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신들의 위계질서에 대한 그릇된 견해
"인도에서의 간증(From The High Places Of India)
1998년 제가 인도 봄베이에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목회자 컨퍼런스를 섬기고 있던 저는 그곳에서 매우 낙심되고, 의기소침해 있는 목회자부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젊은 부부는 한때, 교회가 점점 성장하고, 지역적인 영향력이 날로 커질 것이라는 큰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적 전쟁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습니다.
고대 힌두사원이 자리 잡고 있었던 도시 외곽지역의 언덕에서 살면서, 그들은 영계에서 더 높은 권세를 차지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가난과 죽음, 환생 이론에 대항하면서 그들은 사탄에게 인도 사람들을 그 손아귀에서 놓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이후 그들은 악한 세력들에게 본격적인 맹공격을 시작했고, 한 노파가 실제로 사망했습니다. 기력이 다 쇠할 정도로 고령이었던 그녀는 입술로는 기독교인임을 자처했지만, 사실은 힌두교 신앙이 뒤섞인 의식들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목사님께서는 그 노파의 집 주변을 지나칠 때, 뜨겁고 눅눅한 열대야의 기후 가운데 사람의 몸이 부패하는 냄새를 맡으셨다고 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목사님은 이미 부패되기 시작한 시체가 그녀의 집 주변 관목 덤불 가운데 유기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날 밤 사모님께서는 죽은 노파의 모습을 한 망령이 그들의 침실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방에 들어온 그 망령은 검은색 스카프를 던졌는데, 그것은 마치 나뭇잎처럼 공중에 떠다니더니 결국 두 사람의 침대에 떨어졌습니다. 다음날 목사님께서는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넘나드는 치명적인 심장마비를 경험했습니다. 그 이후로도 심장마비는 두 세 번 더 일어났습니다. 사모님 역시 고열로 인한 장기 손상으로 생명을 위협받아야 했습니다.
두 분이 병원에서 퇴원했을 때, 그 집에서 일하던 정원사는 그들을 조롱하듯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는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을걸요? 두 분 다 살아남으려면 좀 더 세고, 강력한 권위의 힘을 빌리셔야 할 겁니다.' 공포와 두려움이 점점 깊어지는 가운데, 부부는 그들을 둘러싼 모든 생명체가 죽어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애완동물들과 가축들, 채소와 꽃들과 과실수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그 집을 둘러싸고 있는 대기는 점점 더 오싹하고 불길한 기운으로 가득 차고 있었고, 악한 영들의 움직임이 팽팽한 긴장감을 조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결국 그들은 집을 떠나기로 결정하고 대문 밖을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더 큰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대문 안쪽에 빗장처럼 채워져 있던 쇠로 만든 창이 코브라처럼 변하더니, 머리를 들어서 곧 두 사람에게 달려들듯이 공격태세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두 분을 만났을 때는, 그들이 하늘에 속한 통치자들과 대항하기 시작한 지 6개월이 지날 무렵이었습니다. 당시 그들은 생기라고는 전혀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두 분께 그런 식의 영적 전쟁을 즉시 중단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저는 기도 가운데 그들이 고통당하는 이유를 분별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계를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원칙들을 오해하고 위반함으로써 그들이 가졌던 영적인 권위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런 고통을 겪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 저는 저녁 예배 때 ... 성령님의 지시하심을 따라, 망령이 나타났던 장소였던 두 분의 침실에 사모님이 서 계시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 이렇게 선포하도록 했습니다. '노파의 저주로 말미암아 이 집에 임해 있는 모든 악한 것들을 예수의 이름으로 꾸짖노라. 또한 우리는 잘못된 영적 전쟁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위배한 것을 회개합니다.'
목사님과 사모님이 회개하고, 저주를 역전시킨 이후 그들의 건강은 호전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목사님의 주치의는 목사님의 심장이 전혀 사용되지 않은 새 것과 같이 변화되었다고 했습니다. 심장을 조성하는 근육세포들 중에서 손상된 조직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저는 사택 주변의 생물들이 소생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채소들과 닭과 개와 고양이들은 더 이상 죽지 않고 잘 번식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들이 저주를 반전시킨 이후, 대문 빗장에 걸려 있던 코브라 형상의 창이 기적적으로 다시 곧게 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원사는 자취를 감췄다고 합니다."
