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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羅蕙錫, 1896년~1948년) 서양화가
나혜석(羅蕙錫, 1896년 4월 28일 ~ 1948년 12월 10일)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화가이자 작가, 시인, 조각가,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 언론인이다.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아명(兒名)은 나아지(羅兒只), 나명순(羅明順)이며, 아호는 정월(晶月)이다. 일본 도쿄 여자미술학교 유화과에서 서양화를 공부한 뒤 1918년 귀국하여 화가, 작가로 활동하였으며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로도 활동하였다. 1918년에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경성부로 돌아와 잠시 정신여학교 미술교사를 지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이후 1918년 12월부터 박인덕 등과 함께 만세 운동을 준비, 1919년 3·1 만세 운동에 참가하여 5개월간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그 뒤 1920년 김우영과 결혼, 그를 따라 만주와 프랑스 등을 여행하였으며 그림, 조각, 언론, 문필, 시 등에서 활동했다. 1927년 유럽과 미국 시찰을 가게 된 남편을 따라 여행길에 올라 '조선 최초로 구미 여행에 오른 여성'이라는 칭호를 얻게 됐다. 프랑스에 체류하던 중 야수파, 인상주의, 표현파 등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한때 여러 남성들과의 연애로 문제가 되었으나 곧 그림활동에 매진하던 중, 외교관 최린과의 염문으로 이혼하게 된다. 그러나 뒤에 최린으로부터도 버림받게 된다.
1935년 정조 취미론을 발표, 순결과 정조(貞操)는 '도덕도 법률도 아닌 취미'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자신의 아내, 어머니, 누이, 딸에게는 순결함을 요구하면서 다른 사람의 아내나 어머니, 누이, 딸에게는 성욕을 품는 한국 남자들의 위선적인 행동에 대한 비판과 자유 연애론을 주장하였고, 당사자들의 의견이 존중되지 않고 집안의 뜻에 따라 결혼하는 것에 대한 비판, 가정폭력을 일삼는 남성들에 대한 비판 등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의 유명한 신여성으로, 뛰어난 미모와 함께 그림, 글, 시 등 다방면에 재주를 갖춘 근대 여성이었으며, 여성 해방, 여성의 사회 참여 등을 주장하였다. 박인덕, 김일엽, 허정숙 등과 함께 이혼 후 사회생활을 하는 여성으로 유명하였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의 한사람으로 꼽힌다. 문재(文才)도 뛰어났으며, 일본 유학 때부터 여권신장의 글을 발표한 여권운동의 선구자이기도 하였다. 연기자 나문희(본명 나경자)의 고모할머니이기도 하다.
출생과 가계
나혜석은 1896년 4월 28일 경기도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 291번지(현재의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신풍동 45번지)에서 호조참판을 지낸 나영완(羅永完)의 손녀이며, 시흥군군수를 지낸 나기정(羅基貞)의 수성 최씨 최시의(崔是議)의 5남매(요절, 弘錫, 景錫, 蕙錫, 芝錫) 매 가운데 둘째딸로 태어나,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다.
그의 집안은 할아버지 나영완이 관직에 나가 출세했는데, 나영완은 호조참판(戶曹參判, 종2품)의 벼슬을 지내고 증조부 등에게는 증(贈) 호조참판 등 거듭 증직이 내려지는 등 집안을 일으켜 세웠다. 이때부터 그의 집안은 나 참판 댁, 혹은 나부잣집이라 불렸다. 아버지 나기정은 구한말의 개명인사로, 대한제국 당시 수원면장, 경기도 관찰부 재판주사, 시흥 군수를 역임하였고 일제 강점기에도 계속 공직에 있으면서 용인군 군수를 역임했기 때문에 나혜석은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 5남매 중에는 넷째, 딸로서는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1909년에는 시흥 군수를 그리고 1912년에는 용인 군수로 있었다.
유년기
그에게는 친언니와 여동생 나지석, 오빠 나홍석, 나경석 외에도 서출인 이복 언니 (이목언니가 아닌 친언니인 것으로 밝혀짐)나계석(羅稽錫)도 있었다. 아버지 나기정의 서녀인 이복 언니 계석은 일찍 시집을 갔고, 큰오빠 나홍석(羅弘錫)은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나기형(羅基亨)의 양자로 가게 되면서 혜석은 둘째 오빠 경석과 동생 지석과 함께 자라났다. 그중 경석은 늘 혜석의 보호자 노릇을 했다. 아버지 나기정은 깨인 인사였기에 아들 딸을 차별하지 않고 교육을 시켰고 나혜석은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고 총명하였다고 한다. 일찍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한 나혜석은 수원 화성, 사도세자와 정조의 능침인 융건릉, 방화수류정, 서호를 찾아다니며 풍경 그림을 그리곤 하였다.
