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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6. 묵상글 ( 부활 제6주간 월요일, -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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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6. 부활 제6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
저는 두 마음을 품을 때가 많습니다. 그야말로 양다리 걸치기를 합니다. 하느님을 갈망하면서도 마음과는 달리 세상 것을 그리워하고 쫓아갑니다. 이웃사랑을 말하면서도 손발에 이르지 못합니다. 정의를 말하면서도 정의롭지 못한 궁리를 합니다. 남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면서 이미 심판을 내립니다. 그러면서 때때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로마7,15. 19).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약육강식 논리를 따르지 않고 진리를 추구합니다. 마음을 천상에 둡니다. 빛과 사랑을 추구합니다. 몸이 힘들고 고달프더라도 끊임없이 하느님의 선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결정적으로 선과 진리에 어긋나는 것은, 분명히 거부합니다. 당장은 손해를 보더라도 선을 선택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생명을 함부로 하는 낙태법, 사형제도를 반대합니다. 그래서 권력자들은 그것을 싫어할 수 있고 우리는 세상의 미움을 받게 됩니다. 자기 잇속을 챙기는 정치인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나 세상의 미움에 승리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우리네 현실은 믿음의 수련기관이고, 그동안 단순히 육체적 고통만이 아니라 우리 영혼의 아픔 또한 겪어 내야 합니다(박병규). 미움받는 또 하나의 이유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증언하는 것은, 예수님을 처형한 세상의 권력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권력자들은 교회를 박해하였습니다. 미움은 결국 폭력에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홀로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떠나신 후의 일을 예견하시며 제자들에게 성령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먼저 시련과 박해의 시간에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나 시련과 고통이 생기면 마음이 흔들리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마음을 아시기에 당신의 협조자 성령을 약속하셨고 성령께서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향한 신앙을 북돋아 주시어 혹독한 박해 속에서도 용기 있게 그리스도를 증언할 힘을 주셨습니다. 바로 그 성령께서 오늘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해 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한 모든 사람이 성령의 손길을 통해 어려움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과 그리스도의 평화를 간직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 안에서 예수님을 향한 열망을 키워감으로써 시련과 역경 안에서도 흔들림 없는 참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거룩하게 사는 이들은 그분을 추구합니다. 그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는 당신 입김으로 그들에게 생기를 주시고 도움을 주십니다”(성 바실리오).
사실 “성인들은 자기가 받은 은총에 늘 만족하며 살았고 하느님이 주시는 시련과 고통도 그분의 뜻으로 알고 살았습니다”(아빌라의 성 요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시련이 벌이 아니고 오히려 은총의 기회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련을 이겨 내십시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야고1,12). 이 시간 위로의 성령을 통해 우리의 삶이 변화되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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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6. 부활 제6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부활 6주 월요일-2021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
내가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다 미래형의 말씀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신이 돌아가시고 난 뒤를 예고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돌아가시고 나면 당신이 성령을 보내주실 것인데
성령께서는 한편으로는 진리의 영으로서 당신의 진실을 증언하실 겁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당신이 돌아가신 뒤 박해를 받게 될 제자들을
보호해주실 터인데 그것은 제자들이 당신에게서 떨어져 나가지 않고
제자들도 당신을 증언케 하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박해가 제자들을 떨어져 나가게 할 것이라는 말씀은 우리가
충분히 예상하고 수긍할 수 있는 말씀인데 그런데 그런 제자들이
당신을 증언하게 될 거라는 말씀이 일단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일단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런데 일단이라는 말이 많은 경우 일단一旦의 뜻으로 쓰이지만
이 경우엔 일단一段이라는 뜻으로 제가 쓴 것이며
다음에 이단二段이 있다는 것을 내포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당신의 말씀과 달리 제자들이 당신을 모른다고 하고 도망쳤으니
일단은 주님의 말씀과 어긋나는 결과이고 그래서 그런 제자들이
당신을 증언할 거라는 말씀이 일단은 이해가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일단은 인간의 단계段階입니다.
그리고 이단은 성령의 단계段階입니다.
일단은 연약한 인간이기에 도망치고 봤는데
이런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시자
새로운 단계 곧 이 단계인 성령의 단계에 돌입하게 됩니다.
