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겨울 들어 처음으로 감기 몸살에 걸렸다.
월요일 "아웃레이지" 시사회를 다녀온 이후로 증상이 발발했으니,
마치 기타노 타케시가 신작에 대한 악평을 한 나에게 바이러스를 발사한 느낌이다.
지금 머리는 웅웅 울리고, 손가락은 자판 치기를 거부하고
온 몸은 쿡쿡 누르면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런 몸으로 학생 11명을 잘 교육시켜 집으로 돌려보내고 영화를 다시 찾는다.
매번 짧게 쓴다면서도 필요 이상으로 난잡한 쓰레기들을 배출했는데,
이번에는 정말 힘이 딸려서 제대로 영화글 못 적겠다.
여튼 본 영화들에게 대한 최소한의 예의로 일단, 쓴다.
1. 더 문 Moon(2009) : 던칸 존스
= 남성 1인의 버디 무비, 모순율의 자기 해방
나는 그를 처음 만났다.
작년에 개봉한 미국 SF영화 중 결말이 다소 아쉽지만,
나름 만듬새가 돋보였고, SF의 걸작리스트에 올릴만한 두 편이라면
이미 말씀드린 바 있는 "디스트릭트 9"과 더불어 이 작품 "더 문"을 거론한다.
"디스트릭트 9"이 외계인과의 근접조우와 식민지 활용을 통해 현실 정치론을 거들었다면,
"더 문"은 가능한 차분하고 조용하게 클론의 존재-인식론과 탈피를 거론한다.
이제 복제인간-클론이라면 충분히 선배들이 경악의 묵시록적 시선으로 설파한 바 있지만,
신인 감독 던칸 존스는 아버지 데이빗 보위의 영감 어린 음악처럼
지구와 달을 자본가와 노동자로 나누고, 우리 내부의 식민지들이 어떻게 제한 해제를 실천하는지 전한다.
이러한 SF 철학론은 일찍이 "솔라리스" 이후로 감각과 진실의 인식론으로 우리를 인도한 바 있거니와
본편은 과감히 클론-동성애의 성정치학으로 들어가지는 않지만,
모순율의 파괴('나'이면서 동시에 '내'가 아닌 '나의 존재)를 제한된 공간과 3년이라는 시간에 담아넣는다.
힘없는 부실남 루저의 코미디 배우로 알려진 샘 록웰의 1인 2역이 빛나는 시퀀스는
그가 허위로 발송된 이식된 기억 속 여인의 전자영상물을 만날 때지만,
한 쪽은 쓰러져가는 과거의 '나'로서, 다른 한 쪽은 현재이자 미래일 수 있는 '나'로서
동시에 작용하는 상상계와 상징계 양쪽을 아우르는 연기로서도 평가받을만 하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067C71F4CF7228528)
그럼에도 저 장면 속 '사랑'이라는 한글의 부조리한 의미 이면을 비롯하여
극이 종결된 이후 지구 너머로 들려오는 정치적인 수사 어구는 오히려 극의 재질을 떨어뜨린다.
수많은 클론이 이전의 클론을 불태운 바로 그 자리의 지하에서 발견되는 도식도 영민해보이지는 않는다.
어쩌면 "더 문"의 장점은 극의 분위기가 정적이고 차분하여
결코 클론의 비애를 스릴러와 폭력으로 포장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들은 바로 선선히 서로의 존재를 파악하고 원본 인정 투쟁을 하지 않고
경험자가 후임에게 베풀 듯 탁구를 치는 위 장면처럼 1인 버디무비를 꿈꾼다.
SF 영화가 따뜻하게 느껴졌던 경험은 참으로 오랫만이지 않은가?
언제나 SF 장르물은 무언가 밝혀내야 할 비밀이 존재하고
그것을 위해 주인공들이 전력투구를 해야하는 달리기였는데,
( 굳이 허접한 "아일랜드"를 떠올릴 필요도 없겠다. )
본편은 모순과 반복의 존재를 곧바로 긍정하고 어떻게 고리를 끊을 것인지를 공모하는 수순에 이른다.
