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해, 기혁_시력 54년의 현역, 치열한 삶의 소통을 꿈꾸는 시인_한국의 대표 시인 특집 대담
▣ 한국의 대표 시인 특집 | 대담
시력 54년의 현역, 치열한 삶의 소통을 꿈꾸는 시인
김종해(시인)
기 혁(시인)
■일시·2017년 4월 5일 수요일
■장소·문학세계사
■사진·하린
기 혁·안녕하세요, 선생님. 이렇게 대담 자리에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지난해 열한 번째 시집 『모두 허공이야』(북레시피, 2016)를 상재하셨고, 올해 초에는 그림이 곁들여진 서정시선집 『그대 앞에 봄이 있다』(문학세계사, 2017)를 묶으셨는데, 반백년이 넘는 시력詩歷이 무색할 만큼 왕성하게 활동하시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요?
김종해·반갑습니다. 최근에 야구를 보는 재미에 푹 빠져 있습니다. 롯데 자이언츠를 응원하고 있는데, 고향인 부산을 연고로 늘 꼴찌만 하는 팀이지요. 그런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 애착을 가지고 응원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아들인 김요안(평론가, 북레시피 대표)은 오래 전부터 엘지 트윈스를 응원하는데 그럴 땐 한 지붕 아래서 서로 다른 팀을 응원합니다. 한 치의 양보도 없지요. 그래도 계속 지기만 하면 확 돌아서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웃음) 국내 프로야구 경기가 없는 날에는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는 우리 나라 선수들의 경기나 축구선수 손흥민이 뛰는 토트넘의 축구 경기를 시청하기도 합니다. 세계무대에서 활약하는 젊은 선수들의 에너지가 상당히 역동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지요.
기 혁·연이어 시집 탈고를 하는 일도, SNS상의 독자들까지 살피는 일도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한 다방면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힘의 비결이라도 있으신지요?
김종해·지난해 열한 번째 낸 내 시집 『모두 허공이야』와 올해 펴낸 서정시집 『그대 앞에 봄이 있다』는 등단 54년 만에 각기 펴낸 시집입니다. 대략 5년마다 시집을 한 권씩 펴냈다고 보면 됩니다. 그 가운데 『그대 앞에 봄이 있다』는 서정시 선집으로 ‘내가 좋아하는, 내가 쓴 서정시 33편’이 수록되어 있고, 인터넷 SNS에서 시 독자들이 즐겨 찾는 화제의 시가 되어 있지요. 신작 시집 『모두 허공이야』는 지금 쓰고 있는 내 시의 현주소지라 할 만하지요. 삶의 시공을 바라보는 허무의식과 슬픔이 담겨 있는 서정성이 강한 시집이지요.
특별한 비결은 없습니다. 작품은 혼자서 쓰는 것이니까요. 지금도 매일 소주 반병 정도를 반주로 마시고 있고, 아침이면 어김없이 피트니스 센터로 가서 가벼운 운동을 합니다. 기본적인 체력이 되어야 시도 쓸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굳이 찾아보자면, 신춘문예와 문예지 등에서 제가 추천한 시인들의 작품을 눈여겨보는 일을 꼽을 수 있습니다. 여기 기혁 시인도 시인으로서, 문학평론가로서 문학 지면을 통해 활발하게 작품 활동하는 것을 눈여겨 봐왔지요. 젊은 시인들의 문학 일생을 축원하는 심정으로 관심 깊게 지켜보는 것이 때때로 큰 활력이 됩니다.
