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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경북 지역 스크랩 아름다운 추억을 걷는 청산도(0.11.27)
숲길(吉) 추천 0 조회 106 10.12.07 20:16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아름다운 추억을 걷는 청산도(0.11.27)

 

몇달전인가 칠갑산 출렁다리, 장곡사 등 충주여행시에 김다은 가이드가 여행스케치에서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으로 문화생태탐방로 트레킹 상품이 있는데 자신이 가이드를 한다는 것이다.

상품을 검색해 보니 남해보리암 가는 길이 마음에 들어 예약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기일을 보던 중 어느 날 갑자기 모두 예약이 되었다.

 

너무 아쉬워 하면서 너무 재다가 일이 안된 케이스라고 생각을 했는데 다시 상품이 게시되고 그 중 이 청산여수길이 마음에 들어 몇 달전에 잽싸게 예약을 했다.

마침 결혼기념일이라서 항상 같이 다니는 여행이지만 더욱 의미가 있는 것같아 날을 기다렸다.

요즘 북한이 우리 연평도에 무자비하게 대포를 싸서 우리의 귀한 아들 2명이 죽고 민간인 2명도 죽는 일이 벌어졌다.

 

시기가 하수상해서 가도되나 하는 생각도 일부 있었지만 그래도 어렵게 예약했으니 가야겠다고 생각을 해서 겨우 가게 되었다.

2일전에 문자가 왔는데 박혜선가이드이고 교대역9번출구까지 아침 6시 50분까지 오라느 것이다.

어? 가이드가 바뀌었네 하고 생각을 했는데 그런 사정이 있었나 보다 하고 넘어갔다.

6시 50분까지 가기 위해서는 4시 40분경에 일어나 씻고 준비하고 집에서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출발을 했다.

 

도착하니 6시 20분경은 되었던 것으로 기억되어 화장실도 가고 시간을 끌었다.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화장실을 잘 다녀오는 것인 것같다.

그래야 하루시작이 편하고 산뜻한 것같다.

드디어 시간이 되었는데 2명 1팀이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박혜선 가이드가 전화 연락을 해도 전화도 받지 않는다고 하며 7시 10분까지 기다려도 오지 않아 할 수 없이 완도의 배시간이 있기 때문에 출발을 했다.

 

출발해서 어느 정도 가다보니 늦은 분이 전화가 왔는 모양이다.

휴게소까지 택시로 쫓아오겠다는 이야기도 했는데 기사님이 도저히 따라올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여러 번 전화 통화 끝에 휴게소에서 쉴 때 코스가 비슷한 담양가는 여행스케치 버스를 타고 쫓아오겠다는 것이다.

처음에 정안에서 20분간 쉬었는데 차가 따라오지 못하는 것이다.

 

다시 다음휴게소에 가서 20분간 쉬었는데도 따라오지 못해 가고 있던 중에 천천히 가면 길가에서 잡을 수 있다고 해서 겨우 길가에서 담양가는 차가 뒤따라와서 2분이 탔는데 모녀였다.

처음에 모녀가 담양가는 차 기사님에게 부탁을 했는데 도저히 어렵다고 했는데 딸을 보고는 가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알고보니 딸과 모녀가 예전에 그 기사님 차를 탔는데 기사님이 기억이 나서 해주시겠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하긴 이 아름다운 여행길을 놓치셨으면 두고 두고 후회할 뻔 하였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어머님와 딸은 예전에 우리가 살던 동네에 사시던 분이라고 확인이 되어 여러 가지 인연도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 일행중 또 다른 분도 동네에 살던 분이 계셔서 여러 가지 특별한 인연이 있는 여행이었다.

완도가는 길은 정말 멀었는데 경부타고 가다가 저 남쪽 광주 부근인가에서부터 서해안을 타다가 광주외곽으로 해서 나주, 목포, 영암을 거쳐 보성, 해남을 거쳐 완도에 도착하였다.

가다가 휴게소에서는 피라칸타 분재를 이쁘게 해 놓아 눈요기를 시켜 주었다.

그러고 보니 2번째 쉰 곳이 정읍휴게소였는데 거기에 피라칸타 분재도 있고 정읍의 관광명소에 대한 사진과 설명도 있었다.

 

정읍휴게소에는 작은 공원이 있어 탱크도 하나 전시회 놓았고 동상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탱크 사진을 담았는데 우연히 예전에 보령을 같이 갔던 김지원 가이드와 이보람 가이드가 담겼고 두분 가이드는 박혜선과장님을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고 계셨다.

박혜선 과장님 말로는 이 청산여수길 문화생태탐방 트레킹 여행은 여행스케치의 수많은 가이드가 경쟁을 해서 박혜선과장님이 선정되었다고 뿌듯해 하셨다.

여행스케치는 버스에서 방송하는 유쾌한 유행이 있어 박혜선과장님도 음악과 함께 방송을 하였다.

 

나중에 김지원 가이드에게 박혜선과장님이 가이드중 대빵이냐고 물으니 존경심이 가득한 말로 아까 보지 않았느냐?하면서 그 강력한 포스를 연상하는 듯한 이야기를 했다.

여행스케치 후기에 보면 이보람 가이드 감사합니다. 라는 말이 많은데 이제 얼굴이 확인되었다.

 

김지원가이드와 박보람가이드는 단짝처럼 아주 친하게 버스 제일 뒤 왼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박혜선 과장님의 안내멘트에 가끔 추임새를 넣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 들려준 노래는 판타 넬리지아라고 남자의 자격에서 히트친 노래였는데 사라브라이트만 노래인가 했는데 다른 사람 노래라고 하는 것같았다.

해남으로 갈수록 밭에 배추가 많이 심어졌는데 해남 배추는 12월에 출하를 한다고 하는 것같았다.

 

바다도 보이고 멀리 완도가는 다리도 보이는 것이 이제 다와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녀 버스태우기 프로젝트와 박혜선 과장님의 방송 덕분에 6시간 30분이나 걸린 여행이 아주 지루하지는 않았다.

우리 여행객중에는 지난번에 해남 트레킹에 박혜선과장님과 함께 참여한 사람도 많았고 1에서 9탄까지 문화생태탐방 트레킹에 더러 참여한 사람도 많았다.

 

내년에도 이 트레킹이 시작되면 번개같이 참여할 사람이 많고 경쟁이 심할 것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버스에서 어떤 분은 200몇십만원에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자고 다른 회원에게 권하는 회원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상당한 수분의 여행 매티아가 많이 탔다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 기사님은 너무 친절하고 안전하게 운전을 잘해 주셔서 지루한 시간이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가는 길에 선돌이 물에 잠긴 곳이 있었는데 이 선돌은 썰물때는 모두 드러나고 밀물때는 잠기는 것같은 예감이 들었다.

우리가 서울을 출발할 때는 눈과 비가 같이 와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완도에 오니 날은 흐렸지만 비나 눈은 오지 않아 그래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완도여객터미날 가는 길에 붉은 다리가 보였는데 이 다리가 신지도인가 하는 섬을 연결하는 다리라고 하는 것같았다.

 

정확하게 13시 30분경에 여객터미날에 도착하여 맞은 편 해궁횟집에서 꽃게탕을 먹었는데 배도 고프고 음식도 먹을 만 해서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식당주위를 돌아보니 까마중과 분꽃이 있었고 식당 뒤쪽 산위에는 완도의 탑이 보였다.

그리고 측백이 보였는데 열매가 맺어져 있었고 식당에는 어항에는 장어, 돔 등이 보였다.

 

주변에는 무당거미를 줄을 치고 먹이 사냥을 준비하고 있었다.

시간이 남아 여객터미날 안을 구경하였는데 완도의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표현해서 눈을 즐겁게 하고 있었다.

사진을 보니 항구 옆에 둥그런 섬의 이름이 주도였다.

 

완도항에는 엄첨나게 큰 제주행 페리호도 정박해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어떤 분은 차를 끌고 제주갈 때는 여기 완도에서 타를 탄다고 하는 것같았다.

우리 페리호 말고도 섬사람 5호가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예전에 도초도에서 목포올 때 섬사랑 6호인가를 탔던 기억이 난다.

 

청산도 가는 배에서 어디선가 본 분이 있어 미소를 지었더니 같이 웃는 것이다.

누구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하는 것이다.

남편도 왔다고 해서 같이 인사도 나누었는데 정말 세상은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일부 햇살이 비쳐서 완도를 떠나면서 뒤를 보니 온통 바다에 보석을 뿌려 놓은 듯 바닷물과 배의 물거품이 빛나는 것이다.

 

청산도에 도착할 때가 되니 파도가 심해져서 배가 아주 요동쳐서 붙잡지 않으면 넘어지게 생겼다.

나중에 우리 뒤에 오는 배는 파도가 세게 쳐서 출항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청산도에 들어와서 파도가 세면 배가 출항하지 못해 며칠 머무르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항구에 들어가면서 보니 왼쪽에 흰등대, 오른쪽에 빨간 등대가 있었다.

