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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4. 묵상글 ( 부활 제5주간 토요일, - 주님께 뽑히고, 세상에서도 뽑히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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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4. 부활 제5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주님께 뽑히고, 세상에서도 뽑히는
주님에게 뽑히는 사람이 주님의 제자이고 성인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당신의 제자로 뽑으신다고 다 좋아할 것 같지 않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모르거나 관심이 없는 사람도
주님께 뽑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좋아하고 사랑한다고 할지라도
주님께 뽑히는 것을 다 좋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 주님 말씀에 따르면
주님께 뽑히는 것은 세상에서 뽑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이 경우 이런 말이 되겠습니다.
내가 너를 이 세상에서 뽑아버렸다!
이 세상에서 완전 퇴출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가 뽑혀도 좋습니까?
잡초라도 자기가 있던 밭에서 뽑히기 싫어합니다.
무릇 모든 생명은 살기 위해 뿌리를 단단히 내리지 않습니까?
또 다른 이유에서도 뽑히기 싫어합니다.
주님도 좋아하고 사랑하지만 이 세상도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좋게 이해하면 그야말로 주님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합니다.
나쁘게 얘기하면 신자 대다수가 양다리 걸치기를 합니다.
이럴 경우 주님께 뽑히는 것은 OK, 세상에서 뽑히는 것은 NO입니다.
주님께 뽑히기 위해 세상에서 뽑히는 것에 대해 우리는 어떤 입장입니까?
이것을 진지하게 자문하게 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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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4. 부활 제5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종종 카페에 가서 책을 읽고 또 글을 씁니다. 백색 소음이 더 집중된다고 해서 카페를 찾기 시작했는데 정말로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늘 좋았던 것은 아닙니다.
며칠 전에도 카페에 들어갔습니다. 월요일이라 카페가 열리는 10시에 맞춰 갔습니다. 인기있는 카페라서 그런지 벌써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그래도 비어 있는 자리를 발견해서 커피와 빵을 주문했습니다. 오래 있을 생각으로 커피도 제일 큰 것으로 주문했지요. 그러나 오래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던 두 명의 여학생 때문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1) 떠들어서. 2) 난동을 부려서. 3) 너무 예뻐서? 4) 눈길을 두기 힘든 복장이라서?
사실 바로 옆에 앉아 있었지만, 이 여학생의 대화는 그렇게 시끄럽지는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말 속에 자주 등장하는 ‘욕’ 때문이었습니다. 욕을 얼마나 찰지게 하는지 계속 신경이 쓰이는 것입니다. 이어폰이라도 있었다면 그들의 말을 듣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제 귀는 활짝 열려있었습니다. 아마 평소에 이런 욕을 말하지 않고, 또 듣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신경이 너무 쓰여서 결국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학생들의 찰진 욕을 듣지 않으니 이제 살 것만 같았습니다. 욕이 익숙한 여학생에게는 서로를 향한 친근함의 표시일지 모르겠지만, 간접적으로 듣고 있던 저에게는 너무 힘들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직접적으로 상처를 줘야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자기도 모르게 다른 이에게 이렇게 상처를 줄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는 세상에 속하지 않고, 세상이 박해하고 배척한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 속한 사람은 세상의 틀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 안에서 풍요로우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 안에서 욕심과 이기심이 넘쳐납니다. 이런 세상의 틀을 따르지 않으니 세상 사람들로부터 박해와 탄압을 받을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세상의 틀에서 벗어나, 주님께 속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주님께 속하는 사람은 철저하게 사랑에 집중합니다. 사랑하지 못할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는 이유를 찾게 됩니다. 자기가 사랑받지 못함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사랑할 수 있음에 감사하게 됩니다. 자기의 세속적 이익이라면 악과 함께하는 것도 꺼리지 않지만, 주님께 속한 사람은 악을 철저하게 미워하고 선을 행하려고 합니다. 더 높아지려는 욕심보다는 다른 이를 더 높이려는 겸손으로 무장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주님께 속하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세상 사람들에게는 무시와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지만, 주님께서는 늘 우리 편이 되셔서 구원의 영광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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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절망의 늪에서 나를 구해준 것은 많은 사람의 사랑이었습니다. 이제 내가 그들을 사랑할 차례입니다(오드리 헵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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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4. 부활 제5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요한 15,19)
