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100년 - 고난의 3만리
1. 우리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란
- 임시정부, 민족 독립의 꿈과 이상 담은 ‘상징적 존재 가치'
독립운동 시기 1919년 4월 11일-중국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수립- 1945년 8·15 까지 독립운동 주도
내년 2019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이 되는 해다. 일제강점기 당시 중국 대륙의 역사 현장에서 수많은 열사·의사들이 세계 최강 일본 군대와 맞서 싸우며 지금의 대한민국을 지켜냈다.
임정 수립 100년을 앞두고 본지는 장병과 국민들에게 안보의식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27년간 중국 대륙에서 펼친 독립전쟁과 한국광복군의 창설 및 역할 등 다양한 활약상을 소개한다.
임시정부를 계승한 ‘대한민국 정부 수립 국민축하식’ 모습. 필자 제공
2019년, 내년이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대내외에 공표한 지 100년이 되고, 또 ‘왕의 나라’에서 ‘국민의 나라’로 대전환을 이룬 지 100년이 된다는 얘기다. 이때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탄생했고, 국민주권주의에 입각한 ‘민주의 나라’가 만들어진 것이다.
대한민국의 성립은 반만년 우리 역사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었다. 고조선 이래 대한제국까지 우리나라는 군주(왕)가 주권을 오로지하는 전제군주국이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성립으로 주권은 우리 국민 모두가 갖고, 주권을 가진 우리 국민 모두가 화합해 정부를 세워 나라를 운영하는 민주공화국이 된 것이다.
사실 역사는 사람이 만든다. 사람이 자연과 더불어 그리고 사람들과 함께 부대끼며 살아온 발자취가 역사이고 문화다. 그래서 역사 발전의 힘은 무엇보다도 사람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꿈과 이상이다.
독립운동 시기 우리 민족은 자주독립의 꿈과 국민주권의 이상을 담아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만들었다. 일제의 침략으로 국민은 노예 상태에 빠져 있고, 주권은 빼앗기고, 영토는 강점당한 그야말로 척박한 땅 위에 희망의 나무를 심은 것이다.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이것을 근대국가의 조건을 따져 국민, 주권, 영토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으므로 ‘근대 국가와 정부’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자기비하도 그런 자기비하는 없는 것이다.
중국 상하이에 세워진 최초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1919).
더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3·1독립선언과 열화 같은 독립만세 시위운동의 결실이란 발생가치를 가진다. 우리 민족 스스로 “우리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고, 당시 2000만 동포 가운데 적어도 200만 동포가 목숨을 건 독립만세 시위운동으로 분출한 찬성 의사를 결집해 이뤄졌다는 말이다.
이렇게 성립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5년 8·15 광복의 그날까지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우리 민족의 대표기관이자 독립운동의 지도기관으로 중심적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독립을 보장받기 위한 외교활동, 중국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에서 일본군과 직접적인 무장투쟁, 동포 자제들을 위한 민족교육, 인류의 자유와 평화와 인도와 정의를 부르짖은 의열투쟁, 나아가 국내외 동포들을 아우르며 민족독립의 날을 열어갔다.
이 같은 가시밭길 독립운동의 역정에는 온갖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민족독립을 포기한 적도 민주국가의 길을 버린 적도 없었다.
더욱이 일제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군을 창설했다. 바로 한국광복군이다. 이를 바탕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연합국과 합세해 싸웠다. 중국국민군의 대일 항전을 지원하고, 영국군을 도와 인도 미얀마 전선에서 일본군과 맞서고, 미국 전략첩보국(OSS)과 연합으로 국내 정진 작전을 추진한 것이다.
8·15 광복은 연합국 승전의 부산물도,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손님도 아닌 것이다. 우리 민족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워 피땀으로 이룬 성취이자 결과라는 말이다.
임시정부의 역할 가치도 있었지만 -동포들에게 위안됐단 ‘존재 가치’ 커
흔히 우리는 “꿈은 이루어진다”라고 말한다. 얼마 전에 도산 안창호 선생의 사적지를 조사하기 위해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거기 리버사이드시청 광장에 세워진 안창호 선생의 동상을 찾은 것이다. 그곳에는 안창호 선생의 동상뿐만 아니라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동상도 서 있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리버사이드시 광장에 서있는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 동상
두 손으로 흑인 남녀 아이의 손을 잡고 힘차게 걸어가는 킹 목사의 동상 받침돌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I Have A Dream.” 나는 꿈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그 구절을 보는 순간 미국 최초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떠올랐다. 매우 배타적인 백인 중심 사회에서 흑인 대통령이 탄생한 이유가 바로 거기 있었던 것이다.
대한민국 100년을 맞이할 우리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주는 역사적 의의도 바로 여기에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운 발생가치도 중요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이룬 역할가치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존재가치다.
우리 민족이 꿈조차 잃어버린 고난의 시기가 일제강점기 아닌가? 그런 엄혹한 시기에 우리에게 위안이 되고 민족독립의 꿈과 이상을 잃지 않게 했던 것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존재였다. 그래서 저 유명한 여성독립운동가 김마리아도 상하이 국민대표회의 석상에서 목청 높여 얘기한 것이다.
국내에 들어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팔지 않으면 밥 한 끼도 얻어먹지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강제로 학병에 끌려간 수많은 우리 젊은이들이 죽기 살기로 탈출해 찾아간 곳이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사실이 그 존재가치를 잘 말해 준다. 헌법 전문에서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하는 생생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출처] : 김용달: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임시정부 100년, 고난의 3만리> / 국방일보
2, 대한민국 임시정부, 3·1독립운동의 옥동자 - 독립 향한 피의 투쟁
…임시정부 ‘꽃’을 피우다
중국·일본·러시아 등 해외서도 독립선언 참여 -독립운동 최고조였던 4월11일 임시정부 탄생
27년 동안 대한 민족 대표기관으로 역할 수행
여성들의 독립만세시위운동. 필자 제공
3·1 독립운동 시기 4개 지역서 독립운동 선포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독립운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독립운동으로 성립했고, 3·1독립운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으로 그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독립운동의 옥동자이자 계승자라는 말이다.
중요한 것만 들더라도 3·1독립운동 시기 4개 지역에서 독립선언이 발표됐다. 만주 길림의 대한독립선언, 일본 도쿄의 2·8독립선언, 국내 서울의 3·1독립선언 그리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 독립선언이 그것이다. 이들 독립선언의 공통 언어는 “우리 대한의 자주독립과 대한 국민의 자주” 또는 “우리 조선의 독립과 조선인의 자주”다.
예컨대 만주 길림에서 김교헌 등 독립운동가 39인의 이름으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은 “아(우리) 대한은 완전한 자주독립과 대한민주의 자립을 선포”한다 했고, 재일 한국유학생 대표인 조선청년독립단 명의로 발표된 2·8독립선언은, “아(우리) 이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세계 만국의 전(앞)에 독립을 선언”한다 했으며, 국내에서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발표된 3·1독립선언은, “아(우리)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한다고 했다.
재러동포 대표들로 구성된 대한국민의회도 “우리 2천만 동포들을 대표하여 천하만국에 독립을 선언”한다 하였다.
재일 유학생들이 발표한 2·8독립선언서.
전국 각지서 202만명, 1542회 만세시위운동
중요한 사실은 이들 독립선언에 보이는 “육탄 혈전(대한독립선언)” 또는 “영원 혈전(2·8독립선언)” 또는 “영구의 혈전(대한국민의회 독립선언)” 그리고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3·1독립선언)”라는 말이다.
