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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3. 묵상글 ( 부활 제7주간 월요일, - 세상을 이기는 힘.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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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3. 부활 제7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세상을 이기는 힘
세상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그것이 승리라고 좋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 승리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는 악의 고리를 끊기 위해 그 죽음을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능력이 없어서 죽임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더 큰 사랑 때문에 죽음을 감당하셨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실패이지만 속을 보면 오히려 사랑의 승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제자들은 그것을 쉽게 알아듣지 못하였고 수난과 죽음, 부활의 사건을 겪기까지 그리고 부활하시어 제자들과 동행하시고 일깨워 주시기까지 그들의 믿음은 다져지지 못하였습니다. 굳센 믿음을 지닌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든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눈으로 보았다고 해서 저절로 믿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고 맡겨진 일을 성실히 감당할 때 믿음을 견고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쁨과 슬픔에 관해 말씀하시며 세상의 환난을 겪어내기를 기원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고통과 환난을 겪겠지만 정신을 잃으면 안 된다는 당부를 하신 것입니다. 결국은 예수님께서 승리할 것이고 그 승리는 곧 제자들의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승리를 받아들여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곁에 있었던 제자들도 믿음이 온전히 영글기까지 오랜 시간과 시련의 시간이 필요하였는데 하물며 우리에게는 어떻겠습니까? 말씀을 믿고 가슴에 새기고 때를 기다리며 살면 어느새 성장한 나를 알게 됩니다.
세상을 이기는 힘은 예수님에게서 나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신 일도 알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사도10,38). 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줄 것입니다”(필리3,21). 하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마귀를 굴복시키고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는 능력의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세상을 이겨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주님을 애타게 부르고 마침내 그분 품에서 기쁨과 평화를 누려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을 생각하고 그분의 현존을 깨닫기도 전에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생각하고 찾으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빌기보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먼저 빌고 계십니다. 마음을 열어 주님을 만나 뵙게 되길 바랍니다.
어느 시골에 가문이 오래된 가정이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높은 벼슬을 하였으나 자손이 번성하지 못하여 한 농부가 그 집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 농부는 오래된 가구며 유물을 다 팔아 버리고 병풍 하나만 남겨 놓았습니다. 그것도 엿장수가 자꾸 팔아 버리라고 조르는 바람에 십만 원에 팔아버렸습니다. 그런데 농부는 나중에 그것이 시가 천오백만 원을 웃도는 병풍임을 알고 후회하며 가슴을 쳤답니다. 그 농부가 좀 더 지혜로워 그 병풍의 가치를 알았더라면 결코 손해 보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모르는 것이 죄였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이 주님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죄가 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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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3 부활 제7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신부님께서 5월 6일 강론글 말미에 아래와 같이 알려 주셨습니다.
- 앞으로 한 주간 강론을 올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또 죄송합니다.
다음 주 월요일이나 화요일부터 다시 올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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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쇠신부님의 말씀을 같은 전례시기에는
어떻게 묵상하고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 <성체경배 순례자>
23년 부활 제7주간 월요일
(세사을 이기는 삶)
http://www.ofmkorea.org/526908
22년 부활 제7주간 월요일
(세상을 이기는 법)
http://www.ofmkorea.org/489718
21년 부활 제7주간 월요일
(승천의 승리)
http://www.ofmkorea.org/407649
20년 부활 제7주간 월요일
(믿는다고 다 따르는 것은 아니다.)
http://www.ofmkorea.org/354307
19년 부활 제7주간 월요일
(절대 고독)
http://www.ofmkorea.org/223823
16년 부활 제7주간 월요일
(안방을 다 내드릴지라도?)
15년 부활 제7주간 월요일
(초월적인 평화)
13년 부활 제7주간 월요일
(평화가 승리다.)
12년 부활 제7주간 월요일
(물의 세례, 불의 세례)
10년 부활 제7주간 월요일
(참된 승리)
09년 부활 제7주간 월요일
(주님 안에서 평화)
08년 부활 제7주간 월요일
(절대고독 속에 홀로 가는 인생)
===위 2023년도 강론글 옮깁니다.================
김레오나르도 2023.05.22 04:20
부활 7주 월요일 - 세상을 이기는 삶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부러우면 진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가 명품을 가지고 있어도 그가 부럽지 않으면
나는 그도 이기고 세상도 이긴 것입니다.