 

어느 항구나 마찬가지인데 그것은 장애물의 경계라는 것이다.

사람은 1인당 7천 얼마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버스는 왕복 20 몇만원이라고 하는 것같았다.

우리 배가 도착한 곳은 도청리로 면소재지인데 항구는 도청항이었다.

항구에는 아름다운 청산도라는 표지석이 아주 크게 서 있었다.

 

일주버스도 택시도 여기에 많이 정차하여 손님을 태우는 것같았다.

주변에 수협도 있고 농협도 있었는데 우리 해설사 선생님은 여성분이신데 인터넷 검색을 하니 혹시 김미경 선생님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검은 바지에 검은 모자, 그리고 청산도라고 쓰여진 연두색 잠바를 입으시고 한손에는 생수, 옆에는 해설용 스피커를 차고 계셨다.

 

해설사 선생님은 학교는 육지에서 다니시다 이곳 고향 청산도로 돌아오셔서 결혼하여 사신다고 하였다.

최근에는 이 청산도에 인구가 2600명인데 계속 줄고 있고 아이는 작년에 1명 겨우 태어났다고 하였다.

크기는 여의도 크기도 7,8배 된다고 하였다.

타를 타고 오면서 퀴즈도 내고 가위, 바위, 보 게임도 했는데 퀴즈에서 당첨되신 분이 느림의 종을 치기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퀴즈에서 여행스케치 손수건도 받았는데 가위, 바위, 보 해서 지는 게임과 이기는 게임에서 우리 가족이 손수건 2장을 받게 되었다.

느림의 종을 치고 기념사진을 담고 버스를 타고 당리까지 갔다.

당리에 가니 성터가 있었는데 아주 나지막했는데 복원시켰다는 것이다.

당리란 당집이 있었다는 것인데 장보고의 장수중 용맹한 분을 모신 곳이라고 한다.

여기 당리 입석이 있는 곳에서 봄의왈츠 세트장이 있는 곳으로 해서 오늘의 트레킹 코스가 정해졌다.

 

서편제 촬영지라는 곳에서 해설사 선생님이 해설을 해주시고 다시 봄의 왈츠 촬영장쪽으로 걸어갔다.

서편제 세트장위로 석양 빛이 내리 ?아 아름다운 분위기가 있었다.

저기 멀리 도락리 만의 앞바다에는 전복양식장이 눈에 보이고 있었다.

군데 군데 길가는 길에는 길 표시시로 슬로길이라는 표지가 있었다.

바람이 불어 날씨가 추웠으므로 일행들은 모두 모자를 쓰고 추위를 막아가면서 걸었다.

 

마늘은 비닐로 씌워서 키우고 있었고 보리는 그냥 밭에서 비닐없이 키우고 있었다.

봄의 왈츠 세트장에는 주인공들의 사진을 세워 놓고 있었고 안에 들어가 볼 수도 있었지만 시간관계상 그냥 지나갔다.

여기 세트장에서 도락리와 도청항의 풍경을 담았는데 날씨가 흐려서 풍경이 별로였다.

여기서 본 풍경은 청산도 논들이 대부분 다랑이논으로 보였다.

 

이 곳 청산리는 묘를 아주 잘 쓰는데 비석과 상석, 망주석, 문인석이 있는 곳이 많았다고 어느 곳은 장명등도 세우고 있었다.

묘의 특징은 잔디보다 띠가 많이 자라고 있었던 것이 특징이었다.

 

아직도 산국이 많았고 억새가 온세상을 은빛으로 빛나게 하고 있었다.

쥐똥나무 열매같은 것이 있었는데 아마도 광나무 열매도 생각되었다.

만수국아재비도 아직도 꽃이 있었는가 하면, 무당거미도 보였다.

뒤를 돌아보니 우리 일행이 억새숲을 지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쥐꼬리망초가 아직도 피어있고 우묵사스레피나무가 열매도 맺고 꽃이 핀 친구도 있었다.

소나무 잎이 육지보다 더 억세게 보이는 것이 바닷바람때문이 아닌가 하는 해설가 선생님의 해설이 있었고 댕댕이덩굴도 열매를 맺었다.

길을 걷는 일행을 보니 너무 호사로운 길을 걷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보리밥나무도 잘 자라고 있었다.

 

여기는 청미래덩굴도 참 많이 눈에 띠었고 유독 빨간 열매가 눈을 끌었다.

드디어 천선과 열매를 보았는데 해설사 선생님은 천사들이 먹는 과일이라고 했던가?

화랑포가는 길과 연애바탕길로 가는 갈림길에 도착했는데 앞선 일행이 있다고 해서 화랑포가는 길로 가기로 했다.

 

여기서 부터는 털머위가 많이 심어져 있고 노란꽃도 피어 있었다.

아름다운 쑥부쟁이가 얼마나 분홍색으로 이쁜지 눈이 부셨다.

가끔가다 보면 청산도슬로시티라는 로고가 달팽이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너무 귀여웠다.

작살나무 인듯한 열매도 보았는데 정확한 이름은 알 수 없었다.

 

화랑포 전망대에 왔는데 예전에 역대 청산진 진수들이 이곳에 와서 놀았다는 것이다.

여기 청산포는 파도를 파도라 하지 않고 꽃이라고 표현한다는 것이다.

파도에 대한 미화인지 아니면 그만큼 파도가 아름다웠는 지는 모르겠다.

드디어 화랑포를 돌아서니 저 멀리 말탄바위와 범바위가 보인다.

저 쪽에서 이곳을 보면 화랑포 부근이 거북이 머리고 나머지는 몸통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저기 바다에 줄지어 있는 것은 김 양식장이라는 것이다.

드디어 연애바탕길의 시작인 초분이 있는 곳까지 왔다.

초분은 효의 상징이라는 것인데 멀리 있는 아들이 오기전까지 부모를 장사지내지 못한 풍습이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1주일에 한번은 계속 손을 보아야 하고 짐승들의 침입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오던 길에 예찬이인가하는 초등 4학년이 있었는데 이 친구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우리 해설사 선생님이 연락을 해보더니 연애바탕길을 쏜살같이 뛰어 가서 찾아내었다.

연애바탕길은 산비탈 허리를 가는 길로 순찬하지는 않았지만 난간 줄이 있어 그런대로 갈만 했다.

가는 길에 보니 부처손이 많이 자라고 있었다.

 

지나는 길에 보니 우묵사스레피나무가 아주 많았고 꽃도 많이 피고 열매도 많이 맺고 있었다.

날씨가 맑았으면 금상첨화였겠지만 길이 너무 아름답고 좋았다.

군데 군데 이꼬들빼기와 쑥부쟁이가 많이 피어 있었다.

 

드디어 범바위길 가는 갈림길에 도착하여 돌아오게 되었는데 무덤가에 있는 띠가 단풍이 들어 너무 이뻐서 박혜선 과장님과 건이가 기념사진을 찍었다.

다시 봄의 왈츠 세트장과 서편제 세트장을 지나 솔밭이 있는 당집 부근으로 와서 해설사 선생님의 해설을 들었다.

 

솔밭 바로 아래 초분이 하나 있어 초분에 대하여 해설사 선생님이 다시 설명을 했다.

그곳에서 보는 도락리앞쪽 만이 너무 멋지게 보였다.

날씨가 맑았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것은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 할 과제이다.

 

봄에 보면 날씨도 좋고 날도 길어 시야가 아주 좋았겠지만 지금은 늦가을에 늦은 시간이라 보는 시야가 쓸쓸하게 보인다.

바다를 보니 흰물결이 일고 있어 파도가 많이 친다는 것이 느껴졌다.

해설사 선생님의 해설은 계속되어 우리 여행객은 진지하게 해설을 들었다.

 

여기 청산도의 집들은 예전 새마을 운동할 때 지붕 개량사업을 해서 인지 주황색, 청색 지붕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낮은 성곽을 보니 예전이 성곽이 이리 적었으면 어떻게 마을을 지킬 수 있었을까? 생각이 들고 상대적으로 마을이 너무 낮은 곳이라는 느낌을 지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마을을 방어할 수 없어 한 때 입도금지되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당리에서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는데 일부는 등대모텔에서 자고 일부는 칠성모텔 그리고 가이드 일행과 일부는 10분 거리에 있는 민박집을 찾아갔다.

원래는 등대모텔과 칠성모텔에 머물기로 되어 있었는데 우리 배를 마지막으로 나중에 있던 배가 들어오지 못하고 출항도 하지 못해 등대모텔에 머무르던 사람이 육지로 가지 못함에 따라 부득이 인근 민박에 가게 되었다.

 

그래도 저녁은 도청항 옆 도청리 인근에서 했는데 우리는 여기 저기 기웃거리다가 모범음식점이라는 표지가 붙은 바다식당에서 식사를 했는데 식사종류가 별로 없었다.

광어회, 우럭회, 전복, 소라, 매운탕, 백반 등이어서 전복 500g 에 3만원, 우럭매운탕 중 25천원, 공기밥 2그릇해서 저녁을 먹었다.

