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벌 *
네가 나는 곳까지
나는 날지 못한다
너는 집을 떠나 돌아오지만
나는 집을 떠나면 돌아오지
못한다
네 가슴의 피는
시냇물 처럼 흐르고
너의 뼈는 나의 뼈보다
튼튼하다
향기를 먹는
너의 혀는부드러우나
나의 혀는
모래 알만 쏘다닐 뿐이다.
너는 우는 아이에게
꿀을 먹이고
가난한 자에게 단꿀을 준다
나는 아직도 아직도
너의 꿀을 만들지 못한다
너는 너의
단 하나 목숨과 바꾸는
무서운 바늘침을 가졌으나
나는 단 한번
네 목숨과 맞바꿀
쓰디쓴 사랑도 가지지 못한다
하늘도 별도 잃지 않는
너는 지난겨울 꽁꽁 언
별 속에 피는 장미를
키우지만
나는 이 땅에
한 그루 꽃나무도
키워보지 못한다
복사꽃 살구꽃 찔레꽃이
지면 우는 너의 눈물은
이제 다디단 꿀이다
나의 눈물도
이제 너의 다디단 꿀이다
저녁이 오면
너는 들녘에서 돌아와
모든 슬픔을 꿀로 만든다
* 김현승 시인을 만나다*
누구의 시든 완벽한 독창성을 지닌 시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미 시라는 형식 속에는 모방의 의미가 들어 있기 대문이다 아무리 독창적 형식과 내용의 시라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모방을 바탕으로 출발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내 시의 스승은 오늘 날 한국현대시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시인들이다.
이십 대 때 열심히 읽은 시의 시인들, 김소월, 한용운, 윤동주, 이육사, 이상화, 서정주, 신석정,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 김현승, 신동엽, 김수영, 신경림, 황동규, 정현종, 등 일일이 그 이름을 거론할 수 없다 이들은 나 스스로 삼은 내 시의 스승들이다. 나는 이들의 시를 열심히 읽으며 그 정신과 표현을 흉내 내고 싶어 밤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러니까 다른 시인이 내 시 속으로 걸어 들어온 게 아니라,내가 다른 시인의 시 속으로 걸어 들어 갔다고 해야 옳다.
얼마전 춘천에 간 김에 내가 이십 대 때 3년 동안 군북무했던 야전공병부대를 찾아가보았다. 부애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부대 밖 담벼락을 따라 걸어가다가 김헌승 시인을 떠올렸다. 담벼락 너머에는 내가 근무하던 막사의 지붕이 보였는데 바로 그 막사에서 틈틈이 쓴 시 폋 편을 당시 숭전대학교[지금의 숭실대학교]에 재직 중이시던 시인 김현승 선생님께 보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때가 1972년 봄, 가슴에 병장 계급장을 말 달았으,ㄹ 때였다. 그 무렵 나는 김현승 선생님의 시에 푹 빠져 있었다. 휴일에 내무반에서나 어쩌다가 나온 휴가 길에서나 김현승 시집 《옹호자의 노래》 《견고한 고독》등을 틈만 나면 읽고 또 읽었다.
딱 꼬집어말할 수는 없었지만 당시 김현승선생의 시에서는 혼탁하고 가난한 현실 속에서도 맑고 깨끗한 삶을 지향하는 시인의 순결한 정신세계를 느낄 수 있었다. 모름지기 시인이라면 그런 고독한 순결성을 지향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김현승 선생의 시를 흉내 낸 몇 편의 시가 써지자 그만 선생님께 우편으로 보내고 말았다.
답장을 해주실 것이라고 크게 기대하지 않았음에도 선생님께 '언제 휴가 나오면 학교로 한번 들르도록 하라'는 내용의 친필 엽서를 보내수셨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일개 사병잉이보낸 시를 읽고 답신을 보낸 선생님의 마음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선생님의 편지를 내내 가슴에 품고 있다가 마지막 정기휴가를 나가 숭전대 교수실로 선생님을 찾아 뵙게 되었다.
