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리원 원리방아무러크소니 가 모든 선량한 사람들에게 한 말
이 택 원추천 조회 2006.년07월.15일 23:44글
성자 가르침에대한 느낀 평론
아무러크소니 께서 제중생(諸衆生)을 가르켜 한말씀 하시대
제양상이 꼭 나쁜 것으로만 귀결짓는 것은 아니니 석씨의 말을 전부 신용할 것은 못된다 하심이라. 諸行無常(제행무상)이 하필 고름덩어리로만 귀결짓겠는가? 이런 말씀이니 성인의 말씀을 헐뜯고 비방해서가 아니라 사실이 그렇찮는가? 이런 말씀이다. 그 고름 덩어리 또한 諸行無常(제행무상)이니 꽃도될 수 있고 맛있는 설탕 꿀도 될 수있고 아름다운 보옥도 될 수 있고 美聲(미성) 음률가락도 될 수 있다는 뜻이니 하필 흉칙한 것으로 만 귀결짓는 말을 해서 중생의 마음을 근심되게 할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냥 현실생활에 충실할 수 있게 가르치면 어떨까? 즉 너에 지금 삶을 영위함을 열심히 하라는 뜻의 것을 갖고 사람들을 제도 한다면 얼마나 좋을 까이다 중생의 만병은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인데 그 마음이란 것을 잘 다스려 편안하게 함은 어떨까? 하필 고통이나 흉측한 모양이나 이런걸 갖고 마음을 자극시켜 病傷하게 하거나 모든 생김이 내라함이 아니란 것만 갖고 가르치려 들 필요는 없다할 것이다. 혹 나의 말에 반대시각을 갖는 자가 있어, 되 비평해서 너가 뭐란 것을 인식하게 하는 감관이 구별해서 그런 구별을 해놓는다 할는지 모르지만 그렇담 그런 구별에 말씀은 누가 먼저 어지럽게 말했는가? 이런 뜻이다 나에 말씀은 그런 요지다. 즉 장구 허리만 갖고 논할게 아니라 장구 전체를 들어 논해야 된다할 것이다. 현실의 쾌락을 영위하는 것을 갖고 나쁜 시각으로만 관찰한다면 고름덩어리가 춤춘다할 것이고 시기나 질투를 해서 남에 삶을 배가 뒤틀려 하는 꼴 밖에 되지 않는다 할 것이니 윤회 와 업보 논리 또한 남을 제도하기에 앞서 못된 상을 생각으로 그려 衆生(중생)을 癡愚(치우)하게 몰아 엄포 공갈하는 말 밖에 되지 않는다 할 것이다. 이를테면 저 사람이 차에 치여 죽었다 한다면 과거 업보가 있어 차에 치여 죽었다 할 것이니 소위 그전에 자기 몸이 차였었는데 현실적인 차가 과거 사람에 몸이었던 걸 그 차가 갈려 죽이는 바람에 그 현상이 뒤바뀌어 나타난 현상이 지금에 현상이라는 것이라면 그 번복 현상일 뿐 인 것이요 무슨 죄의식 따위를 거기다가 결부 시켜 말할 필요는 없다 할 것이며. 또 그 전생에 일은 무어 며 또 그전생에 일은 무어 란 말인가의 의문점에 도달한다 할 것이다. 설령 갑이 乙을 害(해)하고 을이 丙을 害(해)하고 병이 甲을 害(해)하는 등 체바퀴도는 먹이사슬 논리라도 그 이치는 마찬가지라 할 것이니 그 하나의 응보적 형태가 그렇게 지어져 보였을 뿐이라 할 것이다 어떠한 형태이던 그 응보적 형태이라면 그 응보적 형태일 것이니 그 이친 마찬가지라 할 것이다. {(*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듯한 응보적 형태 또한 그렇다할 것이니 즉 미리 어떤 사건을 겪는 것은 래세에 어떻게 하기 위해서 라기 라거나 어떻게 될 것이라거나 그 뜻은 時間性向의 順流하면서 짓는 현상과 다를봐 없다 할 것이니 이를테면 乙의事 현상이 甲의事 현상보다 먼저 있었다해도 그 응보적 이치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즉 머리부터 먼저 움직이는게 아니라 그 꼬리부터 먼저 움직일수 도 있다는 것이니 어떠한 일 이 아직 일어나기도 전에 그 결실이 먼저 나타날 수 있고 그 징후도 보일수도 있는 것이며 내가 그미리 그 댓가를 치룬다는 말도 있지 않는가? 이런 뜻임 또한 응보적 입장에서 배은망덕이란 뜻도 있는데 그것이 배은망덕이 아니라 입장의 바꿔놓기가 전세 에 있었다면 이미 그것은 배은망덕의 의미가 소멸되었다는 뜻이다 또 후세에 있을 것을 지금대변 하는 것이라도 그 이친 마찬가지가 된다는 것이다 즉 내가 저자에게 보살핌을 받아 극한상황 죽을 처지에서 살아났는데 그 은인이 은인이라 해서 자기의 곤란한 처지가 당도했는데도 알면서도 모르는체 돌봐주지 않는다고 내게 헐뜯을게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이미 그것은 입장 바꿔놓기로 내가 전세에 베풀었던 것을 도로 되받아 오는 것인 줄 굳이 누가 있어 아니라고 확연히 증명할 것인가 이 말이다. 또 이런 상황의 전개는 못된 귀신이 제공과를 뻐기고 제 포로 코자 구걸하듯 굽힐 것을 강요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래도 안되고 저래도 안되고 회유정책에다 그래도 안되니까 이제는 배은망덕의 상을 그려 그 구렁텅이로 올가미 씌우듯 몰고 갈려고 하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귀신이 귀신을 희롱하는 것일 뿐 참사람은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 일체가 다 귀신이 짓는 빠트리는 함정이라면 함정이요 덫이라면 덫일 것이니 그 우그려 짓는 시간성향의 모습이 그렇다는 데야 어찌해볼 도리 있겠는가 이런 뜻이다 너가 크다는 것이(크려는 것이) 아니꼬우니 제 손아귀에 넣듯 하고 一躍(일약)하듯 올라서서 여보란 듯 베풀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데야 천상간에 구걸에 모습으로 살 수 밖에 더 있겠는가 이런 나에 말씀이다 내가 크면 저-귀신이 종 될 [까바 두려워서 그래 방훼 할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안하무인처럼 나대 내가 저해를 화살로 떨어트려 너 해보다 높다는 것을 주지시키려드는 그 옛날의 (예)임금처럼 말이다 말꼬릴 돌려 그래서 생색내는 은덕이 원수 노릇 할까봐서 그런지는 몰라도 보감에 말하길 薄施厚望者(박시후망자)는 不報(불보)하고 貴而忘賤者(귀이망천자)는 不久(불구)라 했고 석씨는 갈러 指目하는 것을 비운다는 뜻(*비워 재킨다)일수도 있는 空的[공적]인 입장에서 역할 담당을 잘해낸 것을 解脫成佛[해탈성불]로 말하게 됨인 것이다 즉 내라는 존재의식을 버린 속에서 제위치를 철저히 고수한 것을 菩薩(보살)이라하고 능력 닿는데 까지 제 性態[성태]의 眞價(진가)를 보여줌을 말함이다. 그렇다고 불분명한 논리의 전후세를 들춰서 배은망덕이란 뜻을 미화하고자 하는 뜻은 아니다 다만 은덕을 받은 자가 자존심만 강해 그 도움 받은걸 치욕으로 여겨 비굴한 의식에 사로 잡혀 갚지 못해 캥겨서 하는 말만 아니요 저쪽의 치사한 유세가 이쪽의 약점 노릇하는 게 되어 마음에 부담을 느낄까봐 노파심에서 소멸시키는 변재 방법을 가르켜 주는 것일 뿐이다 그것은 실리를 얻기 위한 한 수단의 모습 지혜로도 될 수 있는 것이지 즉 나는 저 잘나게 나대는 자를 슬기를 써서 그 가진 것을 내게 내놓게 해 나도 가진 입장이 되 보겠다는 한술수의 방편으로도 그렇게 지어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니 와신상담의 故事를 잘 새겨본다 면 이말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질 잘 알것이다 세상에 구걸하고 실리를 취하는 모습도 가지가지 여러 형태이라 할 것이니 하필이면 남루한 옷에 깡통을 들어야만 구걸하는 모습이라 할 것인가? 이 말이다 또 말머릴 돌려 설령 그 응보적 형태가 현실감각으로 더 환희스런 것으로 나타나면 어떻게 辨在(변재) 할 것인가? 즉 철천지 불공대천지 원수가 그 응보가 사지를 찣는 저주가 아니고 갖은 좋다하는 성향에 것을 갖고 응보된다면 그것이 어찌 그의 응보가 아니라고 무엇을 갖고 확증 할 것인가? 그래서 옛말에 미운놈 떡하나 더준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배터져 죽으라는 뜻이 아니라 忍辱[인욕] 성자께서 너 잘되 여한 없는게 내 바라는바 본모습이라 하고 염원자의 행위에 감명받아 참聖者(성자)의 성스런 자태를 나타내는 모습이라면 어떨 것인가?. 이런 뜻이다 그렇다고 또 철천지 원수라고 하게끔 하는 행동을 미화코자하는 말은 아니다 다만 이렇게도 조명 해볼 수도 있다는 뜻이다 글을 쓰다보니 줄기말은 어데로 가고 가지(枝梧)말만 무성하게 되어서 본뜻을 흐리게 하고 있다.
여기서 가지[枝葉的(지엽적)인]말을 줄일까한다.)}
또 어떤 종족이 몰살을 받게 된 원인은 전세에 물고기들을 씨도 않남게 약을 풀어 몰살시켜 잡아먹는 바람에 그렇게 됬다 한다면 그 물고기는 사람의 사욕을 채우는데 동원되는 견물생심의 원인제공 역할을 하였을 뿐더러 그래 악 탐심을 일으키라 시비걸고 조장시킨 것이라 그래놓곤 누가 더 선업인가 악업인가를 논하여선 사람의 심상을 憂慮(우려)의 함정속으로 밀어넣는 형태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물고기가 그렇게 죽게된 원인은 무어란 말인가? 그물고기들은 전세에 사람들이었었는데 현세 사람들이 과거에 물고기 였었을 적에 약을 풀어 몽땅 잡아먹은 자들이란 [훌러덩 뒤집은]논리가 나오 지 않겠는가 내 말은 그런 뜻이다 그렇담 오히려 후생에 물고기로 태어나서 사람을 위하여 몽땅 죽음 받음이 그 원한을 푸는 게 되지 않겠는가? 이래 서로 사과하는 것으로 됐음 됐지 무얼 더 물고늘어져선 輪回(윤회) 운운하는가 필자의 말뜻은 그런 뜻이다.(또한 생각 짚히는 것은 석씨가 깊은 속 갈무린 뜻을 내보였다 할 것이니 즉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해탈 시킨 자가 나온 종족이란 뜻이다=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므로 何人[하인]이 그 要旨[요지]를 말한다면 제 중생과 걸림이 있는 고뇌의 세상을 한 낫 물고기 떼등으로 비유해서 독한 약을 푸는 것과 같은 처방의 가르침을 해서 해탈시키는 방법을 취했다는 것이다. 그런 뜻을 뜻 속에 뜻이 있고 말속에 말이 있다고 은유법으로 숨겨 하나의 말 句[구]로 수많은 思量(사량)을 하게 하는 것을 갈무려서 가르켰다 봐야 할 것이다.) *즉 먹는 자만 용서할 관점으로 볼게 아니라 먹히는 자가 먼저 용서하는 관점이나, 내- 이렇다 하는 해탈 맛 보이는 관점으로 놓으면 어떨까 이다. 이래 모든 것이 억측 지레짐작일수도 있다
* 내 얘기는 이렇게 상호간 보복적 관점으로만 볼게 아니란 것이다. 그 해탈 맛 보이는 관점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을 꼭 굳이 나쁜 모습을 그려 나쁜 생각이 짚이게 하여 사람에 마음이란 걸 근심되게 할 필요는 없다할 것이다. 또 本無自性[본무자성]이라 하여 사람에 마음이 또한 어디 고정되어 있겠는가 할 것 아닌가?. 즉 헐뜯어서 이것인가? 저것인가? 사람에 마음 생김을 내보이라 한다면. 그렇기 때문에 즉 한 모양의 모습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사람에 마음이란 것이 諸行無常[제행무상]되어 고정되어 있을 수도 있으니 사람에 마음이라 한들 무슨 병폐의 헐뜯음이 있을 건가 이런 뜻이다. [(* 이말 뜻은 또 무엇을 가르키는가? 모든 것은 제행무상이라 하면 그렇게 말하는 뜻 또한 한 모양이 될테니 그 한모양을 부정하든 감싸든 파훼하던 또 다시 그것을 어떻게 변모하던 바로보던(*같은 향방의 시각이라도 생각이 각도를 달리해서 일어날 수 있음) 하는 모양이 있을 테니 그중엔 고정된 마음도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제행무상이라 하면 그 또한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이 그린 하나의 모양이 될 것이므로 그를 부정하는 파훼하는 또다른 제행무상이 있어 야 될 것 아닌가? 이런 뜻이다 그러므로 그를 파훼하는 제행무상속엔 諸行有相도 있다는 뜻이다.)] 일체가 다 사람의 생각으로 지어 내는 사람꼬득이는 어리석은 수작과 방편의 일과이니 하나도 믿을 것 못된다할 것이니 무슨 이 고차원적인 깨달음이나 理想이 란게 모두가 자아도취해서 남을 동패로 물들이려는 책모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니 그리해서 놀고 먹고 제삶을 살찌우려는 이기적인 발로에서 나왔다 봐야 할 것이다. 소이 종교 두목이 나나니 벌레와 같다는 뜻이다
[一說(일설)에 나나니는 아무벌레나 잡아다 제집에다 넣곤 "나나나"하면서 날개 치며 날 닮아라 한다면 고만 그 잡아다 넣은 다른 벌레가 나나니가 되어서 나온다는 말이 있다 이처럼 동패로 물들인다는 의미]
*서씨 귀신믿는 무리들의 관점은 더 꼴불견이니 모든 부족한 관점 병페 瑕疵[하자] 잡히는 관점을 代束[대속]관점(대신 속박받은 관점)으로보니 이를테면 저사람의 한쪽 팔없어짐을 누구를 위하여 대신 짤려 줬다는 뜻이다. 즉 諸相을 원천적인 부족한 관점으로 보아 내가 이렇게 회생해줌으로 인해서 너희가 멀쩡하게 생을 유지할수 있게 됐다는 것이니 이 얼마나 꼴불견 논리인가? 그러므로 일체의 장애적이거나 병폐적인 것을 업장 응보적 관점으로 보는 것을 치우친 견해라 해서 배격하고 먼저 회생적인 관점 은혜 덕을 베푼 관점으로 본다는 것이니 저 꼽사등이는 전세에 남 등 꼬부라진 것을 대신 (회생해서 펴줬다는 표현을) 위했다는 표현이 그렇게 지어져 나타나 뵈 였다는 것이다. 즉 이런 뜻이다. 쉽게 말해서 西何人[서하인]이 형틀에에 메달려 있는 것은 사람의 원죄를 대신 사함받기 위해서 회생되었다는 논리이다. 그래서 그것을 내보이고 사람들의 정신 감관에 자극시켜 주입 시키기 위하여 저렇게 십자가를 숭상하는 표시로 삼는등 그에다 몰골 험악한 사람에 모습을 메달은 것을 내보여 믿음의 주체로 이끄는 방식을 삼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근원의 허물이 있다는 것이니 허물이 있다는 것은 무슨 과오(지나침)나 부족 불충한데서 비롯되는 것을 갖고 논하는 것인데 천지만물 및 인간이 무슨 원천적인 잘못이 있단 말이 인가? 있다면 다윈의 진화론을 따른다면 아직 덜 깨여서 그렇다 할 것이니 그 덜 깨인 것이 어찌 귀신속셈에 탈잡힐 일이란 말인가? 이것은 마치 갓난 어린애 터러 너왜 빨리 어른되어 일하지 않느냐는 뜻의 어거지 떼쓰는 것일 뿐인 것이다. 일체의 理想 귀신논리가 다 쓰잘데 없는 것으로서 사람에 심금을 후벼파서 병들게 하거나 황폐화시키는 없는 마귀의 꼬득임 같음인 것이니 일체 신용할게 없다할 것이다. 아니면 또 다른 뜻의 곡해할 소지가 있는 오류가 나오니 모든 걸 다 망가트리고 쑥대밭 만들거나 썩고 부패의 소지가 있는 것이 그 이전에 누굴 도와준 표현을 그렇게 짓는 것이라 할 것 아닌가? 그래서 누굴 패죽여도 그것은 누굴 전세에 살려줬다는 표현을 저- 맞아 죽은자가 지금 저렇게 하고 있는 것이라 해도 그 말이 궤변 같지만 사리에 당연히 맞는다할 것 아닌가? 또한 그래서 악성을 갖고 패죽이는 자의 합리성을 갖게 대변하는 것이 된다 할 것 아닌가? (*즉 나는 저-맞아 죽는자 그자의 보살행윌 하길 원해 福(복)을 짓는데 두들겨 패주는 일꺼리 분담 역할을 맡아 一助[일조]를 한 것이 되므로 나도 역시 보살의 반열에 설 수 있다. 이런 뜻) 하인의 생각이 꼭 그런 대로만 돌아간다 할게 아니라 사실이 그렇 잖는가 이말 이다. 마귀 말씀은 마귀란 뜻이 나쁘다는 인식을 줘 오히려 솔직해서 사람의心[심]을 치유하고, 일체의 좋다는 명분이나 명칭 및 그에서 비롯되는 甘言[감언]이나 甘想[감상]이나 甘行[감행]은 僞善的(위선적)이고 可憎(가증)스러운 것이니 하나도 신용할게 없다 할 것이다. 오직 아무렇게나 지껄여대는 아무러크소니의 말씀만이 허심탄회하니 위대하고 신용할만 하다할 것이다.