그것은 단순히 동일한 서사의 과격성의 차이가 아니라 우정의 정치학이라고 말해도 좋을 상호인정에서 온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164E51F4CF7228432)
새로운 에너지원으로서 무인지경의 달 광석의 약탈주이자 은밀한 클론노동자의 족쇄의 임자로서
거대 기업을 상정하는 것은 어쩌면 모든 SF 디스토피아의 철저한 공식일 수 밖에 없는데,
아마도 누구라도 현재의 신자유주의 조류를 약간이라도 눈치챘다면 다른 선택이 불가할 것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전술한 바와 같은 종말의 정치적인 심판 에필로그는 확연히 극 전반과 다른 유치함이 묻어난다.
과감하게 식민주의 이론으로 나아가지 않음에도
푸른 지구와 멈춰진 기구의 미장센만으로도 충분히 접속되는 본편의 또다른 장점은
케빈 스페이시가 목소리 연기를 한 우주선 내부의 모든 움직임을 관장하는 컴퓨터의 긍정성이다.
컴퓨터 이모티콘의 우는 얼굴 한 장면은 의외의 울림을 전달하고,
최종적인 책임을 혼자 지려는 결정 앞에서는 우정이 아닌 부자(목소리는 남자)관계의 정마저 흘러나온다.
거꾸로 말하자면, 이제 기계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일 수 있다는 동화같은 선언이다.
( 이건 "트랜스포머"의 합체 변신 로봇의 전쟁보다 휠씬 따뜻해지는 차 한잔이다.)
새하얀 진실의 공간으로서 달 스페이스 기지 세트는 질문보다 정서를 먼저 전달하고,
검정 공간으로의 달 외부는 노동 착취의 거짓된 허영을 그대로 드러낸다.
하지만, 좀 더 세밀하게 기억의 이식과 감정의 동일성이라는 클론 존재론의 의문문이 생략되고
결코 더해지지 말았어야할 지구인들의 뒷북어린 음성 출연은 신인의 한계를 노정한다.
"더 문"은 아름다운 달나라에서 방아를 찧던 두 마리 토끼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며
그 토끼들의 방아 속 곡식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은연 중에 물으며 달의 신화를 거부하고 해체한다.
2. 더 레슬러 The Wrestler(2008) : 대런 아로노프스키
= 80년대의 찢어지고 헐벗은 신체가 21세기에 왜 전시되는가
나는 이제까지 그를 4번 만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국내에 소개된 그의 전작을 다 본 셈이다.
다른 질문을 하고 싶다.
물론, 그 의문문을 발하기 전에 자기 반영성의 숭고미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모든 관객들의 시선으로 누적된 미크 루크라는 배우의 전력과
프로레슬러와 배우라는 엔터테인먼트를 위한 연기의 동일선은 그 자체로
개인과 직업을 그리스식 비극 영웅의 절정을 이루었다는 데 이견은 없다.
하지만, 나는 난데없이 다른 질문을 하고 싶다.
이제까지 그가 해왔던 이야기에서 그는 갑자기 삐딱선을 타고 있는가?
정말 그는 다른 말을 하고 싶었던것일가?
지난 3편은 모두 "환각"에 대한 이야기였다.
"파이"의 자본과 종교에 대한 응징으로서 자학적인 수학 함수,
"레퀴엠"의 마약, 다이어트약, 텔레비젼의 혼연일체 난장,
"파운틴"의 시공을 초월한 영생과 인연의 안티 로맨스
두 말할 나위 없이 "파이"와 "레퀴엠"이 환각에 의해서 부서지는 인간을 제안했다면,
모두가 의아해한 "파운틴" 역시도 로맨스가 주는 착각을 황홀한 빛으로 갸륵하게 비하시켰다.
그는 가족에게 버림받고 지난 영광의 시절이 다 지나간 시간들
멀게는 빌리 와일더가 글로리아 스완슨에게 바친 "선셋 대로"의 거리,
찰리 채플린과 버스터 키튼이 올려준 "라임라이트"의 코미디 공연,
돈 시겔이 존 웨인을 통해 사라지는 서부 사나이 "최후의 총잡이"
마틴 스콜세즈와 로버트 드 니로의 되돌려지는 엔터테인먼트의 자화상 "성난 황소"을 다시 연주한 것일까?
누구나 자기 연민과 회한에 빠질 때 극도로 취약해지는 심장을 가지고 있음을 이용하여
그동안 자기 파괴에 몰두하여 놀라운 환각제 섭취 역량을 갑자기 포기한 것일까?
아니 극 중에서 미크 루크는 심장이 아프고, 각종 주사약을 꽂으니 동일한 경로를 걷고 있지 않은가.