큰아버지의 양자로 간 큰 오빠 나홍석은 1909년 와세다 대학을 졸업했는데 그로부터 신교육에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오빠 나홍석의 집은 수원면 남창리 55번지였다. 그는 그곳에 자주 드나들었다.
아버지 나기정에게는 몇 명의 첩이 있었는데, 그 중 한명은 나혜석보다 연상인 이복 언니 나계석의 생모였고, 다른 첩은 나혜석과 비슷한 또래였다. 그가 사춘기일 때 아버지 나기정은 첩을 들였는데 이는 나혜석보다 한살많은 여자였고, 어머니 최시의가 어린 첩 때문에 힘들어 하는 것을 보고 자란 나혜석은 정조관념과 축첩제도, 가부장적 제도에 수많은 의문을 품게 된다.
청소년기
소녀기와 중학 시절
나기정은 첫딸 계석을 제외하고 딸, 아들 가리지 않고 모두 신교육을 시켰다. 다만 딸들에게는 이름을 지어주지 않고 나혜석은 아기, 막내딸 나지석은 간난이라 불렀다. 아무리 개명 관료라도 봉건적 인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던 것이다.
1910년(융희 4년) 6월 수원 삼일여학교(수원 매향중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였다. 삼일여학교는 나혜석의 사촌오빠인 나중석이 1902년(광무 5년) 수원 보시동 북감리교회내에 설립한 사립삼일여학당으로 1909년(융희 2년) 삼일여학교로 변경하였다. 나혜석은 1910년 신학제에 의한 제1회 졸업생 4명중 한명이었다.
1910년 삼일여학교 재학 중 나혜석은 월간지 '개벽'을 위해 단색목판화를 제작하였다. 나혜석의 단색목판화 '개척자' 제작 소식은 월간 '개벽' 13호에 게재되었다.
여학교 시절부터 그는 그림을 그리고 있어 오빠가 후원했다.1910년 8월 삼일여학교를 졸업하였다.
여고 시절
그해 9월 1일 경성부에 있는 진명여학교에 편입학했다. 2년 연하의 여동생 나지석 역시 진명여학교에 진학하여 자매는 처음에는 통학하다가 나중에는 경성부 근처에 기숙사를 얻어 함께 기숙사 생활을 했다. 진명여학교 재학 중, 1912년 3학년 때는 7명의 같은반 동급생 중 급장(반장)이었고 1등을 했다.
나혜석은 1906년, 수원 삼일여학교에 입학하면서 '명순'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리고 진명여학교에 편입한 이후 돌림자를 넣어 '혜석'으로 개명했다. 1913년 진명여고보 제3회 졸업생 7명 중 최우등으로 졸업했는데 그 사실이 신문에 보도되기까지 했다. 중등학교 졸업생이 신문에 소개될 만큼 당시 신교육을 받은 여성이 드물었다.
그는 수려한 외모와 우수한 성적으로 진명여고 최우등 졸업 사실이 「매일신보」에 사진과 함께 실릴 정도로 하이틴 스타가 되었다. 1913년 둘째 오빠 경석의 권유로 일본으로 유학,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해 화가의 길에 들어섰다.
고교 졸업과 유학
학창시절 우수한 성적의 모범생이던 1913년 경성부의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했으며, 일본 유학을 하고 있던 둘째 오빠 나경석의 권유로 일본으로 유학, 여자 미술대학 전신인 여자 미술학교 유화과(油畫科)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 오빠 나경석이 추천한 학교가 도쿄의 여자미술학교였다. 일본 유학의 배경에 대해서는 오빠 나경석의 권고 외에도 '신미술인 양화를 전공하기 위해서'였다는 설도 있다. 나혜석은 어렵게 일본 유학을 떠난 만큼 열심히 공부했고, 성적도 우수해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 동경에 유학하는 조선 여학생 수효는 30명에 이르나 번화한 도회 문물에 접촉함과 부모의 감독을 가까이 받지 못하는 까닭으로 모두 성적이 좋다고 이르기 어려우나, 연약한 여성의 몸으로 학업을 닦기 위하여 만리 해외에 괴로움을 달게 여김은 청년 남자가 도리어 부끄러이 여길 바이라. 그중에도 제일 학업 성적이 남보다 출중한 여자 유학생은 여자미술학교 생도 나혜석, 여의학교(女醫學校) 생도 허영숙, 일본여자대학교 부속 고등여학교 졸업생 김수창 등 세 규수이다.