*무엇이 절대적 가치가있어 절대자를 논한단 말인가? 절대자 운운 해가면서 그자의 명령을 듣지 않해서 사람이 원천적인 허물이 원래 있다하니 이것이 또한 성립되지 않는 논리이니 전지전능 무소불위 절대자라면 제명령듣는 자로하면 안될게 뭐가 있겠는가? 소위 제명령 들어서 허물이 있다는 것이나 제명령 듣지 않해서 허물이 있다는 것이나 어느것이 절대자의 뜻에 합리성에 부합되는 말일가? 이런 나의 물음요지이다. 또 절대자라면 하필이면 가련하고 불구장애적인 것만을 부각시켜 제 모습이라 할게 뭐가 있겠는가 그래서 그런자를 대접하면 저를 대접한 걸로 된다면 이것은 순다지 세상이 병신 불구 장애 天地가 우월하다는 논리가 나오지 않겠는가? 내 뜻은 그런 뜻이다. 또한 그렇다면 벌 나비가 아름답고 향기 나는 꽃을 갖고 맞아들일려 한다면 악마 사탄을 맞이 할려 드는 꼴로 여길 것 아닌가? 뒷논리 말고 앞논리 대로라면 그것은 사람에 심금을 후벼파려 드려는 귀신 우롱논리요 하등에 가치가 없는 논리이니 오직 슬픔이 일어나게 하는 논리는 선한 모습의 탈을 쓴 악마 사탄에 논리요, 화려함을 쫒고 맛있는 것을 동경해서 쫓는理想[리상]이 참으로 世人(세인)의 심신을 즐겁게 하는 논리로서 推仰(추앙)받고 신앙할만한 논리라 할 것이다.
[[ * 선악 시비 논리는 그 모다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부려 쳐먹기 위해서 나약한 심상들을 이용하려 꼬득이기 위해서 만들어낸 논리로서 사람들의 심상에 대하여 공갈하고 협박을 가하기 위한 하나의 동원된 수단의 논리라 그 하나도 추종할게 없다는 것이라 오직 힘을 배양하는 데에만 모든 사람들은 몰두해야 한다할 것이다
所以(소이) 呵責(가책) 받는 심상을 각인시키기 위해선 그리하여선 저들의 주구로 부려 먹기 위해서 그래 그 적자생존 논리에 반하는 말도 안돼는 논리를 씨브렁 거린 것이라 그에 얽메일 필요가 없고 오직 악다구니로 도전의식을 갖고 그 승리를 쟁취 해서만이 인간의 복된 삶이 보장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심상에 죄의식을 심어줌으로 인해서 저가 부려 쳐먹기 용이하겠음으로 덜돼먹은 그딴 선악 흑백 시비 논리를 들고 나서는 것이라 이래 쇠뇌 의식화가 사람의 심상을 황폐화 시킨다는 것이라 그 관점을 어디다 두느냐인데 깃겁게 할 것도 모다 죄의식을 심어주는 것으로 둔갑 질 할 수도 있고 죄의식을 들게하는 것도 얼마던지 정당시 미화하여선 사람의 마음을 환희 스럽게 할 것이라 그 관점을 어디다 두느냐에 달린 것이란 것이다 肉食(육식)을 하는데 이것을 살생으로 보느냐 아님 그 해탈 맛을 보이는 것으로 觀(관)하느야에 따라서 그 犬羊之差異(견양지차이)의 心狀(심상)이 刻印(각인)된다는 것이라 마땅히 사람의 마음상에서 어두운 구석이 존재치 않게 하는 것이 참다운 가르침이라 할 것이니 설령 처녀를 사통하고 사람을 서로가 함정에 밀어 넣는 행위를 짓는다해도 그것은 얼마던지 좋게 미화 변재 될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소한데는 얽메여선 선악시비를 논하지만 전장마당에 숫한 죽음에 대해선 그 선악이란 논리 比對(비대)를 끽소리 한마디 못한다 이러니 얼마나 편파성을 띈 논리를 갖고 떠벌이는 것인 줄 을 알 것이다 ]]
(*혹 반대시각을 갖는 자가 있어 그것은 그런 게 아니라 은혜를 베풀어 사랑을 받아보겠다는 입장에서 자기를 낮춰 행하는 大德(대덕) 普施(보시)의 行事(행사)의 한=(壹)것일뿐 꼭 그렇게 斜視的(사시적)인 관점을 갖을 필요는 없다고 한다. 세상에서 소외된 부분들을 찾아 돌봐주거나 앞면으로 나서게하여 용기를 북돋는 것이고 있어야될 이유를 알리는 것이지 그대 처럼 원천적으로 그런 것을 조장시키려 드는 것은 아니라 한다. 왜냐하면 어느 일방만이 완전한 성립체로 보기엔 흡족치 않다는 것이니 수수거래 來(래)往(왕)은 마음에 안위를 찾는등 願[원]의 渴求[갈구]에 대한 適答[적답]을 위해하는 것인데 누가 누구를 위하는 것이냐는 의문이 나오니 즉 누가 누구를 위한바 없고 저마다 자기 원의 답을 찾아 세우는 모습이 그런 모양이라는 것이다 주는 자만 하늘 또는 부처가 아니요 받는 자만 또한 그렇다고 부처 또는 하늘이 아니란 것이니 전체주의 사상 같으나 어떤 한 모양에 합하는 것을 구하는 것은 아니라 할 것이다.) 즉 일체의 심상을 나쁘게 하는 사상이나 주의나 논리는 사라져라이다. 이반면 기쁘고 즐겁고 아름다운 것 맛있는 것은 하염없이 싫증 안내게 시리 생겨나라이다. 일체의 불충분한 상은 내 눈앞에서 꺼져 버려라이다. 길딲아 노으면 문둥이 부텀 지나가지 말고 대통령 부텀 지나 가라이다. 혓바닥 널름거리는 大 [대망]의 계집년 머리카락 여기저기 널려져있어 나뒹구는 것은 내 눈앞에서 보이지 말라이다. 일체의 혐오스런 것은 좋은 명분(*일예로=하나님)의 탈을 쓴 악마가 뿌린 象[상]이니 사라져라이다. 오직 꾀꼬리 날고 철쭉꽃 피어나라이다. 그리고 쾌락을 위하여 저 가련하게 보이는 토끼를 흉칙하게 찔러 죽여보자 이다. 그 쾌감을 위하여 저주의 눈초리로 보는 것을 즐겨 보자이다 그저 똥개를 마구 두들겨 패 보자이다. 그 깨갱깽 거리는 소리를 듣길 즐겨 보자이다. 스트레스 해소 차원만 아니라 악성을 돋구어 그 악성이 어떻게 광적으로 나대는지 충동질 해보자이다. 사자가 맛있는 고기를 이를 앙시물고 뜯듯 잡아먹어 보자이다. 버마 아웅산에서 범 아가리에 들어간 것이 되어서 범이 아웅(어-흥)하듯 해서 많이 잡아먹어 보자이다. (*이것이 국기를 뒤흔들어 헐뜯는 말이라 할지 모르겠으나 당시의 군의 구테타 세력들이 정권을 잡고 어떻게든 잘 해보려는 한 일과속에 들떨어지게 대처해서 발생한 나라의 동량 인재만 회생시킨 결과를 가져온 일이라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도 원이 풀리지 않으면 지친 듯 주저 않아 쉬어보자 이다 그리고 난다음 다른 소일거릴 찾아 보자이다. 저-비싼 애지중지하는 고려청자를 깨트려 보자 이다. 아주 악질적으로 나대보자 흉악하게 생긴 강도가 칼을 들고 찌러올제 살려 줍샤 싹싹 빌어 보자이다 아니면 대어들어 죽든 살든 혈투해서 네가 센지 내가센지 자웅을 결해서 결판을 내보자이다. 그강도가 그래도 용서를 해주지 않고 흉폭한 모습으로 칼을 찔러오면 으윽- 하던가 꽤액- 하던가 해서 일그러지고 뒤틀린 몰골을 해가지고 죽어 보자이다. 그리곤 산발 피칠한 귀신이 되어 가지곤 시뻘건 손톱을 길게 해 가지곤 이히힝- 너 잡아먹자 해 보자 이다. 이렇게해도 원과 원한은 풀리지 않는다 할 것이다. 그리곤 소중한 물건에다 오물칠 똥칠을 마구 해보자 이렇게 해서 억눌렸던 마음을 내보여보자 일체의 하지 말라는 극기사항은 마음을 억눌렀던 무거운 돌추 꼭채운 족쇄 이것을 다이나마아트로 폭파해 치우고 그 마음이란 것의 참모습을 보자 (*그렇다고 아무러크소니의 깨침을 주겠다는 말씀을 범죄를 부추기는 말로 해석하면 안될 것이다) 대체로 마음이란게 어떻게 생겼는가 말이다. 가증스럽게 위선을 떠는 껍질을 나무 껍질 벗기듯 벗겨 치우자 그러면 그 속엔 밤송이 속에 잘 여물은 밤알처럼 마음이란 게 들어있을지 모르리라. 아주 맛이 고소한 게 말이다.
*사람에 마음은 성악도 성선도 아니다 촉감받은 외부반영 刻印(*佛家에선 이를 갖다 有漏(유루) 種子(종자)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에 의해 思量(사량)함으로서 그 動搖(동요)가 일어 파도가 일렁이듯 나타내 보일 뿐인 것이다.
*두뇌란 됫박에 각인종자 콩알, 손으로 이리 고르고 저리 헤집듯 굴리어 서로가 잘 조화있게 썪어 그 생긴 형태를 내보이듯 여러 刻印[각인]된걸 갖고 고르게 섞어 생각을 만두빚듯 빚어 내는 것이다. 점을 연결하면 線(선)이 되듯 각인된 覺[각]의 種子[종자]를 연결 늘어놓아 思量線[사량선]이 성립되고 그 累積(누적)은 면적이나 입체성을 띄어 갖은 象[상]을 다그려 나타내는 것이 곧 상념 相[상]으로서 천지 만물 우주의 생김象[상]이라 할 것이다.
*생각을 그렇게 일으키게 하는 존재는 무엇인가?....마음인가?....