자주독립을 달성할 때까지 우리 대한국민은 마지막 한 사람까지 마지막 한순간까지 영원히 ‘피의 투쟁’을 멈추지 않겠다는 뜻이다. 조국 독립과 민족 자주를 위한 굳은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독립과 자주를 말로만이 아니라 몸소 행동으로 표출했다는 사실이다. 국내 동포는 물론 국외 동포까지 독립선언에 참여한 것이다. 국내 삼천리 방방곡곡은 물론이고 중국 만주와 러령 연해주, 미주 그리고 일본 도쿄와 오사카에서까지 독립선언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3·1운동 시기 전국 각지에서 연인원 202만3000여 명의 동포들이 1542회의 독립선언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했다. 가히 전국적이며 거족적인 독립운동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만주 길림에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
조국독립·민족자주 뜻 결집할 지도기관 탄생
이렇게 우리 민족 대다수가 조국 독립과 민족 자주를 원했으니, 그 뜻을 결집할 우리나라와 우리 정부가 필요했다.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세운 나라와 정부가 절실했던 것이다. 그래서 3·1독립운동 현장의 모습은 정형화된 틀이 있었다.
우선 사람들을 공공장소, 즉 장터에 모았다. 여기서 “대한의 독립과 대한인의 자주”를 선언한 뒤, 시위 군중은 일제의 식민통치기관인 면사무소나 헌병경찰주재소로 몰려갔다. 이제 우리 대한이 독립했으니, 일본제국주의는 물러가라는 뜻이다.
여기서 충돌이 일어났다. 순순히 물러가지 않으려는 일제와 빨리 물러가라는 우리 민족의 요구가 격돌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희생자와 부상자 그리고 투옥자가 발생했다. 박은식의 통계에 따르면 7509명의 희생자와 1만5961명의 부상자, 4만6948명의 투옥자가 생긴 것이다. 얼마나 조국 독립과 민족 자주의 의지가 절실하고 강렬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3·1독립운동은 세계만방에 독립을 구걸하거나 청원한 것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 대한의 독립과 대한인의 자주를 선언한 것이다. 그러니 나라와 정부를 세우는 일도 우리 스스로 해야 했다. 더욱이 시급히 할 일이 있었다.
바로 독립을 위해 ‘영원 혈전’을 벌여야 했고, 그를 위해 우리 민족의 대표기관과 우리 국민의 지도기관을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3·1독립운동 시기 각지에서 임시정부가 탄생했다. 옥동자가 태어난 것이다.
러령 연해주에서 발표된 대한국민의회 독립선언서
연해주서 대한국민의회 독립선언 및 정부안 발표
먼저 러령 연해주에서 대한국민의회의 독립선언과 함께 정부안이 발표됐다. 이어 국내에서 한성정부안이 성립했다. 그리고 3·1독립운동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인 4월 11일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나라의 이름을 ‘대한’으로 하고, 정치체제를 민주공화제 곧 ‘민국’으로 하며, 우리 국토가 아닌 외국 땅에서 전 국민이 아닌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정부이기에 ‘임시정부’라 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이다.
국제 관례와 민주 절차에 따라 상해에 모인 독립운동가들 가운데 13도 대표와 북간도와 서간도, 연해주 그리고 미주 대표를 선발하고 ‘임시의정원’ 즉, 국회를 구성해 세운 것이다.
이렇게 출범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27년 동안 대한 민족의 대표기관이자 대한 국민의 지도기관으로서 지대한 역할을 수행했다. 온갖 고난과 역경을 딛고 상해 시기와 장정(이동) 시기 그리고 중경 시기에 이르기까지 민족 독립의 길을 열었던 것이다.
때로는 만주 독립군단을 영도하고, 때로는 의열투쟁도 불사하고, 결국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한국광복군을 창설해 ‘영원 혈전’의 사명을 다하며 조국 광복을 이루어냈다.
[출처] : 김용달: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임시정부 100년, 고난의 3만리> / 국방일보
3. 대한민국 임시정부, 민주공화제로 - 백성’에서 ‘시민’으로…민주의 역사 열리다
임시헌법으로 ‘대한민국 임시헌장’ 선포 - 군주전제 사라지고 민주공화제 국가로
‘왕국’서 ‘민국’으로…역사의 일대 전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신년 축하회 기념(1920.1.1). 필자 제공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성문 헌법 ‘대한민국 임시헌장’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 이는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에 명시된 대한민국의 정체이자 국체이다.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성문 헌법이다. 대한민국 임시헌장 선포문과 전문 10조로 구성된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제정 선포되었다.
사실 1919년 4월 10일에서 11일에 걸쳐 상해 김신부로에 위치한 독립임시사무소에서 열린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은 제헌의회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국호로 ‘대한민국’, 임시헌법으로 ‘대한민국 임시헌장’, 그리고 국무총리 이승만을 비롯한 각 부 총장(장관) 등 각료들이 선출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이다. 더욱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민주공화제’를 채택함으로써, 고조선 건국 이래 반만년 지속된 군주전제 국가가 사라지고 민주공화제 국가가 새롭게 성립하게 되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왕국(제국)’에서 ‘민국’으로, 우리 민은 봉건국가의 ‘신민(臣民)’에서 근대국가의 ‘국민’으로, 나아가 무권리의 ‘백성’에서 주권을 가진 ‘시민’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진실로 우리 역사의 일대 전기가 되었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재정결산서
갑신개혁부터 애국계몽운동까지…독립의 진정한 의미
모든 역사가 그렇듯이 이는 거저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오랜 고뇌와 고투의 시간이 있었다.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근대 개혁운동은 ‘3일천하’로 끝나고 말았지만, 갑신개혁에서 시도됐다.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 인사들은 1884년 정변을 일으켜 ‘갑신개혁강령’을 반포했다.
이 속에는 근대적 개혁조치들이 담겨 있었다. 신분제 철폐를 위한 ‘인민평등권의 제정’, 군주와 신민의 공동 정치를 위한 ‘군민공치(君民共治)’의 정치지향 등이 포함된 것이다. 하지만 이들 개혁안은 정변의 실패로 말미암아 역사의 흔적으로만 남게 되었다.
이후 서구 자유주의의 세례로 근대 민권운동이 일어났다. 1896년 독립협회가 결성되어 근대 민족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독립협회는 『독립신문』을 발행해 자유주의사상을 전파하는 한편 만민공동회운동을 통해 입헌군주제를 지향했지만, 보수파의 공격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당시 제정 공포한 대한민국 임시헌장 10조..
을사늑약 이후 애국계몽운동기에도 근대 민권운동은 계속됐다. 실력양성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애국계몽운동은 근대 정치사상의 전파에도 힘썼다. 헌정연구회와 대한자강회, 그리고 신민회가 앞장섰다. 특히 신민회는 을사늑약으로 빼앗긴 주권의 일부를 되찾기 위한 국권회복운동과 함께 근대 국민으로 거듭나기 위한 공화주의를 모색했지만, 이 또한 경술국치로 무산되고 말았다.
후일 이들 신민회 인사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운영과 유지의 주체세력이 되었다. 안창호와 이동녕과 이동휘와 박은식과 이시영, 그리고 김구 등이 바로 그들이다. 뜻이 있다고 일이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여건이 무르익고, 또 역량이 성숙해야 한다.
경술국치 이후에도 새로운 국가를 세우기 위한 독립운동가의 고뇌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독립운동이 우리 민족의 독립만이 아니라 침략주의에 맞서 인류의 자유와 평화, 그리고 정의를 구현하는 인도주의운동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독립운동의 진정한 의미를 터득한 것이다.
대동단결선언.
우리식 국민주권에 기초한 민주공화제 정부의 탄생
국제정세의 변화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911년 중국의 국민혁명인 신해혁명을 체험하고, 1917년 러시아의 노농혁명도 목격하면서 세계 개조의 도도한 흐름을 놓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미주의 대한인국민회중앙총회를 중심으로 미주지방총회와 하와이지방총회 그리고 시베리아지방총회 등을 아우르는 ‘무형(無形)국가’를 세우려 하였다.
