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왕 3(忠烈王三) |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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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왕 3(忠烈王三) |
신묘 17년(1291), 원 지원 2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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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왕 3(忠烈王三) |
신묘 17년(1291), 원 지원 2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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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記) |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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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記) |
곡주(谷州) 공관(公館)의 새 누각에 대한 기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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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19일 (기미) | ||||
계품사(計稟使)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김첨(金瞻)을 보내어 경사(京師)에 가게 하였는데, 첨(瞻)이 왕가인(王可仁)과 함께 갔다. 주본(奏本)은 이러하였다. “조사해 보건대, 본국의 동북 지방(東北地方)은 공험진(公嶮鎭)으로부터 공주(孔州)·길주(吉州)·단주(端州)·영주(英州)·웅주(雄州)·함주(咸州) 등 고을이 모두 본국의 땅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요(遼)나라 건통(乾統) 7년에 동여진(東女眞)이 난(亂)을 일으켜서 함주(咸州) 이북의 땅을 빼앗아 웅거하고 있었는데, 고려(高麗)의 예왕(睿王) 왕우(王俁)가 요(遼)에 고(告)하여 토벌할 것을 청하고 군사를 보내어 회복하였고, 원(元)나라 초년(初年) 무오년(戊午年)에 이르러 몽고(蒙古)의 산길보지(散吉普只) 등 관원이 여진(女眞)을 거두어 부속시킬 때에, 본국(本國)의 반민(叛民) 조휘(趙暉)와 탁청(卓靑) 등이 그 땅을 가지고 항복하였으므로, 조휘로 총관(摠管)을 삼고, 탁청으로 천호(千戶)를 삼아 군민(軍民)을 관할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여진(女眞)의 인민(人民)이 그 사이에 섞여 살아서, 각각 방언(方言)으로 그들이 사는 곳을 이름지어 길주(吉州)를 ‘해양(海陽)’이라 칭하고, 단주(端州)를 ‘독로올(禿魯兀)’이라 칭하고, 영주(英州)를 ‘삼산(參散)’이라 칭하고, 웅주(雄州)를 ‘홍긍(洪肯)’이라 칭하고, 함주(咸州)를 ‘합란(哈蘭)’이라 칭하였습니다. 지정(至正) 16년에 이르러 공민왕(恭愍王) 왕전(王顓)이 원나라 조정에 신달(申達)하여 모두 혁파(革罷)하고, 인하여 공험진(公嶮鎭) 이남을 본국(本國)에 환속(還屬)시키고 관리를 정하여 관할하여 다스렸습니다. 성조(聖朝) 홍무(洪武) 21년 2월에 호부(戶部)의 자문(咨文)을 받았사온데, 호부 시랑(戶部侍郞) 양정(楊靖) 등 관원이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의 성지(聖旨)를 흠봉(欽奉)하기를, ‘철령(鐵嶺) 이북(以北)·이동(以東)·이서(以西)는 원래 개원(開原)의 관할에 속하였으니, 군민(軍民)을 그대로 요동(遼東) 관할에 소속시키라.’ 하였습니다. 