누가 나에게 싸움을 걸어와도 내가 싸우지 않으면,
싸움에 말려들지 않으면 그것이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고,
싸울 마음이 도무지 없으면 그것이 더더욱 완벽하게 이긴 것입니다.
누가 나를 무시하고 심지어 대놓고 모욕을 퍼부어도
그것으로 내가 무시당하지 않고 욕을 먹지 않으며
화가 나지 않고 여전히 평화롭다면 그것이 그를 이기고 세상을 이긴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처럼 말로는 믿는다고 하고선 배신하고 떠날지라도
배신감에 분노가 치밀지 않고 여전히 믿어주고 오히려 용서한다면
그것이 그를 이긴 것이고 세상을 이긴 것입니다.
미움엔 사랑이 승리고,
배신엔 믿음이 승리고,
상처엔 용서가 승리고,
모욕엔 평상심이 승리고,
세상에 대해서는 승천이 승리입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 살면서 하느님 나라를 소유한 삶이 세상을 이기는 것이고,
이 세상에 살면서 예수님께서 사신 것처럼 사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것임을 알지만
관건은 어떻게 이 승리의 삶을 살아낼 것인가, 그것이겠지요.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 혼자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함께 계신다고 하는데
혼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아버지와 함께 살 때 가능하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러니 제자들에게 내렸던 성령이 우리게도 임하기를 우리도 빌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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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3. 부활 제7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이탈리아에 가게 되면 꼭 방문하는 곳이 있습니다. 성 베네딕토의 수도원으로 알려진 ‘수비아코’입니다. 해발 800미터 정도의 산꼭대기에 30미터는 족히 될듯한 깎아지른 바위 절벽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베네딕토 성인은 첩첩산중 수비아코의 두 평 남짓한 동굴에서 기나긴 은수 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동굴에서 참회와 기도 생활을 하며 서양 수도원의 체계를 세우셨습니다. 그가 6세기 만든 수도회 규칙은 그 후 모든 수도회 규칙의 전형이 되었습니다.
베네딕토 성인께서 수도자에게 요구한 첫 번째는 무엇일까요? 많은 이가 ‘Ora et labora’(기도하고 노동하라)만을 떠올리지만, 사실 ‘자기 스스로를 받아들여라.’라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자신과 잘 지내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과 잘 지내겠는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이 어떻게 온전한 인간일 수 있는가?”
그는 스스로를 부정하고 미워하는 사람은 하느님과도 또 동료인 인간과도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베네딕토 성인께서 수도자들을 향해 하신 말씀이었지만, 지금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미워하는 사람은 이를 통해 더 큰 문제를 낳고 맙니다. 이런 사람이 주위 사람들에게 더 많이 화를 내는 등 부정적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극복하기 위해 타인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또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주님을 바라보고 굳게 믿는 사람은 가장 힘센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큰 자신감을 갖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당연히 만나는 이웃에게도 너그러운 사랑으로 다가서게 되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시련과 고통을 겪었지만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바로 주님과 함께한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몇 차례에 걸쳐서 말씀하셨지요. 오늘 복음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자기 스스로를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힘차게 살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 없이는 자기를 받아들이기 힘들어집니다. 특히 세상 안에서 어떤 고통과 시련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결국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통해 우리는 주님과 함께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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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우리는 삶의 모든 순간에 사랑이 있음을 안다. 이것을 잊지 않는 게 중요하다(레오 보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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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3. 부활 제7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6,33)
오늘 예수님께서는 다락방에서의 <고별사>를 끝내면서, 우리에게 위대한 교훈을 남겨 주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약함’에 대한 교훈입니다. 우리 믿음의 약함에 대한 교훈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고백합니다. “저희는~ 믿습니다.”(요한 16,30)
아마 이 고백은 정직한 고백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고백이 확실하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우리도 흔히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강하지를 못합니다. 마치 베드로가 “내가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지만, 금방 예수님을 부인해버렸듯이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믿음을 입으로 고백하는 데는 자신할지 모르지만, 믿음의 실제 행동인 ‘위탁’에 있어서는 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믿음이 약해질 때를 훤히 아십니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너희가 나를 혼자 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요한 16,32)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질 것입니다. 좌절하고 절망할 것입니다. 의혹에 휩싸이고 혼동에 빠질 것입니다. 각자 제 갈 길로 가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믿음은 “약하고 더듬거리고 무지하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강함은 우리의 믿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믿음의 대상이신 주님께 있을 뿐입니다. 주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주님의 믿음이 우리를 지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요한 16,33)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남겨 주시기 위해서, 우리의 연약함을 먼저 말씀하십니다. 이 ‘평화’는 의혹과 좌절과 혼동에 빠지고, 흩어져 제 갈 길을 가버릴 제자들에게 주는 평화입니다.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기에 주시는 평화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평화’란, 바로 그러한 처지에서도, 그 어떤 곤란과 슬픔 속에서도 하느님께 신뢰하고 의탁하는 것입니다. ‘평화’란 갈등이나 시련이나 고통이 사라진 상태도, 분열이나 전쟁이 없는 상태, 혹은 그 어떤 낙담이 전혀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의탁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평화’는 믿음의 고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실제 행동인 ‘위탁’에서 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6,33)