기 혁·후배시인들의 활동을 보면서 활력을 얻는다는 말씀 깊이 공감합니다. 본격적으로 시집에 대한 질문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모두 허공이야』 출간 이후 한 일간지 인터뷰에서 “스쳐 지나가지만 일상 속에서 깊이 있는 것을 만나 이를 건져 올리는 게 시”라는 말씀을 하셨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표제시 「모두 허공이야」에 드러난 바와 같이, 사소한 일상의 모습마저 서로의 관계 맺기 속에서 존재론적 가치를 부여받게 되고, 그로 인해 비어있던 존재들이 “서로서로 뭐라고 소리치는” 내면의 목소리를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을 듣는 시인의 귀는 얼마나 깊고 맑아야 하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일상의 관계 맺기 아래 도사리고 있는 시적 긴장을 탐구해온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신지요? 개인적으로는 시집 후반부에 실린 「오늘은 신호등마저 얼룩져 보인다」를 읽으면서 그러한 관계 맺기가 진행될수록 가장 순수하게 드러나는 슬픔의 결정을 목격한 것 같아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음식점 2층 창문 앞에 앉아
나는 혼자서 죽을 먹는다
횡단보도를 오가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뜯어보며
나는 왜 혼자서 죽을 먹는 것이며
지하철 승강기에서
지상으로 빠져나오는 사람 중에
내가 찾는 사람은 왜 없는 것일까
그 생각으로 나는 갑자기 뭉클,
눈에서 눈물이 맺힌다
(…중략…)
죽그릇에 남은 죽을 비우지 못하고
나는 죽을 물린다
창밖은 여전히 흐린 날
오늘은 신호등마저 얼룩져 보인다
― 「오늘은 신호등마저 얼룩져 보인다」 부분(『모두 허공이야』)
김종해·시인마다 시 쓰기의 방법론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감성感性과 감정을 중시합니다. 일상에서 느끼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라든지 그 속에서 일어나는 절실한 감정이나, 자연과 사물을 바라보는 특별한 느낌 같은 것을 언어로 예리하게 잡아내는 일은 시인이 아니고서는 표현하기 어렵겠지요. 꼭 같은 언어로 표현해 낸다고 해도 시인의 언어는 좀 더 정제되고 축약되거나 상징성을 띠게 되겠지요. 표제시 「모두 허공이야」 같은 시의 경우, 벚꽃 꽃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꽃잎 한 장 한 장마다/서로서로 뭐라고 소리치는 마지막 안부/봄날 허공중에 떠 있는/내 귀에도 들리는구나” 사람 사는 세상의 마지막 날을 깨닫게 하는 ‘봄날 하루 허공 속의 문자’로 보여주려 했지요. 내 속에 가득 차 있는 ‘슬프다’는 감정이 시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봐야죠. 그 동안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삶 속에서 나는 많은 지인들과 사랑하는 가족들과 사별했는데, 그 사람들은 내 마음속에서 추억 속에서 떠나지 않고 남아 있지요. 이 사람들을 하나하나 생각하면, 봄날 떨어져 날리는 꽃잎 한 장 한 장마다 슬픔이 담겨 있고, 또 때로는 함축된 선시禪詩가 담겨 나를 위로해 주는 듯해요.
기 혁·개인적으로 불교의 공空사상 등을 염두에 두시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만, 넘겨짚었습니다. 의도된 사상에 기반을 두기보다는 시인의 진정성과 내면에 침전된 슬픔, 경험 등을 통해 선시의 경지로 나아가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한 작품들이 다시 시인 자신을 위로할 수 있다면, 그러한 작시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김종해·좀 전에 기혁 시인이 언급한 「오늘은 신호등마저 얼룩져 보인다」 같은 시는 삶 속에서 자주 부딪치는 아주 단순한 외로움과 슬픔을 담아내려고 했어요. 어려운 수사와 시의 복층구조가 없는 단선적인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 보인 시라 할 수 있지요. 시를 쉽게 쓰자, 시 독자와 쉽게 소통할 수 있는 시를 쓰자는 것이 내 시 쓰기의 기본적인 방법론이라 할 수 있죠.
기 혁·쉽게 쓰고 쉽게 읽히는 시가 결국 시인 자신에게도 위로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은 단출하지만 무척 중요한 지평에 놓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선생님께서는 시대의 풍랑과 함께 시풍의 변화를 모색해오셨고, 말씀하신 방법론 역시 그러한 기반 위에 있기 때문인데요. 선생님의 시를 살펴 온 평자들은 모더니즘 기법이 중심이 된 초기시, 사회참여 의식을 보여주는 중기시, 그리고 삶에 대한 깨달음과 관조가 이루어진 후기시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도 한 지면을 통해 『풀』(문학세계사, 2001)의 간행 이후를 “4기”로 명명하시며, “서정시에서 존재시로, 즉 선적인 세계로 넘어오고 있”다고 언급하신 적이 있으신 걸로 기억합니다, 독자들을 위해 간략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김종해·시력詩歷 50년간 간행되었던 나의 시집들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문학평론가들의 지적 또한 틀리지 않다고 봅니다. 나의 시세계를 요약하여 내면의식을 그린 모더니즘 기법의 등단 초기시, 사회참여와 현실인식을 보여주는 중기시, 삶에 대한 깨달음과 존재에 대한 관조가 이루어진 후기시로 분류해 놓은 것에도 동의를 합니다. 이렇게 보았을 때 내가 쓴 시들은 순수시와 참여시의 금역禁域 한계를 그어놓지 않고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말하고 쓰는’ 칼릴 지브란의 견자見者의 길을 걸어오지 않았느냐는 생각도 듭니다. 2000년대 들어서 간행한 시집 『풀』에서부터 그 이후에 쓴 시들은 대체로 짧고 함축적이며, 존재를 관조하고 성찰하는 선시禪詩를 지향하고 있으며 이 시들은 또한 거의 서정시의 옷을 입고 있지 않았나 라고 스스로 자문합니다.