오늘 <복음>은 ‘제자들과 세상의 관계’에서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당하게 될 것에 대한 예고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편으로는 제자들의 ‘신원’과 ‘사명’으로부터,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 사람들의 몰이해로부터 오게 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리하여 결국, 세상과 제자들의 관계에서 제자들의 사명 역시 “사랑”임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당하는 이유를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세상에서 택한 사람들이기 때문”(15,19)이라고 밝혀줍니다. 이 말씀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와 한 계약체결의 약속 내용, 곧 “너희를 나의 소유가 되게 하리라...거룩한 민족으로 뽑았다”(탈출 19,5-6)라는 말씀을 떠올려줍니다. 그러니 이는 ‘이미’ 우리 안에 ‘성취된 계약’, ‘성취된 말씀’입니다. 이는 두 가지 사실이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주님께 ‘속한다’는 것이요, 또 하나는 주님께 ‘선택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제자들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2세기의 무명 교부의 작품인 [디오그네투스에게]서 말해주듯이, “세상의 영혼”으로서의 삶입니다. 곧 ‘세상 안에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당하는 이유를 “내 이름 때문”(15, 21), 곧 “내 제자라 해서”라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그리고 “그들은(세상은) 나를 보내신 분을 모른다.”(15,21)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비록 제자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해도’, 혹은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받는다 해도’, 혹은 ‘세상이 아버지를 모르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도’, 제자들도 똑같이 세상을 그렇게 할 수만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한 것은 그들만의 구원이 아니라 모든 민족의 구원을 위한 도구로 삼기 위함이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은 것도 그들의 구원만이 아니라 만민의 구원을 위한 도구로 삼기 위함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은 세상이 아무리 제자들을 미워하고 박해한다 하더라도, 오직 당신을 보내신 분인 아버지께만 믿음을 두셨던 주님이요 스승이신 예수님을 따라서, 믿음으로 복음을 선포하라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예수님께 속해 있다면, 미움과 박해는 당연한 것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특권에 해당할 것입니다. 이 특권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립 1,29)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명과 함께 고난의 특권도 부여받았습니다.
한스 큉은 말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고난을 없애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사랑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오, 나의 주 나의 전부 나의 임자시여! 나를 독차지하신 나의 지배자 나의 정복자시여, 바로 지금 저를 점령하소서. 저는 본시 당신 것이옵니다. 저는 당신의 것, 당신의 소유이오니, 당신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이옵니다. 당신의 택함, 당신의 보냄을 따라 감히 당신의 뜻을 따르겠사오니, 제가 공동체와 형제들 안에 머물게 하소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혹 내 형제가 나를 미워하고 박해한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사랑 안에 머물게 하소서. 당신 말씀을 사는 말씀의 봉사자가 되어 주인님이신 당신을 찬미하며 감사하게 하소서. 오 감사하나이다. 나의 주, 나의 임자시여!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요한 15,19)
주님!
세상에 속하지 않기에, 세상의 사랑을 구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 속하니, 당신의 사랑에 목마르게 하소서!
고난을 겪는 특권을 받았으니, 그 속에서 당신을 만나 뵙게 하소서!
그 어떤 미움과 배척에서도 사랑을 배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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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4. 부활 제5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꿈은 크게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거나 선에 대치되는 꿈과 희망은 결코 현실화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룰 수 있는 꿈을 가져야 합니다. 바라는 것에 걸맞은 노력과 정성이 함께한다면 꿈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대한 꿈을 지니되 선 안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크게 이루었다고 해도 선한 방법을 쓰지 않았다면 결코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오래전 일이지만 모 그룹 재벌 회장이 술집에서 폭행당한 아들을 보고 너무 화가 나서 조직 폭력배를 동원하여 보복하였다는 얘기가 떠들썩하였습니다. 결국 그 아버지는 구속되었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고귀한 마음은 나무랄 수 없지만 선에 대치되는 잘못된 방법을 선택하였습니다. 자식을 사랑한다는 빌미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선생님을 폭행한 학부모도 있습니다. 폭행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녀 교육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 자녀가 아버지의 전철을 밟을까 걱정입니다. 오늘의 세상에는 ‘선생과 학생만 있고, 스승과 제자는 없다’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세상의 방법을 좋아하고 그것으로 자신을 내세우며 권력을 행사합니다. 그리고 그에 동조하는 사람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줄을 세우며 그것을 즐깁니다. 옳고 그렇지 않고는 상관없이, 자기 입맛에 따라 좋고 싫은 것에 관심을 둡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속한 사람은 그것에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미움을 당하게 됩니다. 너만 고고하냐? 잘났냐? 