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508. 묵상글 ( 부활 제6주간 수요일, - 진리는 아무리 흔들어도 진리. 등 )
----------------------------------------------------
240508. 부활 제6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진리는 아무리 흔들어도 진리
민주주의 사회에서 중요한 의사 결정 방식의 하나가 다수결의 원칙입니다. 어떤 한 가지 주제에 대해서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의견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만장일치로 모든 사람들의 의견이 통합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지만 그렇게 진행되기가 어려운 것이 또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다수가 선택한 의견을 따르자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소수의 의견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 소수의 의견이 현실적인 정확한 답과 기준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수결의 원칙이 진리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진리가 다수에 의해서 바뀔 수는 없습니다. 다수에 의해서 이랬다저랬다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이미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누가 아무리 흔들어도 진리일 뿐입니다.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님은 말합니다. “이 세상의 누구도 진리를 뜯어 고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발견하며 진리에 봉사하는 일입니다.” 신부님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지하 아사감방(餓死監房)에서 1941년 8월 14일 운명하셨습니다. 신부님은 수용소 소장에게 지목되어 죽임을 당하게 된 전 폴란드군 부사관이었던 프란치세크 가조우니첵크의 “오~ 제발 절 살려 주세요. 제겐 아내가 있고 불쌍한 자식들도 있습니다. 제발..”울부짖으며 애원하는 소리를 듣고 대신 죽음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결국 진리의 길을 따르면서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께 충실하게 고정되고, 우리가 그분께 기쁘고 은혜로운 일들을 찾으며 그분의 마음에 드는 것을 찾아 행한다면 그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이요,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만을 위하여 쌓아놓은 이기심의 멍에를 내려놓고 이웃에게 열려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굳건히 서서 진리로 허리를 동이고 정의로 가슴을 무장하고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갖추어 신고 손에는 언제나 믿음의 방패를 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 방패로 여러분은 악마가 쏘는 불화살을 막아 꺼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에페6,14-16).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진리의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우리를 진리 안으로 부르십니다. 진리를 거짓과 바꾸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섬기고 예배하도록 이끄는 세상의 많은 어두운 세력들을 물리치기 위해서 진리 안에 더욱 굳건해야 하겠습니다. “숨기려고 하면 왜곡할 수밖에 없고 모든 것을 자신의 논리로 합리화하기 때문에 다른 이들을 무시하거나 없애려고까지 하게 됩니다.” 그러나 진리의 영을 따라 살아가려는 이들은 이웃과 세상에 열려있습니다. 신앙인은 시기, 질투, 미움의 자리를 털어버리고 일어설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구원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진리는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모든 영적인 지혜, 계시 및 지식입니다. 그리고 최고의 진리는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에“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요한17,17).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요한복음은“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1,1).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1,14).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요한1,18).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미사성제 안에서 당신을 내어 주시며 사랑 안에 머물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사랑, 진실한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영원합니다. 진실한 사랑은 자유를 줍니다. 말씀, 예수님, 사랑 안에 자유를 누리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240508. 부활 제6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신부님께서 5월 6일 강론글 말미에 아래와 같이 알려 주셨습니다.
- 앞으로 한 주간 강론을 올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또 죄송합니다.
다음 주 월요일이나 화요일부터 다시 올리겠습니다. -
---------------------------------
♡ 당쇠신부님의 말씀을 같은 전례시기에는
어떻게 묵상하고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 <성체경배 순례자>
23년 부활 제6주간 수요일
(모든 진리 안에 하나의 진리로)
http://www.ofmkorea.org/526535
22년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진정한 종교심)
http://www.ofmkorea.org/488857
21년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일리와 모든 진리)
http://www.ofmkorea.org/407195
------
2020년 이하 강론글을 더 보시려면
아래에 들어가셔서 보세요
https://cafe.daum.net/ThomasMoreSeoul/UtFb/521
===위에서 2021년도 강론글 옮김니다.================
김레오나르도 2021.05.12 04:47
부활 6주 수요일-일리와 모든 진리
지난주 동포 미사 때도 물었지만
저는 가끔 저를 얼마나 아는지 사람들에게 미사 강론이나 강의 때 묻습니다.
그런데 저를 안다고 대답하지만 의외로 저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저의 이름이나 신분 정도 알고 있거나 제가 하고 있는 일을 조금 아는
정도여서 그것은 안다기보다는 차라리 모르는 거였습니다.
사실, 저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지요.
한 번은 어떤 분이 '좋은 분으로 알고 있다.'고 말씀하시길래
그것을 어떻게 아시냐고 되물었더니 '좋은 분일 거라고 믿는다.'고
바꿔 대답하시는 거였는데 그러니 그분이 저에 대해서 아는 것은
뭘 많이 알고 잘 알아서 아는 것이 아니라, 믿어서 아는 거였습니다.
본래 안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이 거의 다 이렇습니다.
알아서 믿는 것이 아니라 몰라서 믿는 것이며,
알면 굳이 믿을 것까지 없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조금 아는 것을 가지고
모르는 것까지 그럴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저를 좋은 사람일 거라고 믿는 것은 경험을 통해
저의 좋은 면을 조금 알고는 저라는 존재 전체를 좋게 믿는 겁니다.
제게 대해 이러하니 하느님께 대해서는 오죽하겠습니까?
저에 대해 아는 것보다 하느님에 대해 아는 것이 훨씬 적고,
저에 대해서 보다 하느님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으며,
그러니 더더욱 알아서 믿는 것이 아니라 몰라서 믿는 것이겠지요.
사실 하느님을 모르니 믿을 수 없다고 뻗대서도 안 되겠지만
하느님을 잘 모르는 것을 창피해 할 것도 없습니다.
하느님을 잘 모르는 것이 당연하고,
그러니 잘 모른다고 함이 오히려 겸손이며,
안다고 하거나 더 나아가 잘 안다고 하는 것은 교만이거나 착각입니다.