그런데 일 단계에서 이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소위 중간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것이 제자들에게 요구됩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처럼 하느님도 손쓸 수 없게
자기가 완전히 끝장을 내지 말아야 하는데
그런데 열한 제자는 주님을 배반했지만 그리고 비록 두려움 때문에
다락방에 숨어있었을지라도 다행히 완전히 떨어져 나가지는 않았지요.
여기에 우리가 오늘 배울 것이 있습니다.
정말 끝이라고 생각될 때도 내가 끝장내지 않고
하느님께 여지를 드리는 것 말입니다.
우리에게 하느님을 위한 여지는 없습니까?
하느님께 여지를 드릴 여유가 나에게 없습니까?
나로 가득하여 우리에게 하느님을 위한 여지는 없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께 여지랄까 말미를 드리면
그 여지에 하느님께서 성령과 작당하여 모의하실 것이고
그래서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다락방을 박차고 나와
마침내 주님의 예언대로 주님을 증언하게 될 것이며.
오늘 리디아의 마음을 연 바오로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바꿔 주님을 믿게 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뭐든 우리가 끝장내려고 하지 말고,
하느님께 여지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늦잠을 자는 바람에 새로운 강론을 올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한 주간 강론을 올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또 죄송합니다.
다음 주 월요일이나 화요일부터 다시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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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6. 부활 제6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책상에 앉아 책을 읽다가 잠시 눈을 감고 책의 내용을 음미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제 책상 위가 너무 지저분한 것이 딱 보이는 것이 아닙니까? 어떻게 된 것일까요? 눈을 감고 있는 사이에 누가 와서 난장판으로 만든 것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원래 지저분했는데 느끼지 못했고 또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눈을 감고 책 내용을 되새기고 나서 눈을 떴을 때 그 지저분함이 보인 것입니다. 이 눈을 감고 드는 것이 우리 신앙인에게는 성찰의 시간과 같지 않을까요?
성찰해야 주님과의 관계가 보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성찰 없이도 주님과의 관계가 가까워질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예수님도 바쁜 일정 가운데에서도, 심지어 식사할 시간조차 없었는데도, 외딴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세상 안에 있지만 하느님과 만나는 시간이 별도로 필요하다는 것을 당신께서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을 느끼지 못할 때, 그리고 주님의 뜻보다 세속적인 마음이 더 크게 일어날 때, 잠시 눈을 감고 스스로를 바라보며 주님께 향하는 시간이 우리에게 필요했습니다. 그래야 세상 안에 있지만,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을 느끼며 큰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특히 이런 사람이 주님께서 보내신 보호자, 진리의 영, 성령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 성령은 세상에 주님을 힘차게 증언할 힘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 의해 내쫓겨도, 죽음의 위험 속에서도 진리의 영을 통해 용기를 얻어 힘차게 이 세상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실제로 많은 순교자가 이런 삶을 사셨고, 우리에게 그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희망 안에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새롭게 보는 우리의 시선이 필요합니다. 과거만을 바라보면서 지금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시선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현재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도 벗어던져야 합니다. 세상만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닌, 주님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우리가 간직해야 하는 시선이었습니다.
우리의 시선을 바꾸는 것, 성찰을 통해 또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했습니다. 저절로 이루어지길 바라는 착각은 모두 벗어 던지고, 깊은 성찰과 성령의 도움을 통해 우리의 시선을 철저히 주님께 향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새로운 시선으로 지금을 더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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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삶에 질문하지 말고 삶이 던지는 물음에 “예”라고 답하라(빅터 프랭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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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6. 부활 제6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제자들)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 15,27)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으로부터 고난과 박해가 오면, 제자들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증언”하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증언”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 증언의 확실성인데, 그 확실성의 근거는 직접 눈으로 목격한 사실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증언하게 될 이들이 둘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직접 본 이들입니다.
<첫 번째>로 증언하게 될 이는 바로 “성령”이십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 15,26)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직접 목격한 성령께서 예수님을 증언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 증언은 확실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증언하게 될 이는 제자들입니다.