이상 소개해드린 바와 같이, 전략적 수준의 영적 전쟁은 우리를 사탄의 공격에 노출시켜서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지상에 있는 귀신들이 아닌 하늘에 있는 악한 영을 다룰 수 있는 권세를 우리에게 주지 않으셨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무장도 하지 않은 채 싸우기 위해 전쟁터로 나가는 형국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각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이쯤에서 저는 신사도운동에 대해 이런 질문을 던져보고 싶습니다. 그들 중 다수는 진실하고 선량한 분들입니다. 그리고 사랑스럽고 존경스러운 분들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왜 성경에서 벗어나게 되었을까요? 왜 성경과 다른 높아진 생각과 이론에 사로잡히게 되었을까요? 왜 마귀의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기 원했던 그들이 도리어 자기 안에 견고한 진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저는 그 대표적인 이유 중의 하나가 사도에 대한 반쪽짜리 지식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책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도에 대해 두 가지를 계시해주신 것이 나옵니다. 하나는 『나를 살리신 하나님』이라는 책에 나오는 사도가 오늘날도 존재한다는 계시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선물』이라는 책에 나오는 예수님과 12사도와 바울은 토대적인 사도로서 성경을 기록하여 교회의 토대를 놓았고, 지금은 이런 사도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계시입니다. 물론 아무 계시나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반드시 성경을 기준으로 엄격하게 분별하여 성경적인 것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 계시들은 둘 다 지극히 성경적입니다.
그런데 피터 와그너 박사님은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책에 나오는 사도가 오늘날도 존재한다는 것은 받아들였으나 토대적인 사도들은 오늘날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는 충분히 주목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즉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습니다. 만약 피터 와그너 박사님이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사도에 대한 두 번째 계시에 주의했더라면 성경에 착념했을 것이고 현상이나 결과에 너무 집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러지 못했고 성경이 아니라 현상이나 결과에 지나치게 집착했습니다. 그래서 생성된 이론이 전략적 수준의 영적 전쟁인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토대적인 사도들과 동등한 자리에 올랐고, 성경에도 없는 영적 도해니 사도적인 네트워크니 전략적 수준의 영적 전쟁이니 하는 것들을 만들어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큰 혼란과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제가 자주 드리는 말씀인데, 성령의 은사와 성령께로부터 오는 계시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잊어서는 안 되는 사활적으로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교리는 성경에서 나와야지 계시나 체험에서 끌어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피터 와그너 박사님은 이 중요한 원칙을 범했습니다. 저는 그분이 이런 실수를 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성경학자가 아니라 교회성장학자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피터 와그너 박사님은 성경을 깊이 연구한 성경학자가 아닙니다. 성장한 교회들을 찾아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그 비결을 조사하고 정리하여 발표한 교회성장학자입니다. 즉 성경이 아니라 교회나 부흥이 일어난 도시를 찾아가 결과를 보고 연구한 분입니다. 그런데 어떤 교회나 도시에 큰 부흥이 일어났다고 해서 그 부흥이 그들이 전한 말씀이나 사용한 방법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표적과 기사들은 단지 예수님과 복음을 확증합니다. 그리고 부흥이 일어난 것은 전한 메시지나 사역방법이 다 옳아서가 아니라 전해진 다른 바른 메시지와 함께 사용된 다른 성경적인 방법에 의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절대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잔 폴 잭슨 목사님 역시 저와 같은 지적을 했습니다.