그래서 오늘 바오로 사도는 모르는 신을 숭배하는 것에 대해
아테네 사람들을 칭찬하는 듯이 말합니다.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대단한 종교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돌아다니며 여러분의 예배소들을 살펴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잘 모름을 겸손히 인정한다면, 다시 말해서 모름을 인정하는 것이
겸손에서 나온 것이라면, 모르는 채로 있을 것이 아니라
알려는 열망과 알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찾게 하려는 것입니다.
더듬거리다가 그분을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찾는 것은 이렇게 더듬거리는 것이고,
이렇게 더듬거려서 찾은 하느님은 하느님의 전부가 아니라
봉사가 코끼리를 더듬거려 아는 것과 같이 일부입니다
다리를 만진 봉사가 코끼리는 기둥 같다고 하여도 잘못 안 것이 아니고
배를 만진 봉사가 담벼락 같다고 하여도 잘못 말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전부를 안 것이 아니라 일부를 안 것이고,
그러니 자기가 안 것이 코끼리의 전부라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이렇게 다 일부 진리, 곧 일리一理를 가지고 있는 것이고,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듯 성령만이 모든 진리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주실
것이다."라고 하시듯 이번 성령 강림 대축일에 진리에 눈먼 나에게
진리의 영께서 오시기를 청해야겠습니다.
----------------------------------------
----------------------------------------------------
240508.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두스는 우리가 위로의 하느님보다 하느님의 위로를 찾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위로만을 찾게 되면 거짓 위로를 만나서 하느님을 잊어버릴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힘들어하는 형제님이 있습니다. 너무 힘들어 매일 같이 하느님께 기도했습니다. 지금의 경제적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자기를 위로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이 기도가 들어주신 것인지 그 어려운 상황에서 너무 쉽게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감사의 기도를 바치면서, 하느님만이 자기를 진정으로 위로해 주시는 분이라고 외쳤습니다.
몇 년 뒤, 다시 한번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또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 힘들어졌습니다. 의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이 정말로 계시는 것일까? 계신다면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자기를 이렇게 외면 하실 수 있을까?’라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신앙을 버렸습니다.
하느님의 위로만을 찾는 사람은 이렇게 되고 맙니다. 그러나 위로의 하느님을 찾으면 어떻게 될까요? 어떤 상황에서도, 즉 좋은 상황이든 나쁜 상황이든 상관 없이 하느님께 위로받게 됩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위로만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 그 자체에 다가설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을 보며 하느님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를 배웁니다. 아이들은 위로받기 위해 엄마 아빠를 찾지 않습니다. 무엇인가를 하다가도 엄마 아빠라는 존재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언제든지 위로를 주는 부모님께 대한 시선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이렇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느님의 위로가 아니라, 위로의 하느님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교회와 모든 믿는 이에게 성령을 보내십니다. 이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 우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하느님이라는 진리로 우리를 이끌어 주면서 하느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분명히 알게 해줍니다. 그래서 고통과 시련 가운데에서도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 안에서 큰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실제로 과거 많은 순교자가 그러했습니다. 죽음의 위협이 가득한 삶 안에서 기쁨을 간직했고, 또 힘차게 하느님을 증거했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살아 계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본성인 사랑을 매 순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당연히 사랑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금과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이를 위해 잊지 말아야 할 것, 하느님의 위로를 찾지 말고 위로의 하느님을 찾아야 합니다.
--------------
오늘의 명언: 변화에서 가장 힘든 것은 새로운 것을 생각해 내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가지고 있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존 메이너드 케인스).
----------------------------------------------------
240508.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16,12)
오늘 <복음>은 예수님 고별사 중에서도 마지막 말씀입니다. 곧 마지막 말씀 중에서도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만큼 귀중하고 소중한 말씀입니다. 이 다음 구절부터는 이제까지의 말씀을 다시 요약하시는 부분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생애 중에 성령의 개입은 크게 보면, 세 시기에 걸쳐 일어나고 있습니다. 첫째 시기는 강생 때로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 1,20)라고 표현됩니다. 둘째 시기는 세례 때로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마르 1,10). 또 “그 뒤에 바로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습니다.”(마르 10,12)고 표현됩니다. 셋째 시기는 부활과 승천하실 때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겠다.”(루카 24,49)고 표현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고별사에서만도 ‘성령에 대한 약속’을 다섯 번이나 거듭 말씀하십니다. 곧 ‘아버지께서는 보호자를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14,16-17). ‘보호자 성령께서 너희에게 가르치시고 ~기억나게 해 주실 것이다.’(14,26). ‘보호자,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할 것이다.’(15,26-27). “보호자가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16,7-11).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신다.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16,12-15)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성령께서 우리를 진리로 이끄시는 안내자라는 말씀입니다. 곧 성령의 이끄심이 없이는 진리를 깨달을 수도, 진리를 행할 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신다.” 라고 하심은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 속에 깊이 결속되어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우리가 성령의 일치 안에 있어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분께서 기름 부으심으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1요한 2,20-27)
그러기에, 우리가 <성경>을 읽고 들을 때는 우선적으로 성령께 의탁하고 성령의 이끄심에 따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관상생활에 대해 쓴 편지]를 쓴 12세기의 카루투시오회의 귀고는 성경을 읽기 전에 “먼저, 성령을 청하라. 그러면 빛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성령의 도유, 곧 성령으로 기름 부어진 독서가 되어야 함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는 성령께서 진리의 해석자이시고 동반자이심을 말해줍니다. 말씀의 뜻이 진리의 영으로 하여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웁살라에서 열린 WCC 세계교회협의회 총회(1968)에서, 그리스정교회 이냐시오 대주교(1920-2012)가 한 말을 되새겨 봅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하느님은 멀리만 계시며 그리스도는 과거에만 머무십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복음은 죽은 문자이며 교회란 한낱 조직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권위란 한낱 지배하는 것일 뿐이며, 선교란 한낱 선전광고일 뿐이며, 전례란 한낱 과거의 회상일 뿐입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다면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노예들의 윤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13)
주님!
