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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리젠더(Charles LeGendre) 장군
프랑스 태생의 미국 군인. 일본 제국의 외교 고문이 되어 일본의 대만 병합을 도와 일본 훈장까지 받았으나 대한제국 외교 고문으로 온 후로는 180도 달라져 대한제국을 돕다가 1899년 서울에서 사망했다. 이선득이라는 한국식 이름이 있다.
[샤를 기욤 조제프 에밀 르 장드르(프랑스어: Charles Guillaum Joseph Émile Le Gendre, 영어: Charles William Le Gendre, 1830년 8월 26일 ~ 1899년 9월 1일)는 미국의 군인이자, 외교관으로, 프랑스의 파리에서 태어나 미국에 귀화하였다. 1872년부터 1875년까지 일본의 외교 고문으로 있던 중 1890년에 조선 공사였던 김가진의 도움으로 조선에 와서 내무 협판이 되었다. 그는 일본을 배척할 것을 주장하여 조선의 국가 정책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한국에서는 이선득(李善得)이라는 이름을 썼다.]
찰스 리젠더(Charles LeGendre) 장군 - 양화진에 묻힌 미국 장군
찰스 리젠더(Charles LeGendre) 장군은 동 아시아 대격변의 한복판에서 파란만장하게 살다 한국 땅에 묻힌 미국의 외교관이었다.
프랑스에서 태어난 그는 본명이 샤를 기욤 조제프 에밀 르 장드르(Charles Guillaume Joseph Emile Le Gendre)이며, 아시아에서는 리산더(李仙得, 李善得, 또는 李讓禮)라는 중국식 이름도 사용하였다.
리젠더는 미국의 남북 전쟁 참전 용사로 중국 주재 영사(1866 - 1872)를 거쳐 일본 정부의 외교 고문(1872 – 1875)과 한국 정부의 내부협판(내무차관) 겸 황제 고문(1890 – 1899)을 지냈다.
초기 인생
리젠더는 프랑스 리용 서남부의 작은 도시 울랭에서 1830년 8월 26일 유명한 화가, 조각가이며 미술학교(Ecole de Beaux-Arts) 교수인 장-프랑수아 르 장드르(1796 - 1851)와 아리시 와블(1799 - 1878)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나 당시 전형적인 명문가의 자녀들처럼 고전 교육을 받았다.
리젠더는 랭스의 왕립 대학에서 군사 교육을 받다가, 최종적으로는 파리 대학을 졸업했다.
우수한 학생이었던 그는 재학 시절에 지질학에 강렬한 흥미를 가졌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저술한 '타이완 기행'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생애에서 여러번 이 지식을 이용하여 광산 채굴을 하거나, 개발 관련 사업의 가능성을 탐색하였다.
24살이던 1854년에 뉴욕의 저명한 변호사이자 외교관인 윌리엄 뮬록(William Mulock)의 딸인 클라라 빅토리아 (Clara Victoria , 17살)와 브뤼셀에서 결혼했다. 리젠더는 결혼 직후 미국으로 옮겨가 미국 시민이 되었다. 1856년 2월 그들의 외아들 윌리엄 찰스(William Charles)가 뉴 저지주 뉴아크(Newark)에서 태어났다.
남북 전쟁 시절
1861년 미국에서 남북 전쟁이 벌어지자, 변호사로 활동하던 리젠더는 제51 지원 보병 연대에서 병사 모집을 담당하다가 1861년 10월 29일 소령으로 임관하였다. 그후 노스 캐롤라이나 전투에 참가하였고, 1862년 로아노크 섬 싸움에도 참가하였다. 그는 168 센티미터의 단신이었으나 용맹한 군인이었다. 1862년 3월 14일 뉴 번 싸움에서 중상을 입었다.
부상에도 불구하고, 리젠더는 군을 떠나지 않았고, 같은 해 9월 20일에는 중령으로 진급하였다. 1863년에는 제9 군단에 배치되어 많은 전투에 참가하였다. 1863년 3월 14일 대령으로 진급하며 제51 연대장이 되었다.