- 매일신보, 1914.04.09 ”
1910년대 일본 유학생은 많이 증가했으나 그는 몇안되는 여자 유학생이었으므로 그의 일본 유학 생활은 화제가 되어 국내에 보도되었다. 이후 교포여학생 모임인 '조선여자친목회'를 결성해 기관지를 내는 등 문필활동도 활발히 전개했다.
작은오빠 덕으로 그는 비교적 유복한 유학생활을 한다. 그는 하숙집 주인 딸과도 친하게 지내며 동경에 살고 있는 청년 화가 사토우 야타(佐藤彌太)와 만나기도 한다. 후일 그의 회고에 의하면 사토우 야타는‘머리가 덥수룩하고 키가 짤막한 청년’이라고 했다. 그 일본 청년이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의 학교 기숙사까지 쫓아 다녔고, 그에게 죽자 살자고 피스톨을 내밀 정도였다고 한다. 사토우 야타는 그에게 “당신더러 일본 사람이 되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조선 사람이 되겠어요.”라고 말하며 고백하였다. 그가 쓴 글이 <시라카바(白樺)> 잡지에 ‘R子에게’라는 제목으로 실리기도 했다. 그러나 나혜석은 사토우의 청을 거절한다. 그 뒤 그는 오모리(大森)에서 자취 생활을 했다. 학교는 성선(省線)으로 통학했다.
일본 유학 시절
나혜석의 친필 편지
여자 미술학교 유화과(油畫科) 재학 당시 그는 서양화와 유화를 배웠지만 그밖에 미술 전반에 대한 것을 익혀 수채화, 조각, 목판화, 석각 공예, 서예 등 다양한 분야의 작품을 남겼다. 그가 도쿄 여자미술학교에 다닐 때 아버지가 또 다른 첩을 얻은 소식을 접한다.
먼저 여자미술학교 선과(選科)에 들어가 1년을 지낸 후 1914년 여자미술학교 사범부에 입학했다. 선과는 외지인을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코스였다. 이때 그가 속한 여자미술학교 사범부 유화과의 지도교수는 고바야시 만고(小林万吾)였다. 고바야시는 동경미술학교 출신으로 후에 동경미술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일본 유학 중 그는 현지의 조선인 유학생 단체에도 가입하는 한편 학지광에도 글을 기고하여 동인으로도 활동하고, 조선인 유학생 단체에도 나갔다. 그는 우수한 성적과 달변으로 많은 친구들과 교제했는데 이광수, 안재홍, 염상섭, 신익희, 주요한, 김성수 등과 교류하였다. 그의 달변과 깔끔한 외모, 유창한 언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매료되었다.
문필, 학예 활동
1914년 학지광(學之光)에 기고한 글 중 현모양처와 부덕을 비난한 글이 사회적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 현모양처는 이상을 정할 것도, 반드시 가져야할 바도 아니다.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하여 부덕(婦德)을 장려 한 것이다.
<학지광 1914년 12월호> ”
그는 현모양처를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보는 한국사회의 여성관을 비판하였다. 또한 1914년 '학지광'에 기고한 글 '이상적 부인'에서 '양부현부(良夫賢父)의 교육법'이 없는'양처현모(良妻賢母)의 교육법'은 '여자에 한하여 부속물(附屬物)된 교육주의'라며 비판하였다. 현모양처만이 좋은 여성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한편 여자도 인간임을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는 계몽적 단편 '이상적 부인'을 쓰면서 이 소설에 매혹된 이광수와의 염문이 동경유학생들의 뜨거운 화제거리가 되기도 했다. 1915년 4월 나혜석은 조선인 유학생들과 함께 주도적으로 재동경 여학생의 모임인 ‘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를 조직했다. 전영택과 이광수를 고문으로 특별 초빙하기도 했다.
일본 체류 중 오빠 나경석의 친구인 게이오 의숙 학생 최승구(崔承九)를 만나 연애하게 된다. 오빠인 나경석은 최승구와의 연애를 반대했으나 오빠의 반대를 거부하고 최승구와 연애를 계속하였다. 다행히도 나경석은 집안에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최승구는 시인과 작가로서 표현력이 뛰어났으나 불행히도 일찍 요절한다. 후일 엄상섭 등은 나혜석의 불행을 최승구의 죽음에서 찾기도 한다.