기 혁·“4기” 이후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은 어떠신가요? 비교적 근래에 발표하신 「이발을 하며」(계간 『발견』, 2016년 가을호) 등의 작품을 보면 통념상의 관조나 초월과 조금 다른 지점이 읽혔습니다. 특히 「이발을 하며」의 시작노트에 쓰신 “삶은, 살아간다는 것은 내게는 긴 여행의 한 부분이다. 일상의 장면이 바뀔 때마다 보고, 느끼고 깨닫는 것은 지리 할 정도로 꼭 같다”라는 고백은 삶과 마찰하는 시인 여정이 깨달음의 종착역을 향해 가는 과정이 아니라, 그저 “지리”한 “여행”의 반복일 뿐이라는 냉정한 현실인식을 엿보게 했습니다. 이것을 “4기”이후의 변화라고 할 수도 있겠고, 『인간의 악기』(서구출판사, 1966)와 『신의 열쇠』(문원사, 1971) 출간 무렵인 “1기”부터 쭉 지속된 ‘무엇’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김종해·시의 방법론을 전면에 먼저 세워놓고 시를 쓰는 것은 아니지만, 근작시 「이발을 하며」는 삶에 대한 권태와, 이발사 가위 끝에 잘려나가는 머리털을 보며, 또한 잘려져 나가는 삶의 시간들을 보며 처음과 끝이 있는 존재에 대한 생각을 시로 쓴 거죠. 삶과 인간의 문제를 다뤘던 등단 초기의 시들과 50년이 지난 지금의 근작시와의 변별점을 굳이 찾으려 한다면 시작 방법론상의 문제만 다를 뿐이지 주제상의 큰 줄기는 비슷하다고 봅니다.
기 혁·앞선 질문에서 칼릴 지브란을 언급하셨는데, 선생님의 시세계와 관련해 어떤 영향관계가 있습니까?
김종해·내가 시인으로 살아온 시인의 한 생애에서 나에게 큰 영향을 끼친 문학자는 누구였을까를 오늘에 와서 되짚어 보았을 때 아마도 나는 『예언자』를 쓴 레바논 사람 칼릴 지브란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20대 초반에 읽었던 함석헌 선생 번역의 그 시집은 시를 공부하는 내 삶의 성서聖書였습니다. 그 번역판 시집의 머리말에서 함석헌 선생은 “『예언자』는 똥깐에 빠진 나를 구해주었다”라고 썼습니다. 이 시집을 읽었던 문청시절의 나는 칼릴 지브란에 매료되어 시집 책장이 닳도록 읽고 또 읽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방법도 그렇겠지만 시의 방법론도 함께 가르쳐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박목월 선생 주례로 열린 내 결혼식 청첩장에도 칼릴 지브란의 명시 「결혼에 대하여」를 인쇄하여 여러 지인들에게 돌렸지요. 또한 1960년대 말에 우리 문학에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순수시냐, 참여시냐」에서도 나는 확실한 논쟁의 키를 칼린 지브란에게서 얻어냈지요. 우리 문학사는 순수시도 필요하고 참여시도 필요하다는, 또 그 밖의 다양하고 다채로운 다른 형질의 시들도 필요하다는 논지를 말이지요. ‘견자見者는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말하라’의 사명과 소명의식을 칼릴 지브란에서 읽었지요. 시를 읽고 이해하고 시를 쓰는 시인의 기본적인 시계視界를 배우기 시작한 거죠. 나의 시엔 항상 현실의식과 역사의식이 전제되어 있었지만, 어느 한쪽만 봐서는 안 된다는 생각 또한 갖고 있었지요.