본국에서 즉시 상항(上項)의 사건으로 인하여 배신(陪臣) 밀직 제학(密直提學) 박의중(朴宜中)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받들고 조정(朝廷)에 가서 호소하여 공험진 이북은 요동에 환속하고, 공험진 이남에서 철령까지는 본국에 환속시켜 주기를 빌었습니다. 당년 6월 12일에 박의중이 경사(京師)에서 돌아와서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받아 보니, 본부 상서(本部尙書) 이원명(李原明) 등 관원이 당년 4월 18일에 성지(聖旨)를 흠봉(欽奉)하기를, ‘철령의 일로 인하여 왕국(王國)에서 말이 있다.’ 하시고, 전과 같이 관리를 정하여 관할해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지금 흠차(欽差)하신 동녕위(東寧衛) 천호(千戶) 왕수(王脩)가 싸 가지고 온 칙유(勅諭)를 받들어 보니, ‘삼산(參散)·독로올(禿魯兀) 등처의 여진(女眞) 지역의 관민인(官民人) 등을 초유(招諭)한다.’ 하셨습니다. 상고하건대, 삼산 천호(參散千戶) 이역리불화(李亦里不花) 등 10처 인원(十處人員)이 비록 여진 인민(女眞人民)에 속해 있기는 하나, 본국 지면(本國地面)에 와서 산 지가 연대가 오래고, 호인(胡人) 나하추(納哈出) 등의 군사와 왜구(倭寇)의 침략을 여러 번 겪었기 때문에, 조잔(凋殘)하여 거의 다 없어지고, 그 유종(遺種)의 남아 있는 것이 얼마 없으며, 또 본국의 인민과 서로 혼인하여 자손을 낳아서 부역(賦役)에 이바지 하고 있습니다. 또 신(臣)의 조상(祖上)이 일찍이 동북 지면(東北地面)에 살았으므로, 현조(玄祖) 이안사(李安社)의 분묘가 현재 공주(孔州)에 있고, 고조(高祖) 행리(行里)와 조(祖) 이자춘(李子春)의 분묘(墳墓)가 모두 함주(咸州)에 있습니다. 생각건대 소방(小邦)이 성조(聖朝)를 만난 이래로 여러 번 고황제의 조지(詔旨)를 받았사온데, 화외(化外)를 구분하지 않고 일시동인(一視同仁)하였으며, 또 성조(聖朝)의 호율(戶律) 내(內)의 한 조목에 준하면, ‘홍무(洪武) 7년 10월 이전에 다른 고을로 유이(流移)하여 일찍이 그곳의 호적(戶籍)에 등재(登載)되어 부역(賦役)에 종사하고 있는 자는 논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소방(小邦)은 이미 동인(同仁)의 가운데에 있사옵고, 공험진 이남이 또 고황제의 ‘왕국유사(王國有辭)’라는 명령을 입었사오니, 그곳에 살고 있는 여진 유종(女眞遺種)의 인민(人民)들을 본국(本國)에서 전과 같이 관할하게 하시면 한 나라가 다행하겠습니다. 이 때문에 지금 배신(陪臣)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김첨(金瞻)을 보내어 주본(奏本)과 지형 도본(地形圖本)을 받들고 경사(京師)에 가게 하여 주달(奏達)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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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선대 능 목록
왕, 왕비 태조와 관계 능호 소재지 비 고 고조부 덕릉(德陵) 고조모 안릉(安陵) 증조부 지릉(智陵) 증조모 숙릉(淑陵) 조부 의릉(義陵) 조모 순릉(純陵) 부 정릉(定陵) 모 화릉(和陵)
목조(穆祖)
함경남도 신흥군 가평면 능리
덕릉, 안릉 쌍릉. 함북 경흥의 성남(城南)에서 1410년(태종10년)에 이장.
효공왕후(孝恭王后) 이씨(李氏)
익조(翼祖)
함경남도 안변군 서곡면 능리
정숙왕후(貞淑王后) 최씨(崔氏)
함경남도 문천군 문천면 능전리
도조(度祖)
함경남도 흥남시 운남면 운흥리
경순왕후(敬順王后) 박씨(朴氏)
함경남도 흥남시 마전리
환조(桓祖)
함경남도 함흥 동쪽 귀주동
정릉, 화릉 쌍릉.
의혜왕후(懿惠王后) 최씨(崔氏)
사진 : 조선고적도보(조선총독부/1932년)
목조 덕릉. 효공왕후 안릉
덕릉,안릉 석양 석호
곡장을 두르고 봉분엔 병풍석을 둘렀는데 난간석은 설치되지 않았다. 봉분을 수호하는 석양과 석호등이 온전하게 남아있다.
덕릉, 안릉 문인석 ,무인석. 문인석과 무인석이 서 있는 위치의 상, 하차이가 확연하다.