*마음이란 무엇인가? (*成心 一切皆苦[성심일체고])=즉 일체 다 苦(고)로 이루어진 것인가?. 一切皆苦[일체개고]로 이루어 졌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苦[고]란 소위 입력시스템에 들어가 일체 입력되는 情報[정보]를 갖다 苦[고]라 할 수 있는데 입력시스템이란 또 뭔가? 有(유)이던 無(무)이던 實(실)이던 虛(허)이던 空(공)이란 器[기]이다 이 器(기)에 담기는 여러 각인된 정보종자 매채를 갖다 苦(고)라 할 것이다. 佛氏[불씨]는 이것을 고통의 맺힘으로 보았는지 알 수 없다.
*정보란 또 뭣인가? (*自他[자타]란 것에서 얻어냈든 않 냈든) 뜻의 凝固(어려 엉김)를 말함인 것이다 또 뜻이란 뭣 인가? 意向處[의향처]를 말한다 의향처는 뭣인가? 마음이 짚히는 것을 말한다 마음이 짚힌다는 것은 그리로 짐이 쏠리고 기우는 것을 뜻한다 그리로 짐이 기운다는 것은 그릇에 골수가 무언가 짓기 위하여 편벽되게 한쪽으로 기우는 것을 뜻한다 소위 뜻이란 어떤 상을 그려 짓기 위하여 골수가 이리저리 움직임에 불과 하다는 것이다 또 골수란 무언가? 그릇에 담긴 빈곳 또는 實(실)한 것의 새김 새기지 않는것의 覺露[각로] 즉 象[상]을 그려짓는 테잎을 이루는 點[점]의 연결흐름 原素[원소]와 같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주생성 이치로서 아무러크소니 오십육억론 및 왜그런가장을 읽어봐야 대충 안다할 것이다.
*여기서 그릇을 말하였는데 그릇의 實體[실체]는 무엇인가? 所謂[소위] 虛實[허실] 空有[공유]라는 것인데 그 虛空[공허]의 그릇은 實[실]한 것이요 담긴 것은 實虛[실허]한 事物[사물]이요 實[실]한 事物[사물]의 그릇은 허공이요 허공에 담긴 것은 일체를 지칭하는 허실의 사물이라는 것이다. 소위 이것은 저것의 그릇이 되고 저것은 이것의 그릇 또는 다른 것으로 발전 연계 전개되어 간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마음의 생김상이나 그형성 형태 및 과정을 일편 그렇치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조명하여 장황하게 늘어 나봤다.
*우주 삼라만라상이 왜저렇게 생겨 있나의 논함에서 그것은 마음이란게 불어내어서 있다하나 대체로 마음이란게 어느 곳으로 불어 냇단 말인가? 그것은 마음이란 게 불어내서 있는 게 아니요 마음이란 그릇 속에 있음을 어떤 표현작자가 심상으론 깨닷고 있지만 적절한 표현방식을 구사치 못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요 마음의 내재속에 있을 뿐인 것이다 저 나무가 눈이 있어 사계절을 볼 것이며 저 꽃이 눈이 있어 벌의 기호를 알 것인가 오직 마음이란 空感[공감]을 갖고 깨달아서 눈으로 들여다 보는 것보다 더 확실하고 자세하게 앎인 것이니 일체의 모든 사물형태가 다 그렇게해서 자기존재의미를 아는 것이며 세상의 성립상태를 주지케 되는 것이다. 즉 마음속에 모든 사물은 존재하는 것이다. 마음이란 것이 여러개의 개체의 몸 껍질탈을 뒤집어 쓰고 마음속에 있는 것이 곧 우주삼라만상인 것이다. 그마음이란 걸 혹자는 空이라 할지 모르고 또 혹자는 絶對 作者[절대 작자]라 할지 모르나 마음이란 마음 일 뿐이요 어떤 理想(이상)의 주체로 둔갑 될수 있는 것은 아니니 거짓 꼬득임에 속지 말아 야 할것인 것이다.(*따라서 心感=空感 否定空感[심감= 공감 부정공감]일수도 있음)(*또한 마음이 내외가 어디 있겠는가? 사람이 생각을 지어 가르는 [분별]말로 표현하다보니 그렇게도 말해 보는 것이지.....)
*마음이 그렇게 생겨 있으니 그러한 상을 짓는 것이요 즉 겉과 속이 같거나 다르거나 그 아니거나 등 여러 상을 짓는 것이요 그렇게 생겨 있지 않다면 어찌 그러한 못마땅하다거나 마땅하다거나 하는 상을 우그려 짓겠는가? 이 말이다.
*마음밖에 원천적인 外部(외부)가 있을수 없고 따라서 외부 反影(반영)이라하는 것도 마음속에 일어나는 그림자를 그렇게 표현한 것일 뿐이요 마음 어느 한구석에 세워놓고 그것을 외부라하고 외부에 비춰진 그림자라 하는 것이요 별도에 외부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니 촉감이란 것도 그 스스로 마음속에 일어난 것을 같다 촉감해 본다 하는 것이요 그로한 각인된 종자로 사량함 또한 마음속에서 함인 것이니 일체가 다 마음을 벗어나선 존재할수 없는 것이니 마음이 곧 우주인 것이다. 그렇담 그 마음이란 것이 실체적이고 고정되어 있어 저것만이 마음이라 할 수 있는 것인가? 마음이란 꼭 굳이 그렇치 만도 않으니 묶여있는 게 아니라서 변덕이 죽끌 듯 하는 것인지 모름이라 꼭 그것 만이라 꺼내 보일 수 없는 것인 것이다. 저 풀잎에 궁굴르는 아침이슬이 마음이란 것인가? 저 빨래줄에 맺힌 빗물 방울이 마음이란 것인가? 마음이란 그렇게 보기에 투명하다하는 것인가? 아니면 저 담벼락이나 암흑의 동굴 같은 것인가? 아니면 볼수도 쥘수도 들을수도 없는 것인가? 의문에 의문만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할 것이다.
*성인이 지극히 평범한 기우는 말씀으로 지극히 기울지 않는 뜻의 가르침을 배우는 자를 위하여 말씀하셨으니 즉 壹 二 乘的 多乘的[일 이승적 다승적] 비례 관계를 늘어 놓아 無乘[무승]에 근접하려는 논리를 설파 또는 무유승 허실승에 가까운 논리를(*가르침을)말씀하시려 드신 것이다. (* 여기서 또 승이란 말을 하였는데 그 승이란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 乘[승]이란? 중생을 태워서 생사고해에서 벗어나게하여 涅槃[열반]의 세계로 이끈다는 말뜻인데 그럴려면 무엇을 어떻게 올라타야 하는 의문이 제기 된다할 것이다. 소위 올라탄다는 것은 發性覺[발성각]을 올라탄다는 뜻이니 깨달음의 粒子 種子[입자 종자]로 형성된 實相象體[실상상체]를 올라 탄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서 생각으로 그려 허물탈 집을 짓게 되는데 馬[마]이나 수레 구름등 따위상을 들어 타는 것을 그려 올라탄다 고도 할수 있다 할 것이다 飛上[비상] 즉 나른다는 뜻도 약간 통하는 면이 있을 것이다 즉 깨우침을 올라탄다 정신영역이 확 트였다는 뜻이다. 思慮[사려]나 그로 아니한 것이나 얻은 깨침을 갖다 올라탐을 뜻하는 뜻이라 할 것이다. 또 여기서 그뜻이 연결될는지 안될런지는 모르지만 昇華[승화]의 관점으로 해석한다면 이말은 사전에 보면 정신영역의 용어로서 무의식적인 性的[성적] 에너지가 예술적 활동 종교적 활동 등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활동으로 전환되는 것을 말한다하였고 또 물사의 영역에선 어떤 현상이 더욱 높은상태로 돌입하는 것을 말한다하였는데. 이를 물사와 정신영역을 접목시켜 말해본다면 깨침의 단계가 어느 한고비를 넘겨 무르익어 곰삭었다는 뜻 환골탈태하듯 변모한 모습을 가르키기도 한다할 것이다. 또 勝(승)이란 보다 낳거나 눌러 제압하는 것이나 겨루어서 이기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할 것이다. ) 내가 다분히 성인의 가르침을 비방 헐뜯을려는 것만이 아니라 차근히 살펴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렇다는 것이니 소위 諸樣相[제양상]을 뜻하는 것이나 제양상을 뜻하지 않는 것이거나 등 兩端(양단) 또는 無無量(무량) 牙角[아각] 端(단)을 들어 비교케 하여서 비교아닌 것 비교할 것 없는 것에 도달케 함인 것이니 따지고 보면 가르침에 모순 말씀에 모순 뜻에 모순을 갖고 모순 아닌걸 설파하려 들었다 할 것이다. 그 말씀이 극히 편벽되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편벽된 모양으을 그려 진행해가면서 편벽아닌걸 가르키려 들었으니 그 곤혹함이야 말로, 글 말뜻으로 다 표현치 못한다 할 것이다. 세상에 空[공]을 추구한다 해놓고 여러 치우치는 말을 들어 가르치려 들었으니 번복되는 과정이 연속적으로 계속일어 날 수밖에 더 있겠는가? 즉 이뤘으면 걸려서 空(공)아닌 것이 되므로 금새 이뤘다간 곧 파괴하는 말씀을 아니 할 수 없게 되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말씀이 길게 늘어 나고 했던 과정을 되풀이 하는 경향이 있게되고 역겹게만 느껴지게 하여 극기의 한계를 보고자함에 도달케 함인 것이다. 즉 아궁이의 불이 언제까지나 더 세게 탈 것인가? 내 궁둥이가 다 탈망정 나는 일어나지 않으리라를 보려 드는 것과 같다할 것이다. 즉 忍耐[인내]의 한계 의 겨룸에서 승리한자가 곧 大聖覺者[대성각자]란 뜻이 나온다할 것이다. 즉 이와같이 하여 어느 목적한 경지에 드는 것을 보려 하였던 것이다.
*구슬은 좋은 것이나 그보다 더 좋은 것 있다는 것은 편벽된 논리로서 이와 같은 논리로서 평한 가르침을 준다하면 더 좋다는 것이 기울지 않는 평한 가치가 있을까 이다. 평한 것이 아니라 기울다 못해 수직적인 것이 될 것이다. 꼬챙이를 세워놓는 논리는 그외는 평이 혹 될 수 있는 것이 있을지 몰라 그것을 가르키기 위하여 그렇게 세웠다면 혹 평의 뜻이 될진 모르나 그 꼬챙이 자체로는 수직적인 꼬챙이지 평이라 할 순 없다.
*선생이란 것을 가르키기 위해서 제자가 있다 그러므로 선생을 가르키기위한 제자이니 그 또한 선생이란 논리가 나온다는 뜻이다. 즉 오른 것을 가르키기 위한 '그른 것은' 오른 것이란 뜻이다. *위한다는 것은 보살 성향이요 佛體(불체)를 이루게하는 것이니 解脫(해탈) 引導者(인도자) 濟度者(제도자)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논리이면 수직적인 꼬챙이도 수평의 막대라 할 것이다.
* 諸樣相(제양상)속엔 시간감 이라는 것도 있다 이것이 중요하니 사람들은 혹 이것을 등한이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시간성향은 가르침에서 중요한 자리메김을 하고 있다 제양상에 머물지 말라는 것은 이 시간감이라는 것도 염두에 두지 말라는 것이니 계속 궁구 깊이 파고든다면 시간이라는 것은 원래 없다에 도달하는 생각의 길이 열릴수도 있다 할 것이다 이것은 치우친 견해 佛(불)氏(씨) 말을 잘못해석 한 諸法斷滅(제법단멸)로 본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제법단멸상 아닌 것으로 본다면 그 안엔 제법단멸로 볼 수 있는 게 있는 법 즉 그것만이란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닌 것이 제법단멸이 아닌 한편으로도 볼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간감이 없는 걸로 본다면 석존의 가르침을 볼진데 부처는 시간에 의해 흘러 래왕하는 것이 아닌 게 되므로 부처님은 항상 존재하는 것이되니 저기 절에 계시는 부처상은 이제나 저제나가 없으니 연등불전에 서 연등불이 수기하길 너는 내세에 부처가 된다 수기하셨다하는데 지금 저렇게 계시는 것이 곧 연등불께서 수기하는 모습이요 연등불이란 저 전등 불빛이나 일체 볼 수 있게 느낄수 있게 하는 感性向[감성향]에 것이란 뜻이요 또한 연등불께서 어디 따로 계신다는 뜻은 아닌 것이라 할 것이다. 이것이 마음에서 일어나 마음에 비춰 보는 방식이니 부처가 어느것 어느곳에나 어떤 형태로 던지 있다면 있는 것이요 그것을 가르침을 받는 중생의 위치로 놓고 본다면 또한 그렇게도 보일수 있는 문제인 것이니 마음의 짚힘에 있다는 것이다.
*끝에가선 말하길 어떻게 청중에게 연설하는가? 불퇴전에 용기를 가져라다. 모든 것이란 한낫 별 것 아닌 것이니 겁내지 말라는 것이다 베옺 입고도 허리를 꼿꼿히 펴서 비단옺 입은자와 마주서서 말한 자는 공자 제자 子路(자로)였고, 釋尊(석존)은 일체 것이 그림자 거품등과 같은 것이니 눈망울 바라봄을 두려워 떨지 말라는 것이니 한 낫 지프라기 세워 논 것 정도로 여기라는 것이다 이것이 해탈을 갈구하는 중생 아닌 중생들을 대하여 겁먹지 않고 연설하는 자세라는 것이다.
* 중생은 없나니 세상에 부처들이여 아라한이 되었으면 일체 꼬득이는 감언이설 하지를 말거라 또 감언이설상을 세상이라 하지를 말라 또 너들이 중생이라 스스로 전락하고 유혹 감언이설에 도취되지 말것이다
*석경 한구절의 감상 평론.
