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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0. 묵상글 ( 부활 제6주간 금요일, - 기쁨의 원천.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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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0. 부활 제6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기쁨의 원천
성 아우구스티노는 “주님 안에서의 기쁨이 세상을 두고 누리는 기쁨에 승리를 거두게 하십시오.” 하고 권고합니다. 사실 “주님은 기쁨이십니다.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고 할지라도 주님은 언제나 기쁨이십니다. 하찮은 우리의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까롤로 까레또). 그러므로 기쁨이신 주님을 차지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예고를 듣고 근심에 싸인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16,2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보게 된다는 말씀은 곧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부활은 완전한 기쁨의 원천이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랑의 승리요, 사랑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슬픔은 얼마 가지 않아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받아들이기까지는 불안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악의 어둠에 죽고 거듭나는 일상의 삶을 통해서 부활의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활에서 도망가지 맙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포기하지 맙시다.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만이 우리를 계속 앞으로 나아가도록 이끕니다”(프란치스코 교황).
기쁨이 크다는 것은 그만큼 기쁨에 앞서 괴로움을 크게 겪었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 것에 맛 들이지 않고 주님을 희망하고 천상 것에 마음을 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실 주님을 갈망하면 처음에는 갈등이 생깁니다. 할 일도 많아집니다. 손해 보고 불이익을 당하는 것 같고, 괜한 일을 시작하였다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고달픈 생활입니다. 남들은 편히 사는데 사서 고생한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께 가까이 가면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 봄에 애써 씨 뿌린 사람만이 가을에 거둘 참 기쁨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신문에는 미국에서 ‘신부가 되겠다’는 말을 하였을 때 첫 번째로 듣는 얘기가 “너 제 정신이냐?” 는 물음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귀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결정이지만 세상 사람들은 얼마든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제정신으로 응답하는 사람이라야 성직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남모르는 기쁨에 흠뻑 취하게 됩니다. 참된 기쁨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영적 해산의 순간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고통을 외면하고 현실적 안락함을 추구하면 내적인 기쁨은 멀어지기 마련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고통이 깊은 사랑일수록 그 향기는 짙다.” 고 말하였습니다. 세상이 어려울수록 사랑의 향기를 내는 신앙인의 소명이 요구됩니다. 예수님을 차지하여 기쁨을 만드는 오늘이길 희망합니다.
“당신 말씀을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습니다”(예레15,16).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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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0.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신부님께서 5월 6일 강론글 말미에 아래와 같이 알려 주셨습니다.
- 앞으로 한 주간 강론을 올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또 죄송합니다.
다음 주 월요일이나 화요일부터 다시 올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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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쇠신부님의 말씀을 같은 전례시기에는
어떻게 묵상하고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 <성체경배 순례자>
23년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창조적 근심)
http://www.ofmkorea.org/526678
22년 부활 제6주간 금요일
(하느님 없는 기쁨과 두려움에 관하여)
http://www.ofmkorea.org/489202
20년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고통과 기쁨의 관계)
http://www.ofmkorea.org/353475
18년 부활 제6주간 금요일
(뺏기질 않을 기쁨)
http://www.ofmkorea.org/122107
17년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근심뿐인 근심은 하지 말지어다.)
http://www.ofmkorea.org/104216
16년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근심과 기쁨 사이에서)
15년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어둔 밤을 지나지 않는 새벽은 없다)
13년 부활 제6주간 금요일
(빼앗기지 않을 기쁨)
12년 부활 제6주간 금요일
(두려움의 속 내용)
11년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장강(長江)의 작은 일렁임처럼)
09년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싫지만)
08년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근심을 풀라)
===위 2020년도 강론글 옮깁니다.===
김레오나르도 2020.05.22 03:00
부활 6주 금요일-고통과 기쁨의 관계
"너희는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제가 너무 심하게 말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요즘 많은 사람이 기쁨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제게 많은 분이 그것이 도대체 무슨 말이냐,
기쁨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고,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하실 텐데 진정 그렇습니다. 기쁨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막상 기쁨을 추구하라고 하면 기쁨을 포기하기에
기쁨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제가 얘기한 것이고,
좋아하더라도 원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기쁨을 좋아하면서도 원하지는 않을까요?
그것은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얻으려면 고생스럽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고생스럽지 않고 얻을 수 없는 기쁨은 없다는 겁니다.
무릇 모든 기쁨은 고통을 전제하고, 수반합니다.
영어로 'No Pain, No Gain'이라는 말이 있지요.
고통 없이 얻는 것이 없다는 말인데 그런데 문제는
기쁨이 원하는 것을 얻을 때 오는 만족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쁨이란 원하는 것을 얻을 때 오는 만족감인데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어려움이나 고통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이고,
설사 어려움이나 고통 없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얻은 것은 그리 큰 기쁨이 되지 못하지요.
