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에 있는 한 가정집에서였다. 1910년 1월23일 늦은 저녁이었다. 추위가 절정에 달한, 겨울이 깊은 때였다. 이른바 ‘일한병합’으로 대한제국이 멸망하던 바로 그해였다. 나라가 망하기 불과 7개월 전이었다. 국제 정세에 관심 있는 이라면 누구라도 대한제국의 망국이 임박했음을 짐작할 수 있던 때였다.
또 그때는 안중근이 중국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한 지 3개월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를 무대로 하여 동분서주하던 안중근이었던 만큼, 개척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그 충격과 감격이 가시지 않았다.
개척리란 한인들의 밀집 주거지 ‘코레이스카야 슬로보드카’를 지칭하는 한국어 명칭이었다. 바로 코리아타운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1910년쯤에는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 1만400명의 한인이 살고 있었다.①
아랫배에 총 맞고 4일 만에 숨져
피살자는 한인이었다. 집주인 양성춘(楊成春)이라는 사람이었다. 아랫배에 총을 맞은 그는 다량의 출혈 끝에 4일 만에 숨을 거뒀다. 그는 십수 년 전에 이주한 덕분에 러시아 국적까지 취득한 고참 이주민이었다. 그런 사람들을 한국말로 ‘원호’(元戶)라고 했다. 자산도 넉넉했고, 러시아어도 불편하지 않게 구사할 줄 알았다.
그는 개척리 한인들 사이에서 손꼽히는 유력자였다. 2년 전에는 한인 거류민회 ‘민장’까지 지낼 정도였다. 러시아 행정 당국의 승인을 받아서 공식적으로 활동하는 한인 자치단체의 대표였다. 개척리의 자치단체 대표로 선출될 만큼 한인들 사이에서 신망과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언론기관의 보도에 따르면, “마음이 공평 정직하여 동포 사회에 공익을 극력 도모하던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③
도대체 누가, 왜 양성춘을 살해했는가? 범인은 금방 밝혀졌다. 그도 한국 사람이었다. 살인 혐의로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된 범인은 37살의 정순만(鄭淳萬)이었다. 그는 피살자와는 달리 러시아로 이주한 지 겨우 3년도 안 된 신참 이주민이었다. 아니, 이주민이라기보다는 망명자였다.
정순만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우리나라의 유명한 애국지사’라고 일컬을 만큼 항일투쟁 경력이 혁혁한 이였다.④ 본래 충청도 청주의 유생 출신이었다. 청소년기에는 재야의 큰 유학자로 전국에 명성이 자자하던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하에 나아갔다. 그 문하에서 유교 고전학 연구와 시문 제술에 전념했다. 뒷날 언론인으로서 필봉을 휘두르던 기본 소양은 이 시절에 갖춰졌을 것으로 보인다.
20대 청년기에 들어서 정순만은 급진적인 서구화 개혁주의자의 면모를 드러냈다. 반정부 비밀결사 유신당에 참여했다가 옥고를 치렀고, 독립협회의 후신이라는 평을 듣던 상동청년회에 참가해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나아가 한국 최초의 적십자사 설립에도 참여했다.
그 때문에 보수적인 대한제국 정부의 탄압을 받았으니, 민심을 선동한다는 죄목으로 곤장 80대를 선고받은 것도 바로 이때였다. 곤장형 집행장에서는 유혈이 낭자했다고 한다.
고난 속에서도 얻은 게 있었다. 신뢰였다. 유신당 사건으로 함께 투옥된 정순만, 이승만, 박용만 세 사람은 뒷날 ‘독립운동계의 3만’이라는 이름을 얻은 데서 보듯이 사람들의 큰 신망을 얻었다.
러일전쟁(1904~05년) 시기에 일본의 식민지 침략이 노골화되자, 정순만은 그에 맞서 항일운동에 두각을 나타냈다. 황무지 개간을 표방하며 한국 토지 침탈에 나선 일본 상업자본과 군대에 목숨을 내걸고 감연히 맞섰고, 일본인 중개상이 주도하는 한국 노동자 멕시코 송출 반대운동을 주도했다. 1905년 을사강제조약이 공포되자, 그에 맞서 서울에서 대중적인 시위 운동을 이끌기도 했다.
범인은 항일 투쟁 망명자 정순만
정순만은 국외 망명길에 올랐다. 1906년 4월이었다. 식민지로 전락해가는 조국을 지켜보면서 내린 결론이었다. 국경 너머 근 100만 명의 이주민 사회가 형성된 북간도와 연해주가 곧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한국 사람들은 두 지역을 합쳐서 ‘해도’(海島)라고 했다. 연해주의 ‘해’자와 북간도의 ‘도’자를 합쳐 만든 이름이었다. 해도는 망명자들에게는 희망의 땅이자, 약속의 땅이었다.