*釋弟의 말로는 물질은 말할 것도 없고 그영혼 까지도 분해되듯 흩어져서 영원한것은은 없다 했는데 이에 대해서 느낀바 의문 나는 점 있어 한말씀 하고자 한다. 영혼까지도 흩어진다면 지금 그 영혼은 물질처럼 흩어져서 사방으로 흩어졌다할 것이다. 또 영혼이란 무엇인가 ? 귀신의 종류이던가 그 뭉친 덩어리던가 아님 유령종류 신령종류나, 얼 결이 베여 숨쉬는 것 등등 정신적 感象으로써, 어떠한 물질적 감각에의해서 느껴 지는 것은 아니라 할 것이다.(*물론 物質象이 영혼을 배제하곤 성립될수 없다 하지만 그 물감적인 것을 육감의 차원 일수도 있는 영혼감이라곤 하기엔 거리가 좀 있지 않을까 이다.)앞서 말했듯이 모든 것은 영원한 것은 없다 했다 그렇다면 그 흩어진 것은 영원하겠는가? 언젠가는 다시 원인이나 여건이 조성되면 긁어 모여 다시 뭉칠 것 아닌가? 하는게 내 의문에 요지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영혼 또한 그러한 수순에 의해 긁어 모이지 않을 까 이다 그러므로 영혼이 흩어 졑다 하등에 근심하거나 무슨 병폐 잡을게 없다 할 것이다 이를테면 여기 금 덩어리가 있다 이것을 분해하여 사방으로 흩었다면 그 금을 긁어모으는 방식을 취한다면 금은 다시 모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 방식이란 무언가? 사람들은 금을 채취할 때 여러 가지방법을 동원하는데 그중 한예로 사금의 채취라면 당연히 물에서 모래를 일어 금을 채취하게되는데 그 뭉치게하는 것은 수은이란 또 하나의 광 물질을 택하여 하게 된다 그렇다면 흩어진 영혼을 긁어 모을려면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모든 인식 성향에 것이나 감상에 성향은 그 감상케하는 주체 성향이라는 게 있다 즉 색으로 논할진데 색이란 보는 것의 주체성향이라는 것이다 즉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한 빛갈을 띄는 성향의 것은 그 한 빛갈을 긁어모으는 어떠한 방법을 택한다면 긁어 모으게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의 취합도 그 긁어모으는 방법이 있다면 그 방법을 택해 긁어 모은 다면 흩어 졑던 영혼은 취합하게 된다는 논리이다. 대체로 그 방법이란 무언가?. 모든 사물상 및 영혼은 저가 그러했다는 것을 또는 저가 그렇다는 것을 주지시키는 감식성향이 있다 그것은 곧 그것의 그것을 현상시키는 업적 행적과 같다 바로 그런 것이란 것이다 즉 영혼이 흩어졑다는 것은 바로 이 業績(업적)이나 행적의 자취가 퇴색되거나 멀어져가 아득히 묘연해져 사라졌다는 뜻이니 그 업적이나 행적을 다시 찿아 세우면 그 흩어졑던 영혼은 다시 취합하게 된다는 논리이다. 어떻게 찾아 세우는가? 이것이 방법론이라는 것이니 무슨 물질적인 것으로도 한다 하지만 마음이나 정신적으로 도 찾아 세울수 있다할 것이니 사람등이 생각을 그리는데로 쫓아 영혼은 긁어 모이고 원상회복을 하게 된다할 것이다. (*마음과 정신 영역은 흩어진 금을 긁어 모으는 수은과 같다.) 즉 思量하는곳으로 쫓아 흩어졌던 영혼은 다시 일어나게 된다는 논리이다 무너진 예전 저 바위의 영혼을 복원한다면 생각을 생산해 낼수 있는(*창출해 낼 수 있는 주체) 주체(*사람등=사람만이 생각을 한다할 수 없다 일예로 저 나무는 생존을 위하여 춘추를 思量한다. 한다면 그 또한 생각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등이 그 영혼을 머리등(*다른 물사는 그 형태가 머리 아닐 수도 있음)에서 그림으로부터라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떠한 사람의 영혼도 구천에 흩어져 내라할게 없이되었다 하더라도 그가 남긴 자취 업적과 행적이 있다면 얼마던지 그 영혼을 복원 시킬수 있다는 단계에까지 나아간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 영혼이 흩어진걸 하나도 근심할게 없고 모든게 영원한게 하나도 없다는 말에 병탈이 잡혀 영혼이 흩어지면 어떻게하나.... 하는 우려는 떨쳐버린 게 된다는 것이다. *또 연금술이란 말이 있다 여건에 의해 본질의 변형이나 환태되어 엉뚱한 성향을 띌수 있듯이 이처럼 금 아닌게 금일수도 있게됨이라 그래서 영혼 아닌 것도 영혼으로 환태될수 있다는 논리가 나온다 모든 감지성향이 다 그렇다면 물사와 영혼이란 것을 구분할 필요가 없다할 것이다 저 감나무는 과거의 돼지의 영혼이었고 지금도 돼지의 영혼일수도 있는 문제이요 지금하인은 옛 어느 낫다하는 일체 모든 성현이나 그대변이라면 대변일수도 있는 싯탈타와 그이전 이후의 모든 각성 성향의 것이거나 마귀사탄 중생이었다 해도 말이 된다 할 것이다.... 저들이 지금 말하는 것은 사람에 마음을 속시원하게 치유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근심되게 하여 병들게 하는데 속셈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할 것이다 그래서 병들은 마음으로 병귀 해탈을 시키겠다는 것이다. 즉 오르게 말하는 것처럼 보여도 모다 중생을 병들게 하는 가르침이요 오직 이 아무러크소니의 아무렇게나 해되는 말씀이 고뇌에찬 제양상의 중생들을 멸도 시키는 말 씀이라 할것 이니 모두 이 何人의 말 씀을 들어 야 해탈을 할수 있다는 것이니 일체의 꼬득이는 말에 넘어가 물심을 빼앗기고 황폐화 당하지 말라는 것이다. 즉 저들이 말하는 것은 오른 것 같아도 오른 것이 아니요. 그른 것 같아도 그른 것이 아니니 시비를 어떠한 가르침에서 찿으려 할게 아니라 자신이 궁구해서 합리성을 띄게 해서 결정할 것이라는 것이니 똥은 떡이요 떡은 똥이란 것이다. 즉 모든 것을 삐뚤은 조명 고약한 심사를 내보여 뒤틀어놓는 것처럼 보여야만 제대로된 관찰을 할수 있을는지 모른다. 저는 실천 않으면서 주둥아리로만 살아 나블거리면 이것은 남을 기만하여 무슨 영리를 취득하겠다는 장사아치의 고단수 수단 파는게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니 파는 자는 제 실리를 倍加하기위한 노력이라서 탈이 없다 할지 모르겠지만 정신팔려 넘어가는 자는 普施먹이의 道를넘어 바보껍질로 취급받아 쭉정이 해탈상을 뒤집어 쓰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의 감언이나 감행이란 것에 넘어 가지 말 것이니 산삼녹용의 보약성분 효력이 저 산삼 녹용이라고 가르치는 그물질에 있는게 아니라 내 심정에 있으니 한 낫 저 좋다는 것을 불쾌하거나 더러운 것으로 여기면 그렇게도 될 수있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제중생 세인들에게 권하노니 좋은 것은 나쁜 것으로 나쁘다하는 것은 좋은 것으로 보길 힘쓸 것이다 이렇게 심사 뒤틀려 비뚤은 것처럼 보이는 가르침을 주다. 내 심사를 그려 내보이라면 내 모습은 아이스크림 스크류바나 꽈배기 과자를 연상하면 될 것이다.
*그 가르침이 衆生(중생)을 바르게 引導(인도)하는 것인가?.
*깊이가 쪽색처럼 물들은 중생을 탈파 시키기 위해 극약 처방을 한다는 것이 모질고 악의에 찬 말로 엄포 공갈하여 되려 병들게 할 필요가 없다할 것이다. 그 쪽색 처럼 된 것도 일편의 탈파 방식에 속하지 아니한다 어찌 장담할 것인가 이 말이다. 하필 자기의 주장만 갖고 남을 물들여 파괴해 치울려 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절대법이지 무위법은 아닌 것이니 자가당착 모순에 빠진다 할 것이다. 일체의 겁주어 마음 여린자에게 공갈하는 듯 한 가르침에 말씀은 중생을 되려 병들게하는 것이지 모든 상을 여윈 참 보살 인도자라 할수 없을 것이다. 무슨 그렇게 마음에 꺼리는 게 많아 자신 없어 하는 말만 변명하듯 늘어 놓는가 한다면 자신 없어서만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 잖는가? 내 말은 그런 뜻이다 업보 응보 윤회설을 듣다보면 앞과 같은 생각이 돌수도 있는 문제라 할 것이니 못되고 험악한 뜻의 말만 들추어서 중생을 제도할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세상에 왜 까시만 있겠는가? 염증 안나는 감로나 꿀도 있는 것이다. 석존이 말하길 그 마음을 다치지 않게하고 좋은 길로 이끄는 자가 참으로 능력 있는 보살이라 목건련을 칭찬하는 말씀중에 있었다. 내가 본을 보여 저가 비꼬기에 앞서 참으로 우러나는 마음을 갖게할 순 없을 까? 내 생각은 그런 뜻이다 본을 보여 자발적인 마음을 일게 한다는 것은 보통성의가 아니곤 어렵다할 것이니 잘못하면 위선에 탈을 쓴 것으로도 보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혹은 그렇게 보여도 제도하기 위해선 아니하는 것보다 낳다 할는지 모른다 할 것이나 그렇게 하는 것은 위선의 모습도 함께 가르켜 주는 결과라 할 것이다. 소위 위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잘하지 못하는 자가 비꼬아서 보는 관점에서 나온 말일수 도 있는 것이니 위선처럼 보여도 위선이 아닐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선은 없다에 도달 할수 있다 할 것이다 얘기의 본질이 변해 가는 것 같다 내가 말코자 하는 요지는 사람에 마음을 황폐화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언젠가는 겪어야 한다는 보복적 복수적 차원의 논리 전개가 업을 탈파시키는 뜻의 전부는 될 수 없고 그런 논리는 큰 가치를 부여 할 수 없는 전개 방식이라는 것이다 즉 생 양가죽 벗기는 논리는 극약처방이기에 앞서 일고에 가치도 없는 논리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뭣을 어떻게 한다면....하는 탕감논리 또한 정당화 논리라곤 할 순 없다 이것은 활빈당의 논리이니 도둑질하고 베풀면 정당화 될 수 있다는 과정을 무시하고 목적 만 중시한 논리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본다면 시건방지게 나서서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것은 참으로 꼴불견일수도 있는 문제요 相[상]을 여윈 제도란 진정 어려운 일이라 할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생활이 모다 전세의업을 벗는 것의 일과요 또 새로운 업을 짓는 것의 일과려니 생각한다면 별도로 튀게나대어서 모난 비평을 받는 것보다 낳으리라 그러므로 사회규범을 지키고 생을 위해 주어진 업무에 열심히 노력한다면 굳이 해탈을 위해 달리 모색할 필요가 없다 할 것이다. 석존께서 나는 불법승 일체가 되어 시간감을 떠난속의 僧弟[승제]의 일방도 되어 저 가람속에 있어 제 부처님 공양하느라고 하지 못하지만 若復有人[약부유인]은 시간감아닌 시간감속에 연꽃이 뿌리 내린것처럼 하고 있으니 어떠한 공덕으로 비유할 계제 꺼리 감이 아니라고 하시는 것만 같다. 꽃피고 열매 맺고를 거듭하니 온 세계를 여러 가지 모양華[화]로 덮을 것이니 어찌 나의 노력이 거기에 견쥬랴 하는 겸허의 말씀이시다.
去現未 三界[거현미 삼계]가 한군데 일군락을 지어 꽃처럼 피어 있으니 저 가람속의 밝히는 연등은 연등불이요 주위조성은 팔백사천만억 나유타 즉명제불이요 무공과자 승계는 경내를 거니는 화상 참선 염불하는 이로다.
사람으로 계속 태어나는 방법.어느한가지..
*하인이 휘미진 계곡길을 지나다가 사람들이 천렵을 나와서 伏(복)때라서 개를 잡아 먹는걸 보게 되었다 때마침 우연에 일치로 스님이 그곳을 지나다가 스치는말로 "쉬이- 쯧쯧 살생유택인데 개를 저렇게 잡아먹어서나 쓰나 나중에 후생에 개로 태어나서 고통을 받을려면 어쩔라고" 하면서 가신다 그래서 하인이 생각하길 그런 방법에 논리라면 내에겐 인간 탄생의 연중 쉬운 방법이 있다 생각했다. 만약 내가 世世(세세)生生(생생)토록 사람으로 태어나서 영달하길 원한다면 사람을 잡아먹으면 어떨까 하고, 모든 지어진 것은 영원한 것은 없다하니 뭣으,로 태어나던 부숴지고 없어질 것은 사실 아닌가? 그런데 뭐가 꺼릴게 있다고 자꾸 번복되는 죽음을 두려워 할 것인가? 내 말은 그런 요지다.
부처도 영원할 것 없고 어떠한 법상이나 그것만이 아니란 것도 영원할 것 없다 할 것인데 무엇에 두려워 여러 理想 을 펼치려 드는가 이 말이다. 여하한 형태던 보복성 논리라면 제위치로 돌아온다는 뜻인데 순간에 영화라도 누리는 사람으로 계속 태어나는 게 다른 것으로 태어나는 것보다 낳지 않을까 이다. 그러니까 사람으로 계속 태어날렴 사람을 많이 잡아먹는 게 사람으로 태어나는 길이 아닌가 이런 내 생각이다. 나는 너를 잡아먹으니 후생에 네밥이 되기 위해 또 사람으로 태어날 것이라는 것이다. 밥이 될땐 될 값이라도 우선 사람으로 태어나서 갖은 향락 누린 다음(*싯달타가 왕의 아들로 태어나서 갖은 향락누리고난다음 염증이나서 고상한 취미를 채택해서 즐기려든 게 바로 불법이라 하는 듯 이 보이는 것처럼) 잡아먹힌다면 맛보이는 해탈차원의 경계일 것이니 무슨 분한이 생길 것이면 무슨 원이 또 있겠는가? 이런 뜻이다.
