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의 여한가는 오늘 날 어떻게 변했을까?
지금부터 100 여년 전의 우리들 어머니의 일생을 읊은 “어머니 여한가”(아래 첨부)는
당시를 사는 여인들의 일생을 그려 놓은 슬픈 인생 고백이다. 이 여한가를 읽으면서
우리 어머니들의 일생이 너무나 비정한 인생임을 알게 되어 슬프고 안타까워 눈물이 난다.
그런데 그후 100 여년이 지난 오늘의 여인들의 삶을 무슨 노래로 표현 해야 할지
궁금하다.
우리 어머니들의 비참한 삶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가를 생각해 본다.
구약 성경의 이스라엘 족보와 같은 열왕기나 역대기를 보면 그 당시도 여인들은 역시
우리 어머니 같은 여한가의 여인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하나님의 축복을
듬뿍 받는 위대한 인물의 탄생에는 훌륭한 여인의 기록도 있다. 예로서 디윗 왕의 증조
할머니 롯 이라는 후륭한 여인도 있다. 이것은 장차 1100년 후에 그리스도를 탄생
시키려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가까운 한국사 이씨 조선의 역사를 보아도 사람 차별이 심하고 가장 극심한 때가 세종대왕
때라고 한다. 당시 노예급에 해당되는 비율이 거의 90%가 노예라고 하니 그들 중의 여인들의
사회적인 지위는 최하 일 것임은 명백하다. 우리 여성들은 그런 비참한 삶을 견뎌 온 것이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를 성경을 통해 보면 모든 것이 남성 중심이다.
하나님께선 남자 아담이란 인간을 만드신 후 독거하는 것이 안 좋으니 남자 갈빗대를 뽑아
함께 할 여성 하와를 만들어 주었는데 이 여성은 부속 물이지 언제나 메인(Main, 즉 주인공
역)이 되지 못하는 신분 이다. 그리고 인도라는 나라의 여인들의 일생은 지금 우리의 100년
전의 여한가 보다 더 비참한 상황이라고 본다. 그 예로서 버쓰를 타고 가던 남성들이 동승한
여인 몇 명을 버쓰 안에서 집단 강간을 하고도 대항하면 여인들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그래도
남성들에겐 처벌이 경미 하거나 없다고 한다. 또 처녀가 기혼자와 간통을 하면 인도에선 돌로
처 죽인다.이런 일이 다반사로 일어 나고 있어 크게 놀랄 일이 아니라 한다. 그런 여성 학대가
다반사로 이어지는 풍습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나라다.
불교에서도 그런 흐름이 지금까지 존속 되고 있다고 본다. 안타까운 현상이다. 종족 번식을 위해
조물 주가 남성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무례한 성정을 심어준 때문이 아니겠는가 ...
다시 구약을 보면 왕이나 마을 촌장들이 아무리 축첩을 많이 해도 축첩을 한 만큼 축복해주는 이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 이시다. 거기에 대해선 하나님이 너무 관대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버릇이
아직도 일부 종교에 남아 축첩을 공식적으로 용납하고 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그랬고, 다윗 왕은 부하의 부인을 빼앗아 첩으로 삼고서 솔로몬을 낳았으며
그렇게 낳은 솔로몬에게는 하나님이 더 큰 축복을 주시어 훌륭한 왕이 되게 하였다. 그런 솔로몬 왕의
여인들의 수는 천 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은 종족 번식을 위함인지는 몰라도 해도 해도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은 계속 솔로몬을 축복해주고 칭찬 해주는 하나님이시다.
구약 성경의 전부가 다 그런 것이 아니고 여성을 값있게 쓰인 곳도 있다. 이는 메시아의 계보의 시작에 관한
기록이다. 즉 룻기에 나오는 나오미와 룻이란 여인의 얘기다. 이 여인들은 하나님께서 귀하게 들어 쓰신
여인들이다. 그 이유는 1100년 후에 이 여인들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크게 들어 쓰실 예수의 탄생과 관계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개신교 목사들의 불륜 사건이 빈발하는 것은 그와 같은 이유 때문이라고 본다. 교회 여성도들이
목사의 감명 깊은 설교에 영감을 받으면 여인들이 경쟁적으로 기도해 달라 안수 해 달라 등등의 구실로 목사
가깝게 접근하게 되니 목사도 인간인데 '''자연 현상으로 보게 된다. 그리고 노출이지 되지 않는 카톨릭 사제들의
성 추문도 개신교 목회 자들 못지 않게 발생하고 있다. 특히 남미 여러 나라 성직자 들에게 심하다고 한다.