“너희(제자들)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 15,27)
그렇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예수님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니 직접 목격한 그들의 증언은 확실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이들이 당신을 증언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고 말씀에 대한 이유를 ‘우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요한 16,1)이요, ‘당신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요한 16,4)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박해에 대한 예수님의 이러한 예고는 우리를 당혹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단지 박해를 예고만 할뿐, 박해를 피할 방도나 극복할 방법을 제시하지는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러한 때가 오면 내가 한 말을 기억하라고 너희에게 이렇게 미리 말해 두는 것이다”(요한 16,4)라고만 말씀하십니다. 기껏 “기억하라”고만 할 뿐입니다. 참으로 무력해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예고만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당신을 따르는 길에서, ‘고통’과 ‘박해’는 없어져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통해 당신이 구세주이심을 증거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립 1,29)
그러니 고통과 박해는 없어져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우리 신앙생활의 일부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를 증언해야 할 공간이고 배경이 됩니다. 그리스도께 보내신 성령께서 바로 그 고통과 박해를 통해서, 바로 그 속에서 우리의 증언을 동행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때가 오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6,4)
주님!
미움과 박해가 닥치면 피할 방도를 찾기보다 당신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게 하소서.
안정과 편안을 찾기보다 당신의 증인으로 부름 받았음을 기억하게 하소서.
피할 수 없는 고통이 불가항력으로 닥칠 때,
도저히 용서될 수 없을 것 같은 죄와 끝내 치유될 수 없을 것 같은 상처를 당할 때,
바로 그때가 당신을 증거 해야 할 때임을 알게 하소서!
바로 그것이 당신을 증언할 수 있는 선물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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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6. 부활 제6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댈러스에 있으면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제가 속한 서울대교구의 ‘경조사’에 함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손희송 베네딕토 주교님은 서울대교구 총대리 주교님으로 있다가, 의정부교구 교구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지난 4월 4일에 송별미사가 있었는데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손 주교님은 1993년부터 1994년까지 용산 성당에서 함께 지냈습니다. 신부님은 본당신부였고, 저는 보좌신부였습니다. 온화하고, 합리적인 신부님께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2013년부터 2018년까지는 교구청에서 함께 지냈습니다. 주교님은 사목국장 사제로 있다가, 2015년에 서울대교구 보좌주교가 되었고, 2024년에는 의정부교구 교구장이 되었습니다. 주교님은 제가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지사장과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서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온화하고, 합리적인 주교님께서 의정부교구의 교구장으로서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드러내시리라 생각합니다. 송별미사에 함께 하면서 아쉬움을 나누고, 축하의 인사를 드리지 못했지만 멀리서나마 기도를 드렸습니다.
지난 4월 16일에는 이홍근 스테파노 신부님의 장례미사가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1983년 신학교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저는 2학년이었고, 신부님은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한 5학년이었습니다. 신부님은 자치회 간부를 맡았습니다. 후배들에게는 엄격하였지만, 성소에 대해 고민하는 후배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었습니다. 신부님과 함께 본당에서 지낸 경험은 없지만 사제의 맛과 멋을 아는 신부님의 이야기를 자주 들었습니다. 사제의 맛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사제입니다. 교우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제입니다. 동료 사제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제입니다.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한 사제입니다. 이런 사제가 사제의 맛을 아는 것입니다. 사제의 멋은 무엇일까요? 세상의 것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두 번이나 춘천교구의 공소사목을 지원하였습니다. 최민순 신부님의 ‘두메꽃’이라는 시처럼 주님만 아신다면, 해님만 아신다면 시골의 공소에서도 기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사제가 사제의 멋을 아는 것입니다. 신부님의 장례미사에는 함께하지 못했지만, 멀리서나마 천상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티아티라 시 출신의 자색 옷감 장수로 이미 하느님을 섬기는 이였던 리디아라는 여자도 듣고 있었는데, 바오로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도록 하느님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 리디아는 온 집안과 함께 세례를 받고 나서, ‘저를 주님의 신자로 여기시면 저의 집에 오셔서 지내십시오.’하고 청하며 우리에게 강권하였다.” 바오로 사도는 신자로서 맛과 멋을 아는 리디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리디아는 세례를 받기 전에도 하느님을 알았고, 세례를 받은 후에는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방인의 도시에서 공동체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신앙인으로서 맛과 멋을 아는 신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본당에서 그런 교우들을 자주 만났습니다. 드러나지 않게 숨은 곳에서 봉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지난번 성지순례 때도 그런 분들을 보았습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힘들어 하는 분들의 짐을 들어주는 분이 있었습니다. 베로니카처럼 지친 분들의 땀을 닦아 드리는 분이 있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맛과 멋을 아는 분들이 함께 했기에 은혜로운 성지순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사제로서의 맛과 멋을 아는 사제들이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으로서의 맛과 멋을 아는 교우들이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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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6. 부활 제6주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 오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제자들이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앙의 길을 걷다 보면 많은 유혹을 만나게 됩니다. 또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진리의 영’과 함께 시련과 훈련의 길을 걷기도 합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수많은 신앙의 선조들을 낳았습니다. 그분들 중 어떤 분은 순교로서 하늘나라의 꽃이 되었고 어떤 분들은 지금 우리에게 신앙을 전해주었습니다.
