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제와 이상의 풋사랑 / 김병중
여학교 본관 뒷 건물, 단독으로 지어진 작은 건물 하나가 보인다. 녹음이 짙푸른 오월 어느 토요일 오후, 학생들이 하교하고 난 뒤 이십여 평 남짓한 음악실에는 열여덟 살 동갑내기인 남녀 학생 둘의 숨소리가 들린다. 곧이어 적막이 깨지고 영이가 윤기나는 피아노 뚜껑을 번쩍 열어 설렘과 신열의 기운을 머금은 매력적인 연주를 시작하자 나는 영이가 앉은 피아노 의자에 나란히 앉는다. 건반 위를 빠르고 능수능란하게 움직이는 하얀 손과 열정적인 선율에 실눈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엘리제를 위하여>와 <소녀의 기도> 두 곡의 연주가 끝나자 실내는 다시 조용해진다.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다시 한번 쳐달라고 검지손가락을 세워 보인다. 영이는 즐거운 듯 멈췄던 어깨를 다시 들썩이며 피아노 건반을 신나게 두드린다.
남자 여자 학교가 한 울타리 안에 있으니 남녀공학도 아니고 그렇다고 남자학교도 아니었다. 이런 환경이 조성된 것은 두 고등학교가 같은 재단인데 남자학교를 갑자기 신설하면서 미처 교사가 완공되지 못해 여자고등학교에 교실을 빌려 쓰는 처지였으니 어쩌면 좋고 어쩌면 불편 그 자체였다. 강당이나 운동장같은 시설은 두 학교가 시간표를 살펴 가면서 같이 행사를 하거나 아니면 따로 실시했다.
여자학교에 갑자기 남녀 고교생들이 한 울타리 안에 섞여 있으니 선생님들은 쉬는 시간마다 남자 화장실 앞에 서서 용변을 보고 나오는 학생들의 바지 지퍼를 올렸는지까지 확인하며 엄한 규율을 만들어 통제를 강화했지만, 언제라도 남녀가 가까워질 수도 있을 법했다. 그랬어도 직접적인 계기가 없는 한 대개 남녀 학생들은 소 닭 보듯 지나치는 분위기였다. 나는 학교 글짓기대회에서 장원을 여러 번 차지하여 여학생들에게 익히 알려진 얼굴이 되었고, 영이는 성악을 하는 데다 특히 소프라노였으니 각종 행사가 있을 때마다 독창으로 무대에 서게 되어 유명인사가 되었다. 어버이날이나 스승의날이면 나는 글짓기대회 장원으로 뽑힌 글을 전체 조회시간에 강단에 올라가 낭송을 했고, 영이는 부모님 은혜와 스승의 은혜같은 노래를 소프라노 고음으로 유려하게 불렀다.
내가 영이를 알게 된 것은 남녀 학교 음악과목을 맡은 성격이 쾌활하고 생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매력적인 여선생님 덕분이었다. 아직 미혼인 선생님은 영이를 개인 지도하고 있었고, 난 음악 과목을 그 선생님에게 배우는 학생이었다. 어느 날 일과 후 선생님이 저녁이나 같이 먹자며 나와 영이를 같이 불렀다. 그 자리는 선생님 댁이었고, 나는 너무 어색하여 그냥 밥만 먹고 큰 눈만 껌뻑였다.
“중이와 영이는 서로 친구하면 잘 어울릴 것 같아.”
“한 사람은 문학, 한사람은 성악이라 이렇게 만나기가 무척 어려운데. 오늘 저 녁은 두 사람의 친교를 위해 선생님이 쏜다. 맛있게 먹어. 그리고 축하해.”
선생님이 일부러 자리를 만든 이유는 영이가 전국 성악콩쿠르에서 일등을 차지해 명문대 음악 특기생으로 대학 입학이 확정되었고, 나는 전국 고교남녀 글짓기대회에서 당선되어 서울 소재 대학교 문학 특기생으로 진학이 가능한 조건이 되었으니 서울 물을 먹고 공부한 채선생님은 예능에 소질을 보인 둘을 불러 예술의 길은 어려우므로 서로 동행하고 정진하면서 친구로 지내면 좋을 것이라 했다. 그랬지만 나나 영이는 아직 철이 없고 순박하기만 한데다 조용한 성격에 숫기마저 없었으니 그저 선생님 말만 조용히 듣고 있을 뿐이었다.