실로 기쁨은 고통과 정비례하는 거기 때문입니다.
내 집이 있기를 누구나 원하지만
그 원하는 집을 사달라고 하자마자 부모가 사준 부부와
누구의 도움 없이 부부가 10년을 고생고생하여 산 부부가 있다면
부모가 하루 만에 사준 부부보다 10년을 고생고생하여 산 부부가
더 기쁘고, 그 집을 산 것 때문에 더 행복하겠지요.
집이나 재물뿐 아니라 우리는 힘들게 원하던 대학에 합격했을 때,
원하던 승진을 힘들게 하거나 천신만고 끝에 박사학위를 땄을 때,
또 어찌 살지 몰라 어둠 속을 헤매다 인생의 큰 깨달음을 얻었을 때,
이런 때에도 그 어려움과 고통만큼 큰 기쁨을 얻을 수 있는데 그러나
고통을 싫어하는 사람은 사과를 먹고 싶지만, 나무에 올라가면서까지
따먹기는 싫어서 먹기를 포기하듯 고통스러운 기쁨들을 포기하고 맙니다.
그런데 이런 기쁨들을 포기하는 것보다도 더 안타까운 것이
바로 사랑의 기쁨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 있고, 사랑보다 더 원하는 것이 있습니까?
그런데도 요즘 사랑하기를 포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결혼을 포기하는 사람은 더 많고
사랑하는 사람 대신 반려동물과 사는 사람도 많지요.
사람을 사랑하고 반려 동물도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진짜 생명을 사랑하고 모든 존재를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사람 사랑하기를 그만 두고 반려 동물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쉬운 사랑만 하겠다는 거라고 해야겠지요.
또 이렇게도 얘기할 수 있습니다.
미워하는 사랑은 않겠다는 거라고 말입니다.
미워하면서도 사랑하는 고통이 싫어서 아예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니.
오늘 주님께서는 근심이 동반되는 기쁨을 포기하거나 뺏기지 말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진정 구더기 무서워서 장 담그는 것을
포기하는 우를 범하지는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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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0.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자연 상태에 있는 금붕어는 일평생 만여 개의 알을 낳습니다. 그렇다면 어항 속의 금붕어는 얼마의 알을 낳을까요? 모든 환경이 만족스러운 상태이기에 자연 상태의 금붕어보다 더 많이 알을 낳을 것 같지만, 자그마치 6~70%나 적은 삼사천 개의 알밖에 낳지 못합니다. 아무런 위험도 없고, 적당한 온도와 먹이도 풍부한 어항 속의 금붕어입니다. 그런데도 알은 오히려 적게 낳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항이 고통이라는 자연의 진리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수반하는 삶이 자연의 삶인데, 어항 속의 금붕어는 자연의 삶, 즉 삶의 실재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 점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어떤 상태를 원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자연 상태의 금붕어인가 아니면 어항 속의 금붕어입니까? 위협과 불안이라는 고통이 많다 하더라도 자연 상태의 금붕어가 되어야 합니다. 고통에 직면하는 그 순간은 괴롭고 힘들 수 있겠지만, 고통을 통해서 삶이 풍부해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오직 일등에게 관심을 두지만,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견디고 극복한 사람에게 관심을 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당연히 하느님께 관심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많은 이가 고통을 극복하기보다 쉽게 포기하고 좌절에 빠집니다. 이 고통을 하느님의 벌로 생각하고, 때로는 불공평한 하느님의 잘못된 행동이라며 불평불만을 합니다. 결국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면서 하느님의 관심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고통 속에 있다면 하느님의 반대편에 있다고 착각하는 분에게 성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병자와 고통받는 이들에게 하신 말씀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고통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수행하시는 구원 사업에 참여하는 것이기에 진정 가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복음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합니다. 주님께서는 해산의 고통과 기쁨을 말씀하시면서, 수난의 고통 다음에 오는 부활의 기쁨은 너무나도 클 것이며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영원한 기쁨이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듣고 제자들은 온갖 근심에 싸여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낙담과 걱정, 불안과 공포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자신을 견디고 극복한 사람에게 큰 관심을 갖고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모든 것은 하나의 과정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 안에서 주저앉는 것이 아닌, 과정을 지나가야 한다는 진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이런 믿음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큰 관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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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타인의 마음에 닿는 일이야말로 어쩌면 세상 가장 먼 곳까지 가 보는 일이다(박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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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0.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오늘날에는 아파하고 고통 받는 이들이 유난히도 많아 보입니다. 슬픔과 외로움에 지친 이들, 부당한 처사로 괴로움을 당하는 이들, 근심걱정과 절망에 빠진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누군들 슬픔에서 해방되고 싶지 않는 이가 있을까요? 누군들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 않는 이가 있을까요? 기쁨을 향해 달려가지 않으려 하는 이가 있을까요?