진리의 옷을 입고 당신 정원에 심어진 한 그루의 나무가 되게 하소서.
하여, 당신의 정원에서 행함으로 꽃을 피우고 의로움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오늘도 당신의 모상에 따라 새로워지게 하시고,
진리의 영의 숨결 되어 흐르는 거룩한 성전이 되게 하소서. 아멘.
----------------------------------------------------
240508.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알고 싶은 가톨릭 신학’을 읽고 있습니다. 조한규 신부님이 교우들을 위해서 집필하였습니다. 신앙인이라면 꼭 알아야 할 교리와 신학을 교리 교사가 학생에게 알려주듯이 편안하게 읽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한번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교회’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성지순례를 하면 교회를 보게 됩니다. 교회의 건축도 로마네스크, 고딕, 바로크, 모던, 현대에 이르면서 모습이 변하였습니다. 제가 있는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도 아름답습니다. 일반적으로 교회는 ‘건축물’을 의미합니다. 박해의 시기에는 지하무덤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신앙인들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친교를 나누고, 신심활동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사명을 주셨듯이, 교회에서 영적인 힘을 얻은 교우들은 가정에서, 직장에서,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얻습니다. 사목자와 수도자들은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도록 공동체로부터 선발되었습니다. 사목자는 성사를 집전하고, 말씀을 선포하고, 교리를 가르칩니다. 수도자는 세상에서 하느님나라의 삶을 증거합니다. 수도자는 ‘가난, 정결, 순명’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해 줍니다.
교회는 ‘제도’의 모습도 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베드로로부터 이어오는 교황을 중심으로 제도를 이루고 있습니다. 교황은 가톨릭교회의 교리와 신학을 수호합니다. 교황은 지역교회의 주교를 임명합니다. 지역교회의 주교들은 사제를 임명합니다. 사제들은 주교의 권한에 의해서 본당으로 파견됩니다. 수도회는 교회로부터 인준을 받습니다. 인준된 수도회는 각자의 영성과 은사에 따라서 복음을 전합니다. 교육, 나눔, 기도, 피정을 통해서 복음을 전합니다. 본당의 요청이 있으면 본당으로도 수도자를 파견합니다. 교계제도에 따라서 사제는 교구에 속하게 됩니다. 저는 서울대교구에 속해 있지만 댈러스 교구의 요청에 따라서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으로 파견되었습니다. 세례를 받은 신자들도 사는 지역에 따라서 본당에 속하게 됩니다. 이를 속지주의(屬地主義)라고 합니다. 본당에서 영적인 도움을 받고, 본당을 위해서 봉사하고, 재정적인 도움을 줍니다. 헌금, 교무금은 본당 재정의 중심입니다. 교계제도에 따라서 모든 본당은 같은 말씀을 듣고, 성체를 모십니다. 지금은 그 나라의 언어로 미사를 봉헌하지만 2차 바티칸 공의회 전에는 ‘라틴어’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신부님은 이런 교회에 대한 이해는 일반적이지만 정확하지는 않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교회를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성사인 교회는 성부의 사랑으로 계획되었고, 성자의 파견과 활동으로 세상에 설립되었으며,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을 통해 생명력을 유지합니다. 삼위일체로부터의 교회는 무슨 뜻일까요? 첫째, 교회는 삼위일체의 친교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삼위의 하느님께서는 일체로 친교와 사랑을 나누시는데, 이는 교회의 원래 모습, 건립 이유와 목적이 삼위일체 하느님이심을 의미합니다. 둘째, 성자와 성령의 파견을 통해 교회의 신비가 구현되고 완성됩니다. 파견된 이는 파견하신 분의 뜻을 실행하도록 노력합니다. 성부가 성자를 파견하셨고, 성부와 성자로부터 성령이 파견되었습니다. 여기서 파견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에 높낮이가 있는 종속적인 관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일치와 사랑과 친교로 이루어진 파견입니다. 셋째, 인간과 친교를 나누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인격적인 친교 의지가 교회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교회는 하느님을 보다 분명하고 직접적으로 만나고, 체험하고, 구원 은총을 받는 곳입니다. 교회는 창조 이전부터 계셨던 삼위일체 하느님으로부터 계획되었고, 시작되었고, 완성을 향해 나가고 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들 각자의 복음서를 가지면 어떨까? 가브리엘 복음서, 안드레아 복음서, 마리아 복음서, 로사 복음서와 같이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요한 복음사가처럼 깊은 영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처럼 성서에 대한 깊은 묵상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루가 복음사가처럼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끊임없이 물어야 할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사가처럼 주님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도전은 ‘그리스의 철학, 로마의 법, 페르시아의 문학’보다 더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과학과 기술은 신화와 종교의 틀을 벗겨버리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블랙홀처럼 다른 모든 가치와 의미를 빨아드리고 있습니다. 인간중심의 사고는 함께 살아야 하는 생명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온 우주에 하나밖에 없는 푸른 별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는 분이 함께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성령, 위로의 성령, 굳셈의 성령, 지식의 성령, 지혜의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의 따뜻함과 온유함이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전해 질 수 있도록 우리가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생명의 복음을 만들어야 합니다. 생태의 복음을 만들어야 합니다. 나눔의 복음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오늘 막사랑에 빠진 것처럼, 내일은 없는 것처럼, 오직 지금이 유일한 것처럼 서로 사랑을 고백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
240508. 부활 제6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진리의 영께서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특히 진리의 영에 관해 들려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진리의 영께서 바로 성령이심을 드러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돌아가신 직후부터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 두려움은 죄의식에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주님을 모른다고 말하고 죄의식과 주님을 배신했다는 죄의식이 그것입니다. 또한 죽음에 관한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잡히면 주님처럼 십자가형에 처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진리의 영이 올 것임을 미리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리의 영 곧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불혀의 모양으로 내려오십니다. 이날을 우리는 ‘성령강림절’이라고 부릅니다.
