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도 능히 이기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2) 변화되기를 원한다면 몸을 죽이십시오!
4) 스스로 자기의 몸을 죽여야 합니다.
우리는 거듭난 이후 몸에 무엇인가를 해야만 합니다. 영이 거듭날 때 몸은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몸이 원하는 대로 하도록 내버려두고, 마음이 생각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면 마귀가 마음과 몸에 들어와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의 몸은 잘못된 것을 하고 싶어 하지요? 물어보나 마납니다. 얼마나 오래전에 구원을 받았는지, 얼마나 영적인지와 상관없이 몸은 구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그릇된 일을 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몸의 구원에 대한 약속어음이 있습니다(고전15:53). 그러나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가 몸에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사탄이 몸을 통해 우리를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몸에 무엇을 해야 할까요? 성경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 우리는 몸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롬12:1).
2. 우리는 몸의 지체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합니다(골3:5).
3. 우리는 몸을 쳐서 자신의 속사람에게 복종시켜야 합니다(고전9:27).
우리는 몸을 통제하여 원하는 대로 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사탄이 우리 몸을 불의의 병기로 사용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로마서12:1)
바울은 죄인들에게 이 편지를 쓴 것이 아닙니다. 믿는 자들에게 썼습니다. 바울은 거듭난 신자들에게 몸은 거듭나지 않았으므로 자신의 몸에게 해야 할 일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몸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만약 몸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지 않으면, 그 몸은 구원받기 전에 하던 모든 일들을 하기 원할 것입니다(엡2:2). 그래서 악한 영들에게 문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몸을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마귀에 대한 가장 훌륭한 방어책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로새서 3:5)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로마서 8:12-14)
같은 내용을 다르게 표현한 것인데, 이것이 구원받은 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한 사람도 예외는 없습니다. 평신도든 목사든 모두 자신의 몸과 육신적인 본성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이 구절들에서 사용된 "죽인다"는 말에는 '죽이다', '죽게 만든다' 혹은 '복종시키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몸을 죽이는 일은 몸을 영에게 복종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이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대신 해주시지 않습니다. 부모나 배우자나 그 누구도 대신 해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직접 육체적 본성과 정욕을 "죽여야" 합니다.
바울뿐 아니라 예수님도 육체의 악한 경향, 정욕, 식욕, 갈망을 다스려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마가복음 9:43-49)
이 말씀에 숨겨져 있는 주어는 "너"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몸을 죽여야 합니다. 이것은 즐거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몸을 죽여야 마귀의 먹이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영의 지배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나아가서 몸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마귀를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약4:7). 그러므로 반드시 몸을 죽여야 합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몸을 죽이는 일을 하지 않고 축사나 받으려고 합니다. 축사는 해결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마귀와 상관이 없는 본성적인 욕망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몸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몸은 내쫓을 수가 없습니다. 몸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몸의 정욕에 계속 자리를 내주면, 즉 몸의 욕망을 계속 즐기면 신자라 할지라도 결국 악한 영들에게 붙잡히게 됩니다. 이것이 사탄이 우리에게 들어올 자리를 얻는 대표적인 방법입니다.
또한, 사람들은 스스로 몸을 죽이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의 몸에 뭔가를 해주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러분의 몸에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영을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그 영에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의 몸을 다루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몸에 어떤 일도 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해도 안 변하는 것이 이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몸은 어쨌든 하나님의 몸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몸입니다! 따라서 몸을 다스려야 하는 것도 여러분입니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자유행위자이며 책임감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축사나 성결 체험에 매달리지 말고 책임감을 가지고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기 바랍니다(갈5:24, 골3:5). 그것이 변화될 수 있는 참된 비결입니다.
