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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공동체의 영광/연세대 연신원 TH.M.
Ⅰ. 서 론 요한복음서의 중심 주제 중 하나는 ‘영광’이다. 요한은 ‘영광’(doxa) 또는 ‘영광스럽게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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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 론
요한복음서의 중심 주제 중 하나는 ‘영광’이다. 요한은 ‘영광’(doxa) 또는 ‘영광스럽게 하다’(doxazou)라는 용어를 모두 43번 사용한다. ‘영광’이 마가에는 오직 4번 나타나는가 하면 마태에서는 12번 나타나, 그 용어의 빈약한 빈도 수를 감안한다면 요한복음서에 나오는 ‘영광’은 현저한 사용이라 할 수 있다. W. R. Cook은 ‘영광’이 요한복음서에 있어서 하나의 주제라기 보다는 오히려 유일한 주제라고까지 강변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요한복음서의 주도적 공동체인 요한공동체에서 ‘영광’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 논문의 목적은 요한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영광이 요한공동체의 영광에 어떻게 스며들어 있는가를 규명하고, 이 둘의 관계를 설정하는 데에 있다.
Ⅱ. 영광의 상실
1. 예수의 영광 상실
요한공동체에서 예수는 신의 속성을 잃고 이 땅에 내려온 것으로 의미한다. 요3:13절에 “하늘에서 내려온 자”는 예수의 하강을 잘 나타내어 주는 말이다. 요1:2에서 예수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것으로 묘사하여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한 신적 지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말한다. 그러나 예수는 육신을 입음으로 하나님과 동일성을 잃어 버렸고, 하나님에게 복종하여야 하는 위치에 처하게 되었다.(요3:17, 7:28)
요한공동체는 예수가 상실한 신의 특권을 회복할 때에 그의 영광이 회복된다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완전한 신적 상태를 회복하는 것은 땅에서 떠나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었으나, 요한공동체는 예수가 그의 초기 삶에서는 하늘로 올라갈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요7:39에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라고 말하는 것을 요한공동체가 예수의 생애 초기가 하나님의 상태에 있지 못하다는 보여준다.
하늘에서 내려온 예수는 하나님의 특권을 상실한 것을 의미한다. 만약에 예수가 스스로 이 땅에 내려왔다면, 그것은 상실이라기보다는 희생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요7:28에 “나는 내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예수는 스스로 희생하여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에 의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것을 말해 준다.
예수의 육신은 하나님의 상태를 상실한 것을 의미한다. 제자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요셉의 아들’로 육신을 입은 예수를 명목상으로는 인성이라는 것으로 허용한다고 하더라도, 요한복음에서는 육신 안에 있는 예수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육신은 결핍된 영광이다. 요1:14에서 육신은 신의 영광을 상실한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육신의 내용으로는 예수에게는 어머니가 있는 것(요2:1-4, 19:25), 요한공동체에서 예수는 갈증을 경험하고 있는 내용, 또한 예수는 유대인들과 자주 논리적으로 논쟁을 하고 있는 것,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요11:34)라고 말하는 것 등이 있다. 이러한 내용은 예수가 하나님의 신성을 가진 것과는 멀리 떨어진 예수의 인성을 기록한 것이다.
더 나아가 예수는 ‘요셉의 아들’로 나오고 있다.(요1:45, 6:42) 요한복음서는 예수가 요셉의 아들(인성)과 하나님의 아들(신성)이라는 원칙에서 출발한다. 요한은 예수의 인성 안에서의 신성과 예수의 신성 안에서의 인성을 함께 보고 있다. 이것은 예수의 초월성과 한계를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원칙은 요한복음서 안에 영광의 특성을 정의하는데 중요하다. 예수가 인성과 신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은 예수가 인성(육신)을 가지지 않는 신성을 가진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것을 말한다.
