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타 니파타 6-94 자림 가사단상] - 뱀의 품
6. 파멸의 경
94. [하늘 사람]
진실하지 않은사람 사랑하고 진실한이
사랑하지 않으면서 진실하지 않은사람
하는짓을 즐긴다면 이건정말 파멸의문
----2567. 10. 23 자림 심적 합장
[숫타 니파타 6-94 자림 시조단상]
선량하지 않는이 좋아하고 선량한이
좋아하지 않으며 선량하지 않은이
하는 일 즐기면 그것은 파멸의 문
●●●더하는 말○○○
세상사람들이 흔하게 표현하는 진실한 사람,
선량한 사람, 아름다운 사람은 우리가 미인대회의
진,선,미에 대한 한글 옮김이라면 어쩌면 미인대회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중심으로 판단하는 일종의 판단
인데 아름다움이 3등으로 일등은 진실한 여성에게
2등은 선량한 여성에게 점수를 더 주며 상을 준다.
그러나 이러한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기준은 과연 옳을까?
그리고 무슨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것도 아니기 때문에
결국은 어떤 시대에 어떤 부류의 여성을 더 선호하는가와
심사위원들의 나름 합의 본 기준의 점수에 따라 좌지우지
되니 어쩌면 아름답다는 기준 자체에 점수나 등수를 주는건
무의미하다.
그런 미인대회가 여섯 대륙을 합해 국제미인대회까지
하는데 심사기준 자체나 운영위원의 운영원칙에 따라
들쭉날쭉하니 비판과 비방까지 받고나면 관중들은
저 사람 아름다운데 한 사람은 꼴지가 되고 피부색이나
다른 조건으로 한 번도 미인대회에서 일등의 가능성이
없는 사람이 일등하고 그 다음은 옛날 약간 왕따 당한
듯한 지역의 사람이 이등으로 되는 등 아름다움의 심사
기준이 운영등이 오락가락하여 미인대회가 아닌 눈치
보기대회란 비평까지 받기도 한다.
이런 장황한 말을 붙이는 이유는 번역어로 등장한
진실한 사람, 선량한 사람의 번역어를 전재성 박사는
여러가지 논거로 참사람으로 옮겼는데 필자는 동의를
하지만 좀 더 보편적이고 평범한 언어로 원어의 뜻에
위배되지 않는 진실한 사람과 선량한 사람을 택하였기
때문에 설명을 덧붙인다.
필자는 진실한 사람, 선량한 사람, 아름다운 사람의
세 부류를 만약 점수나 등수를 꼭 따진다면 [물론
그럴만한 절대 기준은 아니지만] 각 100점 만점에
300점 만점인 사람은 바로 붓다가 아닐까 하며
붓다는 성스러운 사람으로 표현하는 것이 어떨까하는
의미에서 이다.
아름다움은 표면적인 부분이라면 진실과 선량은
풍기는 인상과 그 사람의 배려나 마음 즉 보이지
않는 복과 공덕의 영향이 어떻게 나타날까이며
그러한 부분이 지혜까지 드러나는 것을 세상에서는
기준으로 보는듯하나 불교에서는 그 사람의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고, 교만하며, 잘못된 견해가 얼마나
많은지의 유무에 따라 그것을 결정하는 기준으로
본다면 초기불교는 바로 사향사과[네 종류로 향하고
네 종류의 결과[열매]]라는 그 사람의 수행단계를
점검하는 기준이 경전에 수록되어 있으며 대승불교
에서도 보살의 십지[열가지 보살의 수행단계의
기준]가 있으니 위에 분류한 300점 만점 기준으로
보아 판단하기는 어렵겠지만 수행 자체에도 성스러운
단계에 진입한 분들에게도 기준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좋아하고 사랑할 정도 수준의 사람이라면
자기 자신의 욕망이니 다른 마음이 없는 순수한 마음
이라면 성스러운 마음 아니고는 분명 완전하게 믿기는
어렵기 때문에 대승불교의 보살의 일곱번째 물러나지
않는 수행단계[불퇴전지]나 초기불교의 최상의 단계인
성자의 단계인 아라한 정도의 수준이라면 흔들림 없는
사랑과 좋아요가 가능할 수 있으나 수행이 없거나
부족한 범부의 소견으로 좋아요 사랑해요가 누구의
그림이나 글 댓글을 보고 좋아요, 사랑해요는 누르는
것과 같다면 참으로 턱도 없는 기준이 되니 누가 그것을
믿고 따르겠으며 진리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는데 어떻게
진리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으니 시의 내용으로 들어가
이러한 진실하며 선량하고 양심이 있는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한다면 그는 파멸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 단계 더 높인다면 진실하고 선량하며
올바르고 양심이 있는 갖춘이가 만점을 맞는 마음
닦음을 통해 성스러운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다면
그러한 성스러운 분이 진정으로 사랑받고 좋아하며
따라야하는 분이기에 25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모두의
스승 석가 세존 붓다는 우리 불자들에게 이러한 메세지를
이 시를 통하여 전하고 계시지 않을까 사유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