혹 이런 것을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성령님은 믿는 자들이 옳은 일을 하도록 격려하고 도와주십니다. 이것을 우리는 '은혜'라고 부릅니다. 은혜가 없으면 아무도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변화될 수 없습니다. 이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고 성령님께 순종하면 옳은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도와주실 때 우리가 성령님의 부드러운 음성에 순종해야 합니다. 성령님이 인도하시고 암시를 주실 때, 성령님께 순종하고 그 지시에 반응해야 합니다. 따라가야 할 책임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이 옳은 일을 하게 도와주셨다 할지라도 성령님이 옳은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공로라는 의미는 아니지만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최종적으로 성령님께 순종하는 결정을 하고, 말씀을 따라서 옳은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이것을 대신해주지 않습니다. 금식이 이것을 대신해주지 않습니다. 축사가 이것을 대신해주지 않습니다. 불을 받는 것이 이것을 대신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변화되려고 몸부림치면서도 변화되지 못하고 실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몸에 자기가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하지 않고 죄를 이기기 위해 엉뚱한 다른 일들만 열심히 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마귀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귀는 신자든 불신자든 사람들을 격동시켜 가능한 한 모든 나쁜 일을 하게 하려고 합니다. 특히 마귀는 불신자들을 지배하고 있으므로 그들이 나쁜 일을 하도록 강하게 충동질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신자들이 행한 모든 악한 일들이 마귀의 짓이라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마귀의 역사일 뿐 아니라 사람의 일입니다. 사람들의 몸의 정욕도 나쁜 일에 관여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에베소서 2:1-3)
불신자들은 공중권세 잡은 자, 마귀를 따릅니다. 공중권세 잡은 자가 불순종의 아들들인 불신자들에게 역사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많은 죄를 짓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보면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라고 나와 있습니다. 단순히 마귀의 역사로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 그들 속에 있는 욕심, 그들 몸에서 나오는 욕심이 악에 동참하게 만들고 악을 선택하게 한 것입니다.
죄는 간접적으로는 마귀가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일에 기여한 사람들의 역할이 있습니다. 선택은 항상 사람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가 단지 마귀의 일은 아닙니다. 거듭난 이후에 짓는 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듭난 후에도 자유의지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옳은 것을 선택할 수도 있고 나쁜 것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나쁜 것을 선택하였을 때, 마귀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선택한 것입니다. 마귀가 유혹을 했을지라도 최종적으로 누구에게 순종할 것인가는 우리가 결정합니다. 우리는 사탄에게 순종할 수도 있고 성령님께 순종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행한 일의 책임은 전적으로 그 사람에게 있습니다.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책에 보면 이런 간증이 나옵니다. 텍사스에서 한 여인이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사람들이 떠난 후 그 여인은 강단에서 울며 큰 소리로 기도했습니다. 가끔씩 그 여인은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내게서 가져가세요, 주님! 당신은 내가 그것을 원하지 않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기차화통같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래서 해긴 목사님이 그 여인에게 물었습니다.
"자매님, 당신이 원하지 않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그 여인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담배입니다!"
아마 축사를 하는 목사님이 이 말을 들었다면, 그 여인에게서 '담배 귀신'을 쫓아내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 여인이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쉬운 길을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해긴 목사님은 지혜롭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담배를 당신에게서 가져가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을 가져다가 무엇을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담배를 피우시지 않습니다. 당신이 당신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러자 그 여인이 말했습니다.
"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의 말이 틀렸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포기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를 들어, 골로새서 1장 12절에서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말씀한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우리가 몸을 따라가지 않고 영으로 행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몸을 통해 역사하는 마귀의 유혹에 넘어갈 필요가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자주 이 여인처럼 "나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변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둘 중 하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거짓말쟁이일까요? 당연히 하나님은 아닙니다. 우리가 스스로 속아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이 새로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마귀가 또는 경험이 속이는 잘못된 생각에 속아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은 이 부분에 대해 뭐라고 말씀할까요? 성경은 이에 대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성령을 좇아 행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을 검으로 삼아 거짓과 기만을 물리치십시오. 그리고 할 수 없다고 말하지 말고 '할 수 있다!'고 생각을 바꾸십시오. 그래서 책임감을 가지고 몸을 죽임으로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는 자들이 치러야 할 가장 큰 '전쟁'은 마귀와의 전쟁이 아닙니다. 몸과 영 사이의 전쟁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라디아서 5:16-17)
사람들은 많은 영적인 전쟁들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러나 가장 큰 전쟁은 몸과 영이 싸우는 것입니다. 몸에 있는 정욕과 욕심과의 전쟁입니다. 우리가 이 싸움을 잘 싸우면 전쟁할 일이 거의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마귀에 대해 문이 굳게 닫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싸움의 승패가 다른 모든 전쟁의 승패를 좌우합니다. 그러므로 이 싸움에 집중하고 승리하십시오. 그래서 다른 모든 전쟁에서도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5) 몸을 죽이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방법!