그런데, 대체 참된 기쁨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오늘날 세상의 슬픔과 고통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가장 깊이 공감하며 함께 아파하고 계신 프란치스코 교종의 권고문헌인 <복음의 기쁨> 제1항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줍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죄와 슬픔, 내적 공허와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참된 기쁨’을 예수님에게서 만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내 안에서’ 탄생되는 기쁨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제자들은 주님이 죽음에 처했을 때 슬퍼했지만, 그분께서 부활하신 것을 알자 그 슬픔은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제자들은 지금 신음하며 해산중입니다. 해산을 마치면 그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고통이 사라질 뿐만 아니라, 기쁨이 너무 커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고 하십니다. 그때에는 “슬픔이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이 기뻐하는 것은 한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서가 아니라, ‘자신의 아기’가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기쁨은 아기가 ‘내 안에서’ 태어나야 오는 기쁨입니다. 그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은 ‘내 안에서’ 이루어져야 됩니다. 그것은 내가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자신이 ‘새로 탄생하는 것’이 곧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그렇습니다. 부활이 ‘내 안에서’ 탄생하는 이 기쁨은 빼앗겨지지도, 빼앗겨 질 수도 없는 기쁨입니다. 사실, 내가 기쁨을 낳은 것이 아니라, 기쁨이 나를 낳은 것입니다. 이것야말로 바로 예수님께서 주신 ‘참된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예수님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임을, 죽음이 아니라 생명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고통 속에서도, 슬픔 속에서도 결코 기쁨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 속에서도 주님은 늘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항상 함께 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놓치지 않아야 할 일입니다. 스스로가 그 기쁨을 놓아버리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주님의 이 ‘사랑의 승리’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고별담화의 마지막을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주님!
저에게는 자랑할 것이 딱 한 가지 있습니다.
자랑하고 또 하고 또 해도 다하지 못할 자랑입니다.
방에 들라치면 먼저 들어와 있고
일어날라치면 내 안에서 먼저 일어나고
기도할라치면 이미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임의 사랑’입니다.
바로 이것이 저의 기쁨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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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0.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산보 길에 새소리를 듣는 것은 즐거움입니다. 이렇게 새들은 아침 일찍부터 하루를 노래로 시작합니다. 아침에 분주한 것은 새들만이 아니었습니다. 길가에 애벌레들이 느리지만 어디론가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애벌레들에게는 많은 위험이 있었습니다. 저처럼 산보를 가는 사람이 무심코 밟고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새들에게 아침 식사가 되기도 합니다. 며칠 전에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When faced with difficult situations, don't just hope for easy resolutions; instead, strive to make yourself stronger." 어떤 나비도 애벌레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나비가 될 수는 없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거친 애벌레들은 마침내 하늘을 나는 아름다운 나비가 될 것입니다. 나비가 된 애벌레는 다시 애벌레의 생활로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땅위를 기어 다니는 것과 하늘을 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삶이기 때문입니다. 아침 산보 길에 보는 애벌레들이 무사히 나비가 될 수 있기를 기원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형제님은 위암이 생겼고, 암은 여섯 군데의 장기로 전이가 되었습니다. 의사들도 3개월 시간이 남았다고 하면서 죽음을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형제님은 암을 극복해서 살고 싶은 의지가 강했습니다. 몸에 많은 의료장비를 달고 있으면서도 산보를 하였습니다. 형제님의 형님은 직업을 포기하고 동생을 위해서 이사 왔습니다. 그리고 동생을 정성껏 돌보았습니다. 신부님은 형제님을 찾아가서 고백성사를 드렸고, 함께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형제님의 건강을 위해서 정성껏 기도드렸습니다. 무덤에 묻혔던 나자로가 무덤을 덮었던 돌을 치우자 무덤에서 나왔던 것처럼 형제님의 갈망, 형님의 돌봄, 신부님의 기도가 함께하니 형제님을 덮었던 암이 치워졌고, 기적처럼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애벌레가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된 것처럼 형제님도 새롭게 변화되었습니다. 단순히 건강을 회복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변화되었습니다. 3년 동안 곁에서 도움을 주었던 형님에게 감사드린다고 합니다. 3년 동안 힘든 일을 참아 주었던 아내에게 감사드린다고 합니다. 건강을 회복할 수 있도록 은총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고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런 환시를 보았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 바오로 사도가 많은 위험과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겪었던 고난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유다인들에게 다섯 차례나 맞았습니다. 그리고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 돌질을 당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입니다. 밤낮 하루를 꼬박 깊은 바다에서 떠다니기도 하였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 늘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에게서 오는 위험, 이민족에게서 오는 위험, 고을에서 겪는 위험, 광야에서 겪는 위험, 바다에서 겪는 위험, 거짓 형제들 사이에서 겪는 위험이 뒤따랐습니다. 