이는 평화가 “그분 안에서” 얻어지는 평화임을 말합니다. 곧 “그분 안에 머물 때” 얻어지는 평화이기 때문입입니다. 그러니, 입술로 하는 믿음의 고백이 아니라, 실제로 믿음의 행동으로 ‘그분 안에 살게 될 때’ 얻어지는 평화입니다. 곧 평화는 다른 그 어떤 것이나, 좋은 환경이나, 혹은 자기만족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분 안에서” 얻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승리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분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2)
이제, 우리는 그분과 함께 세상을 이깁니다. 그분이 주신 평화로 세상을 이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처럼, 우리는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존재”(필립 4,13)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주님!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옳고도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죄마저 뒤집어쓰고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지는 무능이 이기는 전능임을 알게 하소서.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에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사랑이 이기는 길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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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3. 부활 제7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991년에 운전을 배웠습니다. 어느덧 33년이 지났습니다. 본당 신부님께서 차는 ‘신발’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공간 감각이 부족한 편이라서 길 찾는 것이 늘 숙제였습니다. 눈앞에 목적지가 있는데도 빙글빙글 돌기도 했습니다. 그런 제게 큰 도움을 주는 것이 있었는데 ‘지도’입니다. 목적지가 있으면 지도를 몇 번이고 보고 또 보았습니다. 멀리 휴가를 갈 때면 지도를 길게 이어서 다녔습니다. 지도를 보면서 다니지만 길이 바뀌기도 하고, 새로운 건물이 생기기도 하기에 가끔 헤매기도 했습니다. 그런 제게 ‘희소식’이 생겼습니다. 내비게이션입니다. 이것은 신통하게도 길을 안내해 주었습니다. 저처럼 ‘길치’인 사람들에게는 고마운 친구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도 생겼습니다. “어머니의 말, 아내의 말, 내비게이션의 말을 잘 들으면 삶이 편하다.” 내비게이션은 다양한 기능으로 운전자를 도와줍니다. 교통감시 카메라가 있는 곳도 알려주고, 속도제한도 알려주고, 교통상황도 알려주고, 빠른 길도 알려줍니다. 길을 놓치면 새롭게 길 안내를 해 줍니다. 내비게이션이 나오면서 이제는 차에 지도를 가지고 다니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에도 ‘업그레이드’가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신앙인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첫째, ‘감사’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감사할 줄 모릅니다.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자기 능력, 자신의 재능, 자신의 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지금 잘 사는 것도, 지금 건강한 것도, 지금 높은 직책에 있는 것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감사할 줄 모릅니다. 그런가 하면 당연하게 여기던 것을 상실하면 이웃을 탓하거나, 원망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주어진 모든 걸 감사하면서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정성 어린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세리의 겸손한 기도를 칭찬하셨습니다. 성체성사는 ‘감사’의 마음이 가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체성사의 중심에는 ‘감사’가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항상 감사하십시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둘째, ‘유혹’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습니다. 사제복을 입었어도, 수도복을 입었어도,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되었어도 유혹은 바람처럼 소리 없이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도 3가지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라는 유혹입니다. 높은 데서 뛰어내려 보라는 유혹입니다. 권력을 주겠다는 유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유혹을 극복하셨습니다. 악의 세력은 다른 방법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다음에 하지’라는 유혹입니다. ‘남들도 다 그러는데’라는 유혹입니다. ‘나는 안 돼’라는 유혹입니다. 게으름과 자기 합리화 그리고 열등감은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유혹은 공든 탑을 무너지게 하고, 다 된 밥에 재를 뿌리게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주님 안에 편히 쉬기까지 내 마음은 언제나 불안합니다.” 성덕이 깊어도, 오랜 수양을 했어도 유혹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셋째 ‘고단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전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면서 슬퍼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을 순수하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 없어지고 말 황금도 불로 단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황금보다 훨씬 더 귀한 여러분의 믿음은 많은 단련을 받아 순수한 것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날에 칭찬과 영광과 영예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합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하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하느님의 큰 영광을 위해서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야 합니다.