며칠 뒤 제과점에서 다시 선생님과 함께 다과를 나눈 토요일 오후, 그 자리가 끝나자 학교 음악실로 가서 피아노 의자에 나란히 앉아 대화의 시간을 가지면서 마음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점점 피아노 소리와 음악 시간이 기다려졌고 목월의 <4월의 편지> 가곡을 자주 불렀다. 그리고 그 노래로 음악 실기시험을 쳤는데 선생님은 과분하게도 내게 최고 점수를 주었으니 무척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최고 점수를 받을 정도의 실력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젊은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는다는 구절이 자꾸 입 노래로 되뇌어지면서 왠지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내가 피리를 부는 소년의 마음이 되어 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영이 아버지는 원주에 근무하시다가 전근을 온 교육청 장학사였다. 어머니가 어릴 때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곧 재혼했는데, 그 연유로 어머니 사랑이 부족하여 자기 얼굴 표정이 차갑게 보인다고 말했다. 영이 얼굴에는 차가움 이면에 창백한 느낌이 얼비쳐 약간의 걱정이 들었으나 그걸 직접 물어볼 수 없었다. 이런 그녀의 아픈 과거를 들은 이후 내가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얼마 후 내가 묻기도 전에 자신은 폐결핵이 걸려 장기간 치료를 해왔으며 지금은 약을 끊고 거의 완치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의사 선생님은 성악을 계속하면 폐가 약해져 결핵이 재발하면 악성이 되어 고치기 어려울 것이라 경고를 했단다.
“재발하면 어쩌려고 성악을 계속하니?”
“으응, 나는 다른 사람들과 생각이 달라. 의사 선생님도 경고했고, 아버지도 강하게 반대를 했지만 내 생각은 바뀌지 않아. 난 노래를 하다가 죽을 거야.”
나의 질문에 영이는 담담하게 예상외의 대답이었다. 자신은 노래를 너무 사랑하므로 노래 부르다가 죽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표했다. 육신이 늙어서 죽는 것보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맘껏 하다가 유관순처럼 젊은 몸으로 하늘나라 가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그 말에 경이로움을 느끼며 나도 모르게 영이에게 강하게 끌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속마음을 말했다.
“나도 <오감도>와 <날개>의 시인 이상을 평소 존경해. 사람이 오래 산다고 좋은 글을 쓰는 게 아니지. 요절하는 문인이 되어도 좋으니 심금을 울리는 글을 쓰다 죽는 건 매우 영광스런 일이거든. 그래서 내 필명을 이상(李箱)의 이름을 본떠 김상(金箱)이라 지었어.”
짧은 시간에 영이와 이심전심이 되어 나도 이상처럼 살다가 가겠다고 했으니. 이렇게 마음 털어놓은 둘은 각자에게 주어진 목적을 꼭 이룰 것을 맹약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당분간은 만나지 말고 고3까지는 공부에만 전념하자. 특히 나는 목표로 하는 서울의 대학을 가야하므로 공부에 더 정진해야 한다고 말했고, 영이 또한 우리 둘이 대학생이 된 후 성인으로 만나 세상에서 가장 열정적인 예술가로 선한 영향력을 끼치자고 다짐하면서도, 난 끝내 영이를 좋아하고 있다는 말은 차마 꺼내지 못했다. 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눈빛의 교감은 친구 그 이상임을 느끼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 후 나는 영이가 보고 싶으면 그녀 모르게 음악실 앞에 서서 피아노 연주 한곡 정도를 듣고 와서야 공부에 임할 수 있었다. 이후 정신을 집중해 공부하다 보니 어느새 3학년, 나는 3학년 일 학기가 좀 지난 오월 어느 날 서울로 올라가 공부를 하겠다는 별난 결정을 하기에 이른다. 서울 유명학원에 가서 주요 과목을 보충하고 내 점수를 최대한 끌어올릴 작정이었다. 그리고는 서울로 올라가 피아노 소리도 잊은 채 목숨을 걸듯 맹렬하게 공부에 빠졌다.
그해 대입시험을 한 달여 밖에 남겨두지 않은 어느 날 원서를 쓰기 위해 학교에 나갔다. 그때 가장 절친인 부잣집 막내 도련님같은 동규가 내게 할 말이 있다며 교정 느티나무 아래로 가자고 했다. 곱게 물든 낙엽이 소리 없이 지고 있었고 바람이 약간의 추호가 돋을 정도로 살랑거렸다. 그가 심호흡을 하더니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어렵게 나에게 말을 꺼냈다.
“중이 네가 서울로 간 후 내가 영이와 사귀고 있었어. 너 한테 너무 미안해. 아무 할 말이 없다.”
“뭐, 뭐, 뭐라고?......”
동규가 고개를 숙인 채 자기를 용서해 달라는 상상도 하지 못할 충격적인 선언앞에 나는 실어증 환자처럼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굳게 얼어붙었다.