수고와 고생, 잦은 밤샘, 굶주림과 목마름, 잦은 결식, 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렸습니다. 그 밖의 것들은 제쳐 놓고서라도, 모든 교회에 대한 염려가 날마다 나를 짓누릅니다.” 애벌레가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된 것처럼 바오로 사도는 그런 많은 시련과 고난을 겪었지만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되었고, 천상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려움을 겪는다고 해서 낙심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그 어려움을 통해서 더욱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올리브 동산에서 그리고 나중에 십자가 위에서 조롱받으시고 버림받으시는 그 극심한 수난의 순간들을 묵상하면서, 이런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분의 마음에 드는 제자가 되려면 그분의 충고를 마음 깊이 새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망치로 벽에 못을 박는데 아무런 저항이 없으면, 거기에 무엇을 걸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우리가 희생을 통해서 단련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주님의 도구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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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0. 부활 제6주간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저의 지인 중에 낳아주신 어머니와 길러주신 어머니가 다른 분이 계십니다. 그분과 이야기하던 중 이런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낳아주신 어머니도, 길러주신 어머니도 사랑합니다. 두 분 모두 저 때문에 고통을 겪으셨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낳을 때 산고는 시작되고 기르면서 그 산고는 계속된다고 생각합니다.’ 묵상 글을 쓰면서 그분의 말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산고가 다가오면 근심에 싸인다고 합니다. 그리고 낳으면 기쁨으로 바뀐다고 말합니다.
‘근심에 싸인다.’ 무슨 근심에 싸이십니까?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무슨 근심에 싸일까? 우선 육체적인 고통에 근심하겠지요. 아프다고만 들었는데, 죽음과 같은 고통이라는데, 라고 하며 경험하지 못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단지 육체적인 근심만 있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또한 아이가 태어나면 해야 할 많은 일 때문에, 아기 때문에 포기해야 할 일들 때문에 근심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기쁜 것은 한 생명이 태어났기 때문에 기쁠 것입니다. 또 있습니다. 어머니가 되었다는 대에 대한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태어나는 것은 아기뿐만이 아니라 한 여인이 어머니로 태어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도 기쁨과 설렘이 있을 것입니다. 기대와 두려움은 항상 공존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이런 부분을 이렇게 말합니다. ‘이처럼 너희도 근심에 싸여 있다.’라고 말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하느님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신앙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이 길은 산고의 길과 같습니다. 신앙 때문에 겪어야 할 아픔과 고통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등지고 싶은 욕심과 유혹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이겨 내야지만 새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신앙의 길은 세례로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어집니다. 산고가 태어남과 기름으로 이어지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산고의 시간이 이어지고 이어지면 그러면서도 기대와 설렘과 사랑의 길을 걷다 보면 우리에게 태어남의 은총이 내릴 것입니다.
근심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근심이 우리를 약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하느님께 더 의지하고,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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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자신을 알라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참으로 좋은 충고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분석을 의미하는 말은 아닙니다.
한동안, 그리고 지금도 가끔 이렇게 서로에게 묻습니다.
MBTI 유형이 뭐예요?
자신의 유형을 이야기하면 그것으로 서로서로 분석합니다. 그리고 이내 쉽게 정의해 버립니다.
‘당신은 이런 사람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사람은 변합니다. 변하지 않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변하고 또 변하니까 사람입니다.
유형도 변합니다. 그러므로 유형은 그 사람에 대한 정의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이 변한 것에 대해 실망도 할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변하는 것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의 의미는 변하는 나를 잘 보살피고 안아주라는 말이 아닐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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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0.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늘 주님과 함께 하는 삶
기뻐하십시오!
“기쁨은 선물이자 발견이요, 선택이자 훈련이다”
가장 아름다운 5월 성모성월입니다. 수도원 곳곳에 무수히 만개한 하얀 이팝나무꽃들이 기쁨의 선물처럼 생각됩니다. '영원한 사랑'이란 이팝나무 꽃말도 멋집니다. 새삼 기쁨의 선물도 발견이요 선택이요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늘 기뻐하십시오. 주님께서 늘 함께 하심이 기쁨의 원천입니다. 새삼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순식간 떠오른 “눈부신 날에는”이란 시입니다. 시역시 저에겐 기쁨의 선물이자 발견이 됩니다.
“5월
'영원한 사랑'이란
꽃말의
새하얀 이팝나무꽃들
눈부신 날에는
눈부신 이와 함께
눈부신 만남
눈부신 위로
눈부신 기쁨을 나누고 싶다
새하얀 이팝나무꽃들 눈부신 날에는”-2024.5.9
유난히 “눈부시다”라는 말마디가 마음에서 맴돌았습니다. 하루하루가 기쁨으로 빛나는 선물같은 눈부신 삶입니다. 눈부심의 중심에 바로 눈부신 분, 파스카의 주님이 계십니다. 언젠가 나눴던 “선물”이란 시를 또 나누고 싶습니다.