요한공동체에서 예수의 초월적 신성은 육신 안에서 뿐만 아니라, 그의 사회적 환경에서도 형성된다. 그러나 그 시대의 사람들은 육신과 환경 속에서 초월적 신성을 무시한다. 사람들이 육신 속에 있는 예수의 신성을 인정할 때 요한공동체에서 육신을 입은 예수가 이전의 영광을 회복하게 된다. 하나님 상태의 완벽한 회복은 예수가 스스로 인성을 제거하고 하늘에 올라갈 때에 성취되는 것이다. “나의 아버지께로 감”(요14:28)이라는 말은 예수의 상태가 하나님의 신성으로 옮겨지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요14:28)는 구절은 하나님이 예수보다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성경의 내용이다. 이것은 예수가 하나님에게 복종하고 의지한 것을 통해서 설명할 수 있다. 예수는 하나님에 의해서 보냄을 받았다. 보낸자는 보냄을 받은 자보다 크다.(요13:16) 그리고 예수는 육신의 상태로 보냄을 받았다. 이 측면에서 예수는 하나님에게 복종한 것이다.(요4:24) 예수의 신성은 육신 안에서는 드러나고, 그 육신은 스스로 신성으로 될 수 없다. 요한공동체에서는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3:6)라고 말하여 육신이 절대로 스스로 신성이 되지 못한다고 여기고 있다.
요한공동체에서 육신을 입은 예수는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것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몇 가지 있다. 예수는 자신의 권위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거하고 일하는 아버지를 말하고 있다.(요14:10) 예수가 일하는 것은 “아버지가 아직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요5:17) 예수가 일하는 목적은 그를 보낸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고, 아버지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다.(요4:34) 여기에 더하여 요한공동체는 그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보내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있다.(요7:18) 예수는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요12:28)라고 기도한다. 심지어는 예수가 영광을 위하여 기도할 때,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17:1)라고 하여 하나님이 영화롭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요한공동체에서 예수는 회복을 위해서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17:5)라고 하나님에게 기도한다. 예수가 이전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서 아버지를 의지하는 것은 요한복음서에서 명백하고 분명하게 나타난다. 하나님이 예수보다 더 크다고 하는 것은 요14:29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2. 요한공동체의 영광 상실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묘사는 요한공동체의 상황을 쉽게 분리할 수 없다. 말하자면 요한에서 예수의 이야기는 요한공동체의 이야기인 것이다. 요한공동체는 자기 정체성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요한공동체에서 가장 명백한 자기 정체성은 ‘하나님의 아들’(요3:18)과 ‘하나님에게서 난 자들’(요1:13)이다. 전자가 하나님에게서 난 결과로서 현재의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이라면, 후자는 요한공동체의 신적 기원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에게서 난 자들’은 예수가 하늘에서 온 것처럼 요한공동체도 하늘에 있는 하나님에게선 난 자로 여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가 하늘에서 왔을 때에 그의 신적 영광을 상실한 것처럼, 요한공동체의 멤버들도 하늘에서 왔기 때문에 그들의 신적 영광이 상실하였다고 생각한다. 요한공동체가 비록 현재는 하늘의 특권을 상실한 체 땅에 살고 있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서는 그들이 하늘에서 내려왔으므로 하늘에 그들의 기원이 있다고 여기기 시작하였다.
육신을 입은 요한공동체가 하늘의 영광을 상실하였다. 요한공동체가 비록 그들 자신의 의식 속에 하늘에 기원을 둔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육신으로 태어났고, 땅에 육신으로 살고 있다. 그들은 육신이 없이는 살 수 없다. 요한공동체는 땅에 육신을 입고 태어났을 때, 심지어는 신성이 육신 안에서 존속될 때에라도 명백한 신적 상태에 있는 이전의 영광을 상실한다고 생각하였다.
요한 기자는 공동체의 멤버가 예수보다 크지 않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예수를 전적으로 의지하여야 한다. 만약 그들이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고, 예수의 이름을 믿지 않는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요1:12)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요한공동체의 멤버가 예수보다 크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요14:12-24에서는 다른 차원에서 요한공동체 멤버가 예수보다 크지 않는 이유로, 예수를 위한 신자의 복종으로 명백히 말하고 있다. 신자는 예수와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만약에 그들이 예수의 사랑을 받을려면 그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요14:21) 예수에 대한 복종에 관한 다른 측면은 ‘참된 제자’로 표현되고 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요8:31)라고 말하여 예수의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에게 복종하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요한 기자는 신자가 예수에게 의지하는 것을 강조하여 그들이 예수보다 크지 않은 것을 말한다. 예수는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다.(요17:18) 요한공동체에서 예수는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요13:16)라고 말한다. 신자들에게 그들의 신적 영광을 회복하는 것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요17:9) 예수에게 달렸다. 예수가 활동을 하지 않고는 그들이 영광을 받을 수 없다. 이처럼 요한공동체는 예수보다 크지 않은 것을 말하고 있다.