성령이 제자들에게 내려오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진리의 영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 순간 제자들은 안에서 잠가 놓았던 문을 열어버립니다. 스스로 잠갔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갑니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 주님에 관한 이야기를 만천하에 고합니다. 공개적으로 말입니다. 두려움 없이 말입니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알려 주실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맞습니다. 진리의 영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누구를 통해서? 바로 우리 자신을 통해서 말입니다. 누군가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영은 우리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오늘도 우리 마음 안에서, 우리 눈빛과 우리 행동 안에서 진리의 영은 우리 자신을 깨우쳐 주십니다.
그렇게 우리가 실천한 모든 것으로부터 행복과 평화의 꽃을 피우십니다.
-----------
인간관계가 힘들 때….
우리는 관계 안에서 살아갑니다.
가족, 친구, 회사 동료, 동호회, 종교….
이렇게 수없이 얽혀있는 관계 중 대부분은 끊을 수 있고 바꿀 수 있는 관계입니다.
관계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눈물지을 수 있지만
생각해 보면 간단한 방법으로 그 관계를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은 바로 ‘장소’를 바꾸는 것입니다.
장소를 바꾸면 관계가 바뀝니다.
장소를 바꾸면 밀접한 관계였던 사람이 밀접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의 관계는 주로 장소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가끔은 장소를 바꿔보세요.
지금 관계 때문에 힘들다면 장소를 바꿔보세요.
지금 관계가 내 발목을 잡고 고통으로 잡아당긴다면
장소를 바꿔 새로운 바람을 선물하세요.
----------------------------------------------------
240508.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자유의 여정
-‘진리의 영’의 인도에 따른 삶-
삶은 선물이자 과제입니다.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 과제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났음이 축복의 선물이지만 평생 과제의 실현을 위한 평생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저절로 완성에 이르게 하는 공짜 선물은, 값싼 선물은 없습니다. 은총과 더불어 부단한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노력하라 하지 않습니까.
무슨 선물이요 과제입니까? 참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과제입니다. 세례받았다 참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게 아니라 평생 노력이 뒤따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겸손한 자세로 살아있는 그날까지 한결같은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누구나의 소망이 자유로운 삶, 평화로운 삶입니다. 참사람이 되기 위한 평생 노력과 더불어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 점차 자유로운 삶, 자연스런 삶, 평화로운 삶, 행복한 삶이겠습니다.
바로 여기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 진리의 영, 성령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성령뿐입니다. 진리의 영,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갈 때 점차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자연스럽고 평화롭고 행복한 참나의 실현이요, 이것은 인간 누구나의 근본적 소망일 것입니다. 바로 이런 소망을 노래한 “들꽃같은 삶”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살아있음이
기쁨이요 행복이다
찬미와 감사다
들꽃같이 사는 게 잘 사는 거다
물주지 않아도
약치지 않아도
가난한 땅에서도 무리 이루어 잘도 자란다
작고 수수하나
한결같이 맑고 곱고 부드럽고 강인하다
탈속의 초연한 아름다움이다
최소한의 자리, 양분, 소비의 가난이지만
하늘 바람에 유유히 휘날리는
샛노란 별무리 고들빼기꽃들
참 자유롭고 자연스럽고 평화롭고 행복해 보인다
가난한 부자다
소유의 기쁨이 아닌 존재의 기쁨이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이다
들꽃같이 사는 게 잘 사는 거다”-2001.5.20
23년전 쓴 시이지만 이때의 분위기는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이 시를 써놓고는 무려 한달 이상은 행복했습니다. 이때 수도원은 참 가난했고 한옥의 소박하면서도 초라했던 본원 건물 주변에는 철따라 저절로 자라 피어난 들꽃들이 장관이었습니다. 이런 분위기의 평화롭고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삶을 살고 싶은 갈망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답은 한 하나 진리의 영, 성령의 인도에 따른 겸손하고 항구한 인내의 삶입니다. 진리가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진리의 영의 인도에 따라 살 때 무지의 질곡에서 벗어나 점차 자유로운 삶의 실현입니다.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 진리의 영, 성령입니다. 세상을 떠나기전 고별사와 같은 유언에서 주님은 참 좋은 선물인 성령을 약속하십니다. 단숨에 읽히는 오늘 복음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는 것이다.”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끄시는 진리의 영, 성령입니다. 진리의 영의 인도에 따라 한결같이 끝까지 겸손히 따르는 것이 구원의 지름길입니다. 옛부터 종파를 초월해 모든 구도자들이 한결같이 소망했던 진리 추구의 삶이었습니다.
진리자체의 삶을 사셨던 예수님이요, 진리의 연인으로 자처했던 아우구스티노 성인이요, 진리의 협력자로 명명되기를 원했던 베네딕도 16세 교황이요, 진리에 몸바치는 사람이 되기를 열망했던 불가의 대선사, 이미 오래전에 타계한 성철 큰 스님입니다. 그리고 무수한 성인들이 현자들이 시종 여일 “진리와의 열애(熱愛)”속에, 진리이신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우정의 삶을 살았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진리의 영, 성령의 인도따라 살 때 이런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신 주님과의 날로 깊어지는 우정과 더불어 자유롭고 자연스럽고 평화롭고 행복한 진리실현의 삶이겠습니다. 새삼 한결같은 진리추구의 예닮의 여정은 자유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이의 탁월한, 빛나는 모범이 바로 사도행전의 바오로입니다. 이교철학의 중심지인 아테네에서 선교하는 바오로 사도입니다. 아레오파고에서의 연설이 공감 100%입니다. 일부만 인용합니다. 자연을 통한 하느님의 증거에 이어 끝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소개합니다.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에게 생명과 숨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실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이어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부활을 소개하며 이들을 회개에로 이끌려 하지만, 무지의 철벽같은 이들의 철학저 사고 앞에 좌초하는, 흡사 계란으로 바위치기의 같은 분위기입니다. 그리하여 당시 최첨단을 걷던 철학의 도시 아테네에서의 선교활동은 실패로 끝난 듯 하지만 결국은 그리스란 나라도 복음화되어 지금은 국민의 97%가 그리스정교회 신자라 합니다. 아테네에서 일단 선교에 실패한 진리의 사도, 바오로는 이에 좌절하지 않고 고린토, 에페소에서 열정적 선교활동을 펼치며 마침내 로마에 이어 유럽 대륙의 선교에 전초기지를 마련하는 느낌입니다. 이 또한 성령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겠습니다.