버지니아 황야 싸움에서는 율리시스 그랜트(Ulysses Grant) 장군 휘하에 있다가, 1864년 5월 6일 리젠더는 다시 중상을 입었다. 이번에는 얼굴에 총알이 관통하여 왼쪽 눈과 코의 일부를 잃었다. 아나폴리스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그 동안에도 남군 최후의 도시 공격을 막기 위한 준비를 도왔다. 그후 뉴욕으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제9 군단의 병사 모집을 도왔다.
1864년 10월 4일에 명예 제대 하였으며, 1865년 3월 13일 준장으로 명예 진급 하였다.
타이완에 대한 미국의 영토 야욕
영국은 아편 전쟁이 한창이던 1841년 9월 초 함대를 보내 타이완 북부의 지롱(基隆)과 서해안 중부의 우치(梧棲)를 점령하려다 모두 실패하였다. 이것이 제국주의 강국의 타이완에 대한 최초의 침략 행위였다.
두 차례에 걸친 아편 전쟁(1차 1839 - 1842, 2차 1856 - 1860)에서 영국에 크게 패배한 중국은 많은이권을 넘겨 주게 되었다. 난징(南京) 조약(1842)으로 상하이, 닝포, 푸저우, 샤먼, 광저우의 5개 항구를 조약항(treaty port)으로 개방한 것이 그 출발이다. 조약항이란 유럽의 강국들이 중국을 비롯하여 일본, 타이완, 한국 등 아시아 나라들에게 불평등한 조약을 강요하여 외국 무역에 개방하도록 한 항구 도시를 일컫는다.
중국은 1844년에 미국과 왕샤(望厦) 조약, 프랑스와 황푸(黃埔) 조약을 영국과 같은 조건으로 맺었다. 이후 중국은 줄줄이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으로 조약항의 증가되어 1943년 폐지될 때까지 백년 동안 80개가 넘는 조약항이 생겨났다.
왕샤 조약은 마카오 북부의 왕샤에 있는 푸지 선원(普濟 禪院)의 관음당(觀音堂)에서 1844년 7월 3일 초대 주중 미국 공사 케일레브 쿠싱(Caleb Cushing)과 청나라 량광(兩廣) 총독 아이신교로 키옝(愛新覺羅 耆英, 한어음 아이신쥐에루오 치잉)이 조인하고 이어서 미국 의회의 통과와 대통령 존 타일러(John Tyler, 10대)의 비준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정식 명칭은 '아메리카 연방과 중화 제국 사이의 평화, 우호, 무역 조약'이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치외법권(미국인에 대한 영사 재판권)
2. 조약항에서의 무역에 고정 관세
3. 조약항에서의 토지 매입, 교회-병원 건축의 권리
4. 중국어 학습의 권리(외국인에 대한 중국어 학습 금지 법의 폐지)
5. 미국의 최혜국 대우
6. 12년 뒤에 조약을 개정할 권리
한마디로 말하면 조약항은 중국 땅이로되 중국의 주권이 거의 배제되는 식민지나 다름없는 곳이다. 조약의 공식 이름과는 거꾸로 내용이 엄청나게 침략적이고, 적대적이고, 편파적인 국가 폭력이었다.
1854년 7월 미국의 페리 함대가 일본에서 화친 조약을 맺은 뒤 지롱에 10일 정도 머물면서 실종된 수병을 수색하고 지롱 근교의 탄광을 조사하였다. 매슈 페리(Matthew Perry) 준장은 귀국하여, 타이완이 미국이 동 아시아 중계 무역의 거점으로 삼기에 적당하여, 마치 플로리다 반도와 유카탄 반도에 둘러싸인 멕시코 만을 통제하는 쿠바와 같은 존재라고 보고하고 점령할 것을 주장하였다. 타이완 점령의 주장은 실현되지 않았으나, 페리의 보고는 유럽 강국들의 주목을 끌어 타이완에 대한 관심을 단숨에 높여놓았다.