“꽃처럼 환한 웃음보다 더 좋은 선물 있을까
삶은 순전히 선물이다
꽃같은 삶이다
눈여겨 보지 않으면 순식간 사라져 가는 꽃들
바로 선물 인생 아니던가
얼마나 그 많고 좋은 선물들 놓쳐버리고 살았는지
살아 있는 동안은 그대로 꽃인 인생인 거다
어제의 꽃 폈다지면 또 오늘의 꽃 폈다지고...
평생을 하루하루 그렇게
주님 파스카의 꽃으로 사는 거다
끊임없이 폈다 지면서 떠나는 삶이다
잘 떠날 때 아름답지 않은가
길이길이 향기로 남는다”-2001.4.23.
살아야 할 꽃자리, 기쁨의 선물을 발견하여 행복하게 살아야 할 꽃자리는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기쁨의 선물들 한 중심에 파스카의 주님이 계십니다. 파스카의 주님으로부터 샘솟는 기쁨입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에 우리가 만나야할 눈부신 분은 바로 파스카의 주님입니다. 다음 부활하신 주님의 약속은 이미 실현되어 기쁨의 선물을 살 수 있게 된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은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바로 오늘이 그날입니다. 부활한 파스카의 주님과 함께 할 때 눈부신 선물인 기쁨의 빛에 온갖 번민과 의심의 어둠이 말끔히 걷힙니다. 아무도 빼앗아갈 수 없는 기쁨, 빼앗아올 수 없는 기쁨, 거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기쁨, 주님의 선물인 기쁨입니다. 이런 기쁨이 영원한 기쁨, 참 기쁨입니다. 계속되는 고통과 시련, 불안과 두려움 중에도 끊임없이 꽃처럼 피어나는 기쁨입니다. 세상에 이런 파스카의 기쁨을 압도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신록의 5월, 파스카의 기쁨을 색깔로 하면 신록의 기쁨입니다.
요즘 저의 기쁨은 집무실옆 신록과 애기똥풀꽃이 어울어진 꽃길, 하늘길에서 고백성사후 사진을 찍어 나눠 드리는 일입니다. 주님의 기쁨과 행복을 선물하고 싶은 마음의 표현입니다. 어제 주고 받은 메시지입니다.
“사진처럼 멋지고 행복하게 사세요!”
“신부님, 예쁘게 찍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세요. 사랑합니다.”
모든 것을 다 지녔어도 내면에 기쁨이 없다면 행복하다 할 수 없습니다. 이런 기쁨은 순전히 선물이자 발견이요, 선택이자 훈련입니다. 날마다 우리가 거행하는 공동전례기도 역시, 기쁨의 선물, 기쁨의 발견, 기쁨의 선택, 기쁨의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무엇보다 참 좋은 선물인 기쁨의 원천인 파스카의 주님을 발견하고 선택하여 훈련하는 것입니다. 기쁨 역시 영적훈련입니다. 우리의 모든 일상이 기쁨의 영적훈련의 장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기쁨의 전사’로 사는 삶이라면 얼마나 멋진 삶이겠는지요!
바로 사도행전의 바오로가 그 빛나는 모범입니다. 그 누구보다 기쁨을 강조한 기쁨의 사도, 기쁨의 전사, 바오로입니다. 바로 파스카의 주님이 늘 함께 하심이 바로 기쁨의 비결, 행복의 비결임을 봅니다. 환시중 들려온 주님의 약속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도 내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바오로 사도의 입을 빌려 우리 모두에게 당부 말씀을 주십니다. 제가 고백성사 보속으로 주는 말씀 처방전에 참 많이 써드리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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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0.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기쁨과 슬픔>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기쁨의 믿음 아니라
믿음의 기쁨이요
슬픔의 믿음 아니라
믿음의 슬픔이니
믿음 안에서
기쁨은 슬픔을 품고
슬픔은 기쁨을 낳습니다
기쁨의 희망 아니라
희망의 기쁨이요
슬픔의 희망 아니라
희망의 슬픔이니
희망 안에서
기쁨은 슬픔을 품고
슬픔은 기쁨을 낳습니다
기쁨의 사랑 아니라
사랑의 기쁨이요
슬픔의 사랑 아니라
사랑의 슬픔이니
사랑 안에서
기쁨은 슬픔을 품고
슬픔은 기쁨을 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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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0.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요한 16,21)
순교자들의 생일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여자가 기뻐하듯이, 믿는 이들의 무리가 장차 올 세상 안으로 태어날 때 교회도 그 여자처럼 기뻐하며 환호합니다. 교회는 그들이 태어나도록 현세의 시기에 수고하고 크게 신음하며, 출산하는 여인처럼 근심합니다. 사람이 이승에서 떠나는 것을 탄생으로 표현하는 것은 이상하게 여길 일이 아닙니다. 사람이 어머니 태에서 나와 여기 지상의 빛 속으로 오는 것을 ‘태어난다’고 통례적으로 표현하듯이, 사람이 육의 굴레에서 벗어나 영원한 빛 속으로 들어 올려지는 것을 ‘태어난다’고 표현하는 것은 매우 적절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된 순교자나 고백자가 세상을 떠난 날을 그들의 생일로 부르며, 그들의 축일을 ‘장례일’이 아니라 ‘생일’로 표현하는 관례를 따릅니다.