참으로 철학의 어원처럼 지혜를 사랑하는 진짜 겸손한 철학자라면 철학의 완성이신 하느님의 지혜이자 진리자체이신 파스카의 예수님을 찾을 것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이 답이듯, 철학이 물음이라면 예수님은 궁극의 답이기 때문입니다. 새삼 선행하는 은총이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성령의 은총이 없이 무지의 철학을 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를 성령의 인도에 따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시고 하느님의 지혜이자 진리이신 주님과의 우정을 날로 깊게 해 주십니다. 아멘.
----------------------------------------------------
240508.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진리의 영을 따라서>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13)
홀로 믿음
흔들릴지라도
진리의 영
따르는 믿음
늘 굳건히 뿌리내리네
홀로 희망
시들지라도
진리의 영
따르는 희망
늘 푸르게 샘솟네
홀로 사랑
식을지라도
진리의 영
따르는 사랑
늘 뜨겁게 타오르네
----------------------------------------------------
240508. 부활 제6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요한 16,13)
영원한 세상에서 알게 될 지식
“영께서 너희에게 모든 진리를 가르쳐 주실 것이다”, “영께서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라는 주님 말씀을 생각할 때, 저는 현세의 삶을 사는 이의 마음은 완전한 지식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렴풋이’ 볼 뿐이라고 바오로 사도도 말했다시피, 영혼을 무겁게 하는 썩어 없어질 이 육체(지혜 9,15 참조) 안에 사는 동안 모든 진리를 알 수 있는 이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우리가 약속받은(2코린 1,20) 성령께서, 바오로 사도가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l코린 13,12)라고 한 그 완전한 지식을 우리가 실제로 얻을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이생에서 완전하게 아는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완전함에 도달할 미래에 얻게 될 지식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영께서 너희에게 모든 진리를 가르쳐 주실 것이다”, “영께서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약속하신 성령의 사랑을 통해 우리가 얻게 될 지식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6 사람은 숭고하다
사람은 새로운 성전이다.
하지만 엑카르트는 우리가 하려고만 한다면 영혼을 증명할 수 있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 요소는 영혼의 지적인 능력이다. “지성은 하느님의 성전이다”라고 엑카르트는 잘라 말한다. “하느님은 다른 곳에 거주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자신의 성전인 지성 안에서만 거주한다." 엑카르트는, 인간
영혼의 터전 속에 이러한 지성의 빛이 약간 들어 있으며, 하느님이 성전, 곧 인간 안에 보금자리를 트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하느님의 터가 나의 터고, 나의 터가 하느님의 터다.” 엑카르트는 이 “영혼의 불꽃”을 일컬어 자주 “아무개” 라고 부른다.
“영혼 안에는 아무개가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입니다. 대가들은 말합니다: 그것은 이름 붙일 수 없고,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그것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여기도 저기도 아닙니다. 따라서 그것은 제 스스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것 안에도 있고, 저것 안에도 있습니다. 저것은 이것 안으로 흘러들고, 이것은 저것 안으로 흘러듭니다.”(166)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4절: 서구의 새 정신
재속 성직자의 개혁:
그레고리오 개혁은 옛 요구들을 새롭게 다시 받이들였다. 후에 그레고리오 7세가 된 힐데브란트의 사회로 개최된 1059년의 로마 교회회의에서는, 모든 주교좌 성당과 공주 성직자단의 성직자들에게 사유재산의 포기와 일정한 규칙의 준수를 요구하였다. 이 요구에 준비가 되어 있던 참사회원들은 “수도 참사회원” 또는 “수도 규정의 수도회원”으로 불렸고, 나머지 사람들은 “재속 참사회원”으로 불렸다. 개혁가들의 노력은 모든 공주 성직자들이 아우구스티노 회칙을 받아들이도록 권하는 것이었다.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우리는 이 운동이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즉, 그러한 형태의 수도 참사회 4,500여 개가 중세 시기에도 있었다. 그 중심은 라테란 대성전의 참사회원, 대(大) 성 베르나르도 성당의 아우구스티노 참사회원, 파리의 성 빅토리오회와 예루살렘 성묘의 참사회원, 십자가회원들이었고, 그밖에도 많았다. 이 수도 참사회원들은 성직자를 그 시대의 사도적 이상으로 접근시킨다는 목표를 추구하였다. 그레고리오 개혁은 재속 성직자의 성화를 기호(旗號)로 삼았다. 성사적 사제직과 교회 안에서의 지위에 대한 그들의 새로운 강조는 재속 사제들의 내적 쇄신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사도적 청빈과 독신제, 성직자 장상에 대한 순명과 위계적인 교회의식, 신학교육과 나무랄 데 없는 사생활은 새 사목사제의 자랑거리가 되어야 하였다.