“바오로가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리시어, 그들이 신령한 언어로 말하고 예언하였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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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3. 부활 제7주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용기를 주십니다. 세상을 이겼다고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우리가 세상에서 겪은 고난에 대해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다가올 고난에 대해서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늘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는데 그것을 우리는 다른 말로 ‘평화’라고 부릅니다.
주님께서도 고난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모두가 떠나갈 것을 아셨던 만큼 우리보다 더 큰 고난을 겪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혼자가 아니셨습니다. 늘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계셨습니다. 이 함께 있음은 주님께 커다란 힘이었습니다.
혼자라는 생각과 느낌은 우리 마음의 힘마저 빼앗아 버립니다. 그러나 혼자가 아니라면, 누군가가 나를 위해 마음 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어떤 짐도 지고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고난의 길을 걸으셨고, 우리에게도 그 힘을 나눠주시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고난의 길을 갈 때 혼자가 아님을 알게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늘 ‘내 안에 머물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머무를 때 우리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길은 누구에게나 펼쳐집니다. 나의 고난의 길과 다른 사람의 고난의 길은 다릅니다. 한 가족이라 하더라도 고난의 길은 다릅니다. 모든 사람은 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오늘도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고난의 길을 주님께서 함께 걸으십니다. 그리고 그 끝의 천상 행복도 우리와 함께 나누려고 기다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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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치면 산다.
누가 처음 말했을까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김밥집 사장님이 말하셨을까요?
얼마 전 사순 판공성사 부탁을 받고 방문한 성당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선·후배 신부님들과 판공성사를 위해 모였습니다. 아직 시작 시간이 되지 않아 기다리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중 한 신부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본당 예비자 교리를 어떤 식으로 하시나요?’
이 물음에 각 본당 신부님들은 자신의 본당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필요한 것들과 불필요한 것들…. 그리고 꼭 해야 하는 것들….
거의 모든 신부님이 꼭 필요한 것들을 4가지고 꼽았습니다.
교리, 성경, 기도, 성가.
이상의 4가지고 습관이 되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이 모든 신부님의 의견이었습니다. 4가지 모두 소홀히 할 수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신부님들은 한데 뭉쳐 더 좋은 것들을 찾고자 애쓰고 있었습니다.
뭉치면 산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닌 듯합니다. 이렇게 신부님들이 모여 교회와 교우들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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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3. 부활 제7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정의 여정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일치의 삶-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의 학인이 되어, 배우는 마음으로, 공부하는 마음으로 강론을 씁니다. 배워야 할 가르침은 날마다 쏟아집니다. 교황님의 가르침도 매일 빼놓지 않습니다. “인구과잉이 문제가 아니라 세상을 굶게 함으로 비난받아져야 할 바는 소비지상주의”라 갈파한 교황입니다. “이태리의 평균 연령이 47세요, 유럽의 저출산 현상으로 이제 옛 대륙이 아니라 늙어가는 대륙이 되었다”고 주의를 환기시켰습니다.