기 혁·사회참여적인 요소와 미학적인 요소가 충돌하게 되면 거두절미하고 김수영부터 떠올리기 마련인데, 줄곧 “시는 직설화법으로 쓰는 게 아니”라는 입장을 견지해 오셨던 선생님의 시론이나, 그것에 주요한 영향을 끼친 칼릴 지브란의 사상도 한국문학사와 관련해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다시 시집 얘기로 돌아와서, 『모두 허공이야』 에 실린 「나라 안이 상중(喪中)이라」처럼 비교적 직접적인 외침이 들어간 경우도 있고, 사회 참여적 시풍에서 다시 서정성으로 복귀한 시기의 시편들처럼 민중시의 외양 아래 시적 화자의 1인칭 독백이 빼어난 작품들도 존재합니다. 선생님의 경우를 포함해서 시를 통한 사회적 발화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김종해·사회 참여, 혹은 현실 참여하는 시들은 대개 사회적 정치적인 이념과 주장이 뚜렷하고 목적의식 또한 강렬해서 시로서 심화되지 않은 직설화법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지요. 사회시, 참여시의 단점이 그대로 드러나 있지요. 마치 선동적인 프래카드의 궐기문을 보는 듯해서는 안 되지요. 더 깊은 곳의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움직이고, 더 크게 깨닫게 하는 현실 참여의 시, 상처받은 대다수의 노동자와 민중들을 위로해주는 민중시나 참여시가 우리 시사詩史에 한 부분으로서 필요한 것도 당연하다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의미가 함축되고 시로서 잘 심화된 진정성이 담긴 그런 참여시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부정·불의한 시대와 사회를 시인은 시로써 비판하고 질타는 하되, 광장으로 뛰쳐나온 정치인의 선동 구호와는 동선動線을 달리하라, 시인이 직설화법의 시를 피해야 할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기 혁·개인적으로 『별똥별』(문학세계사, 1994)에 실린 「면회」라는 작품이 인상 깊었습니다. 남녀노소 모두가 광장의 촛불을 들어야 했던 작금의 사태에 비추어도 여전히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작품으로 읽혔습니다. 실제 창작과정은 어떠셨나요?
수감되어 있는 너를 만나려고
아들아 네가 갇힌 쇠창살 바깥쪽에
나는 서 있다
역할이 바뀐 우리들의 시대
네가 가진 진보와 혁신이 아직 서툴고
뽀오얀 최루탄 연기 속에 연행된
네 청춘의 봄을
나는 탓할 수 없다
아들아 이 봄날 나도 외치고 싶구나
살아가는 일 모두가 쇠창살이 되어
나를 갇히게 하는 이 봄날
또 다른 감방 하나가 내 안에서
육중한 문에 자물쇠를 채우는구나.
―「면회」 전문(『별똥별』)
김종해·1974년에 작가회의의 전신이었던 ‘자유실천문인협회’가 발족되었고, 발기 위원 63명 전원이 조작된 ‘문인 간첩단 사건’으로 남산 정보부에 끌려가 군부 정권의 혹독한 문초를 받았던 적이 있었지요. 이때 다니던 직장에서 나는 사직의 위기까지 몰렸었지요. 악명 높은 남산 정보부의 ‘구속’은 무섭지 않았지만, 직장 퇴출은 우리 가족 전부에 대한 위기였지요. 자유와 정의는 무엇이며, 시민 저항은 무슨 의미인가, 그때 느꼈던 그 생각을 10년이 지나서 대학 다니던 아들 김요일을 보면서 또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학내 데모 주동세력으로 경찰서 감방에 구금되어 있던 김요일을 면회하고 집으로 돌아온 날 썼던 시가 바로 「면회」라는 시입니다. 아버지에게는 삶이라는 또 다른 감방 하나가 육중한 문에 자물쇠를 채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 혁·시인으로서, 아버지로서, 그리고 정치적 변혁을 바라는 선배로서의 입장을 모두 아우르려는 시인의 의지가 “육중한 감방”과 같은 고독으로 드러난 것 같습니다. 이때의 고독은 자폐적인 것이 아니라, 일상의 면면을 동일한 삶의 지평으로 포용하려는 치열한 소통의 부산물이겠고요. 그렇다면 일상을 반추하는 선생님의 시론 역시 소통과 공감을 통해서 권력과 정치의 문제까지도 극복하려는 의지로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소통과 관련해서 잠깐 화제를 돌려보겠습니다. 7-80년대 <현대시를 위한 실험무대> 동인으로 활동하셨습니다. 동인 활동의 지향점이 “독자로부터 소외되고, 고립된 현대시를 대중화하고, 시가 갖는 숙명적인 언어공간으로부터 새로운 무대공간의 확충”을 꾀하고자 했다는 논문을 본 적이 있습니다. 당시는 물론 현재까지도 ‘시극’의 정의가 명확하지 않고, 연극에 비해 어렵다는 선입견도 뒤따랐을 텐데, 시극 활동의 간략한 내용이나 인상적인 일화 등이 있으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김종해·시극은 시의 형식으로 쓴 희곡으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시화詩話가 갖는 함축과 서정성, 무대 위에서 배우가 연기로 표현하는 스토리의 감동적 요소가 첨가되어야 관객의 마음을 뺏을 수 있지요.