성경은 우리가 몸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여러 곳에서 보여줍니다. 그중 하나가 골로새서 3장 5절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만일 이 구절에 열거된 뭄의 악한 행위들을 죽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고도 잘 지낼 수 있을까요? 당연히 없습니다.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골로새서 3:6)
바울은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고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질병, 가난, 문제, 저주, 실패로 임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겪는 이런 각종 불행뿐 아니라 지옥형벌까지도 포함합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한복음 3:36)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로마서 2:5)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요한계시록 14:10)
그러므로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자기의 몸을 죽여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몸을 죽일 수 있을까요? 저는 여러분에게 실제적인 도움이 되도록, 가능한 한 구체적으로 그 비결을 설명해드리길 원합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지금까지 '죄을 이기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설교를 별로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제일 중요한데, 설교자들이 너무 등한히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드문 설교는 죄를 이기는 방법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가끔 진실하고 좋은 목사님들이 죄를 이길 수 있는 방법들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들어보면 그냥 자기 경험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것은 자신에게는 통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반드시 통하는 것은 아닙니다. 즉 그분이 훌륭해서 그런 원리로 이긴 것이지 성경이 말하는 승리의 비결은 아닙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설교들은 더러 있지만, 정말로 어떻게 해야 죄를 이길 수 있는지 만족할 만한 비결을 제시해주는 설교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긴 시리즈의 설교를 하고 책으로 출판한 것입니다. 죄와 싸우고 있는 진실한 사람들, 신실한 사람들, 승리하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실제적으로 붙잡을 수 있는, 정말 효과가 있는 성경적인 명확한 비결을 가르쳐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만날 "회개하라!",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을 가져라!", "거룩을 추구하라!" 그러면 뭐합니까? 방법을 모르는데, 진실로 변화되고 싶어도 실패하고 마는데,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지 그 비결을 모르는데 ... 영성이 좋은 사람들, 인격이 훌륭한 사람들은 성경적인 정확한 비결을 몰라도 말씀의 이 부분 저 부분을 붙잡고 변화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모든 사람들이 붙잡을 수 있고 모든 사람에게 효과가 있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비결을 가르쳐줄 수 있을까요? 그래서 절망에 빠진 영혼들을 도와주고 자유케 하고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이것이 제가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던 깊은 고민이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그 고민에 대한 완전한 해답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알리기 위해 이 책을 집필한 것입니다.
본서의 핵심은 신사도운동의 잘못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준비과정일 뿐입니다. 본서의 진짜 목적은 어떻게 해야 우리가 자기 몸을 실제로 죽일 수 있는가? 그 비결을 구체적으로 알려드리는 데 있습니다. 주관적인 경험담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통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 실제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데 있습니다. 지금부터 여러분에게 그 비결을 말씀해드리겠습니다.
♣ 십자가에서 자기가 죽었음을 믿으십시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로마서 6:3-7)
아내가 결혼을 통해 남편과 하나가 되듯이,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내 죽음이고 예수님의 부활이 내 부활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살기 위하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겨야 합니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게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로마서 6:10-11)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 고신 측 목사님이 쓴 한 책은 이것이 주제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내가 죽었다는 것을 늘 읊조리고 고백함으로 자기를 세뇌시켜서 이 진리가 머리에서 마음으로 내려와 확실하게 믿어지면 그때 우리가 변화된다는 내요이었습니다. 이것은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변화되려면 보통 1년 6개월 내지 3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이 기간 동안 계속해서 '나는 죽었다!' 이렇게 끊임없이 고백하면 변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저는 그것을 추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는 어떤 의미에서 바울이 로마서 6장에서 비결을 말한 것이 아니라 당위성을 말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님이 널 위해 죽었다! 결국 그 십자가에서 네가 죽은 것이 아니냐? 너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는데 계속 죄 가운데 산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이제 죄를 버리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당위성을 가르쳐주는 쪽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조금 뒤에 다루기로 하고, 아무튼 우리는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죽은 자'로 살기 위해 자기의 몸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겨야 합니다.