자신이 클뤼니의 수도자였던 우르바노 2세 교황은 성직자의 개혁을 수도회의 개혁보다 중요하고 긴급한 것으로 보았다. 잘츠부르크의 대주교 콘라트 1세는 1140년경 수도회에 소속되어 있지 않는 모든 성직지들에게 “참사 수도회적”으로 생활할 것을 요구하였다. 열렬한 개혁가이던 라이헤르스베르크의 게르호(+1169)도 아우구스티노의 참사 수도회 규칙을 모든 재속 사제들에게 의무화하려 하였다. 얼마 동안 이 운동은 전 성직계를 장악할 것처럼 보였다.(216)
----------------------------------------------------
240508.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두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16, 13)
세상 살아오면서 알아야 할 것은 그 알 때가 되면 알게 되지만 그때가 이르지 않으면(=겪어 보지 않으면)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습니다. 물론 제 엄마는 가끔 섭섭하실 때 누이들에게 이렇게 표현하셨지요. 너도 시집가서 애 낳으면 에미 속 알꺼여!, 라고 말한 다음엔 침묵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표현하듯 그때는 몰랐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겪어보고 부딪혀 보고서야 우리는 늦게 깨닫는 게 인생살이인지 모릅니다.
이처럼 세상사도 경험해 보기 전에는 들은 말의 의미와 본 행동의 이유를 이해하기 어려운 일인데, 우리가 어찌 지상의 일도 아닌 천상의 일을 들었다고 다 들어 알겠으며, 보았다고 다 보아 알 수 있겠습니까? 제자들도 그토록 가까이서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시면서 예수님의 의중의 표현인 말씀과 행동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았건만, 정작 중요한 수난의 예고 앞에서 무엇을 말씀하신 지를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너희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느냐?, 라는 표현이 성서에 17번이 기록되었다는 것은, 그들의 이해력이 부족했다기보다는, 인간 경험의 한계, 지식의 한계라고 본다면 우리 또한 예외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 신비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시거나 아버지와 아드님에게서 발하시는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하늘나라 신비를 알아들을 수 없는 게 인간의 한계라고 봅니다.
주님께서 당신 아버지와 하늘나라의 신비에 대해서 저희에게 말씀하셨지만, 알아듣지 못한 제자들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안타까우셨겠습니까? 그런데 산 넘어 산이라고 제자들에게만 가르쳤던 진리도 이해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지고 심란해하는 모습을 보실 때,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하셨을까요? 말씀하면 말씀하실수록 멘붕의 상태에 빠져버린 제자들을 보시면서 끝내는 이 모든 일을 오실 진리의 성령께 맡기시고 스스로 자제하신 모습이 역력합니다.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은 점점 다가오는데, 당부하고 싶은 말들은 많은데, 오히려 제자들이 더욱더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시면서 안타까워하시는 그분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은 당신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묻히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다음 성령께서 오신 후에야, 제자들은 왜 그때 주님께서 자신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는가를 성령의 기억을 통해서 다시 듣고 보게 됩니다. 이는 성령강림을 통해서 차츰 제자들의 마음이 열리어 진리를 알아듣게 되었다는 희망의 여지를 남겨 두셨습니다.
주님은 "진리의 성령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16,13) 하고 표현하십니다. 진리의 성령께서 파견되신 것은 우리 모두를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일 곧 구원을 통해 아버지의 자녀가 된 인류를 성부께 이끌기 위해서 성령께서 오신 것입니다. 아버지가 곧 진리이십니다. 이를 예수께서 가르치셨고 성령께서 이를 이어받아 아버지의 자녀들인 우리에게 동일한 진리를 가르치실 것입니다. 그리고 어제 복음에서 언급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 (16,8참조)에서 참되고 거룩한 천상의 진리 안으로 사람들을 이끌 때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진리인 성령은 예수께서 아버지께 들으신 것을, 원하신 것을 말씀하시고 가르치신 것처럼 오직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진리이고 생명에 이르는 진리임을 가르치실 것입니다. 성령을 받아들인 사람은 예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고, 예수를 받아들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은 한 분 하느님이십니다. 성령께서 예수님께 들으신 것만을 이야기하듯이 우리 또한 성령께 들은 것만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 모두 진리를 목말라하는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우리 자신에게 물어봅시다. ‘참으로 진리를 살고 있습니까?’ 저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 진리를 추구하긴 하지만, 막상 진리를 만나면 주춤하고 주저합니다. 왜냐고요. ‘진리는 우리가 가장 싫어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제대로 살기 위해서 우리는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기에 "아버지 이 사람들이 진리를 위하여 몸 바치는 사람들이 되게 해 주십시오." (요17,17) 라고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진리를 깨달으면 그 진리를 위해 몸을 바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미묘한 색깔을 묵상해 봅시다. 진리를 살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진리 안으로’ 이끌림을 받아야 하고, 그 진리 안에서 차츰 진리가 아닌 세상의 어둠으로부터 빛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그 어둠에서 빛으로, 거짓에서 진리로 나오기 위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성령의 은사와 열매로 충만할 때까지 그분들의 사랑 안에 머물며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지 맙시다. 우리 모두 이미 그분 안에서, 진리인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사17,28) 모든 것은 다 때가 있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고,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할 말이 참으로 많으셨지만, ‘말을 삼키셨습니다.’ 이를 통해 느낀 점은 사랑은 기다림이며 여백이라는 점입니다. 예전 저희 엄마 역시도 할 말이 많으셨겠지만, 저희 형제들에게 말하지 않은 까닭은 ‘때가 되어 스스로 겪을 때’에야 비로소 무엇을 말씀하셨고 무엇을 말씀하시지 않았나를 배울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살아 온 세월만큼 삶의 깊이는 더 깊어질 것이고, 비워진 여백은 인생의 깨달음으로 채워질 것이며 그때 ‘울 엄니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 이것이구나!’라고 깨닫게 됩니다. 세상의 이치와 사람의 관계도 그러한데 하물며 ‘하늘 진리’, ‘하느님의 신비’, ‘진리인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의 지식이나 경험만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감당할 수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통해 말씀하신 진리는 그러기에 진리의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을 때 깨달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오실 진리의 성령은 그러기에 우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16,13) 이 진리의 성령은 우리에게 하셨던 예수님의 하실 말씀과 하지 못한 말씀을 깨우쳐 주시기에, 우리는 ‘왜’라고 더 이상 물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 모두 진리를 위해 몸 바치는 사람들이 되리라 믿습니다.