덕릉 장명등. 쌍릉인 덕릉과 안릉의 봉분 앞에는 각각의 혼유석과 망주석이 있다.
도조 의릉
도조 의릉 후면
언덕위에 봉분을 설치하고 그 언덕 아래 정자각이 세워진 일반 왕릉들과는 다르게 봉분 바로 앞에 정자각이 자리하고 있다.
도조 의릉 정자각
도조 의릉 정자각 내부
도조 의릉 정자각 천정
환조 정릉, 의혜왕후 화릉
정릉과 화릉은 하나의 담장 안에 앞뒤로 나란히 즉 안쪽에 정릉, 앞쪽에 화릉을 조성한 상하이봉릉(上下異封陵)이다.
일반적으로 쌍릉은 좌·우로 조성하지만 이것은 풍수지리상 능의 위치를 정혈에 두고자 이루어진 설계이다.
이러한 상하이봉 형태의 쌍릉은 효종과 인선왕후의 무덤인 여주의 영릉과(寧陵) 경종과 선의왕후의 의릉(懿陵)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환조 정릉, 의혜왕후 화릉 측면
환조 정릉, 의혜왕후 화릉 전면
환조 정릉, 의혜왕후 화릉 문, 무인석
동독의 건축설계사였던 에리히 로베르트 레셀(1919~1975)은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북한 재건을 돕기위한 사회주의 국가들의 건설지원단으로 파견되어 1956~1957년 1년간 함흥과 흥남의 도시계획팀장으로 근무했다.
레셀은 자신이 근무했던 함경남도 일원과 그가 여행했던 개성과 평양등을 찍은 사진 삼천여장을 남겼는데 그 중 250여장이 실린 책이 출판되었다. 그 사진들 중에 북한의 문화재 사진들도 여러장 들어있는데 반갑게도 함경남도 일원에 있던 태조의 선대 왕릉 사진들 3장이 포함되어 있어 1950년대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아래 사진 : <동독 도편수 레셀의 북한 추억/효형출판/2000년> 중에서
목왕 덕릉비, 효비 안릉비.
태조는 자신의 고조부모를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목왕(穆王)과 효비(孝妃)로 추존하였다. 그들의 묘인 덕릉과 안릉에 세워진 비석일 것이다. 목왕과 효비는 태종 때 목조와 효공왕후로 존호가 바뀌었다.
익조 지릉 석물
태조의 조부인 익조의 지릉의 무인석과 동물 석상이다. 동물 석상에 올라탄 아이들은 레셀의 일행인 동독 기술단의 자녀들이다.
환조 정릉, 의혜왕후 화릉 동쪽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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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강목 제11상 | 원문이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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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인년 고종 41년(송 이종 보우 2, 몽고 헌종 4, 12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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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1일 (을해) | ||||||||||||||||||||||||||
강원도 관찰사가 아뢰기를,
“삼척부(三陟府)의 동산(東山) 이릉실(伊陵室)에 어떤 사람이 뼈를 태워 장사하였사오니, 의심날 만한 사람 10여 명을 잡아서 국문(鞫問)하겠습니다.” 하니, 회유(回諭)하기를, “간사한 무리들이 풍수(風水)의 길(吉)함을 듣고 도장(盜葬)하였으니 그 죄가 가볍지 않다. 그러나 혹독한 추위에 갇힌 사람이 많으니 내가 매우 이를 불쌍히 여긴다. 그 실정이 의심날 만한 사람 외의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보방(保放)하게 하고, 그 능실(陵室)의 대수(代數)는 옛날의 전적(典籍)을 상고하고, 또 삼화사(三和寺)에 간수한 불경(佛經)은 어느 사람이 이룬 것이며, 어느 사람이 쓴 것인가를 아울러 상고하여 계(啓)하게 하라.” 