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일견 설랑-당부마도위 설소묘 고고학 발견 해석
何日见薛郎——唐驸马都尉薛绍墓考古发现解读
출처: 펑파이 뉴스 작성자: 李明 중국 고고학 소스 : 동북아역사문물연구원
2019년 11월, 함양 1,314년 동안 묻혀있던 당 부마도위 설소 묘가 인간계로 재현되었는데, 이는 2013년 상관 완얼 묘에 이어 서함신구 공항신도시에서 발견된 두 번째 태평공주 관련 당나라 명인 묘소입니다.
설소묘는 심하게 훼손되었지만, 무덤 구조가 완전하고, 형태가 특수하며, 규모가 비교적 크며, 출토된 묘지는 이 당국 제일의 부마가 정사에서는 전해지지 않는 아쉬움을 달래주고, 다시 한번 세상을 변화무쌍한 특수 시대로 데려왔습니다.
이번 고고학적 발굴 소식이 발표된 후, 검색의 등장과 위챗 도배는 모두 예상했던 일입니다, 당시 상관 완얼의 묘소 발견도 대략적인 상황이었지만, 시간이 지났을 뿐이고, 설소묘도 파괴되어 헤어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진다면, 제군들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여러분이 추측할 필요 없이, 저는 다음에 다른 이야기를 하나 할 것입니다.
▲ 전경천지의 손자 공후의 아들인 부마도위(驸馬都尉)를 무덤에 묻고, 줄여서 부마도위는 황제의 사위이자 공주 남편의 특별한 신분으로 인해 일반 대중의 마음속에 자연스러운 로맨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외국 문학의 고전적 교량에서 왕자와 공주가 마침내 행복한 삶을 살게 된 것처럼, 사실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것에 대해 바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설소(薛绍)와 태평공주(太平公主)의 결혼은 이러한 기대에 부합합니다,
후대의 문예 작품을 통해 설소(薛绍)는 당국의 제일의 부마가 되었습니다. 설소(661-689)는 명문가 출신으로 고귀합니다.허둥 펀인 설씨는 당나라의 높은 가문으로 많은 인재를 배출하고 가지와 잎이 무성합니다.설소의 증조는 북제(北齊)에서 벼슬을 한 이래 3대째 하동공(河東公)에 봉해졌고, 설소의 맏형 설𫖮작은 하동현후(河東縣侯)에 봉해졌으며, 이른바 '2대 상주(尙主) 4대 봉후(封侯)'입니다.
시대에 봉작의 최고 경지는 군망입작이었고, 하동 분음은 설씨의 유일한 군망이었으며, 당대의 모든 설씨는 하동 분음인이었습니다.쉐샤오작은 핑양현 개국자에 봉해지고, 그의 딸은 완취안현에 봉해졌다. 이 두 현은 모두 펀인현(당나라에서는 바오딩현, 오늘날의 산시성 완룽현)의 린현으로, 봉인 토의도 학문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작위에서 볼 수 있듯이 설소의 가문은 당나라 초 설씨의 대표였고, 같은 부마도위 신분의 설경도 묘지에서 '부마도위 瓘의 조카, 부마도위 소의 동생'이라고 자랑할 정도였습니다.
▲ 후묘실 석관상 복원 추정 설소의 아버지 설瓘, 관배 좌봉 신위장군, 부마도위.어머니 성양공주는 당 태종과 장손황후의 딸인 당 고종 이치의 동포 자매입니다.
성양공주는 재상 두여회(杜如晦)의 아들 두하(杜荷)에게 시집갔고, 태자는 역모를 꾸미고, 또 설瓘(薛嫁)에게 시집갔습니다.瓘설 瓘성양공주와 셋을 낳았는데 설소가 가장 어렸습니다.
인덕초에는 성양공주가 주술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설瓘가 방주자사로 격하되기도 했습니다.함형중, 공주와 설瓘는 방주에서 죽었고, 관은 서울로 돌아와 '옹주 함양현'에 묻혔습니다.이때 설소미자는 오빠들을 따라 컸을 겁니다.