"영적 전쟁 분야에서도 성공과 승리의 열매들이 분명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성공적인 결과는 그동안 영적 전쟁이 그 방법 면에서 옳았기 때문이 아니라, 기도와 금식으로 중보하는 성도들의 울부짖음이 점점 더 증가되고, 점점 더 하나가 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비슷한 사례로, 크리스천 사이언스(Christian Science)를 세운 메리 베이커 에디(Mary Bsker Eddy)의 예가 있습니다. 그녀의 가르침 안에도 성경으로부터 비롯된 올바른 가르침들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역 가운데서 기적이 실제로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사역이나 그녀가 범한 오류들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그 가르침의 대부분은 영지주의 이단사설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기적적인 현상들이 그녀의 사역을 정당화시킬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영적 전쟁에서 몇몇 표면적인 승리가 있었다 하더라도 과거의 방법과 시도들이 모두 지혜로운 것이었다고, 혹은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피터 와그너 박사님은 이 점을 놓쳤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아니라 부흥한 교회나 도시가 사용한 방법과 결과를 텍스트로 삼고 거기에서 이론을 끌어내어 조립한 후 성경으로 살짝 덧칠을 했습니다. 이것이 동기는 선하지만 피터 와그너 박사님이 범한 실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신사도운동에 대한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다음과 같은 판단과 권면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적 가르침과 하나님의 말씀의 건전한 지혜의 부족이 그리스도의 몸 안에 우스운 일들을 하게 만든 것이고 그것들이 사람들을 상하게 한 것입니다. 그들은 너무 극단적이고, 사람들로 하여금 한쪽으로 치우져서 광신과 과다와 오류를 만들게 했기 때문에 이것은 해로운 것입니다 ...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을 말하여'(디도서 2:1)
사람들은 그들이 영적인 전쟁에 대하여 배우는 것이 교리적으로 건전한 것인지 주의해서 보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선 전쟁에 대한 계시를 받아서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말씀 밖에서는 어떤 계시도 없는 것입니다. 당신이 가진 어떤 계시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합니다. 사람들이 말씀을 떠날 때, 그들은 마귀들의 영역에 빠져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령을 따른다고 말은 합니다만 당신이 말씀을 떠나서 성령님을 따를 수는 없습니다. 말씀을 첫 번째로 두고 성령님을 두 번째로 두십시오.!"
신사도운동에서 가르치는 것 중 옳은 것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중 일부는 분명 비성경적인 것이며 바른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피터 와그너 박사님은 우리나라의 조용기 목사님과 김선도 목사님을 비롯해서 세계적으로 가장 인맥이 넓은 분입니다. 그래서 국제적으로 수많은 교회지도자들이 신사도운동에 동참하거나 혹은 비호하여 세력이 커졌고, 그 결과 성령운동이나 영성운동을 하는 교회들은 도매금으로 신사도운동을 하는 교회로 오해를 받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실제로 거짓말쟁이인 이단사냥꾼들과 일부 시기하는 목사들은 알면서도 일부러 우리 교회를 신사도운동으로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교회는 신사도운동의 가장 큰 피해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계의 굴절된 시각과 달리, 성령운동이나 영성운동을 하는 교회들이 모두 신사도운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증거 중의 하나로 미국 하버드와 영국 프린스턴에서 신학을 제대로 공부한 평택대학교 김동수 박사님은 최근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모든 성령운동은 신사도운동인가? 김동수 교수(평택대학교)
한북 복음주의권 목회자의 대표자 격인 이동원 목사는 최근 국내판 크리스채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 2013년 3월호 사설에서 개혁주의적 복음주의자들에게 애정 어린 충고를 한마디 던진다. 자신의 신앙과 신학도 내용을 따지고 보면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하면서, 하지만 개혁주의적 복음주의가 다른 신앙전통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는 보다 열린 복음주의로, 다른 교파의 신학에 대해서 보다 포용적으로 바뀌어야 함을 역설한다. 유독 한국의 개혁주의적 복음주의는 타 교파의 신학을 포용하지 못하고 정죄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는 미국의 복음주의의 대표적 신학교인 트리니티 신학교를 다니면서 열린 복음주의를 경험하고 이렇게 말한다고 했다.