Ⅲ. 영광을 위한 투쟁
1. 영광을 위한 예수의 투쟁
요한공동체에서 예수는 신성과 인성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현재의 상태에서 이전의 신적 상태로 나아가도록 움직이고 있다. 현재 육신 안에 있는 신성은 주로 그의 ‘일하는’ 것과 단순히 예수의 인간성만을 보는 유대인과의 논쟁에서 드러난다. 유대인은 이전에 예수의 신성과 육신 속에 있는 현재의 신성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은 예수의 기적을 ‘일하심(work)’이나 ‘표적(sign)’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공동체는 ‘표적’이라는 말보다는 차라리 ‘일하심’이라는 말로 더 사용하고 있다. ‘표적’이 인간의 심리적 관점을 말한다면, ‘일하심’은 예수가 기적을 베푸는 신적 상태를 더 잘 표현해 주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요한공동체는 ‘일하심’을 사용함으로 과거에 아버지가 일하신 것처럼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라고 하여 예수의 목회적 활동을 아버지의 일과 관련시키고 있다. 이것은 그들의 일 속에 아버지와 예수가 밀접히 연합되어 있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반면에 ‘표적’으로 사용된 사건 속에서는 영광을 잃은 현재 상태를 예수의 영광으로 바꿀 수 없다.
요한공동체에서 예수의 신성을 드러내는 일곱 표적이 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든 가나의 혼인잔치(요2:1-12)는 새 시대의 새 포도주로 유대교 전통에 따른 종말론적 식탁교제를 보여 준다. 이것은 육신 속에서 신성을 강조하여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신하의 아들 치유 이야기(요4:46-53), 인간의 건강을 회복하게 해 주는 능력을 보여준 베데스다 앉은뱅이 치유 이야기(요5:1-9b)도 역시 예수가 표적으로 그의 신성을 강조하고 있다.
오병이어(요6:1-15)는 육신을 위해서 먹을 것을 주는 모세와 같지 않게 예수는 하나님이 영혼을 위해서 하늘로부터 주는 참된 빵을 주는 신적 정체성을 보여 주고, 바다 위를 걸어 가신 일(요6:16-21)은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을 다른 측면에서 표명하고 있으며, 태어나면서 소경된 자를 치유하신 일(요9:1-41)은 빛으로 오신 예수를 강조하고 있으며,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이야기(요11) 영적 부활뿐만 아니라 육적 부활까지도 상징하여 인간의 최고의 적인 영적․육적 죽음까지도 통제하는 신적 능력을 보여주는 것은 예수가 육신으로 땅에 오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땅에서 그의 육신을 통하여 여러 번의 표적으로 그의 영광을 명백히 하고 있다. 여기에서 예수의 영광은 표적에 제한되지 않는다. 그의 영광은 기적의 능력보다 훨씬 더 많은 능력으로 둘러 싸여 있다. 예수는 그의 신성을 선포하고 회복하기 위하여 그의 영광을 드러낸다. 요한에서 예수가 행한 모든 표적은 현재 육신 속에 있는 그의 신성을 선포하고, 지금은 상실하였지만 이전에 육신 없는 신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투쟁하고 있는 측면에서 보아야 한다.
요한복음서에서는 모세와 예수를 이분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요1:17) 모세는 율법을 주는 자요 예수는 진리와 은혜를 주는 자라는 이분법이다. 모세는 아버지를 보지 못했으며(요1:18), 하나님을 대리하는 대리자에 불과한 것이다. 반면에 예수는 아버지의 품 속에 있는 자로서 현재 땅에 나타난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을 본 자는 아무도 없으나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예수는 아버지를 보았다.(요6:48) 이렇게 예수를 모세와 다르게 보듯이 예수는 유대인의 율법적인 생활을 반대하여 유대인과 논쟁하고 있다.
