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평등 평화 행복 가득한 곳 희망의 나라로~’
남현봉 씨의 중후한 목소리와 김인혜 교수의 명쾌한 목소리가 혼연일체(渾然一體)를 이루며 sbs <스타킹> 무대에 울려 퍼지자 관객과 출연진은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희망’이 귀에 들리는 소리라면 꼭 이런 음색이 아닐까? ‘성악계의 여자 강호동’이라며 넉살좋게 자신을 소개한 김 교수는 화통하게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서울대 성악과 교수이자 동양인 최초 줄리아드음대 박사학위까지 받은 ‘엘리트’지만 그녀에게서 ‘딱딱한 교수님표 격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려운 가정환경을 딛고 일어선 그녀
김 교수가 자청까지 해 스타킹 무대에 선건 ‘꽃게잡이 폴포츠’ 남현봉 씨를 돕기 위해서다. 성악에 대한 꿈을 접어둔 채 꽃게잡이 일을 하고 있다는 그의 소식을 듣고 꼭 도와줘야겠다는 결심이 섰기 때문이다. 한눈에 현봉 씨의 재능을 알아봤다는 김 교수는 무엇보다 실전경험이 중요한 그에게 여러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줄 것이라고 했다.
그녀는 2008년 <아침마당>에 출연한 ‘수족관 폴포츠’ 김태희 씨를 도운 장본인이기도 하다. 자신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기꺼운 마음으로 달려가는 그녀에게서 목소리만큼이나 밝고 건강한 ‘희망의 기운’이 묻어났다.
예체능을 전공한 사람들에 대한 선입견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부유한 집안에서 부족함 없이 공부했을 것’이라는 인식이다. 그러나 김 교수의 사연을 듣고 보면 그러한 선입견이 얼마나 섣부른, 그야말로 ‘선입견’에 불과했는지 깨닫게 된다.
“어휴! 지금 생각하면 내가 그 시절을 다 어떻게 견뎠나 싶어요. 가정 형편으로 치자면 나만큼 어려운 학생이 없었을 테니까. 교회 장로님이었던 아버지는 늘 봉사하는 일에만 몰두했어요. 자선사업을 하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집이 담보로 잡혔던 일도 수십 번이 넘죠. 고등학교 때는 급기야 온 가족이 길거리에 나앉은 기막힌 상황도 벌어졌어요. 어린 마음에 어찌나 상처가 컸던지 아버지를 원망하고 미워한 적도 많았죠.”
성악가에 대한 꿈을 키워갔던 그녀지만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레슨조차 제대로 받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던가. 지인의 소개로 당시 서울대 강사였던 ‘황화자 교수님’을 만나게 됐다. 잠자코 그녀의 노래를 듣던 황화자 교수는 ‘너는 반드시 크게 될 재목’ 이라며 레슨비 없이 성악을 가르쳐주겠다고 나섰다. 그야말로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였다.
황 교수님에게 거의 공짜나 다름없이 성악을 배웠던 그녀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선생님께 과분한 가르침을 받으면서도 마음 한쪽에 늘 죄송한 마음이 들었어요. 나도 다른 친구들처럼 선생님께 근사한 선물을 해드리고 싶었는데 어디 그만한 돈이 있어야죠. 어느 날인가 집 근처 재래시장을 지나는데 정말 먹음직스럽게 생긴 딸기가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가진 돈을 탈탈 털어 겨우 딸기 한 봉지를 사드렸어요. 고작 딸기 한 봉지에 어찌나 감동을 하시던지 오히려 제가 너무 죄송했었죠.”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오직 노래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연습에 매달린 결과 그녀는 결국 선생님께 서울대 성악과 수석 입학의 기쁨을 안겨드렸다.
자신의 용돈은 물론 동생들의 학비까지 벌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학과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눈물이 쏙 빠지도록 엄하게 가르치셨던 이정희 교수님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가난해서 그 흔한 스카프 한 장 선물하지 못했던 제자 김인혜를 교수님은 누구보다 예뻐하셨다. 어느 해이던가 동아콩쿨대회에 나가 대상을 탄 그녀는 상금 30만 원을 들고 곧바로 백화점으로 달려갔다.
“상금은 무조건 이정희 선생님께 쓰고 싶었어요. 너무 감사한 일이 많았는데 지금껏 제대로 보답한 적이 없었으니까. 제일 비싸고 좋은 가방을 선물해드리고 싶어서 백화점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몰라요. 그러다 ‘란셀’이라는 브랜드에서 가방을 하나 골랐는데 난생 처음으로 그렇게 큰돈을 쓰자니 손이 벌벌 떨리더라고. 가방을 건네 드렸더니 선생님께서 깜짝 놀라서는 ‘얘가 미쳤잖니, 이렇게 비싼 걸… 얘가… 얘가…’ 하시며 계속 우셨어요. 평생 그 가방을 들고 다니셨는데…” 마치 어제 일처럼 기억이 생생하다던 김 교수는 끝내 눈물을 보였다.
훌륭한 은사님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줄리아드음대 박사학위까지 수여받은 그녀는 <뉴욕타임스>로부터 “뛰어난 발성과 천부적인 음악적 스타일을 보여준 최고 연주자”라는 격찬을 받을 정도로 대성했다.