 

우리 옆에는 우럭회를 드시는 분도 있었고 매운탕 드시는 분들도 계셨다.

바다식당벽에는 봄의 왈츠 사진이 대형 사진으로 붙어 있었다.

 

아침에 6시에 일어나서 씻고 주위를 산책했는데 다행히 6시 30분인가 50분인가 출항하는 배가 고동을 울리며 출항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제 해설사님 말씀으로는 배출항 여부는 전적으로 선장의 재량이라는 것이다.

가끔은 파도로 며칠 섬에 머무르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요즘 연평도 사건 때문에 나라가 시끄러운데 출항을 못하면 큰일이라는 걱정이 들었는데 다행이라고 생각되었다.

시간이 남아서 여객선 대합실 구경을 했는데 여기 구경 온 사람들이 즉석사진을 찍어 붙여 놓은 것이 신기했다.

 

다시 모텔로 들어와서 올 때 가위, 바위, 보 해서 받은 여행스케치 손수건 기념사진을 찍었다.

아침은 7시 30분부터 등대모텔 1층에 있는 청산도 식당에서 전복죽을 준다고 해서 20분쯤 가니 전복죽을 주는데 먹을만 했다.

 

시간이 남아 우리 숙소인 칠성모텔 1층에 주인 아주머니가 건어물을 파는 것이 있어 미역, 다시마 등을 샀는데 여러 사람이 샀다.

 

8시 30분경에 해설사 선생님이 오셔서 범바위쪽 트레킹에 나섰다.

가면서 범바위로 가느냐, 아니면 말탄바위로 가느냐 선택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도착해서 시간이 있어 말탄바위쪽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차에서 내린 동네는 돌담을 많이 쌓았는데 바람을 피하려는지 아니면 경계를 위한 것인지 역사와 정성이 돋보였다.

어떤 분들의 공적비도 보이고 동네에 있는 진돗개같은 개가 꼬리를 흔들고 반갑게 맞기에 사진으로 담아 주었다.

네모진 마을 발래터 같은 것도 보여서 신기했는데 이 곳 청산도는 다행히 물이 풍부하다는 것이다.

 

어제 식당에서 물을 먹었는데 물 맛이 아주 좋았는데 삼다수보다도 좋은 것같았다.

해설사 선생님 말로는 아주 깊은 곳에 물을 모아서 물 맛이 좋다는 것이다.

지나가는 길에 폐교 연혁비가 세워져 있었다.

요즘 시골은 학교가 하나씩 없어지는 추세가 여기도 예외가 없는 것같다.

 

청산도의 슬로길 도안은 아주 멋있게 잘한 것같은데 입표지도 있고 화살표 표지도 있다.

말탄바위로 올라가면서 보니 작은 저수지도 보이고 어제 걸었던 화랑포길과 연애바탕길 쪽이 거북이 머리와 몸통으로 보이는 것이다.

 

낮은 돌담과 억새가 가을의 정취를 잘 보여주고 있는데 마을에 있는 길은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었다.

낯선 사람은 흙길이 좋겠지만 마을사람들이 불편하니 포장을 했을 것이다.

가는 길에 댕댕이덩굴 열매가 튼실하게 보였다.

 

본격적인 오르막길이 시작되어 바다를 보니 저기가 여서도인가 보다.

보리밥나무 꽃도 약간 시들었지만 보였다.

우묵사스레피보다 사스레피 열매는 더 굵고 튼튼하게 보였다.

우묵사스레피 꽃도 여기 저기 한창이었다.

 

청미래덩굴의 열매도 보이고 등골나물 꽃이 아직도 보였다.

지나는 길이 건이 독사진도 담아 보았다.

초등 2학년인데 퀴즈도 아는 것도 많고 씩씩하게 잘 걸었다.

주름이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것은 (주름) 피자라고 한다.

사과를 하면서 웃는 것을 풋사과라고 한다고 가르쳐 주었다.

 

길을 올라갈수록 점점 더 풍경이 멋지게 보였다.

말탄바위 가까이 가니 너덜바위처럼 생긴 것이 많이 있는데 흘러내릴까봐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우리가 권덕리에서 오르기 시작했는데 권덕리해안도 잘 보이고 멀리 화랑포해안도 멋지게 보였다.

말탄바위쪽에서 상도와 그 쪽 해안을 보니 나름대로 절경이었다.

 

범바위쪽은 산불이 났다고 하더니만 조그만 나무가 자라는 것이 마치 까까머리를 연상시키고 있었다.

여기에도 바다를 바라보는 꽃이 핀 우묵사스레피가 있었다

여기서 보니 상도에 큰산 작은산 그리고 그 사이에 애기산이 있는데 신기하게 바위에 소나무로 추정되는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상도쪽 해안가와 그 바로 옆 바위가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 바위와 해안에 갯바위 낚시를 하는 사람이 보였다.

이쪽 너머 해안의 풍경도 나름대로 멋진 풍경이었다.

날씨만 좋았으면 더 멋진 풍경이었을 것이다.

 

여기 지나는 길도 구절초도 보이고 이고들빼기와 쑥부쟁이도 꽃을 피우고 있었다.

오르는 길에 횡재를 했는데 자주쓴풀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이 길에 몇 포기가 있어 눈을 즐겁게 하고 있었다.

청산도는 참 묘가 많다는 것이 우리 일행들의 의견이었다.

 

범바위를 올라가다가 잔대를 발견했는데 색감이 아주 고은 친구였고 섬잔대로 추정된다고 하는 것이다.

범바위 올라가면서 뒤돌아 보니 묘 주위에 낮은 돌담을 쌓아 놓았는데 아마도 짐승들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범바위가 위용을 나타냈는데 우락 부락한 느낌이 들었다.

범바위 왼쪽으로 돌아갔는데 앞에 등대같은 것이 보였다.

범바위를 지나가는데 자금우가 열매를 맺었다.

범바위는 어미범이 뒤딸라오는 어린 범을 돌아보는 형상이라고 하는데 예전에 호랑이가 범바위를 보고 어흥하니 범바위에서 울림이 더 커 나보다 더 무서운 짐승이 있구나 해서 도망쳐서 청산도에는 호랑이가 살지 않는다는 전설이 있다는 것이다.

 

범바위 전망대에서 상도와 여서도가 보이고 왼쪽으로 거문도, 오른쪽으로 제주도도 보인다는 것이다.

기어코 범바위에 올라가는 일행이 있었는데 우리는 위험하게 보여 그만두었다.

 

등대에 올라가니 느림우체통이 설치되어 있었다.

보적산으로 올라가는데 인동덩굴이 열매를 맺고 있었다.

엉겅퀴도 시들어 가고 있었고 내려가면서 앞을 보니 다랑이논이 멀리 눈에 보였다.

내려가니 주차장이 나왔는데 여기에는 화장실도 잘 갖추어져 있었다.

 

산에서 내려오는 길은 억새가 꽃을 피워 나름대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여기 주차장에서 다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상도앞의 해안가로 향했다.

내려가는 길에 쑥부쟁이, 광나무 열매가 까만 열매를 보여 주었다.

 

여기 엉겅퀴는 아직도 싱싱하게 보였고 이고들빼기도 노란 꽃이 이뻤고 심어진 패랭이꽃은 아직도 꽃을 보여주고 있었다.

내려가는 길에 전망대가 있어 전망을 구경하고 갔다.

 

청산도의 물은 옥색으로 쪽빛바다라는 것이 실감이 났다.

해설사님 말로는 옛날에 청산도로 시집온 새댁이 물이 너무 쪽빛이어서 물이 들까? 시험하기 위해 옷고름을 바닷물에 적시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쫓빛 바다물이 고은 색이었다는 것이다.

 

아까 오다 보니 저기 멀리 울타리를 쳐놓은 곳이 있는데 그것은 야생에서 자라는 염소를 포획하기 위한 울타리라는 것이다.

염소는 나무뿌리까지 먹기 때문에 자연생태를 파괴하는 주범인데 집에서 기르던 것이 야생으로 가버린 것이라고 한다.

 

용담이 있었는데 꽃이 시들어가고 있었고 오리풀도 이제 전성기를 지난 듯했다.

길을 따라 내려가니 상도앞 해안은 맑은 계곡물이 흐르는 곳이고 좀 큰 몽돌해안과 접하고 있었다.

물이 너무 맑아서 그냥 먹어도 괜찮을 것같은 생각이 들었다.

 

내려와서 산쪽을 보니 소나무가 마치 X자처럼 가지가 퍼졌는데 큰 바위를 뚫고 자라는 것이다.

해설사님 말씀으로는 소나무는 뿌리에서 바위를 부식시키는 물질을 내뿜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기름나물도 아직도 꽃을 피우고 있었고 멀구슬나무도 열매를 맺고 있었다.

