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돌림 사이로 정원에 있는 꽃 한 아름 들어와 안긴다. 꽃 한 송이 차지하지 못하고 살아온 이십여 년. 잔디밭에는 늘 골프공이 득세를 부리고 있었다.
올해 봄 잔디밭 옆구리를 밀어붙이고 나직한 울타리를 쳤다. 그리고 클레마티스, 밥알시아, 블루세이지, 쑥부쟁이까지 캐다 심었다. 이들은 모두 보라색 꽃을 피운다. 남편은 눈만 뜨면 정원으로 나가 꽃을 들여다보며 눈인사를 하고 손길을 준다. 그렇게 꽃을 좋아하면서 어떻게 이날까지 참고 살았을까? 참 오래도록 속내를 모르고 살았구나 싶다.
나는 정원 한 귀퉁이에 앉아 열무 단을 풀어 다듬고, 그는 쪽파를 다듬는다. 그의 손길에서 다시 태어난 쪽파의 하얀 머리와 푸른 잎이 신선해 보인다. 물김치 맛이 한층 좋아질 것 같다. 요즘은 시키지 않아도 설거지와 청소도 잘 도와준다.
뒷산 자락에서 이주시킨 쑥부쟁이가 정원 한 귀퉁이에서 흐드러지게 꽃을 피웠다. 그 꽃을 바라보다가 문득 옛 생각이 떠올랐다.
첫 발령지에서다. 그 해 여름 동료들끼리 천렵에 나섰다. 남자들은 강물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나는 나지막한 산을 끼고 강물이 여울져 흐르는 모싯빛 너래반석에 자리를 잡았다. 강바람이 지나다가 치마폭에 걸려 파들파들 소리를 내며 종아리를 휘감았다 바람을 피해 버덩으로 들어섰다. 싱그러운 들판이 모두 내 세상이었다. 장마로 씻긴 모래들은 어머니 젖가슴처럼 눈부셨고, 얼룩얼룩 자갈이 껴안은 모래벌판은 물비린내 풀비린내가 풀풀했다.
곱디고운 얼굴을 드러낸 들꽃들은 모두 하늘을 닮아 청초했다. 꽃마중 나간 바쁜 길을 뒤로 남자 동료가 따라와 쑥부쟁이 꽃 한 뭉치를 꺾어 주었다. 꽃을 들고 애기세줄나비처럼 들판을 날아다녔다. 꽃이 시들까 걱정되어 강물에 담가놓았다.
어느덧 막차 시간이 촉박했다. 허겁지겁 달려와 버스에 오르고 나서야 강가에 두고 온 꽃다발이 생각났다. 이미 버스는 출발했고, 가지고 올 방법은 없었다. 꽃을 생각하니 즐거웠던 하루가 시무룩해졌다. 마치 소중한 물건을 두고 떠나온 느낌이었다. 다음날 출근길에서 어제 꽃을 주었던 동료를 만났다. 뒷짐 진 손에 잠 못 이루게 했던 그 꽃다발이 들려있었다. 슬며시 꽃을 내밀며 겸연쩍게 웃던 그가 후일 내편이 되었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흘렀다. 둘만 남은 둥지에서 마주보고 앉아 김칫거리를 다듬고 있다.
“저 꽃 좀 봐요.” 하고 우리 집 터줏대감 향나무 밑에 자리 잡은 쑥부쟁이를 가리켰다.
“그때 그것이 대단한 나의 착각이었어.”하며 혼자 킬킬거렸다. 눈치를 살피던 그도 맞았다는 듯이 얼굴에 깊은 주름을 지으며 환하게 웃는다. 강바람에 더위를 식힌 것처럼, 한바탕 웃고 나니 속이 후련하다. 둘이 앉아 이렇게 흐드러지게 웃은 적이 있기나 했던가. 흔치 않았다. 사는 게 뭐 그리도 틈이 없었는지! 슬쩍 엿본 남편도 행복해 보였다. 한구석을 차지한 쑥부쟁이도 아스라한 하늘빛을 담고 소리 없이 웃는다.
강원도 산간벽지 초등학교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고 정년퇴직 하던 날이다. 딸이 안겨준 꽃다발도 모두 보라색 꽃이었다. 그 꽃을 그대로 화병에 꽂아 놓았더니 남편이 보기에 답답했던가? 꽃을 수반과 화병에 나누어서 시원스레 다시 꽂아 놓았다. 그 후로 집 꽃꽂이는 슬그머니 남편의 몫이 되었고, 나는 보는 것으로 족했다.
몇 년 전 2박 3일로 문학기행을 다녀왔다. 집을 나가서도 좀처럼 집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공연히 혼자 있는 남편 걱정도 되고 미안하기도 해서 노심초사했다. 돌아와서 조심스레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먼저 눈에 확 들어온 것은 조촐한 꽃꽂이였다.
“어마! 당신 나 많이 기다렸네!” 대책 없이 툭 튀어나온 말.
빨간 장미 한 송이는 수반 나직이 앉혔고, 또 한 송이는 장대 목을 하고 먼 곳을 바라보듯 꽃송이를 위로 올려놓은 것이 전부였다. 그것은 한눈에 보아도 기다림의 표현이었다. 지금까지 남편에게서 장미 꽃다발 한번 받아본 적 없지만, 그날의 꽃꽂이는 잊지 못할 형상으로 가슴에 남아 있다. 이즘도 일주일이 멀다 하고 꽃꽂이 하는 우리 집 남자다. 꽃다발이 가슴에 안기는 것이라면, 수반의 꽃꽂이는 마음과 눈길에 머무는 정이라고 하겠다. 꽃은 꽂는 이의 감성과 심성이 작품으로 승화한다고 한다. 생을 재창조하는 아름다운 의미이기도 하다.
철없던 시절 밤을 서성이게 했던 쑥부쟁이 꽃다발 하나가 평생을 동반자로 살게 한 중매자였다.
(안태희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