▲ 동일감 하피농의화여도 이태평공주는 당 고종과 무측천의 보배이자 유일한 친딸로 자녀들 중 최하위이며 당 일대를 총애하고 있습니다.토번이 청혼하러 왔었는데, 무칙천(武则天)이 태평공주가 멀리 시집가는 것을 아까워하여 도사로 가장하여 피하게 했습니다.
한 번은 태평공주가 무관 복장을 하고 당 고종과 무측천 앞에서 춤을 추자 제후가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아들은 무관이 아닌데 왜 이렇게 치장합니까?공주는 "이 옷을 부마께 드려도 되겠습니까?"황제는 딸이 커서 시집을 간다는 것을 알고 사위를 선택했습니다.
당나라가 근친혼을 피하지 않자 고종의 생질인 설소(薛绍)가 자연스럽게 후보군에 올랐습니다.설소묘지(薛绍墓誌)에 오기가 없었다면 두 살 때 종6품에서 상계한 봉의랑(奉議郞·처음부터 중급 관리)으로 사패왕(事沛王)이자 훗날 장회태자(章怀太子) 이현(李賢)에 임명됐을 것입니다.당 고종의 생질도 한 단계 보강된 중대인데, 왜 설소(薛绍)를 선택했습니까?
하나는 설소가 태평공주와 나이가 적당하고 친조카라는 점이고, 설소가 확실히 용모가 뛰어나다는 점일 가능성이 높으며, 관건은 성실하고 말썽을 일으키지 않는 점이고, 반례는 무칙천의 조카 하란민지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영륭 2년(681) 7월, 태평공주가 설소에게 항복했습니다.설소시의 나이는 21세, 태평공주의 나이는 약 17,8세. 고종 남매인 두 사람은 나이가 비슷하고 친척이 더 많습니다.
결혼식은 만년현 廨을 빌려 혼관으로 사용했지만 현아의 문이 너무 좁아서 자이차가 지나갈 수 없었습니다. 어떤 회사는 즉시 담장을 허물고 웨딩카를 들여보냈고, 흥안문에서부터 길을 따라 불을 질러 분위기를 돋우어 가로수가 모두 타버렸습니다.
이런 세부 기록들을 통해 당시 결혼식의 격식을 짐작할 수 있고, 그야말로 구경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설소는 이때부터 청운의 뒤를 이어 유격장군수우위친부중랑장(守右衛親府中郞將)을 임명하고 핑양현 개국자를 봉하고 좌옥검위대장군, 우무위대장군 겸 검교우산기상시(右散上侍)를 누천하여 정3품 중앙고관까지 이르렀다.그러나 그의 주요 신분은 여전히 부마도위이며, 위에서 언급한 일련의 위협적인 관직은 사실 모두 한직이며 출근 및 업무 수행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설소의 임무는 오직 하나, 공주와 잘 지내는 것입니다.두 사람은 결혼 후 2남 2녀를 두었으며 막내딸은 687년생.그렇게 8년이 흐른 후, 설랑은 영문도 모른 채 태평공주의 삶에서 증발해버렸습니다.
▲ 후묘실 청소 현장 운전에 따른 혁명둔수 어설소 인생의 반전은 설회의를 알게 된 날부터 시작됩니다.
鄠현의 소상인 펑샤오바오는 낙양에서 장사를 하는데, 외모가 출중하여 천금공주의 시녀와 사랑에 빠졌고, 천금공주는 펑샤오바오를 무측천에게 바쳐 총애를 받았습니다.묘사할 수 없는 그의 출처를 감추기 위해 무측천은 풍소보를 삭발하고 법명을 화이(怀義)로 바꾸고, 성을 설(薛)로 바꾸고, 대외적으로는 그를 부마 설소(薛绍)의 계부라고 속였습니다.
그때부터 설회이는 부마 아저씨의 신분으로 당당하게 황궁에 들어갔습니다.설화의는 무즉천의 비호를 받으며 온갖 짓을 다했고, 낙양의 랜드마크인 천당과 명당도 그의 방화로 말끔히 불태웠습니다.