이어 교황은 “주님은 당신의 승천과 더불어 우리의 길을 하늘로 인도하신다”고 어제 승천대축일 강론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우정 관계의 하늘길 여정임을 밝히신 것입니다. 홍보주일 담화문중에는 특히 “마음의 지혜의 시야를 잃지 말아야 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새삼 하느님의 지혜이자 하느님의 사랑이신 예수님과 우정의 여정이 얼마나 절박한지 깨닫게 됩니다. 한걸음 한걸음 주님을 따르며 주님과의 우정을 깊이하며 그분의 지혜를 배우는 것입니다. 옛 어른의 오늘 말씀도 저에겐 주님의 말씀처럼 들립니다.
1.“물고기를 잡는 방법보다 더 큰 가르침은 ‘멀리 바다를 꿈꾸게 하는 것’이다.”<다산>
시야를 넓히는 꿈꾸기를 가르치는 것이 더 큰 가르침이라 하십니다.
2.“백성이 많은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들을 부유하게 해야 한다.
부유하게 한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가르쳐야 한다.”<논어>
민생 해결이 우선이고 이어 곧장 가르침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일상에서 좋은 지혜의 가르침을 배우는 점이 참으로 부실했음을 깨닫습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주님과 우정의 관계를 날로 깊이해야 함을 배웁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을 믿는다 하지만 이들의 부족함을 직시하시고 자신을 배울 것을 기대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그러나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예수님께서 온갖 시련과 외로움, 고독을 견뎌내고 버텨낼 수 있었던 비결은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라는 고백에서처럼, 아버지와의 깊은 일치 관계에 있었음을 봅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든 홀로하든, 우리의 평화이신 예수님과의 우정을 날로 깊이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예수님과 깊어지는 우정과 더불어 내적평화와 용기요, 세상을 이긴 예수님처럼 우리도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내적 힘이 생깁니다. 예수님과 날로 깊어지는 우정의 힘이, 은총이 저절로 예수님의 세상 승리에 참여할 수 있게 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이긴 비결이 아버지와의 관계에 있었듯이, 예수님과 우정의 깊이가 예수님의 승리에 참여함으로 우리 또한 세상을 이기게 합니다.
이래서 요셉수도원 배경의 하늘과 불암산은 저의 좋은 스승입니다. 자주 소개했던 ‘하늘과 산’이라는 시는 바로 주님과 우리의 우정 관계를 상징합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1997.2.>
여기 수도원에서 27년전에 쓴, 날로 주님과 깊어지는 일치의 우정 관계를 열망하며 자주 되뇌이는 고백시입니다. 이런 주님과의 근본적 우정 관계의 깊이와 더불어 사람간의 우정 관계도 깊어질 수 있습니다. 부부도반 역시 주님과의 우정과 더불어 이들간의 애정은 우정으로 변모될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과 날로 깊어지는 일치 관계의 우정의 빛나는 모범은 사도행전의 3차 선교여정에 오른 바오로 사도입니다. 바오로의 지칠줄 모르는 한결같은 선교 열정은 그대로 예수님과 일치 관계의 우정의 깊이를 반영합니다.
에페소에서는 요한의 세례만 받은 이에게는 예수님 이름으로 세례를 주면서 예수님과의 관계를 마련해 주시니, 성령이 그들에게 내려 신령한 언어로 말하고 예언도 하니 본격적으로 예수님과의 우정이 시작되었음을 봅니다.
마지막 대목에서 바오로 사도의 지칠줄 모르는 선교활동 역시 예수님과 우정의 깊이를 반영합니다. ‘바오로는 석 달 동안 회당에 드나들며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토론하고 설득하면서 담대히 설교하였다.’그러고 보니 다음 예수님 복음 말씀을 잘 배워 실천한 이가 영적승리의 사도 바오로임을 깨닫습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ㄴㄷ).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께서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복음의 핵심 말씀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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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3. 부활 제7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고난당할 때 우리는 흔자가 아니다
각자가 이 모든 세력을 거슬러 투쟁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 저는 인간 본성에 일정한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오로에 관해 “그는 내가 선택한 그룻이다”(사도 9,15)라고 쓰여 있고, 베드로에 관해 “저승의 문도 그를 이기지 못한다”(마태 16,18 참조)라고 쓰여 있으며,모세에 관해 “하느님의 친구"('탈출 33,11 참조)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이들 가운데 아무도,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말씀하신 그분의 능력이 그 안에서 활동하지 않는다면, 어떤 손상을 입지 않고서 동시에 적대 세력들의 온 무리를 거슬러 대항할 수 없을 것입니다 ... 저는 인간 본성이 그 자체로만은 천사들이나 높은 곳, 깊은 곳 또는 다른 어떤 피조물을 거슬러 투쟁을 지속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 본성은 그 안에 현존하시고 사시는 주님을 느끼면 신적 도움을 받았다는 확신에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빛,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시편 27,1).