국토와 국민이 일제의 강점 아래 있기에 재외동포들을 중심으로 주권을 행사할 민족의 대표기관을 설립하려는 시도였다. 이런 우리의 역량을 바탕으로 국제정세의 변화를 포착하여 1917년 「대동단결선언」이 발표되었다. 재외동포들이 대동단결하여 무형국가로 임시정부를 세우자는 것이다.
이 선언에는 매우 탁월한 우리식 국민주권주의가 반영돼 있다. 서구 자유주의에 입각한 국민주권주의만이 아니라 우리 고유의 국민주권주의가 중심사상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경술년(1910) 융희황제(순종)의 주권 포기는 즉 아(우리) 국민동지에 대한 묵시적 선위이니 아(우리) 동지는 당연히 삼보(주권)를 계승하여 통치할 특권이 있고, 또 대통을 상속할 의무가 있도다. 고로 이천만의 생령(국민)과 삼천리의 구강(국토)과 사천년의 주권은 오인(우리) 동지가 상속하였고 상속하는 중이요 상속할 터이니, 오인(우리) 동지는 이에 대하여 불가분의 무한책임이 중대하도다.”
이처럼 「대동단결선언」에서 독립운동가들은 고조선 이래 ‘사천년의 주권’이라는 고유주권설과 ‘황제주권포기 국민주권수수’설을 창안해 우리 민족의 대동단결기관으로 재외동포를 중심으로 하는 임시정부 수립을 주장한 것이다.
이제 빼앗긴 나라를 되찾을 독립운동 주체도 우리 국민이요, 임시정부를 수립할 주체도 우리 국민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의해 3·1운동 중에 우리 민족의 대의를 결집해 우리식 국민주권에 기초해 민주공화제 정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한 것이다.
나아가 27년 동안 민주공화제 원칙을 의정원과 정부라는 제도와 절차만이 아니라 실제 정국 운영에서도 철저하게 적용하며 광복의 날을 열며 새로운 민주의 역사를 써갔다.
[출처] : 김용달: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임시정부 100년, 고난의 3만리> / 국방일보
4. 도산 안창호,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총장으로 부임하다
- 초기 임정 자금난 해결·지방행정조직 체계화 ‘진력’
대한인국민회 지원금 등 거금 지참 임정 청사 마련하고 독립신문 발간
각료들과 직원들의 봉급도 지급해 비밀리 국무원령 ‘임시연통제’ 시행
국내외 특파원 파견 선전·시위 주도
안창호(앞줄 가운데)와 국무원 각료들.
장년층인 이동녕과 이시영·신규식 등이 뒷배를 맡고 여운형과 조소앙, 신익희와 김철 등 신한청년당원들이 앞장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체제와 제도를 마련한 것이다.하지만 의욕만으로 국정을 운영하고 독립운동을 주도할 수는 없다.
국정 운영에는 삼박자가 갖춰져야 한다. 바로 조직과 인물과 자금이다. 불완전하나마 임시정부를 구성함으로써 조직과 인물은 어느 정도 구비했으나 자금이 문제였다. 이를 해결할 인물이 필요했는데, 그가 부임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내무총장으로 선임된 도산 안창호였다.
안창호는 당시 독립운동계에서 촉망받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여러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민주공화제 정부를 이끌기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평민 출신으로 경신학교의 전신인 밀러학당에서 신식 교육을 받고, 미국에 유학해 자유주의의 세례를 받은 근대 지성이었다.
더욱이 미주에서 1905년 공립협회를 결성해 민족운동을 전개하고, 1907년 국내로 들어와 한말 최대의 국권회복운동 조직인 신민회를 이끈 신망 있는 인물이었다.
1910년 경술국치 직전 중국으로 망명한 안창호는 미주에서 흥사단을 발족해 민족지도자를 양성하고, 무형정부를 지향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을 지낸 장년의 노련한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다. 특히 그는 대한인국민회의 공식 파견 요원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으로 부임하면서 막대한 독립운동 자금을 지참하고 있었다.
그 액수는 대한인국민회의 공식 지원금 3만 불과 개인 후원금 1만 불을 합쳐 4만 불에 달했다. 요즈음 액수로 환산하면 적어도 40억 원 정도의 가치를 지닌 돈이다.
안창호가 부인 이혜련에게 보낸 편지.
초기 임시정부의 살림살이는 이 자금으로 충당됐다. 상해의 프랑스 조계 하비로에 근사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를 마련하고, 기관지로 독립신문을 발간하며 각료와 직원들의 봉급도 주었던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돈이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였다는 점이다.
안창호는 미주에서 홍콩을 거쳐 1919년 5월 25일 상해에 도착한 뒤, 6월 28일 내무총장에 취임하여 업무를 개시했다. 국무총리로 선임된 이승만은 부임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안창호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로 집무하면서 초기 임시정부를 주관했다.
내무총장에 취임하면서 안창호가 시급하게 추진한 것이 국내외 동포들에 대한 통치 시도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가와 정부로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국내외 동포들의 지지와 지원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국민이 없는 국가와 정부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항상 국내외 동포들에 대한 관심과 통치 의지를 숨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비밀리에 지방행정 기구를 설치해 국내 동포들을 통치함으로써 실질적인 주권기관의 역할을 수행하고자 했다. 그 노력이 법제화된 것이 1919년 7월 10월 국무원령 제1호로 발포된 ‘임시연통제’다.
연통제는 내무총장 아래 감독부(도)→ 총감부(군)→ 사감부(면)로 체계화된 지방행정 조직망을 설치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통제의 구상과 조직망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이미 안창호는 신민회 시절 그 같은 구상을 실현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앙의 총감독을 우두머리로 각 도에 총감, 각 군에 군감을 두고 전국적으로 국권회복운동을 주도한 신민회의 조직 원리가 바로 연통제의 연원이 됐던 것이다.
안창호는 내무총장에 취임한 직후 지방행정 조직망으로 ‘임시연통제’를 시행하면서, 국내외에 임시정부 특파원을 파견했다. 이들을 통해 한편으로는 연통제 설치를 추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3·1운동의 불꽃을 되살리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그것은 ‘임시연통제’ 발포 직후인 7월에만도 10차례에 걸쳐 집중적으로 임시정부 특파원의 국내 파견이 이뤄졌다는 사실이 잘 말해준다. 파견 지역 또한 서울과 경기도는 물론 함경도와 평안도, 황해도,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에 걸쳐 있었다.
안창호가 지속적으로 국내에 파견한 임시정부 특파원의 주된 임무는 ‘선전과 시위운동’이었다. 즉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국내에 널리 알리고, 소강 상태로 접어든 3·1운동의 불길을 되살리려는 것이다. 더 나아가 10월 31일 일왕 다이쇼의 생일인 천장절을 기해 국내에서 대대적인 제2차 독립만세운동을 추진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10월 31일을 전후해 제2차 독립만세운동이 터졌던 것이다. 박은식을 비롯한 대한민족대표 30인의 명의로 된 독립선언서가 살포되고, 서울과 평양, 의주, 선천, 정주, 영변 등지에서 제2차 독립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여기에 내무총장 안창호의 뛰어난 지도력과 자금이 투입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출처] : 김용달: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임시정부 100년, 고난의 3만리> / 국방일보
5.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성립 - 강한 임시정부 만들고 자신은 낮은 자리에
... 빛난 ‘안창호의 헌신’
대한민국 임시정부 각료와 임시의정원 의원의 신년 축하식(1921.1.1)
국민대회 취지서
3·1운동 시기 각지에서 임시정부가 선포됐다. 그 가운데 3곳에서 절차적 정당성과 실체를 가진 임시정부가 성립했다. 하나는 러령 연해주에서 성립한 대한국민의회 임시정부다. 이른바 ‘러령정부’로 대한국민의회가 독립을 선언하고 곧이어 3월 21일 대통령 손병희, 부통령 박영효,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군무총장 이동휘 등을 각원으로 하는 임시정부를 선포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국내에서 4월 초 한남수, 이규갑, 홍진 등이 인천 만국공원에 모여 13도 대표와 종교계 대표로 민족대표를 선임해 조직한 임시정부다. 세칭 ‘한성정부’로 집정관총재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내무총장 이동녕, 노동국총판 안창호 등을 각원으로 했다.