이때, 무측천은 그녀를 반대하는 일련의 반란을 물리치고 혁당명이 황제가 되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무씨 세력은 이 기회에 급부상했고, 제무들은 하루 종일 무측천 곁에서 시중들며, 가장 큰 목표는 이씨 가문을 무씨 가문으로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승룡쾌사위였던 설소는 오히려 눈에 거슬리게 되고, 사악한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수공 4년(688) 9월, 월왕 이정, 낭야왕 이충 부자가 군사를 일으켜 무측천을 모반하고 20일 이내에 진압되었습니다.
11월, 설소의 맏형인 제주자사 설𫖮는 이충모에 가담하여 오히려 하옥되었고, 설소도 함께 하옥되었습니다.영창 원년(689) 설소(薛绍)는 사위를 죽이지 않아 허난(河南)현에서 29세의 나이로 굶어죽었습니다.
▲ 무덤 정사 영상 사진 설소가 실제로 이충의 반란에 가담했는지를 놓고 신구당서가 서로 엇갈리고 있습니다.<구당서> 권183 <무승사전부부무유기처태평공주전>은 "소, 수공에서 여러 왕들과 함께 복수를 모의했다는 누명을 받으면, 하늘이 유기의 처를 사사로이 죽이고 주인을 맞췄습니다.
신당서 권80 월왕정부랑야왕충전(越王貞附琅王王冲傳)은 "제주자사 설𫖮과 그 아우 소모가 응충하여 부하들을 거느리고 병사를 모병하여 패배하여 옥사하였습니다.
"'설소묘지'에 따르면 "영창 초에는 흉신 설화의(薛臣 怀義), 주흥(周興) 등이 일을 저질러 급사(仓死)를 당했습니다.무측천에게 화살을 겨누지 못하고 죽은 지 오래 된 미치광이와 혹리를 들먹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설소는 돌아가시기 전에 중앙정부 정3품의 한한한 높은 벼슬을 맡아 세상과 싸우지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고귀한 출신에 아들딸을 모두 갖춘 20대 중반의 나이에 중앙 고위 관직을 맡고 무측천의 유일한 사위라니, 예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꿈꾸던 인생의 절정이 아닐까요?아마 꿈에도 감히 이렇게 생각할 수 없을 겁니다!
설소는 자신의 장모에게 반란을 일으켜 반란을 일으킬 어떤 동기가 있었을까.하지만 설소(薛绍)는 정말 정상에서 바닥으로 떨어졌고, 어떠한 과도기 없이 비참한 죽음도 사람들을 울게 했습니다. 한 사람의 성격을 바꿀 수 있는 이 중대한 변고는 태평공주가 겪은 인생 최대의 부침이었습니다.
설소가 투옥되었을 때, 그들의 막내딸인 훗날 완취안 현주로 봉해진 것은 아직 두 살 미만이었고, 장남 숭윤(崇胤)은 기껏해야 일곱 살이었습니다.태평공주는 당연히 그녀의 결발남편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있었고, 아마도 그녀의 향후 정치활동 동기는 설소의 죽음에 자극을 받은 것이었을 것입니다.
마침내 무측천이 고개를 끄덕여 설회의를 수습했을 때, 태평공주가 제일 먼저 뛰쳐나와 그녀의 유모 장씨를 지휘하여 건장한 부녀자들을 찾았고, 이 미치광이를 순식간에 목 졸라 죽인 후, 시체를 수레로 끌고 백마사로 시위하러 갔다가, 놀라서 사중들은 갑자기 뿔뿔이 흩어지고, 태평공주의 천진함과 단순함이 함께 흩어졌습니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당국 제국 전체가 무측천에게 대항할 수 없었고, 태평공주는 어머니가 그녀에게 준 운명을 따라 무유치와 재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전히 아들딸을 낳고 살고 있지만(실제로 태평공주와 무유기는 자녀를 낳지 않았고, 무유기의 네 자녀는 모두 무측천에게 살해당한 불쌍한 전처에게서 태어나 태평공주의 막내딸이 684년에 태어났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인생이 순탄할 때 갑자기 닥친 파멸의 충격은 영원히 가라앉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 벽감 출토 도풍모자용 장식은 진천신룡정변으로 무측천을 역사의 뒤안길로 들여보냈지만 여주가 집권한 여운은 가시지 않고 있습니다.당국은 중흥했고, 종실 여성들은 도전하고 싶어했고, 무칙천 제2의 야망을 품었습니다.
