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여성화가 나혜석, 소를 사랑한 이중섭, 세계적 미술가 이응노,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유영석,
아이의 낙서 같은 미술가 장욱진, 한국에서 가장 비싼 화가 김환기, 국민화가 박수근,
비디오 예술의 선구자 백남준, 돌조각을 예술로 만든 모노파 화가 이우환 등
우리나라 미술 거장을 방구석에서 만난다면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나혜석(1896-1948)
수원 부잣집의 둘째 딸로 태어나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수석 졸업,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 서양학과에 입학
유학시절 만난 첫사랑 최승구가 전 부인과 이혼하지 못하고 생활고와 폐병으로 죽자 충격을 받았고
3.1 운동과 관련하여 옥고를 치르던 중 아내와 사별한 변호사 김우영의 도움을 받고 그의 청혼을 받아들임
일과 육아를 병행하던 혜석은 서울에서 유화 개인전을 열고 조선미술전람회 1회~6회 입선과 특선을 차지하는 등
성공하였으나 슬럼프를 벗어나기 위해 남편과 함께 유럽여행을 갔다가 남편은 베를린에서 법학공부를
혜석은 파리에서 미술공부를 하던 중 그곳에 머물던 최린과 친밀하게 지낸 일이 남편의 귀에 들어가 별거하게 됨
생활이 궁핍해진 혜석은 최린에게 경제적 도음을 요청하면서 결국 이혼당하고 쫓겨나서
다시 미술학사를 열었으나 외도로 이혼당했다는 소문이 퍼져 폐업하고 왼팔에 수전증까지 생김
39살에 문예지[삼천리]에 이혼고백장을 기고하여 이혼의 과정이 밝혀져 최린에게 합의금을 받아
수원에 집을 마련하고 <화령전작약>을 그렸으나 세상의 싸늘한 시선만 돌아옴.
이 사건으로 혜석은 절과 양로원을 떠돌다가 행려병자로 사망함
이중섭(1916~1956)
평안남평원군 대지주의 가정에서 태어나 15살에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입학
서양화가 임용련-백남순 부부 미술교사와 선배인 백석의 영향을 받아 소를 사랑한 중섭
1937년 도쿄의 문화학원에 입학하여 마사코와 CC가 되었고 3년간 꾸준히 그림엽서를 그려 보낸다
1943년 징용을 피해 원산으로 돌아오자 같은 해 5월 마사코(이남덕)가 한국으로 들어와 결혼
두 아들을 얻고 한국전쟁으로 인해 제주도로 피난 가서 단칸방에 4 식구가 살다가
부산 피난 생활에 아내는 폐결핵, 두 아들은 영양실조에 걸리자 가족을 일본으로 보낸다
종이 살 돈이 없어 담뱃갑 속 은박지에 <도원>을 그리고 편지화를 보내다가
일 년 후에야 일주일자리 선원증을 구해 가족을 만나고 와서 통영에서 미친 듯이 그림을 그린다
1955년 1월 개인전을 준비하여 서울 미도파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어 그림 절반이 판매되었으나
작품값을 지불하지 않아서 실패하고 작품을 나눠주거나 불태우고 우울증과 거식증에 영양실조로
정신병원을 전전하다가 무연고자로 생을 마감함
이응노(1904~1989)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으나 신식학교에 밀려 아버지의 서당이 쇠하자 19살에 무작정 상경.
영친왕의 서화 스승이며 황실 전속 사진가로 상업화랑을 운영하던 해강 김규진을 15번 찾아가 제자가 됨
허드렛일로 시작하여 서양화를 배운 지 3년 만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청죽>으로 입선.
전주로 내려가 생활을 위해 <개척사>라는 간판점을 차리고 대성황을 이루자 동생에게 맡기고
일본 가와바타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하여 자신의 동양화 세계를 구축하게 됨
<황량 1942>은 실제 당시 한반도의 혼란한 풍경을 묘사한 것임
55세에 유럽으로 공부를 하러 갔으나 4.19 혁명으로 해외송금이 금지되어
신문 잡지 폐지를 사용한 콜라주 기법을 적용 문자추상으로 한글을 그림에 적극 활용하여 10년을 활동하다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으로 돌아왔으나 북한에서 아들 사진을 보여주며 회유하여 데려가려는 속셈을
거절한 일로 인하여 공항에서 바로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3년간 옥살이를 하게 됨
1969년 66세에 프랑스와 독일 등 세계 각국 예술기관 단체의 탄원서 제출 덕분에 2년 만에 석방되었으나
한국에서 활동을 하지 못하고 1983년 프랑스에 귀화함.
1989년 고국에서 작품전시회를 열었고 우리말로 한국화를 가르치다 86세에 파리 작업실에서 심장마비로 사망
유영국(1916-2002)
넓은 땅과 50t급 선박과 3개의 양조장을 경영하는 집안에 태어나 일본인 담임의 부당함에 19살에 자퇴하고
도쿄 문화미술학원에 입학하여 이중섭을 만나 추상주의에 취하나 일본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그림을 거부하고 절필
고향 울진에 돌아와 죽변항에서 선주로 큰돈을 벌게 되나 서울대 서양화가 김환기의 전임강사 제안을 수락하며
신사실파를 만들어 활동함. <직선이 있는 구도>처럼 추상세계에 한국의 자연을 담기 시작함.