망명 동지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상설(李相卨)은 언제나 믿고 의지하는 평생 동지였다. 두 사람은 의기가 투합했다. 같은 충청도 출신인데다 기질과 성향이 맞았다. 두 사람은 형제간이라고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됐다.
이상설은 정순만보다 세 살이 더 많고 고위 관료 출신이었다. 이상설이 앞서고 정순만이 뒤를 따랐다. 일본 정보 문서에는 정순만이 이상설의 ‘심복’이라고 표현돼 있었다.⑤
기울어가는 국운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가. 망명자들은 과연 실현 가능한, 구체적인 행동 계획을 갖고 있을까? 그랬다. 이상설과 정순만을 비롯한 망명자들이 갖고 있던 복안은 말하자면 ‘해도 거점 임시정부 수립론’이었다.
일본에 의해 강제로 퇴위당한 고종 황제를 연해주로 망명케 하고, 그를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수립한다는 구상이었다. 1910년 화서학파의 저명한 유학자 유인석과 이상설이 앞장서서 ‘13도의군’을 편성한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았다.
이 복안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협력이 필요했다. 이상설이 러시아 당국과 교섭을 중시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망명자들은 러시아의 협력을 낙관했다. 왜냐하면 러일전쟁에 패배한 뒤 러시아인들은 조야를 막론하고 일본을 향한 복수심이 넘쳐흘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상설과 정순만을 중심으로 비공식적이지만 강력한 세력이 조직됐다.
이 그룹은 특징이 있었다. 첫째, 양반과 고위 관료 출신자가 중심을 차지했다. 이상설 자신이 ‘종2품 가선대부 의정부 참찬’ 자격으로 활동했고, 대한제국 정부에서 관료를 지냈던 망명자들은 대부분 이 그룹에 합류했다. 둘째, 러시아 행정 당국과 교섭력을 강화하는 데 역점을 뒀다. 특히 연해주 관내의 정치활동 단속을 책임진 러시아 헌병대와 협력에 능동적이었다.
이런 특징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양반이나 관료적 전통과 거리가 먼 평안도와 함경도 출신자들 속에 그런 사람이 많았다. 양반·관료 주도의 행동 양상은 낡은 것으로 간주됐다
. 평민적 지향성이 강할수록 그랬다. 또 러시아 헌병대와 협력하는 것은 스파이 활동이나 다름없었다. 러시아 헌병대에서 급료를 받고 정기적으로 한인 사회의 내막을 전하는 행위를 비루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피살을 둘러싼 두 견해
도대체 정순만은 왜 양성춘을 살해했는가? 개인적 원한이나 이해관계 탓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두 사람 사이에 금전 거래가 있었다거나, 여성을 둘러싼 알력이 있었다는 정황은 어느 기록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 불화가 있었다는 정보도 찾을 수 없다. 살인 사건의 동기는 사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이고 사회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양성춘의 피살 이유로 화해할 수 없는 두 개의 견해가 제기됐다. 그중 하나는 피해자 쪽에서 바라본 것이다. 당파적 분노와 적개심 때문에 무고한 사람을 고의로 살해했다는 의견이었다. 사건이 있던 그날 낮에 거류민회에서 중대한 회의가 있었다. 한인 사회의 내부 알력을 평화적으로 조정하기 위한 회의였다.
하지만 결과는 성공적이지 않았다. 도리어 갈등이 격화되고 말았다. 참석자들은 재정 문제를 둘러싸고 두 그룹으로 나뉘어 적대적으로 충돌했다. 그날 저녁 정순만이 양성춘의 집을 방문한 동기는 분노 때문이었다. 자신의 견해가 무시되고 백안시된 데 대한 모멸감 때문이었다.
그가 이례적으로 권총을 갖고 방문한 것은 처음부터 살해할 뜻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행위다. 방문 첫마디에, “오늘 거류민회 회의에서 일방적으로 공격받은 일이 너무 분하다. 너를 죽이러 왔다!”고 큰소리친 행위도 그것을 뒷받침한다는 견해였다.