이 징크스에 위황후, 안락공주, 상관 완얼, 태평공주가 앞다퉈 역사무대에 등장합니다. 신용초, 정확히는 무측천이 불안을 겪은 후, 당 중종은 대담하게 무측천이 집권하는 동안 살해된 이당 종실의 반란을 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일련의 조치들 중 후사를 찾고 관작을 회복하는 것 외에 눈에 띄는 의례적인 절차가 바로 이들을 위한 묘역을 조성하는 것이었습니다.무덤의 등급을 높이고 호화로운 장례의식을 행함으로써 이당황실통치의 정통성을 고취시키기도 합니다.
신용 2년(706년), 중종은 그의 아들 의덕태자와 딸 영태공주를 위해 차등을 뛰어넘는 묘를 조성하여 이당 황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위황후와 태평공주 역시 이런 방식을 본받아 권위를 세우고 정적을 탐색했습니다.
경룡 2년(708), 위황후(韦皇皇后)는 그의 부모와 형제, 여동생을 위해 제릉과 개국공신 부장묘를 본뜬 묘를 지었고, 경운 원년(710)에는 태평공주가 그녀의 유녀인 만천현주를 위해 격식을 뛰어넘는 묘를 지었습니다.나는 이 특별한 정치적 의미를 지닌 규제를 뛰어넘는 귀족의 무덤을 '신룡(神龍) 모드'라고 부릅니다.
신룡모형의 특징은 하제릉 1등의 전권 전후의 쌍묘실이며, 지속기간은 당중종조와 예종조, 현종조 초기이며, 정치적 올바름을 확립하는 역할을 합니다.그렇다면 '신룡모드' 시대를 연 최초의 무덤은 바로 신룡 2년 정월에 하관된 설소묘입니다.
▲ 만천현주 설씨 묘신룡모형의 묘역으로는 영태공주묘(중종녀), 의덕태자묘(중종자), 위泂, 위순, 위호, 위泚, 위성현주 위씨, 위남현주 위씨(이상 중종위황후 제·매), 절민태자(중종자), 성왕 이천리(종실친왕), 만천현주 설씨(태평공주녀), 장회태자(고종자), 동효심(현종 외할아버지) 등이 있습니다.
이 묘주들은 모두 권력자의 혈족으로 만천현주가 요절하고 이천리가 절민태자의 쿠데타에 가담하여 주검을 받은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무칙천에 의해 자행되었습니다.
당 예종이 이천리를 위해 묘를 짓고 예장을 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태평공주가 만천현주를 위해 묘를 짓고 예장을 지었다는 것은 어찌 된 일입니까?
태평공주의 권세가 경운 원년부터 절정에 달해 부마 무유가 살아 있는 상황에서 '자신을 날려보내는 것'을 포함해 하고 싶은 일은 거침없이 할 수 있게 됐다는 설명밖에 안 됩니다.
설소묘지(雪绍墓誌)에 따르면 이 묘는 당 중종이 '영소사이례개장(令所司以禮改葬)'하고 설소의 두 아들이 주관해 안장했으며 태평공주의 역할에 대한 언급은 없었습니다.
당시 태평공주(太平公主)의 두 번째 부마인 무유(武攸)가 아직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설랑(薛郞)이 그녀의 생명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대체할 수 없지만 직접 장례식에 나서기는 쉽지 않았습니다.'이례개장(以禮改葬)'이란 제도에 준하는 직급에 따라 다시 안장하기 전에 제도에 따라 안장하지 못한 사람을 말합니다.
설소의 최고 직책인 사관 정3품의 신분으로는 쌍실묘장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20대 초반의 두 아들은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오직 태평공주만이 그녀의 형 당중종만이 설소를 위해 월제묘장을 짓는데 동의하도록 로비를 할 수 있습니다.
이 추측이 성립한다면 '신룡 모드'의 원조는 사실 태평공주이며, 그의 두 황제 오빠와 한 황제 조카가 그녀의 조작을 모방하고 있는 것입니다.만천현주를 안장할 때, 태평공주가 직접 나서서 사위 두노씨 집안을 넘어섰고, 정2품 현주의 장례를 두노씨 집안에서 치러야 하지만 두노씨 집안은 도저히 며느리를 위해 쌍실전권묘를 지을 수 없었다.