♣ 이 믿음을 가지고 올바른 선택을 하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의 죽음이 내 죽음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죽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저절로 모든 것이 변화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들었다고 무슨 차이가 납니까? 이것을 안다고 내가 확 변합니까?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바울도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라고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롬6:11) '여긴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이것이 영적으로는 진리지만 우리 실생활에서는 실상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실생활에서도 실상이라면 여길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진리이긴 하지만 실생활에서는 내 몸이 시퍼렇게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정욕과 욕심이 시퍼렇게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라고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믿음을 가져야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런 믿음을 가진데서 멈추면 안 됩니다.
또한, 우리는 이 믿음이 머리의 믿음에서 마음의 믿음이 되게 하기 위해 1년 6개월이나 3년 동안 읊조리고 다닐 필요도 없습니다. 저는 초대 교회 성도들이 예수 믿고 난 후에 1년 6개월에서 3년 동안 이 구절을 외우고 다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고 즉각 변화가 되었습니다. 즉각 자유케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1년 6개월이나 3년 후에 구원받거나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으면 즉시 변화되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우리는 예수님을 믿은 즉시 변화될 수 있습니다. 1년 6개월이나 3년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믿는 즉시 성령님께 나를 내어줄 수 있고 변화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진리를 깨달으십시오. 그러면 그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케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즉시 자신을 성령님께 내어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짐승이 아니고 사람이기 때문에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사람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려라, 다시 말해서 여러분의 몸을 불의에게 내어주지 말고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그렇게 하십시오. 그것이 죄를 이기는 비결입니다. 그것이 마귀를 이기는 비결입니다. 그리고 변화되는 비결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믿고 말씀 위에 서서 책임감을 가지고 즉각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합니다. "자기를 죄에 대해서 죽은 자로 여겨라." 이 말은 "나는 죽었다고 생각해라." 이런 의미가 아니라 "나는 죄에 대해서 죽었으니까 죄를 지을 수 없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된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의지적으로 결단하고 그렇게 노력하면서 그런 삶을 살아가라는 의미입니다. 저는 로마서 6장 4-6절 말씀이 실제로 그런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 위에 서서 책임감을 가지고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합니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죽었음을 믿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바울처럼 날마다 자기를 죽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고전15:31).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갈2:20)라고 했습니다. 또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은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몸을 따라가지 말고 날마다 몸을 죽여야 합니다. 그래야 정말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로새서 3:5)
이 말씀에 보면, 실제로 몸을 죽이는 것이 어떤 것인지 밝히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죽여야 할 "땅에 있는 지체"란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입니다. 그러므로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을 물리치는 것이 곧 몸을 죽이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 개역한글)라고 말씀한 것처럼 죄의 소원 즉 각종 욕심에 굴복하지 않고 그것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죄에게 "안 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몸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변화되기 원하면서 유혹이 없는 것을 구해왔습니다. 그래서 실패하는 것입니다. "유혹이 있어서 내가 지나 봐." 아닙니다. 유혹이 있어도 이길 수 있습니다. "정욕이 있어서 지나 봐." 아닙니다. 사람에게 몸이 있는 이상 정욕은 당연히 있는 것입니다. 정욕이 있다고 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안 돼!"라고 말하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따라가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유혹받지 않는 상태를 상상하면서, 기도하면서 나를 성화시켜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기도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노력하고, 힘쓰고, 애써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유혹이 있다고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정욕이 있다고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결연한 의지를 가지고 죄에 대하여 "안 돼!"라고 거절하면 됩니다. 그런데도 마땅히 해야 할 그 일은 하지 않고 기도만 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정작 해야 할 그 일은 하지 않고 기도만 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정작 해야 할 그 일은 하지 않고 성령의 불이나 받으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히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로마서 12:1)
여기서 "산 제물"은 성전 뜰이나 교회 건물에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일상생활의 장에서 드려야 하는 예배를 의미입니다. 즉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몸을 하나님께 드렸으므로 몸이 원하는 것을 더 이상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자신의 욕심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몸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날마다 드려야 할 영적 예배입니다.
