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에 관한 시모음 22)
첫눈은 신파조로 온다 /홍해리(洪海里)
드디어
그대가 오고
신파조로
첫사랑 순정으로
처음 그대를 맞는
떨리는 눈빛
속살빛 바람
무슨 명사가 필요하랴
아니, 감탄사가 필요하랴
설레이는 부끄러움
촉촉한 입술 사이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어
천지가 향기롭구나
휘청대는 대지 위
목숨 걸고 내리는 너
언뜻 와 닿는
서늘한 손길
네 눈빛이 터져
허공에 뿌려지는
여기는
백옥의 궁전
그대는 초야의 왕비
눈을 감고 있어도
더욱 황홀한 영혼으로
그대는 온다
신파조로
첫사랑 순정으로.
첫눈 2 /오수열
공간을 채우고 남을
원색의 물결
썰물처럼 들어오고
버린 다음 또 담을 순수여
머물 듯 하면서 다시 살아남아
온 세상 다 덮어버리는 몸짓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을 위하여
저 홀로 왔다 서둘러 더나는 것들
무엇이 그리 서러워
세상을 덮었다
눈은 눈 속에서 눈을 맞이하고
낡은 가지에 또 한 번
쓸쓸한 설화(雪花)를 피웠다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욕심으로
그 속을 걷고 있었다
첫눈 /고은
이 나라 비로자나의 순정이여
더도 말고
첫눈이여
언제 내린 줄도 모르게 내려
아가씨 초사흘 눈썹
거기에도 내려
얼른 녹아버리건만
앞산 너머 숭늉마을 다리 저는 사내
그녀석 앙가슴에
아가씨 생각
문풍지 부르르 울고
방바닥 뜨거워
어쩔거나
첫눈을 기다림 /장석남
녹이 슨 수레바퀴가 담장에 기대어 있네
낮게 드리운 하늘과 숲과는 아침부터 손톱 발톱 깎고
흐린 날을 골라 오는 더딘 객을 기다리는데
어스름에 불 켜면 불빛이나 들여다보러 오려는지
벗어놓은 신발짝이나 적시러 오려는지
허기진 소년배들처럼 몰려오려는지
정갈히 차리고 오는 새 풍경을
손발톱이나 좀 깎고 설레어 기다리니
그 참을성 많이 길러서 억울할 것 하나 없네
첫눈 /장선희
창밖에 펄펄 눈이 온다
거리엔 커진 눈송이 뺨을 스치며
콧등으로 날아와 살짝 기대고
반가워 시린 손안에 너를 감싼다
첫 만남에 환호성 되어
기쁨으로 맞이하고
따스한 체온에 눈물 녹아 흐른다
눈송이 꽃송이 되어
어느 틈에 날아와
가벼운 입맞춤 첫 인사 나눈다
아아~ 겨울이 찾아왔나
어느새 찬바람에 사라지고
아쉬운 발자취 여운만 남아있다.
첫눈을 기리는 노래 /박형준
너의 캄캄한 내부에 켜 있는
불빛 한점이 내 눈가를 스쳤네.
얼른 고개를 들어보니 눈이 내리고 있었네.
그것들은 채 쓰지 못한 일기 속의 글자들처럼
어지럽게 주변에 흩날렸네.
나는 가만히 손을 펴 눈송이를 하나 받아 보았네.
방금까지 같이 있었던 여자가
녹은 눈송이 속에서 따뜻하게 떠올라왔네.
그렇게 나와 먼 길을 내려가고 있었네.
점점 많은 눈송이들이 지붕을 덮고,
외투깃을 여민 사람들의 목덜미를 헤집으며
거리를 하얗게 뒤덮었네.
사람에게 저런 맑은 한숨이 있다면,
언제나 눈이 내릴 것이네.
눈은, 네 눈 속의 노오란 달이 떠오를 때까지
지켜보던 나의 슬픔과 닮았네.
눈은, 보도블럭 사이에
생명의 꽃씨를 숨겨두고 광채나는 빛을
얇게 터뜨리며 올라올 날이 있을 것이네.
우리가 그런 꽃봉오리라면,
그 밑뿌리가 캄캄한 암흑을 헤쳐나오기까지
허리를 스쳤던 아픔으로 성숙하겠네.
첫눈이면 쌓일 수 있도록 /정세일
숲의 향기처럼
언제나 동산에서 말씀하시고
서늘할 때에
마음에 오솔길에 가는 빗소리와 새벽을 보내주시어
나뭇잎 속삭이는
실바람 같은 새싹들의 푸름
꿈을 정결하게 씻어
바람의 생각일지라도
나무와 숲 그리고 그리움의 언덕에는
별빛들의
어깨에 보랏빛 하늘을
꿈을 꾸는
마음에 빛남과 때로는 어두움도
작게 하거나
깨어있는 달빛으로 안개를 걷어내 봅니다.
사랑하는 당신이여
그래서 아름다운 날에요
밤하늘별들 사이에
그리움의 처음 발걸음
첫눈이 내리는
함박눈과 싸락눈에게 마음을 허락하면
마음에 크기
생각이 깊이에 따라
달빛의 중심에까지 소복소복
징검다리를
무지개 손잡이로 기둥 옆에 장식하고
마음에 쓸쓸함
소낙비 내릴 수 있도록
초승달의 기다림도 보내봅니다
당신의 마음으로
언제나 처음인 것처럼
첫눈이면 쌓일 수 있도록
첫눈 /박가월
기쁜
설렘도
잠시
반가운
포옹도
잠시
좋아하자마자
질퍽거리는
조루
어설픈
첫
경험
첫눈 오는 날 /이종철
하늘 높이 구름과 떠돌다가
그 얼마나 그리움의 소식인가
올해도 첫날 내려온 은빛 선녀의 무희
섬섬옥수가 저리도 부드러울까
지상에 한 잎 한 잎 내려질 때마다
추억에 가슴이 무너져 내리고
나뭇가지에 흘러내리는 수정 같은
눈물(雪)은
눈물(眼)이 되어 흐르고 있다.