커피 애호가이신 선생님의 방은 은은한 커피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선생님은 교수실 다탁 위에 고독하게 앉아 있는 난 화분 같은 모습으로 나를 맞이해주셨다. 선생님께서는 손수 커피를 끓여주시면서 "열심히 써보라"는 말씀외엔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다. 그렇지만 선생님께서 나를 만나주신 것 그 자체가 이미 칭찬과 격려의 큰 의미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선생님이 손수 끓여주신 커피를 들면서 선생님을 우러러보는 나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선생님의 존재 자체가 한 편의 고독한 시로 느껴졌다. 마침 다탁 위에 선생님의 시집 《절대고독》이 놓여 있어 오랫동안 그 시집에 눈길을 주었다. 그리고 그날 선생님의 방을 나오자마자 바로 서점에 들러 《절대고독》을 구입해 이십 대가 다 가도록 읽고 또 읽었다. 그러면서 기쁘고 즐겁게 공부하는 마음으로 선생님의 시를 자꾸 흉내 내어 시를 써보았다.
김현승 선생님의 시에는 맑고 순결한 인간의 마음이 있었다. 절대자에 대한 지고지순한 믿음과 사랑이 있었다. 고독한 인간의 삶에 대한 사색의 결정체가 보석처럼 빛났다. 그러나 선생님이 끊임없이 노래하신 ' 절대고독의 세계'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 뒤 인생의 많은 시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시집이 꽂혀 있는 책상 정리를 하다가 반가운 마음으로 《절대고독》을 다시 꺼내보게 되었다. 이십 대 때 내 시의 영혼에 불을 지핀 시집이었음에도 30여 년이 지나도록 꺼내보지 않았다는 자책의 마음에 얼른 펼쳐보았다. 순간, 책갈피에서 '다형茶兄 김현승 시문학사상 발표회'라고 적힌 인쇄물 한 장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1973년 5월 25일자로 인쇄된 인쇄물이었다.
''아, 맞아. 이날 내가 선생님 경연을 들으러 갔었지.' 그때서야 숭전대 강당에서 선생님께서 문학 강연을 하신 일이 떠올랐다. 당시 나는 집이 숭전대와 지척에 있었음에도 제대하고 나서 선생님을 찾아뵙지 못했다. 선생님께서 뇌졸중으로 쓰러져 학교에 나오지 않으신다는 이야기를 들은 탓이었다. 그런대 건강을 회복하셔서 강연을 하신다는 소식에 반가운 마음으로 얼른 숭실대 강연장을 찾게 되었다.
연단에 선 선생님은 건강해 보이셨다. 목소리는 조용조용했지만 힘이 들어 있었다. 강연 중에 선생님께서는 당신이 추구하시는 고독의 영역을 '신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제3의 영역'이라고 강조해서 말씀하셨다. '신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제 3의 영역은 어디이며 무엇일?'
그 말씀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하나의 화두처럼 내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다. 지금까지 시를 써오면서 그 '고독의 영역'을 늘 알고 싶었으나 알 수 없었다. 이제 칠순의 나이가 되자 조금 알 것 같기도 하지만 '아것이다!"하고 명확하게 이해하고 깨닫기는 어렵다., 다만 인간이 '절대 고독'한 존재라는 사실을, '외로우니까 사람'이라는 사실을 나 나름대로 이해해볼 뿐이다.
나는 그렇게 김현승 선생님의 시에 대한 흠모와 존경의 마음을 지니고 이십 대를 보냈다. 나의 그런 마음은 '꿀벌'과 같은 시를 쓰게 해서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에 싣기도 했다. 지금도 꿀벌을 읽으면 김현승 선생의 시의 내음이 마치 커피향 같은 모방의 향기가 진하게 배어난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날 강연을 마치신 선생님을 찾아가 인사드리지 못한 일이 참으로 후회스럽다. 습작을 써서 보낸 그 군인이라고 말씀드리면 바로 아시고 반가워하셨을 텐데, 제대할 때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었다고 말씀드리면 더더욱 반가워하셨을 텐데 인사를 드리지 못했다.
그렇게 빨리, 강연하신 지 이태 뒤에 작고하시리라고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어쩌면 내가 지금 선생님의 고독의 영역에 들어서서 '영원의 먼 끝을 만지며' 존재해 있는지도 모르나. 지금도 내 눈엔 '내 고독에 돌을 던져본다고' 노래한 김현승 선생님의 고독한 모습이 보인다.
- 정 호 승의
시가 있는 산문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