1857년 4월 중국 주재 미국 공사 피터 파커(Peter Parker, 1855 - 1857)는, 1000만 달러에 타이완을 매수하자는 미국인 상인 기드온 나이(Gideon Nye)의 제안을 받아들여, 정부에 여러 차례 강력히 타이완 획득을 촉구하였다. 파커는 1857년 4월 2일 마카오에서 영국의 홍콩 총독 겸 중국 주재 공사 존 바우링(John Bowring), 프랑스 공사 알퐁스 드 부르불롱(Alphonse de Bourboulon)과 모임을 갖고, 미국은 타이완을, 영국은 저장(浙江) 앞바다의 저우산(舟山) 군도를, 프랑스는 한국을 점령할 것을 제안하였다. 파커는 미국이 행동하기에 앞서 영국이 타이완을 차지하게 될 것을 걱정하였다. 그러나 영국이 거부하였다.
이때 신임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1857 - 1861, 15대)은 남북 사이의 심각한 분열을 맞은 가운데 파커 대신 온건한 윌리엄 리드(William Reed) 펜실베이니아 대학 역사학 교수를 공사로 임명하였다. 1857년 가을 미국 정부는 아시아에 미국의 보호령을 두자는 모든 모의를 금지하였다.
1858년 6월 제2차 아편 전쟁 중에 톈진(天津) 조약이 맺어지며 아편 수입이 공인되고, 청 정부는 타이완의 지롱, 탄수이(淡水), 안핑(安平), 다거우(打狗, 나중의 가오숑 高雄)를 잇따라 개방하였다.
남북 전쟁(1861 - 1865)의 발발로 미국의 동 아시아 개입은 잠시 주춤하게 되었으나, 미국 선박들은 그 동안에도 끊임 없이 상업 활동을 위하여 타이완에 왔다. 1861년 말 미국 선박 이스캔데리아는 가오숑에서 쌀을 싣고 샤먼으로 돌아가다가 타이완푸(臺灣府, 현재의 타이난 臺南) 북쪽에서 좌초하였다. 선장 프랭크 루더스(Frank Ruders)는 현지 관원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18000 달러 어치 화물은 현지인에게 모두 약탈 당하였다. 샤먼 주재 미국 부영사 하트 하이어트(Hart Hyatt)는 중국 정부에 배상을 요구하였지만 성과가 없었다.
1862년 말 미국 선박 러키 스타가 면화 80000 달러 어치를 싣고 상하이를 거쳐 홍콩으로 가던 중 강풍을 만나 탄수이 가까운 곳에 대피를 요청하였으나 화물을 약탈 당하고 선장 찰스 넬슨(Charles Nelson)과 아내, 그리고 선원들이 납치되어 1주일 동안 억류되었다. 결국 영국 부영사 조지 브론(George Braune)과 프랑스인 세관원 바롱 드 메리탕(Baron de Meritens)이 몸값을 치르고 그들을 구출하였다.
샤먼 주재 영사 시절
1866년 7월 13일 리젠더는 샤먼(厦門, 아모이) 주재 미국 영사에 임명되었다. 7월에 뉴욕을 떠나 리버풀을 거쳐, 유럽, 아시아 대륙을 여행하고 12월에 샤먼에 도착했다. 영사로서 리젠더는 5개의 조약항 곧 샤먼과 맞은편에 있는 타이완의 지롱, 탄수이, 타이난, 가오숑을 담당했다. 거기서 그는 중국 남부에 흔했던 노예 노동자(쿨리, 苦力)의 불법 거래를 막는 데에 힘을 쏟았다.
1867년 3월 12일 미국의 어선 로버 호가 타이완에서 조난하여 선원들이 타이완 원주민에게 살해되는 이른바 '로버 호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 공사 앤슨 벌링게임(Anson Burlingame, 1861 - 1867)은 리젠더를 파견하여 사건을 처리하게 하였다.