하였다. 처음에 전 현감(縣監) 김계(金啓)가 효령 대군(孝寧大君)을 통하여 아뢰기를, “삼척(三陟)은 고로(故老)들이 서로 전해 말하되, ‘동산(東山)의 이릉(伊陵)은 곧 목조(穆祖)의 부모(父母)의 능(陵)이고, 삼화사에 간직된 금은자경(金銀字經)은 목조(穆祖)께서 손수 쓴 불경이라.’ 합니다.”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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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15일 (갑오) | |||||||||||||
경상 감사 구봉서(具鳳瑞)가 치계하기를,
“풍기(豊基) 사람 박지영(朴之英)이 꿈에 황지(黃池)의 능묘(陵墓)를 찾아냈다 하고 이어 몽서(夢書) 1책을 올렸습니다.” 하였다. 처음에 목조(穆祖)의 황고비(皇考妣)가 전주(全州)에서 삼척(三陟)으로 옮겨가 살다가 죽자 그곳에 장사지내고, 목조는 북도(北道)로 옮겨가 그곳에서 살았다. 그래서 마침내 삼척에 있는 장지(葬地)의 소재를 잃어버렸다. 세상에 전하는 말로는 ‘능이 황지의 노동(蘆洞)에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거기에 투장(偸葬)을 했다.’고 하나 사실인지 알 수가 없고, 《여지지(輿地誌)》에도 동산리(東山里)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어느 언덕인지 알 수가 없어, 여러 대의 조정에서 그곳을 찾으려고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그런데 박지영이 스스로 말하기를, “꿈으로 인하여 그곳을 알아냈는데, 그곳 가까이 사는 주민이 그 묘를 파내고 정혈(正穴)에 투장을 했다. 태조·세종·선조 세 임금의 신령이 나에게 그곳을 가르쳐 주면서 조정에 그 사실을 고하게 하였다.” 하였는데, 그 말이 영남 일대에 전파된 지가 수년이 되었다. 박황(朴潢)이 그 이웃 고을을 왕래하다가 그 말을 듣고 이상하게 여겨, 서울의 여러 재신들에게 그 사실을 말해 주었다. 이에 감사로 하여금 그곳을 방문하고서 그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도록 한 것이다. 이른바 몽서(夢書)는 글이 무려 1만여 자나 되었는데, 그 내용은 대략, “백두산(白頭山) 정맥(正脈)이 태백산(太白山)에 결집하여 동해(東海)를 안(案)으로 삼았으니, 황지의 묘는 곧 운이 트여서 왕이 나올 좋은 묏자리이다. 조선의 왕업이 본디 여기에서 비롯되었는데, 지금 간악한 백성이 그곳에 투장하여 선조의 신령이 안식처를 잃었기 때문에 나라에 난리가 많이 일어나서 장차 위망의 지경에 이른 것이다. 지금 만일 다시 장사를 지내고 봉분을 하고 나무를 심는다면 국운을 연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세 임금의 신령께서 선령(先靈)이 간악한 백성에 의해 파헤쳐진 것을 가슴 아프게 여기고 국운이 연장되지 못할까 걱정하여, 하루 빨리 조정에 보고하기를 재촉하였는데, 그 말씀이 매우 간절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지석(誌石)과 표석(表石)이 모두 있는데, 모처에 간직되어 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세 임금께서 명패(命牌)와 옥규(玉圭)를 주어 신표(信標)로 삼도록 했다.” 하였는데, 말들이 분명치 못하고 괴이하며, 이른바 명패니, 옥규니 하는 것은 더욱 황당하였다. .............................................................................................................................................................................