-존자 베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6 사람은 숭고하다
사람은 새로운 성전이다.
엑카르트가 데카르트 학파도 아니고, 합리주의자도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게 중요하다. 하느님의 성전인 지성은 뇌의 한쪽, 곧 분석을 전문으로 하는 쪽도 아니고, 학문적 각주의 영역도 아니다. 쉬르만이 지적한 대로,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한 개념, 곧 맨스(mens)라는 개념은 “알고 사랑하는 근본적인 기질이며, 인간 안에 있는 신적인 생명의 영적인 혼적이다. 이런 이유로 쉬르만은 지성이라는 말보다 “영”이라는 말을 더 좋은 말로 꼽는다. 여기서 말하는 지성은 “직감적으로 아는 내적인 앓”이다. 그것은 직관적인 지성이지 추론적인 지성이 아니다. 카푸토는 이렇게 말한다. “엑카르트가 ‘지성의 작은 불꽃’을 말할 때, 그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결론으로 나가는 추론 능력, 개념을 사용하는 추론 능력을 언급한 것이 아니다.” 엑카르트는 “다른 것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능력, 곧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탁월하고 고귀한 능력”을 말한다. 이 능력이야말로 “자유의 바탕”이다. 그것은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선과 존재가 벗겨진 모습 그대로 파악한다. 선은 하느님이 자신을 감추기 위해 입는 옷이지만”, 직관적인 지성은 그러한 매개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지성의 이 바탕에서 사람은 근본부터가 신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신적인 불꽃과 접촉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비우거나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할 때만 우리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일치를 알게 될 것이다 .(167)
✝️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요한 크리소스토모
세례를 받은 사람은 새로운 생활 자세를 취해야
그러므로 우리는 세속적이고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할 어리석은 대화를 하지 맙시다. 우리는 이제부터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의 방식으로 새롭게 살아가기로 했습니다. 이 새로운 삶의 방식에 적합하게 살아서 품위를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올바른 일입니다. 여러분은 명예로운 의회의 의원 자리를 얻기 위해 행하는 의회 의원들의 그 큰 노력을 보지 않습니까? 이들은 일반 사람들은 아무런 문제없이 행할 수 있는 것도 의회 의원이기에 하지 말도록 정해진 법을 철저하게 지켜 갑니다.
막 세례를 받았거나 이전에 이미 세례의 은총을 받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단 한 번 세례를 받음으로써 영적 의회의 의원이 된 우리는 세속 의회의 의원들이 하는 것과 같이 열성적으로 노력하여, 말하는 것에 있어서 조심하고 생각하는 데에 있어서 순수한 것을 증명해야 하겠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의 영혼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하지 말기를 권합니다.
혀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성서를 해설하며 영적 대화를 하는 데에만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으로 제가 의도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성서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남을 해치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마십시오. 오히려 기회 있는 대로 남에게 이로운 말을 하여 도움을 주고 듣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도록 하십시오”(에페 4,29).(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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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0.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16, 22)
사순시기에서 부활 시기로 영적 움직임은 불안에서 평화로 그리고 근심에서 기쁨으로 회심입니다. 사순기기는 해산할 여자처럼 걱정과 근심에 싸이지만, 부활 시기는 해산한 여자처럼 기쁨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쁨은 평화처럼 부활의 선물이고, 부활의 기쁨은 사랑하는 이와 재회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기쁨은 하나의 선물, 곧 무상으로 받은 선물입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요15,11)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기쁨은 우리 안에서 부활하시고 영광스럽게 되신 예수님의 기쁨이고, 우리 안에 들어오신 하느님의 기쁨으로 영원한 생명 안에 있음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어떤 누구도 이 기쁨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16,23) 한 마디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기쁨의 생활입니다. 기쁨 중에 살아가는 삶이 바로 크리스챤 생활입니다.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사랑이신 주님 안에 머문 삶의 결과가 기쁨이며 이는 바로 내적 기쁨이자 존재적 기쁨입니다. 이를 체험하고 지속할 수 있는 삶이 바로 기도 생활입니다. 충실한 기도 생활은 기쁨이 충만한 생활을, 기쁨이 충만한 삶은 기도 생활에 더욱 충실할 수 있습니다.