칼이 목에 들어왔을 때도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하늘나라를 바라봤습니다. 산속 깊이 숨어들어 먹을 것이 없어 생명이 위태로울 때도 하늘나라를 바라봤습니다.
저는 이런 선조들의 모습을 ‘고집’이라고 말합니다. 필자의 ‘고집’이라는 단어가 ‘은총’이라는 단어보다 거슬릴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고집스럽게 하늘나라만을 바라봤습니다.
그 고집은 진리의 영에서 나왔습니다. 진리의 영이 우리 선조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주는 선물은 바로 ‘고집’입니다.
하느님 나라만을 바라보도록 하는 ‘고집’이 그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삶의 전부로 알고 걸어가는 ‘고집’이 그것입니다.
제자들이 그 ‘고집’으로 순교했고,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그 ‘고집’으로 우리에게 신앙을 전해줬습니다.
이제 우리 차례 아닐까요?
진리의 영이 우리에게 ‘고집’의 은총을 베풀어 주기를 바랍니다.
하늘나라만을 바라보는 ‘고집’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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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는 당연합니다.
‘저는 어릴 때 운동선수를 했습니다.
어떤 운동을 했었을까요?’라고 사람들에게 물으면….
씨름, 유도, 레슬링, 스모? 등이 답으로 나옵니다.
얼마 전 미용실에 갔습니다.
여름이 다가오는 터라
‘짧게 잘라주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미용실 사장님이 말했습니다.
‘얼마 전 해병대 높은 분이 바뀌셨다고 하던데 그분이신가요?’
저는 가끔 몸이 크다는 이유로, 다부지다는 이유로 이런 오해를 받습니다.
오해받으면 어떻습니까? 원래 우리는 오해하는 동물인걸요.
가끔 오해받으시나요?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어쩌면 오해받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니까요.
오해받고, 오해하고, 이것이 우리 삶의 모습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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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6. 부활 제6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환대(hospitality)와 보호자 성령(the Paraclete)
교회선교의 본질적 두 요소
일기쓰듯 편안하게 쓰는 강론을 지향합니다. 오늘은 한국 순교성인 103위 시성 기념일입니다. 꼭 40년전인 오늘 1984년 5월6일, 오전 10시25분, 순교자들이 피로 신앙을 증거한 절두산과 새남터 성지가 내다보이는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보편교회의 수장이자 그리스도의 대리자, “평화의 사도” 성 요한 바오로 2세(1920-2005)는 황금빛 곤룡포를 입고 미사주례중 100만명이 신자들 앞에서 라틴어로 103위 순교복자의 시성을 선언했습니다.
이 교황님 황금빛 곤용포 제의는 요셉수도원을 참으로 사랑했던 매듭전문가 김희진 자매가 만들었고 후에 자매님은 남은 황금빛 천으로 제의를 만들어 우리 요셉 수도원에 기증하여 자주 대축일에 입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이에 앞서 교황님이 1984년 5월3일 김포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내려 땅에 엎드려 겸손히 친구(親口, 존경을 담은 입맞춤)하던 장면은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요!
1984년 5월6일 이날은 평신도 92명(여성47명, 남성45명), 성직자 11명(한국외방전교회10명 포함)이 성인이 된, 참으로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적 순간이었습니다. 전 국민이 TV 생중계를 통해 그 감동을 생생히 느낀 국민의 축제같은 날이었습니다. 저는 당시 장충동 분원에 머물러 연학중이던 청원자 신분으로 이 행사에 참여했습니다.
