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길에 관한 시모음 2)
가는 길 /안상학
오늘 밤은 우리가 강물로 흘러도
사랑은 새벽 강가 안개로 남아
이 땅 모든 풀꽃들의 가슴을 적시리
아침해가 떠오르면 흔적 없어도 좋을
별빛보다 서러운 사랑, 그런 사랑 하나
떨구고 가리, 가없는 밤길
출렁이며 넘실거리는 가는 길에
아버지에게 가는 길 /박영희
가고 싶지 않았으나
나는 빈손을 내밀러 가야 했다
아버지가 오라 하지 않아도
그 집엔 언제고
엄마보다 젊은 여자가 있었다
나를 낳았다는 아버지는
늘 분내나는 그 여자 곁에 있었다
살갑게 구는데도 정들지 않던,
봐도봐도 낯이 설던 그 여자 앞에
궁핍한 손 쫙 펴 보이면 여자는
열두살 내 빈손에 일용할 양식과
겨울날의 햇살과
비웃음을 가득 채워주었다
그걸 손에 쥐고 집으로 돌아오면
아는지 모르는지 어머니는
어떨 땐 달뜬 얼굴로
어떨 때는 폭폭 한숨을 내쉬며
밥을 지으셨다
어머니는 매번 나 때문이라고 하셨지만
나는 엄마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던
그 길,
아버지에게 가는 길
돌아오는 길은 멀었다
언제고 눈물이 났다
저승 가는 길 /김기월
간다 간다 나는 간다
이승 떠나 저승으로
길 떠나 부는 바람은
살갗을 에이어도
한 번은 왔다 간다기에 훌훌 벗어 버리고
이생에 빛을 밟고 어둠의 곳으로
넘어 넘어 나는 간다
저 고개 넘어가면 저승인가
이제는 그곳에 영혼을 쉬이고
황톳빛 흙에 떨어진 눈물을 꼭꼭 밟고
바람을 친구 삼아 가련다.
이승에 미련일랑 후회도 없이 내려놓고
훨훨 날아 그곳으로
나는 간다.
세상 가는 길 /김초혜
생명의 새벽이
어둠이라고
오랫동안 많은 사람
오고 간
이 길
처음에
끝을 얻지 못할 줄
어찌 압니까
삶의 피안에
죽음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의 마음으로부터
사로잡힌 마음
끌어내려고
언제나 제자리걸음
그렇게
이 세상을 오고 갑니다.
걸어가는 길 /박진표
서로에게
따스한 가슴 내어주고
저만치 울고 있는 추억
뜨겁게 안아 살아야 할 우리
흐르는 물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버리고 비워가며
우리 베풀며 채워가자
물은 언제나 낮은 곳으로 흐르는 법
섬기는 마음으로 평온한 마음을 갖자
나를 찾아 떠나는
주어진 우리들 삶의 여정
광야에서 한 그루의 나무와
한 송이 꽃을 심으며 그대여 행복하라
차곡차곡 마음을 쌓으며 내어주고
저마다 가슴의 아픈 가시를 뽑으며
울고 있는 상처 매만져 사랑이란 이름으로 품자
누구나 홀로 가는 길
시련이란 상처조차 밉지 않음은
내가 살아있다는 그 이유 하나
그래서 시리도록 행복하고 행복하다
가슴에서 저 하늘로 자라는 꿈들
오늘도 내일도 그렇게 뚜벅뚜벅
눈을 감고 마음으로 푸른 하늘을 걷는다
내 몸을 걸어가는 길 /유 하
길은 미래를 향해 뻗어 있지만
그 길을 만든 건 추억이었다
길은 속도를 위해 존재해왔다
하지만 추억의 몸인 그 길은 자꾸
속도의 바깥으로 나를 끄집어내곤 했다
실연의 신발은 속도를 갈망했고
사랑의 신발은 정지를 찬양했다
바뀐 사랑을 이끌고 그 길을 지나갈 때마다
새로운 추억은 그보다 오래된 추억을 지웠고
가까운 미래는 더 먼 미래를 지웠다
하여, 미래와 추억은 어느 순간 길 위에서 만났다
난 이미 낡아버린 신발로 미래를 추억하였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그 길은
내 암흑의 내부를 걷기 시작했고
비 내리는 내 기억들의 필름이 몸을 풀어
길의 미래가 되어주었다.