는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나를 미워한다고 해도 두려워할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곧 내가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증거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미움을 당하는 것은 악에 대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해야 할 소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사실 사악한 세상의 미움을 받지 않고 그들과 더불어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조직 폭력배와 공생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누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구애 없이 선, 옳음을 선택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상에서 뽑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삶이 우리 믿는 이의 삶이라는 일깨움을 되새기는 오늘이길 바랍니다. 누가 나를 미워하면 더 큰 사랑으로 되갚아 주시길 다짐하며……사랑에 사랑을 더해야 하겠습니다.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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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4. 부활 제5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수영을 배우려면 ‘직접 물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론으로 수영하는 법을 배울 수도 있지만, 그래도 물속으로 들어가서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운전을 배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필기시험을 보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실기시험입니다. 직접 차를 몰고 운전을 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전에 ‘장롱면허’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면허증은 있지만 운전을 해 보지 못한 분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운전해 보지 않으면 면허증이 있어도 별 소용이 없습니다. 이번에 성지순례를 하면서 성지에서 하는 프로그램에 직접 참여하였습니다. 메주고리예에서는 묵주기도와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함께하였습니다. 파티마에서는 묵주기도와 행렬을 함께 하였습니다. 루르드에서도 성체강복과 묵주기도 행렬을 함께 하였습니다. 몬세랏에서는 성무일도를 함께 했습니다. 예전에는 성지에서 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할 기회가 적었습니다. 일정이 바쁘기도 했고, 숙소가 성지에서 멀기도 했고, 미처 모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성지에서 하는 프로그램에 함께하면서 성지순례가 더욱 풍요로워졌습니다.
‘화중지병(畵中之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림의 떡은 보기는 좋지만, 그 맛을 느낄 수는 없습니다. 그림의 떡은 보기는 좋지만, 결코 먹을 수는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비슷합니다. 말만 앞서고 행동이 없다면 참다운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신앙생활을 비난하셨습니다. 그들은 말은 하지만 그 말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 사람들이 하는 말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저 사람들의 행동은 따라하지 말아라.” 그리고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저 사람들은 자기들도 하느님께로 가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로 가는 것을 가로막는다.” 성모님의 메시지 중에도 그런 것이 있었습니다. “많은 주교와 사제들이 하느님과 멀어지고 있다. 그들이 신자들의 영혼이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고 있다. 그러니 주교와 사제들을 위해서 기도하여라.” 성지순례를 하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이 제게는 ‘죽비’처럼 따갑게 다가왔습니다. 성지순례의 기회가 있어서 몇 번 더 왔지만, 성지순례를 준비하는 마음은 그렇게 간절하지 않았습니다. 성지순례의 마음가짐은 설명하지만, 정작 저 자신은 여행객에서 순례자로, 순례자에서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되려는 노력이 부족했습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자신은 성화 되지 않았으면서 남을 성화시키려고 하는 분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의지와 뜻이 먼저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분들을 볼 때도 있습니다. 힘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곧 지치게 됩니다. 힘이 빠지면 다른 사람들 때문에, 신앙이 식어버립니다. 즐거웠던 일들도 시들해지고, 성당에 나오는 것도, 기도하는 것도 재미가 없어집니다. 자신의 힘으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성화 된 신앙을 가진 사람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기도할 수 있으며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성화시킬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주님 곁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가전제품도 전원이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그저 고철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원이 연결되어야만 텔레비전도, 컴퓨터도, 냉장고도 기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성화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연결될 때, 주님 곁에 머무를 때 성화 될 수 있습니다. 오늘 화답송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알아라, 주님은 하느님이시다. 그분이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는 그분의 것, 그분의 백성, 그분 목장의 양 떼라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성화 된 신앙인은 박해받을 수 있고, 고독할 수 있으며, 십자가를 지고 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우리를 살리는 길이고, 그 길이 영광과 부활의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여라. 거기에는 그리스도가 하느님 오른쪽에 앉아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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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4. 부활 제5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세상이 나를 먼저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라고 말씀하신 부분에서 마음이 짠합니다.