한국전쟁의 발발로 다시 울진으로 돌아와 피난 때 실고 온 갱지를 팔아 종잣돈을 마련하여
막걸리와 소주 <망향>을 만들어 큰돈을 번 후 화실을 차리고 미친 듯이 그림에 매진하나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는 심근경색과 뇌출혈로 쓰러져 운명함
장욱진(1917-1990)
유영국과 고교동창인 장욱진은 그림 그리는 것을 반대하던 집안에서 고모에게 매를 맞고
성홍열과 신장염을 앓다가 치료를 위해 수덕사에서 지내는 동안 나혜석과 함께 그림을 그리며
이때 들은 칭찬에 힘입어 22살에 조선학생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을 받고
이듬해 도쿄 제국미술학교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신사실파(김환기, 유영국, 이규상, 이중섭)에서 활동
한국전쟁으로 부산 피난시절 술에 빠져 살다가 전쟁이 끝나고 혜화동에 서점을 차리고
서울대 미대 대우 교수로 일했으나 6년 만에 그만두고 덕소 강가(남양주시 삼패동)에 거쳐를 마련하여
작품활동을 하다가 덕소의 개발로 수안보 산촌에서 살았다
김환기(1913-1974)
대지주의 삶과 아버지가 정해준 아내와 자식 셋을 두고 니혼대학 미술부에 입학하여 25살부터 그림을 시작
1942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소작인들에게 땅문서를 나눠주고 아내에게 재산을 넉넉히 주고 이혼함
시인 노리다케의 소개로 변동림(이상의 아내, 김향안으로 개명)을 만나 1년 가까이 편지를 주고받다가
양쪽 집안의 반대에도 1944년 결혼하여 종로에 화랑을 열고 백자의 아름다움에 빠짐
1955년 향안이 먼저 파리로 가서 타진하여 9개월 후 베네지트화랑의 지원과 집을 담보로 자금을 마련하여
전시회를 열어 호평을 받음. 3년 동안 활동하고 1959년 고국으로 돌아온 후에 그림[달 두 개] 속에 점이 나타나기 시작함
51세에(1963년) 홍익대 학장을 내려놓고 다시 미국 뉴욕의 록펠러재단의 지원을 받아 전시를 준비했으나
화랑 주인이 작품 30점을 가지고 잠적하여 향안은 백화점 판매사원으로 일을 시작한 지 8년 만에
환기의 점화는 뉴욕 미술계에서 고가로 거래되기 시작하였으나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져
1974년 척추 수술에 성공하였으나 침대에서 낙상하여 세상을 떠남
1992년 향안은 서울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을 열고 2004년 환기 곁으로 감
박수근(1914-1965)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나 8살 때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어머니가 유방암으로 사망하여
중학교 진학을 하지 못하고 집안일을 하며 밀레의 <만종>을 보며 목탄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함
1940년 평안도청에 다니며 결혼을 하고 독학파 젊은 화가의 모임인 [주호회]를 만들어
경주 남산의 석물을 보고 감동하여 목판화에 관심을 두고 활동함
한국전쟁으로 혼자 피난 갔다가 2년 후에 아이들과 재회하고 미국 PX에서 초상화를 드리며 생계를 유지
주로 평범한 사람들을 독특한 개성을 화폭에 담던 중 미국 미술애호가들이 해외 전시나 책자에 소개하며
널리 알려짐
그러나 과음으로 간경화에 시달리다 백내장 수술을 하던 중 시신경이 끊어져 왼눈이 실명하고 51세에 세상 떠남
천경자(1924-2015)
공부는 낙제였으나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여 고등학교 물리시험에 펌프의 원리를 설명하라는
문제에 펌프로 물 긷는 여인을 그리는 창의적 답안 제출
반대하는 아버지 앞에서 실성한 연기를 하여 일본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진학하여 1년 만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조부]로 18세에 입선함
졸업 후 입국할 때 도움을 받았던 유학생 이철식과 결혼했으나 수학교사를 그만둔 이철식은
아내의 근무지인 전남여고를 찾아와 상습으로 돈을 요구하는 한량이 됨
이에 실망하여 신문기자인 유부남 김남중과 사랑에 빠져 20년간 관계를 유지하게 됨
1950년 한국전쟁에 남편은 행방불명되고 김남중은 군에 입대하고 여동생이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자
뱀을 탐구하여 뱀 35마리가 등장하는 [생태]를 그려 대한미협 전에 출품하나 자극적이라는 이유로 제외되어
다방 주방에 방치되었으나 시인 오상순에 의해 입소문이 퍼져 유명세를 타게 되고
김환기의 눈에 띄어 홍익대 동양화과 교수가 됨
일본풍이라는 오해에도 꿋꿋이 작품활동을 하며 자신의 독창적 회화를 구축하가다
김남길과 관계를 청산하고 교수직도 내려놓고 세계일주(1969-1999)를 함
1979년 타히티를 다녀오고 원시적 화풍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나의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1977]의 고독한 울음소리가 [나의 슬픈 전설의 49페이지]에서는 침묵이 된다
첫댓글 유용하게 잘봤어요
방구석 미술관2..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