예전 저는 아테네 아레오파고스에 갔었죠. 그땐 바오로의 설교가 교회사에서 어떤 의미를 내포하는지 사실 잘 몰랐습니다. 그냥 ‘여기가 그 자리구나.’라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긴 호흡에서 보면 바오로의 아레오파고스 설교는 현대에 와서 타 종교와 타 문화와의 대화에서 중요한 시금석이 되는 설교이고 대화의 시도입니다. 유사성에서 출발하여 상이성으로 대화를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하지만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선포한 대로 복음의 핵심인 ‘예수님의 파스카의 신비’ (1코15,2~3참조)를 선포하는 것을 주저하거나 주춤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 대화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바오로 사도의 설교를 이해할 수 없었고, 감당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뒤에 바오로는 아테네를 떠나 코린토로 갔다.”(사18,1)
기도를 대신해서 조병화의 「어머니, 당신은 지금」을 보냅니다. 『어머님, 당신은 지금 사람의 눈으론 보이지 않는 세상에 계시옵니다 때론 가까이 때론 멀리 제 곁에 항상 계시오며 하얀 제 생각 속에 계시옵니다 어머님, 당신은 지금 사람의 귀론 들리지 않는 세상에 계시옵니다 때론 가까이 때론 멀리 제 곁에 항상 계시오며 햐얀 제 혼자 속에 계시옵니다 얘, 순리대로 사는 거다 매사 탁 풀고 사는 거다 마음 상할 거 없다 아파할 거 없다 당하는 대로 사는 거다 늦추며 늦추며 자연대로 사는 거다 아리게 혼자 사는 게 아니다 순리대로 사는 거다 잠간이다, 하시며 어머님, 당신은 지금 사람으론 갔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세상에 계시옵니다 때론 가까이 때론 멀리 제 곁에 항상 계시오며 햐얀 제 눈물 속에 계시옵니다.』』
출처 :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4&id=2093273&menu=4770
----------------------------------------------------
240508.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진리 중의 진리, 궁극의 진리, 불변의 진리는 또 무엇입니까?
가끔 우리는 진리가 아닌 거짓, 허위를 접합니다. 때로 유명인사들의 거취에 대한 허위사실들이 순식간에 유포되어 입장 곤란하게 만들기도 하지요. 저도 며칠 전 한 신자로부터 한 선교사 신부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너무 놀란 나머지 ‘그럴 리가 없는 데’하며, 즉시 펙트 체크를 했습니다. 당사자께서는 이미 부활하셔서 삼시 세끼 밥 잘 드시고 계신답니다. 이런 일까지 있었으니, 당신 명줄이 길겠다고 좋아하십니다.
이렇게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들고, 큰 혼란으로 몰고 가는 거짓, 허위, 헛소문들이 날개를 달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때로 이런 그릇된 정보가 부당한 공권력을 등에 업고, 진실인 양 공공연하게 유포되기도 합니다. 분명 거짓인데 그럴싸하게 포장되고 편집되어 일반화된 것을, 비판력을 상실한 관용 매체를 타고 진실인 양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우리 앞에 매일 펼쳐지는 세상만사, 다양한 사건 사고 들 앞에서 무엇이 진실이며, 무엇이 거짓인지 파악할 수 있는 정확한 식별력과 정보력입니다.
신앙생활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알고 보면 분명 거짓이요 악인데, 사탄의 우두머리인데, 그럴싸하게 스스로를 포장해서 진리처럼, 예언자처럼 행세합니다. 아직도 두꺼운 가면을 쓰고 다니며 선량한 사람들을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는 그릇된 지도자들과 사이비 교주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근원적, 태생적으로 나약한 우리 인간들입니다. 거짓과 헛소문 앞에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는 우리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늘 필요한 존재가 한분 계십니다. 바로 성령이십니다.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13)
성령께서는 우리를 진리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실 진리, 진리 중의 진리, 궁극의 진리, 불변의 진리는 또 무엇입니까?
그 진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 자체이시며, 그분께서 공생활 기간 동안 우리에게 보여주신 생애 전체이며, 그분께서 선포하신 복음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
죄로 물든 이 세상, 악이 기승을 부리는 이 세상이지만 그래도 이 진흙탕 같은 세상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고 계시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아름답고 가치 있는 세상이라는 것이 진리가 아닐까요?
때로 부담스럽고 때로 거추장스러운 내 이웃, 그래서 피하고 싶은 이웃이지만 그 사람 안에서도 엄연히 하느님께서 활동하고 계시고 하느님께서는 항상 그의 회개와 성장, 그리고 성화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고 계심이 진리가 아닐까요?