최근에 한국 교회의 성령운동을 신사도운동이라는 카테고리로 몰아넣고 비판한 정이철의 『신사도운동에 빠진 교회: 한국교회 속의 뒤틀린 성령운동』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2)을 읽고 나도 이동원 목사와 같은 말을 저자에게 하고 싶다. 본서의 저자는 기독교 교파 신학의 다양성을 거의 인정하지 않고 매우 편협한 자신의 입장에서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의 모든 성령운동을 비판하고 있다. 또 성서학자가 볼 때 그의 성서해석은 아마추어 수준을 약간 벗어난 정도로, 성서 본문 본래의 정황과 저자의 신학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한 교파 혹은 자신의 도그마적 해석에 빠져 있다. 본서는 성령운동이 성경이 말하는 정도를 벗어난 사례들에 대해 정당한 비판도 포함하고 있으나, 그가 전제하고 있는 도그마는 매우 편협하며, 그의 판단은 극단적으로 단정적인 경우가 많다.
나는 본서가 주장하는 구체적인 것보다도 본서의 저자가 당연시하고 있는 그의 전제를 비판하려고 한다. 이 책의 저자는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도그마에 빠져 있다. 그것은 이런 것이다. (1) 성경의 성격은 하나님의 계시다. (2) 사도들의 역할은 계시를 기록하는 데 있었고, 계시는 사도들로 인해 종결되었다. (3) 대부분의 기적적인 은사들(치유는 예외?)은 사도들의 계시의 방편이었기 때문에 그것들은 사도들의 사라짐과 함께 그쳤다. (4) 그래서 이러한 은사들(사도, 예언자, 방언, 예언 등)이 지금도 계속된다고 하는 것은 사도들이 지금도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들을 주장하는 것은 일종의 신사도운동이다. (5) 한국에서 많은 성령운동이 위와 같은 은사들을 인정하기에 그것들은 신사도운동일 수밖에 없다.
나는 다른 책들(『신약이 말하는 방언』,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에서 이미 바울이 말하는 방언과 예언과 방언통역이 계시적 은사가 아니라는 것을 밝혔다. 그래서 여기서는 다른 문제에 집중해서 위 견해를 비판하려고 한다.
우선,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가 지금도 존재한다고 믿는 것과 신사도운동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신사도운동은 피터 와그너가 그의 책 『신사도적 교회로의 변화』(서울: 쉐키나, 2006)에서 제기한 대로 2000년 이후를 '제2의 사도시대'로 규정한 것에 근거한다. 아마도 정이철이 신사도운동이라고 몰아붙인 대부분의 인물이나 단체는 지금이 '제2의 사도시대'라고 본 와그너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신사도운동이라는 말을 너무 확대해서 해석하고 있다.
나는 성서에서 옛 언약 시대(구약시대)와 새 언약 시대(신약시대)를 명확히 구분했다고 본다(렘31:33). 그리고 신약시대는 예수시대와 교회시대로 구분된다. 요한은 그 기점을 제자들이 성령을 받는 때라고 본다(요7:39). 사실 이것들 외에 신약성경은 어떤 의미 있는 시대 구분도 하지 않는다. 사도시대와 그 이후 시대의 구분도 인위적일 뿐 성서가 우리에게 제시한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시대를 교회시대에서 따로 떼어놓은 정이철이나 이 시대를 '제2의 사도시대'라고 보는 와그너의 구분은 모두 인위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교회사적으로 이런 구분은 가능하다고 본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성경이 이것을 구분하여 그에 따른 성령의 역사가 다르게 일어난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정이철의 문제는 그의 비판이 초자연적 은사중지론의 입장에서 은사가 지금도 있다고 하는 사람들을 비판한 것이다. 그가 여러 사람들을 신사도운동의 카테고리 안에 넣어 비판한 것은 결국 은사가 지금 지속된다고 믿고 그러한 신앙을 전개한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그는 방언을 주장하는 김우헌, 치유를 주장하는 손기철, 예언을 주장하는 김하중을 비판하는데, 그 내용을 보면 사실 이들 각각이 이러한 은사가 지금도 존재한다고 믿고 그러한 신앙 행동을 한다는 데 있다. 내가 볼 때 그가 비판한 많은 내용은 그가 오순절적 신앙 행습에 익숙하지 않고, 그러한 신앙 행태를 부정하는 것에서 온 것이다. 그는 치유는 인정하지만, 방언과 예언이 현재에 지속된다고 믿지 않는다. 이러한 은사들이 지금도 계속 된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 것들이 그에게는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본서 저자의 문제는 그는 하나의 정통 신앙이 있고, 그것으로 다른 신앙 형태를 다 재단해 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는 웨슬레는 인정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이외에 알미니안적 신앙 정통에 대해서는 그는 매우 교조적으로 비판한다. 