그리고 4월 23일 보신각에서 국민대회를 통해 민족대표와 정부 각원을 추인해 대내외에 선포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국민대회를 열지는 못하고 취지서와 선포문만 살포하고 말았다.
또 하나는 상해에서 4월 11일 성립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다. 곧 ‘상해정부’로 국회인 임시의정원을 구성해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군무총장 이동휘 등을 각원으로 선출해 성립한 것이다. 이들 3곳의 임시정부는 각기 절차적 정당성을 가졌다.
러령정부는 만주와 노령 동포 대표로 대한국민의회를 구성해 수립했고, 한성정부는 국내에서 명분상이지만 13도와 종교계에서 민족대표를 선발해 수립한 것이며, 상해정부는 각도 대표와 독립운동 지역 대표로 임시의정원 의원을 구성해 수립했기 때문이다.
초대 임시대통령 이승만의 상해 부임 환영회(1920.12.5)
민족 대표기관이자 독립운동 지도기관으로
문제는 임시정부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불거져 나왔다. 러령정부는 의회는 활동했지만, 정부가 운영되지 않았다. 정부수반이 피체되거나 국내와 미주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성정부는 의회와 정부 모두 활동하지 못했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 때문이었다. 상해정부만 의회와 정부가 작동하고 있었지만, 불완전했다.
정부수반인 국무총리 이승만을 비롯해 각료 태반이 부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무총장인 안창호가 국무총리를 대리해 정부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명실상부한 민족의 대표기관이자 독립운동의 지도기관으로 만들기 위해 안창호가 나섰다.
안창호는 러령 대한국민의회에 사람을 보내 의회 통합을 꾀하고, 미주의 이승만에게 연락해 상해로 부임할 것을 촉구했다. 그런데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가 아니라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 혹은 이를 대통령으로 번역해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이미 자신을 대통령으로 각국에 통보했으니, 대통령제로 정부 형태를 바꿀 것을 요구했다. 안창호는 이승만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대한국민의회와 권력을 나눌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 바로 정부는 한성정부안을 따르고, 의회는 상해 임시의정원과 러령 대한국민의회를 통합하는 것이다. 명분과 실질을 구비한 방안이었다.
비록 한성정부는 실체는 미약하지만 국내 동포들 손으로 만든 정부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래서 각료는 한성정부안을 채택해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과 정통성을 확보한 것이다. 의회 곧 임시의정원에는 대한국민의회 대표를 일부 수용해 실리를 주었다.
이렇게 해서 통합 임시의정원에서 정부 형태를 국무총리제에서 대통령제로 바꾸는 임시헌법 개정을 하고, 대통령 이승만을 비롯한 한성정부의 각원을 그대로 승인해 9월 11일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성립한 것이다.
통합 임시정부를 이뤄낸 제6회 임시의정원 회의 의원과 안창호.
이승만·이동휘에 국무총리·군무총장 양보
여기서 안창호의 헌신성이 또 한 번 빛을 발했다. 3곳의 임시정부에서 이승만과 이동휘 그리고 안창호는 모두 각원으로 선임됐다.
이승만은 국무총리(러령정부)·집정관총재(한성정부)·국무총리(상해정부)이고, 이동휘는 군무총장(러령정부, 상해정부)과 국무총리(한성정부), 안창호는 내무총장(러령정부, 상해정부)과 노동국총판(한성정부)이다.
한성정부안을 따르면 안창호는 다른 두 사람에 비해 낮은 자리를 맡게 된다. 이를 마다하지 않은 안창호의 헌신성이 통합 임시정부를 이루어낸 것이다.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출범은 노령정부와 한성정부와 상해정부의 물리적 통합 이상의 역사적 의의를 내포하고 있다. 독립운동 세력으로 보면, 만주·노령을 대표하는 이동휘와 하와이를 대표하는 이승만과 미주 본토를 대표하는 안창호 세력의 통합이었다.
독립운동 방략으로 보면, 무장투쟁론을 대표하는 이동휘와 준비론을 대표하는 안창호와 외교론을 대표하는 이승만의 결합이었다. 독립운동 이념으로 보면, 자유주의를 숭상하는 이승만과 진보적 민족주의를 지향하는 안창호와 사회주의를 숭상하는 이동휘의 연합이었다.
그야말로 세력과 방략과 이념의 통합이자 독립운동계 세 거두의 연대로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성립해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이제 난공불락이 된 것이다.
[출처] : 김용달: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임시정부 100년, 고난의 3만리> / 국방일보
6,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사정책
- “대한민국 2천만 남녀, 주저 말고 광복군 되기를”
국민 모두가 국방의 의무를 지는 ‘국민개병제’ 천명
1919년 말 상해에 육군무관학교 설립, 1기생 19명 졸업
독립전쟁에 대비해 1920년 13명의 남녀 간호병 양성도
미국서 비행사·중국서 무관 양성, 광복군 창설로 이어져
육군 주만 참의부 독립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할을 거론할 때 흔히 범하는 오해가 있다. 바로 임시정부가 열강에 대한 외교로만 민족독립을 추구했다는 인식이다. 이는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대표적인 외교 독립론자이고, 또 임시정부가 국제도시인 상해에 소재했기 때문이다.
국내외 동포들 통솔 쉬운 상해에 임시정부
수립 초기부터 임시정부를 어디에 둘 것인가를 둘러싼 논쟁이 있었다. 만주와 러령 지역의 무장 독립론자들은 국경 지역, 즉 만주나 연해주 지역에 둘 것을 주장했다. 그래야 독립군단을 통솔하며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효율적으로 국내진공작전을 펼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국제도시인 상해에 임시정부를 두어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았다. 우선 국경 지역인 만주와 연해주보다는 안전하고, 국내외 동포들과 소통하기 편하며 국제사회에 민족독립의 필요성을 선전하기 적합한 곳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여기에 더해 만주와 연해주와도 육로나 해로로 교통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임시정부가 단순히 독립운동 총괄 지도기관으로서만 성립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독립운동 지도기관의 역할만 한다면 독립군단이 활동하고 있던 국경 지역에 두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우리 민족의 국가이자 정부로 세워졌다.
우리 민족의 대표기관이자 주권기관이며 독립운동 지도기관이라는 자부심을 가졌다는 뜻이다. 그래서 국내외 동포들과 연락하며 통솔하고, 민족교육도 하고, 독립 외교도 펴고, 독립군단도 원격 지휘할 수 있는 곳을 골랐다. 그곳이 상해였다.
각지의 임시정부를 결집해 상해에 성립된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군사정책을 세워 본격적으로 군사활동에 들어갔다. 국무총리 이동휘와 군무총장 노백린이 중심이 됐다. 이들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으로 군무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육군 참령으로 복무해 실무에도 정통했기 때문이다.
군무부 포고 제1호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헌장’ 공포
임시정부는 기본적으로 국민 모두가 국방의 의무를 지닌 국민개병제의 원칙을 천명했다. 이는 1919년 4월 11일 공포된 ‘대한민국임시헌장’ 제6조에 제시돼 있다. “대한민국의 인민은 교육 납세 병역의 의무가 유함”이라는 조항이 바로 그것이다.
1920년 1월 군무총장 노백린도 포고 제1호를 발포해 “주저 말고 고려 말고 하루바삐 너도 나와 대한민국의 군인이 되며, 나도 나가 대한민국의 군인이 되어 2천만 남녀는 1인까지 조직적으로 통일적으로 광복군 되기를 단행할지어다”라고 하면서 2000만 동포들에게 모두 광복군이 되기를 요구했다.