또 교회 뉴스를 보니 지난주 4월29일에는 90세로 선종한 부산교구의 저명한 진보적 신학자 서공석 신부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서인석 신부와 사촌간이자 마르틴 아빠스와 절친관계에 있던 분이셨습니다. 세월이 지나니 대개는 90세 전후로 세상을 떠납니다. 긴듯하나 짧은 인생입니다.
어제 교황청 베드로 광장에서 레지나 첼리 삼종기도후 교황님의 강론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교황님은 “나는 더 이상 너희를 종이라 부르지 않고, 친구들이라 부르겠다” 대목을 중심으로 주님과의 아름다운 우정의 성장을, 그리고 그 우정을 다른 이들과 나눌 것을 강조했습니다.
주님과의 우정, 얼마나 아름답고 정겨운 말마디인지요! 날로 주님과 깊어지는 우정의 관상적 삶인지 뒤돌아 보게 합니다. 정말 우리의 친구가 되시는 예수님과의 깊어지는 우정과 더불어 웬만한 소원도 다 이루어지리란 생각이 듭니다. 어제부터 내린 하루종일 내린 봄비가 지금도 계속 오고 있습니다. 어제 수도원을 찾아 미사에 참석했던 어느 자매는 빗소리에 감격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빗소리 듣기도 힘든 아파트 주택구조라 그럴 것입니다. 빗소리를 들으며 23년전 써놨던 "대화"란 시가 생각났습니다.
“바라봄의 관상만으로는 부족하다
여기에 때로 둘만의 깊고 긴 대화가 필요하다
하늘님과 땅,
멀리서 보기만 했지 못다한 이야기들 너무 많았다
하루종일 두런두런 소리내며 내리는 비
나눠도 나눠도 끝없이 이어지는 하늘님과 땅의 정다운 대화
사랑의 일치
아! 때로 나누고 싶다
관상적 삶중에 주님과의 끝없는 대화를”-2001.7.5
오랜만에 내린 충분한 봄비로 흐르는 불암산 계곡 물소리도 반갑습니다. 하늘님과 땅의 대화를 상징하는 봄비 소리처럼 주님과의 관상적 대화는 신자들의 내적생활을 참으로 풍요롭게 합니다. 이런 관상적 삶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환대와 파라클레토 보호자 성령입니다. 이 둘은 교회 선교 활동에 본질적 요소에 속합니다. 표면에 드러나지 않고 활동하는 역할의 겸손한 환대, 겸손한 보호자 성령입니다.
바로 제1독서 사도행전의 필리피에서의 리디아의 환대가 그 빛나는 모범입니다. 초대교회의 선교활동이 원활할 수 있었음은 이런 자발적 겸손한 환대에 있음을 봅니다. 히느님은 리디아의 마음을 열어 주시어 바오로와 그 선교 일행을 환대하게 하십니다. 다음 대목의 묘사가 참 아름답습니다.
‘티아티라시 출신의 자색 옷감 장수로 이미 하느님을 섬기는 이였던 리디아는 온 집안과 함께 세례를 받고, “저를 주님의 신자로 여기시면 저의 집에 오셔서 지내십시오.”하고 청하며 우리에게 강권하였다.’
아마도 분명 바오로와 그 선교 일행은 리디아의 환대에 응해서 그의 집에 머물렀을 것이며 자연스럽게 가정교회가 이뤄집니다. 초대교회는 이런 환대에 바탕한 가정교회가 주류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보이지 않는 숨겨져 있는 겸손한 환대 없이 초대교회의 선교활동은 불가능했습니다. 이리하여 필리비는 바오로와 그 선교 일행의 활약에 힘입어 지역선교에서 유럽 대륙 선교의 영광스러운 교두보이저 전초기지가 됩니다. 물론 당시의 바오로와 그 일행은 몰랐겠지만 하느님의 계획에는 유럽 대륙의 선교가 있었던 것입니다.