그에게 있어서 정통은 오직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을 따르는 자들로 보이며, 오순절 운동과 그것을 잇는 20세기 이후의 성령운동은 모두 비정통인 것처럼 보인다. 그에게 있어서 정통은 지금은 성경이 완성된 시대이기 때문에 성령으로부터 조명을 받아 성경을 이해하고 그에 따른 신앙생활를 하는 것, 그것만이다. 신약성경이 우리의 삶의 모델이며, 신약성경에 예수님이 약속한 성령의 역사들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그대로 일어난다고 믿는 사람들은 비정통인 셈이다. 사도행전을 우리 신앙생활의 모델로 보고 사도행전을 읽는 오순절주의는 그에게 당연히 비정통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일대학교 신학부 조직신학 교수인 미로슬라브 볼프(M. Volf)는 최근 우리말로 번역된 그의 저서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서울: 국제제자훈련원, 2012)라는 책에서 성경의 목소리의 다양성과 통일성은 물론, 본문의 다의성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 안에서도 다양성이 있고, 그 말씀의 해석 자체에도 어느 정도 다의성이 있는 것이다.
물론, 본문에 대해서 어떤 해석도 가능한 것은 아니다. 본문은 기호화된 의미이기 때문에 개연성 있는 해석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기독교인 간에 이런 정도의 합의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개신교 정통 안에는 개혁주의적 입장(장로교, 침례교 등)과 알미니안적 입장(감리교, 성결교, 오순절파) 등이 있고, 각자는 자신의 입장에서 성서를 해석하고 있다. 그 역사적 기원이나 내용으로 볼 때 모두 의미 있는 해석 전통이다.'
만약, 위와 같은 입장에서 본다면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를 인정하고 그것이 실제로 교회 사역에서 활용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을 그 자체로 비판해서는 안 된다. 이들이 그것을 성경이 말한 대러 하고 있는지 우리는 늘 감시의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만 말이다. 구소련 출신 불신자 우주비행사와 신자였던 미국 우주비행사가 우주를 여행하고 와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다른 말을 했던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한 사람의 지적 체험과 한 교파 전통의 체험은 늘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보다 열린 마음으로, 또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것을 실제로 체험하고 성령의 은사를 보면 한국에서의 성령운동에 대해서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될 것이다."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현재 교계 일부에서 조용기 목사님, (고)하용조 목사님, 저 그리고 손기철 장로님과 김하중 대사님 등이 신사도운동을 주도적으로 도입한 것처럼 오도하며 성령운동을 약화 내지는 이단시하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합니다. 동시에 많은 교수들을 중심으로 이런 움직임에 신학적으로 대항하고 파쇄하려는 움직임도 자생적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보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이 기회에 다시 한 번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우리 교회는 신사도운동을 하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런데 신사도운동을 한다고 오해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난 2011년 "큰믿음교회는 신사도운동을 하는 교회가 아닙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인터넷에 올린 일이 있습니다. 그 글을 여러분에게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성경대로 사도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를 신사도운동을 하는 교회로 오해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큰믿음교회는 신사도운동을 하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 증거로 저의 최신간 『1세기의 사도와 오늘날의 사도』 제3장 '사도의 직무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신사도운동'에 나오는 내용을 일부 여러분께 인용해드리겠습니다.