임시정부의 군사정책도 국민개병제에 따라 국내외 동포들로 군대를 편성해 독립전쟁을 전개한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를 위해 군대조직을 위한 법규를 마련하고, 간부 양성과 모병 활동을 전개하며, 만주지역의 독립군단을 통할 지휘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무장투쟁론을 주장한 이동휘
육군무관학교, 군무부에서 설립
임시정부는 1919년 12월 ‘대한민국육군임시군제’ 등 세 가지 군사 관련 법령을 제정했다. 주요 내용은 군사정책에 대한 기본원칙과 방향을 정립한 것이었고, 병력을 모집하고 군사간부를 양성하기 위한 실행 방안이었다. 이 방침에 따라 1919년 말 상해에 육군무관학교를 설립했다.
육군무관학교는 임시정부의 육군사관학교였다. 육군무관학교는 군무부에서 설립하고, 운영했다. 청년들을 모집, 군사훈련을 실시해 1920년에 1기생으로 19명, 2기생으로 24명을 졸업시켰다. 이 밖에 임시정부는 독립전쟁에 대비한 위생병 양성도 계획했다. 상해의 대한적십자회가 주관해 1920년 1월 간호원양성소를 부설기관으로 개설, 3개월 과정으로 13명의 남녀 간호병을 배출한 것이다.
또한 임시정부는 비행사를 양성해 공군을 창설하려고 했다. 비행사를 양성하는 일은 미국에서 추진됐다. 군무총장 노백린이 미주동포 김종림의 지원을 받아 샌프란시스코 인근 윌로스에 비행사양성소를 설립한 것이다. 김종림은 캘리포니아에서 광대한 토지에 쌀농사를 짓던 인물이었다. 그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비행기를 마련하고, 한장호 등 한인 청년 10여 명에게 비행사 훈련을 실시했다.
다른 지역 독립군들과 연계
다른 한편으로 임시정부는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군들과 연계해 독립전쟁에 나서고자 했다. 독립군단을 임시정부 산하로 편제하기 위해 북간도 지역에 안정근과 왕삼덕, 서간도 지역에 조상섭을 파견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서간도의 대표적 독립군단인 서로군정서와 북간도의 북로군정서가 임시정부를 봉대하며 군무부 산하로 편입됐다. 이 밖에도 서간도의 대한청년단연합회 의용대와 대한독립단 등을 통합해 광복군총영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임시정부는 군무부를 만주로 이전하려는 계획도 수립했다. 그러나 만주 지역의 독립군 세력이 1920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 이후 러시아 자유시로 이동했다가 참변을 당한 뒤에는 군사 활동이 위축됐다.
그럼에도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 주만 참의부’를 두고 남만주를 무대로 군사 활동을 계속해 나갔고, 또 중국 각지의 군관학교에 한인 청년들을 보내 무관 양성에도 힘썼다. 이를 바탕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한국광복군을 창설했으니, 시종일관 군사활동 곧 무장독립운동의 의지를 구현해 간 것이다.
[출처] : 김용달: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임시정부 100년, 고난의 3만리> / 국방일보
7. 외교활동 - 임시정부, 한국 독립·정부 승인, 전 세계 상대 ‘투 트랙 외교’
파리강화회의 대표들 대상 선전활동 - ‘공고서’ 등 보내 한국 문제 관심 환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대표단
상해 시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 활동은 두 갈래로 진행됐다. 하나는 파리강화회의를 비롯한 국제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 정부 승인을 얻는 일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국제사회의 외교는 국력이 바탕을 이룬다. 군사력과 경제력과 문화 역량이 국력의 핵심이다. 임시정부는 글자 그대로 임시로 세운 국가요 정부이기에 이들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힘의 논리로 작동되는 국제외교 무대에서 임시정부의 처지가 눈에 보인다는 얘기다.
임시정부가 내세울 수 있는 힘은 거족적인 독립 의지와 그 표출인 독립투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3·1운동 같은 거족적인 민족독립의 함성과 독립군의 무장 항전 같은 실력 투쟁이 필요한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강화회의가 파리에서 열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상해 신한청년당에서 김규식을 대표로 보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국내외에 밀사를 파견해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임시정부는 수립 직후 파리위원부를 설치하고, 그 대표에 외무총장 김규식을 임명해 신임장을 발송했다. 이미 신한청년당 대표로 1919년 3월 13일에 파리에 도착, 샤토당가 38호에 한국민대표관을 설치해 활동하던 김규식을 임시정부의 전권대표로 추인한 것이다. 이곳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구미외교 창구인 파리위원부가 됐다.
파리위원부 대표로 임명된 김규식
파리위원부는 선전활동에 주력했다. 파리강화회의 대표들에게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공문 등을 보내, 한국 문제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예컨대 5월에 강화회의 의장 클레망소를 비롯한 위원들과 각국 정부에 ‘공고서’ 등 서한을 여러 차례 보낸 것이다. 임시정부와 국내외 인사 명의로 된 ‘공고서’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 등을 설명하고, ‘한일합방조약’의 폐지와 대한민국의 승인 등을 요구하는 20개 항목을 담고 있었다.
그해 6월에 끝난 파리강화회의는 전승국의 국익을 위해 약소국들의 의견이 무시됐기에 파리위원부는 한국 문제에 대한 직접적 성과를 얻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의 독립 문제를 국제사회에 부각시키고, 한국에 대한 동정적인 여론을 형성하는 성과를 거뒀다.
1921년 11월부터 1922년 2월까지 미국 워싱턴에서 태평양회의가 열렸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열강 사이의 군비경쟁을 조정하고 그에 따른 경제적 부담도 축소하자는 게 목적이었다. 한국을 비롯한 태평양 연안의 약소 국가들은 이 회의에 민족독립에 대한 열망을 표출했다.
태평양회의 때도 독립 열망 확산 노력 - 中 정부로부터 임시정부 승인 얻기도
임시정부는 태평양회의에 한국 문제를 상정시키기 위해 외교후원회를 결성해 기관지를 발행하고, 이승만을 전권대표, 서재필을 부대표로 해 외교적 노력을 다했다. 이러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한국 문제는 논의되지 않았다. 열강이 한국을 국제법상의 지위나 외교관계가 없는 나라로 간주하고, 일본의 반발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로 상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시정부는 태평양회의에서 기대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이를 통해 한국 독립의 열망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렸다.
다른 한편으로 임시정부는 중국 정부의 승인을 얻기 위한 외교적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임시정부의 소재지가 상해라 어느 나라보다 중국 정부의 양해와 협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마침 손문을 수반으로 하는 호법정부가 광동에 세워지자, 1921년 10월 외무총장 신규식이 손문을 방문해 국서를 봉정하고,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했다. 이 자리에서 임시정부와 호법정부는 서로 상대 정부를 승인했다.
하지만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 효과는 지속되지 못했다. 1925년 손문이 사망한 뒤 1927년 국민당정부가 수립됐지만, 일본의 견제로 임시정부에 대해 소극적인 정책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와 중국 국민당정부의 긴밀한 협조는 1932년 한인애국단의 이봉창과 윤봉길 의거 이후 비로소 가능해졌다.
러시아에 대한 외교는 임시정부가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와 통합정부를 구성한 뒤 본격화됐다. 특히 약소 민족에 대한 러시아의 관심과 지원을 기대한 사회주의 독립운동 세력이 적극적이었다. 국무총리 이동휘는 박진순과 한형권을 대표로 러시아에 파견해 레닌에게 임시정부의 승인과 독립운동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레닌은 임시정부를 승인하고 200만 루블의 자금 지원을 약속한 뒤 우선 60만 루블을 지원했다. 하지만 이 자금은 이동휘 계열이 독점하다가 분란이 일어났고, 레닌마저 1924년 사망함에 따라 임시정부와 러시아는 외교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구미위원부에서 발행한 독립공채
대미외교는 미국 워싱턴에 설치된 구미위원부가 맡았다. 1919년 5월 이승만은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 자격으로 워싱턴에 사무소를 설치하고 대미외교를 수행했다. 그러다가 9월 통합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임되자 파리위원부와 필라델피아에 설치한 대한민국통신부를 통합해 구미위원부를 조직한 것이다.