겸손한 관상적 환대에 이어, 겸손한 파라클레토 진리의 영이 또 절대적 역할을 합니다. 바로 2주 후에는 진리의 영, 성령님이 오시는 성령강림 대축일이 있고 불교와 사이 좋은 관계를 상징하듯 그 앞 5월15일은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앞서 오시는 부처님이 성령님의 형님처럼 생각됩니다. 참으로 교회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성령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교회의 중요한 행사때는 전례시 성령님이 임하기를 간청합니다. 이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진리의 영을 보내주실 것을 예고하십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주님을 증언하시는 진리의 영, 성령의 역할입니다. 다양한 형태로 우리를 위로하시고 조언하시며 강화하시고 지지하시는 성령입니다. 그대로 성령은 교회 공동체내의 예수님의 현존이 됩니다. 참으로 역설적으로도 온갖 박해중에도 위로자 성령의 도움으로 사랑과 용서, 평화와 정의의 활동에 항구했던 교회였음을 봅니다. 코린토 2서의 다음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그분은 인자하신 아버지시며 모든 위로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환난을 겪을 때 마다 위로해 주시어, 우리도 그분에게서 받은 위로로, 온갖 환난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치듯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리는 위로도 넘칩니다.”
이래서 우리는 주님의 현존인 성령을 우리의 희망이자 참 좋은 위로자, 조력자로 고백합니다. 참으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환대와 더불어 성령과의 친교로 바람직한 관상적 선교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끝으로 환대와 주님과의 친교를 고백한 자작 좌우명시를 나눕니다. 교회는 물론 우리 모두가 지녀할 환대의 앞문과 친교의 뒷문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활짝 열린 앞문, 뒷문이 되어 살았습니다.
앞문은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歡待하여 영혼의 쉼터가 되었고
뒷문은 사막의 고요에 활짝 열려 있어
하느님과 깊은 친교親交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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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6. 부활 제6주간 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빛>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6,1)
빛은
어둠에
삼켜질지언정
스스로를 꺼트려
어둠 속의 목숨을
구걸하지 않으니
참으로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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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6. 부활 제6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요한 15,26)
오소서, 성령이여
오소서, 성령이여,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언제나 하나이신 분,
우리 영혼이 당신의 거룩함으로 가득 차는 시간이 왔습니다.
육과 마음과 입술과 정신은
인류에게 우리의 증언을 소리 내어 말하고
사랑은 죽을 운명의 우리 몸들에 빛을 비추어
살아 있는 불꽃을 사람들이 붙들게 하라.
외아들 그리스도와, 저희가 흠숭하는 성령과
언제나 하나이시며
영원무궁토록 다스리시는 복되신 아버지,
저희 기도를 들어주소서. 아멘.
-암브로시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6 사람은 숭고하다
사람은 새로운 성전이다.
이 말은, 사람을 예로 들면, 우리가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우리가 그분을 쑥 빼닮았다는 뜻이다. 또한 이 말은 “우리의 모든 존재”가 하느님에게 속해 있으며, 하느님만이 우리의 근원이며, 우리의 존재가 하느님으로부터 곧바로 왔으며, 우리가 “하느님을 닮은 유일한 존재”라는 뜻이다. 엑카르트는 이 설교에서, 영혼과 하느님 사이에는 생소함이라든가 거리감과 같은 것이 없다는 것을 상세히 설명한다. 그는, 영혼은 쉽게 하느님을 피하지만 하느님은 항상 영혼 안으로 흘러들고, 절대로 영혼을 피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곧바로 흘러 나오는 신적인 것을 받고자 한다면, 폭포 아래 서 있듯이 하느님 아래 머물러야 할 것이다. 긴 안목으로 보면, “사람은 제아무리 하느님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해도, 하느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모든 은신처가 하느님을 드러낸다. 사람이 제아무리 벗어나고자 해도 결국에는 하느님 슬하로 뛰어게재 마련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닮은 것은 빛이 빛을 닮은 것과 같다. 하느님에게서 벗어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신적인 형상을 너무나 사랑하는 하느님을 죽이는 짓이다.(164)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사도 23,12-22
유다인들이 바오로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다
날이 밝자 유다인들은 모의를 하고, 바오로를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하느님을 두고 맹세하였다.
그 음모에 가담한 자는 마흔 명이 넘었다.
그들이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에게 가서 말하였다. “우리는 바오로를 죽이기 전에는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기로 하느님을 두고 굳게 맹세하였습니다.