여기서 나의 질문은 시작되고 이미 그 대답을 선취하고 멈춰버렸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06AFA324CF8312537)
여전히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환각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전의 그의 전작들이 그렇듯 그것은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집단적이다.
"나인 하프 위크"와 "와일드 오키드"의 야릇하고 섹시한 미키 루크의 쭉 빠진 몸매가
울퉁불퉁 근육강화제의 도움 없이는 유지되지 못하고
선혈이 낭자하게 도륙되고 심지어는 가슴은 아래위로 쭈욱 갈라져 버릴 때
그는 "아이언맨"이 아니라서 감히 새로운 에너지원을 가슴에 장착하지는 못한다.
"아이언맨"은 이전부터 세계 최강이었던 군수 산업의 메카인 미국이
이제는 아예 인간 슈트를 개발해 전세계를 평화로 이끈다는 아주 고약하고 훌륭한 게임을 업그레이드하지만,
동년인 2008년에 발표된 "더 레슬러" 본편은 그와 정반대의 현상을 제안하고
이제까지 우리가 빠져있던 황홀한 근육의 연기를 미국의 80년대 영광과 동일시하며
거의 30여년이 지난 지금 그것이 얼마나 위태롭게 삶을 유지하고 자기 최면에 빠져
마지막 신체의 포기 선언을 통해서 (영화- 프로레슬러) 관객을 각성시키는지를 말한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04A72324CF8312403)
여기에 동참하는 것은 마리사 토메이의 스트립걸이라는 직업에서 노출되는 벗겨진 여인의 신체이다.
몸의 전시라는 측면에서 동일한 엔터테인먼트의 출발점을 갖는 그녀가 자신만의 규정을 깨고
마지막에 레슬링 경기장으로 가서 미키 루크를 만나고 결국 만나지 못하는 것은
그가 그 경기에서 죽음에 이르고 모든 것이 허위였음을 (영화-프로레슬러) 관객이 알기를 바라는 간절함에서다.
아마도 그녀는 다시는 스트립걸이라는 직업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미키 루크의 침대 머리맡에 성조기가 걸리고,
이후 성조기가 그의 내면을 상징하는 거울과 경기장 안팍에 보이는 것은
단지 그가 마치 "캡틴 아메리카"와 같은 프로레슬링계의 미국을 대표하는 영웅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미키 루크가 동네 소년과 그의 캐릭터가 나오는 레슬링 닌텐도 게임을 할 때
소년은 이제 식상하다는듯 새로운 전쟁 게임에서는 2차 대전이 아니라 이라크를 상대로 한다고 말하고,
마지막 재대결의 상대가 아랍 계열인 것으로 추정되는 종결의 시퀀스에 당도하면
허망한 80년대의 과격한 근육질 미국 마초들과 미끈한 다리와 풍만한 가슴의 그녀들을
일상의 비루함을 통과시키고 영광 재현의 정점에서 정지시키려는 서사는
미키 루크의 개인사이면서 동시에 80년대-21세기의 첫 십년에 대한
미국민들의 역사적 환각을 도륙난 심장의 피로 산산히 부숴뜨리며 엔터테인먼트의 이면을 박살낸다.
"더 레슬러"는 레슬링-연기라는 환각이 주었던 80년대의 미국 횡포의 역사를
30 여년이 지나 철저히 피맺힌 육체로 앙갚음하는 허공에의 질주이다.
첫댓글 개인적으로는 두 작품이 사람 중심의 생각이 아닌, 물질과 실용중심의 생각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낙오되어진 사람들의 고달픈 삶의 여정을 보는 것 같았던 기억... 신자유주의야, 이젠 굿바이!!.... 라고 할 수 있었으면...
'더 문"은 흐뭇했고, "더 레슬러"는 가슴이 시리더군요. 영화를 새롭게 읽어야하는 데 요즘 영화이론쪽보다는 자꾸 사회괴학쪽만 책을 접하게되서 매번 내용이 비슷한 점이 죄송스럽습니다.
'환각'이란 키워드로 읽은 '레슬러'글 잘 읽었습니다..그의 신작인 '블랙 스완'까지 생각한다면 더욱 흥미로운 글이 될거 같긴 하군요..애초에 두 작품이 하나에서 분리되어 나갔다 하니 여러모로 궁금한 작품중에 하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