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밝은 달밤에 / 밤늦도록 놀고 지내다가 / 들어와 자리를 보니 / 다리가 넷이로구나. / 둘은 내 것이지만 / 둘은 누구의 것인고? / 본디 내 것(아내)이다만 /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위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처용(處容)이 불렀다는 노래이다. 처용이 밤늦도록 서울(경주)을 돌아다니며 놀다가 집에 들어가 보니 자기 잠자리에 웬 다른 남자가 들어와 아내와 동침을 하고 있었다. 처용은 화를 내기보다는 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물러 나왔다. 그러자 아내를 범하던 자가 그 본모습인 역신으로 나타나서 처용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대범함에 감동하여 약속을 하나 하였다. 처용의 형상이 있는 곳이면 그 문안에 절대 들어가지 않겠다고 맹세한 것이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처용의 얼굴을 대문 앞에 그려 붙여 역신의 방문을 피했다고 한다.
처용무는 처용의 이야기가 전해오는 신라 말엽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이어져 내려온 우리나라 전통의 춤이다. 처용탈의 생김새는 조선시대 [악학궤범]의 기록에 자세하게 남아 있어 비교적 충실하게 그 원형이 보존되어 있다. 처용의 탈은 그 얼굴 생김이 다른 가면에서 볼 수 없는 몇 가지 특성들이 있다. 얼굴의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다소 험상궂으며 얼굴색은 한국 사람과는 다른 붉은색으로 정해져 있다. 성현(成俔, 1439~1504)의 [용재총화]에도 처용탈이 붉고 이가 희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처용탈의 피부색은 붉은색으로 줄곧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처용은 그 생김부터 상당히 특이했던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근 천 년 이상을 이어져 내려온 잡귀를 쫓는 상징인 처용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처용은 누구일까? 처용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 남아 있다. |
어느 날 대왕이 개운포(開雲浦, 학성 서남쪽에 있는데, 지금의 울주다)에서 놀다가 돌아가려 하였다. 낮에 물가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길을 잃고 말았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신하들에게 물으니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동해(東海) 용의 조화입니다. 마땅히 좋은 일을 해주어 풀어야 할 듯합니다.”
그래서 왕은 일을 맡은 관원에게 명하여 용을 위해 절을 세우도록 하였다. 왕이 명령을 내리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기 때문에 그곳을 개운포라 불렀다.
동해의 용이 기뻐하며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왕 앞에 나타나 덕(德)을 찬양하며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하였다. 그 중 한 아들이 왕을 따라 서울로 들어와 정사를 도우니, 이름은 처용(處容)이라 하였다. 왕은 아름다운 여자로 처용의 아내를 삼아 머물도록 하고, 급간(級干) 관직도 주었다.
- [삼국유사] 권2 처용랑망해사(處容郞望海寺)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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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현강왕이 학성에 갔다가 개운포로 돌아왔을 때, 홀연히 한 사람이 기이한 몸짓과 괴이한 복색을 하고 임금 앞에 나아가더니, 노래와 춤으로 덕을 찬미하고 임금을 따라 서울로 들어갔다. 그는 자기를 처용이라 불렀으며 언제나 달밤이면 시중에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추었으나, 끝내 그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하였다. 당시 그를 신인이라 생각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그 일을 기이하게 여겨, 이 노래를 지었다.
- [고려사] 권제71, 36장 앞쪽~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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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3월에 왕은 나라의 동쪽 지방의 주 군에 행차하였다. 이때 알지 못하는 사람 4명이 어전에 나타나서 노래하고 춤추는데 그 모양이 괴이하고 의관도 다르므로 사람들이 말하기를 ‘산해(山海)의 정령’이라 하였다.
– [삼국사기] 권 11 헌강왕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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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오이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