그러니 이제 여러분은 바오로에 관한 일을 좀 더 자세히 조사하려는 것처럼 꾸며, 다른 최고 의회 의원들과 함께 천인대장에게 가서 바오로를 여러분에게 데리고 내려오도록 요청하십시오. 우리는 그가 가까이 오기 전에 그를 없애 버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오로의 생질이 그 매복 계획을 듣고 진지 안으로 들어가 바오로에게 알려 주었다.
바오로는 백인대장 한 사람을 불러, “이 젊은이를 천인대장에게 데려다 주시오. 그에게 알려 줄 것이 있다오.” 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백인대장이 그를 천인대장에게 데리고 가서 보고하였다. “수인 바오로가 저를 불러 이 젊은이를 천인대장님께 데려다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천인대장님께 드릴 말씀이 있답니다.”
천인대장이 그 젊은이의 손을 잡고 아무도 없는 데로 가서, “나에게 알려 줄 것이 무엇이오?” 하고 물었다.
그가 대답하였다. “유다인들이 바오로에 관하여 좀 더 자세히 신문하려는 것처럼 꾸며, 내일 그를 최고 의회로 데리고 내려오도록 천인대장님께 청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믿지 마십시오. 그들 가운데에서 마흔 명이 넘는 사람이 바오로를 치려고 매복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오로를 없애 버리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기로 하느님을 두고 맹세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준비를 갖추고 천인대장님의 승낙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천인대장은 “이 사실을 나에게 알렸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시오.” 하고 지시한 뒤에 그를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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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6. 부활 제6주간 월요일.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요한 복음서의 긴 ‘고별 담화’가 마무리되면서, 오늘 복음은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심을 예고합니다.
“보호자”로 옮긴 그리스 말 ‘파라클레토스’는 ‘파라’(- 주변에, - 옆에)와 ‘클레토스’(‘칼레오’ 동사의 수동태, ‘불린’ 또는 ‘부름받은’)가 합성된 낱말입니다.
직역하면 ‘어떤 것 주변에 있도록 부름받은 자’를 의미합니다.
곧 ‘파라클레토스’는 우리 주변에 늘 함께하도록 불린 존재를 뜻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은 ‘성령’이 “진리의 영”으로서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증언’하는 역할을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사실 어떤 것의 ‘증언’이 필요한 경우는 관련 사건의 정보나 진실 여부가 확실하지 않을 때입니다.
법정에서 증인은 그때 거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하고,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 분별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령’과 ‘제자들’이 “나를 증언할 것”이라고 두 번이나 강조하십니다.
예수님의 존재와 신원에 의문이 생길 때 그분의 말씀과 행적이 모두 ‘진리’였음을 증언할 존재는 성령과 제자들입니다.
물론 이들이 ‘증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처음부터 예수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함께한’ 이들만이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이에 소통이 쉽지 않은 이유는 누구의 문제라기보다 처음부터 서로 ‘함께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유한한 인간이기에 시공간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고 함께하지 못하니 소통에도 한계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소통’은 우리의 마음까지 아시며 “처음부터 나와 함께” 계신 ‘진리의 영’과만 가능합니다.