* 지금 그대의 처지가 전에 왕자로 갖은 향락 누렸었는데 그때도 이런말을 하였는지라 이제 그 말대로 修道(수도) 精進(정진) 속의 日課(일과)일수도 있는 逆境(역경) 속에 들어 있다한다면 또 그 말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할 것이다
성자 가르침에대한 느낀 평론 아무러크소니 께서 제중생(諸衆生)을 가르켜 한말씀 하시대 제양상이 꼭 나쁜 것으로만 귀결짓는 것은 아니니 석씨의 말을 전부 신용할 것은 못된다 하심이라. 諸行無常(제행무상)이 하필 고름덩어리로만 귀결짓겠는가? 이런 말씀이니 성인의 말씀을 헐뜯고 비방해서가 아니라 사실이 그렇찮는가? 이런 말씀이다. 그 고름 덩어리 또한 諸行無常(제행무상)이니 꽃도될 수 있고 맛있는 설탕 꿀도 될 수있고 아름다운 보옥도 될 수 있고 美聲(미성) 음률가락도 될 수 있다는 뜻이니 하필 흉칙한 것으로 만 귀결짓는 말을 해서 중생의 마음을 근심되게 할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냥 현실생활에 충실할 수 있게 가르치면 어떨까? 즉 너에 지금 삶을 영위함을 열심히 하라는 뜻의 것을 갖고 사람들을 제도 한다면 얼마나 좋을 까이다 중생의 만병은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인데 그 마음이란 것을 잘 다스려 편안하게 함은 어떨까? 하필 고통이나 흉측한 모양이나 이런걸 갖고 마음을 자극시켜 病傷하게 하거나 모든 생김이 내라함이 아니란 것만 갖고 가르치려 들 필요는 없다할 것이다. 혹 나의 말에 반대시각을 갖는 자가 있어, 되 비평해서 너가 뭐란 것을 인식하게 하는 감관이 구별해서 그런 구별을 해놓는다 할는지 모르지만 그렇담 그런 구별에 말씀은 누가 먼저 어지럽게 말했는가? 이런 뜻이다 나에 말씀은 그런 요지다. 즉 장구 허리만 갖고 논할게 아니라 장구 전체를 들어 논해야 된다할 것이다. 현실의 쾌락을 영위하는 것을 갖고 나쁜 시각으로만 관찰한다면 고름덩어리가 춤춘다할 것이고 시기나 질투를 해서 남에 삶을 배가 뒤틀려 하는 꼴 밖에 되지 않는다 할 것이니 윤회 와 업보 논리 또한 남을 제도하기에 앞서 못된 상을 생각으로 그려 衆生(중생)을 癡愚(치우)하게 몰아 엄포 공갈하는 말 밖에 되지 않는다 할 것이다. 이를테면 저 사람이 차에 치여 죽었다 한다면 과거 업보가 있어 차에 치여 죽었다 할 것이니 소위 그전에 자기 몸이 차였었는데 현실적인 차가 과거 사람에 몸이었던 걸 그 차가 갈려 죽이는 바람에 그 현상이 뒤바뀌어 나타난 현상이 지금에 현상이라는 것이라면 그 번복 현상일 뿐 인 것이요 무슨 죄의식 따위를 거기다가 결부 시켜 말할 필요는 없다 할 것이며. 또 그 전생에 일은 무어 며 또 그전생에 일은 무어 란 말인가의 의문점에 도달한다 할 것이다. 설령 갑이 乙을 害(해)하고 을이 丙을 害(해)하고 병이 甲을 害(해)하는 등 체바퀴도는 먹이사슬 논리라도 그 이치는 마찬가지라 할 것이니 그 하나의 응보적 형태가 그렇게 지어져 보였을 뿐이라 할 것이다 어떠한 형태이던 그 응보적 형태이라면 그 응보적 형태일 것이니 그 이친 마찬가지라 할 것이다. {(*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듯한 응보적 형태 또한 그렇다할 것이니 즉 미리 어떤 사건을 겪는 것은 래세에 어떻게 하기 위해서 라기 라거나 어떻게 될 것이라거나 그 뜻은 時間性向의 順流하면서 짓는 현상과 다를봐 없다 할 것이니 이를테면 乙의事 현상이 甲의事 현상보다 먼저 있었다해도 그 응보적 이치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즉 머리부터 먼저 움직이는게 아니라 그 꼬리부터 먼저 움직일수 도 있다는 것이니 어떠한 일 이 아직 일어나기도 전에 그 결실이 먼저 나타날 수 있고 그 징후도 보일수도 있는 것이며 내가 그미리 그 댓가를 치룬다는 말도 있지 않는가? 이런 뜻임 또한 응보적 입장에서 배은망덕이란 뜻도 있는데 그것이 배은망덕이 아니라 입장의 바꿔놓기가 전세 에 있었다면 이미 그것은 배은망덕의 의미가 소멸되었다는 뜻이다 또 후세에 있을 것을 지금대변 하는 것이라도 그 이친 마찬가지가 된다는 것이다 즉 내가 저자에게 보살핌을 받아 극한상황 죽을 처지에서 살아났는데 그 은인이 은인이라 해서 자기의 곤란한 처지가 당도했는데도 알면서도 모르는체 돌봐주지 않는다고 내게 헐뜯을게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이미 그것은 입장 바꿔놓기로 내가 전세에 베풀었던 것을 도로 되받아 오는 것인 줄 굳이 누가 있어 아니라고 확연히 증명할 것인가 이 말이다. 또 이런 상황의 전개는 못된 귀신이 제공과를 뻐기고 제 포로 코자 구걸하듯 굽힐 것을 강요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래도 안되고 저래도 안되고 회유정책에다 그래도 안되니까 이제는 배은망덕의 상을 그려 그 구렁텅이로 올가미 씌우듯 몰고 갈려고 하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귀신이 귀신을 희롱하는 것일 뿐 참사람은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 일체가 다 귀신이 짓는 빠트리는 함정이라면 함정이요 덫이라면 덫일 것이니 그 우그려 짓는 시간성향의 모습이 그렇다는 데야 어찌해볼 도리 있겠는가 이런 뜻이다 너가 크다는 것이(크려는 것이) 아니꼬우니 제 손아귀에 넣듯 하고 一躍(일약)하듯 올라서서 여보란 듯 베풀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데야 천상간에 구걸에 모습으로 살 수 밖에 더 있겠는가 이런 나에 말씀이다 내가 크면 저-귀신이 종 될 [까바 두려워서 그래 방훼 할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안하무인처럼 나대 내가 저해를 화살로 떨어트려 너 해보다 높다는 것을 주지시키려드는 그 옛날의 (예)임금처럼 말이다 말꼬릴 돌려 그래서 생색내는 은덕이 원수 노릇 할까봐서 그런지는 몰라도 보감에 말하길 薄施厚望者(박시후망자)는 不報(불보)하고 貴而忘賤者(귀이망천자)는 不久(불구)라 했고 석씨는 갈러 指目하는 것을 비운다는 뜻(*비워 재킨다)일수도 있는 空的[공적]인 입장에서 역할 담당을 잘해낸 것을 解脫成佛[해탈성불]로 말하게 됨인 것이다 즉 내라는 존재의식을 버린 속에서 제위치를 철저히 고수한 것을 菩薩(보살)이라하고 능력 닿는데 까지 제 性態[성태]의 眞價(진가)를 보여줌을 말함이다. 그렇다고 불분명한 논리의 전후세를 들춰서 배은망덕이란 뜻을 미화하고자 하는 뜻은 아니다 다만 은덕을 받은 자가 자존심만 강해 그 도움 받은걸 치욕으로 여겨 비굴한 의식에 사로 잡혀 갚지 못해 캥겨서 하는 말만 아니요 저쪽의 치사한 유세가 이쪽의 약점 노릇하는 게 되어 마음에 부담을 느낄까봐 노파심에서 소멸시키는 변재 방법을 가르켜 주는 것일 뿐이다 그것은 실리를 얻기 위한 한 수단의 모습 지혜로도 될 수 있는 것이지 즉 나는 저 잘나게 나대는 자를 슬기를 써서 그 가진 것을 내게 내놓게 해 나도 가진 입장이 되 보겠다는 한술수의 방편으로도 그렇게 지어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니 와신상담의 故事를 잘 새겨본다 면 이말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질 잘 알것이다 세상에 구걸하고 실리를 취하는 모습도 가지가지 여러 형태이라 할 것이니 하필이면 남루한 옷에 깡통을 들어야만 구걸하는 모습이라 할 것인가? 이 말이다 또 말머릴 돌려 설령 그 응보적 형태가 현실감각으로 더 환희스런 것으로 나타나면 어떻게 辨在(변재) 할 것인가? 즉 철천지 불공대천지 원수가 그 응보가 사지를 찣는 저주가 아니고 갖은 좋다하는 성향에 것을 갖고 응보된다면 그것이 어찌 그의 응보가 아니라고 무엇을 갖고 확증 할 것인가? 그래서 옛말에 미운놈 떡하나 더준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배터져 죽으라는 뜻이 아니라 忍辱[인욕] 성자께서 너 잘되 여한 없는게 내 바라는바 본모습이라 하고 염원자의 행위에 감명받아 참聖者(성자)의 성스런 자태를 나타내는 모습이라면 어떨 것인가?. 이런 뜻이다 그렇다고 또 철천지 원수라고 하게끔 하는 행동을 미화코자하는 말은 아니다 다만 이렇게도 조명 해볼 수도 있다는 뜻이다 글을 쓰다보니 줄기말은 어데로 가고 가지(枝梧)말만 무성하게 되어서 본뜻을 흐리게 하고 있다. 여기서 가지[枝葉的(지엽적)인]말을 줄일까한다.)} 또 어떤 종족이 몰살을 받게 된 원인은 전세에 물고기들을 씨도 않남게 약을 풀어 몰살시켜 잡아먹는 바람에 그렇게 됬다 한다면 그 물고기는 사람의 사욕을 채우는데 동원되는 견물생심의 원인제공 역할을 하였을 뿐더러 그래 악 탐심을 일으키라 시비걸고 조장시킨 것이라 그래놓곤 누가 더 선업인가 악업인가를 논하여선 사람의 심상을 憂慮(우려)의 함정속으로 밀어넣는 형태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물고기가 그렇게 죽게된 원인은 무어란 말인가? 그물고기들은 전세에 사람들이었었는데 현세 사람들이 과거에 물고기 였었을 적에 약을 풀어 몽땅 잡아먹은 자들이란 [훌러덩 뒤집은]논리가 나오 지 않겠는가 내 말은 그런 뜻이다 그렇담 오히려 후생에 물고기로 태어나서 사람을 위하여 몽땅 죽음 받음이 그 원한을 푸는 게 되지 않겠는가? 이래 서로 사과하는 것으로 됐음 됐지 무얼 더 물고늘어져선 輪回(윤회) 운운하는가 필자의 말뜻은 그런 뜻이다.(또한 생각 짚히는 것은 석씨가 깊은 속 갈무린 뜻을 내보였다 할 것이니 즉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해탈 시킨 자가 나온 종족이란 뜻이다=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므로 何人[하인]이 그 要旨[요지]를 말한다면 제 중생과 걸림이 있는 고뇌의 세상을 한 낫 물고기 떼등으로 비유해서 독한 약을 푸는 것과 같은 처방의 가르침을 해서 해탈시키는 방법을 취했다는 것이다. 그런 뜻을 뜻 속에 뜻이 있고 말속에 말이 있다고 은유법으로 숨겨 하나의 말 句[구]로 수많은 思量(사량)을 하게 하는 것을 갈무려서 가르켰다 봐야 할 것이다.) *즉 먹는 자만 용서할 관점으로 볼게 아니라 먹히는 자가 먼저 용서하는 관점이나, 내- 이렇다 하는 해탈 맛 보이는 관점으로 놓으면 어떨까 이다. 이래 모든 것이 억측 지레짐작일수도 있다 * 내 얘기는 이렇게 상호간 보복적 관점으로만 볼게 아니란 것이다. 그 해탈 맛 보이는 관점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을 꼭 굳이 나쁜 모습을 그려 나쁜 생각이 짚이게 하여 사람에 마음이란 걸 근심되게 할 필요는 없다할 것이다. 또 本無自性[본무자성]이라 하여 사람에 마음이 또한 어디 고정되어 있겠는가 할 것 아닌가?. 즉 헐뜯어서 이것인가? 저것인가? 사람에 마음 생김을 내보이라 한다면. 그렇기 때문에 즉 한 모양의 모습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사람에 마음이란 것이 諸行無常[제행무상]되어 고정되어 있을 수도 있으니 사람에 마음이라 한들 무슨 병폐의 헐뜯음이 있을 건가 이런 뜻이다. [(* 이말 뜻은 또 무엇을 가르키는가? 모든 것은 제행무상이라 하면 그렇게 말하는 뜻 또한 한 모양이 될테니 그 한모양을 부정하든 감싸든 파훼하던 또 다시 그것을 어떻게 변모하던 바로보던(*같은 향방의 시각이라도 생각이 각도를 달리해서 일어날 수 있음) 하는 모양이 있을 테니 그중엔 고정된 마음도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제행무상이라 하면 그 또한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이 그린 하나의 모양이 될 것이므로 그를 부정하는 파훼하는 또다른 제행무상이 있어 야 될 것 아닌가? 이런 뜻이다 그러므로 그를 파훼하는 제행무상속엔 諸行有相도 있다는 뜻이다.)] 일체가 다 사람의 생각으로 지어 내는 사람꼬득이는 어리석은 수작과 방편의 일과이니 하나도 믿을 것 못된다할 것이니 무슨 이 고차원적인 깨달음이나 理想이 란게 모두가 자아도취해서 남을 동패로 물들이려는 책모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니 그리해서 놀고 먹고 제삶을 살찌우려는 이기적인 발로에서 나왔다 봐야 할 것이다. 