산부추도 하나 있었는데 시들어가고 있었으며 계요등 열매도 주황색을 띠고 있었고 댕댕이덩굴은 열매가 한창이었다.

 

오리나무도 있었는데 여기는 오리나무가 아주 많다고 하셨는데 오리나무 씨가 몇키로까지 날아간다고 하였던 것같다.

유자로 보이는 노란 열매도 눈에 띠었고 구들장논 구경을 하였는데 구들장논은 구들장에 진흙을 ?어 물이 새지 않게 하여 물이 밑으로 흐르게 하는 점이 일반 다랑이논과 다른 점이라고 하였다.

 

신기한 것은 길옆에 송악이 한창 꽃을 피우고 있어 육지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마늘과 배추, 그리고 보리가 자라고 있는 모습은 포근하기까지 하였다.

 

청계리가는 길에 갈가에 일부 해송이 있었는데 예전에 불나기 전에는 산에도 이렇게 해송이 많았다는 것이다.

저기 밭 사이에도 초분이 있는 것이 신기했다.

 

개갓냉이가 아직도 노란 꽃을 피운 것이 보였으며 까마중은 자주 눈에 띠었다.

청계리에 가까이 오니 철 이른 유채꽃이 지난 봄의 화려함을 대신하는 것같았다.

지나가다 보니 꽃향유가 아직도 꽃을 피우고 있어 모든 것이 슬로라는 것이 실감이 났다.

 

저기 산중턱에 절이 하나 보였는데 벽련사라고 했던 기억이 나는데 비구니스님 2분이 절을 지킨다는 것이다.

다사마을이라는 기념탑이 있는데 많은 선비들이 나신 곳이라는 곳이다.

청산도에서 글을 자랑하지 말라고 할 정도로 이곳 분들은 글에 밝다는 것이다.

 

동백나무에 꽃도 하나 피어 너무 일찍 피지 않았나 생각이 들었다.

청계리에 버스를 세워둔 곳까지 왔다.

이제 이곳에서 버슬르 타고 점심을 먹으러 보덕산장까지 가야한다.

 

청계리에서 신흥리로 내려다 보는 풍경은 층층히 논, 밭이 보여 풍요로운 느낌이 들었는데 자료를 보니 이곳 분들의 삶도 아주 척박하였다고 한다.

청계리 표지석에서 기사님과 해설사님 그리고 일행중 한분이 사진을 찍었다.

용기있는 분이 사진을 남기는 것이란 것이 실감이 났다.

 

우리의 가이드 삼총사는 아직도 열심히 걸어오고 있는데 청계리에는 훌륭한 인재가 많이 탄생한 마을이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버스타고 보적산장으로 가면서 보니 다랑이논이 너무 멋지게 보였다.

 

읍리라는 곳에 지석묘도 있고 하마비도 있었다.

버스가 잠시 정차한 틈에 지석묘와 하마비를 담고 안내판도 담았다.

햇볕이 비추니 산과 들에 있는 억새가 빛나니 더욱 멋진 풍경이 되었다.

드디어 보적산장에 도착해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보적산장에 도착하여 점심 준비를 위한 시간이 조금 남아서 산책을 했는데 코스모스가 아직도 피고 있었다.

보적산장에 도착하니 금년 1월 9일날 유인촌문체부장관이 방문했다는 사진이 있었다.

보적산장에서 백반정식을 먹었는데 나중에 물어보니 가격이 1인당 1만원이라고 하는데 문어, 거북손, 김무친 것, 생선 2종류, 돼지고기 머릿고기, 호박, 김치, 고들빼기김치, 청산도탕, 된장국, 고사리, 콩나물 무친 것, 청산도탕 등이 나왔는데 너무 맛있어서 다음에 가면 보덕산장에서 머무르고 싶었다.

 

주위를 보니 도깨비바늘, 만수국아재비, 방가지똥, 왕고들빼기 열매가 보였다.

개망초도 계절을 잊은 듯 핀 것이 눈에 띠었다.

주위에는 나뭇가지에 무청을 말리는 장면도 보였다.

버스정류장을 보았는데 비가 와서 들이치지 않게 입구를 빼고 사방을 유리로 막았다.

이곳은 길고 넓은 옥토가 있다고 해서 구장리로 불리운다는 표지석이 있었다.

 

걷기가 불편한 사람은 보적산장에서 봉고차를 대주어 타고 가고 나머지 사람은 30분내지 40분거리를 걸어 도청항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버스는 미리 가서 승차하지 않으면 배에 실을 수 없을 수도 있다는 판단이 있어 기사님은 미리 버스를 타고 가서 대기하면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걸어가는 길이 너무 좋았다.

옛 추억을 되살리며 고향의 따스함이 배어있는 길을 걸어가는 것이 유쾌한 일이었다.

가면서 언덕쪽을 보니 묘 5개가 나란히 있는데 그 밑으로 억새가 줄지어 피어 있는 것이 너무 좋았다.

 

쥐꼬리망초가 아직도 피어 있어 선물을 받은 느낌이었다.

논인지 밭인지 구분은 안가지만 억새와 갈대가 너무 멋지게 피어 있었다.

간혹 쑥부쟁이와 산국도 이쁘게 피어 있어 덤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가다보니 봄의 왈츠 세트장이 멀리 보이기 시작하였다.

가끔 보면 오래된 나무가 있고 선돌이 있는 모습도 더러 보였다.

당리쪽으로 오니 송악이 꽃핀 것이 또 보였고 서편제 세트장이 있어서 구경을 하고 갔다.

초가집인데 마루에 북을 가르치는 인형 모형이 있었고 마당에는 초가지붕을 이울 볕집이 쌓여 있었다.

 

엄첨 오래된 동백나무가 서 있어서 기념으로 담았는데 그 나무에 꽃이 피면 좋았을 것같았다.

담장에 사위질빵이 열매가 있는데 햇볕을 받아 너무 이뻤다.

드디어 당리 3거리 고개에 도착했다.

 

내려가면서 도락리쪽 만을 보니 이제 날씨가 맑아 너무 평화롭게 멋지게 보였다.

길을 가다보니 열대수가 있는데 워싱턴야자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저쪽 도락리는 간척사업을 했는데 반원모양의 지형이 간척사업을 한 곳이라는 것이다.

내려가면서 보니 119 소방파출소도 있었다.

 

도청항으로 내려가면서 보는 도청항의 풍경이 날씨가 좋아져서 아주 보기 좋았다.

도청항에 도착하니 청산고속카페리2호가 대기하고 있었다.

완도항으로 돌아올 때는 날이 맑아 풍광이 아주 좋았다.

 

오후 2시경에 완도에서 버스로 출발한 것같았는데 올라오면서 길이 너무 막혔다.

나중에 보니 수도권에 눈이 와서 차들이 잘 달리지 못한 것같았고 천안 논산 고속도로를 오면서 천안 가까이에서도 아주 많이 밀렸던 것같다.

 

우리 기사님 길이 너무 막히고 밀려서 너무 고생하셨는데 짜증 한번 없이 정말 안전운전을 해주셨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으니 기사님의 안전운전과 인품덕분에 1박 2일 이런 여행을 주로 가신다고 하였다.

 

올라올 때 시간이 늦을까봐 2분은 나주역 부근에서 내렸는데 KTX를 타고 올라온다고 하신 것같았다.

기사님과 박혜선 과장님 덕분에 너무 좋은 여행을 한 것같다.

또한, 이 좋은 여행을 기획한 문체부, 여행스케치 임직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새삼 기사님과 가이드가 여행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냐 하는 것을 느낀 여행이었다.

 

같이 여행한 모든 분들도 정말 시간을 잘 지키시고 가이드의 안내에 잘 따라 아주 유쾌하고 기분좋은 여행을 한 것같았다.

 

청산도에 대하여 자세한 내용은 아래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청산도

 

완도 남동쪽 해안에서 남동쪽으로 약 19.7㎞ 지점에 있다. 주위에는 장도·지초도·항도 등의 부속섬과 대모도·소모도·여서도 등이 있다.(완도항에서 뱃길로 45분)

섬모양은 둥근 소라형 모양이며 해발 343.4m, 총면적 42.70㎢, 해안선 길이 98.35㎞로 국립해상공원에 속하는 청정수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청산도는 하늘, 바다, 산 모두가 푸르다해서 '청산(靑山)'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섬으로, 자연 경관이 유별나게 아름다워 옛날부터 청산여수(靑山麗水)라 불렀고,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무공해 청정지역으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 서남해안 바닷길의 요충지로, 임진왜란 당시에는 이 일대가 전란에 휩싸여 거주하는 사람이 없다가 1608년 선조 41년에 사람들이 처음 거주하기 시작하였고, 1866년 고종 3년에 청산도에 당리진(堂里鎭)이 설치되어 강진, 해남, 완도 일원을 관장하였으나 1895년 고종 32년에 가리포진과 함께 당리진도 해체되었습니다.