양성춘의 피살 이유에 관한 또 하나의 견해는 과실치사설이었다. 가해자 정순만이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받는 과정에서 견지했던 견해가 바로 이것이다. 그에 따르면, 정순만이 양성춘의 집을 방문한 이유는 자신의 의견에 동의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양성춘은 정순만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정순만은 분노와 절망에 빠졌다. 휴대한 권총을 빼든 그는 “이렇게 탁한 세상에 생존할 바에야 지금 자살하겠다”고 부르짖었다. 깜짝 놀란 양성춘이 자살을 막으려고 권총을 뺏으려다가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 와중에 권총이 오발됐으며, 불행하게도 총알이 양성춘의 아랫배를 맞히고 말았다. 이것이 정순만이 묘사한, 사건의 진상이었다.⑥
이 견해에 따르면, 양성춘은 숨을 거두기 전 가족 앞에서 유언을 남겼다. 이 사건이 사고로 난 것임을 설명하고 자신의 사후에 복수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한인 거류지를 감도는 긴장감
러시아 사법기관에서 재판이 벌어졌다. 정순만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변호사를 고용해 적극적 방어에 나섰다. 마침내 판결이 이뤄졌다. 살인 사건이 일어난 그해 11월 초였다. 피고 정순만은 3개월 금고형과 정교 사원에서 참회를 명받았다. 피고인 쪽의 승리였다. 고의 살해가 아니라 과실치사를 인정한 것이다.
1911년 2월8일, 마침내 형기를 마친 정순만이 출옥했다. 양성춘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불과 1년 남짓 만에 가해자가 돌아왔다. 모든 형사처벌을 마친 상태에서 한인 사회의 일상생활에 복귀했다. 블라디보스토크 한인 거류지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참고 문헌
① 현규환, <한국유이민사> 상, 어문각, 1953판. 814-815쪽
② <해조신문> 제61호 1908년 5월6일치
③ ‘양씨피살상보’, <대동공보> 1910년 4월24일치
④ ‘정순만씨의 역사’, <대동공보> 1909년 5월5일치
⑤ 박걸순, ‘연해주 한인사회의 갈등과 정순만의 피살’,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4, 독립기념관, 2009년판
⑥ 박인영,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과 충북인의 활동', <정순만의 생애와 민족운동> 학술쇠의 발표문,2011년판
[출처] :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겨레 21, 1219호
16. 독립운동 예봉 꺾은 개척리의 비극
양성춘 살해 연루 정순만의 보복 피살 - 동지가 적이 되며 해방운동에 치명상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한인 사회에는 냉기류가 흘렀다. 정순만이 석방됐을 때 그랬다. 양성춘 살인사건(제1219호 ‘개척리 살인사건’ 참조)의 피고인인 그는 불과 1년 만에 모든 죄과를 씻고 보란 듯이 밝은 세상에 나왔다. 그의 출옥을 보고서 두 개의 상반된 여론이 조성됐다.
잘됐다고 반기는 사람들과, 과실 사고이므로 그만하면 충분히 죗값을 치렀다고 보는 사람들이었다. 분개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무고한 사람을 죽였는데도 가벼운 형벌을 받은 것은 재판이 불공정했기 때문이라는 의견이었다. 두 여론은 팽팽히 맞섰다. 차갑고 긴장된 분위기가 한인 거류지에 감돌았다.
당시 분위기를 전하는 현지 인사의 말을 들어보자. 개척리에 오래 산 여성이었다. 사료에 ‘박산석의 모친’으로 기록된 이 여성은 여성단체 자혜부인회 회장이자, 한인 기독교회 확장을 위해 그때 화폐로 ‘5루블’을 기부할 만큼 재력이 있었다.
순식간에 꺼진 ‘애국 동포의 희망’
“상년 겨울에 본항 한인 남자 사회에서 한 풍진이 일어 각각 한 모퉁이를 웅거하고 일장 승부를 결함에, …대동공보가 폐간되므로, 애국 동포의 희망이 거의 단절하고 외양 사회의 기관이 거의 파괴되니, 어찌 통곡유체할 일이 아니리오.” (<대동공보> 1910년 5월15일)
지난겨울 한 풍진이 일었다는 표현은 1910년 1월 발발한 양성춘 살인사건을 가리켰다. 그 때문에 ‘한인 남자 사회’가 둘로 나눠 각각 한 모퉁이를 웅거하고 한바탕 승부를 겨뤘다고 한다. 블라디보스토크 한인 사회의 분열이 심각했고, 국권 회복의 희망이 물거품이 됐음을 잘 보여주는 표현이다. 부정적 영향이 너무나 심각해 눈물 흘리며 통곡하는 것 외에 달리 어찌할 수 없었다고 한다.