맞습니다. 세상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세상은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세상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 것을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세상은 자기 자신에게만 그 시선을 두었습니다. 자신의 명예와 권력, 이익과 이미 소유한 것을 지키고자 하는 아집에 시선을 두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세상은 주님을 세상이 만들어 놓은 것들을 파괴하는 파괴자로 몰았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정한 법대로 선하디선한 하느님의 어린양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것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먼저 미움받았음을 기억하라 하십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가 주님 닮은 모습으로 우리를 내어놓을 때 세상은 우리를 바보스럽게 볼 수 있습니다. 혹은 정말로 세상의 법을 헤치는 파괴자로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길은 주님의 길과 같습니다. 주님께서 걸으셨던 길을 걷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이오. 우리는 주님께 속해있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미워할지라도 우리는 주님의 사랑 안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에게 늘 새로운 영적 힘을 전해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뽑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뽑힌 사람들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뽑힌 사람입니다. 그러니 오늘 하루도 당당히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가십시오.
미움보다는 사랑으로, 다툼보다는 화해로, 심판보다는 용서로 걸어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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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 밟으면 재수가 좋다?
어린 시절, 제가 살던 곳은 시골 산골 마을이었습니다.
일명 ‘깡시골’이라고 하는데 제가 살던 산속 마을을 정확히 표현하자면 ‘깡시골’이 아니라 ‘깡깡깡시골’정도 될 것 같습니다.
마을 전체는 비포장의 흙길이었습니다. 비가 오면 웅덩이가 생기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푹푹 파인 곳은 신발을 더럽히기 딱 좋았습니다. 비가 그치면 얼굴에 주름살이 생기듯이 길 위에도 물이 지나간 자리가 주름살처럼 남았습니다.
화창한 날 이런 길을 걷다 보면 무심코 밟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소똥입니다. 작은 동물은 작게, 큰 동물은 크게 쌉니다. 소똥의 크기를 어린 시절 제게 적잖은 충격을 줬습니다. 제가 신고 있던 신발보다 더 컸기 때문입니다. 그런 크고 물컹한 것을 밝는 순간 신발은 그 똥에게 잡히고 맙니다. 그렇게 더럽다고 인상 찌푸리고 있으면 옆에 있던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똥 밟으면 재수 좋데. 너 오늘 재수 좋겠다.
사람들은 왜 똥을 밟으면 재수 좋다고 말했을까요? 똥을 밟으면 진짜로 재수가 좋아지는 걸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나쁜 일 후에 꼭 좋은 일이 있기를 바라는 우리들의 따뜻한 마음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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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4. 부활 제5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우리의 존재 이유-
“온 누리 반기어 주님께 소리쳐라.
기쁨으로 주님 섬겨 드려라.
춤추며 그분 앞에 나아가라.”(시편100,1-2)
오늘 복음은 짧지만 이해하기도 어렵고 좀 불편합니다. 현재 우리 교회가 제대로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으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 성찰하게 합니다.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은 우리의 신원이자 존재이유이기도 합니다. 과연 교회가 세상과 동화(同化)되어 점차 세상과 하나되어 점차 부패(腐敗)되어 가는 경향은 아닌지 성찰하게 합니다. 세상을 성화(聖化)해야할 교회가 세상에 속화(俗化)되어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역할을 상실한다면 존재이유의 상실일 것입니다.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또 세상 한복판에서 치열한 생존경쟁속에서 참으로 힘겹게 살아가는 분들의 고백을 통해, 말그대로 총체적 위기의 현실처럼 느껴집니다. 어디서부터 손대야할지 참 망막하게 생각됩니다.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습니다. 긍정적으로, 낙관적으로 보려해도, 부정적이, 비관적이 됩니다. 각자도생의 사회, 국내의 정치현실, 사회현실, 교육현실, 군대현실, 모두가 소리없이 무너져 내리는 현실같습니다. 다 서로 하나로 연결되어 일어나는 현실입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교회는 과연 책임이 없나 묻게 됩니다. 길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학자의 현실 진단에 공감했습니다.
“위기의 본질은 가치와 지향, 비전과 신뢰의 상실에 있다. 그려면 남는 것은 문먼 탐욕뿐이다.”
다음 독일의 문호, 괴테의 말도 잊지 못합니다.
“지옥에는 한계가 없다”
무한한 욕망따라, 한계없는 삶이 지옥이라는 것이며 오늘의 현실에 대한 진단같기도 합니다.
자주 묻는 물음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렇게 살아도 되나?" 교회가 과연 예언자적 사명에 충실함은 물론 주님의 가르침 따라 살았는지 묻게 됩니다. 세상과 사이좋게 평화로운 공존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과연 옳은지 묻게 됩니다. 참으로 제대로 된 신자 정치가들이요 정당이라면 교회의 가르침이 실현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제대로 된 에언자적 교회라면 세상과의 적당한 불편은 필수라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면 박해도 받고 때로 순교자들도 있기 마련입니다. 사실 세상과 하느님의 적대적인 대립은 구원 역사의 근본적인 면을 이룹니다.
