서 나는 부화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비록 백열전구는 사라지더라도 세상의 또 다른 많은 부화기들의 등에서 언제나 따뜻한 불빛이 쏟아지기를 바래본다.
수필부문 우수
까치밥 /박경대
자판기에는 잔돈 몇 개가 들어있었다. 지루하던 수업이 끝나자 따뜻한 커피 생각이 간절하여 동전을 찾던 중이었다. 잔액이 남아 있다는 표시를 보자 웬 횡재인가 싶어 기분이 좋아졌다. 버튼을 누르는데 슬며시 웃음이 났다. 얼마 전에도 돈이 남아있어 한 잔 먹었던 기억 때문이다.
한 달에 두 번 교리를 공부하는 불교모임에 연세가 높은 어르신이 많이 계신다. 아마 어느 분이 커피를 마시고 거스름돈은 깜빡 잊어버리신 것 같았다. 한 잔에 백 원밖에 하지 않지만 어쨌든 공짜 커피여서인지 맛이 더 좋은 것 같았다. 잔돈은 나처럼 운 좋은 누군가가 뽑아 먹으라고 까치밥처럼 남겨두고 왔다.
며칠 전, 교외로 생수를 받으려갔다가 빨갛게 물들어가는 감나무를 보았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달려있는 감을 보자 문득 가까이에 있는 시골집이 생각났다. 차로 불과 십 여분 걸리는 가까운 곳이기에 생수 통을 채우고 들러 보았다.
스산한 가을 햇볕 때문인지 집은 더욱 쓸쓸하게 보였다. 외로워 보이는 집은 나를 본 척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근처를 지나는 일이 있어야 휑하니 둘러보고 가는 주인이 섭섭했으리라. 애정을 가지고 돌봐주지 않기에 항상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러나 감이 익을 무렵이면 한 번쯤은 꼭 들린다.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홍시를 몇 년 전 우연히 따먹어 본 뒤론 달콤하고 쫀득한 맛에 푹 빠지고 말았다. 예전에 어르신들이 홍시를 좋아하시기에 연세가 들면 그런가보다 했었는데 이제 나도 중년이 된 모양이다. 그렇다고 감 농사에 힘을 쓰는 것은 아니다. 거실의 화초에도 물 한 번 주지 않는 성격이라 나무를 돌본다는 것은 아예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저 가을에 감이 익으면 몇 상자 따먹는 것이 고작이었다.
감나무는 일 년에 네 번 정도 농약을 쳐준다고 한다. 그러나 장비도 없거니와 일부러 시간을 내기가 어려워 시골집을 장만한 이후 10여 년 동안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그러니 절반가량은 검은 점이 생기는 병으로 썩어 버리지만 먹을 만큼은 충분하여 병충해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평상에 앉아 올려다보니 가지마다 빨간 감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그것들은 잠시나마 허전했던 가슴을 꽉 채워주는 듯했다. 언제 또 오겠나 하는 생각에 감을 따기 시작했다. 두어 시간을 따고 보니 큰 물통에 가득하였다. 괜찮은 것을 골라보니 세 접 가량 되었다. 이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 높이 달려있는 나머지는 까치밥으로 남겨두었다.
다음날, 가족이 먹을 것은 떼어놓고 나머지는 다섯 개의 작은 상자에 담았다. 주위 분들에게 맛이나 보라고 보낼 참이었다. 옆에 있던 아내가 작년의 홍시가 아직 많이 남았으니 반 정도는 더 나눠주자고 하였다. 내가 보기에도 많은 것 같았으나 힘들여 딴 것이 아까워 그냥 나의 생각대로 나누어 주고 말았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시큼한 냄새가 나기에 어디에서 이런 냄새가 나는가하고 코를 킁킁대며 찾아보니 골방의 붙박이장에서 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뭔가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문을 열어보니 냄새는 감 상자에서 나고 있었다. 삭히는 약을 넣고 봉하여 두었는데, 꺼내어야 할 날짜가 지나있었다. 그러나 날짜가 지났다고 섞는 냄새가 날리는 없었다.
불안한 심정을 억누르며 상자를 열어보니 절반 가까이 썩어가고 있었다. 놀라서 살펴보던 중 검은 점이 있는 감을 버리지 못하고 몇 개 넣었던 기억이 났다. 그 서너 개의 감이 삼사십 개를 상하게 만든 것이었다.
썩은 감은 정원 구석에 파묻었다. 검은 점이 있는 것은 아깝더라도 넣지 말고 성한 감도 이웃에게 더 나누어 주자는 아내의 말이 감을 묻고 있던 내내 귓가에 맴돌았다.
엊저녁, 교리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갈려던 참이었다. 신발을 찾으면서 보니 할머니 한 분이 자판기에 여러 개의 동전을 넣고 계셨다. 커피를 드시려나보다 하는 순간 할머니는 그냥 나가셨다. 현관에서 살펴봐도 할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마침 관리실 근무자가 들어왔다. 관리인에게 방금 나가신 할머니가 돈을 넣고는 깜박하고 가셨다는 말을 해주었다. 다급하게 말하는 나를 보며 그는 빙긋이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그 할머니는 수업을 마치고 돌아가실 때 항상 주머니의 잔돈을 몽땅 자판기에 넣어놓고 갑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큰 망치로 한방 맞은 듯 머릿속이 ‘쿵’ 하고 울려왔다. 공양과 보시에 관한 불법교리를 수업시간마다 듣고 있지만 실천 하지 않는 나와 달리 할머니는 뭇사람을 위한 사랑 나눔을 실천하고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누가 깜빡하고 잔돈을 두고 갔다며 웃으며 커피를 뽑아먹었던 나 자신을 생각해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무에 남겨두는 과일을 까치밥이라고 한다. 배고픈 까치나 날짐승들이 먹으라는 것이다. 먹을 게 궁하던 옛날에도 까치밥을 남겨두는 선인의 심중에는 욕심을 줄여 세상의 모든 생명들과 사랑을 나누라는 뜻이 담겨져 있으리라.
얼마 전, 책에서 본 교리가 생각났다. ‘바람이 없는 보시, 남을 위하여 개천에 다리를 놓는 공덕, 목마른 사람을 위하여 샘을 파는 공덕 등 덕 쌓는 일은 셀 수 없이 많다.’고 적혀있었다. 그리고 내 마음의 파동이 느껴졌다.
‘그래, 그 많은 복 짓는 일 중에 커피공양 또한 없겠는가.’
무겁게 느껴지던 호주머니속의 동전들을 모두 털어 자판기에 넣고 돌아서자 집을 향한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