구미위원부는 미국 정부로부터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기 위해 힘을 쏟았다. 또한 미국 전역에 한국친우회의 조직을 주도해 19개 지부를 설립하는 성과를 올렸다. 나아가 1920년 3월 미국 상원에 ‘한국독립 동정안’이 상정되도록 노력을 기울였다.
훗날 카이로 선언 이끄는 원동력 돼
온갖 고난 속에 진행된 상해 시기 임시정부의 외교 활동은 한국의 독립 문제를 국제사회에 크게 부각시켰다. 이는 임시정부가 ‘한국의 자유 독립’을 국제적으로 확약받은 1943년 11월 카이로선언을 이끌어 내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출처] : 김용달: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임시정부 100년, 고난의 3만리> / 국방일보
8.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재정 정책 - ‘국민개납주의·재정일원화’ 독립운동 물적 기반
만 20세 이상 남녀 1인당 금화 1원…매년 6월·11월 말 나눠 내도록
‘인구세’ 외에 독립공채·임시소득세·외국차관을 주요 재정정책 삼아
독립공채 발행 놓고 재무부-구미위원부 불화…내각 권력 투쟁 불씨로
재무총장 이시영.
독립운동도 근대의 민족운동이자 사회운동이다. 사회운동은 이념과 주체와 조직이 필요하다. 사회운동으로서 독립운동은 빼앗긴 민족의 주권을 되찾아 근대국민국가를 세운다는 운동이념이 명확했다. 또 열렬한 독립운동가라는 운동주체도 있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임시’ 국가와 정부도 조직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부가 발행한 독립공채
정액제의 ‘인구세’‥가장 중요한 재정정책
그렇다고 해서 이슬만 먹고 독립운동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투철한 정신도 필요하지만 독립운동의 물적 기반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임시정부는 국민개납주의, 곧 국민에게 납세 의무를 부과하는 방식을 택했다.
대한민국임시헌장은 제6조로 “대한민국의 인민은 교육과 납세와 병역의 의무가 유(有)함”이라고 해서 교육·병역의 의무와 함께 납세의 의무를 명시했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가 재정정책에 관한 논의를 시작한 것은 ‘임시국회’이던 대한민국 임시의정원회의에서다.
1919년 5월 2일 열린 제4회 임시의정원 회의는 임시정부의 재정정책에 대한 각 의원의 의견을 총괄하여 두 방향의 방침을 의결했다. 하나는 ‘영구 유지 방침’으로 정부령으로 인구세를 시행하며 국내외에서 독립공채를 모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당면한 임시정부의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구급 의연금’을 의회 주관으로 상해 한인동포에게서 모집하는 것이었다.
임시정부가 가장 중요하게 설정한 재정정책은 정액제의 인구세(人口稅)였다. 6월 15일 임시정부령 제3호로 ‘임시징세령’과 ‘인구세 시행세칙’을 제정, 공포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인민 부담의 균일과 정기’를 원칙으로 대한국민 만 20세 이상의 남녀 1인에게 금화 1원을 연 2회로 나눠 내도록 하는 것이 인구세이며, 납세 시기는 매년 6월 말과 11월 말로 정했다.
애국금 감사장(1920.10.16)
이 밖에도 임시정부는 국민이 자발적으로 의연하는 애국금과 국내외 동포들에게 발매하는 국채인 독립공채, 국민의 소득비례에 따른 임시소득세, 외국차관을 주요한 재정 정책으로 제시했다. 조세 부과 및 재정 수입의 방침으로 조세법률주의와 국민개납주의를 채택한 것이다.
그래서 9월 개정한 통합 임시정부의 임시헌법에서도 “조세를 새로이 부과하거나 세율을 변경할 시는 법률로 이를 정한다”고 하여 조세법률주의를 명시했다.
안창호도 1920년 1월 ‘우리 국민이 결단코 실행할 6대사’라는 시정연설에서 장래의 재정 정책으로 “독립운동 기간에는 남녀는 물론하고 1전 2전씩이라도 다 내야 할 것”이라며 국민개납주의를 주장했다.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에서도 여러 차례 재정의 중요성과 성실한 납부를 당부하면서 “종금 이후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업은 국민개납주의의 실행”이라고 거듭 밝혔다.
재무부 포고 제1호 인구세 징수 사무 이관에 관한 건(1922.3.11).
“모든 재력은 임시정부 재무부에 있어야”
임시정부는 국민개납주의와 함께 재정 일원화 정책도 시행했다. 국내 동포를 대상으로 하는 연통제와 국외 동포를 대상으로 하는 교민단제 등 지방자치제를 통한 내정통일책을 실시하면서 ‘재무행정상 통일’ 곧 재정의 일원화를 실시한 것이다. ‘독립신문’에서도 “모든 재력은 임시정부 재무부의 금고에 있어야 한다”라며 재정의 일원화를 강조했다.
당시 만주·노령·미주 등지에 있는 독립운동 단체들이 동포사회로부터 자금을 모아 자치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명목적이든 실질적이든 임시정부의 재무부가 재정을 통괄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이는 재정의 통일을 통한 독립운동 자금의 효율적 관리와 분배뿐만 아니라 민족의 대표기관으로서 임시정부의 위상을 확립할 수 있는 기반이기도 했다.
하지만 재정 정책을 둘러싸고 분쟁도 있었다. 독립공채 발행 문제로 이승만과 임시정부의 갈등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임시의정원이 1919년 7월 17일 이승만의 요구에 따라 공채 발행을 위임한 것이 발단이었다.
이승만은 임시의정원의 위임을 근거로 자신이 조직한 구미위원부를 통해서 9월 1일 자로 공채증서를 발행했던 것이다. 그런데 통합 임시정부가 수립된 뒤 정부에서 인구세와 함께 독립공채를 발행하기로 하면서 공채 발행 및 재정 사무 전담 문제가 생겨났다.
임시정부는 내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대한민국원년 독립공채’ 발행을 재무부가 관장하면서 구미위원부의 공채 발행을 중지하라고 명령했다. 구미위원부는 이승만의 외교 활동에 대한 보좌기관에 불과하니 미주동포에 대한 권리 행사는 임시정부가 직접 한다고 나선 것이다.
더 나아가 이승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19년 12월 12일 애국금 모집을 미주 대한인국민회에 위임하고, 장래에는 주미재무관을 설치해 재정을 처리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죽음도 불사하고 진행’하며, ‘상해에 가도 (대통령) 취임식이라는 것은 안 하겠다’고 극력으로 저항했다.
결국 이승만의 고집으로 미주에서의 공채 발행과 재정 관할권은 구미위원부에 위탁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그 결과 이승만은 구미위원부를 통해 유력한 자금 공급지이던 미주의 재정권을 장악함으로써 임시정부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하지만 반대급부도 컸다. 재정 정책을 둘러싼 대립과 갈등은 이동휘 계열의 레닌자금 전용 문제와 함께 임시정부 내 각 세력 간의 권력투쟁의 서막이자 파열음이었기 때문이다.
[출처] : 김용달: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임시정부 100년, 고난의 3만리> / 국방일보
9,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정 정책 - 국내엔 연통제·해외선 거류민단제
…민족 결속 단단히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은 규정하고 있다.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말이다. 나라를 위해 국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위해 나라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국민이 뽑는 대통령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국토를 수호”할 사명을 짊어진다.