소이 종교 두목이 나나니 벌레와 같다는 뜻이다 [一說(일설)에 나나니는 아무벌레나 잡아다 제집에다 넣곤 "나나나"하면서 날개 치며 날 닮아라 한다면 고만 그 잡아다 넣은 다른 벌레가 나나니가 되어서 나온다는 말이 있다 이처럼 동패로 물들인다는 의미] *서씨 귀신믿는 무리들의 관점은 더 꼴불견이니 모든 부족한 관점 병페 瑕疵[하자] 잡히는 관점을 代束[대속]관점(대신 속박받은 관점)으로보니 이를테면 저사람의 한쪽 팔없어짐을 누구를 위하여 대신 짤려 줬다는 뜻이다. 즉 諸相을 원천적인 부족한 관점으로 보아 내가 이렇게 회생해줌으로 인해서 너희가 멀쩡하게 생을 유지할수 있게 됐다는 것이니 이 얼마나 꼴불견 논리인가? 그러므로 일체의 장애적이거나 병폐적인 것을 업장 응보적 관점으로 보는 것을 치우친 견해라 해서 배격하고 먼저 회생적인 관점 은혜 덕을 베푼 관점으로 본다는 것이니 저 꼽사등이는 전세에 남 등 꼬부라진 것을 대신 (회생해서 펴줬다는 표현을) 위했다는 표현이 그렇게 지어져 나타나 뵈 였다는 것이다. 즉 이런 뜻이다. 쉽게 말해서 西何人[서하인]이 형틀에에 메달려 있는 것은 사람의 원죄를 대신 사함받기 위해서 회생되었다는 논리이다. 그래서 그것을 내보이고 사람들의 정신 감관에 자극시켜 주입 시키기 위하여 저렇게 십자가를 숭상하는 표시로 삼는등 그에다 몰골 험악한 사람에 모습을 메달은 것을 내보여 믿음의 주체로 이끄는 방식을 삼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근원의 허물이 있다는 것이니 허물이 있다는 것은 무슨 과오(지나침)나 부족 불충한데서 비롯되는 것을 갖고 논하는 것인데 천지만물 및 인간이 무슨 원천적인 잘못이 있단 말이 인가? 있다면 다윈의 진화론을 따른다면 아직 덜 깨여서 그렇다 할 것이니 그 덜 깨인 것이 어찌 귀신속셈에 탈잡힐 일이란 말인가? 이것은 마치 갓난 어린애 터러 너왜 빨리 어른되어 일하지 않느냐는 뜻의 어거지 떼쓰는 것일 뿐인 것이다. 일체의 理想 귀신논리가 다 쓰잘데 없는 것으로서 사람에 심금을 후벼파서 병들게 하거나 황폐화시키는 없는 마귀의 꼬득임 같음인 것이니 일체 신용할게 없다할 것이다. 아니면 또 다른 뜻의 곡해할 소지가 있는 오류가 나오니 모든 걸 다 망가트리고 쑥대밭 만들거나 썩고 부패의 소지가 있는 것이 그 이전에 누굴 도와준 표현을 그렇게 짓는 것이라 할 것 아닌가? 그래서 누굴 패죽여도 그것은 누굴 전세에 살려줬다는 표현을 저- 맞아 죽은자가 지금 저렇게 하고 있는 것이라 해도 그 말이 궤변 같지만 사리에 당연히 맞는다할 것 아닌가? 또한 그래서 악성을 갖고 패죽이는 자의 합리성을 갖게 대변하는 것이 된다 할 것 아닌가? (*즉 나는 저-맞아 죽는자 그자의 보살행윌 하길 원해 福(복)을 짓는데 두들겨 패주는 일꺼리 분담 역할을 맡아 一助[일조]를 한 것이 되므로 나도 역시 보살의 반열에 설 수 있다. 이런 뜻) 하인의 생각이 꼭 그런 대로만 돌아간다 할게 아니라 사실이 그렇 잖는가 이말 이다. 마귀 말씀은 마귀란 뜻이 나쁘다는 인식을 줘 오히려 솔직해서 사람의心[심]을 치유하고, 일체의 좋다는 명분이나 명칭 및 그에서 비롯되는 甘言[감언]이나 甘想[감상]이나 甘行[감행]은 僞善的(위선적)이고 可憎(가증)스러운 것이니 하나도 신용할게 없다 할 것이다. 오직 아무렇게나 지껄여대는 아무러크소니의 말씀만이 허심탄회하니 위대하고 신용할만 하다할 것이다. *무엇이 절대적 가치가있어 절대자를 논한단 말인가? 절대자 운운 해가면서 그자의 명령을 듣지 않해서 사람이 원천적인 허물이 원래 있다하니 이것이 또한 성립되지 않는 논리이니 전지전능 무소불위 절대자라면 제명령듣는 자로하면 안될게 뭐가 있겠는가? 소위 제명령 들어서 허물이 있다는 것이나 제명령 듣지 않해서 허물이 있다는 것이나 어느것이 절대자의 뜻에 합리성에 부합되는 말일가? 이런 나의 물음요지이다. 또 절대자라면 하필이면 가련하고 불구장애적인 것만을 부각시켜 제 모습이라 할게 뭐가 있겠는가 그래서 그런자를 대접하면 저를 대접한 걸로 된다면 이것은 순다지 세상이 병신 불구 장애 天地가 우월하다는 논리가 나오지 않겠는가? 내 뜻은 그런 뜻이다. 또한 그렇다면 벌 나비가 아름답고 향기 나는 꽃을 갖고 맞아들일려 한다면 악마 사탄을 맞이 할려 드는 꼴로 여길 것 아닌가? 뒷논리 말고 앞논리 대로라면 그것은 사람에 심금을 후벼파려 드려는 귀신 우롱논리요 하등에 가치가 없는 논리이니 오직 슬픔이 일어나게 하는 논리는 선한 모습의 탈을 쓴 악마 사탄에 논리요, 화려함을 쫒고 맛있는 것을 동경해서 쫓는理想[리상]이 참으로 世人(세인)의 심신을 즐겁게 하는 논리로서 推仰(추앙)받고 신앙할만한 논리라 할 것이다. [[ * 선악 시비 논리는 그 모다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부려 쳐먹기 위해서 나약한 심상들을 이용하려 꼬득이기 위해서 만들어낸 논리로서 사람들의 심상에 대하여 공갈하고 협박을 가하기 위한 하나의 동원된 수단의 논리라 그 하나도 추종할게 없다는 것이라 오직 힘을 배양하는 데에만 모든 사람들은 몰두해야 한다할 것이다 所以(소이) 呵責(가책) 받는 심상을 각인시키기 위해선 그리하여선 저들의 주구로 부려 먹기 위해서 그래 그 적자생존 논리에 반하는 말도 안돼는 논리를 씨브렁 거린 것이라 그에 얽메일 필요가 없고 오직 악다구니로 도전의식을 갖고 그 승리를 쟁취 해서만이 인간의 복된 삶이 보장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심상에 죄의식을 심어줌으로 인해서 저가 부려 쳐먹기 용이하겠음으로 덜돼먹은 그딴 선악 흑백 시비 논리를 들고 나서는 것이라 이래 쇠뇌 의식화가 사람의 심상을 황폐화 시킨다는 것이라 그 관점을 어디다 두느냐인데 깃겁게 할 것도 모다 죄의식을 심어주는 것으로 둔갑 질 할 수도 있고 죄의식을 들게하는 것도 얼마던지 정당시 미화하여선 사람의 마음을 환희 스럽게 할 것이라 그 관점을 어디다 두느냐에 달린 것이란 것이다 肉食(육식)을 하는데 이것을 살생으로 보느냐 아님 그 해탈 맛을 보이는 것으로 觀(관)하느야에 따라서 그 犬羊之差異(견양지차이)의 心狀(심상)이 刻印(각인)된다는 것이라 마땅히 사람의 마음상에서 어두운 구석이 존재치 않게 하는 것이 참다운 가르침이라 할 것이니 설령 처녀를 사통하고 사람을 서로가 함정에 밀어 넣는 행위를 짓는다해도 그것은 얼마던지 좋게 미화 변재 될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소한데는 얽메여선 선악시비를 논하지만 전장마당에 숫한 죽음에 대해선 그 선악이란 논리 比對(비대)를 끽소리 한마디 못한다 이러니 얼마나 편파성을 띈 논리를 갖고 떠벌이는 것인 줄 을 알 것이다 ]] (*혹 반대시각을 갖는 자가 있어 그것은 그런 게 아니라 은혜를 베풀어 사랑을 받아보겠다는 입장에서 자기를 낮춰 행하는 大德(대덕) 普施(보시)의 行事(행사)의 한=(壹)것일뿐 꼭 그렇게 斜視的(사시적)인 관점을 갖을 필요는 없다고 한다. 세상에서 소외된 부분들을 찾아 돌봐주거나 앞면으로 나서게하여 용기를 북돋는 것이고 있어야될 이유를 알리는 것이지 그대 처럼 원천적으로 그런 것을 조장시키려 드는 것은 아니라 한다. 왜냐하면 어느 일방만이 완전한 성립체로 보기엔 흡족치 않다는 것이니 수수거래 來(래)往(왕)은 마음에 안위를 찾는등 願[원]의 渴求[갈구]에 대한 適答[적답]을 위해하는 것인데 누가 누구를 위하는 것이냐는 의문이 나오니 즉 누가 누구를 위한바 없고 저마다 자기 원의 답을 찾아 세우는 모습이 그런 모양이라는 것이다 주는 자만 하늘 또는 부처가 아니요 받는 자만 또한 그렇다고 부처 또는 하늘이 아니란 것이니 전체주의 사상 같으나 어떤 한 모양에 합하는 것을 구하는 것은 아니라 할 것이다.) 즉 일체의 심상을 나쁘게 하는 사상이나 주의나 논리는 사라져라이다. 이반면 기쁘고 즐겁고 아름다운 것 맛있는 것은 하염없이 싫증 안내게 시리 생겨나라이다. 일체의 불충분한 상은 내 눈앞에서 꺼져 버려라이다. 길딲아 노으면 문둥이 부텀 지나가지 말고 대통령 부텀 지나 가라이다. 혓바닥 널름거리는 大 [대망]의 계집년 머리카락 여기저기 널려져있어 나뒹구는 것은 내 눈앞에서 보이지 말라이다. 일체의 혐오스런 것은 좋은 명분(*일예로=하나님)의 탈을 쓴 악마가 뿌린 象[상]이니 사라져라이다. 오직 꾀꼬리 날고 철쭉꽃 피어나라이다. 그리고 쾌락을 위하여 저 가련하게 보이는 토끼를 흉칙하게 찔러 죽여보자 이다. 그 쾌감을 위하여 저주의 눈초리로 보는 것을 즐겨 보자이다 그저 똥개를 마구 두들겨 패 보자이다. 그 깨갱깽 거리는 소리를 듣길 즐겨 보자이다. 스트레스 해소 차원만 아니라 악성을 돋구어 그 악성이 어떻게 광적으로 나대는지 충동질 해보자이다. 사자가 맛있는 고기를 이를 앙시물고 뜯듯 잡아먹어 보자이다. 버마 아웅산에서 범 아가리에 들어간 것이 되어서 범이 아웅(어-흥)하듯 해서 많이 잡아먹어 보자이다. (*이것이 국기를 뒤흔들어 헐뜯는 말이라 할지 모르겠으나 당시의 군의 구테타 세력들이 정권을 잡고 어떻게든 잘 해보려는 한 일과속에 들떨어지게 대처해서 발생한 나라의 동량 인재만 회생시킨 결과를 가져온 일이라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도 원이 풀리지 않으면 지친 듯 주저 않아 쉬어보자 이다 그리고 난다음 다른 소일거릴 찾아 보자이다. 저-비싼 애지중지하는 고려청자를 깨트려 보자 이다. 아주 악질적으로 나대보자 흉악하게 생긴 강도가 칼을 들고 찌러올제 살려 줍샤 싹싹 빌어 보자이다 아니면 대어들어 죽든 살든 혈투해서 네가 센지 내가센지 자웅을 결해서 결판을 내보자이다. 그강도가 그래도 용서를 해주지 않고 흉폭한 모습으로 칼을 찔러오면 으윽- 하던가 꽤액- 하던가 해서 일그러지고 뒤틀린 몰골을 해가지고 죽어 보자이다. 그리곤 산발 피칠한 귀신이 되어 가지곤 시뻘건 손톱을 길게 해 가지곤 이히힝- 너 잡아먹자 해 보자 이다. 이렇게해도 원과 원한은 풀리지 않는다 할 것이다. 그리곤 소중한 물건에다 오물칠 똥칠을 마구 해보자 이렇게 해서 억눌렸던 마음을 내보여보자 일체의 하지 말라는 극기사항은 마음을 억눌렀던 무거운 돌추 꼭채운 족쇄 이것을 다이나마아트로 폭파해 치우고 그 마음이란 것의 참모습을 보자 (*그렇다고 아무러크소니의 깨침을 주겠다는 말씀을 범죄를 부추기는 말로 해석하면 안될 것이다) 대체로 마음이란게 어떻게 생겼는가 말이다. 가증스럽게 위선을 떠는 껍질을 나무 껍질 벗기듯 벗겨 치우자 그러면 그 속엔 밤송이 속에 잘 여물은 밤알처럼 마음이란 게 들어있을지 모르리라. 아주 맛이 고소한 게 말이다. *사람에 마음은 성악도 성선도 아니다 촉감받은 외부반영 刻印(*佛家에선 이를 갖다 有漏(유루) 種子(종자)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에 의해 思量(사량)함으로서 그 動搖(동요)가 일어 파도가 일렁이듯 나타내 보일 뿐인 것이다. *두뇌란 됫박에 각인종자 콩알, 손으로 이리 고르고 저리 헤집듯 굴리어 서로가 잘 조화있게 썪어 그 생긴 형태를 내보이듯 여러 刻印[각인]된걸 갖고 고르게 섞어 생각을 만두빚듯 빚어 내는 것이다. 점을 연결하면 線(선)이 되듯 각인된 覺[각]의 種子[종자]를 연결 늘어놓아 思量線[사량선]이 성립되고 그 累積(누적)은 면적이나 입체성을 띄어 갖은 象[상]을 다그려 나타내는 것이 곧 상념 相[상]으로서 천지 만물 우주의 생김象[상]이라 할 것이다. *생각을 그렇게 일으키게 하는 존재는 무엇인가?....마음인가?.... *마음이란 무엇인가? (*成心 一切皆苦[성심일체고])=즉 일체 다 苦(고)로 이루어진 것인가?. 一切皆苦[일체개고]로 이루어 졌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苦[고]란 소위 입력시스템에 들어가 일체 입력되는 情報[정보]를 갖다 苦[고]라 할 수 있는데 입력시스템이란 또 뭔가? 有(유)이던 無(무)이던 實(실)이던 虛(허)이던 空(공)이란 器[기]이다 이 器(기)에 담기는 여러 각인된 정보종자 매채를 갖다 苦(고)라 할 것이다. 佛氏[불씨]는 이것을 고통의 맺힘으로 보았는지 알 수 없다. *정보란 또 뭣인가? (*自他[자타]란 것에서 얻어냈든 않 냈든) 뜻의 凝固(어려 엉김)를 말함인 것이다 또 뜻이란 뭣 인가? 意向處[의향처]를 말한다 의향처는 뭣인가? 마음이 짚히는 것을 말한다 마음이 짚힌다는 것은 그리로 짐이 쏠리고 기우는 것을 뜻한다 그리로 짐이 기운다는 것은 그릇에 골수가 무언가 짓기 위하여 편벽되게 한쪽으로 기우는 것을 뜻한다 소위 뜻이란 어떤 상을 그려 짓기 위하여 골수가 이리저리 움직임에 불과 하다는 것이다 또 골수란 무언가? 