“세상이 너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요한복음의 배경을 이루는 박해시대에는 세상의 미움의 대상이 된 예수님의 제자들이었는데 현재 우리는 세상의 미움을 받지 않습니다.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자기 사람으로 사랑한다 말씀하시는데 과연, 하느님께 속한 우리 삶인지, 또는 세상에 속한 우리 삶은 아닌지 생각하게 됩니다.
교회에, 하느님께 속한 사실을 까맣게 잊고, 세상에 속한 사람들처럼 살아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분명한 것은 우리가 세상의 사랑을 받는다면 뭔가 문제가 있음에 분명합니다. 정말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의 삶이라면, 세상을 떠난 삶이 아니라 세상 속의 삶이라면, 때로 세상과의 불화와 불편은 자연스럽고 건강한 현상일 것입니다.
정말 영향력있는 정치가들이 교회 지도자들을 찾았을 때 용기있게 쓴소리를 낼 수 있는 분들이 과연 몇이나 있겠는지요. 예전 김수환 추기경은 달랐습니다. 명실공히 시대의 어른이었고 추기경의 발언은 큰 반향을 일으키곤 했습니다. 당시 시국이 어려울 때는 추기경의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요즘 교회의 눈치를 보고 교회를 어려워하는 정치가들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좌파나 우파가 아닌 진정 용기있고 정의로우며 평화를 사랑하는 예수님파 참된 교회 지도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세상에서 너희를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를 미워하는 것이다.”
그대로 세상과 불편해야하고 불편할 수뿐이 없는 우리 예수님을 믿는 이들의 신원이 드러납니다. 세상 안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기에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의 존재로 예수님 친히 뽑아냈기 때문에 세상이 제자들을 불편해하고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하느님의 창조한 본연의 좋은 세상에서 아니라 악으로 날로 부패해져가는 세상을 상징합니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고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여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
정말 예수님의 제자라면 예수님과 운명공동체일 수 뿐이 없겠습니다. 주인이자 스승인 예수님따라 살다보면 예수님이 겪었던 박해와 고통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요, 이는 바오로 사도는 물론 초대교회 지도자들이나 무수한 순교자들이 그 좋은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바오로의 행적을 보면 그 고난의 파란만장한 삶중에도 참 자유로워 보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씀대로 세상에 속하지 않고 진리이신 예수님께 속한 그 자유로움일 것이며 박해를 받거나 순교한 분들 역시 예수님께 속했기에 참으로 자유로웠습니다.
이들 바오로 일행의 행로를 보면 성령의 인도에, 예수님의 영에 따른, 또 주님의 환시에 따른 삶이 바로 자유로운 삶의 비결이었음을, 또 아시아가 아닌 유럽에의 선교가 자유로운 하느님의 섭리이자 주님의 뜻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이 아닌 주님께 속한 자로서 우리 역시 성령께 귀기울이고 성령에 따라 살 때 참으로 자유로운 삶임을 봅니다. 정말 간절히 기도하고 주님을 찾아야 할 절박한 시절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내 이름 때문에 너희에게 그 모든 일을 저지를 것이다. 그들이 나를 보내신 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예수님을 보내신 분, 하느님을 알지 못한 무지에서 기인한 박해였음을 봅니다, 역시 무지가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통해 예수님을 보내신 분이 하느님이심을 알았더라면 이런 박해도 없었을 것이란 말씀입니다. 정말 열린 눈으로보면 예수님의 삶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하느님이신데 무지에 눈이 가려 예수님도 하느님도 몰랐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다음 한 마디로 정의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이 말씀을 믿어야 무지의 어둠에서, 미궁(迷宮)에서 벗어나 흔들림없이 예수님의 길을 통해 진리이자 생명이신 아버지께 이를수 있습니다. 아니 지금 여기서부터 예수님과 함께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되어 진리와 생명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문득 개신교 칼바르트 신학자의 말이 생각납니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제가 잊지 않고 명심하는 말마디입니다.
“성서를 읽듯이 신문을 읽고, 신문을 보듯이 성서를 본다.”
성서를 읽는 마음으로 깨어 신문을 읽으며 하느님의 뜻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매일 미사라는 거울을 통해 세상을 들여다보며 미사를 봉헌하는 마음이 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이 아닌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되어,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으로 살게 합니다.