저는 나이 들어가는 것이 참 좋습니다. 예전 보다 세상의 이치는 물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더 잘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트남에 살 때, 시간이 지나면서 함께 살았던 젊은 필리핀 신부에 대한 저의 느낌은 긍정적이기보다 시간이 흐를수록 부정적인 느낌이 더 강했습니다. 그 까닭이란 제 눈에는 보이는 것이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지, 도대체 아무것도 행하려 하지 않았지요. 결국 제대로 본다는 것도 단지 보이기에 볼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자들이 함께 살 때 보는 것은, 육으로 보는 것이었고 거짓되고 피상적인 봄이었다면, 예수님의 죽음과 그에 따른 제자들의 슬픔을 처절하게 겪고 난 뒤 다시 보게 된 부활을 체험한 이후의 보는 것은 질적으로 차이가 있었다고 봅니다. 즉 후자의 보는 것은 곧 마음이나 심령으로 보는 것으로써 이 보는 것은 참되고 깨달음을 수반한 보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로써 제자들은 소경이 눈을 뜨듯 참된 심령의 눈을 뜨게 됨으로써 모든 것을 보면서 이해하고 꿰뚫어 볼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참된 영적인 눈을 뜨고서는 제자들은 몰이해의 안개가 걷히듯 모든 것을 제대로 불 수 있는 것처럼 어떤 의심이나 의문이 사라졌기에 주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으리라고 봅니다. 성령을 체험한 후의 우리 역시 동일하게 믿음의 눈이 열리고 부재 가운데 현존하시는 주님을 인식하고 의식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참된 내적 전환 곧 근심, 슬픔에서 기쁨으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외적 시간의 흐름만이 아니라 그 흐르는 시간의 강 밑바닥에 침잠되어 있는 근심의 무게를 깊은 내성과 숙고를 통해 거슬러 올라와야 만이 변화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근심이 기쁨으로 변화의 과정을 해산의 진통에 비유하십니다. 마치 해산을 앞둔 여인에게 산고가 예고되어 있듯이, 우리도 인생을 ‘苦海’라고 표현했듯이 인생 항로에서 갖가지 근심과 시련의 시간이 닥칠 것을 알면서도 항해를 계속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어쩔 수 없이 겪을 어려움과 고통을 무의미하게 생각하거나 남을 탓하거나 불평하고 원망하며 힘겹게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후에 생명의 길을 열어 주신 주님이 계시기에 고통과 질곡의 시간을 인내하고 희망하면서 닥칠 그 날을 고대하면서 고통을 잊어버리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 부활 이후 제자들의 슬픔, 근심은 기쁨으로 변화되었으며, 이 기쁨은 실제적인 현실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를 기쁨의 눈물을 흘리게 했던 많은 순간 중에서 가장 강력한 순간은 이산가족 상봉 중계방송을 시청할 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전쟁으로 헤어진 가족과 재회의 기쁨, 다시 만남의 기쁨!!! 생사를 모르는 채 살아왔던 남과 북의 이산가족이 다시 만났을 때의 기쁨을 연상한다면 아마도 부활 후 스승을 다시 만났을 때 제자들의 기쁨의 강도를 가늠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물론 그 재회의 기쁨의 크기가 큰 쪽이 어느 쪽이라고 단정할 수 없겠지만, 자신들의 눈앞에서 죽으셨던 주님을 생생하게 다시 만나 제자들의 기쁨이 훨씬 더 컸으리라 봅니다. 자신들의 어떤 노력이 아니라 전적으로 주님께서 부활하시어 다시 찾아오셨기에 받은 기쁨이었기에.