요한 기자는 유대인에 대한 여러 가지 논쟁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논쟁의 목적은 예수가 아버지의 품 속에 있던 이전의 신적 상태와 현재 땅의 삶 속에 있는 신성을 모두 드러내고자 하는데 있다. 예루살렘 성전 정화 논쟁(요2:13-22)에서 예수는 ‘성전이 된 자기의 육체’(요3:21)라고 말하여 예수가 생명수의 원천이 되고 있음을 말하며, 안식일 논쟁(요5:16-29)에서 안식일에도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은 하나님이 안식일에도 일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여 안식일에 일하는 예수가 하나님과 동일한 것을 보여주어 예수가 이전의 신성과 현재 육신 속에 있는 신성을 선포하고 있는 것을 말하며, 생명 떡 논쟁(요6:31-59)에서 예수는 자신을 모세가 아니라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려준 생명 떡이라고 말하며 예수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인 예수의 육신을 먹고 그 피를 마시라고 말하여 예수의 육신 속에 있는 신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예수와 하나님과의 관계(요7:16, 8:28)에서 요셉의 아들로서 배우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글을 잘 아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이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요8:28)고 말하여 사람과 하나님을 연결하여 주는 율법의 중재를 받지 않고 예수는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배운 것을 말하여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영적 소경 논쟁(요9:35-41)은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는 바리새인은 예수의 신성을 보지 못하는 영적 소경으로서 그들의 죄가 그대로 있게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 등은 예수가 유대인에 반대한 논쟁이다.
2. 영광을 위한 공동체의 투쟁
요한복음서에서 가장 모호한 구절 중에 하나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12;14)이다. 여기에는 ‘이보다 큰 일’을 하는 주체와 목적과 내용이 있다. ‘이보다 큰 일’을 하는 주체는 제자들이나 사도 라인의 지원을 받고 있는 유대교적 크리스천이 아니라, 제자들에 대하여 반대의 위치에 있는 요한공동체의 멤버이다.
요한이 이 구절을 사용한 목적은 요한공동체의 사회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12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땅의 예수를 통한 과거 제자들의 활동이 하늘의 예수를 통한 현재의 요한공동체 활동보다 못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12절은 과거 사도들에 의지하고 있는 현재의 유대교 크리스천의 권위가 요한공동체의 권위에 의해서 감소되는 것이다.
더 큰 일은 ‘하나님의 자녀’의 신성으로서 요한공동체의 신성을 드러내는 일을 나타내는 말로 조명된다. 과거에 예수가 그의 신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일을 한 것처럼, 현재 요한공동체는 그들의 신성을 더 잘 드러내기 위해서 ‘더 큰 일’을 행하고 있다. 그들이 ‘더 큰 일’을 행함은 그들의 영광을 상실한 현재의 상태를 회복하기 위한 투쟁의 말로 보이게 한다.
제일고별연설이라고 불리는 요13:31-17:26은 요한 기자의 다른 어떤 내용에서보다도 유대인 크리스천과 논쟁하는 요한공동체의 사회적 정황이 훨씬 더 잘 반영되어 있다. 제일고별연설 속에 반영된 요한공동체의 정황은 간결하게 요약하면 논쟁적이 정황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공동체가 논쟁한 그룹은 유대인들도 아니고, 카리스마 그룹도 아니고, 사도계 공동체의 유대교적 크리스천 멤버이다. 요한공동체는 사도적 전통을 배경으로 하는 신학을 가지고 있는 사도계 유대교적 크리스천에 반대하는 논쟁을 하고 있다. 사도계 유대교 크리스천은 12사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유대인 크리스천에 대한 논쟁의 지배적인 주제는 기독론이다. 요한공동체는 예수를 단지 그리스도로 시인하고 고백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사도계 크리스천의 낮은 단계의 기독론을 예수와 하나님의 동등성을 강조하는 발전된 높은 단계의 기독론을 내세워 반박한다. 사도계 유대교 크리스천의 기독론을 요한공동체의 기독론으로 대체시키기 위해서 그들은 투쟁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계 유대교 크리스천의 기독론을 거절하고, 자신의 기독론을 받아들일 때 요한공동체에게 영광이 주어지는 것이다.
