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시대(복습)
나폴레옹 전쟁(1803년 ~ 1815년)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 정부가 혼란과 군사 반란을 진압하면서 1799년에 통령정부의 첫 통령이 되어 권력을 잡는다. 이후에 외국과 여러 번의 전쟁을 치룬다.
1805년 오스트리아 제국과 러시아 제국은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재개했고, 나폴레옹은 이에 맞서 1805년 12월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바다에서 영국은 1805년 10월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스페인-프랑스 연합함대를 격파해 나폴레옹의 영국 침공 계획을 무산시켰다.
프로이센 왕국은 프랑스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우려해 1806년 10월 프랑스와 전쟁을 개시했지만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패배했고, 1807년 6월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러시아 제국군도 패배시켰다.
이후 틸지트 조약이 체결되었지만, 평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1809년 전쟁은 재발했고, 바그람 전투에서 연합군은 패배했다.
영국을 고립시키려 대륙 봉쇄령을 발표하고, 1808년에 스페인을 침공해 스페인 국왕까지 되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영국의 지원을 받고, 1814년까지 이베리아반도에서 프랑스를 축출했다.
이후 영국을 비롯한 연합군은 프랑스를 침공해 1814년 3월 말 파리를 함락시켰다. 연합국은 1814년 4월 엘바섬에 나폴레옹을 유폐시키고 부르봉 왕정복고를 단행한다.
나폴레옹은 1815년 2월 섬을 탈출해 프랑스에 대한 통치권을 회복했다. 연합국은 연합하여 프랑스와 싸워 1815년 6월 워털루 전투에서 승리한다. 이후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섬으로 유배를 간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영국이 세계사를 주도하는 세력이 된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대 스페인 독립 운동이 전개된다.
이태리와 독일의 통일
그리스 독립 전쟁
===> 전쟁을 통해 급진적이고, 새로운 군사 전술과 전투방식이 나타난다.
워털루 전투
대륙봉쇄령에 러시아의 고통이 더 심해지자 러시아가 봉쇄령을 어긴다. 이것을 이유로 1812년 나폴레옹이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공격한다. 퇴각하면서 러시아군은 도시와 곡식에 불을 질른다.(초토화 작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겨울이 되자 프랑스군은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순간을 기다린 러시아군은 철수하는 프랑스군의 뒤를 쫓아 공격하여 궤멸시켰다.
결국 1814년 4월 16일 퐁텐블로 조약을 체결한 뒤 지중해의 작은 섬인 엘바 섬으로 추방되었다. 엘바 탈출 후, 워털루 전쟁에서 패배한 나폴레옹을 남대서양의 한가운데에 있는 세인트헬레나에 유폐시켰다.
-->가장 큰 결과는 나폴레옹의 몰락이다.
몰락 이후의 유럽은
1. 유럽의 보수주의자 — 계몽사상과 프랑스 혁명의 확산을 막는 것이 중용했다.
2.그리스 독립 전쟁
러시아가 같은 정교국가라고 지원 – 사실은 남쪽 바다로 진출하려는
3, 유럽의 낭만주의자들 — 그리스 독립을 지원(고대 그리스 문화를 흠모하여)
4. 민족주의와 자유주의가 성장했다.
각국에 미친 영향
1) 영국
나폴레옹 전쟁의 승전국이 되었다. 이 기간 동안 프랑스 중심의 연합 함대를 격파함으로써 유럽의 해양강국 중 한 곳으로 발돋움하게 되었으며, 식민지를 확보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유명한 해전 – 트라팔가 해전)
막대한 식민지와 그곳에서 나오는 자원을 바탕으로 영국 경제는 크게 성장할 수 있었고, 명예 혁명 이후에 정치적인 안정도 보장됨에 따라 영국은 대영제국으로써의 기틀을 다질 수 있었다.
또한 이는 영국이 산업혁명의 으뜸 주자로 나서는 데도 큰 기여를 하게 된다. 한편, 나폴레옹 전쟁 이후의 자유주의가 영국에도 영향을 끼쳐 차티스트 운동과 선거법 개정 등이 영국에서 실시되었다.
프로이센
( 여기의 내용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및 독일 연방입니다.)
1830년대의 프로이센. 이 때 프로이센은 독일 연방의 맹주였다.
프로이센은 1815년 이후 라인 동맹의 영토 중 상당한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강력한 육군이 탄생하게 되었다.
프로이센이 영토를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을 대체한 독일 연방에서 프로이센은 맹주가 되었다.
19세기 후반 유럽의 강국으로 성장하게 되었으며 독일의 통일을 주도하는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 속에서 오스트리아 제국과 주도권을 두고 경쟁하기도 했으며, 덴마크와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은 나폴레옹 전쟁 기간 동안 일시적으로 프랑스의 동맹국이 되었으나, 오스만 제국 및 카자르 왕조와 전쟁을 벌여 동맹을 위태롭게 하기도 했다. 카자르 왕조와의 전쟁을 통해 오늘날 타키스탄과 조지아 전체와 아제르바이잔의 대부분, 아르메니아 북부 일부분을 점령하여 옛 소련의 국경의 기반을 닦는데 성공했다.
한편, 러시아 제국은 오스만 제국, 핀란드, 스웨덴 등과도 전쟁하면서 영토를 넓혔다.(오늘의 소 연방이란 이름으로) 러시아 제국은 나폴레옹 전쟁 종전 당시 유럽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보유한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농노제를 실시하고 있었던 국가였기 때문에 여전히 전근대적인 체제가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는 알렉산드르 2세의 농노 해방령으로 완화된다.
러시아 제국은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에서 세력을 넓혔으며, 이때부터 남하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오스만 제국과 카자르 왕조, 청나라, 조선 등을 압박해오기 시작한다. 이는 영국과 프랑스를 크게 자극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군사적 변화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의 군사제도는 용병에서 국민군(상비군) 제도를 확립했다.(프랑스가 국토를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먼저 시작했다)
전쟁 말기 각국도 국민군의 성격이 강해진다. 국민군으로 이루어진 군대의 규모는 계속 확대되었다.
전쟁 기간 중 영국은 최대의 무기 생산국이 되어 동맹국에 무기 제공을 실시하였다. 프랑스는 제2위의 무기 생산국이었다. 국민군의 병사들은 강한 애국심을 갖고 있고, 단결력도 있었다. (탈영병이 확 줄었다고 한다.)
군사 기술
보병부대는 정밀하게 겨냥하지 않고, 적을 향해 탄막 사격을 가했다. 포병은 그때까지 보병의 엄호만을 맡았기에 기동성이 낮은 부대였으나, 프랑스군은 기동성을 높여(포에 바퀴를 달아 말이 끌도록 하여-오늘의 자주포) 독립된 부대로 편성하였다. 나폴레옹은 포탄의 사이즈를 표준화하여 포병 부대 간의 융통성을 쉽게 하였다.
병참은 현지 조달에 의존했다. 인구밀도가 높은 중앙 유럽에서 손쉽게 조달이 되나, 인구밀도낮은 러시아나 이베리아반도에서 문제가 생겼다. 원거리 사이의 통신에는 수신호 통신이 도입되고, 전쟁 기간 내내 사용되었다.
열기구를 이용한 공중정찰이 1794년 6월 26일 블류스 전투에서 처음으로 실용화되었다.
나폴레옹의 전술
나폴레옹은 군의 기동성에 뛰어났다. “최고의 군대는 싸우는 부대보다는 빨리 걷는 부대이다.”라고 나폴레옹이 말했다.
***이 시기에 낭만주의가 대 유행을 하면서, 오늘까지도 영향이 크므로
조금 상세히 공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