1979년 출판사 문학세계사를 창립하던 그해에 <현대시를 위한 실험무대>라는 이름으로 김후란, 정진규, 이근배, 허영자, 김종해, 이탄, 강우식, 이건청 이상 여덟 시인이 현대시와 독자의 소통을 위한 시낭송과 시극 운동을 하게 되었죠. 그 당시 대표적인 마당놀이 극단 활동을 하던 연출가 허규 씨의 <민예극단>과 문학세계사가 공동 주최했어요. 시극 동인 한 사람씩 차례대로 시극을 쓰면 허규, 손진책 등이 연출을 맡아서 민예 소극장의 연극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공연했지요.
신촌 이대 정문 앞에 3,40명의 관객이 들 수 있는 민예소극장이 있었는데, 시극 공연은 일주일 동안 계속되었고, 시극 공연 직전에 시인들이 무대에 나와서 신작시 한 편씩을 낭송하였지요. 여덟 명의 상임 시인 이외에 초청시인으로 이형기, 황금찬, 신경림, 최하림, 문정희 등의 시인이 무대에 올라서 시낭송을 했습니다. 시인들이 가장 즐거워하는 것은 일주일간의 공연이 끝났을 때 시인들과 연극배우들이 함께 식당 술집으로 가서 밤늦도록 어울린 ‘쫑파티’였습니다. 정한모 선생님이 가끔 오셔서 거금의 술값을 쏘기도 했습니다. 이때 만났던 대표적인 연극인들로는 윤문식, 김종엽, 손진책, 김성녀 등이었으며, 이들은 지금 대한민국 연극계를 떠받치는 큰 기둥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제1회 시극 공연은 1979년 정진규 시인의 「빛이여 빛이여」를 시작으로, 1985년 허영자 시인의 「임자 찾기」가 제7회로 마지막 공연이 되었습니다. <현대시를 위한 실험무대> 시극 공연 주최자로서 시극 집필을 마지막까지 미루다가 시극 대본도 쓰지 못하고 결국 시극 공연마저 무산시킨 것은 모두 나의 탓이 되었지요. 40년이 지난 지금도 손진책 연출가의 공연 새 작품이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공연될 때마다 손진책 연출가가 그 당시의 시극 동인을 초청해주면 우리는 만나서 모두 그 옛날 <민예극단>의 비밀 단원이라고 친밀감을 보이며 인사하고 웃지요.
기 혁·정작 선생님의 공연을 올리지 못하셨군요. 개인적으로 연극에 관심이 많아서 선생님 공연을 보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시선집 『그대 앞에 봄이 있다』와 관련해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독자들의 요청에 의해 묶여진 시집으로 소개되고 있는데요.
김종해·지난 2월에 김종해 서정시집 『그대 앞에 봄이 있다』를 간행했던 이유는 이 시집의 표제시를 좋아하는 수많은 시독자들의 적극적인 요구에 의한 것이었지요. 이 시가 삶에서 느끼는 뼈저린 추위와 아픔, 절망과 상처를 가진 사람에게 희망과 위안, 치유를 깨닫게 해준다는 것이죠. 메가박스에서 영화 상영 직전에 소개되어 SNS는 물론 서울, 부산, 광주의 청사와 도서관에도 이 시가 플래카드로 내걸려 있었죠. 그보다 인터넷의 ‘인스타그램’에서 ‘#김종해’를
기 혁·제 이름으로도 한번 쳐보았는데 그다지 인기가 없는 것 같습니다. 모르는 사람들만 한가득.(웃음) 독자들로부터의 인기라고 범박하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독자를 대하는 자세가 남다른 듯합니다. 선생님에게 독자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요?