황제가 허락할 필요도 없었다. (월제 묘는 황제가 직접 허락해야 한다) 정2품 현주 작위의 딸만을 위해 쌍실전권묘를 건설했다(말하자면 이 정2품 현주의 봉작도 태평공주가 딸에게 준 것이다) 당대 제도는 친왕의 성은 의심할 여지 없이 이현주의 성씨입니다.
이 작업은 나중에 AAA 황후가 고양이와 호랑이 그림을 그리는 법을 배워 그녀의 두 여동생에게 사용되었습니다).같은 해 하관된 정2품 신분인 상관 완얼이 태평공주를 위해 5천정 단실묘의 형태를 택한 것은 상관 완얼이 태평공주의 혈족이 아니기 때문.강조할 점은 태평공주가 상관 완얼을 안장하는 것은 비록 '신룡 모드'는 아니지만 정2품 조관의 호방한 기급이라는 점입니다.
또한 같은 시기에 제릉을 배장한 소용, 첩여의 무덤을 초라하게 보면 태평공주가 상관 완얼을 어떻게 대접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 상관 완얼의 묘 조감 설소가 묘지를 쓴 최융은 초당(初唐)의 '문장사우(文章四友)' 중 한 명으로, 양당서(兩唐書)는 "문전려(文典丽)로 융화(融化)되니 그 당시에는 비교가 되지 않아 조정에서 《낙출보도송(洛出寶圖颂)》, 《측천애책문(则天哀文)》 및 여러 필치들을 칙부융(敕付)해야 합니다.
애도책문을 쓰고 심혈을 기울여 쓰다가 병이 나서 5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더라"최융이 무측천을 위해 애책문을 썼다가 절필해 죽었다는 것은 확실히 마음을 썼다는 것 외에는 놀라 죽었을 가능성이 큽니다.최융의 전철을 밟아 다시는 무측천을 위해 비문을 쓸 사람이 없어 건릉 신도 앞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무자비(無字碑)'를 남겼습니다.
▲ 설소묘지 국부신룡 2년(706) 정월 22일 정유(丁酉)는 장남 설숭윤과 차남 설숭간(雪崇简)의 주관으로 "옹주 함양현 하동부군 구영(河東府君舊墓)에 귀장되었다"며 "설소묘지(說绍墓誌)는 "구루만만(绋迟挽,) 绋, 낙성을 등지고 서전(西轉), 애인 가소(加箫)는 진릉을 가리키며 북마(北馬)를 말합니다.
낙양의 관이 장안으로 귀장된 것은 그가 죽은 지 17년 만입니다.이 하관 시간의 선택은 매우 미묘합니다.첫해(신룡 원년) 11월 26일, 무칙천(武则天)이 동도 상양궁(上陽宮)에 무너졌고, 이듬해 정월 22일, 설소(薛绍)가 함양현에 하관된 지 불과 54일 만으로, 이 기간으로는 이러한 규모의 무덤을 만들고 장례를 준비하기에 분명히 부족합니다.
그렇다면 설소의 장례는 무측천이 '불편'할 때 이미 준비했고, 그녀가 승천하면 낙양에서 관을 들고 장안으로 돌아와 하관식을 거행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시간적 세부 사항 측면에서 '구당서·중종본기'에는 "(신룡) 2년 봄 정월 병신(21일), 호칙천령이 귀경했습니다.
"무측천령이 낙양을 출발해 장안으로 돌아온 날은 설소가 묻히기 전날인데, 이론상으로는 태평공주가 호위대 가운데 막 낙양을 출발했을 터이니 설소의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않을 것입니다. 초봄의 찬바람 속에서 태평공주는 초혼의 성대한 장면과 설랑의 잘생긴 얼굴을 다시 떠올리며 황홀하게 그의 곁을 지키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설랑을 다시 만나도 태평공주는 더 이상 처녀가 아닙니다. 자신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녀의 목표는 그녀의 어머니입니다.
분류:고고학 연구
본문 라벨:당부마 설소묘 고고학 발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