첫눈 /전영금
첫눈의 설렘이어
하늘의 꽃이어
첫사랑 같은 순백의 꽃이어
아름다운 여인의
귀밑에 매달려 있는
찬란한 보석처럼 반짝이며
만지면 부서지고
땅에 떨어지기엔 너무나 고귀한
가로등 불빛에 반짝이는 현란아
바람아 불지 마라
저 아름다움이 머무를 곳을
알기 전에는 녹지도 마라
내 여태까지
서투었던 첫 사랑 말고는
저처럼 순백의 아름다움에
가슴 벅차 본 적이 있으랴...
첫눈 내리는 날 /장용순
광화문 거리에
첫눈 내리는 날
나는 무얼 하고 있었을까
전국에서 모여든
수많은 깃발이 나부끼고
넓은 길에 사람들이
꽉 들어차는 시간
어제 먹은 술이 덜 깬 채로
펑펑 쏟아지는 눈송이를 맞으며
초라한 모습으로 달려간 곳
밤새 오지 않는
주인을 기다리며
첫눈이 녹아 흐르는 몸을 웅크리고
차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첫눈에게 /김덕성
단풍도 사랑을 안은 채
모두 떠나버린 차디 찬 빈 자리
하늘에서 기쁨을 안고
좋아라 춤추듯 내리는 백의천사
첫눈이 내린다
우와- 함성이 들린다
펑펑 쏟아져라
서설瑞雪이 되어
더럽고 추한 대지위에
마구 퍼부어
은세계를 만들어 주려무나
첫눈이여!
첫눈 /감태준
이쪽 육교 밑에는
영하 5도의 겨울
슬픈 옛 노래를 부르는
장님 부부의 빈 손에
첫눈이 날아가 앉는다
몸은 있고
마음은 없는 듯, 그래서 첫눈마저
아무런 감동도 없는 듯 냉랭한 얼굴에
코 하나 눈 두엇 그려 붙인 사람들
장님 부부와 두 팔 이상 떨어져 지나가고
지나가고……
길 건너 전깃줄 위에는
강남 가는 친구들을 놓친
철새 두 마리
첫눈을 맞으며 초조히 떨고 있다
첫눈 /곽재구
내가 신한촌의 한 호텔 315호실에서
문득 눈을 떴을 때 새벽 3시 35분이었다
비늘마다 노란색 등을 켠
몸은 백색인 이무기 한 마리가
기차 레일을 따라 남행하는 꿈속
열차는 함남 도안역에서 멈춰 섰고
나는 플랫폼에 내려 쩔쩔 끓는 귀리차*를 마셨다
여기서 서울까지는 열 시간
여기서 목포까지는 스무 시간
흰옷 입고 등짐 맨 사람들의 목소리에서 수수내음이 났다
스탠드의 불을 켜자
벽에 걸린 드가의 그림 발레리나가 보였다
잠들기 전 존재를 알지 못했던 복사판 그림이었다
나는 일어나 거울 앞 꽃병 속의 붉은 꽃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는데 그때야 이 꽃이 조화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옆방 객실의 화장실에서 물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비상시에 창문을 부수는 데 쓰이는
붉은색의 망치가 벽에 걸린 모습도 처음 보았다
냉장고 안에서 생수 한 병을 꺼내 들이키는 동안
창가에 뭔가 어룽이는 느낌이 있었다
천천히 창으로 다가갔을 때
비로소 내 잠을 깨운 이가
누구인 줄 알게 되었다
세상을 하얗게 물들이는 그
한없이 포근한 입술과
한없이 자유로운 날개를 지닌 그
첫눈이 세상을, 오십 년 뒤의 첫사랑이라도 찾은 듯
그 어깨 안에 포근히 감싸는 것을 보았다.
*쩔쩔 끓는 귀리차 - 백석 시 '함남 도안'에서 인용.
첫눈 내리는 날 /전혜령
어둠속 은빛가루
휘날리는 새벽
밤새 수북히 쌓인
하얀 나라 바라보며
왠지 모를 가슴 설레임
창밖을 바라보면서
하이얀 순백색의
깊은상념으로
어릴적 동화 속으로
첫눈 내리는 날
가슴속 깊은곳 자리한
작은 소원 하나
간절히 빌어봅니다
삶의 가시 정원도
세상살이 버거움도
헝클어진 나의 마음 까지도
순백의 나라로
첫눈 내리는 날
아무도 걷지 않는길
걸어 봅니다
첫눈 내리는 날에 /최수월
가슴 할퀴는 찬바람이 불어도
한평생 사랑해도 후회 없을
당신과 함께 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행복한 일은 없을 겁니다.
당신 그리워서 늘 서성이던
그 골목에
별들도 잠든 어젯밤
첫눈이 소담스럽게 내렸어요.
가슴 설레는 첫눈이라 그럴까요.
왠지 오늘만큼은 당신이
그 길 따라 오실 것만 같아
그 길에서 당신을 기다리는
애처로운 내 모습을 봅니다.
그 애처로움
결코 놓을 수 없는 사랑이기에
가슴 한쪽에 꾹꾹 눌러 놓았던
당신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 그리움일 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