국무원령 제1호 임시연통제(1919.7.10)
국내외 동포 통할 위한 내정 정책 시행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국내외 동포, 즉 국민을 통괄하고 보호하는 정책을 폈다. 곧 임시정부의 내정 정책으로 주로 내무부가 주관했다.
내정에 관한 구체적인 시정방침은 1920년 3월 국무총리 이동휘가 밝혔다. 우선 내정의 목표는 국내외 국민을 통일해 민족 전체의 행동 일치를 도모한다는 데에 두었다. 이를 위해 국내에는 각 도와 각 군을 연락하는 기관을 시설해 독립운동의 적극성을 조장하고, 국외는 대소 단체를 자세히 조사해 일치 규합하고 정부의 범위 내에서 행동하게 하는 것이었다.
임시정부는 수립 초기부터 국내외 동포를 통할하기 위한 내정 정책을 펴고 있었다. 하나는 내무부에서 연통제를 실시하고, 다른 하나는 교통부에서 교통국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1919년 7월 국무원령 제1호로 발포한 ‘임시연통제’와 곧이어 8월 제2호로 발포한 ‘임시지방교통사무국장정’이 바로 그를 위한 정책이다.
연통제는 내무부 산하에 국내 지방행정기관을 설치하려는 계획이었다. 도 단위 감독부, 군 단위 총감부, 면 단위 사감부로 계선화하는 연통부를 만드는 것이다. 연통부 조직은 내무부에서 특파원들을 파견하는 것으로 추진됐다.
특파원들은 국내 각지로 파견돼 각 행정조직의 책임자를 선정하고 임명장을 전달했다. 서울을 비롯해 평안도·함경도·황해도·경기도·충청도 일대에 연통부를 비밀리에 설치해 나갔다. 강원도에서는 철원애국단 같은 비밀결사가 그 역할을 대행하기도 했다.
교통국은 국내와의 통신연락기관을 설치하는 것으로 교통부가 주관했다. 교통부 산하의 임시교통사무국은 국내는 물론 만주 지역에도 설치됐는데, 관할 구역은 연통제에 따랐다. 특히 국내와의 왕래 거점인 중국 단동에 최초로 ‘임시단동교통사무국’을 설치했다.
단동에는 아일랜드인 쇼(G. L. Shaw)가 경영하는 해운회사 이륭양행이 있었고, 배일사상이 투철한 쇼는 독립운동을 물심양면으로 도왔기 때문이다. 교통국은 국내 평안도·함경도·황해도·서울 그리고 만주 관전현과 장백현에도 설치됐다.
임시단동교통사무국을 지원한 아일랜드 상인 조지 쇼
연통제 보도 기사(동아일보 1920년 8월 22일자)
국외 동포들에게 자치제 실시
요즈음과 달리 국외 동포에 대한 정책은 외무부가 아니라 내무부가 맡아 시행했다. 만주와 러령 연해주, 미주의 동포들은 교통이나 통신연락이 용이하지 못해 임시정부와 연계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임시정부는 이들을 통괄하고자 힘을 쏟았다. 국외 동포를 대한국민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외지에 거류하는 대한인에게 자치제를 실시하기 위하여 거류민단제를 공포”한다는 발포문이 이를 잘 말해준다. 국외 동포들을 ‘식민지 조선인’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국민인 ‘대한인’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거류민단은 1920년 10월 내무부령 제7호로 ‘임시교민단제’를 시행함에 따라 명칭이 교민단으로 바뀌었다. 국외 동포정책은 상해 대한교민단처럼 임시정부의 관할 아래 모범적으로 운영되기도 하였지만 상황은 녹록하지 않았다.
만주에는 이미 동포 조직들이 활동하고 있었기에 이를 추인하는 방식으로 가야 했다. 북간도에서는 1920년 10월부터 대한국민회 관할 지역을 간북남부총판부, 북로군정서 관할 지역을 간북북부총판부로 삼았다. 그리고 대한국민회 회장 구춘선을 간북남부총판,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을 간북북부총판으로 임명해 교민단제를 운영하는 방식이다.
서간도의 경우에도 1920년 12월 서로군정서 관할 지역을 간서총판부로 하고 여준을 총판, 김형식을 부총판에 각각 임명했다. 러령 연해주도 1920년 3월 총판부를 설치해 현지 유력자인 최재형을 총판, 김치보를 부총판에 선임해 교민단제를 시행했지만, 4월참변으로 최재형이 피살되자 그마저 해소되고 말았다.
1922년 하와이대한교민단 결성
미주지역도 기존의 대한인국민회가 거류민단을 대신하도록 했는데, 1922년 3월 하와이대한교민단이 결성되자 상황이 바뀌었다. 대한인국민회중앙총회와 하와이지방총회가 분규 끝에 하와이대한교민단이 새로 발족했기 때문이다. 표면으로는 교민단제를 따른다고 했지만, 이면에는 안창호를 지지하는 대한인국민회와 이승만을 지지하는 하와이지방총회의 갈등으로 분립된 탓이다.
결국 연통제와 거류민단제는 국내외 동포에 대한 통치행위를 구현하려는 목적에서 실시된 제도라는 점에서 동일한 맥락을 가진다. 각 단위로 설치된 연통부와 교통국 그리고 국외 동포사회에 조직된 교민단은 임시정부 선전, 법령 및 독립신문의 배포, 독립군 모집, 애국금 및 독립공채 수합은 물론 각종 정보 수집과 전달 등을 주요한 임무로 삼았다. 이로써 임시정부는 국내외 동포, 즉 국민들과 연계를 맺고 국민적 기반을 확보할 수 있게 됐던 것이다.
안태국 선생 장례식에 참석한 상해 대한교민들(1920.4.14)
[출처] : 김용달: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임시정부 100년, 고난의 3만리> / 국방일보
10.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교육 정책
- 1941년 건국강령 ‘수업료 국가 부담 교육의무’ 명시
1919년 만든 학무부, 교육정책 관장 - 독립운동 중에도 교육의 중요성 강조
상해 ‘인성학교’와 ‘3·1중학’ - 한인 동포 대상 초등·중등과정 운영- 국어·국사·외국어까지 두루 가르쳐
인성학교 춘계운동회는 잔칫날 방불- 문화광장·독립의지 결속의 장 역할
상해 공립 인성소학교 제6회 졸업 기념사진
교육은 국가의 백년지대계다. 임시정부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1919년 4월 11일 공포한 ‘대한민국임시헌장’ 제6조로 납세와 병역의 의무와 함께 교육의 의무를 명시했다. 특히 1930년 독립운동 이념으로 삼균주의를 채택하면서 정치와 경제적 권리의 균등과 함께 교육 받을 권리의 균등을 내세웠다. 곧 교육을 의무이자 권리로 규정한 것이다.
특히 1941년 11월 28일 공포한 ‘대한민국건국강령’에서 “헌법상 교육의 기본원칙은 국민 각개의 과학적 지식을 보편적으로 균등화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교육정책을 추진한다”고 거듭 언급했다.
“6세부터 12세까지의 초등 기본교육과 12세 이상의 고등 기본교육에 관한 일체 비용은 국가가 부담하고 의무로 시행케 함”이라고 구체적으로 못 박았다. 교육의 의무와 권리를 초등교육만이 아니라 고등교육까지 확대하고, 면비수학 곧 수업료의 국가 부담을 명문화한 것이다.
초등학교 무료급식조차 논란이 되고, 더 나아가 사회적 갈등을 일으켰던 작금의 상황을 보면 임시정부가 지향한 교육정책이 어찌나 혜안인지 감탄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하고 있지만, 얼마나 그에 대해 무지한지 알려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상해 인성학교 소개 엽서.
