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 영산성지가 있는
구수山(九岫山)
어제는 봄이 시작된다는 입춘이었다.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이라 해서
“봄이 시작되니 크게 길하고 경사스러운 일이 많이 생기기를 기원합니다.” 라는 말이
생각난다.
부모천년수 자손만대영(父母千年壽 子孫萬代榮)이란
“부모는 천년을 장수하시고 자식은 만대까지 번영하라.” 말도 있으니 자기나 남에
복을 비는데 인색해서야 되겠는가?
옛 부터 입춘에는 동풍이 불어 언 땅을 녹이고,
동면하던 벌레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물고기가 얼음 밑을 돌아다닌다고 하였다.
그러나 봄을 시샘하는 겨울의 마지막 발악인지 이삼일 전부터 강추위가 휘몰아치면서
그제는 눈발까지 날리며 기세가 등등하더니 어제 오늘도 추위는 수그러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올해는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렸고 강추위가 계속된 날도 많았다.
“겨울은 추워야 제철 맛이 난다”는 말이 너무나 사치스럽게 느껴졌던 추운겨울이었다.
그래도 봄은 코에서부터 온다고 냉이 향, 달래향이 마트 야채코너를 주름잡고 있었다.
눈 덮인 빈들엔 파릇파릇한 보리 싹이 돋아 있었고 이름 모를 작고 여린 연두 빛
아기 싹들이 여기저기 농가빈터를 매우고 있었다.
저 가날 뿐 몸으로 어떻게 언 땅을 뚫고 나왔을까,
저 보드라운 아기 살결로 어떻게 칼바람을 견뎌냈을까?
우리는 생명의 경이로움에 그저 감탄을 할 뿐이다.
오늘은 전남 영광군 백수읍에 있는 구수山(351m)을 산행하는 날이다.
원불교 창시자인 소태산 박중빈이 태어나 득도한 영산성지 북서쪽에 자리한 山으로
이곳은 성지순례 차 찾는 수만 명에 달하는 원불교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으로 유명하다.
소태산이 山神을 만나 삶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해 11세 때부터 5년간 기도를
올렸다는 마당바위와 기도실은 지금도 圓光대학생들이 이곳에서 기도를 올리는
정신수양소로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아침 6시45분,
겨울용 등산파카를 입고 아파트를 나서는데 찬 기운이 코끝을 쌩하고 건드린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아파트 동(棟)사이로 조경용 소나무가지가 그림처럼 늘어져있고
그 밑으로 둥근 가로등이 보름달처럼 정겹게 켜져 있다.
고개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길 잃은 반달이 방송용 케이블 선에 그대로 걸려있다.
그러고 보니 음력 설날도 얼마 남지를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오늘산행지가 영광에 있는 구수山으로 결정된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강추위로 잔뜩 움 추려 있는 회원들을 실고 확장 개통된 광주-영광 간 4차선도로를
달리던 산행버스는 백수읍 백암里 흥곡분교 앞에서 우리를 하차시켰다.
오늘 산행코스는 홍곡분교에서출발:-
봉화 령 -큰골峰 -불복 재 -구수山 -안부 -삼밭 재 -설렁峰 -상여峰 -옥여峰
-소태산 생가로 내려오는 종주구간 약 13km로 4시간 이상 소요되는 거리란다.
날씨가 춥다고 산행을 포기하는 회원들도 있었지만 우리는 산행을 시작했다.
영산성지 北西쪽에 서해바다 해풍을 막아주기라도 하듯 하늘 금을 이루며
아담하게 솟은 山.
구수山은 광주나 영광산악인 들이나 찾을 뿐 외부에 널리 알려지지 않는 山이라
흔한 관광객들조차 찾아보기 힘들다고 했다.
산마루에 오르면 들리는 것은 서해바다의 소금기어린 해풍소리와 뱃고동 소리일 뿐,
고만고만한 거리로 떠있는 섬들이 한 폭 그림을 만들어 내는 바다풍경조차 너무나
한가롭게 보였다.
산행路는 대체로 잘 가꾸어져 있어서 크게 불편한 점이 없었다.
작년가을에 떨어진 참나무낙엽들이 썩지 않고 그대로 쌓여있어 황금카펫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참나무 숲인 山능선은 마치 황토이불을 덮고 겨울잠을 자는 듯 포근하게 보였고
여기저기 잔설이 조금씩 남아 있어 겨울분위기를 풍겨주고 있었다.
발길을 옮길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낙엽소리가 마치 자장가처럼 들려 구수山은
노곤한 겨울잠에서 깨어나지를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상여峰을 오르는 삼밭 재 구간에서는 참나무줄기를 타고 올라간 넝쿨식물이 군락을
이루고 살아 있어 그 푸른 잎이 온실 속에서 자라는 상록활엽수처럼 보이기도 했다.
상여峰에서 내려다보이는 법성포는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처음 불교가 유입된 곳이라
전해지고 있다.
옥녀봉에서 동쪽 아래로 農地가 내려다보이는데,
소태산이 1918년 자신을 따르는 아홉 제자들과 함께 와탄川 범람을 막는 제방을 쌓아 기름진
옥토로 변모시켰다는 정관평이었다.
옥녀봉안부를 타고 山 아래로 내려오니 소태산생가가 있었고 생가주변의 노송단지에는
공원화작업을 위한 성토작업이 현재 진행 중에 있었다.
아홉 제자들이 최초로 세운 교당이 있었다는 구간도실 터도 있었다.
산자락 끄트머리에는 원불교의 상징인 동그란 원이 산꼭대기 바위벽에 그려져 있었다.