《여지승람(輿地勝覽)》에, “목조 황고(穆祖皇考 이성계(李成桂)의 고조부 이안사(李安社))의 묘(墓)는 부(府 삼척군(三陟郡))에서 서쪽으로 45리 노지동(蘆池洞)에 있고, 황비(皇妣 이성계의 고조모)의 묘는 부에서 서쪽으로 30리 동산(東山)에 있다.” 라고 하였고, 지리지(地理誌)에도 그렇게 되어 있다. 또 옛 이원(吏員)이던 김윤직(金允直)이 소장(所藏)하고 있는 고사(古事)에도,“정통(正統) 연간, 우리 세종 때에 감사(監司) 이심(李審)이 왕명(王命)을 받들어 묘가 있는 곳을 수소문하였는데, 옛 늙은이 고봉생(高鳳生)ㆍ조흥보(曺興保)ㆍ최산봉(崔山鳳)ㆍ최흔만(崔欣萬)의 아내와 최산덕(崔山德) 등이 알려온 내용에 ‘황고의 묘는 노동에 있고, 황비의 묘는 동산에 있다.’라고 하였다.” 라고 되어 있다. 홍치(弘治) 초년, 우리 성종(成宗) 때에 종부시에서 전교(傳敎)를 받고 본도(本道)에 공문을 발송하여 감사(監司)에게 직접 나가서 두 묘의 퇴락된 상황을 조사하여 보고하라 하였고, 이듬해 경술년(1490, 성종21)에는, 예조에서 전교를 받고 명을 내려 산소를 수축(修築)하라고 하였다가 이내 수축은 그만두고 수호만 하라고 명하였다.가정(嘉靖) 중엽, 우리 명종(明宗) 때에는, 감사 윤인서(尹仁恕)의 장계(狀啓)에 의하여 해마다 봉심(奉審)하고, 양민(良民) 네 집을 두어 묘를 수호하도록 하였다. 또 만력(萬曆) 초에는 감사 정철(鄭澈)이 묘의 위치도를 그려 올리고서 수축하기를 청하였는데, 그 당시 삼공(三公)들의 의논이 한결같이 성종 때의 옛일에 의하여 시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때 정병(正兵) 임호(林)와 역리(驛吏) 김계수(金戒守) 등이 나라의 은택(恩澤)을 바라서 거짓으로 말을 만들기를, “두 분의 묘가 모두 황지(黃池)에 있는데, 석물(石物)도 그대로 있다.” 하였고, 또 무관(武官) 강사룡(姜士龍)이라는 자도 상소하여 그 말을 사실이라고 하였으며, 사대부들도 이것을 믿는 이가 많았다. 그래서 경연관 이발(李潑)과 김륵(金玏) 등이 임금에게 아뢰어서, 산속을 조사하여 이를 찾아보기를 청하게 되었는데, 모두가 거짓이어서 끝내 실재의 묘를 밝혀내지 못하였다. 이로부터 노동과 동산의 두 묘를 수호하고 봉심하는 예가 폐지된 것이 지금 80년이 넘었다. 또 일설에는,“황비 정씨(鄭氏)의 묘가 평창(平昌)에 있다.” 하는데, 이 말은 이곳 사람들의 전설이 잘못된 것이다. 족보(族譜)의 도표를 고증해 볼 때, 효비(孝妃 황비를 가리킴) 이씨(李氏)의 아버지인 천우위 장사(千牛衛長史) 이공숙(李公肅)과 그의 아내 돌산군부인(突山郡夫人) 정씨(鄭氏)의 두 묘가 모두 평창에 있고, 제사 지내는 의식까지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두 묘는 다시 의심할 여지가 없다. 목조가 옛날에 살던 유허(遺墟)는 노동과 동산 사이에 있는데, 거리가 각각 5, 6리 정도이며, 지금까지 그때의 담장과 주춧돌이 남아 있고, 또 마을 늙은이들도 그때의 집터와 텃밭터라고 전하고 있다. 그런데도 산소가 있는 곳이 전해지지 않았겠는가?삼척부는 태조와 태종 때부터 군(郡)에서 부로 승격시키고, 부사(府司)에게 서대(犀帶)를 하사(下賜)하여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는데, 전하기를, “목조의 외가 고향이기 때문이다.” 라고 한다. 이곳은 외진 바다 모퉁이여서 고증할 만한 문헌(文獻)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삼척과 평창은 다만 후비의 고향일 뿐만이 아니니 어찌 분묘가 있는 고향이 아님을 알고도 서대를 하사하였겠는가. 널리 고사를 수집하고 노인들에게 문의하여 손 대부(孫大夫)의 실기(實記)에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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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간단하게 정리좀.. 너무 길어서 읽기가..