‘애국 동포의 희망’이 꺼진 데는 또 다른 원인도 작용했다. 양성춘 살인사건 뒤 불운한 두 사건이 덮쳤던 것이다. 그중 하나는 조국의 운명이었다. 1910년 8월29일 이른바 ‘일한병합’ 조약이 체결돼, 허수아비처럼 껍데기만 남았던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말았다. 블라디보스토크 일본총영사관은 관내 한인들 관할권을 가진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흉사는 한인 거류지를 교외로 이전하는 것이었다. 1909년 가을 개척리에서 콜레라가 유행해 한인 남녀 100여 명이 죽었다. 도시 거주민 8만 명에서 유독 개척리 한인만 그런 화를 입었다. 현지 조사한 러시아인 지방 관료는 전염병의 원인을 불결한 주거 환경에서 찾았다. 보고서에 이렇게 썼다.
“한인 거류지는 극도로 좁고 더러우며 위생 상태가 중국인 거류지와 마찬가지다. 결벽성이 있는 저 한인들로 볼 때는 참으로 불가사의하다”고 적었다.①
1911년 3월 연해주 행정 당국은 한인 거류지를 시외 외딴곳으로 이전할 것을 결정했다. 그즈음 국경 너머 중국 길림성에서 다시 전염병이 생기자 나온 대응책이었다. 개척리는 시유지에 당국의 양해를 얻어 건립된 집단 주거지였다. 그 때문에 소정의 임대료를 내면 합법적으로 거주할 수 있었다.
거류지 이전을 위한 대체 부지가 제공됐다. 옛 개척리 북쪽 고개 너머 산비탈에 위치한, 아무르만을 바라보는 경사진 곳이었다. 지금이야 블라디보스토크 도심에서 멀지 않지만, 그때만 해도 도시 외곽 경계선을 벗어난 궁벽진 곳이었다. 그곳을 한인들은 ‘신개척리’ 또는 ‘신한촌’이라고 불렀다. 이주는 그해 5월부터 이듬해까지 서서히 이뤄졌다.
정순만의 출옥은 블라디보스토크 한인 사회의 분위기를 더욱 차갑게 했다. 양성춘의 죽음을 동정하는 이들은 원통해했다. 아무 죄 없이 목숨을 잃은 것도 억울한데, 관청 교섭력의 우열로 재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이 못내 분했다.
피살자의 아내 전소사가 분노를 터뜨렸다. 그는 현지 발행 한글 신문 <대동공보>(1910년 9월1일치)에 기고문을 실어, 가해자 비호 그룹이 있음을 폭로했다.
고의적 살인 행위가 분명하지만, 이를 부인하는 조직적 움직임이 있다는 말이었다. 공공연히 과실치사설을 유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무슨 협잡을 꾸미려는 짓인가? 아무런 잘못도 없다 하니, 죄 없는 사람을 또 죽이려는 책동인가?” 젊은 아내는 이렇게 힐난했다. 특정인을 지목하기까지 했다. ‘이민복’이란 자가 과실치사설을 퍼뜨리는데, 그 이유를 밝히라고 했다.
또 다른 비극의 잉태, 정순만의 출옥
양성춘을 동정하는 이들은 정순만이 풀려나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는 것을 차마 지켜볼 수 없었다. 또 다른 비극이 잉태됐다.
1911년 6월21일이었다. 정순만이 옥고를 치르고 출감한 지 넉 달이 지났다. 아침 8시, 이른 시간이었다. 연중 해가 가장 길 때라 날이 밝은 지 꽤 지났다. 정순만은 장 보기 위해 가게를 찾았다. 우연히 양덕춘을 만났다. 고인이 된 양성춘의 친형이었다. 껄끄러운 상대였다. 뜻밖에도 그가 부드럽게 다가왔다.
과거 일은 돌이킬 수 없으니 잊어야 할 터이고, 산 사람들은 한마디 얘기라도 나눠야 하지 않겠느냐며 자기 집으로 가자고 이끌었다.
양덕춘의 집에서 세 사람이 대면했다. 고인의 아내 전소사까지 합석했던 것이다. 일본 경찰이 작성한 정보 문서에 따르면, 분위기는 험악했다. 젊은 여인은 거세게 압박했다.
“무슨 이유로 너는 내 남편을 살해했느냐, 내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하라”고 요구했다. 정순만이 선선히 응하지 않고 머뭇거리는 순간, 여인은 어딘가에서 도끼를 꺼내들었다. 여인은 정순만에게 거듭 타격했다. 머리 외에 여러 곳을 맞은 정순만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그사이 양덕춘은 계속 정순만을 붙들고 있었다.