제자들이 느꼈던 기쁨은 ‘세상의 기쁨’과 전혀 다른 기쁨입니다. 세상적인 기쁨이 무엇인지를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세상적인 기쁨이 일시적이고 지나가며 외적인 기쁨이라면, 주님께서 부활 후 주시는 기쁨은 지속적이고 항구하며 내적인 기쁨이라는 점입니다. 그 기쁨은 우리 내면에 깊숙이 숨겨져 있는 근원적 기쁨이며 존재적 기쁨이고 은사적인 기쁨입니다. 주님의 죽음을 통해서 가져다준 부활의 기쁨입니다. 그러기에 그 기쁨을 아무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성령으로 내 영혼 안에 함께 계시는 한!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한 마디로 기쁨을 잃어버린 세상입니다. 잦은 자연 재화와 전쟁으로 말미암은 경향일 수도 있겠지만 지나치게 외적인 기쁨, 쾌락적이고 감각적인 것만을 추구하기에 참된 기쁨을 잃어버린 세상입니다. 그중에서도 바로 젊은 세대가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살다 보면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을 수밖에 없겠지만 그 어려움을 견디어 내는 끈기도 인내심도 없는 듯합니다. 예전에는 한국인 하면 으레 은근과 근기를 말했었는데, 보릿고개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이기에 작은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기뻐하기보다는 너무 화려하고 큰 것만을 추구하기에 그러하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외적 사회 구조 자체가 그들의 희망을 꺾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끊임없이 비교하고 경쟁하는데, 익숙하다 보니 삶의 잔잔하고 소소한 작은 기쁨이나 참된 존재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지 않나 싶어 마음이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부활의 기쁨 곧 참된 기쁨이 지금 근심하고 슬퍼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길 바랍니다. 그리고 기쁨을 회복하기 위해 참된 눈이 열리게 되길 기도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권고를 기억합시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필리 4,4)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사18,10) 하고 말씀하신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사도 바오로는 항상 늘 기뻐하며 살았을 뿐만 아니라 환난 가운데서도 기뻐하였습니다. 그가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사도의 좋은 성격이나 노력으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받는 사랑에서 내어주는 사랑을 자신이 먼저 사신 분이십니다. 이는 사랑받고 싶은 주님으로부터 사랑받는 기쁨에서, 이제 다른 사람에게 기꺼이 내어주는 사랑의 기쁨에서 그리고 이를 통해 존재의 기쁨을 충만히 누릴 수 있습니다. 우울한 성인은 불행한 성인이기에 불행한 성인이 아니 되기 위해서 우리는 늘 환난이나 근심 가운데서도 기뻐하며 살아갑시다. 기도를 대신해서 김종삼의 「어부」라는 시를 보내니 음미하시길 바랍니다. 지금 삶이 힘들더라도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되는 날까지 희망하면서 말입니다. 『바닷가에 매어 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거린다.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 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 머얼리 노를 저어 나가서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이 되어서 중얼거리려고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
----------------------------------------------------아래 10;08 추가
240510.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주님 승천 대축일을 준비하면서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고별 담화’를 계속해서 전하여 줍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 곧 수난을 앞두고 불안해하는 제자들에게 잠시는 ‘근심’스럽겠지만, 다시 조금 있으면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에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기쁨’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를 더욱 명확하게 설명하여 주십니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해산을 앞둔 여자의 이미지를 통하여 지금 제자들의 고통이 얼마나 혹독한지를 묘사하시고, 더 나아가 그 고통의 의미까지 알려 주십니다.
사랑하는 존재나 마음을 다하여 애착하던 것을 잃었을 때의 고통은 해산의 고통만큼이나 혹독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구원의 여정일 때, 반드시 ‘부활’과 새로운 ‘생명’이 주는 ‘기쁨’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온전히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났을 때의 기쁨은 ‘아무도 빼앗지 못합니다.’
예술적 영감과 철학적 사고는 슬픔이나 비극에서 싹트는 경우가 많습니다.
불행하여야 행복을 그리워하고 슬퍼하여야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생명은 죽을 만큼의 고통에서 태어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은 기쁨은 가식적 행복일 수 있고, 언제 슬픔으로 바뀔지 모르는 불안을 품고 있습니다.
영적 기쁨은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 생기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이겨 내고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며 믿을 때 생기는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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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0.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해산의 고통을 예로 드시면서
제자들이 느끼는 근심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표현하십니다.
이별의 슬픔은
엄청난 고통이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그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것은 출산과 비교하십니다.
아이를 낳으면 기뻐하면서
고통을 잊게 되는 것처럼
예수님을 다시 보게 되면
그 기쁨 또한 말로 표현할 수 없을만큼
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출산과 비교하십니다.
어머니의 몸에서 새 생명이 태어나는 것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자들이 만났을 때
그들은 예수님을 보자마자
기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기쁨이 부활을 증명하는 세 가지
평화, 기쁨 그리고 성령 가운데 하나로
요한복음의 부활 이야기에서 전해집니다.
모든 것을 잃은 듯한 슬픔은
이제 곧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상실의 아픔이 큰 만큼
그것을 다시 얻었을 때의 기쁨도 클 것입니다.
이렇듯 모든 것을 잃은 우리에게
그것을 되돌려주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며 그분의 부활입니다.
하느님과 관계가 멀어져서
점점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지 못하고
그래서 빛 마저도 잃어가는 우리에게
그 빛을 돌려주며
그 관계를 다시 가깝게 만드는 것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기쁨을 가지고 옵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돌아섰다는 것은
우리도 다시 생명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비록 예수님처럼 육체적인 부활을
하지는 않았어도
우리 또한 다시 태어나서
그 기쁨을 누릴 수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그 기쁨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며
그 기쁨을 받아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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