사제들은 성적으로 억압 된 삶을 살아 가기 때문에 자연 현상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무리하게 조물 주의 지시를
순응하지 않는 결과라고 본다. 일부일처 제는 인간 사회에서나 통용되는 제도이지 가축이나 동물들의 세계는
일부 다처 제이고 모계 중심 사회이다. 이것이 조물주의 섭리라고 본다. 종족 번식을 위해서다.
그런데 요즘 여자들은 남자 못지 않게 자기들 스스로가 남자 이상으로 남자 사냥을 하고 있어 지난 날의
여한가는 존재할 수 없다. 남자들의 상대가 여성이고, 여성의 상대가 남자 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남성이 더
적극적이라면 오늘날은 남여 공히 적극적이 라고 할 수 있다. 그 예로
돈 많은 어느 친구 중의 한 분은 교회 직분을 가진 자인 데도 남자 사냥하는 한 여인과 관계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여인은 이름 있는 유명 의사 부인이다. 남편의 환자와의 은밀한 관계로 의심을 하게 되니까 도저히
부인은 부아가 치밀어 자기도 같이 놀아 나는 현상이라고 본다. 그렇게 해서 심신의 안정을 회복한다고 들었다.
여의도의 큰 교회 C 목사는 천하의 성자 처럼 설교하고 온 세계를 돌아 다니며 선교 활동을 크게 하지만
그분의 애인에 대한 얘기는 인터넷에 공개 된 바 있다. 그것도 주변 측근 장로들이 큰 종에겐 그렇게 주선해
주는 것이 다 하나님의 뜻 인 양 용납하고 있기에 입 닫고 알게 모르게 주선해 해 주는 것 같다. 그런 연유로
부인과 별거 하면서 대외적으로는 내색 하지 않는다. C 목사 아들은 그 아비 이상으로 난잡하다. 그러나
부부의 다정한 관계는 이미 끝 난 것이다.
C 목사는 몇 년 전에 작고 했다. 그 여인은 프랑스에 상주하고 있는데 C목사가 해외 선교 나가면 은밀하게 만난다는
것이 그 여인의 입으로 밝혔다. 그런 여인이 그 곳 외에도 일본, 미국 등 가는 곳 마다 예비 되어 있다고 한다.
훌륭한 하나님의 종은 그렇게 해도 죄 의식을 하지 않는 것이 구약 성경에 있는 기록을 재현하고 있는 것 같다.
선교 활동만 잘 하면 하나님께선 다윗과 솔로몬에 하신 것 처럼 기뻐 하시고 더욱 축복을 내려주실 테니까....
********************************************************
어머니 여한가 (餘恨歌)
열여덟살 꽃다울제 숙명처럼 혼인하여 두세살씩 터울두고
일곱남매 기르느라 철지나고 해가는줄 모르는채 살았구나.
봄여름에 누에치고, 목화따서 길쌈하고 콩을갈아 두부쑤고,
메주띄워 장담그고 땡감따서 곶감치고, 배추절여 김장하고
호박고지 무말랭이 넉넉하게 말려두고 어포육포 유밀등과
과일주에 조청까지 정갈하게 갈무리해 다락높이 간직하네.
찹쌀쪄서 술담그어 노릇하게 익어지면 용수박아 제일먼저
제주부터 봉해두고 시아버님 반주꺼리 맑은술로 떠낸다음
청수붓고 휘휘저어 막걸리로 걸러내서 들일하는 일꾼네들
새참으로 내보내고 나머지는 시루걸고 소주내려 묻어두네.
피난나온 권속들이 스무명은 족하온데 더부살이 종년처럼
부엌살림 도맡아서 보리쌀로 절구질해 연기불로 삶아건져
밥도짓고 국도끓여 두번세번 차려내고 늦은저녁 설거지를
더듬더듬 끝마치면 몸뚱이는 젖은풀솜 천근만근 무거웠네.