아, 갑자기 하늘이 뒤집히고 땅이 흔들렸다. 무엇을 말하고 또 어떻게 정리해야 좋을지 몰라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리고 나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등을 돌렸다. 그 뒤 학교에 한번도 가지 않았고 영이와 동규도 만나지 않았으며 그렇게 나는 고등학교를 불량스레 졸업하게 된다. 집에는 극비로 하고 나는 그때 충격으로 대학 입시시험도 치지 않았으며, 긴 노도같은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사람을 향한 분노도 분노지만 그보다 공부에 대한 분노, 그러니까 공부가 아니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동안 영이는 나와 여러 차례 분명히 약속까지 했으나 나를 배신했고 그것도 모자라 내가 가장 친했던 친구와 교제를 이어가다니 정말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절망이 온몸을 휘감았다.
작은 체구에 얼굴은 예쁘장하면서도 까무잡잡한 단발머리의 영이, 두 옥타브가 자연스레 올라가는 고음의 소프라노, 원주에서 태어나 사투리보다 서울 말씨를 쓰는 그녀는 상냥하면서도 약간 살얼음이 낀 차가운 정신의 소유자였지만 결국 나와의 약속은 물거품이 되고 내 눈앞에 불신 덩어리를 던져놓았다. 나는 상당 기간 공부도 버리고 문학은 절필하며 내가 좋아하던 두 사람을 미련 없이 지워버렸다. 아니 나의 무능으로 두 사람을 모두 잃어버리고 살았다. 이유 있는 방황의 시간에 내게 다가온 낭떠러지를 서서히 의지의 벽으로 생각하며 다시 일어서 내 길로 다시 나아가기 시작했다. 어느 날 영이가 내 앞에 불쑥 나타난다면 나는 보란 듯 어엿한 문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 뒤 나는 두 사람의 연락처를 알려면 얼마든지 알 수 있었으나 한번도 누구에게 알아보거나 말을 꺼내지 않고 공부에 몰입했다.
나는 어금니가 아프고 시리도록 입을 앙다물었다. 육 개월짜리 하사관학교 훈련을 받아야 하는 낙엽이 직각으로 떨어진다는 군대도 갔다 오고 그 후 수십 대 일의 관세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세관원이 되었으며, 계속해서 나의 전공인 문학 공부도 학교를 두 번이나 번갈아 가며 정진했다. 해가 여러 번 바뀐 어느 날 내가 대학원 시험을 치는데 시험장에서 감독관이 시험지에 본인 여부를 날인하고 다녔다. 그런데 그때 시험지에 날인 하던 감독관이 갑자기 내 손을 꽉 잡는 것이었다. 커닝을 한 것도 아닌데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보니 천만뜻밖에 옛 친구 동규였다. 내가 할 말을 잃은 것보다 할 말을 전혀 할 수 없는 장소라서 그저 시험을 치는 데만 최선을 다했고, 시험을 마친 후에는 그냥 그곳을 힘없이 빠져 나왔다. 다시 마음의 불을 지필 필요는 없었으나 왠지 아직도 풀리지 않은 복잡한 분노가 남아있음이 감지되었다.
몇 해 전 하늘로 가신 음악 선생님, 어느 날 강남역 부근 한식당에서 고등학교 친구 여러 명과 저녁 자리에 모였다. 그때 선생님은 나를 제일 가까이 앉히고 세관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며 잔뜩 치켜세워주었다. 담배 연기를 길게 뿜으시며 내가 해외 나갈 때 연락할 테니 공항에서 얼굴 한번 보자고 말씀하셨다. 그때 현대건설 부사장 사모님이라고 했으니 그동안 선생님의 긍정적인 삶의 태도가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차마 영이에 대해 안부라도 물어보지 못했고 그럴만한 작은 용기조차 없었다. 그날 전교에서 일등을 도맡아놓고 하던 문호는 대우 법무관실에 근무한다는 명함을 내밀었으나 선생님은 기대 이하라며 시선을 돌려 그의 사기를 꺾어 놓는 걸 보고 내 마음이 미안해졌다.