사건이 벌어진 뒤 양덕춘은 결심했다. 경찰 당국에 자수하겠다고 나서는 제수씨를 말렸다. 희생자의 형인 자기가 책임지겠다는 뜻이었다. 그는 관할 경찰서 제4분서에 자진 출두해 자신이 흉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했다.③
보복 살인 소식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쇼킹한 뉴스였다. 현장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정순만의 가까운 동료인 이상설도 한달음에 왔다. 현장엔 경찰이 배치됐다. 경찰은 이상설의 출입을 막지 않았다. 피살자가 자신의 동생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참혹한 사건 현장을 확인한 이상설은 망연자실했다. 또 분노했다. 참혹한 현장 모습에도 그랬지만, 사태를 이 지경까지 몰고 가는 사람들이 미웠다. 때마침 사건 현장에 황공도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미운 마음이 치솟았다. 알은체를 하는 그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는 양성춘 지지 그룹의 유력한 일원이었던 것이다.
이상설과 안창호의 대립
정순만 피살 사건도 사적 범죄로 간주되지 않았다. 한인 사회의 내분과 관련된 음모라고 보는 사람이 많았다. 이제 상황이 뒤집어졌다. 정순만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분노를 터뜨렸다. 이상설이 지도자인 이 그룹은 러시아 관청의 힘을 빌렸다.
러시아 관청 교섭력에서는 이 그룹이 월등했다. 이는 역사가 계봉우가 논평한 바 있다. “기호파의 수령인 이상설이 러시아 헌병대 하바롭스크 정탐부의 촉탁으로 있으면서 자기의 파를 거기에 많이 배속한 것은 그의 평생 역사로 보아 결점”이라고 평했다.④
러시아 헌병대는 네 사람에 대한 구인장을 발부했다. 살인교사 혐의였다. 체포 위기에 직면한, 국민회 운동의 지도자들은 일단 피신하기로 결정했다. 안창호는 페테르부르그와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가기로 작정했고, 이강과 정재관도 연해주 밖 자바이칼주로 피신했다.
결국 개척리의 두 살인사건은 한국 독립운동에 치명상을 입혔다. 운동권의 두 중진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한 악영향을 미쳤다. 바로 독립운동의 예기를 꺾어버린 것이다. 미국과 러시아, 중국에 걸쳐 해외 한인들의 폭넓은 네트워크를 형성하려던 거창한 노력이 좌절됐다.
각지에 국민회를 결성하고, 그를 통해 반일 역량의 통일을 도모하던 움직임이 분열되고 위축됐다. 국민회 기관지로 발간되던 <대동공보>도 폐간됐다.
국권회복운동의 끝 모를 추락
국권회복운동의 두 영웅이 서로 등을 졌다. 헤이그 특사 사건의 주인공 이상설과 신민회의 리더 안창호는 더는 협력하기를 꺼렸다. 그들은 고작 ‘기호파’ ‘서도파’라는 소규모 비공식 추종자 그룹의 대표일 뿐, 국권 회복의 중·장기적 전망을 제시하는 큰 지도자로 여겨지지 못했다.
가까운 동지였던 사람들이 이제 편을 갈라 서로 적대했다. 민족해방운동은 침체기를 겪어야 했다. 개척리의 두 살인사건은 망국 전후 국권회복운동의 끝 모를 추락을 상징하는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대립물로 전화하지 않는 사물은 없는 법이다. 비록 자신의 과오로 실패와 좌절을 겪었음에도, 인간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해방 의지 말이다. 해가 바뀌는 1912년, 정초부터 블라디보스토크 한인 사회는 침체를 딛고서 국권회복운동의 활발한 기지로 되살아났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① В.Граве. Китайцы, Корейцы и Японцы в Приамурье, Хабаровск, 1912; 南滿洲鐵道株式會社庶務部調査課 日譯, <極東露領に於ける黃色人種問題>, 大阪每日新聞社, 147쪽, 1929년
② 朝鮮駐箚憲兵隊司令部, <(秘)明治45年 6月調, 露領沿海州移住鮮人ノ狀態> 1913년 3월3일; 정태수, ‘국치 전후의 신한촌과 한민학교 연구’, <수촌박영석교수화갑기념한민족독립운동사논총> 1189쪽, 1992년
③ 在浦潮斯德 總領事代理 二甁兵二, ‘機密鮮 제43호, 鄭淳萬 殺害에 관한 報告’ 1911년 6월27일,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3
④ 계봉우, ‘꿈속의 꿈’, <북우 계봉우 자료집 (1)>,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373쪽, 1996년
[출처] :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겨레 21, 121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