여성 해방론 수용
그는 여자도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생각을 스스로 자각, 여자도 남자와 똑같은 인간이며 똑같은 교육을 받고 인간답게 살 권리를 누려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동료 남녀 유학생들에게 귀국하면 딸과 누이들에게도 교육의 기회를 줄 것을 호소하였다. 한편 나혜석과 김일엽은 일본 유학 때 <세이토>(靑踏)라는 일본 최초의 페미니스트 잡지를 통해 여성 해방에 처음으로 눈뜨게 됐다. 특히 나혜석은 히라쓰카 라이초의 여자 해방론, 남녀 평등론 주장에 적극 공감하였다. 세이토 지를 구해서 읽어본 뒤 남녀평등론을 넘어 여성 해방론에도 관심갖게 된다.
나혜석이 평생 가장 사랑했던 문학 작품은 그가 1921년에 한국어로 번역·연재까지 한 노르웨이 작가 입센의 인형의 집이었다. 그는 자유를 향해 남편과 자녀를 두고 간 <인형의 집> 주인공 노라의 운명을 자신이 닮아간다고 느꼈다. 나혜석이 처음 접한 인형의 집의 일본 번역 텍스트는 1912년에 나왔던 일본어 번역이었으며, 그의 ‘노라’에 대한 이해에 결정적 영향을 준 것은 <인형의 집>을 중점적으로 다루며 “노라의 미래는 우리의 미래다”라고 선언한 <세이토> 제3호이었다. 훗날 유학 초기 시절을 회고했을 때 나혜석이 “나에게 천재적인 이상을 심은 것은 <세이토>의 발행인 라이초(雷鳥) 여사였다.”고 이야기했다. 일본어 번역본으로는 충족되지 않던 나혜석은 틈틈이 노동과 잡화상점 종업원 등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인형의 집 영어본과 노르웨이 원전을 사서 내용을 독파한다.
그러나 후일 히라쓰카 라이초가“국가가 결혼을 통제하여 유전자가 나쁜 사람들의 결혼을 금지해야 한다”는 우생학적 관점에 서고, 1930년대에 “여성들은 국가와 민족에의 봉사를 통해서만 인권 신장을 도모할 수 있다.”며 파시즘에 협조하게 되자 실망, 그에 대한 존경심을 버리게 된다.
최승구와의 교제
나경석은 친구로서 최승구를 신뢰했지만, 동생의 남자친구로는 탐탁지 않게 여겼다. 최승구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숙부 슬하에서 자랐으며, 결핵을 앓고 있다는 것도 반대의 이유였지만 그보다 최승구에게는 본처가 있었다는 것이다. 나혜석은 최승구와의 교제를 원했지만 나경석은 계속 반대하였다. 나경석이 최승구를 반대한 것은 최승구에게 이미 아내가 있다며 강하게 반대하였다.
최승구(崔承九) 역시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숙부의 강요로 충주 색시와 결혼했다. 결혼식 날 처음 만난 신부는 무식한데다 몸집도 크고 얼굴도 커서 최승구의 마음에 차지 않았다. 최승구는 결혼식만 치르고 몇 해를 두고 신부 방에 들지도 않았다. 이에 최승구는 본처와 이혼하고 나혜석과 재혼하려 했다. 최승구가 나혜석과 결혼을 약속하고 숙부에게 본처와 이혼을 허락해 달라고 사정했지만, 최승구의 숙부는 "첩을 들이는 것은 괜찮으나 이혼은 안 된다"라며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나혜석의 첫사랑은 최승구 집안에서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최승구의 집안에서는 고생한 조강지처를 버려서는 안된다며 최승구에게 결혼을 말리는 한편 나혜석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였다.
이 무렵 그는 '무한한 고통과 싸우며 예술에 매진하겠다'는 글을 남겼다. 예술에 대한 이런 태도는 최승구의 영향이 컸다. 한편 그를 연모한 일본인 남학생들이 그를 쫓아다녔다. 그러나 그는 좋은 배경과 환경을 가진 일본인 청년들의 구애를 거절한다.