바우방 문학 동아리를 시작으로 중앙 문단에서 눈썹을 휘날리며 패기 있게 활동을 하던 어느 날, 공시인이 <내마음의 노래>라는 가곡집 6집을 만드는 데 같이 참여하자는 제의를 해 왔다. 원래 떠벌리거나 거드름 피는 걸 싫어하는 나는 한발을 빼고 다음에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공시인은 시 한편 발표하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 시인들은 시를, 음대 교수들은 작곡을 하는데 먼저 시인들이 가사를 내면 그것을 교수들이 추첨으로 받아 작곡한 다음 음반으로 내는 작업이란다. 그리고 이 노래들은 EBS에 방송까지 타는 이렇게 좋은 기회인데 왜 빠지느냐며 조금도 물러서질 않았다. 나의 미온적인 태도에 급기야 자기가 동인지에서 한편 골라서 내겠다고 으름장을 놓아 본의 아니게 참여하게 된다.
첨에 그 시인의 끈질긴 권유에 반대를 한 결정적인 이유는 나의 아픈 과거 탓이라 말하진 않았으나 기실은 이 작업과 관련하여 음대를 생각하면 영이와 동규를 다시 떠올려야 하는 게 너무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다시 나의 근본이 흔들리게 되므로 차라리 먼저 스스로 회피하는 게 옳다는 생각이었다. 몇 달 후 음반이 제작되고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창작 가곡 발표회가 있었다. 그리고 작시를 한 시인들은 관심을 갖고 빠짐없이 참여해야 한다고 했다.
“저것 봐, 단 꿀을 많이 물고서 날카로운 가시를 숨기고 있는 아카시아꽃! 아아, 눈부신 하얀 꽃은 영이의 하얀 칼라, 아니 아카시아 늘어진 꽃술은 <엘리자를 위하여>의 주렁주렁하며 길고 복잡한 악보야.”
나는 영이에게 기울어진 감성과 병적 환상을 지닌 고질 환자였다. 그 환자가 음악 치료를 통해 상처를 치유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는 건 좋은 일이라 생각하며 그날 저녁 참석을 했다. 내 시는 J교수가 작곡하고 소프라노 I씨가 부른 <아카시아꽃>이었다. 영이와 나는 향기나는 아카시아꽃 피던 계절에 만나 이듬해 아카시아 꽃이 지던 계절에 마지막 얼굴을 본 다음 이렇게 긴 세월이 흘렀지만 오늘은 그녀가 달오름 무대에 서서 내 노래를 멋지게 독창하고 있지 않는가. 고음이 올라갈 때마다 아카시아 꽃이 오버랩 되더니 영이 하얀 목젖이 몇 번이나 보였다. 한 소절이 끝나고 2절까지 끝이 나자 나는 기립 박수를 보냈다. 그랬으나 무대에서 내려오는 성악가를 가까이서 보는 순간 아연실색한다. 이게 무슨 변괴일까. 그녀는 영이가 아닌 다른 성악가였고 음색도 아주 달랐으니 이만저만 실망이 아니었다.
살면서 아카시아 꽃이 피는 계절이 오면, 가끔씩 영이 이름을 네이버 검색에 놓고 습관처럼 쳐 보지만 전혀 검색되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영이를 생각하면 할수록 자꾸 영화 <러브스토리>의 주인공 얼굴이 떠오르는 그 이유는 뭘까? 까만 교복에 하얀 칼라, 허리를 잘록하게 묶은 청순한 여고생, 그녀는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 뒤 궁금증과 허탈감을 반복하면서도 긴 세월이 가장 좋은 약이라 기억을 점점 지워나가는데, 그래도 이름은 이상하게 온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한참 뒤 내 마음의 노래 15집에서 그녀의 이름이 보였다. 앗! 소프라노? 그리고 <미안해요>라는 곡을 부르는 것으로 검색되어 다시 조용하던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래 나를 떠난 후 일말의 미안함을 갖고 있다가 이렇게 노래로 갚아준다고 생각하니 작은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미안하다는 노래 한 곡으로 그동안의 상처가 치유될 수 있을지는 아무래도 의문이었다. 컴퓨터를 끄고 눈앞의 모니터가 캄캄해지도록, 아니 하얀 종이가 깜지가 되도록 칠하며 나의 부끄러운 집착을 지워버리려고 애썼다. 그렇게 잊기로 수없이 다짐해 놓고 다시 검색하는 바보짓을 반복하던 하는 도중 드디어 <ㅇㅇ영 독창회>라는 기사가 떴다. 이젠 절대 이대로 그냥 지나치지 못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독창회에 가려고 장소를 검색하면서 영이의 프로필을 찬찬히 확인한다.
“이게 뭐지, 어? 이럴 수가. 이 성악가가 영이와 동명이인이라니.”
더 이상 아무 할 말도 없어지며, 오히려 절망의 벼랑이 평온의 평야로 전개되어 펼쳐지고 있었다. 내 눈에는 바람이었다가 낙엽으로 떨어지던 고3의 우울한 교정의 마지막 결별이 나의 풋사랑 종지부였음에 감사를 느낀다.