-오리게네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6 사람은 숭고하다
사람은 새로운 성전이다.
하느님은 불이다. 우리는 그분의 불꽃을 우리 속에, 곧 우리의 핵 속에 지니고 있다. “이 불꽃은 하느님과 너무나 밀접히 연결되어 있고,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독특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모든 피조물의 이미지, 이미지 없는 이미지, 이미지를 뛰어넘는 이미지를 품고 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핵 속에서 하느님만큼 자유롭고, 이미지들을 여의고, 자유롭게 모든 이미지가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영혼의 터 안에는 하느님이 자신의 모든 신성과 더불어 있기 때문이다.”(168)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사도 28,17-31
로마에서 선교하다
사흘 뒤에 바오로는 그곳 유다인들의 지도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이 모이자 바오로가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나는 우리 백성이나 조상 전래의 관습을 거스르는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도, 예루살렘에서 죄수가 되어 로마인들의 손에 넘겨졌습니다.
로마인들은 나를 신문하고 나서 사형에 처할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으므로 나를 풀어 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나는 내 민족을 고발할 뜻이 없는데도 하는 수 없이 황제에게 상소하였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뵙고 이야기하려고 오시라고 청하였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희망 때문에 이렇게 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바오로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유다로부터 당신에 관한 편지를 받은 일도 없고, 형제들 가운데 누가 와서 당신에게 불리한 보고나 이야기를 한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분파가 어디에서나 반대를 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당신의 생각을 직접 듣고 싶습니다.”
그들은 바오로와 날짜를 정해 두었다가, 많은 사람을 데리고 바오로의 숙소로 찾아왔다. 바오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들에게 설명을 하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들을 들어 예수님에 관하여 그들을 설득하였다.
그러자 어떤 이들은 바오로의 말을 받아들이고 어떤 이들은 믿지 않았다.
그들이 이렇게 서로 의견을 달리한 채 떠나려고 할 때에 바오로가 한마디 덧붙였다. “성령께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여러분의 조상들에게 하신 말씀이 지당합니다.
곧 이 말씀입니다. ‘너는 저 백성에게 가서 말하여라.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느님의 이 구원이 다른 민족들에게 보내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들을 것입니다.”
바오로가 이 말을 마치자 유다인들은 서로 많은 논쟁을 하며 돌아갔다.
바오로는 자기의 셋집에서 만 이 년 동안 지내며,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였다.
그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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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3. 부활 제7주간 월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16,33)
예수님의 오늘 말씀은 아예 작정하시고 말씀하신 듯싶습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16,33)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세상을 살다 보면 모든 사람은 피할 수 없는 고난과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러기에 고통이 낯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고통은 남녀노소, 빈부귀천 혹은 인종, 종교와 관계없이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입니다. 개인이건 공동체이건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저 자신부터 고통을 마치 저의 애인 인양 평생 끌어안고 살아왔고, 제가 소속한 수도회 형제들도 그리고 가정도 예외가 아닙니다. 동일한 고난과 고통, 십자가는 아니지만 저마다의 고통을 겪고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론 사람들은 고통이 없는 유토피아를 생각하기도 하지만 이보다 어리석은 생각도 없을 것입니다.