리젠더는 푸저우(福州)로 가서 푸지엔-저장 총독 우 탕(吳棠)을 만나 타이완의 현지 당국에게 문제 해결을 지시하도록 설득하였다. 총독은 스스로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으나, 리젠더가 타이완으로 가는 것을 허가하고 현지에서 협조하도록 소개장을 써 주었다.
1867년 4월 초 리젠더는 미국의 아시아 함대 사령관 헨리 벨(Henry Bell) 소장을 설득하여 미국 해군 전함 애슈엘럿 호가 타이완으로 가서 미국인 생존자를 수색하도록 하였다. 함대는 4월 18일 조난이 일어났던 타이완푸에 닿았다. 현지 청나라 관원들의 비협조 속에 애슈엘럿 호는 남쪽의 가오숑으로 항해하였다. 4월 24일 구조대가 현장에 도착하여 해안으로부터 밀림을 뚫고 조사를 한 결과 상륙 작전 능력과 보급품 지원 없이는 안전하게 상륙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함장 퍼비거(Ferbiger) 중령은 수색을 중단하고 그 날 샤먼으로 귀환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홍콩 주재 미국 영사 아이작 앨런(Isaac Allen)은 페리와 파커의 주장을 재점화하여, 타이완을 무력이나 매수로 영유할 것을 미국 정부에 제안하였다. 앨런은 미국이 동 아시아에 미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항구나 해군 기지가 없는데, 유럽 강국들은 모두 기지를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는 또 다른 강국들의 타이완에 대한 야망을 저지할 것을 촉구하였다.
벨 제독은 중국 당국의 성가신 허가 없이 자신의 결단으로 미국인 생존자들을 구출하기로 하였다. 1867년 6월 13일 그는 해병대 178명과 대포 5문을 비롯한 중무장으로 원주민 마을을 집중 공격하였으나 수색대가 원주민의 매복에 걸려 참패하였다. 이 일로 벨 제독은 퇴역을 강요 당하게 된다.
그러나 이 재앙은 리젠더 장군이 두각을 나타내는 계기가 된다. 그는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다시 타이완으로 가기로 하였다. 리젠더는 타이완 남부에 군대를 파견하도록 총독을 설득하여, 그와 함께 500 명의 청나라 군대가 1867년 7월 25일 타이완으로 원정갔다. 원정대는 또 원주민의 완강한 저항으로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리젠더는 직접 원정에 나서기로 하고 벨 제독에게 대포함을 요청했으나 거절 당했다. 그러자 개인 전투함 볼런티어 호를 빌렸다. 리젠더는 상부에는 관여하지 않는다고 보고하고서 9월 4일 타이완에 상륙하였다. 그는 원주민과 그 언어-풍습에 밝은 영국의 윌리엄 피커링(William Pickering)의 도움을 받으며, 타이완 총병 류 밍덩(劉明燈)과 함께 원정대를 지휘하여 타이완 남부의 거친 산악 지대를 뚫고 들어갔다. 그는 마침내 10월 10일 남부 원주민 18부족의 총두목 타우케톡(Tauketok)과 만나, 협박과 회유 끝에 조난한 미국-유럽인 선원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조약을 구두로 맺었다.
1869년 2월 28일 리젠더는 다시 타우케톡을 만나 담판하여 조약을 문서로 확인하였다. 이 조약은 미국 정부의 승인을 받아 정식으로 국제 조약이 되었다. 청 정부는 이를 부인하지 않았고, 두 해 전에 이미 많은 병력으로 미국인과 함께 원주민 토벌에 나선 적이 있으므로 스스로 원주민에 대한 관할을 부정한 꼴이 되었다.
리젠더는 이번 여행에서 북부의 탄수이를 출발하여 곧장 남하하여 타이완푸에 닿았다. 그리고는 타이완 서부의 지리, 지질, 식생, 언어, 풍습 등을 깊이 조사하였다.