 

이어 1896년 고종 33년 완도군이 설군되면서 청산도도 완도군에 예속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여서면을 청산면에 소속 편입시켰고 1964년 10월1일 청산면 모도출장소를 설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13개 법정리, 23개 행정리, 79개 반으로 이루어진 인정이 많고 인심이 훈훈한 반농 반어촌으로 주요 기관단체로는 면사무소, 보건지소, 파출소, 우체국, 입출항신고소, 예비군면대, 농협(하나로마트), 수협지점, 한전서비스센타 등이 있으며 학교 2개교 (중학교 1, 초등학교 1)가 있습니다.

 

최고봉인 매봉산(385m) 이외에 대봉산(379m)·보적산(330m) 등 300m 내외의 산이 사방에 솟아 있다. 이들 산지에서 발원해 사방으로 흐르는 소하천 연안을 따라 좁은 평야가 발달했으며, 중앙부와 서부 일부지역에는 비교적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동쪽 해안 만입부에 간석지가 있을 뿐 대부분 암석해안을 이루며 해안선이 복잡하다. 특히 남부 해안에 해식애의 발달이 탁월하다. 기후는 비교적 온화하고 비가 많다. 주민은 농업과 어업을 겸하나 농업에 더 많이 종사한다. 농산물로 쌀·보리·참깨·콩·마늘·고구마·감자 등이 생산된다.

 

연근해에서는 삼치·갈치·고등어·멸치·문어 등이 잡히며, 김·미역·다시마·톳 등이 양식된다. 취락은 중앙부와 서부 평야지대에 주로 분포하는데, 중심지는 서부의 도청리이며 이곳에 도청항이 있다. 청산도-완도 간 정기여객선이 운항한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해 있어 자연경관이 수려한 관광명소로 꼽힌다. 유적으로는 당락리에 1800년대에 축조한 당리성터와 당리마을 사당이 남아 있으며, 사당에서는 매년 음력 1월 3일에 당제를 올린다. 그밖에 읍리에 읍리성터와 남방식 고인돌, 부흥리에 백련암이 있다. 면적 33.28㎢, 해안선 길이 42.0㎞,

 

완도항에서 남동쪽으로 약 19.7km지점에 위치하며 동쪽으로 거문도, 서쪽으로 소안도, 남쪽으로 제주도, 북쪽 으로는 신지도를 바라보고 있으며 면적(41.92평방km,) 2009년 통계자료인구(약2.590명) 해안선길이 (42km) 청산도 면적(33.28평방km) 장도, 대모도, 소모도, 여서도의 5개 유인도와 무인도를 포함하여 23리로 이뤄져 있다,

 

주도인 청산도는 남쪽에 최고봉인 매봉산(384.5m) 과 보적산(330m) 북쪽에 대봉산(379m)이 솟아 있고 평지는 읍리와 양중리 부근에 발달 하였다, 주요 농산물은 쌀, 콩,마늘 등이며 근해에서는 멸치, 문어, 삼치 등 어로가 성하고 김, 미역, 전복 등의 양식이 활발하다, 면소재지인 도청리와 완도 사이에 정기여객선이 오간다.

 

1981년12월23일 다도해 해상국립공원 지정, 2007년4월5일 가고 싶은 섬 시범사업선정, 2007년 12월1일 아시아 최초 슬로시티로 지정 되었으며 영화 (서편제) 와 드라마 (봄의왈츠) 촬영지로서 푸른 바다, 푸른 산, 구들장 논, 돌담장, 슬로길 등 느림의 풍경이 가득 한곳 입니다,

 

면 소재지인 도청리(청산항)를 중심으로 관공서, 주요기관, 의료원, 약국, 식당, 편의점,주유소, 낚시점 등이 있고 민박집은 2km~7km 떨어진 각 마을에 위치 합니다,

3부 능선을 타고 오르고 내리는 듯한 해안도로(13.7km)는 아스팥트의 잘 포장된 왕복1차선이며 마을길은 대부분 진입 하였다가 다시 돌아 나와야 합니다, 완만한 곡선을 이루는 해안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마을 주변에서 일하는 주민들을 만날 수 있으며 해안가 절경이 차를 멈추게 합니다,

 

청산항

 

청산항은 천혜의 자연적인 조건을 갖춘 항구로, 70년대에는 수많은 어선들의 기항지로 그 면모를 자랑하였다.

청산도 근해는 일찍이 황금어장으로 불리웠을 정도로 어자원이 풍부해 수산업이 활기를 띠었다. 과거에는 이곳 청산항에 고등어잡이 어선들이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면서 고등어파시가 형성되는 등 고등어, 삼치어장으로 명성을 날렸었다.

 

이런 연유로 1960년대에는 어업전진기지로 선정되면서 바다사업이 번창,풍족함을 누리기도 했지만 7,80년대 들어서면서 어로 장비와 어업기술의 발달과 그리고 외지에서까지 몰려든 어선들이 치어까지 싹쓸이하는 불법 저인망 어장을 하면서 점차 바다가 황폐해져 갔고 지금 청산도 근해의 어선어업은 이제 쇠퇴일로에 있다.

 

그러나 그 양은 과거보다 훨씬 못하지만 지금도 철에따라 멸치, 삼치, 갈치어장이 형성되고, 바다를 이용한 공동양식장에서는 소라, 전복, 미역 따위의 해산물을 채취한다. 또 단지를 이용하여 잡는 청산도 문어는 그 맛과 영양이 우수하여 국내는 물론 일본으로도 수출된다

 

고인돌, 하마비, 숭모사

 

읍리 한쪽에 3기가 남아 있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양식으로 밑에 기둥이 있는 북방식 고인돌과 기둥이 없는 남방식인 지석묘가 원형대로 남아 있으며 그중 하나는 특이하게 덮개돌이 이중으로 올려져 있고 아래 땅속에서 돌검등 부장품이 나오기도 했다

 

청산도는 고려시대에는 강진현에 속해 있었으나 그 후 정부의 금도령으로 한때 사람이 살지않다가 숙종 7년(1681) 수군만호진이 설치된 이후부터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청산면 읍리의 지석묘는 청동기 시대의 유물로서 지방문화재 11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하마비가 지방문화재 108호로 지정되어 있다.

 

부흥리에는 고종 22년(1885)에 건립한 종묘사가 있다. 대표적 설화로는 효부이야기 등 다수가 전해져 오고 있으며 자장가, 한탄가, 시집살이 노래 등 옛부터 전해져 내려온 다수의 민요가 있다. 민속신앙으로는 청산면 당리마을의 풍어제 굿이 유명하다.

 

한국도서백서(발행 : 내무부 / 연구 및 편집책임 : 신순호)에서 소개하는 청산도의 모습이다.

읍리에 있는 고인돌(문화재 자료 제116호)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청산도의 역사를 이야기 해주며,하마비 역시 구석기 문화의 소산으로 하마비의 후면에는 음각마애불이 새겨 있는데 이는 재래신앙과 불교의 습합된 현상으로 보인다.

이 하마비는 선사시대부터 신앙의 대상이 되어온 입석으로 알려지고 있다.

 

숭모사는 김류의 학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웠다는 제당이다.

김류(1814-1884)는 조선말기의 문신으로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다 당쟁에 휘말려 여천군 삼산면 거문도에서 귀향을 살다가 1838년(현종4년) 귀향이 풀리게 되자 고향으로 돌아가던중 산세가 수려하고 인심이 순후한 청산도에 매료되어 이곳에 머무르게 되어 서당을 세우고 후세들의 교육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그때부터 "청산에 가서 글자랑 말라"는 말이 생겨나게 됐다

 

영화 '서편제' 촬영지

 

<진도아리랑>장면을 찍은 아담한 오솔길은 선창에 내려 오른쪽으로 걸어서 15분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 있다.

 

<진도아리랑>장면을 찍은 길을 따라 내려갈 때 오른쪽으로 보이는 오목한 언덕기슭에 자리잡은 당리는 아직까지도 옛 마을의 모습이 그대로 잘 보존된 드문 곳이다.

자연석을 층층이 쌓아 만든 거무튀튀한 담장과, 막 세수한 아기 얼굴만큼이나 말끔한 골목길은 시골마을의 단아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서편제>를 찍을 당시엔 초가집도 몇채 남아 있었는데,지금은 <서편제> 촬영때 사용했던 초가집을 포함해 두채만 남아있다.

 

“사람이 살면은 몇 백 년 사나/ 개똥 같은 세상이나마 둥글둥글 사세/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이내 가슴속엔 구신도 많다/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에으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배가 닿는 도청항에서 어른 걸음으로 20분이면 닿는 당리 마을 언덕길은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에 나오는, 그 유명한 롱테이크 장면 촬영 장소이다. 소리꾼 유봉(김명곤)과 송화(오정혜)가 5분40초 동안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걸어 내려오던 풍경은 ‘한국의 서정미’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장면이었다. 많은 여행자가 이곳에서 사진을 찍고는 발길을 돌린다.