“주님은 하느님, 너희는 알라,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는 그분의 것,
그분 백성이어라, 기르시는 그 양 떼이어라.”(시편100,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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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4. 부활 제5주간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의 벗이기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요한 15,20)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 역시
사랑받기를
당신을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나 역시
미움받기를
그리하여
나 언제나
당신의 벗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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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4. 부활 제5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고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여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요한 15,20)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겪는 이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린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우주의 창조자인 나,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손안에 쥐고 있는 내가 그들의 격노를 제어하지도 ... 그들의 태도를 억누르지도 않았다. 오히려 나는 그들 각자가 자신의 행실을 선택하도록 두었고 모두가 지기 원하는 대로 하도록 허락했다. 그래서 나는 박해받을 때, 그것을 막을 힘이 있었음에도 참고 견뎠다. 너희가 나의 자취를 따라 내가 걸은 것과 같은 길을 걸으면, 너희도 박해를 받을 것이다. 너희는 너희가 이롭게 해 준 이들의 배은망덕에 지나치게 마음 상하지 말아야 하며, 때로는 너희를 미워하는 이들의 반감을 견뎌 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너희가 나의 영광을 얻는 길이다.
나와 함께 고난을 겪는 이들은 나와 함께 다스리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6 사람은 숭고하다
사람은 새로운 성전이다.
엑카르트는 원죄에 집착하지 않는다. 진정한 창조신학의 전통에 서 있는 그는 사람이 “창조되던 그 순간부터” 하느님의 모상을 지녔다는 사실에 서서히 넋을 잃는다. 그는 닮은 것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닮은 것은 저절로 존재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비치는 아무개가 있어야만 존재합니다. 그것의 존재는 모두 자신이 비치는 아무개에게 속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아무개에게 어떤 빚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아무개의 상이기 때문입니다. 그 아무개 이외의 어떠한 것도 그것의 근원이 될 수 없습니다. 닮은 것은 그 아무개의 상입니다. 그러하기에 닮은 것은 그 아무개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직접 받습니다.
그것은 그 아무개와 닮은 유일한 존재를 가집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아무개와 같은 존재입니다.(164)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이슬람교의 유일신 신앙과 '믿음의 다섯 기둥'
이슬람의 ‘믿음의 다섯 기둥'
단식은 <꾸란>의 계명을 통해서 명하고 있는 바(<꾸란> 2 : 184, 2 : 185), 무하마드를 비롯한 이슬람 종교 지도지들이 권장하면서 모범적으로 실천해 온 신앙덕목이다. 경건한 무슬림은 개개인의 건강상태나 자유 의지에 따라서 일 주일에 하루나 한 달에 2,3일씩 단식을 하기도 하고 하루 세 끼 식사 중 한두 끼를 단식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이슬람 신도가 의무적으로, 공개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단식은 앞서 말한 라마단 기간의 공동체적 단식이다. 이슬람권 밖에서도 딘식은 건강의 증진은 물론 인간의 영성 회복과 자기 절제의 훈련에 매우 유용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넷째 기둥은 ‘자선 또는 희사'(Zakat)인데, 본래 자선과 희사를 의미하는 아랍어 ‘자카트' (Zakat)는 남에게 자기를 과시하는 행동이 아니라, 신 앞에서 자기를 ‘정회하다', 타인을 향한 희사 행위가 작신의 복을 ‘증가시킨다'는 뜻을 지닌 말이다
고등 종교들이 보이는 특징은 ‘믿는 일' 과 ‘선행의 실천' 을 두 가지로 구별하지만 결코 분리할 수 없는 동전의 앞뒤 관계라고 생각한다는 점에 있다. 선행이 동반되지 않는 믿음은 헛것이거나 거짓이며,, 종교인에게서 자기 수행과 이타행(利他行)은 불가분리적이다. 이슬람교도 그 점을 강조하는데, 특별히 신앙의 다섯 기둥 중 하나로서 중요시 한다.
본래 유목민이 그 뿌리였던 아라비아반도의 부족들은 배타성도 강하지만, 궁핍한 자연 환경 속에서 유랑자나 손님을 박대하지 말고 친절과 자비를 베풀 것을 권장하고 있다. 그들 자신이 언제나 그런 경우를 당할 수 있는 척박한 생활 환경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목민들의 인심이 본래 뿌리가 되었으나, 알라의 자비심과 정의로움으로 살아간다고 신앙 고백하는 이슬람교도들에게 있어서 이제 자선은 참된 신앙이 유지되는 필수불가결의 종교적 의무가 된 것이다.(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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