1914년 여름 조선에 있던 아버지 나기정에게서 전보 연락이 왔는데, 좋은 혼처가 나섰다고 공부를 그만 두고 시집갈 것을 강하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문물과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의 문물을 목격하고 근대적 여성의식과 민주주의 개념을 인식하고 자아 의식을 가지게 된 그는 차일피일 답을 미루었다. 또한 일본 체류 중 게이오 의숙 학생 최승구(崔承九)와 연애하고 있었으므로 아버지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해 12월 도쿄 조선인 유학생 잡지인 《학지광》 3호에 최초의 글 「이상적 부인」을 발표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여성문예동인지 「청탑」을 중심으로 여성해방론과 신여성 운동이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고, 청탑 지의 문인들과 교류, 신사상을 수용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글이 조선에 알려지면서 이상한 사상에 물들었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
결혼 압력과 갈등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일본에서 미술을 공부한 한 사람이고, 유학생들 사이에서 연애소동을 일으켰으며 봉건주의와 남존여비사상에 도전하는 글을 발표해 화제를 뿌렸다. 좋은 혼처를 마련했으니 만나보기라도 하라는 집안의 권고를 미루다가 거절하게 되자 아버지 나기정은 학비 송금을 중단한다. 그는 휴학을 하고 1년간 여주에서 여학교 선생을 하면서 학비를 모은 뒤 복학한다.
1915년 1월 여자 미술학교 2학년의 3학기가 시작되기 전 1월부터 아버지의 결혼 강요와 압력으로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고 휴학했다. 아버지 나기정의 결혼 강요와 학비 송금 중단에 맞서 일시 귀국, 배편으로 조선에 되돌아와 일자리를 구하던 중, 여주공립보통학교에서 미술 교사로 1년간 근무하면서 돈을 모았다. 그해 일본에서 발간하는 《여자지계(女子之界)》의 창립, 발간에 적극 참여하였다.
한때의 애인 춘원 이광수
(오빠 나경석의 반대로 헤어졌지만 친한 친구로 지내며 연락하였다.)
집안에서는 결혼하라는 압력을 가했지만 그는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내에서 하숙하면서 학교 교사로 일했다. 1915년 12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며칠만인 12월 10일 아버지 나기정이 사망하여 일시 귀국, 12월 무렵 최승구의 결핵 병세가 악화되어 조선으로 돌아가 전남 고흥 군수로 있던 형 최승칠의 집에서 요양하였다.
1916년 최승구는 이미 조혼해 부인까지 있었으나 나혜석은 그와 약혼을 한다. 1916년 2월경 최승구의 위독 소식을 급히 받고 일시 귀국하여 전남 고흥으로 죽기 직전의 최승구를 찾아갔다. 이때 도쿄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다가 도중에 비밀리에 몰래 빠져나와 배편으로 당도했지만, 나혜석이 방문하고 되돌아간 다음날 최승구는 25세로 폐병과 결핵의 합병증으로 죽었다. 최승구는 전남 고흥군 고흥읍 남계리 오리정 공동묘지에 묻혔다.
도일과 수학
도쿄에서 애인의 사망 소식을 들은 나혜석은 미친 듯 울었고, 신경쇠약에 걸려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결핵을 앓던 최승구가 사망함으로써 그들의 관계는 막을 내리지만 첫사랑 최승구는 나혜석의 뇌리에 영원히 각인된다. 이후 그는 오빠로부터 교토제국대학 법학과에 다니는 친구 김우영을 소개받게 된다. 김우영은 나혜석보다 10살이 많았고, 한 차례 결혼한 적이 있었지만, 3년 전 아내와 사별한 독신이었다. 김우영은 나혜석에게 무한한 사랑을 주었고 나혜석이 첫사랑의 상처를 잊을 때까지 묵묵히 지켜보았다. 1917년 초 그는 마음을 추스르고 계속 학교에 다녔다.
1917년 여름, 수원의 그의 집으로 나경석을 찾아온 김우영을 만났고 이후 오빠 나경석의 강력한 권유로 서로 도쿄와 교토를 오가며 본격적으로 만나게 된다. 중간에 춘원 이광수와도 가까워져서 동시에 잠시 사귀었으나 오빠 나경석의 반대로 이광수와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광수는 후에 부인이 되는 허영숙에게 여러 통의 편지를 보내는데 그중 1918년 편지에 나경석과 나혜석에 관한 내용도 있다. 이광수와 김우영 등과 연애하는 동안 주변에서 혼처를 물색하여 중매를 주선하였으나 그는 중매를 모두 거절한다.
1917년말, 그는 오빠 나경석이 소개한 김우영을 만나러 교토(京都)로 갔다. 이후 교토제대생 김우영은 도쿄와 국내를 오가며 열심히 구애했지만 당시 그의 관심은 남성과의 결혼이 아니라 '여성'과 '민족'에 있었다. 그는 1917년 '학지광'에 게재한「잡감(雜感) - K언니에게」라는 글에서 '내가 여자요, 여자가 무엇인지 알아야겠다. 내가 조선 사람이오, 조선 사람이 어떻게 해야할 것을 알아야겠다' 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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