유대인 크리스천에 대한 논쟁은 사도계 크리스천들의 권위를 비판한다. 요한은 사도계 크리스천의 현재적 권위의 근거 중 하나가 되고 있는 베드로의 모습을 부정적으로 부각시킨다. 요한복음서에서 예수는 제자를 선택하는데 주도적 위치에 있지만 베드로는 예수에 의해서 선택된 것이 아니라 안드레에 의해서 추천되었고,(요1:39) 베드로가 예수를 ‘하나님의 거룩한 자’(요6:69)라고 고백한 것은 막1:24과 눅4:34에 똑같이 나오는 것처럼 사탄의 고백을 한 것으로 여기고 있고, 베드로는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다.(요13:6-17) 이처럼 베드로가 과거에는 불충실한 제자인 것을 명료하게 제시함으로써, 그에게 근거를 두고 있는 사도 계열의 유대교적 크리스천의 현재적 권위를 약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요한공동체와 사도계 유대교적 크리스천의 갈등은 요14:16-17에 나오는 예수와 보혜사에 대한 이해에서도 나오고 있다. 본절에 나오는 ‘다른 보혜사’는 예수라고 요한공동체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계 유대교적 크리스천은 예수가 죽은 후에 다시 볼 수 있는(요14:19a) 보혜사를 깨닫지 못하였다. 그들은 예수가 죽은 후에 자신들과 함께 있는 보혜사를 예수와는 다른 ‘다른 보혜사’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요한공동체는 현재 자신들과 함께 있는 살아 있는 보혜사를 깨닫지 못하는 사도계 유대교적 크리스천을 비판하고 있다.
더 나아가 사도들이 과거 역사적 예수와 함께 활동했던 것보다 현재 요한공동체가 부활한 예수와 함께 활동하고 있는 것이 더 위대하다는 것을 ‘이보다 더 큰 일’(요14:12)이라는 선언을 통해 확정짓고 있다. 이 연설에서 논박되는 대상은 구체적으로 요한공동체와 동시대에 활동하고 있었던 유대교적 성향을 고수하고 있었던 사도계열의 크리스천들이라고 하겠다. 유대교 크리스천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베드로, 빌립, 도마, 가룟유다, 다른 제자들 뿐만 아니라 니고데모도 포함시킬 수 있다. 요한공동체의 영광은 공동체의 멤버가 예수를 이해하고, 그들이 다른 공동체와 투쟁하였을 때 얻어진 것이다.
Ⅳ. 영광의 회복
1. 예수의 영광 회복
요한복음서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 불린다. 세례요한의 예수에 대한 증거 내용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요1:34)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의 신적 기원과 그의 신적 모습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다. 나다나엘의 대답 속에서도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 일컬어지며, 나사로가 병든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 영광을 얻게 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요11:3) 빌라도에게 유대인들은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고 보고한다.(요19:7) 요한복음서의 결론에 해당하는 20장 31절에서도 그 복음서의 목적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게 하기 위한 것으로 천명한다.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은 죽은 사람을 살리고, 믿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약속하고 있다. 아버지의 일로 여겨지는 것을 아들이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아들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다 그 아들의 것이다.(요17:10) 이것을 아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버지의 권세를 위임받게 된 것은 아들의 영광이라 할 수 있다.(요17:1) 그러므로 예수는 자신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아버지의 영광을 구하고 있다.(요7:18) 이렇게 예수의 영광은 예수를 만난 사람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데에서 회복되기 시작한다.
요한 복음서는 궁극적으로 예수를 하나님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사정은 무엇보다도 로고스 기독론을 제시하고 있는 요한복음서 서막에서 보다 명료한 형태로 강조된다. 서막에서 ‘육신이 된’(요1:14) 말씀은 곧 ‘하나님’으로 선포된다.(요1:1) 요한복음서 서막의 ‘로고스’가 비교되는 대상은 고대 근동의 다른 신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고스는 ‘육신’의 형태를 입고(1:14), 완전한 인간이 되어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묘사된다는 점에서는 그들로부터 구별된다. 요한복음서에 있어서 인간 예수는 곧 하나님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요한의 사상은 14장에서도 제시된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요14:7)와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요14:9)은 예수와 아버지의 일치를 보여준다. 예수와 하나님의 상호거주 하는 것으로 표현되고, 더 나아가 하나님과 예수는 ‘우리’로 표현된다.(요14:23) 10장 30절에서 예수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고 말하며, 20장 28절에서 도마를 통해 예수를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도 요한 기자가 ‘우리’라고 명료하게 선언하고 있다.