 

<서편제>

이청준의 원작을 바탕으로 '판소리'라는 한국 고유의 전통 음악을 소재로 한국인의 한을 훌륭하게 그려낸 임권택 감독 작품. 한국영화 사상 처음으로 백만명 이상의 경이로운 흥행기록을 세웠으며, 대종상 6개 부문을 휩쓸었고 주연을 맡은 소리꾼 오정해가 일약 충무로의 새별이 되었다. 촬영 감독 정일성이 담아낸 한국의 사계도 빼어나다. 특히, 우리 고유의 가락과 아름다운 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져 극찬을 받았다. 제31회 대종상-작품, 감독, 촬영, 신인여우, 신인남우, 녹음상 등 6개 부문 수상, 제1회 상해 국제 영화제-감독,여우주연상 수상.

 

역사적으로 판소리는 한국의 남서부 지역 민중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사랑받아왔다. 이 지역 사람들이 경험했던 집단적인 슬픔이 음악의 형태로 승화된 것이 판소리. 이 영화속에서는 그 몰락해가는 대중 예술의 역사가 떠돌이 예술가들인 주인공들의 삶속에 표현된다. 소리꾼 부녀와 의붓남매의 기막힌 삶, 소리를 통해 자식을 낳고, 그 여식의 아비와 소리를 떠날까봐 눈에 청강수를 부어 장님으로 만들면서까지 소리를 붙잤아두려는 아버지의 이야기. 영화는 판소리가 현대 한국의 문화사 속에서 그것이 차지해온 위상의 변화를 추적하고 있다.

 

임권택 감독이 이청준의 소설 '서편제'을 읽고 영화화하려했던 것은 이미 13여 년 전이었는데, 그땐 한국적인 여인 모습에 판소리를 할 줄 아는 배우가 없어 포기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미스 춘향 선발대회를 보다가 그 적역을 발견해서 마침내 영화화되었다고 한다. 바로 92년 미스 춘향 오정해로 남원 명창 대회에서 1등을 한 전적도 있다. 김명곤은 마당극을 해온 연극인 출신 연기자이다.

 

'서편제'는 전라도 지역을 나눠서 부르는 이름으로 '동편제'라 하면 주로 임실, 구례, 남원, 운봉쪽을 말하고 서편제는 보성, 곡성, 해남쪽을 말한다. 또한 지역적 의미 외에 음악적 구분이 더 많은데, 동편제는 우조라고 해서 소리까 씩씩하고 사내답고 우렁찬 반면, 서편제는 계면조로 슬픈 감정에 기교가 있는 여성적인 느낌의 소리다. 원작자가 굳이 제목을 서편제로 한 이유도 서편제가 한국 사람의 한을 표출시키는 데 더 가깝게 느꼈기 때문이라는 임감독의 설명

 

청산도의 역사

 

청산도는 한때 선산(仙山),선원(仙原)이라 불리우며 신라시대 (新羅時代)부터 많은 주민이 살았다는 것이 여러 가지 정황으로 추측되나 구전(口傳)에 의한 것이며 기록은 찾아볼수 없고,고려시대에는 탐진현(현 강진군)에 속해 있었다.

 

그 후 임진왜란을 계기로 왜적의 칩입이 빈번하자 정부의 도서금주령에 의해 한 때 사람이 살지 않았으나, 선조 41년(1608)에 다시 주민이 입도하여 거주하였으며, 1681년(숙종7년) 수군만호진(水軍萬戶鎭)이 설치된 이후부터는 서남해안을 방어하는 군사적(軍事的)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후 1866년(고종3년) 청산도에 첨사진(僉使鎭)이 신설되면서 당리에 청산진성(靑山鎭城)이 축조되었고 진의 높이는 15척, 길이는 10리이며, 성문은 동,서, 남 3문을 두었다.

 

청산진의 군사는 420여명 정도였고, 또한 당리마을 서편의 원천정에서 남문까지는 매일 시장이 개설되었다고 하며, 성내 호구 수는 약 460여호였고, 인구는 약 2000여명(남1465명, 여1150명)이었다고 한다. 그후 1896년(고종 33년) 완도군이 신설되자 완도군 산하 청산면으로 편입되었다.

 

1964년 10월 1일 대모도 동리에 모도출장소를 설치 하였고 빼어난 자연 경관으로 인하여 1981년 12월 23일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구전에 의하면 청산도는 나무가 무성하였다 하여 청(靑 푸를청) 산(山 뫼산)자를 따서 청산이라 쓰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 1608년 (선조 41년) - 입도 거주

- 1681년 (숙종 7년) - 수군만호진 설치

- 1866년 (고종 3년) - 당리에 진 설치

- 1896년 (고종 33년) - 완도군 설군으로 청산면 설치

- 1964년 10월 1일 - 모도출장소 설치

- 1981년 12월 23일 -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지정

 

고려사(高麗史) - 청산도에 관한 최초의 기록

탐진현(현 강진군)은 본래 백제때 冬音縣이었는데, 신라 景德王 16년(757년)에 탐진현으로 개명하여 陽武郡의 領縣이 되었다. 후에 고려때 영암에 이속되었으며, 부속도서로서 富仁島,恩波島,碧浪島,仙山島(청산도),莞島등이 있다.

(<高麗史志> 卷 11)

 

동국여지승람

仙山島(靑山)는 縣(강진현)의 남쪽바다 가운데 있으며, 고려의 正言 李(?)(?~1277)이 완도에 귀향왔는데, 그 의 숙부 僧 慧日이 따라와서 곧 섬(청산도)으로 들어가 절을 세우고 살았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 37)

 

태종실록 - 태종 9년(1409)

왜구가 전라도 海縣(현 해남 진도) 仙山島(靑山)에 쳐들어와 병卒 4명을 생포하여 도주하였다.

(<太宗實錄> 卷 18)

 

세종실록 - 세종 31년(1449)

병조에서 상소하여 이르기를 해남. 강진의 경계에 있는 완도는 海中의 達梁島.馬島와 떨어져 있어 방어하기가 심히 어려운 도서이다. 따라서 만일 적이 침입해 온다하여도 적을 쫓을 수 없으니 이곳은 실로 위급한 지역입니다. 청컨대 백성이 거주하는 것을 금지하여 주십시요.

(<世宗實錄> 卷 126)

 

성종실록 - 성종 14년(1483)

전라도 병마절도사 卞宗仁이 상소하여 이르기를 왜선 수척이 達梁. 靑山島에 침입하여 약탈하고, 또 商船을 탈취하여 綿布 50匹.米穀 30餘石을 빼앗아 갔으며, 3명이 살해되고 7명이 부상당하였다.

(<成宗實錄> 卷 152)

 

중종실록 - 중종 1년(1516)

전라도 관찰사의 狀啓에 왜선이 연속적으로 仙山島(靑山) 근해에 나타나 이곳에 정박해 있는 제주출항 선박을 약탈하였다 합니다. 이제 兵士를 추가로 배차하여서라도 왜구의 침범을 근절시켜야 합니다. 海洋의 모든 작은 섬들을 방어할 수는 없겠으나 (仙山島) 근해에 잠입하여 있는 왜구들 만이라도 토벌하여 주십시요.

(<中宗實錄> 卷 25)

 

선조실록 - 선조 20년

仙山島 伏兵將 李필은 술을 좋아하여 방비하는 마음이 소홀하였다. 그리하여 적이 먼저 기습하여 활을 쏘고 단칼에 수백명의 목숨을 빼았아가니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엄히 문책하여 파직에 처하여 주십시요.

(<宣祖實錄> 卷 25)

 

슬로시티

 

슬로시티는 이탈리아어로 “유유자적한 도시 또는 풍요로운 마을”이라는 의미인 칫따슬로(cittaslow)의 영어식 표현으로 전통보존, 지역민중심, 생태주의 등 느림의 철학을 바탕으로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하는 커뮤니티를 의미한다.

 

슬로시티 운동이란 1999년 10월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 그레베 인 키안티에서 시작된 운동으로 효율을 내세워 지나치게 비대화되고 비인간화되는 도시에 반하여, 생태주의를 바탕으로 주민들이 전통을 보존하면서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하며 느림을 통하여 여유롭고 정신적으로 건강한 생활을 추구하자는 운동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시아 최초로 2007년 12월1일 전남의 4개 마을이(완도 청산도,신안 증도, 담양 창평 삼지천 마을, 장흥 유치의 반월 마을과 장평의 우산 마을)선정되었다.

 

슬로시티는 인구가 5만명 이하여야 하며 전통적인 수공업과 조리법이 보존되어 있어야 하고, 지역의 고유한 문화유산을 지키고 자연친화적인 농법을 사용해야 한다고 한다.