박중빈 (朴重彬, 1891.5.5~1943.6.1)
호는 소태산(少太山)
출생지는 전남 영광군 백수면(白岫面)
원불교의 창시자. 우주의 자연현상에 깊은 의심을 품고 20년간 구도에 힘쓴 끝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
1924년 익산에서 일원(一圓)을 최고의 종지(宗旨)로 하고 이를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삼는 불법연구회를 조직했다.
이것이 원불교의 시작이었다.
주요저서=원불교교전(敎典), 불조요경(佛祖要經)
오늘산행은 여기서 마치고,
회원들은 일정에 따라 전남 영광군 홍농읍 계마리(桂馬里)에 있는 한수원 영광원자력
발전소 견학을 했다.
별관에 있는 홍보실에서 원자력발전소건설에 관한 홍보영상물을 보았고,
발전소현장으로 가서 전기를 만들어 내는 발전과정과 전 과정을 컴퓨터로 통제 운영하는
주 제어실도 견학 했다.
영광원자력발전소는
95만kw급인 가압경수로型 1, 2호기,
100만kw급인 가압경수로型 3, 4호기,
100만kw급인 한국표준형원전 5, 6호기 등 원전 6기가 가동 중에 있다고 한다.
1, 2호기는 1981년 2월에 착공하여 1986년 8월에 1호기를,
1987년 6월에 2호기를 각각 준공하였다.
1,2호기는 고리원자력발전소 3, 4호기 건설 경험을 바탕으로 했으며,
고온기능시험기간 중에 원자로 냉각재 펌프만을 가열하여 증기를 생산,
발전기계통 병입에 성공함으로써 원자력발전소 건설기술자립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3호기는 1995년 3월, 4호기는 1996년 1월에 각각 준공되어 운전 중이며,
5호기는 2002년 5월, 6호기는 2002년 12월에 상업 운전을 시작했다는 설명이었다.
원자력발전소 견학을 마친 산행버스는 윤선도의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중
겨울 귀 절이 저절로 생각나는 백수해안도로를 따라 법성포항으로 갔다.
“구름 걷은 후에 햇볕이 두터웠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천지가 막혔으니 바다만은 여전하다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한없는 물결이 깁을 편 듯 고요하다”
항구는 길고 긴 포구전체가 굴비를 파는 가게로 이어져있었으며 가게 안에도 밖에도
판매용굴비가 가득 진열돼있었다.
요즘 굴비의 고장 전남 영광군 법성포항에서 굴비 말리기 작업이 한창이라는데,
주민들은 지푸라기로 팔뚝만한 굴비를 엮어 바닷바람에 말린다.
짭짤하고 눅눅하기가 딱 알맞은 바람이부는 법성포항에서 말린 영광굴비를 굴비중의
최고로 치는데 그중에도 1부터 3월 사이에 잡힌 조기가 살이 통통하게 오르고 알이
차있어 맛이 좋다고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해풍, 햇살, 정성이 키우는 “굴비의 왕”이라는 말이다.
예전에는
"돈 실로 가세. 돈 실로 가세. 영광 법성으로 돈 실로 가세."라는 뱃노래가 있을 만큼
참조기 어업이 성행했었으나 이제는 참조기나 굴비 값이 올라 모양이 비슷한
수조기를 참조기로 속여 파는 일도 더러 있다고 한다.
양동매씨들 중 회원 아들이 운영하고 있는 굴비판매점 “해광굴비”를 찾았다.
오늘 하산酒는 굴비집주인이 성심 성의껏 마련해준 술과 조기안주로 대신했다.
회원들은 산행의 피로를 풀었고 얼마 남지 않는 설 명절에 사용할 굴비를 구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굴비란 조기의 아가미를 헤치고 조름을 떼어낸 후 깨끗이 씻어 물기를 뺀 다음,
아가미 속에 가득 소금을 넣고 생선 몸 전체에 소금을 뿌려 항아리에 담아 이틀쯤
절인 후에 절인조기를 다시 꺼내어 보에 싸서 하루쯤 눌러 놓았다가 채반에 널어
빳빳해질 때까지 말린 것을 말한다.
한국연안에서 잡히는 조기 종류는 13여종 정도이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참조기와 수조기이다.
황석 어(黃石魚)라고 불리는 참조기는 몸빛이 회색을 띤 황금색이며,
입이 불그스레하고 몸통 가운데 있는 옆줄이 다른 조기에 견주어 굵고 선명하다.
참조기와 모양이 비슷한 수조기(부세)는 참조기보다 몸이 가늘고 편평하며 머리가
몸체에 비해 크고 몸빛깔이 황색이다.
특히 산란을 위해 3월 중순 영광 법성포 칠산 앞바다를 지나는 참조기를 쓴 굴비를
영광굴비라 하며 가장 유명하다.
고려 17대 인종 때, 난을 일으킨 이자겸이 정주(지금의 법성포)로 귀양을 왔다가
해풍에 말린 조기를 먹어보고 그 맛이 뛰어나 임금에게 진상하였다 한다.
그는 말린 조기를 보내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屈) 않겠다(非)”는 의미의 '굴비'라는
이름을 붙였다하는데 이때부터 영광굴비는 수라상에 올라가기 시작하였다한다.
영광굴비는 섶 간이라 하여 1년 넘게 보관해서 간수가 완전히 빠진 천일염으로
조기를 켜켜이 재는 것이 특징이다.
좋은 굴비는 머리가 둥글고 두툼하며, 비늘이 몸통에 잘 붙어 있고 배나 아가미에
상처가 없다.
또한 특유의 윤기 있는 노란빛을 띠고 있다.
보관 시 공기가 잘 통하는 그늘진 곳에 두고,
오래 두면 배에서부터 누런 기름기가 배어 나와 맛이 변하므로 적당한 시기에
냉장보관을 해야 한다.
전남 영광군 백수읍 구수山을 다녀와서
(2010년 2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