네게로 가는 길은 /(宵火)고은영
가난한 내 영혼에 꿈의 돛을 달고
어둠을 노젓는 그리움은
풀빛 닮은 향기로운 유혹이다
네게로 가는 길은
게으른 내 정서를 건드리고
떨리는 감성을 깨우는 길이다
네게로 가는 길은
설레임 출렁이는 종이배 타고
날 향한 그대 사랑 궁금하여
태풍의 눈을 찾아 상처를 무릅쓰는 일이다
네게로 가는 길은
한 줄기 바람 속 민들레 홀씨 되어
목마른 거친 동토에 싹을 틔우고
더위에 찌든 곤 고함에
순수로 꽃피운 향기로 서성대다가
소망의 산비탈 나뭇잎 새로
진종일 상큼한 바람이 되어
노래하는 기다림이다
네게로 가는 길은
여름날 흠뻑 젖는 소나기가 아니라
이슬비처럼 잔잔히 너를 적시고 싶은
침묵의 간절한 기도이다
네게로 가는 길은
네게로 가는 길은 너무나 멀고도 험하다
생각만큼 가까이 다가서 지지 않는
작은 아픔 물고 망설이다 쓸쓸해지는
너는 내게 너무나 보고픈 그리움이다
직소폭포 가는 길 /정영경
나 몹시 외롭거든 내변산 직소폭포 갈대 무덤길로 갈 것이다 황백색 붉나무랑 한나절 붉어지다가 남몰래 신들림을 당한 신나무 되어 보리라 장구밥나무의 장구를 빼앗아 놀다 쥐가 똥을 싸서 무르팍이 헐어버린 쥐똥나무 아래 슬쩍 실례도 해보리라 질감이 좋고 향이 기가 막히는 까마귀베개 꽃잎에서 한숨 자다 보면 공작꼬리 흔들며 자귀나무 날 깨우리라 복사나무 그늘에선 복사꽃을 꿈꾸면 안 된다고 꽝꽝나무 온몸으로 꽝꽝대리라 더러 수려한 수리딸기 잎 지어 누워있는 바로 그 옆에 숨어 있다가 덜꿩나무 엉덩이에 박혀 있는 밑구멍에 똥침을 가하리라 아직은 안 된다 배꼽을 숨겨 앙살떠는 팥배나무 배꼽도 벗겨 보고 때가 많아 발발이 휘어져 있는 때죽나무 등딱지도 밀어 주리라 다리 꼬인 합다리나무와 아서요 아서요 손 저어 나무라는 서어나무 그러다 작살난다 벼르는 작살나무 정주면 가슴에 금이 간다 찌어대는 정금나무 모두 저 샛길 담장 아래로 유혹하리라 이도 저도 싫으면 푸레 푸레 눈두덩이 우물진 물푸레나무에 주저앉아 봉래곡 암벽단애 사이 떨어져 내리는 실상용추 물이 되어 흘러가 볼 것이다 분옥담에 엎드려 딱 한 번 울음 되어 너를 불러 볼 것이다
당신에게로 가는 길 /서지월
별들이 차거운 밤이면
당신에게로 가는 길이 보입니다
눈덮인 언덕을 지나서
희디흰 달빛을 구부려서
당신에게로 가는 길은 멀고도 아스라하지만
오늘밤 내 마음속에 뻗쳐오르는
한 송이 불꽃,
불꽃을 찾아서 당신에게로 가는 길은
먼먼 고구려적 사내가 꽁꽁 언
겨울강을 건너서 말을 달리고
천변(川邊)의 잔돌들이 이마 맞대고 살부비는 밤
어디서 胡개가 나타나 정강이뼈
물어뜯을 것 같지만
자작나무 숲속엔 어린 눈꽃송이들이
칭얼칭얼 깨어서 우는 아이와 같이
툭툭 매맞는 소리 들리지만
당신에게로 가는 따뜻한 시간의 역사는
천년 하늘에 수놓인 밤별처럼 아름답습니다.