'오늘날도 사도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은 분들 중 세계적으로 가장 광범위하게 일하고 있는 분이 피터 와그너 박사님입니다. 이분은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맥과 조직을 가지고 큰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이분이 WLI를 통해 하시는 일을 흔히 '신사도운동'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 역시 사도의 존재를 인정하기 때문에 이단사냥꾼들은 우리 교회를 신사도운동을 하는 교회로 분류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도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해서 다 신사도운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피터 와그너 박사님보다도 먼저 오늘날도 사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아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믿음의 말씀운동'을 하는 분이지 신사도운동을 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사도에 대하여 피터 와그너 박사님과 많은 부분 상반되는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외에도 빌리 그래함, 오랄 로버츠, 로렌 커닝햄,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 ... 등 국제적으로 저명한 많은 지도자들이 오늘날도 사도가 존재한다는 것에 동의하지만 그분들 역시 신사도운동을 하는 분들은 아닙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이는 저를 가리켜 '신사도운동의 선두주자'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 증거로, 피터 와그너 박사님이 신사도운동에 대해 정리한 대표적인 책이 『신사도적 교회로의 변화』라는 책인데, 저는 그 책의 내용에 동의하지 않을 뿐 아니라 몇 가지 점에 있어서는 매우 위험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권하지 않고 있습니다. 더욱이 최근에 저는 우리 교회 주보에 교회의 정체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명시했습니다.
큰믿음교회는?
하나, '말씀운동'을 하는 교회입니다.
즉,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3:15)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교리대로가 아니라 '성경의 문맥'(행17:11)과 '성령의 조명'(요일2:27)에 의지하여 성경대로만 설교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교회입니다.
둘, '성령운동'을 하는 교회입니다.
즉, 교회는 '예수님의 몸'(엡1:23)으로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해야 함으로, 예수님이 성령의 기름부음에 의존하여 사역하신 것처럼(행10:38) 성도들 역시 성령 충만을 받고 자기의 은사를 발전시켜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하고 그보다 큰일도 할 수 있도록 돕는 교회입니다(요14:12).
셋, '신부운동'을 하는 교회입니다.
즉, 단순히 '성령운동'을 하는 교회가 아니라 '성경'(요5:39)과 '성령'(요15:26)이 증거하는 것이 예수님이므로, '예수님에 관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요17:3, 빌3:8) 알고, 그분을 사랑하고 교제하고 본받고 동행하도록 오직 예수님께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교회입니다(요3:25-30).'"
지금까지 제가 쓴 60여 권의 책 중에 우리 교회의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터』라는 책입니다. 그 책을 꼭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우리 교회가 결코 신사도운동을 하는 교회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큰믿음교회는 절대로 신사도운동을 하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거짓 소문을 믿고 우리 교회를 오해하는 분들이 한 분도 없길 바랍니다.
한편, 우리 교회가 신사도운동을 하거나 신사도운동을 지지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신사도운동을 이단시하는 직업적인 이단사냥꾼들이나 종교적인 목사들이 판단에 동의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신사도운동에 문제가 있지만 이단이나 사이비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전략적 수준의 영적 전쟁을 비롯해서 몇 가지 잘못된 생각과 견해를 갖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신사도운동에 대한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시각과 마음가짐이 가장 정의롭고 균형 잡힌 것이라고 보며 그분의 판단에 동의합니다.
"오늘날 영적 전쟁은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 방법으로 너무 강조하는 주제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몸에서 영적인 전쟁과 귀신들에 대하여 가르쳐주고 있는 것에는 성경적으로 잘못된 것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탄과 그 계략을 성경적으로 다루는 것을 알기 위하여 말씀을 공부하는 것이 유익합니다."
이 글에서 해긴 목사님은 신사도운동의 잘못을 지적하면서도 그들을 향해 이단이라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말했습니다. 한 형제라는 것입니다.