요한복음서에서 영광의 주체는 유동적이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어떤 때는 예수가 그 주체가 된다. 더구나 요한 기자는 여러 곳에서 예수와 하나님이 하나임을 밝혔다. 예수와 하나님이 서로를 통해 영광을 얻는다는 13장 31절의 사상 역시 예수와 하나님의 동등함을 밝히기 위한 또 하나의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런 종류의 선언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의 영광이 되고 있다. 이렇게 예수의 영광과 하나님의 영광을 동등하게 여기는 요한복음서의 사상은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를 분리시킨 채, 하나님만을 믿으려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2. 요한 공동체의 영광 회복
요한공동체 멤버들의 주요한 자기 규정 중 하나는 ‘하나님의 자녀’(요1:12)라는 것이다. 이 용어는 서막의 핵심개념으로 등장하고(요1:1-18), 11장 52절에도 나온다. ‘하나님의 자녀’가 요한복음서에서 중요한 것은 서막의 중심단락(요1:10c-13)에서 위치되고 있으며, ‘하나님의 자녀’는 신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을 표현하는 결정적인 개념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요한공동체는 땅에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신성을 가지고 있는 그들을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로 정의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는 구약이나 쿰란문서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복음서 중에서는 오직 요한복음에서만 나타난다. 이것은 요한 공동체가 자기 정체성을 ‘하나님의 자녀’로 규정하고 있다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요한공동체 멤버들은 스스로를 신적 기원을 가진 사람들로 설정했다. 이런 입장에서 예수와 니고데모의 대화(요3:1-15)에서 강조하는 점은 유대인이라는 인종적인 혈통만 가지고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데에 주어진다. 곧 혈통은 그 나라를 위한 기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거듭났느냐의 여부는 ‘위로부터’ 났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거듭나는 ‘하나님의 자녀’는 위로부터 난 사람들이다. 그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들”(요1:13)이다. 이것이 요한공동체가 새로운 기준으로 스스로를 규정한 모습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입증하기 위해 자신들은 유대인들이 설정한 인종적이 혈통이나 인간적인 기준을 넘어섰다고 주장한다.
요한 기자는 “하나님에게서”(요8:24)라는 표현을 통해 요한공동체 멤버들의 신적 기원을 예수의 신적 기원과 일치시킨다. 이것이 요한 공동체 영광의 한 단면이다. 요한공동체에 있어서 영광의 획득은 간접적이고 매개적인 통로를 통해 이루어진다. 요한공동체가 신적 기원을 지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은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러한 특권을 허락한 로고스에 의한 것이다. 로고스에 의해 주어진 이 영광도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영접, 곧 그의 이름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요한공동체가 ‘하나님의 자녀’로 스스로 규정하여 상실한 영광을 회복하려 하지만, 영광의 회복은 예수의 주도와 중재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으로 분명히 하고 있다.(요1:12, 19:26-27)
하나님에게서 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요한공동체 멤버들은 ‘신들’로까지 이해된다. 이러한 사정은 10장 34-36절에서 암묵적으로 제시된다. 요한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들’로 규정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라 함은 율법을 말하기보다는 ‘예수를 영접한’ 것을 이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은 예수를 영접한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율법을 받은 사람들을 신들로 규정하는 것과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을 신들로 규정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신들’로 설정된 요한 공동체의 자기 이해는 그 공동체 멤버들과 예수와의 상호거주 또는 그들과 예수 및 하나님과의 상호 거주에 의해 보다 강화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이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한다”(요6:56)는 하나님 안에 예수가 있고, 예수 안에 하나님이 거하는 것처럼 요한공동체 멤버들은 물론 그 멤버들의 활동을 통해 그들과 하나가 될 모든 믿는 사람들은 ‘우리’로 표현되는 예수와 하나님 안에 거할 것이다.(요17:21) 하나님에 의해 예수 자신에게 주어진 영광이 이제 예수 자신의 주도에 의해 요한공동체 멤버들에게도 주어지고 있다.(요17:22) 이로써 예수의 영광은 요한공동체의 영광이 된다.