그는 표준 한어뿐 아니라 푸지엔과 타이완의 민난어가 유창하고 원주민의 언어들도 이해하였다. 그는 전후로 최소한 8차례 타이완을 방문하여 조사한 결과물로 그림, 사진, 문자 자료를 풍부히 보유하여, 당시에 최고의 '타이완 원주민 지역 통'으로 알려져 있었다.
리젠더는 나중에 메이지 정부의 고문이 되면서 '타이완 기행'을 일본에서 완성하였다. 기행에는 170장의 사진, 일본인 화가 코바야시 에이타쿠(小林 永濯, 1843 - 1890)가 그린 많은 삽화, 자신이 작성한 지도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지도들이 1874년 일본의 타이완 침공 때 크게 도움이 되었다.
1871년 9월 6일 류큐(琉球)의 배가 타이완 해안에서 조난하여 로버 호와 마찬가지로 생존 선원들이 살해되어 66명 가운데 12명만 살아남았다.
1872년 2월 29일 리젠더는 이전에 맺은 조약을 류큐 선원에게도 적용하도록 하기 위해 타이완으로 갔으나, 임무를 이루지 못하였다. 그와 중국 주재 미국 공사 프레데릭 로우(Frederick Low, 1869 - 1873)가 의견이 대립되는 가운데 청 정부는 타이완에 해군 기지를 건설하는 것을 거절하였다.
일본 외교 고문 시절
1872년 11월 리젠더는 샤먼으로부터 미국으로 가는 도중에 일본에 들렀다. 일본 주재 미국 공사 찰스 딜롱(Charles DeLong, 1869 - 1873)이 외무경(외무대신) 소에지마 타네오미(副島 種臣)에게 그를 소개하였다. 소에지마는 곧바로 그의 가치를 알아보고 크게 기뻐하였다. 청나라와의 협상과 조난 선원의 살해를 트집 잡아 타이완을 침략하는 데 그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었다.
소에지마는 그에게 외교-군사 고문 자리를 제의하고, 장래의 타이완 총독 임명을 약속하였다. 리젠더는 1872년 12월 19일 샤먼 영사를 사임하면서 이 제의를 수락하였다.
청나라 실정을 잘 아는 리젠더는 청 정부의 관할권 불인정을 핑계로 타이완을 공격할 것을 제안하였다. '고문이 된 그는 파격적인 연봉 12000엔을 지급 받고, 타이완 파병 준비를 하였다.' (이토 키요시 伊藤 潔, '타이완' 臺灣)
딜롱은 1871년에 우호 조약을 체결한 중국과 일본이 동맹으로 발전하여 서양 열강에 대항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일본이 중국에 공세적인 태세를 취하도록 리젠더가 공작하기를 바랐던 것이다.(이때 미국이 그려 놓은 구도가 14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여 아시아 나라들은 서로 적대하면서, 아시아 문제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
1872년 12월 소에지마가 우호 조약에 서명하고 조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베이징을 방문하면서 리젠더도 수행하였다. 리젠더의 예상대로 청 정부가 배상 책임을 회피하여 교섭은 지지부진하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청 정부가 타이완 원주민에 대한 관할을 부정함으로써 직접 파병할 근거를 획득하였다.
리젠더는 1874년로 예정된 타이완 파병의 준비를 도왔다. 리젠더는 딜롱의 지원을 받아 개인 자격으로 이 원정에 참가할 예정이었다. 거기에 2명의 미국 군인을 고용하였다.
그러나 1873년 10월에 부임한 딜롱의 후임 공사 존 빙엄(John Bingham, 1873 - 1885)이 일본의 군사 문화에 비판적인 데다, 남북 전쟁에 같이 참가했던 리젠더의 제국주의적 야심을 견제하는 바람에 1874년 4월 19일 타이완 파병은 일단 연기되었다.