가는 길 /이봉우
새벽이슬 서리꽃으로 피어
아침 들풀은 수정처럼 반짝입니다
눈부신 햇살에 실려오는
새들의 노랫소리 정겹습니다
입김은 숨결의 자국을
허공에 남기고 사라집니다
한낮의 그림자는 북쪽으로 기울고
짧은 해는 저녁을 재촉합니다
긴 밤 사랑 꽃을 활짝 피웁니다
이어 달리는 계절은 피고 지고
겨울은 가을을 끌어안습니다
아름다운 곳을 향하여
새 삶이 시작되는 그곳으로
시린 손 호호 불며
서리꽃 곱게 핀 길 오늘도 걷습니다
산동네 가는 길 /유병근
어깨 기우뚱한 팻말을 지나 지붕과 지붕 맞닿은 골목을 지나 한낮에도 어둠이 짙은
뒤란을 지나 삐걱거리는 삽짝을 지나 어쩌면 어깨를 터는 돌담을 지나 무청 시래기
시들한 바람을 지나 바람 속에 서있는 바지랑대를 지나 바스락바스락 부딪치는 자
갈돌을 지나 호롱불 같은 이름의 초승달을 지나 초승달에 기우는 귀뚜라미를 지나
밤톨이 툭 떨어지는 언덕을 지나 달 뜨는 쪽인지 달 지는 쪽인지 어둡게 흔들리는
무릎을 지나,
물의 종점을 지나 집으로 가는 길 /황학주
바다에도 종점이 있고
디딜 때 시큰해지는 종점은 대부분 밤에 많다
집으로 기어가는 사람이 등장하는 밤
종점이 있어 항구의 변두리가 밝다
불이 켜지지 않은 채로 불빛이 스며 나오는
내 마음에 처음 찍힌 발자국은
종점과 함께 내 사랑에 있었다
‘박란 슈퍼’ 앞에서 눈을 감은 채 생수를 마시며
폭풍일 뿐인 능선을 생각한다
선박 수리소의 검은 배 하나가 바다로 가기 위해 조용히 눈을 감고 있다
나처럼 구옥을 유지하고 본래의 돌산에 대해 기억하는 사람은 줄어간다
종점과 스칠 때처럼 나는 웃음을 흘리며 돌산 골목을 오른다
작은 노인들이 구부러진 등을 고집하며 사는 비탈엔
조개껍데기 깔린 길마다 조개껍데기 같은 별 그림자들이 많다
문득 가는 빗방울이 떨어져
손바닥에 받아 본다 연필을 쥐고 생각하듯
한 빗방울을 받아 쥔다 이 빗방울은 짐을 싸든 채
한없이 밤길을 내려오다 해쓱해진 것이다 한번만 그어지는 성냥불을 써버리고
누군가의 손바닥 위에 잠들어버리는 시처럼
한 번씩 하품이 백발을 늘어뜨리며 간다
문득 하얗게 밤꽃을 뒤집어쓰고 있는 밤나무와 만난다
일생 백설을 연습한 듯 꽃을 줄줄 흘리다 고인이 될 것 같은 고목,
지상의 높은 한 종점에
흰 포말을 풀어놓은 바다가 비릿하고
잃어버린 것을 닮아 아름다워진 고목의 그늘을 지나면 집이었다
가족사진이 지갑에서 빠진 줄도 모른 채 집으로 돌아가는 어부가 있다
바다로 가는 동안
태풍도 하냥 집으로 가는 한 벗이겠다
집으로 가는 길 /양문규
영국사에서 집으로 가는 길
산수유 가지 위
새들이 안팎 없이 노닌다
노오란 꽃잎
쪽빛 물구덩 노랗게 물들인다.
그 속을 참개구리
암팡지게 기지개 펴며
물방귀를 뀐다.
논밭에선 농부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노인의 허리 굽은 삽질
아버지도 배 밭에 거름을 뿌리고 있겠지
삶의 검붉은 때 배꽃처럼
환하게 꽃 피울 수 있을지
썩은 두엄더미 옆으로 개가 지난다
집으로 가는 길
많은 꿈들 울음으로 메마른
그 못난 사내,
앞길 열어 보여주기도 하면서
산채만 한 슬픔이며 아픔
살포시 감싸안아주기도 하는 것이다.
여름이 가는 길 /김경희
아이들 풀벌레 매미소리 새가 날아
풍성한 여름이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각자 더위를 잊는 법도 터득한 채
나무와 숲은 더 가까이 길을 묻는다
입추가 계절을 겪게 되며 가을이 주는
아름다운 사랑 흠뻑 취해 보련다
그대를 만나러 가는 길 /김기전
그대를
만나러 가는 길은
늘 행복하기만 합니다
왜 이렇게
가슴이 설레고
두근거리는지 모르겠어요
그대를 알게
된 후로는 세상이
정말 아름답게 보인답니다
그대를
만난 것은 나에겐
커다란 행운이고 기쁨입니다
언제까지나
내 곁에 있어주세요
그대를 진정으로 사랑하니까요
소래포구 가는 길 /정의홍
월곶에서 소래포구 건너는 길은
아주 오래된 협궤 철교
그 다리 위엔 늘
일몰이 걸려있어
소래포구 가는 길엔
그대 꼭 잡은 손을
놓지 말아야 해
아침 바다에 나갔던
낡은 배 두어 척이
저녁 무렵 지친 몸으로
이곳에 찾아드는데
내 작은
소망 하나
붉게 지는 낙조 속에
그대와 함께
빠지는 일
혼자 가는 길 /최원정
그래
2호선 전철역에서
네가 날 보냈듯이 나도,
널 보내며 손을 흔든 것처럼
우린 그렇게 헤어짐에 익숙해지다가
아주 긴 이별을 하게 되겠지
언젠가는 가야 할,
혼자 가는 길이
많이 외롭지 않으려면
바래다주는 일은
하지 않는 게 좋을거야
오늘이
마지막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