물론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주일낮예배, 각종 예배에 와서 찬양하고, 말씀 듣고, 헌금드리고, 봉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영적 예배를 드리고 있지 않다면 이것은 종교에 불과합니다.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영적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즉 내 몸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몸이 원하는 것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몸을 하나님께 드렸고 하나님 것이 되었으므로 몸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일뿐 아니라 일주일 내내 드려야 할 영적 예배입니다.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순간순간 드려야 할 영적 예배입니다. 여러분, 주일성수 한다고 참된 신자가 아니라 영적 예배를 드려야 참된 신자입니다. 성경은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영적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난주 영적 예배를 드리셨습니까? 만일 드리지 못했다면 이번 주에는 반드시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 후에 와서 주일예배를 드려보십시오. 그러면 주일예배 때 은혜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주석가인 이상근 박사님은 로마서를 주해하면서 산 제물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산 제물'은 구약의 죽은 제물, 즉, 레위기의 규례를 따라 제단에서 죽여 바친 제물에 상대되는 것이다. 성도의 생애가 그대로 하나님께 제물이 되라는 뜻이다. 주를 위해 한 번 죽는 것(순교)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주를 위해 일생을 사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러면, 우리의 몸이 어떻게 산 제물이 될 수 있을까? 눈은 악을 보지 않으면 제물이 된다. 혀는 비루한 말을 하지 않으면 제물이 된다. 손은 죄를 짓지 않으면 번제가 된다. 그리고 그것 이상에 우리는 더욱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여야 한다. 손은 구제를 하고, 입은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귀는 시간 나는 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그것이 산 제물이 되는 것이다.'"
참으로 훌륭한 설명입니다. 그런데 이 글의 뒷부분은 유명한 크리소스톰의 책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크리소스톰의 책에서 그 부분을 찾아보았습니다. 그 부분을 직접 인용해보겠습니다.
"바울은 제물을 말할 때 자기 몸을 죽이라는 오해가 없도록 하기 위해 '산'이라는 말을 부연합니다. 그리고 그는 유대인들의 제물과 구분하기 위해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제물은 물질적인 것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사1:12)라고 말하였고, 다른 여러 구절에서도 하나님은 분명하게 그들을 제외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물질로 드리는 제사가 아닌 다른제사를 더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시50:23)라고 말씀하셨기에, 다윗은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시69:30, 31)라고 노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물질만의 제사를 배척하시어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시50:13)라고 하셨고, 이어서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시50: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는 여기서 우리의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하여 몸을 제물로 드릴 수 있겠습니까? 눈으로 악한 것을 보지 않을 때 그것이 제물이 됩니다. 여러분의 혀가 더러운 것을 말하지 않을 때 그것이 제물이 됩니다. 여러분의 손이 불법을 행하지 않을 때 그것이 온전한 번제가 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족하지는 않습니다. 선행도 해야 합니다. 손으로 구제를 행하고, 입으로 다른 사람을 축복하며, 귀로는 성경말씀을 더 듣기 위해 힘써야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손과 발, 그리고 입과 다른 모든 지체로 하나님께 첫 열매를 드려야 됩니다. 그러한 제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입니다."
이제 몸을 산 제물로 드린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아시겠지요! 산 제물은 몸의 지체들을 사용하여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저와 여러분에게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릴 수 있도록 기도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릴 수 있도록 금식하라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너희 몸을 산 제물로 드릴 수 있도록 축사를 받아라 이렇게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너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저와 여러분이 죄를 이길 수 있으며, 말씀대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로마서에 나오는 "산 제물로 드리라!"는 말에 나오는 "드리라!"는 표현과 같거나 같은 내용의 다른 표현들 역시 이것을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난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로마서6:13)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로마서 6:16)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로마서 6:19)
이 구절들에서 나오는 "드리며" 또는 "내주어"라는 표현에 주목하십시오. 하나님도, 마귀도 우리의 의지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고 마귀는 유혹하는 일을 합니다. 이때 우리가 자기 몸을 둘 중 하나에게 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에게 내주느냐에 따라 죄를 짓기도 하고 의를 행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 아니면 사탄에게 자신의 몸과 몸의 지체들을 내어줍니다. 선과 악은 하나님이나 마귀가 아니라 이런 인간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기도만 하고 있습니까? 왜 축사만 의지하고 있습니까? 왜 불 받을 생각만 하고 있습니까? 큰 소리로 따라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마귀의 속임수에 미혹된 것이다. 우리는 선을 행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입니다. 우리에게는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특히 거듭난 자 안에는 성령님이 거하시는데,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내 율례와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겠다."(겔36:2)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죄를 이기고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갈라디아서 5장 16절에서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러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리라, 사랑하게 되리라, 기뻐하게 되리라, 화평하게 되리라, 오래 참게 되리라, 자비한 자가 되리라, 양선하게 되리라, 충성하게 되리라, 온유하게 되리라, 절제하게 되리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진리를 굳게 붙잡으십시오. 케네스 해긴 목사님 역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성경은 믿는 자들이 세상이나 육신이나 마귀에게 자신을 내어주지 않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성경은 우리가 거듭났다면,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는 세상을 이긴 것이라고 했습니다(요일5:4-5, 요16:33, 요일4:4). 우리가 그리스동 안에 있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의 영향에, 혹은 우리 육신의 본성이 원하는 대로 순종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귀에게 패배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사탄에게 하신 승리는 곧 우리의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듭 말하지만 죄를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성경말씀에 입각하여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책임감을 가지고 올바른 선택을 하십시오. 그래서 죄를 이기고 거룩하게 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이제, 이 후에 여러분이 해야 할 일에 대해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절대로 죄를 이기기 시작한 것에서 만족하지 마십시오. 신자는 마귀나 육신에게 자신을 내어줄 필요가 없습니다. 신자는 성령님에게 내어드리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부분적으로만 성령님께 내어드리고, 또 어떤 때는 더욱 많이 내어드립니다.