육군 중장 사이고 주도(西鄕 從道)가 지휘하는 3600명의 원정대는 1874년 5월 18일 나가사키를 출항하였다. 그후 리젠더는 타이완으로 가는 길에 중국에 도착했다가, 상하이 주재 미국 총영사 조지 수어드(George Seward, 1863 - 1876, 중국 주재 공사 1876 - 1880, 전 국무장관 윌리엄 수어드의 조카)에게 체포되었으나 워싱턴 국무부의 명령으로 석방되었다. 그는 원정에 참가하지 못하였다.
그는 1874년 타이완 파병을 준비하면서 이후 일본이 제국으로 나아가는 데 기본이 되는 방략을 아울러 건의하였다.
"북쪽은 사할린부터 남쪽은 타이완에 이르는 일련의 열도를 영유하여, 중국 대륙을 반달꼴로 포위하고, 나아가서 조선과 만주에 발판을 마련하지 않으면, 제국의 안전을 보장하고 동 아시아의 시국을 제어할 수 없다." (고토 신페이 정전 後藤新平正傳)
이는 일본 정부에 커다란 자극을 주어 타이완 영유의 야심을 구현하는 데 다대한 영향을 미쳤다. 나중에 일본의 대륙 정책은 거의 리젠더의 이 건의대로 이루어진 것이었다.(이토 키요시 伊藤 潔, '타이완' 臺灣)
타이완 정벌이 일본 뜻대로 이루어진 뒤, 리젠더는 1875년 일본 정부로부터 훈2등 욱일중광 훈장을 받았다. 이는 외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일이었다. 그 해 말에 고문을 사임하였다. 리젠더는 1890년까지 일본에 머무르며 외무경 오쿠마 시게노부(大隈 重信)의 개인 고문을 맡았다.
한국 정부 고문 시절
1890년 3월 리젠더는 일본을 떠나 한국으로 와서 황제의 고문이 되었다. 당시 정부는 각 부문에 고문을 초빙하여 그들의 지식과 경험을 활용하여 근대화와 대외 교섭을 처리하는 동시에, 그들의 모국을 우방으로 삼아 청나라와 일본을 견제하려 하였다.
리젠더와 묄렌도르프(Paul-Georg von Möllendorff 穆麟德), 데니(Owen Nickerson Denny 德尼), 브라운(John McLeavy Brown 柏卓安), 그레이트하우스(Clarence Ridgeby Greathouse 具禮, 양화진에 묻힘), 샌즈(William Franklin Sands 山島, 벤자민 프랭클린의 외손자) 등이 그러한 사람들이었다.
리젠더는 정부에 중앙집권제를 수립하여 예산-회계 제도 실시, 조세 제도 개혁, 노비제 폐지, 수출 상품 개발, 지폐 발행을 행할 것을 제안하는 등의 개혁을 주창하였다.
그는 또 개인적으로 많은 자본을 투자하여 각처에 광산 채굴권을 확보하고 다수의 공장 경영권을 장악하는 영악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또 고종의 밀명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외교 고문 시절의 인맥을 활용하여 김옥균, 박영효 등 일본 망명자들의 동태를 감시하고 일본 내부 사정을 관찰하기도 하였다.
리젠더 장군은 1899년 9월 1일 뇌출혈로 사망하였다. 그는 서울의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리젠더의 저술에는 '중국을 다루는 방법', '진보적인 일본' 등과 정보 보고서인 '타이완 기행' 등이 있다.
역사적 배경
미국은 1776년에 독립한 뒤 36년 만에 벌어진 미국-영국 전쟁(1812 - 1815)에서 이기고, 또 46년이 지나서 영국의 간섭으로 일어난 남북 전쟁(1861 - 1865)을 잘 마무리하였다.
아메리카는 드디어 유럽의 간섭을 뿌리치고 내부의 분열을 봉합하면서, 경제적으로도 급성장(연 100% 이상)하는 가운데, 실질적으로 대국으로 탄생하는 때였다.