김종해·시가 위안과 치유를 준다고 생각하는 시의 독자가 시를 즐기며 읽어줄 때 시의 역할은 비로소 시작된다고 나는 생각하지요. 시와 독자의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우리 사회에서 시와 시인의 존재는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죠. 시인은 시로써 미세하게라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울림과 감동이 있는 시를 쓰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오늘의 젊은 시인들이 시도하는 새로운 시, 실험시, 해체시, 난해시가 다수의 시독자로부터 외면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집중해서 읽어도 이해할 수 없는 시, 암호보다 더 풀기 어려운 시의 기호화를 시독자들은 더 이상 붙들고 읽으려 하지 않는다는 거죠. 오늘의 시와 시인의 소외는 시인 스스로가 만든 자해自害의 올가미를 스스로 선택해서 쓰고 있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기 혁·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바람 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문학세계사, 1990)의 자서였던 「시인선서」가 새삼 떠오릅니다. “시인이여, 시여, 그대는 이 지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위안하고 보다 높은 쪽으로 솟구치게 하는 가장 정직한 노래여야 한다./ 그대는 외로운 이, 가난한 이, 그늘진 이, 핍박받는 이, 영원 쪽에 서서 일하는 이의 맹우여야 한다”는 이 선서가 여전히 유효하다면, 시인은 봄꽃을 노래하더라도 현실을 말할 수 있고, 현실을 비판하더라도 오직 봄꽃의 목소리만으로 그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종해·「시인선서」는 1990년대에 간행되었던 시집 『바람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의 머리말에 해당하는 자서自序로 실렸던 글이지요. 뒤에 내가 한국시인협회장을 역임하던 2005년에 「현대시 100년-제19회 시의 날 전주시인축제」 때 다시 보완해서 행사장에서 인사말 대신 낭송했던 글이 「시인선서」입니다. ‘온 세상이 권력의 전횡專橫에 눌려 핍박받을지라도/ 그대의 칼날 같은 저항과 충언을 숨기지 말라.’ 등의 메시지가 추가되었고, 많은 시인들로부터 호평을 받았습니다. 훼절하지 않는 시인의 품격과 사명을 적시해 놓은 거지요. 지금도 이 시인선서는 나에게 아직도 유효한, 깨어지지 않는 시인으로서의 약속입니다. 50년 넘게 하루같이 시를 읽고, 시를 쓰고, 시를 생각해온 내가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오늘의 시잡지와 시집들의 시를 대할 때마다 시의 난해성에 부딪쳐 독해하지 못하면 무척 곤혹스럽지요. 매월 발표되는 시인들의 신작시 앞부분 3,4행 정도를 읽어보면, 더 읽지 않아도 될 시는 과감하게 버리지요. 그래서 읽지 않고 버리는 시가 더 많다고 솔직히 나는 고백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좋은 시인의 좋은 시를 발견하여 읽게 되면, ‘다시 읽기’를 위해 책상 위쪽에 잘 챙겨두죠. 좋은 시에서 받았던 향기와 상승된 감정을 또 한 번 읽으며 되새김질하기 위해서죠.