동지섣달 긴긴밤에 물레돌려 실을뽑아 날줄들을 갈라늘여
베틀위에 걸어놓고 눈물한숨 졸음섞어 씨줄들을 다져넣어
한치두치 늘어나서 무명한필 말아지면 백설같이 희어지게
잿물내려 삶아내서 햇볕으로 래기를 열두번은 족히되리.
하품한번 마음놓고 토해보지 못한신세 졸고있는 등잔불에
바늘귀를 겨우꿰어 무거운눈 올려뜨고 한뜸두뜸 꿰매다가
매정스런 바늘끝이 손톱밑을 파고들면 졸음일랑 혼비백산
간데없이 사라지고 손끝에선 검붉은피 몽글몽글 솟아난다.
내자식들 헤진옷은 대강해도 좋으련만 점잖으신 시아버님
의복수발 어찌할꼬 탐탁잖은 솜씨라서 걱정부터 앞서는데
공들여서 마름질해 정성스레 꿰맸어도 안목높고 까다로운
시어머니 눈에안차 맵고매운 시집살이 쓴맛까지 더했다네.
침침해진 눈을들어 방내부을 둘러보면 아랫목서 윗목까지
자식들이 하나가득 차내버린 이불깃을 다독다독 여며주고
막내녀석 세워안아 놋쇠요강 들이대고 어르리고 달래면서
어렵사리 쉬시키면 일할엄두 사라지고 한숨만이 절로난다.
학식높고 점잖으신 시아버님 사랑방에 사시사철 끊임없는
접빈객도 힘겨운데 사대봉사 제사들은 여나무번 족히되고
정월한식 단오추석 차례상도 만만찮네 식구들은 많다해도
거들사람 하나없고 여자라곤 상전같은 시어머니 뿐이로다.
고추당추 맵다해도 시집살이 더매워라 큰아들이 장가들면
이고생을 면할건가 무정스런 세월가면 이신세가 나아질까
이내몸이 죽어져야 이고생이 끝나려나 그러고도 남는고생
저승까지 가려는가 어찌하여 인생길이 이다지도 고단한가.
토끼같던 자식들은 귀여워할 새도없이 어느틈에 자랐는지
짝을채워 살림나고 산비둘기 한쌍같이 영감하고 둘만남아
가려운데 긁어주며 오순도순 사는것이 지지리도 복이없는
내마지막 소원인데 마음고생 팔자라서 그마저도 쉽지않네.
안채별채 육간대청 휑ㅡ하니 넓은집에 가문날에 콩나듯이
찾아오는 손주녀석 어렸을적 애비모습 그린듯이 닮았는데
식성만은 입이짧은 제어미를 택했는지 곶감대추 유과정과
수정과도 마다하고 정주어볼 틈도없이 손님처럼 돌아가네.
명절이나 큰일때는 객지사는 자식들이 어린것들 앞세우고
하나둘씩 모여들면 절간같던 집안에서 웃음꽃이 살아나고
하루이틀 묵었다가 제집으로 돌아갈땐 푸성귀에 마른나물
간장된장 양념까지 있는대로 퍼주어도 더못주어 한이로다.
손톱발톱 길새없이 자식들을 거둔것이 허리굽고 늙어지면
효도보려 한거드냐 속절없는 내한평생 영화보려 한거드냐
꿈에라도 그런것은 상상조차 아니했고 고목나무 껍질같은
두손모아 비는것이 내신세는 접어두고 자식걱정 때문일세.
회갑진갑 다지나고 고희마저 눈앞이라 북망산에 묻힐채비
늦기전에 해두려고 때깔좋은 안동포를 넉넉하게 끊어다가
윤달든해 손없는날 대청위에 펼쳐놓고 도포원삼 과두장매
상두꾼들 행전까지 두늙은이 수의일습 내손으로 다지었네.
무정한게 세월이라 어느틈에 칠순팔순 눈어둡고 귀어두워
거동조차 불편하네 홍안이던 큰자식은 중늙은이 되어가고
까탈스런 울영감은 자식조차 꺼리는데 내가먼저 죽고나면
그수발을 누가들꼬 제발덕분 비는것은 내가오래 사는거라,
내살같은 자식들아 나죽거든 울지마라 인생이란 허무한것
이렇게도 늙는것을 낙이라곤 모르고서 한평생을 살았구나
원도한도 난모른다 이세상에 미련없다.
서산마루 해지듯이 새벽별빛 바래듯이
잦아들듯 스러지듯 흔적없이 지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