또 1850년에 캘리포니아를 영유하여 태평양에 닿아 변경(미개척지)이 없어졌고, 황금 쇄도(Gold Rush, 1848 - 1855)가 끝나 침체에 빠진 캘리포니아 경제에 아시아 시장이 필요해졌다.
1867년에는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매입하면서 58킬로미터 폭의 베링해 건너 아시아가 미국에서 가장 가까운 대륙이 되었다. 태평양 국가가 된 미국은 바다 너머로 군사력을 투사하여 아시아에서 상업적 이익 추구에 나섰다.
러시아는 17세기 중반 흑룡강(黑龍江,아무르강)까지 진출한 이후 영토 확장을 거듭하여, 1860년에는 베이징 조약으로 연해주 일대를 청나라로부터 획득하였다. 그 해 블라디보스토크('동쪽 정복'의 뜻) 건설을 시작하였다.
1872년에는 아무르강의 니콜라예프스크에 있던 해군 기지를 이곳으로 옮겨 태평양 진출을 본격화하고 있었다.
청나라는 강옹건(康雍乾) 성세(1661 - 1799) 138년이 지나자 세계 최강의 제국에서 무력한 '잠 자는 사자'로 전락하였다. 그 무력함이 온 천하에 자드락난 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더러운' 아편 전쟁(1840 - 1842)이었다.
뒤이은 태평천국의 난(1850 - 1864)은 4000년 이어온 왕조 체제를 사실상 쓰러트린 마지막 일격이었다. '중국 역사의 공식'대로라면 청나라가 무너지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서 질서를 잡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 주어야 마땅하였다.
그러나 청 정부는 스스로 난을 진압하지 못하고 외세를 끌어들여 잔명을 50년 가까이 간수하였다. 사자는 하이에나와 늑대들의 좋은 먹이감이 된 것이다.
일본은 1192년에 시작되어 700년 가까이 이어온 막부(幕府) 체제가 무너져내리고 중앙 집권적인 군주제가 이루어졌다(명치 유신 明治 維新, 1868).
이에 앞서 1853년에 미국의 동인도 함대 사령관 매슈 페리(Matthew Perry) 제독이 이끄는 함대가 우라가(浦賀) 만에 정박하였다.
그는 조약 체결을 요구하는 밀라드 필모어(Millard Fillmore, 13대) 대통령의 국서를 전달했으며, 이듬해 함대를 끌고 다시 출동해 에도(江戶) 만에 정박하고 일본과 미일 화친 조약을 체결하였다.
미국의 위세에 눌려 우왕좌왕하면서 조약을 맺은 막부 정부의 허약함이 여지없이 드러나게 되고 이는 막부 몰락으로 이어졌다.
한국은 서양 열강의 몰려옴과 더불어 왕조 쇠퇴가 동시에 진행되었다.
1800년대에 들어 와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최제우가 1860년에 창시한 동학교는 민중의 내우외환의 두려움 속에서 폭발적 성장을 이루었다.
1866년의 한국-프랑스 전투(병인양요), 1871년의 한국-미국 전투(신미양요), 그리고 일본과의 운양(雲揚)호 전투 등은 몰락의 박차였다.
리젠더의 유산
리젠더는 미국이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을 펴고 아시아 정세가 어수선한 가운데 아시아로 몰려 들던 야심만만한 미국인 모험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좋은 면으로는 아시아 근대화에 약간 기여한 자들이고, 나쁜 면으로는 아시아 근대에 크나큰 불행의 씨앗을 뿌린 자들이었다.
1871년 리젠더가 동 아시아 역사의 흐름을 엄청나게 바꾸어 놓은 일을 벌였다. 그가 류큐 선원 살해 사건(무단사 사건)의 해결책으로 일본 정부에 타이완 파병을 제안하고, 일본 정부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그를 고문으로 초빙한 것이다.
아무런 프로그램도 없이 갑자기 출범하여 분열되고 허둥대던 일본 명치 정부에 국가 전략의 바탕을 마련해 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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