그릇에 담긴 빈곳 또는 實(실)한 것의 새김 새기지 않는것의 覺露[각로] 즉 象[상]을 그려짓는 테잎을 이루는 點[점]의 연결흐름 原素[원소]와 같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주생성 이치로서 아무러크소니 오십육억론 및 왜그런가장을 읽어봐야 대충 안다할 것이다. *여기서 그릇을 말하였는데 그릇의 實體[실체]는 무엇인가? 所謂[소위] 虛實[허실] 空有[공유]라는 것인데 그 虛空[공허]의 그릇은 實[실]한 것이요 담긴 것은 實虛[실허]한 事物[사물]이요 實[실]한 事物[사물]의 그릇은 허공이요 허공에 담긴 것은 일체를 지칭하는 허실의 사물이라는 것이다. 소위 이것은 저것의 그릇이 되고 저것은 이것의 그릇 또는 다른 것으로 발전 연계 전개되어 간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마음의 생김상이나 그형성 형태 및 과정을 일편 그렇치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조명하여 장황하게 늘어 나봤다. *우주 삼라만라상이 왜저렇게 생겨 있나의 논함에서 그것은 마음이란게 불어내어서 있다하나 대체로 마음이란게 어느 곳으로 불어 냇단 말인가? 그것은 마음이란 게 불어내서 있는 게 아니요 마음이란 그릇 속에 있음을 어떤 표현작자가 심상으론 깨닷고 있지만 적절한 표현방식을 구사치 못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요 마음의 내재속에 있을 뿐인 것이다 저 나무가 눈이 있어 사계절을 볼 것이며 저 꽃이 눈이 있어 벌의 기호를 알 것인가 오직 마음이란 空感[공감]을 갖고 깨달아서 눈으로 들여다 보는 것보다 더 확실하고 자세하게 앎인 것이니 일체의 모든 사물형태가 다 그렇게해서 자기존재의미를 아는 것이며 세상의 성립상태를 주지케 되는 것이다. 즉 마음속에 모든 사물은 존재하는 것이다. 마음이란 것이 여러개의 개체의 몸 껍질탈을 뒤집어 쓰고 마음속에 있는 것이 곧 우주삼라만상인 것이다. 그마음이란 걸 혹자는 空이라 할지 모르고 또 혹자는 絶對 作者[절대 작자]라 할지 모르나 마음이란 마음 일 뿐이요 어떤 理想(이상)의 주체로 둔갑 될수 있는 것은 아니니 거짓 꼬득임에 속지 말아 야 할것인 것이다.(*따라서 心感=空感 否定空感[심감= 공감 부정공감]일수도 있음)(*또한 마음이 내외가 어디 있겠는가? 사람이 생각을 지어 가르는 [분별]말로 표현하다보니 그렇게도 말해 보는 것이지.....) *마음이 그렇게 생겨 있으니 그러한 상을 짓는 것이요 즉 겉과 속이 같거나 다르거나 그 아니거나 등 여러 상을 짓는 것이요 그렇게 생겨 있지 않다면 어찌 그러한 못마땅하다거나 마땅하다거나 하는 상을 우그려 짓겠는가? 이 말이다. *마음밖에 원천적인 外部(외부)가 있을수 없고 따라서 외부 反影(반영)이라하는 것도 마음속에 일어나는 그림자를 그렇게 표현한 것일 뿐이요 마음 어느 한구석에 세워놓고 그것을 외부라하고 외부에 비춰진 그림자라 하는 것이요 별도에 외부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니 촉감이란 것도 그 스스로 마음속에 일어난 것을 같다 촉감해 본다 하는 것이요 그로한 각인된 종자로 사량함 또한 마음속에서 함인 것이니 일체가 다 마음을 벗어나선 존재할수 없는 것이니 마음이 곧 우주인 것이다. 그렇담 그 마음이란 것이 실체적이고 고정되어 있어 저것만이 마음이라 할 수 있는 것인가? 마음이란 꼭 굳이 그렇치 만도 않으니 묶여있는 게 아니라서 변덕이 죽끌 듯 하는 것인지 모름이라 꼭 그것 만이라 꺼내 보일 수 없는 것인 것이다. 저 풀잎에 궁굴르는 아침이슬이 마음이란 것인가? 저 빨래줄에 맺힌 빗물 방울이 마음이란 것인가? 마음이란 그렇게 보기에 투명하다하는 것인가? 아니면 저 담벼락이나 암흑의 동굴 같은 것인가? 아니면 볼수도 쥘수도 들을수도 없는 것인가? 의문에 의문만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할 것이다. *성인이 지극히 평범한 기우는 말씀으로 지극히 기울지 않는 뜻의 가르침을 배우는 자를 위하여 말씀하셨으니 즉 壹 二 乘的 多乘的[일 이승적 다승적] 비례 관계를 늘어 놓아 無乘[무승]에 근접하려는 논리를 설파 또는 무유승 허실승에 가까운 논리를(*가르침을)말씀하시려 드신 것이다. (* 여기서 또 승이란 말을 하였는데 그 승이란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 乘[승]이란? 중생을 태워서 생사고해에서 벗어나게하여 涅槃[열반]의 세계로 이끈다는 말뜻인데 그럴려면 무엇을 어떻게 올라타야 하는 의문이 제기 된다할 것이다. 소위 올라탄다는 것은 發性覺[발성각]을 올라탄다는 뜻이니 깨달음의 粒子 種子[입자 종자]로 형성된 實相象體[실상상체]를 올라 탄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서 생각으로 그려 허물탈 집을 짓게 되는데 馬[마]이나 수레 구름등 따위상을 들어 타는 것을 그려 올라탄다 고도 할수 있다 할 것이다 飛上[비상] 즉 나른다는 뜻도 약간 통하는 면이 있을 것이다 즉 깨우침을 올라탄다 정신영역이 확 트였다는 뜻이다. 思慮[사려]나 그로 아니한 것이나 얻은 깨침을 갖다 올라탐을 뜻하는 뜻이라 할 것이다. 또 여기서 그뜻이 연결될는지 안될런지는 모르지만 昇華[승화]의 관점으로 해석한다면 이말은 사전에 보면 정신영역의 용어로서 무의식적인 性的[성적] 에너지가 예술적 활동 종교적 활동 등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활동으로 전환되는 것을 말한다하였고 또 물사의 영역에선 어떤 현상이 더욱 높은상태로 돌입하는 것을 말한다하였는데. 이를 물사와 정신영역을 접목시켜 말해본다면 깨침의 단계가 어느 한고비를 넘겨 무르익어 곰삭었다는 뜻 환골탈태하듯 변모한 모습을 가르키기도 한다할 것이다. 또 勝(승)이란 보다 낳거나 눌러 제압하는 것이나 겨루어서 이기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할 것이다. ) 내가 다분히 성인의 가르침을 비방 헐뜯을려는 것만이 아니라 차근히 살펴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렇다는 것이니 소위 諸樣相[제양상]을 뜻하는 것이나 제양상을 뜻하지 않는 것이거나 등 兩端(양단) 또는 無無量(무량) 牙角[아각] 端(단)을 들어 비교케 하여서 비교아닌 것 비교할 것 없는 것에 도달케 함인 것이니 따지고 보면 가르침에 모순 말씀에 모순 뜻에 모순을 갖고 모순 아닌걸 설파하려 들었다 할 것이다. 그 말씀이 극히 편벽되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편벽된 모양으을 그려 진행해가면서 편벽아닌걸 가르키려 들었으니 그 곤혹함이야 말로, 글 말뜻으로 다 표현치 못한다 할 것이다. 세상에 空[공]을 추구한다 해놓고 여러 치우치는 말을 들어 가르치려 들었으니 번복되는 과정이 연속적으로 계속일어 날 수밖에 더 있겠는가? 즉 이뤘으면 걸려서 空(공)아닌 것이 되므로 금새 이뤘다간 곧 파괴하는 말씀을 아니 할 수 없게 되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말씀이 길게 늘어 나고 했던 과정을 되풀이 하는 경향이 있게되고 역겹게만 느껴지게 하여 극기의 한계를 보고자함에 도달케 함인 것이다. 즉 아궁이의 불이 언제까지나 더 세게 탈 것인가? 내 궁둥이가 다 탈망정 나는 일어나지 않으리라를 보려 드는 것과 같다할 것이다. 즉 忍耐[인내]의 한계 의 겨룸에서 승리한자가 곧 大聖覺者[대성각자]란 뜻이 나온다할 것이다. 즉 이와같이 하여 어느 목적한 경지에 드는 것을 보려 하였던 것이다. *구슬은 좋은 것이나 그보다 더 좋은 것 있다는 것은 편벽된 논리로서 이와 같은 논리로서 평한 가르침을 준다하면 더 좋다는 것이 기울지 않는 평한 가치가 있을까 이다. 평한 것이 아니라 기울다 못해 수직적인 것이 될 것이다. 꼬챙이를 세워놓는 논리는 그외는 평이 혹 될 수 있는 것이 있을지 몰라 그것을 가르키기 위하여 그렇게 세웠다면 혹 평의 뜻이 될진 모르나 그 꼬챙이 자체로는 수직적인 꼬챙이지 평이라 할 순 없다. *선생이란 것을 가르키기 위해서 제자가 있다 그러므로 선생을 가르키기위한 제자이니 그 또한 선생이란 논리가 나온다는 뜻이다. 즉 오른 것을 가르키기 위한 '그른 것은' 오른 것이란 뜻이다. *위한다는 것은 보살 성향이요 佛體(불체)를 이루게하는 것이니 解脫(해탈) 引導者(인도자) 濟度者(제도자)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논리이면 수직적인 꼬챙이도 수평의 막대라 할 것이다. * 諸樣相(제양상)속엔 시간감 이라는 것도 있다 이것이 중요하니 사람들은 혹 이것을 등한이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시간성향은 가르침에서 중요한 자리메김을 하고 있다 제양상에 머물지 말라는 것은 이 시간감이라는 것도 염두에 두지 말라는 것이니 계속 궁구 깊이 파고든다면 시간이라는 것은 원래 없다에 도달하는 생각의 길이 열릴수도 있다 할 것이다 이것은 치우친 견해 佛(불)氏(씨) 말을 잘못해석 한 諸法斷滅(제법단멸)로 본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제법단멸상 아닌 것으로 본다면 그 안엔 제법단멸로 볼 수 있는 게 있는 법 즉 그것만이란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닌 것이 제법단멸이 아닌 한편으로도 볼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간감이 없는 걸로 본다면 석존의 가르침을 볼진데 부처는 시간에 의해 흘러 래왕하는 것이 아닌 게 되므로 부처님은 항상 존재하는 것이되니 저기 절에 계시는 부처상은 이제나 저제나가 없으니 연등불전에 서 연등불이 수기하길 너는 내세에 부처가 된다 수기하셨다하는데 지금 저렇게 계시는 것이 곧 연등불께서 수기하는 모습이요 연등불이란 저 전등 불빛이나 일체 볼 수 있게 느낄수 있게 하는 感性向[감성향]에 것이란 뜻이요 또한 연등불께서 어디 따로 계신다는 뜻은 아닌 것이라 할 것이다. 이것이 마음에서 일어나 마음에 비춰 보는 방식이니 부처가 어느것 어느곳에나 어떤 형태로 던지 있다면 있는 것이요 그것을 가르침을 받는 중생의 위치로 놓고 본다면 또한 그렇게도 보일수 있는 문제인 것이니 마음의 짚힘에 있다는 것이다. *끝에가선 말하길 어떻게 청중에게 연설하는가? 불퇴전에 용기를 가져라다. 모든 것이란 한낫 별 것 아닌 것이니 겁내지 말라는 것이다 베옺 입고도 허리를 꼿꼿히 펴서 비단옺 입은자와 마주서서 말한 자는 공자 제자 子路(자로)였고, 釋尊(석존)은 일체 것이 그림자 거품등과 같은 것이니 눈망울 바라봄을 두려워 떨지 말라는 것이니 한 낫 지프라기 세워 논 것 정도로 여기라는 것이다 이것이 해탈을 갈구하는 중생 아닌 중생들을 대하여 겁먹지 않고 연설하는 자세라는 것이다. * 중생은 없나니 세상에 부처들이여 아라한이 되었으면 일체 꼬득이는 감언이설 하지를 말거라 또 감언이설상을 세상이라 하지를 말라 또 너들이 중생이라 스스로 전락하고 유혹 감언이설에 도취되지 말것이다 *석경 한구절의 감상 평론. *釋弟의 말로는 물질은 말할 것도 없고 그영혼 까지도 분해되듯 흩어져서 영원한것은은 없다 했는데 이에 대해서 느낀바 의문 나는 점 있어 한말씀 하고자 한다. 영혼까지도 흩어진다면 지금 그 영혼은 물질처럼 흩어져서 사방으로 흩어졌다할 것이다. 또 영혼이란 무엇인가 ? 귀신의 종류이던가 그 뭉친 덩어리던가 아님 유령종류 신령종류나, 얼 결이 베여 숨쉬는 것 등등 정신적 感象으로써, 어떠한 물질적 감각에의해서 느껴 지는 것은 아니라 할 것이다.(*물론 物質象이 영혼을 배제하곤 성립될수 없다 하지만 그 물감적인 것을 육감의 차원 일수도 있는 영혼감이라곤 하기엔 거리가 좀 있지 않을까 이다.)앞서 말했듯이 모든 것은 영원한 것은 없다 했다 그렇다면 그 흩어진 것은 영원하겠는가? 언젠가는 다시 원인이나 여건이 조성되면 긁어 모여 다시 뭉칠 것 아닌가? 하는게 내 의문에 요지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영혼 또한 그러한 수순에 의해 긁어 모이지 않을 까 이다 그러므로 영혼이 흩어 졑다 하등에 근심하거나 무슨 병폐 잡을게 없다 할 것이다 이를테면 여기 금 덩어리가 있다 이것을 분해하여 사방으로 흩었다면 그 금을 긁어모으는 방식을 취한다면 금은 다시 모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 방식이란 무언가? 