Ⅴ. 결 론
요한공동체는 유대교 회당으로부터 축출된 후에 공동체의 정체성을 위해서 새로운 기독론이 필요하였다. 사도계 유대교적 크리스천이 인식하고 있었던 낮은 단계의 기독론이 아니라, 요한공동체는 높은 단계의 기독론이 시급하였던 것이다. 요한 기자는 예수가 본래 하나님이었으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온 것으로 묘사한다. 하향 이동되었던 신분이 그 본래의 위치에 이르기까지 상향 이동될 때 예수는 완전한 의미의 영광을 얻게 된다는 높은 단계의 기독론을 제시하고 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영광은 그가 신적 기원이나 신성을 지니고 있다는 수준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예수가 하나님으로 이해되고, 예수와 하나님은 서로가 서로를 통해 영화롭게 되는 것으로 제시된다.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의 영광, 예수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 이러한 예수의 영광은 하나님에게서 받은 영광을 예수의 주도와 매개를 통해 요한공동체에게 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요한공동체에 의해 영광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의 영광은 요한공동체의 영광이 되는 것이다.
독특한 형태로 전개된 요한의 영광의 신학 사상 속에는 요한공동체가 처한 불안한 현실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 함께 반영되어 있다. 요한의 영광사상은 유대교로부터의 축출로 인해 사회적 신분이 현저하게 하향이동을 겪은 요한공동체 멤버들의 불안한 현실과 그 현실로부터의 상향이동에 대한 희망을 표출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들’, ‘예수의 친구들’, ‘예수의 형제들’, ‘신들’등과 같은 요한공동체의 주요한 자기 규정들은 그 공동체의 사회적 신분을 상향 이동시키는 것이 목표이다. 공동체의 신분상승은 예수에 대한 믿음의 통로를 통해 요한공동체가 하나님인 예수와 하나가 되는 데에 있다. 이것이 이루어질 때 요한공동체는 완전한 영광을 얻는 것이 된다.
Ⅵ. 비평
서중석 교수의 ‘요한복음서의 영광’을 읽고 요약을 하면서 세 가지의 문제에서 비평을 하고자 한다. 하나는 제목에서도 그렇듯이 전체적인 화두가 ‘영광’인데, 서중석 교수가 영광을 중요한 화두로 삼은 이유를 서론에서 다른 복음서에서와는 달리 많은 횟수로 영광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요한복음서에서 영광이 많이 쓰여져 있다는 것은 그 만큼 요한공동체가 영광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공동체의 이상과 목표가 영광에 매달려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공동체에서 많은 사건과 고백적 언어를 요한공동체를 위해서 영광에만 묶어 둘 수는 없다.
두 번째는 “영광의 상실” 장에서 보면, 육신은 결핍된 영광이라고 하였다. 요3:6에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을 난 것은 성령이니”하고 하여 육을 영과 분리하고 있으며, 요14:10의 본문에서도 예수는 아버지가 거하지 않는 육체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예수가 육을 가지고 있고, 예수의 몸에 아버지가 거하지 않는 것을 영광의 상실의 상태에 있다면, 요한공동체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영광의 회복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예수는 요17:1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기도”할 수도 없는 육신의 상태에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서에서 이렇게 구분하고 있는 것은 예수의 인성이 변하여 신성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요한공동체는 육신의 상태에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 그러면 예수가 영광을 회복하였다고 하더라도 요한공동체는 영광을 회복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예수의 영광 상실은 요한공동체의 영광 회복을 보인 이전 단계로 볼 수 없게 할 뿐만 아니라, 요한공동체가 영광을 가질 수 없다는 더 큰 절망감에 빠지게 할 수 있게 한다.
세 번째는 예수의 상실이 요한공동체의 상실로, 예수의 투쟁이 요한공동체의 투쟁으로, 예수의 영광 회복이 요한공동체의 영광 회복으로 보는 투사에 관한 것이다. 결론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요한공동체는 현실적 고난을 예수의 영광으로 투사하여 보려고 한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요한공동체가 현실적으로 심각한 삶의 고뇌가 있었고, 공동체 내에서도 약한 자의 처지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예수의 영광을 요한공동체 속에 투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공동체에 투사되는 예수는 공동체의 다른 그룹에도 함께 투사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영광이 요한공동체에 투사되어야 할 필요를 잃어버리게 된다. 예수의 영광이 요한공동체에 투사된다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하나님의 권능을 가진 예수에 의해서 요한공동체가 영광을 얻게 된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서는 요한공동체를 사회학적 측면에서 분석하려고 한 점은 독자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공동체가 처한 외부적이고 내부적인 현실의 상황을 폭 넓게 이해 할 수 있어서 요한복음서를 읽기 쉽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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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