"어떤 선하고 의도가 좋은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기도회에 가서 마귀와 기도로 싸우려고 합니다. 우리는 마귀와 전쟁을 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로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한 자리를 잘 지키고 강화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철저히 패배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해긴 목사님은 어떤 선하고 의도가 좋은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신사도운동 지도자들의 선한 의도와 장점을 인정합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영적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이 하는 어떤 일들로 인하여 한쪽으로 치우치게 됩니다. 영적 전쟁은 성경적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주 훌륭하고 사랑스런 그리스도인들도 성경적이 아닌 극단적인 일을 함으로 극단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많은 이런 극단적인 것들조차 그들이 말하는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열거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신약성경에서 읽는 것들과 일치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스럽지만 잘못 인도된 사람들은 그들이 '전쟁하는' 방언과 같은 극단적인 기도를 통하여 그 도시와 그 나라의 모든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실, 온 도시와 나라에 있는 귀신의 견고한 진을 '전쟁하는' 방언이나 마귀에게 소리를 지름으로 무너뜨리는 것에 대한 직접적인 성경적 근거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말하는 것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여기서 해긴 목사님은 신사도운동 지도자들을 아주 훌륭하고 사랑스러운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칭합니다. 저는 해긴 목사님의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신사도운동 진영의 피터 와그너나 신디 제이콥스 같은 분들은 정말 훌륭하고 사랑스러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물론 안타깝게도 그 밑의 미국과 특히 한국계 지도자들 중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러 있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칼빈주의는 그릇된 것이지만 이단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그들도 사랑하시고 사용하십니다. 은사중단론 역시 잘못된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런 견해를 가진 사람들도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왜 신사도운동을 하는 분들을 사용할 수 없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분들도 사랑하시고 그들을 통해서도 일하고 계십니다. 물론 그분들이 비성경적인 것만큼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겸손히 자신들의 오류를 깨닫고 고친다면 더 효과적인 사역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로 그분들이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신사도운동에 대해서 끝으로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음을 참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슬프게도 신사도운동은 전략적인 수준의 영적 전쟁 관련 부분에서만 성경을 벗어난 것이 아닙니다. 또 다른 주제에서도 성경에서 심각하게 벗어났습니다.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신사도운동의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인 척 피어스는 '히브리적 관점에서 성경보기'에 매우 깊이 심취해 있는 분입니다. 또한 한국 WLI에서 집회를 인도한 바 있고 WLI KOREA에서 출판한 『너 자신을 자유케 하라!』의 저자인 로버트 하이들러 역시 '히브리적 관점에서 성경보기' 사상에 깊이 물들어 있는 분입니다. 그분은 『메시아닉 교회 - 언약의 뿌리를 찾아서』라는 책을 썼고 이 책을 WLI KOREA에서 번역 출판했습니다. 그리고 척 피어스가 이 책의 머리말을 썼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제가 총회장으로 있는 부흥 교단에 속해 있다가 '히브리적 관점에서 성경보기'에 미혹되어 교단을 탈퇴한 한 목사님이 저에게 꼭 읽어보라고 신신당부하며 선물한 책입니다. 그럴 만큼 이 책은 '히브리적 관점에서 성경보기' 사상의 교과서와도 같은 책입니다. 여러분, 굳이 읽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략 목차만 보아도 이 책이 문제가 있는 책임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이 책 부록의 목차입니다.
"부록 1. 유대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부록 2. 초대 교회의 유대성
부록 3. 성경의 절기들을 기념하는 법
1부. 유월절
2부. 오순절
3부. 나팔절
4부. 속죄일
5부. 초막절
6부. 절기 날짜(2006-2020)책 찾을 것"
이처럼 이 책은 "성경의 절기를 기념하는 법" 하면서 유월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일, 초막절을 어떻게 기념해야 하는지를 기술하고 있고, 해마다 바뀌는 절기날짜까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른 것입니까? 절대 아닙니다. 그 증거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라디아서 4:10-11)
물론 '히브리적 관점에서 성경보기'의 추종자들은 율법이 폐해졌다는 성경말씀들이 모세의 율법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잘못 해석하고 가르친 전통들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한 작위적인 구분일 뿐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나오는 날과 달과 해와 절기가 유대교가 아니라 이방 종교의 절기라고 주장하지만 그것 역시 억지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주장에 미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이들의 주장과 달리 율법이 폐해졌다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라디아서 3:19)
여러분 예수님이 오셨습니까? 안 오셨습니까?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폐해졌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의 절기를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히브리적 관점에서 성경보기'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성경에서 찾아내어 인용하는, 성경의 인물들 특히 바울이 안식일이나 율법의 규례를 지킨 것에 대한 기록들이 나오는 것일까요? 저는 그런 부분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고 때로 혼란스럽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바울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밝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적 관점에서 성경보기'가 정말로 이단적인 주장임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히브리적 관점에서 성경보기'라는 그릇된 이론에 한 사람도 미혹되는 일이 없도록, 또는 이미 미혹된 사람들이 깨닫고 돌아올 수 있도록 그것을 여러분에게 소개해드리길 원합니다.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고린도전서 9:20-21)