교육정책은 학무부에서 맡았다. 임시정부는 1919년 11월 5일 ‘대한민국임시관제’를 공포하면서 정부조직을 개정해 학무부를 신설했다. 학무부의 장은 학무총장으로 교육과 학예에 관한 일체 사무를 통할했고, 초대 학무총장에는 김규식이 임명됐다. 당시 임시정부를 이끌던 안창호도 1920년 신년 연설 ‘우리 국민이 단정코 실행할 6대사’에서 교육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독립운동 기간에 우리는 교육에 힘씀이 마땅할까요? 나는 단언하오. 독립운동 기간일수록 더 교육에 힘써야 한다고. 죽고 살고 노예 되고 독립됨이 판정되는 것은 지력(知力)과 금력(金力)으로요. 우리는 아무리 하여도 이 약속을 벗어나지 못하오. 우리 청년이 하루 동안 학업을 폐하면 그만큼 국가에 해가 되는 것이오. 본국에는 아직 우리의 힘으로 교육을 실시하지 못하지마는 기회 있는 대로 공부를 해야 되고 시켜야 되오. 독립을 위하여 공부를 게을리하는 이야말로 독립의 정신을 잃지 아니하오? 국가를 위하여 독립을 위하여 시간 있는 대로 힘써 공부하시오. 또 국민에게 좋은 지식과 사상을 주고 애국의 정신을 격발하기 위하여 좋은 서적을 많이 간행하여 이 시기에 적합한 특수한 교육도 하여야 하고 학교도 세우고 교과서도 편찬하여 해외에 대한 아동에게도 가급적 교육을 실시하여야 하오.”
국무총리 이동휘도 같은 해 3월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독립운동을 진행하는 간에도 가급적으로 교육에 진력하기 위하여 그 방침은 의무교육을 실시하며 교과서를 편찬하며 기타의 제도를 준비”해야 한다면서 의무교육과 교과서 편찬 등을 시정방침의 하나로 내세웠다.
상해 공립 인성소학교 졸업장.
동아일보 1925년 6월 4일 자에 보도된 상해 3·1중학 개학 소식.
임시정부의 공립학교들
임시정부의 공립학교는 인성학교다. 상해에는 동포 자제를 위한 교육기관이 임시정부 수립 이전에 설립돼 있었다. 인성학교로 1917년 상해에 살던 한인 동포들이 세운 초등학교였다. 한인 동포들이 상해 교민단을 조직해 인성학교를 운영했는데, 임시정부가 이를 추인해 공립학교가 된 것이다.
인성학교는 상해 대한교민단이 맡아 1935년까지 운영했다. 이 시기 초대 여운형을 비롯해 손정도·안창호 등 12명의 교장과 60여 명의 교사가 근무했다. 교직원들은 중국인들도 있었지만, 주로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그리고 교민단에서 일하던 독립운동가들이었다.
학생 수는 임시정부 수립 이전에는 10명 미만이었지만, 이후에는 사오십 명에 달했다. 인성학교의 교과목은 민족혼을 심어줄 국어·국사와 본국지리에 치중했고, 그 밖에 한문·산술과 이과 그리고 3~4학년부터 중국어와 영어를 가르쳤다.
상해에는 중등과정으로 3·1중학도 있었다. 인성학교 졸업생의 진학과 중국에 유학 온 동포 학생들을 위해 중등과정으로 3·1중학을 열었던 것이다. 임시정부의 공립중학인 3·1중학교는 학무총장을 지낸 김규식이 교장이었고, 교사로는 한국인 5명과 중국인 등 외국인도 여러 명 있었다. 3·1중학의 학제는 초급 3년, 고급 2년의 5년제로 운영됐으며 학생 수는 100명 정도였다.
인성학교는 교과수업만이 아니라 신체 단련과 덕성 함양을 위해 해마다 춘계운동회를 개최했다. 4월 초순에 개최되는 이 운동회는 3·1절 못지않은 명절이었고 인성학교 학생들만의 행사가 아니라 상해에 사는 한인 동포들의 잔칫날이기도 했다.
더욱이 3·1절이나 8·29국치일 또는 음력 10·3 개국기원절(개천절)이 되면 한인 동포들은 인성학교에서 기념식을 했다. 이것은 단순한 기념행사를 넘어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되새기는 일이었다. 인성학교 학생들은 태극기를 높이 걸고 애국가를 합창했고, 애국적 사건이나 항일투쟁의 내용을 연극으로 만들어 공연하기도 했다.
결국 인성학교를 비롯한 임시정부의 공립학교는 동포 자제를 가르치는 교육기관이자 한인 동포들의 문화광장이고, 민족혼을 고취하며 독립의지를 다지는 결속의 장이었던 것이다.
[출처] : 김용달: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임시정부 100년, 고난의 3만리> / 국방일보
임시의정원 예산결산서 살펴보니
- 1938년 임정 예산 57만 위안… 64%가 독립투쟁 위한 軍費
국회 예산정책처는 9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개원(10일) 및 임시정부 수립(11일) 100주년을 앞두고 1935년 이후 임정이 임시의정원에 제출한 예결산서 중 일부를 분석한 결과를 내놨다. 예산정책처는 “임정은 임시의정원의 예산안 심사와 확정, 정부의 집행, 회계검사·결산 등 체계적 재정 체계를 갖췄던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예산정책처는 1938년 임정이 임시의정원에 제출한 세입세출 예산서 총액은 57만8867.88위안이었다고 밝혔다. 계산 방식에 따라 다르지만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당시 환율과 하급 공무원 임금 수준 등으로 보아 이를 오늘날 60억 원 정도 가치로 추정했다.
임정은 이 가운데 63.9%에 이르는 37만 위안(약 38억 원)을 군비와 군훈비(軍訓費·군사훈련비)로 편성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 발발을 계기로 임정은 1000명 규모의 1개 연대와 장교 200명을 양성해 일제와 전쟁을 벌이고자 했던 것이다.
한시준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임정은 당시 만주에서 독립군을 지휘했던 지청천 유동열 장군 등으로 급히 군사위원회를 꾸리고 군사사업비를 편성했다”면서 “그러나 임정이 중국 창사에서 광저우 류저우로 피란하는 비용으로 쓰였고, 바로 군을 창설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한국광복군은 1940년 창설했다.
예산정책처가 이번에 분석한 자료는 임시의정원 의장과 국무령을 지낸 만오 홍진 선생(1877∼1946)이 1945년 환국하며 가져온 임시의정원 문서다. 홍진 선생의 손자며느리 신창휴 씨(85)는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도 온전히 간직해 온 임시의정원 관인을 10일 국회에 기증한다. 기증식은 이날 국회에서 임시의정원 개원 100주년 기념식과 함께 열린다.
1938년 임정 예산서에는 미주, 하와이 등에 사는 동포들의 피땀 어린 독립성금이 드러나 있다. 임정은 혈성금, 애국금, 후원금 등 7만1086위안과 역시 사실상 성금인 인구세(인두세) 2600위안 등 오늘날 가치로 7억여 원(추정)의 성금 세입을 예상했다. 전체 세입 예산의 대부분은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임정을 지원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금(50만 위안)이었다.
“임시정부를 후원한 미주, 하와이 동포들이라도 만나보고 돌아오다 비행기에서 시신을 던져, 산중에 떨어지면 짐승들의 배 속에, 바다에 떨어지면 물고기 배 속에 영원히 잠드는 것이다.”(‘백범일지’에서)
백범 김구는 만약 자신이 생전 독립한 나라에 돌아가지 못한다면 죽음의 방식은 이런 것이기를 소망한다고 1942년 썼다. 일제 탄압으로 국내 연락망인 연통제가 1921년 소멸된 뒤 해외 동포들의 후원은 임정 운영에 그만큼 긴요했다.
한편 1940년대 임시의정원 의원은 거마비 외에는 급여가 없었다고 예산정책처는 밝혔다. 의장, 부의장, 비서장, 비서 등만 급여를 받았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