우리네 인생 여정에서 수시로 다가오는 갖은 고통과 시련, 유혹과 십자가가 절대로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의 진리, 이 구질구질하고 때로 꼬질꼬질한 인간 현실 속에서도 하느님의 성령께서 활발히 역사하고 계신다는 깨달음의 진리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무력하게도 십자가에 높이 매달리신 예수님, 끝끝내 적대자의 폭력 앞에 저항 한번 하지 않으시고 돌아가신 수동의 예수님이시지만, 그 예수님께서 고통과 죽음을 극복하고 물리치시고 승리하리라는 깨달음의 진리, 십자가 길의 여정에서 처참했던 몰골의 바로 그분께서 참된 하느님이시며 우리를 영원한 불멸의 삶으로 이끌어 주실 구원자임을 깨닫게 하는 진리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
240508.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신성을 선물로 받는 법>
며칠 전에 어떤 형제가 자기 가문 조상들의 무덤을 500개 관리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실 그분은 매우 열성적으로 말씀하셨지만, 저는 ‘왜 저런 고생을 사서 하실까?’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많은 돈과 시간, 무거운 비석을 메고 오르내리며 넘어지는 모습을 보며 아내까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며느리 자랑하기 시작하십니다. 장손을 낳은 며느리가 아이가 크면 가르쳐주겠다고 이 모든 것들을 시간 있을 때 아버님과 함께 가서 배우고 기록해 놓겠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장손이 이 일을 해야 하지만, 장손은 아직 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중간에 누군가 그것을 이해시켜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성령님께서 오셔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얼마 전에 말씀드린 한 학급의 감동적인 사연을 떠올려봅시다. 발을 다쳐서 네 차례나 수술하고 반에 돌아왔을 때 선생님과 아이들이 반겨주지 않아 의아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이벤트였습니다. 아이들은 선생님이 준비해 준 케이크와 노래를 합창했고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선생님과 아이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령님은 선물입니다. 선물은 누군가의 노력이고 피와 같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그들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성령님의 역할은 누군가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받아 전하며 이해시켜 주는 일입니다. 그 일을 한다면 예수님께서 성령님께 모든 것을 주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이해시키시기 위해 노력하셨기에 아버지께로부터 모든 것을 받게 되신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이렇게 받아 전해서 이해시키는 역할을 하는 이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 곧 신성을 주십니다. 하느님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를 이해시키기 위해 성령님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하느님 자녀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위의 형제님도 노후를 위해 준비한 땅이 조금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하는 일을 이해하고 손자에게 전해주겠다는 며느리가 너무 예뻐서 모든 것을 며느리에게 주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결국 손자에게 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영광스럽게 하는 이에게 무엇인들 줄 수 없겠습니까? 예수님도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더 높은 기도』 북 콘서트 때 세 분의 형제·자매가 제 책을 먼저 읽고 아직 책을 읽어보지 못한 이들에게 증언하였습니다. 어떤 분들은 영성의 단계를 알아서 무엇하냐고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읽어야 하는 이유와 좋은 점을 조목조목 말씀하시며 신자들이 책을 많이 사도록 유도하였습니다. 저는 그때 받은 모든 이익금을 그들에게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정은표 씨도 아이들이 공부보다는 관계를 더 중요하게 여기도록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공부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때 엄마는 아빠 편을 듭니다. 이때 남편은 아내에게 무엇을 주고 싶을까요? 다 주고 싶은 것입니다. 이때 자녀들도 마음의 평화를 찾고 좋은 성품과 능력의 자녀로 성장합니다. 성령처럼만 살면 하느님께도 배우자에게도 세상 상사에게도 사랑받고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삼위일체 원리를 이해합시다. 그래야 하느님 자녀가 되고 왜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하느님 자녀가 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드님께 모든 것을 주시고, 아드님은 성령님께 모든 것을 주십니다. 그래서 세 분 하느님은 모두 같은 ‘모든 것’, 곧 신성을 공유하시기 때문에 같은 하느님이 되십니다.
이제 우리도 성령님을 이해하게 할 수 있다면 그분의 신성을 받게 되어 같은 하느님 본성에 참여하게 됩니다. 하늘 나라의 열쇠를 받는 법을 잊지 맙시다.
----------------------------------------------------
240508. 부활 제6주간 수요일.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모든 것을 곧바로 알아내고 완벽하게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여러 생각과 질문은 시간이 흐르면서 깊어져, 점차 그 의미가 명료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의 한계를 전제하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직접 듣고 체험한 제자들이었지만, 여전히 ‘진리’에 도달하지 못한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영’을 말씀하시며 그분께서 진리로 이끌어 주실 것임을 약속하십니다.
이후 본문은 ‘알려 주다’라는 낱말을 되풀이하여 쓰는데 이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아낭겔로’이며, 무엇인가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여 알리는 행위를 말합니다.
마치 기자들이 어떤 사건의 정황을 대중에게 보도하는 행위와 비슷합니다.
본문은 복음의 진리가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 ‘알려졌고’, 아들은 이를 성령에게 ‘알려 주었으며’,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알려 주실’ 것임을 이야기합니다.
한편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아테네의 아레오파고스에서 언제나 참된 ‘진리’로 존재하시는 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더듬거리다가 그분을 찾아낼 수” 있을 정도로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는 하느님의 현존은 진리의 영께서 알려 주십니다.
그 알려 주심을 왜곡 없이 받아들이고 인식할 때 우리의 삶은 가지런하여지고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 삶의 자리에 언제나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심을 알아 가는 과정이 우리 신앙인의 삶이고 영성 생활입니다.
----------------------------------------------------
240508. 부활 제6주간 수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당신에게서 받아
제자들에게 알려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당신에게서 받으시는 것은
원래 아버지의 것임도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의 다른 곳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것을
예수님께 주셨다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들이
당신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 듣고 배운 것이며
아버지께서 시키신 일임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으로 요한복음은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를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성령께서 예수님에게서 받은 것을
알려주신다는 말씀은
예수님과 성령의 일치를 말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것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일치가
표현됩니다.
하지만 삼위일체 하느님의 일치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한다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진리를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우리도 그 일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일치는
요한복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표현됩니다.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전부 다 감당하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을
모두 다 이해하거나
실천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는 대로
온전히 그 길을 걷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라기보다
받아들이려는 의지일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지금 당장 온전히 알지 못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해 주시는 진리를
받아들이려는 의지입니다.
그 의지는 다시 말하면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고 싶은 마음이
있는지에 관한 질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이 모든 질문은
진리를 받아들일 마음이 있는지
하느님과 일치하고 싶은지 등등의 질문은
우리가 신앙 생활이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자신에게 하게되는 질문입니다.
이러한 질문이 때로는 답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
나의 삶과 관계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 삶에서
조금씩 천천히 생각할 수 있다면
신앙과 우리의 삶이
결코 별개의 그 무엇으로만 남지는 않을 것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