기 혁·말씀하신 ‘독자’의 자리에서 문득 ‘시인’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시인의 품격과 사명은 어쩌면 ‘독자로서의 시인’에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닐까 합니다. 이제 마지막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최근 출판사나 서점들 모두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어쩌면 시를 쓴다는 것뿐 아니라, 시전문지를 발행한다는 것 자체가 나름의 저항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지난 10여 년간 발행해 오신 계간 『시인세계』를 종간한지도 시간이 흘렀습니다. 소위 메이저 문예지들도 독자와 적극적으로 소통하려는 새로운 방향을 모색 중이고, 독집잡지들의 출간도 활발한 상황입니다. 복간여부와 관계없이 『시인세계』 발행인으로서 소회와, 앞으로의 시전문지가 지녔으면 하는 역할 혹은 소임 등에 대한 간략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김종해·문학세계사에서 간행해 오던 계간 시전문지 『시인세계』는 정확하게 창간호부터 11년 3개월간 45집까지 간행되었지요. 기혁 시인뿐 아니라 서효인, 김산, 하린, 장인수, 김도언, 박은정 등등 일군의 젊은 시인들의 치열한 작품 활동을 기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발행인이었던 내 개인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시지는 종간된 것이 아니라 휴간된 것이라고 생각하며 어느 시기에 가서 다시 복간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시인세계』가 창간될 당시에 시인들에게 지급하던 시원고료는 그 당시 최고의 원고료를 지급했지요. 시전문지 『시인세계』의 영향을 받아 당시 다른 종합문예지의 원고료도 인상케 한 요인으로 작용했지요. 한 호 한 호 펴낼 때마다 시지의 기획 특집은 국내 일간지들의 문화면 탑 기사로 뜨곤 했지요. 이 잡지가 휴간된 것은 한 마디로 경영난 때문입니다. 그때까지 문학세계사라는 한 개인의 사재 출연으로 버텼던 거지요. 지금 우리나라에서 간행되고 있는 시잡지와 문학종합지는 열악한 경제상황 속에서도 오히려 발행종수가 더 늘어나 있지만 내용면에 있어서는 ‘외화내빈’을 실감케 합니다. 몇몇의 전문 문예지를 제외한 부정기 간행물, 계간지, 월간지 등 다수의 문예지는 한결같이 동인지나 문학동호회지, 문인단체 기관지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젠 달라져야 합니다. 시대가 바뀌어 새로운 시전문지로서의 역할은 시지마다 특색을 달리하겠지만 시와 시인의 삶이라는 본질적인 주제를 벗어나지 않아야 하며, 큰 시각에서 우리 근·현대 시사詩史를 조명하는 기획도 다뤄져야 하고, 천편일률적인 시인들의 신작시 발표도 독특한 주제로 시인들의 색다른 상상력을 볼 수 있는 시작품을 함께 모아보면 어떨까? 이런 생각도 해보지요. 시와 시독자가 다 함께 읽고 즐기는 시지 말입니다.
기 혁·오랜 시간 부족한 질문에 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도 독자와 소통, 시인의 품격과 사명 등 곱씹어보아야 할 것들이 많은 시간이었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언젠가 『시인세계』가 복간되는 날도 손꼽아 기다려 보겠습니다.
김종해·자자, 이제 끝내고 어서 한잔하러 갑시다. 6시가 넘으면 앉을 자리가 없어.
문학세계사에서의 인터뷰를 마치고 김종해 선생님, 사진을 찍어주었던 하린 시인과 함께 마포의 오래된 돼지갈비집 ‘조박집’으로 향했다. 지난 10여 년간 <시인세계>의 등단 축하연이 열리던 장소로서, 나 역시 축하주를 연거푸 마시느라 분주히 테이블을 오갔던 기억이 있다. 불판을 중심으로 소주잔이 도는 동안, 이런저런 얘기들이 오갔다. 한 번도 산문집을 발간한 적이 없다는 것도, 잡지를 발간하는 동안 외부적 지원을 염두에 둔 적이 없으셨다는 것도 듣게 되었다. 등단을 하면 결혼을 하겠노라 호기롭게 외쳤던 문청은 정말로 결혼을 했고, 문학을 업으로 여기는 삶에 한 발을 들여놓고 선생님 앞에 앉아있다.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문학이 선생님의 신념과 다를 수도 있고, 생각보다 멀리 떨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호기롭던 문청에게 진지하게 시를 당부하시던 그날의 선생님은 무엇을 보셨던 걸까. 당신과는 다른 세상을 향해 치열하게 소통을 하셨던 것이 아닐까. 손님들이 밀려들고 밖에선 계속해서 봄비가 내렸다. 기승전시起承轉詩. 이야기에도 조금씩 취기가 올랐다. 저녁의 문전에서 “서로서로 뭐라고 소리치는” 떨어지는 꽃잎과 봄의 모습이 소주잔의 수면 위로 비췄다, 사라졌다.
기 혁 약력
1979년 경남 진주 출생. 2010년 《시인세계》(시) 등단, 2013년 세계일보 평론 등단. 동국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수료. 시집으로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 박수』가 있다. 제3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