참된 보호자이시고 변호자이시며 증인이신 성령! 이제 다가올 성령 강림 대축일에 우리가 받게 될 최고의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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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6. 부활 제6주간 월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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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15,27;16,1)
부활 시기에 사도행전을 들으면서, 교회는 어쩌면 성령의 역사하심과 인간 사역使役의 결실임을 더 분명하게 확신하게 됩니다. 부활과 성령강림을 체험한 사도들은 부활의 증인으로 온 세상에 파견되어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선교활동에서 사도들은 스승이시며 주님이신 예수님처럼 ‘환영과 환대’ 혹 ‘배척과 거부’를 겪게 됩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일과 하느님의 사람은 “사람들이 나를 박해했으니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 (요15,20)하는 말씀을 실제로 체험했습니다. 바오로와 티모테오는 필리피에서 리디아와 그 가족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저를 주님의 신자로 여기시면 저의 집에 오셔서 지내십시오.” (사16,15)라는 환영과 환대를 받고 그곳에서 활발하게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이토록 성령의 역사하심에 힘입은 사도들은 예수님의 증인으로 활동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선교활동에서 이런 환대만 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때론 거부와 배척 그리고 박해까지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할 것이며,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 (15,26)하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증언할 사명은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우리가 ‘주님이 누구시며, 주님께서 이루신 일이 무엇인지 세상에 증언하는’ 주님의 참된 사도가 되기 이전에 먼저 참된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참된 제자가 될 때 참된 사도가 되는 것입니다. 제자는 배우는 사람이라면 사도는 전하는 사람입니다. 첫 제자들과 우리와 동질성은 바로 진리에 대한 갈망과 추구일 것입니다. 복음은 참된 그 무엇을 찾고 추구하는 인간에게 그 해답을 줍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의 첫 만남의 이야기에서 (요한 1, 39~39) 이것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다가오는 제자들을 향해서 예수께서는 그들 마음의 깊이를 헤아리시고 “와서 보라!”고 초대하였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세대를 거쳐 참된 그 무엇을 추구하는 인간에 대한 실존적 응답이며 초대입니다. 진리와 생명에 도달하리라는 확신 속에 제자들은 기꺼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과 함께’ 처음부터 생활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이 바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다.” (15,27) 라는 뜻이고, 이 함께 머무는 시간을 통해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함께 하면서 듣고 본 것이 참된 증언 곧 복음 선포의 핵심 내용입니다. 복음 선포는 직접 보고 듣고 만짐을 통해 체험한 진리를 세상에 증언하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예수님으로부터 듣고 본 것을 성령의 도움으로 다시 기억하고 숙고한 바를 자신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성령과 함께 현실화시키는 행위입니다. 이렇게 사도가 되기 위해선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자신들이 직접 보고 듣고 만지는 제자 기간이 필요하고 요구됩니다.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한 것보다 더 강력한 선포가 어디 있습니까? 체험하지 않는 자의 선포는 장님이 장님을 이끄는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체험이 곧 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과 함께 자신의 증언자가 될 것을 격려하고 당부하시면서 동시에 듣기 민망하고 서글픈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16,1) 여기서 우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 언급하신 말씀을 알아듣기 위해선 이미 수요일 복음을 통해 함께 묵상했던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상기해야 합니다. 가지가 나무로부터 떨어져 나가면 열매를 맺지 못하고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리며 마침내 불 속에 던져 태워버리게 됩니다. 떨어져 나간 가지(=믿음을 잃은 사람들)와 같은 운명을 당하지 않길 바라는 노파심에서 하신 당부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 자신도 마음이 아프셨으리라 봅니다. 사실 주님께서 그토록 간절히 제자들에게 당신 사랑 안에 머물며 열매 맺는 삶을 살기 원했건만 당신 생전에 이미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유다 이스카리옷은 공개적으로 떨어져 나가 불 속에 던져지듯 자살했잖아요. 그리고 예수님 사후에 또 많은 제자가 믿음을 잃었고요. 그러기에 우리 가운데 어떤 누구도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시련과 박해를 통해서만이 진정한 제자가 누구이며 사도인가를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결국 오늘의 말씀은 다원화되어 가는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향한 주님의 노파심이며 격려라고 봅니다. 이렇게 나무에서 떨어진 가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진리의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성령과 우리는 공동 증언자입니다, 이는 세상에 이미 당신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구원을 선포하고 완수하기 위해서 주님은 우리의 도움과 협조가 필요합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 세상을 향해 아버지의 구원계획을 선포하는 데 있어서 성령 없이는 우리는 참된 증언자가 될 수 없지만, 성령은 또한 우리를 통하지 않고서는 참된 복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선포할 수 없습니다. 성령과 우리는 공동 증언자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사람들로부터 박해당할 때, 주님에게서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고” (16,1)하고 말씀하시면서 이내 그렇게 박해당할 때, “너희에게 내가 이렇게 말한 것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16,4 )하고 말씀하십니다. 곧 이런 일을 겪을 때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신’ 주님에게서 떨어지지 않도록 주님 안에 항구하게 머물고, 보호자인 성령께 의탁하라는 격려이며 당부입니다. 또한 그러한 박해의 때 그들이 너희에게 그렇게 하는 까닭이란, “그들은 아버지와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짓을 할 것이며” (16,3),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받았다.” (마5,12) 는 사실을 기억하여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의 증언자로 충실하라, 는 당부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 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마태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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