이 구절을 자세히 보십시오! 바울은 율법 없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구약의 유대인이나 '히브리적 관점에서 성경보기'를 추종하는 사람처럼 모세의 율법 아래 있는 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였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히브리적 관점에서 성경보기'가 그릇된 것임을 확연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구약의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그들은 모세의 율법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모세의 율법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모세의 율법 아래 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적 관점으로 성경보기'를주장하는 사람들 역시 모세의 율법 아래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저는 왜 '히브리적 관점에서 성경보기'의 추종자들이 탈선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그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20)라는 구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바울은 율법 아래 있지 않았지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때로는 율법 아래 있는 것처럼 행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그런 부분을 읽고 '히브리적 관점에서 성경보기'를 창안해낸 사람들이 지금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그릇된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19세기 최고의 신학자로 불리는 찰스 하지는 자신의 주석에서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유대인들에게는 그가 유대인과 같이 되었다. 즉 그는 유대인들이 행동하는 것과 같이 행동했으며, 그들의 관습들을 따랐고, 율법을 준수했는데, 그는 이러한 것들을 편의의 문제로서 행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순응에 대해, 그가 유대인의 관례들의 준수를 필요한 것으로 생각했다는 추론을 낳게 될 우려가 있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든 단호하게 순응을 거부했다.
앞서 언급했던 디모데와 디도에 관련된 그의 행동은 그가 의지했던 행동의 원리를 나타내준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의 양보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하여 디도에게는 할례를 베풀기를 거절했는데, 할례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문제로 그것이 요구된 까닭이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의 의견들과 관습들에 대한 모든 양보의 경우에 있어서 신중히 지켜야 할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양보된(또는 용인된) 논점이 하찮은 문제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 자체가 악한 것이라면 무엇에든지 아주 조금이라도 결코 양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 바울의 행동은 인간들의 죄들이나 또는 그릇된 종교들의 미신적인 관례들에 순응한 사람들의 행동과는 전혀 반대였다.
둘째는 이러한 양보가. 실제로는 하찮은 것이지만 도덕적 의무의 문제가 될 수 있는 어떠한 용인도 내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바울이 유대인들의 친근감을 얻기 위해 행했던 행동의 정도는 사도행전 21:18-27에 기록된 내용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중 사도행전 21장에 대해서는 약간의 부연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사실을 부인하면 안 됩니다. 성경에 보면 실제로 바울이 유대인처럼 행한 것이 나옵니다. 즉 모세의 율법 아래 있는 자처럼 율법의 일부를 지킨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안식일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회당을 찾은 것도 그중 하나이고, 특히 사도행전 21장 18-26절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대가 온 것을 들으리니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
'히브리적 관점에서 성경보기' 추종자들은 이런 성경구절들을 치고 들어옵니다. 그래서 영혼들을 미혹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유대 당국자들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복음진리를 타협한 것도, 믿는 자들이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자세히 보시면 이런 조치가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뒤에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로 보건대 이것은 유대인 신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방인 신자들과 무관한 말씀입니다. 절대로 우리 같은 이방인 신자들을 위한 조치가 아닙니다. 메시아닉 쥬들은 구약의 절기와 규례들 중 복음에 위배되지 않는 것들을 구약의 방식 그대로가 아니라 복음적인 방식으로 지킬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이 그 증거입니다. 유월절을 예로 들면, 유대인들에게는 유월절이 우리나라의 광복절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유월절 어린양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고 그날을 복음적으로 지키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방인인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유월절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성찬식을 행하는 것으로 족합니다. 굳이 유월절을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같은 이방인인 신자들도 메시아닉 쥬처럼 유대교의 절기나 규례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 점을 기억하고 여러분 중에 '히브리적 관점으로 성경보기'에 미혹되는 분들이 한 분도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신사도운동 진영의 지도자들도 속히 분별력을 발휘하여 내부에 깊숙이 침투하여 '히브리적 관점에서 성경보기' 사상을 퍼트리는 인사들을 책망하고, 돌이키지 않으면 결별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사도운동이 더 이상 이단적인 사상의 숙주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