글도 다 않 썼는데 꼭 먼저들 댓글 다시네여...허긴 너무 오래 썼지여...ㅡ,. .ㅡ
어느 개구리님들이...자료 요구 꼬투리질들이시니...그래,의무적으로 먼저 제시한 자료들이니...
이제 막 쓴 맨 위의 본문만 읽으시면 되십니다.
나는 딱 두 줄을 읽었을 뿐인데... 모순과 왜곡이 줄줄줄 ^^ 기대합니다.^^
제가 작성한 글은 아무것도 없고...다 기본 역사자료들 먼저 펌한 자료들인데 뭔 모순여...?
위에 이제야 제글 달았으니 보고나 논하시길 부탁드립니다.
아무글도 않 썼었는데...뭘 보시고 모순이란 건지...?
잘보고갑니다 대륙조선사도 어찌보면 하나의주장이기도하고 사실일가능성도 있기에 저도 중간적인입장에서 동의합니다
저도 한표!
네 맞습니다...제 글이 정답니란게 아니고...저도 또 수정보완될 겁니다.
전에도 자신있게 가설 냈다가 포기한것 많고...지금 주장도 언제든 수정됄 수 있는 가설단계인데..
이런 시도들이 쌓이고 쌓여 공감하는 뭔 공통의 합의된 대륙조선사관이 생기면...
그게 짱께들과 싸울 최대의 무기지...
현재의 강단사학이나...
어정쩡하게 북경 주변만 더듬는 동북삼성 고조선설론.,..절대 짱께들 개수작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궐한 확실히 저도 흔히말하는 북경 동북삼성쪽만을 보지는않고요 삼위산,태백산 즉 중국 섬서성쪽 거기를보고있습니다 부도지와 연관지어서요
사서에 나오는 사실과 유적의 실재가 다를 경우 원인은 두 가지이죠... 세월따라 유적이 변했거나, 사서가 엉터리거나... 아! 또하나 있네요...GPS 성능에 이상이 있었거나... ㅎㅎ
조선총독부에서 만들어준 반도사관 역사위서를 해방후 검증하고 받아 들여야 하는데 그게 없조 이병도의 농간으로 반도설이 사실이라고 우기는 분들은 검증서를 보여주시길 검증서 없이 반도설 우기는 것은 개구리소리다 반도사관에 입각하여 설명하는 글을보면 뭘 증명하려고 하는지 전혀 알아보기 힘들고 악쓰는 소리만 있으니 참견하고푼 마음이 사라진다 ,,,,,,
대륙조선설이 짱깨의 동북공정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사대적 시각과 패배주의에서 나온 결과적으로 짱깨사관입니다.
자긍심이 뭉게진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유대인이 2000년간 나라없이 살았을때 역사를 가지면 죄인이 되는 것이 됩니까 유대인이 역사의 자긍심이 있기에 다시 나라를 세우는 것이조 조선총독부에서 만들어준 반도설이 우리에 정사라고 우기는 것은 자긍심이 뭉게진 사람들의 이야기조 사대의 시각을 버리고 다시 보십시오 유대인이 나라가 없을때 역사를 가지고 있으면 안된다는 논리와 같은것이 우리가 대륙에 나라가 없기에 안된다는 소리와 같은 것으로 들립니다 자긍심이 살아 있다면 대륙사를 부정하는 말은 안 합니다 ,,,,,
@태양해 나는 대륙사를 부정한 적이 없어요... 단, 수도만 한반도에 두면... 중원은 물론이고... 맥시코 아르헨티나까지 우리 영역이었다는 주장도 시비 걸지 않습니다... 이게 참다운 대륙사관입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수도는 런던에 두고도 해가 지지 않은 나라를 만든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