 

청산도는 본디 ‘바쁘고 큰’ 섬이었다. 1960~1970년대만 해도 1만3000명이 넘는 인구가 북적댔다. 고등어 파시가 열린 덕에 부산으로 나가는 배가 다닐 정도였다. 청산도에서 손마디가 굵어진 양치영씨(47)는 “내가 어렸을 때 청산초등학교는 전교생이 1200명이나 될 정도로 큰 학교였다. 섬마을 분교라는 게 무슨 말인지도 몰랐다”라고 회상했다. 지금 청산도에는 초등학생 75명, 주민 2600명뿐이다. 젊은이는 뭍으로 빠져나갔다. 완도 인근의 다른 섬이 다리로 연결되는 동안에도 청산도는 외딴섬으로 고립돼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현실이 청산도를 ‘느림의 섬’으로 탈바꿈하게 했다. 2007년 전통을 보존하고, 지속가능한 생태주의를 실천하려는 국제단체 ‘슬로시티’ 국제연맹은 청산도를 전남 신안군 등과 함께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슬로시티(Slow City)로 지정했다. 슬로시티 연맹은 “청산도는 슬로시티 정신의 원형이 구현된 곳이다”라고 평가했지만, 관광버스를 타고 우르르 몰려다니며 <서편제>나 <봄의 왈츠> 촬영지 같은 곳만 다녀서는 이곳이 왜 느림의 섬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좀더 시간을 두고 섬 구석구석을 거닐어야 비로소 고개가 끄덕여진다.

 

청산도는 문명의 때가 덜 묻었다. 영화 <워낭소리> 속 한 장면처럼 소가 수레를 끌고 언덕길을 오르는 풍경이며, 손수 지게를 지고 터벅터벅 걸어가는 노인의 모습도 쉽게 볼 수 있다. 교통 수단이라고 해봐야 경운기가 가장 대중적이다. 화강암 덩어리를 아무렇게나 쌓아올린 원시의 돌담 너머로 지는 저녁놀은 여느 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다.

 

특히 청산도에서 눈여겨볼 것이 ‘초분(草墳)’과 ‘구들장 논’이다. 초분은 말 그대로 ‘풀무덤’이다. 상주가 고기잡이 나가는 바람에 장례를 치를 수 없을 때 남해 섬 사람들은 일단 시신을 짚으로 덮어 땅 위에 올려놓았다. 3년 혹은 5년 뒤쯤 시신이 깨끗하게 썩고 나면 날을 잡아 땅으로 모셨다. 섬마을의 풍장(風葬)인 셈이다. 대다수 섬마을에서 이런 풍습이 사라졌지만, 지금도 도청리를 비롯한 청산도 곳곳에서는 이 초분을 찾아볼 수 있다.

 

초분이 죽음을 대하는 방식이라면, 구들장 논은 삶의 절박함과 마주하는 방식이다. 예부터 섬에는 물이 귀했다. 바위가 많고 경사가 급해 농사지을 땅도 귀했다. 그래서 만든 것이 구들장 논이다. 넓적한 돌로 축대를 쌓아 평지를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덮은 뒤 물을 가뒀다. 구들장 깔듯 논을 만들었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청산도 여자는 쌀 서 말도 못 먹어보고 시집 간다’는 옛말이 있었을 정도니, 섬살이의 척박함을 구들장 논을 통해 짐작할 뿐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1960년대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다”라는 관광 안내 책자의 문장은 다소 호들갑스럽지만, 청산도 곳곳에서 이런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건 분명하다. 20년 전 청산도를 찾은 적이 있는 사진 기자는 “옛날에 비하면 많이 문명화됐다”라며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지만, 그조차도 이곳이 과거 얼마나 문명과 동떨어진 두메였는지 절절히 설명하는 이야기로 들릴 뿐이다.

 

슬로시티로 지정되기 전에는 이곳 청산도에도 서로 다른 욕망이 충돌하곤 했다. <서편제> 촬영지인 당리 마을 언덕길을 둘러싼 이야기가 그렇다. 영화 속 길과 지금 길은 사뭇 다르다. 영화를 촬영하던 1990년 대 초만 해도 이 길은 오롯한 황톳길이었다. 한복 입은 소리꾼들이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걷는 장면이 더욱 아름다웠던 것은 누런 흙길 덕이었다.

 

하지만 흙길이 불편하다는 주민들의 요구로 얼마 후 시멘트로 포장되고 만다. 몇 해 뒤 다시 청산도를 찾은 임권택 감독이 포장된 길을 보고 관련 기관에 아쉬움을 토로하자 담당 공무원은 요상한 아이디어를 냈다. 시멘트 길을 황토 색깔로 ‘염색’한 것이다.

 

그것도 길 전체가 아니라 영화에 등장한 길만 따로. 씁쓸함을 감출 수 없지만 어쩌랴, 우리 사는 곳곳이 이미 그렇게 갖가지 욕망으로 망가지고 있음을. 어쩌면 원형 그대로를 원하는 외지인의 바람 또한 이기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인위적 손길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토록 아름답다는 것이 그저 경이로울 뿐이다.

 

서편제 촬영지로 유명한 당리마을

 

신흥리로 향하는 길에서 만나는 언덕. 오른편으로 푸른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이 언덕을 당재 고갯마루라고 부르는데 언덕 위에 당집이 있기 때문이다. 당집 뒤로 난 조그만 소롯길이 화랑포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곳이 바로 서편제 촬영지이다. 산등성이를 따라 나있는 길에는 나지막한 돌담으로 둘러쳐 있고 그 안쪽으로는 고구마와 마늘, 콩들이 싱싱한 녹색 잎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길을 걷고 있자니 본지 꽤 오래된 서편제의 영화 속 장면이 생생하게 살아난다.

 

이곳에서 등짐을 짊어진 아버지 유봉과 치마저고리 차림의 딸 송화, 그리고 아들 동호가 보리밭 길 사이의 돌담길을 따라 당재로 내려오는 모습이다. 아버지의 선창에 따라 아들과 딸이 답을 하며 나중에는 북을 치며 흥겨운 춤사위까지 보여주었던 그 길. 거의 6분 동안 길게 촬영된 이 장면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은 그림 같은 풍경과 정겨운 가락이 이 길을 뇌리에 꿈결같이 남겨 두었기 때문이리라.

 

돌담길을 돌아 나오면서 유심히 살펴본 당집은 청해진하면 떠오르는 영웅 장보고의 부하 한(韓) 장군을 신주로 모신 것이었다. 해적들이 쳐들어올 때마다 선두에서 물리쳐낸 한 장군을 기리는 것으로 이 마을에서 매년 정월 초하루에 제사를 지낸단다.

당재 아래로 굽어보이는 마을이 바로 서편제의 촬영지인 당리 마을이다. 울긋불긋한 지붕들 사이로 보이는 초가집이 서편제의 촬영 장소다.

 

범바위 풍광

 

청산도의 속살을 보려면 한참을 더 들어가야 한다. 당리 마을 언덕에서 4km 떨어진 범바위에 오르면 청산도 주위에 펼쳐진 바다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풍광을 제대로 즐기려면 범바위 꼭대기까지 오르는 게 좋다. 가파른 바윗길을 1분만 올라가면 그림 같은 다도해에 절로 탄성이 터져나온다. 눈앞의 여서도는 물론이고 여수시에 속하는 거문도까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거센 바람을 맞으며 바위 위에 올라선 짧은 시간 동안 짜릿한 흥분도 맛볼 수 있다.

 

바다를 한껏 가슴에 담았다면 이제 산을 볼 차례. 범바위에서 출발해 보적산을 넘어 다시 도청항으로 내려가는 코스(1시간40분)가 가장 무난하다. 제대로 등산을 즐길 요량이라면 도청항에서 출발해 대봉산을 지나 진산리로 내려가는 코스도 있다. 어떻게 가도 세 시간을 넘지 않는다. 산 아래에서 보면 청산도는 섬 같지 않다. 특히 계단식 논이 밀집한 신풍리·청계리 등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흡사 두메산골 마을을 떠올리게 한다. 청산도 문화해설가 김미경씨는 “한번은 지리산 밑에 사는 하동군 악양면 사람들이 섬에 온 적이 있는데, 우리 동네와 다를 게 없다며 놀라워하더라”고 말했다.

 

섬의 서남쪽 구장리와 권덕리에서 올려다 보이는 보적산 8부 능선 가파른 곳에 범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다. 누워 잠자는 범(虎)이 아니라 적을 향해 달려들 태세로 앞 발톱은 땅에 힘껏 박고 뒷발로 스프링처럼 튀어오를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으로 억센 바다를 응시하며 파수꾼으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 범바구가 있으므로 해서 청산은 대양(大洋)의 갖은 할킴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제자리를 지키며 앉아 있는 것이다. 태평양의 심술이 저 작은 섬을 넘보며 노도 같이 달려들며 청산의 뿌리를 들어내고자 했던 시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 까지 수 억년 이었으리라.

그때 이미 청산을 낳은 어미의 탯줄을 끊은 자리에 범처럼 웅크리게 된 청산의 단전(丹田)이 범바구다.

 

청산을 가라. 그리고 범바구를 보라.

범바구는 고요를 지키는 전사가 아니다. 범바구 바로 아래로는 바다로 떨어져 내리는 수 십 길 절벽으로 이어진다. 성을 지키되 가장 센 적이 오는 길목을 범바구가 지키고 섰다.