고통의 기원과 의미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인간의 역사만큼 길고도 길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인 우리의 관심사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에서 단지 그분 죽음의 역사적인 사실에 초점을 모으기보다는 그 의미를 묻고 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의 의미는 바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만 용인되고 확인된다고 말입니다. 세상에 대한 예수의 승리는 바로 부활 사건이며, 부활을 통해서 우리의 고난과 고통의 이유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봅니다. 그 희망의 근거는 세상 안에 살아가기에 우리는 고통을 피할 수 없지만,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그 고통이 예수님의 고난-죽음-부활 사건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이 아니며 예수와 함께라면 이 세상에서 겪는 고통을 이겨낼 수가 있다는 새로운 희망입니다. 평화는 고난과 고통을 통해서 얻은 승리의 전리품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언급한 평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16,33) 라는 말씀은 이별의 보상선물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고난과 고통을 겪으면서 살아갈 우리들을 위한 주님의 다함 없는 바람이며 약속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고통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우리는 예수님 안에 항구히 머물러 있을 때, 세상의 승리인 부활을 통해 가져온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평화는 그러기에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이며, 주님께서 죽음을 극복하고 승리하심으로 가져다준 주님의 선물입니다. 마치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 때 기쁨을 얻고 기쁨을 누릴 수 있듯이 평화도 오직 승리하신 주님 안에 머물 때 얻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의도에서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16,33) 라는 희망과 격려의 메시지를 주십니다. 지금 우리 모두에게 주님께서는 부드러우면서 강하게 용기를 내어라, 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치 이 말은 부모가 실의에 젖어 살아가고 있는 자식에게 하는 말과 같이 들립니다. 지금 실의와 낙담에 빠진 우리 모두에게 주님께서 용기를 내어라!, 하고, 말씀하시면서 힘을 쏟아부어 넣어 주십니다. 누가 있어 이토록 확신에 찬 그리고 따뜻한 위로의 말씀을 해주시겠습니까? 그 위로는 단지 말이 아니라 승리를 얻기 위해 처절한 고난과 고통을 겪으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기에 그 말씀이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처럼 세상을 이기는 유일하고 참된 승리는 더 이상 세상적인 가치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가치로 우리의 의식과 행동양식을 바꾸는 데 있다고 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승리하셨기에 우리 또한 용기를 갖게 되었으며 주님의 도움이 있다면 우리가 할 수 없는 게 없을 것입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은 자신을 바꾸는 것이라고 봅니다. 자신의 변화는 세상을 바꿀 수 있고 세상에 대한 가장 위대한 승리이기도 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믿음의 승리이며, 이 승리는 바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을 때 가능한 승리입니다. 고맙게도 예수님은 오늘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말씀으로 살려는 저희가 용기 내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하루, 한 주간이 되도록 당신의 능력과 힘을 주십니다. 우리 편안한 마음으로, 다 함께 성가 44장 「평화를 주옵소서」를 마음으로 부르며 새 하루를 힘차게 시작합시다. 『날 이끌어 주옵소서. 내 가는 길 힘드오니 내 주님의 크신 힘에 나 굳게 의탁하리. 평화 평화 평화를 주옵소서. 그 영원한 참 평화를 우리게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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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3. 부활 제7주간 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세상을 이기는 길>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불신이
불신하라고
쉼 없이 부추길 때에
끝까지 신앙하는 겁니다
절망이
절망하라고
쉼 없이 부추길 때에
끝까지 희망하는 겁니다
증오가
증오하라고
쉼 없이 부추길 때에
끝까지 사랑하는 겁니다
불의가
불의하라고
쉼 없이 부추길 때에
끝까지 정의로운 겁니다
어둠이
어두워지라고
쉼 없이 부추길 때에
끝까지 빛나는 겁니다
탐욕이
탐욕스러워지라고
쉼 없이 부추길 때에
끝까지 내어주는 겁니다
저주가
저주하라고
쉼 없이 부추길 때에
끝까지 축복하는 겁니다
차별이
차별하라고
쉼 없이 부추길 때에
끝까지 보듬는 겁니다
배척이
배척하라고
쉼 없이 부추길 때에
끝까지 함께하는 겁니다
경쟁이
경쟁하라고
쉼 없이 부추길 때에
끝까지 더불어 가는 겁니다
무자비가
무자비하라고
쉼 없이 부추길 때에
끝까지 자비로운 겁니다
죽임이
죽이라고
쉼 없이 부추길 때에
끝까지 살리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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