물론 신자도 마귀에게 자신을 내어주어 사용될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버림받을 수 없다.'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을 때나 가능한 것입니다. 구원받은 이후에도 신자는 여전히 마귀에게 자신을 내어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귀에게 사용되는 것과 마귀에게 사로잡히는 것에는 상당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일부분만 악한 영에게 내어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부분적으로만 악한 영에게 내어 줄 수 있듯이, 성령님께도 부분적으로만 내어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쪽으로든 온전하게 자신을 내어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변화의 정도를 좌우합니다. 이것이 거룩의 수준을 좌우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님을 얼마나 닮을 수 있는가를 좌우합니다. 사람이 악한 영에게 더 많이 내어줄수록 그 영들은 그 사람 안에서 더 많이 자리를 잡게 되고 결국은 그를 사로잡습니다. 반대로 성령님께 더 많이 내어드릴수록 우리는 더욱 성령 충만하게 되고 자유케 되어 더욱 크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성령 충만이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도만 많이 하고 늘 금식한다고 진자 성령 충만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은 우리가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드릴 때 오는 것입니다. 성령을 맨 처음 언제 받습니까? 회개할 때 받습니다. 오순절 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사람들이 마음에 찔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사도행전 2:38-39)
회개할 때 성령님이 내 안에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그 후로도 우리가 자신을 성령님께 내어줄 때 더욱 성령으로 충만케 됩니다. 방언을 한다고 온전히 성령 충만한 것이 아닙니다. 예언을 한다고 온전히 성령 충만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내 의지를 가지고 얼마나 성령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내어드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기도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금식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결연한 의지를 가지고 자신을 성령님께 온전히 내어드리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성령님께 자신을 내어드리면 내어드릴수록 더욱 성령으로 충만케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하고 그보다 더 큰일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요14:12).
죄에게 나를 내어주지 않고 성령님께 내어주어서 죄를 이기고 말씀대로 사는 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절대로 거기서 만족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성령님께 완전히 자신을 내어준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과정 중에 있으며 아직 온전히 성령님께 내어드리지 못한 상태입니다. 오직 한 분 예수님만 성령님께 자신을 완전하게 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같은 성령 충만을 받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증거한 대로 성령을 한량없이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요한복음 3:34)
예수님은 엘리야의 갑절의 영감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갑절이니 칠갑절이니 칠천 갑절이니 칠만 갑절이니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성령님께 자신을 완전하게 내어드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령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는 한량없는 기름부음이 부어졌습니다. 엘리야의 갑절의 영감이 최고의 영감이 아닙니다. 한량없는 기름부음이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루에 몇 시간을 기도하느냐? 금식을 얼마나 자주하느냐? 이런 주변적인 것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내가 얼마나 자신을 전적으로 성령님께 내어드리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절대 만족하지 말고 자신을 성령님께 전적으로 내어드리십시오. 그래서 성령의 충만과 기름부음이 여러분의 삶과 사역에 점점 더 증가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참으로 귀하게 쓰임 받다가 하나님 앞에 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