사람들은 금을 채취할 때 여러 가지방법을 동원하는데 그중 한예로 사금의 채취라면 당연히 물에서 모래를 일어 금을 채취하게되는데 그 뭉치게하는 것은 수은이란 또 하나의 광 물질을 택하여 하게 된다 그렇다면 흩어진 영혼을 긁어 모을려면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모든 인식 성향에 것이나 감상에 성향은 그 감상케하는 주체 성향이라는 게 있다 즉 색으로 논할진데 색이란 보는 것의 주체성향이라는 것이다 즉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한 빛갈을 띄는 성향의 것은 그 한 빛갈을 긁어모으는 어떠한 방법을 택한다면 긁어 모으게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의 취합도 그 긁어모으는 방법이 있다면 그 방법을 택해 긁어 모은 다면 흩어 졑던 영혼은 취합하게 된다는 논리이다. 대체로 그 방법이란 무언가?. 모든 사물상 및 영혼은 저가 그러했다는 것을 또는 저가 그렇다는 것을 주지시키는 감식성향이 있다 그것은 곧 그것의 그것을 현상시키는 업적 행적과 같다 바로 그런 것이란 것이다 즉 영혼이 흩어졑다는 것은 바로 이 業績(업적)이나 행적의 자취가 퇴색되거나 멀어져가 아득히 묘연해져 사라졌다는 뜻이니 그 업적이나 행적을 다시 찿아 세우면 그 흩어졑던 영혼은 다시 취합하게 된다는 논리이다. 어떻게 찾아 세우는가? 이것이 방법론이라는 것이니 무슨 물질적인 것으로도 한다 하지만 마음이나 정신적으로 도 찾아 세울수 있다할 것이니 사람등이 생각을 그리는데로 쫓아 영혼은 긁어 모이고 원상회복을 하게 된다할 것이다. (*마음과 정신 영역은 흩어진 금을 긁어 모으는 수은과 같다.) 즉 思量하는곳으로 쫓아 흩어졌던 영혼은 다시 일어나게 된다는 논리이다 무너진 예전 저 바위의 영혼을 복원한다면 생각을 생산해 낼수 있는(*창출해 낼 수 있는 주체) 주체(*사람등=사람만이 생각을 한다할 수 없다 일예로 저 나무는 생존을 위하여 춘추를 思量한다. 한다면 그 또한 생각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등이 그 영혼을 머리등(*다른 물사는 그 형태가 머리 아닐 수도 있음)에서 그림으로부터라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떠한 사람의 영혼도 구천에 흩어져 내라할게 없이되었다 하더라도 그가 남긴 자취 업적과 행적이 있다면 얼마던지 그 영혼을 복원 시킬수 있다는 단계에까지 나아간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 영혼이 흩어진걸 하나도 근심할게 없고 모든게 영원한게 하나도 없다는 말에 병탈이 잡혀 영혼이 흩어지면 어떻게하나.... 하는 우려는 떨쳐버린 게 된다는 것이다. *또 연금술이란 말이 있다 여건에 의해 본질의 변형이나 환태되어 엉뚱한 성향을 띌수 있듯이 이처럼 금 아닌게 금일수도 있게됨이라 그래서 영혼 아닌 것도 영혼으로 환태될수 있다는 논리가 나온다 모든 감지성향이 다 그렇다면 물사와 영혼이란 것을 구분할 필요가 없다할 것이다 저 감나무는 과거의 돼지의 영혼이었고 지금도 돼지의 영혼일수도 있는 문제이요 지금하인은 옛 어느 낫다하는 일체 모든 성현이나 그대변이라면 대변일수도 있는 싯탈타와 그이전 이후의 모든 각성 성향의 것이거나 마귀사탄 중생이었다 해도 말이 된다 할 것이다.... 저들이 지금 말하는 것은 사람에 마음을 속시원하게 치유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근심되게 하여 병들게 하는데 속셈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할 것이다 그래서 병들은 마음으로 병귀 해탈을 시키겠다는 것이다. 즉 오르게 말하는 것처럼 보여도 모다 중생을 병들게 하는 가르침이요 오직 이 아무러크소니의 아무렇게나 해되는 말씀이 고뇌에찬 제양상의 중생들을 멸도 시키는 말 씀이라 할것 이니 모두 이 何人의 말 씀을 들어 야 해탈을 할수 있다는 것이니 일체의 꼬득이는 말에 넘어가 물심을 빼앗기고 황폐화 당하지 말라는 것이다. 즉 저들이 말하는 것은 오른 것 같아도 오른 것이 아니요. 그른 것 같아도 그른 것이 아니니 시비를 어떠한 가르침에서 찿으려 할게 아니라 자신이 궁구해서 합리성을 띄게 해서 결정할 것이라는 것이니 똥은 떡이요 떡은 똥이란 것이다. 즉 모든 것을 삐뚤은 조명 고약한 심사를 내보여 뒤틀어놓는 것처럼 보여야만 제대로된 관찰을 할수 있을는지 모른다. 저는 실천 않으면서 주둥아리로만 살아 나블거리면 이것은 남을 기만하여 무슨 영리를 취득하겠다는 장사아치의 고단수 수단 파는게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니 파는 자는 제 실리를 倍加하기위한 노력이라서 탈이 없다 할지 모르겠지만 정신팔려 넘어가는 자는 普施먹이의 道를넘어 바보껍질로 취급받아 쭉정이 해탈상을 뒤집어 쓰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의 감언이나 감행이란 것에 넘어 가지 말 것이니 산삼녹용의 보약성분 효력이 저 산삼 녹용이라고 가르치는 그물질에 있는게 아니라 내 심정에 있으니 한 낫 저 좋다는 것을 불쾌하거나 더러운 것으로 여기면 그렇게도 될 수있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제중생 세인들에게 권하노니 좋은 것은 나쁜 것으로 나쁘다하는 것은 좋은 것으로 보길 힘쓸 것이다 이렇게 심사 뒤틀려 비뚤은 것처럼 보이는 가르침을 주다. 내 심사를 그려 내보이라면 내 모습은 아이스크림 스크류바나 꽈배기 과자를 연상하면 될 것이다. *그 가르침이 衆生(중생)을 바르게 引導(인도)하는 것인가?. *깊이가 쪽색처럼 물들은 중생을 탈파 시키기 위해 극약 처방을 한다는 것이 모질고 악의에 찬 말로 엄포 공갈하여 되려 병들게 할 필요가 없다할 것이다. 그 쪽색 처럼 된 것도 일편의 탈파 방식에 속하지 아니한다 어찌 장담할 것인가 이 말이다. 하필 자기의 주장만 갖고 남을 물들여 파괴해 치울려 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절대법이지 무위법은 아닌 것이니 자가당착 모순에 빠진다 할 것이다. 일체의 겁주어 마음 여린자에게 공갈하는 듯 한 가르침에 말씀은 중생을 되려 병들게하는 것이지 모든 상을 여윈 참 보살 인도자라 할수 없을 것이다. 무슨 그렇게 마음에 꺼리는 게 많아 자신 없어 하는 말만 변명하듯 늘어 놓는가 한다면 자신 없어서만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 잖는가? 내 말은 그런 뜻이다 업보 응보 윤회설을 듣다보면 앞과 같은 생각이 돌수도 있는 문제라 할 것이니 못되고 험악한 뜻의 말만 들추어서 중생을 제도할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세상에 왜 까시만 있겠는가? 염증 안나는 감로나 꿀도 있는 것이다. 석존이 말하길 그 마음을 다치지 않게하고 좋은 길로 이끄는 자가 참으로 능력 있는 보살이라 목건련을 칭찬하는 말씀중에 있었다. 내가 본을 보여 저가 비꼬기에 앞서 참으로 우러나는 마음을 갖게할 순 없을 까? 내 생각은 그런 뜻이다 본을 보여 자발적인 마음을 일게 한다는 것은 보통성의가 아니곤 어렵다할 것이니 잘못하면 위선에 탈을 쓴 것으로도 보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혹은 그렇게 보여도 제도하기 위해선 아니하는 것보다 낳다 할는지 모른다 할 것이나 그렇게 하는 것은 위선의 모습도 함께 가르켜 주는 결과라 할 것이다. 소위 위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잘하지 못하는 자가 비꼬아서 보는 관점에서 나온 말일수 도 있는 것이니 위선처럼 보여도 위선이 아닐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선은 없다에 도달 할수 있다 할 것이다 얘기의 본질이 변해 가는 것 같다 내가 말코자 하는 요지는 사람에 마음을 황폐화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언젠가는 겪어야 한다는 보복적 복수적 차원의 논리 전개가 업을 탈파시키는 뜻의 전부는 될 수 없고 그런 논리는 큰 가치를 부여 할 수 없는 전개 방식이라는 것이다 즉 생 양가죽 벗기는 논리는 극약처방이기에 앞서 일고에 가치도 없는 논리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뭣을 어떻게 한다면....하는 탕감논리 또한 정당화 논리라곤 할 순 없다 이것은 활빈당의 논리이니 도둑질하고 베풀면 정당화 될 수 있다는 과정을 무시하고 목적 만 중시한 논리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본다면 시건방지게 나서서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것은 참으로 꼴불견일수도 있는 문제요 相[상]을 여윈 제도란 진정 어려운 일이라 할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생활이 모다 전세의업을 벗는 것의 일과요 또 새로운 업을 짓는 것의 일과려니 생각한다면 별도로 튀게나대어서 모난 비평을 받는 것보다 낳으리라 그러므로 사회규범을 지키고 생을 위해 주어진 업무에 열심히 노력한다면 굳이 해탈을 위해 달리 모색할 필요가 없다 할 것이다. 석존께서 나는 불법승 일체가 되어 시간감을 떠난속의 僧弟[승제]의 일방도 되어 저 가람속에 있어 제 부처님 공양하느라고 하지 못하지만 若復有人[약부유인]은 시간감아닌 시간감속에 연꽃이 뿌리 내린것처럼 하고 있으니 어떠한 공덕으로 비유할 계제 꺼리 감이 아니라고 하시는 것만 같다. 꽃피고 열매 맺고를 거듭하니 온 세계를 여러 가지 모양華[화]로 덮을 것이니 어찌 나의 노력이 거기에 견쥬랴 하는 겸허의 말씀이시다. 去現未 三界[거현미 삼계]가 한군데 일군락을 지어 꽃처럼 피어 있으니 저 가람속의 밝히는 연등은 연등불이요 주위조성은 팔백사천만억 나유타 즉명제불이요 무공과자 승계는 경내를 거니는 화상 참선 염불하는 이로다. 사람으로 계속 태어나는 방법.어느한가지.. *하인이 휘미진 계곡길을 지나다가 사람들이 천렵을 나와서 伏(복)때라서 개를 잡아 먹는걸 보게 되었다 때마침 우연에 일치로 스님이 그곳을 지나다가 스치는말로 "쉬이- 쯧쯧 살생유택인데 개를 저렇게 잡아먹어서나 쓰나 나중에 후생에 개로 태어나서 고통을 받을려면 어쩔라고" 하면서 가신다 그래서 하인이 생각하길 그런 방법에 논리라면 내에겐 인간 탄생의 연중 쉬운 방법이 있다 생각했다. 만약 내가 世世(세세)生生(생생)토록 사람으로 태어나서 영달하길 원한다면 사람을 잡아먹으면 어떨까 하고, 모든 지어진 것은 영원한 것은 없다하니 뭣으,로 태어나던 부숴지고 없어질 것은 사실 아닌가? 그런데 뭐가 꺼릴게 있다고 자꾸 번복되는 죽음을 두려워 할 것인가? 내 말은 그런 요지다. 부처도 영원할 것 없고 어떠한 법상이나 그것만이 아니란 것도 영원할 것 없다 할 것인데 무엇에 두려워 여러 理想 을 펼치려 드는가 이 말이다. 여하한 형태던 보복성 논리라면 제위치로 돌아온다는 뜻인데 순간에 영화라도 누리는 사람으로 계속 태어나는 게 다른 것으로 태어나는 것보다 낳지 않을까 이다. 그러니까 사람으로 계속 태어날렴 사람을 많이 잡아먹는 게 사람으로 태어나는 길이 아닌가 이런 내 생각이다. 나는 너를 잡아먹으니 후생에 네밥이 되기 위해 또 사람으로 태어날 것이라는 것이다. 밥이 될땐 될 값이라도 우선 사람으로 태어나서 갖은 향락 누린 다음(*싯달타가 왕의 아들로 태어나서 갖은 향락누리고난다음 염증이나서 고상한 취미를 채택해서 즐기려든 게 바로 불법이라 하는 듯 이 보이는 것처럼) 잡아먹힌다면 맛보이는 해탈차원의 경계일 것이니 무슨 분한이 생길 것이면 무슨 원이 또 있겠는가? 이런 뜻이다. * 지금 그대의 처지가 전에 왕자로 갖은 향락 누렸었는데 그때도 이런말을 하였는지라 이제 그 말대로 修道(수도) 精進(정진) 속의 日課(일과)일수도 있는 逆境(역경) 속에 들어 있다한다면 또 그 말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할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