52년이 지난 일인데, 지난 2024.6.3. 밤 영이가 꿈으로 나를 찾아왔다. 4시간여의 긴 꿈을 힘들게 꾸면서 예전처럼 엘리제를 위하여와 소녀의 기도를 연주하는 영이 옆에 앉아 나는 넋을 잃고 있었다. 그러다 역시 나답게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손도 한번 잡아보지 못한 채 새벽잠에서 깨어난다. 주섬주섬 나의 시집 <서른 하나의 사랑수첩>에 올린 시 한번을 읊조리며 마음을 추스른다.
들에 핀 꽃의 이름을 몰랐을 때는
그냥 풀꽃이었는데
그 이름을 알고 난 후부터
그 꽃은 나만이 부르고픈 이름이 되었다
꽃잎과 향기와 몸짓에
눈길이 오래 머무는 것은
이름을 혼자 부르고 싶은 욕심 때문일까
봄이 지나고 꽃이 지자
소소한 들풀로 남은 그가
아직 밤마다 이름 모를 그리움의
날개를 접지 않는 건
내가 꽃이름을 기억하며
아직도 봄을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이제 꽃이 없는 날이 와도
그 이름을 부르며
나는 오래도록 들을 떠나지 않는다
-<첫사랑> 전문
몇 해 전 여고 임창 교장선생님이 자신의 퇴임식에 축시 한편 낭송을 부탁했다. 나는 흔쾌히 답하고 만사 제쳐두고 시를 지어 그 행사에 참여했다. 그날 대강당에서 한지에 붓글씨로 쓴 긴 두루말이 시를 풀어가며 낭송하면서도 나는 영이와의 고교 2학년 시절 음악실을 떠올리고 있었다. 혹시 그녀가 이 자리에 스승의 은혜라는 노래를 부르러 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왜 가졌을까. 첫사랑도 풋사랑도 아닌 감정을 아직도 잊지 못하는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자신을 확인하고는 갑자기 얼굴이 붉어졌다.
그동안 혼자만의 비밀로 이 이야길 간직해 오면서 그것이 오히려 풋사랑 증후군이 되어 무시로 가슴 아프게 방아질 한다. 비밀이 없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이라 해도 이제 더 비밀로 안고 갈 수 없다. 이상의 오감도 속을 철없이 뛰어다니는 초현실의 아이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캄캄한 치매처럼 내 기억에서 깨끗이 지우려 한다. 하지만 남자는 첫사랑을 가슴에 묻은 채 무덤까지 가져가고, 여자는 끝사랑의 묘비 앞에 불멸의 꽃을 바친다니 이를 어찌한다?
옛말에 “첫사랑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했으니 이제 소중한 미련 하나쯤은 버리려 한다. 영이와 사랑의 결실보다 예술을 함께 나누는 열정의 친구를 내가 원했던 것이라 자위하며 주름진 마음을 팽팽하게 당겨 본다. 영아, 나는 그리운 이가 마음 속 한곳에 오래 머무르기를 원했지만 엘리제는 피아노 건반 위를 미끄러지듯 어지럽게 뛰어다니고, 이상은 오감도를 펼쳐놓고 제1의, 제2의, 제3의 아이가 되어 엘리제를 쫓아다닌 격이었다. 베토벤은 엘리제를 사랑했으나 마음을 거부당한 후 <엘리제를 위하여>라는 불후의 곡을 남겼어도, 이상은 기생 금홍이를 사랑하며 새로운 비상을 꿈꾸었으나 날지도 못하는 <날개>라는 소설만 남기고 미아리 공동묘지에 누워 있다.
자동기술에 능한 이상이 아무리 미의 여제 엘리제를 그린다 해도 도처에 숨겨진 어둠의 벽이 많아 엘리제가 이상의 꿈을 구현해주지 못한다는 걸 왜 몰랐을까. 첫사랑은 젊은이가 걸린 암과 같아 칼을 대면 될수록 아픔이 커지며 온몸으로 전이되는 위험한 병증이리라. 나는 만다라를 꿈꾸며 수행하는 육신의 중으로, 영이는 육이 아닌 영적 존재로 남아 서로 다른 나라에 유하고 있으니 우린 다시는 지구별에서 재회할 수 없는 남남의 인연이리라. 가다가 어디선가 엘리제를 위하여 피아노 연주 소리가 들려오면 나도 몰래 발걸음이 멈추어지더라도, 난 소녀를 위한 기도는 한번만 하고, 나의 끝 사랑을 위해서는 오래도록 한참 눈물의 기도를 올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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