 

안타깝게도 3년 바닷가 조막 논에서 논둑을 태우던 이가 불을 내는 바람에 범바구의 털이 그을리고 주변의 수백헥타르 산림이 재가 되어 버렸다. 수 백 년 바람을 맞아가며 가파른 곳에 뿌리를 내리며 자라던 잡목 등은 앙상하게 타버린 가지만 남겨졌다.

 

지도에도 없는 섬, 여서도.

 

포구쪽에 자리잡은 마을은 거센 바람을 피하기 위해 높은 돌담에 둘러쌓여 지붕들만 보이고...

이 외딴 섬에는 50여가구,100여명의 주민이 전부다. 예전에는 200여가구가 거주하던 제법 큰 섬이었는데 여느 섬들이 그렇듯이 젊은 사람들은 모두 뭍으로 나가고 노인들만 남아 섬을 지키고 있다.

이제는 뱅어돔,감성돔,돌돔,해삼,전복등 어족이 풍부하기로 유명한 섬을 찾은 낚시꾼들만이 늦은 밤까지 밤낚시로 활기를 띄고...

 

여행일정

 

07:00 교대역 9번 출구 앞 출발 (가이드 ‘STAFF’ 신분증 착용하고 대기)

-아침에 가볍게 드실 수 있는 간단한 아침식사(김밥+물) 제공

13:30 중식제공

-따뜻하고 깔끔한 꽃게탕으로 먼 거리를 달려온 여독을 풀어보세요.

14:30 청산도행 여객선 탑승 및 이동(편도 40분소요)

 

15:15 바다와섬 자연 그대로 주는 아름다움 청산도“서편제&연애바탕길”트레킹

-서편제와 봄의 왈츠의 아름다운 길을 기억하시나요??

청산도의 대표 길을 직접 확인하세요.

-청산도 남해의 바다와 해안절벽이 어우러져 멋진 풍광을 이루고 있답니다.

-해안을 따라 남녀노소 누구나 부담없는 완만한 경사를 걷는 코스입니다.

※이동 코스: 도청리→ 서편제 촬영장→화랑포→연애바위 →구장리

(예상소요시간 3시간)

 

▶서편제 촬영장: 영화 "서편제"의 세트장과 돌담길이 유명하다.

▶당리 화랑포: 화창한 날씨에 파도가 마치 꽃처럼 보인다하여 화랑포라 불린다.

 

18:00 숙소로 이동

 

18:30 숙소 체크인(일반 모텔) - 개별 석식 및 자유 시간

-도청항 선착장 숙소 옆 식당가에서 맛있게 저녁식사 하세요.

 

07:30 조식 제공

 

08:30 용이 꿈틀거리듯 구불구불한 넓은 들판 길을 걷는 “용길 & 들길” 트레킹

-범바위에서 바라보는 청산도 해안 최고의 풍광을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세요.

-해안뒤편에 숨겨진 풍경!! 섬사람들의 지혜가 담긴 구들장논의 아름다운 모습!!

-구석구석 주변에 모든 모습이 절경인 청산도의 매력 속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이동 코스: 범바위→청계리→동부들녁→양지 (예상소요시간 2시간30분)

 

▶범바위: 범유다 삼각지대를 아시나요?? 한국의 범유다 지역 범바위 소개

▶돌담길: 섬생활의 독특함과 옛 시골마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돌담길입니다.

11:00 중식 제공

-트레킹 후 제공되는 꿀맛 같은 청정지역 청산도의 건강 식단이 제공됩니다.

13:00 완도행 여객선 탑승 및 이동(편도 40분소요)

 

14:00 서울로 이동

 

22:30 서울 도착 예정~ 안녕히 돌아가세요

 

● 범바위 전망대 ●

읍리를 지나 권덕리로 향하면 청계리의 범바위가 눈앞에 나타난다. 잠시 바라보고 권덕리의 바다낚시터로 향하자 남지나에서 밀려온 파도가 천길 단애를 만들어 눈과 가슴을 시원하게 해 줄 것이다. 여기에서 범바위에 올라보자 남쪽에는 여서도가 멀리는 제주도가 아스라이 바다에 떠 있고 동쪽으로는 덕우, 황제, 장도, 원도, 초도, 거문도가 눈앞에 시원하게 펼쳐진다.

 

● 봄의 왈츠 촬영지 ●

봄의왈츠 촬영지는 당리에 "바닷가 언덕위의 하얀집"이라는 컨셉으로 지어진 오픈세트장이 있고, 읍리 청용공원, 원두막, 도락리 선착장(매표소), 지리해수욕장 남자주인공집, 청계리 장기미 해변, 읍리~청계리 들녘(유채밭, 보리밭), 청계리 느티나무(사장터)등이 있다. 바로 옆에는 영화 서편제 촬영지가 있고, 전망좋기로 유명한 범바위가 올려다 보이며, 봄에 보는 청산도 바다도, 산도, 들도 말 그대로 청산이다.

 

● 서편제 촬영지 ●

<진도아리랑>장면을 찍은 아담한 오솔길은 선창에 내려 오른쪽으로 걸어서 15분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 있다. <진도아리랑>장면을 찍은 길을 따라 내려갈 때 오른쪽으로 보이는 오목한 언덕기슭에 자리 잡은 당리는 아직까지도 옛 마을의 모습이 그대로 잘 보존된 드문 곳이다. 자연석을 층층이 쌓아 만든 거무튀튀한 담장과, 막 세수한 아기 얼굴만큼이나 말끔한 골목길은 시골마을의 단아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서편제>를 찍을 당시엔 초가집도 몇채 남아 있었는데, 지금은 <서편제> 촬영때 사용했던 초가집을 포함해 두채만 남아있다

 

사진을 보면서 설명하기로 한다.

청산도 가는 길에 정읍휴게소에서 전시된 탱크앞에 김지원, 이보람가이드가 소근거리고 있다.

 

 

완도갯벌에 선돌이 있는데 밀물에 잠기어 있다.

 

 

점심으로 꽃게탕을 먹은 완도여객선터미날 앞에 있는 해궁횟집이다.

 

 

청산고속페리2호가 완도항을 떠난다.

 

 

느림의 종 앞에서 기념촬영을 준비하고 있다.

 

 

당리3거리 고개에서 차에 내려 봄의 왈츠길을 걸어가는데 저기 성곽이 보인다.

아래쪽은 당리이다.

 

 

소나무 숲속에 있는 집이 당집인가?

 

 

서편제 촬영지이다.

 

 

봄의 왈츠 촬영지이다.

 

 

도락리와 멀리 도청항이 보인다.

 

 

길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화랑포에서 만난 절경이다.

 

 

새땅끝에서 만난 절경이다.

 

 

저기 멀리 말탄바위와 범바위가 보이고 바다에는 김양식장이 있다.

 

 

저것이 초분이다.

 

 

연애바탕길은 이런 길의 연속이다.

 

 

박혜선과장님과 건이가 기념촬영을 했다.

 

 

청산도 여객선 대합실의 2010년 청산도 슬로걷기 축제 즉석사진들이다.

 

 

가위, 바위, 보 해서 받은 여행스케치 손수건이다.

 

 

말탄바위길 도중에 본 마을 공동 빨래터이다.

 

 

말탄바위를 오르는데 절경이 보이고 멀리 화랑포가 거북이 형상이다.

 

 

우묵사스레피나무 꽃이 절경을 내려다 보고 있다.

 

 

범바위를 오르며 말탄바위를 본다.

 

 

청산도 등대이다.

 

 

범바위의 모습이다.

 

 

청산도 등대 전망대에 있는 느림 우체통이다.

 

 

다랑이논을 보며 길을 내려간다.

 

 

돌탑위로 배가 지나간다.

 

 

장기미해안으로 가면서 본 절경이다.

 

 

물이 옥색이다.

 

 

구들장논 물빠지는 곳이다.

 

 

밭사이에 초분이 있다.

 

 

철이른 유채꽃이 여행객을 반긴다.

 

 

청계리 가는 길이다.

 

 

전형적인 다랑이 논이다.

 

 

고인돌과 하마비이다.

 

 

밑에서 본 다랑이 논의 풍경이다.

 

 

점심을 먹은 보적산장이다.

 

 

코스모스가 구장리와 화랑포를 내려다 본다.

 

 

억새와 보리밭이 멋지다.

 

 

서편제 세트장이다.

 

 

사위질빵의 씨방이 당리를 굽어 보고 있다.

 

 

해변가 나무들이 멋지다.

 

 

도락리 풍경이다.

 

 

도청항의 풍경이다.

 

 

배로 떠나며 도청항을 본다.

 

 

마지막으로 청산도 지도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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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0.12.13 02:36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 작성자 10.12.13 08:16

    고맙습니다. ^^

  • 삭제된 댓글 입니다.

  • 작성자 10.12.23 08:14

    그렇군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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