김 교수는 “음악을 공부하는 학생들 중에 가정형편이 어려운 친구들이 꽤 많다”며 예술에 대한 열정이 꼭 경제적 여유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 만큼 좌절하지 말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 ▲ 1 초등학교 5학년. 서울시 소년소녀 합창단 시절. 2 딸 김수연씨와 시어머니 백수희 여사 3 초청 공연후 체코 대통령과 함께
가족은 나의 힘
학부 졸업 후 서울대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김 교수는 대통령상을 받아 예상치 못한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미국 줄리아드음대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를 하던 그녀에게 인생의 변화가 찾아왔으니 한국에서 교회 오빠, 동생으로 지내던 ‘그분’에게 프러포즈를 받게 된 것. 그녀의 나이 겨우 스물셋, 그의 나이 겨우 스물넷의 일이었다. 고심 끝에 청혼을 받아들인 그녀는 신혼생활을 즐기기도 전에 덜컥 임신까지 했다. 여름방학을 이용해 한국에서 딸을 출산한 김 교수는 핏덩어리 딸아이를 시댁에 맡겨놓고 보름 만에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딸을 보러 꼭 10개월 만에 한국에 왔어요. 그런데 아이가 나를 보자마자 막 울더라고요. 아이를 키워보질 않았으니 제가 뭘 알았겠어요. 그냥 옆에다 앉히고는 같이 놀아주려 무진장 애를 썼죠. 제법 친해졌다 생각했는데도 밤이 되자 아이가 계단을 기어올라 일하는 아주머니 방으로 가는 거예요. 참… 내가 엄마인데. 저 아이는 내 딸인데.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밤새도록 엉엉 울었어요.”
엄마에게 배신(?)을 감행했던 그 딸이 지금은 스물셋 어엿한 처녀가 됐다. 모전여전(母傳女傳)인지 딸 수연 씨 역시 서울대 성악과 수석 입학에 줄리아드음대까지 합격했다.
딸을 낳은 이듬해 아들을 낳은 김 교수를 두고 ‘너는 애 낳으러 학교 왔냐’며 혀를 끌끌 차는 친구들도 있었다.
“우리 남편이 4대 독자예요, 자꾸 아들 하나만 낳아달라고 보채길래 까짓것 얼른 낳아줬죠. 하하하!”
‘금이야 옥이야’ 5대독자 아들 성환 씨 때문에 웃는 날도 우는 날도 많았다는 김 교수는 우리 아들처럼 특이한 아이가 또 없을 것이라며 입을 떼었다.
“아마 제가 미국 출장 중이었을 거예요. 안부차 남편에게 전화를 했더니 남편 목소리가 영 심상치 않더라고요. 무슨 일이냐고 자꾸 캐물으니까 참다못한 남편이 울면서 그래요. 우리 아들이 가출을 했다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죠. 가족들 모두 이제나 저제나 아들을 기다렸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녀석이 딱 30만 원을 들고 해운대에 갔다 그만 소매치기를 당해서 집에 못 돌아오고 있었다는 거예요. 일주일 동안 해운대 주변에서 노숙을 했대요 글쎄. 애가 하도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니까 어떤 포장마차 주인은 국수까지 말아주더래요. 하하하. 결국 구걸을 해서 대전까지 올라왔어요.”
집 밖에서 일주일 동안 갖은 고생을 다했던 아들은 이후로 한층 의젓한 모습을 보였다. 아이들 얘기에 한껏 흥이 난 그녀는 천상 ‘엄마’였다. 미국에서 9년간 석·박사 공부를 하기까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언제나 힘을 보태준 사람이 있었다. 바로 그녀의 남편과 시어머니다.
외국 금융업계에서 일하는 남편은 김 교수에게 박사학위까지 받으라며 끝없는 지지를 아끼지 않았고, 시어머니는 공부하는 엄마를 대신해 두 남매를 지극정성으로 길러냈다. 두 사람이 없었다면 오늘의 김 교수는 아마 없었을지도 모른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그에게 조건 없는 희망을 걸겠다.
김인혜 교수만큼 음악의 힘을 예찬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그녀는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그에게 아무런 조건 없는 희망을 걸겠다.”고 말했다.
“소년원에 가서 노래를 부른 적이 있어요. 음악이 울려 퍼졌을 때 그 아이들이 보여준 순수한 눈빛을 잊을 수가 없더라고요. 음악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면 절대 악한 사람이 못돼요. 음악만큼 치유가 되고 위안이 되는 게 없어요. 누군가 제 음악을 듣고 긍정적인 생각을 갖는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죠.”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녀는 “하나님이 나에게 목소리라는 재능을 주신 만큼 그것을 잘 활용해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전하겠다.”며 웃었다. 노래가 필요한 곳이라면 그곳이 멋진 예술의 전당이든, 작고 소박한 무대 위든 가리지 않고 달려가는 그녀기에 진정성이 느껴졌다.
KBS 어린이 합창단으로 어릴 적부터 무대에 선 그녀에게는 재밌는 에피소드가 많다.
특히 역대 대통령에 얽힌 다양한 경험담이 꽤 흥미롭다. “어렴풋하게 박정희 대통령 생신 때 한복 입고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나요. 박 대통령은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계셨고, 육영수 여사께서 저희 합창단 아이들을 한 명 한 명 어머니처럼 포근하게 안아주셨죠. 아직도 그 장면이 잊혀지지 않네요. 몇 년 전 우연히 전두환 대통령을 뵐 기회가 있었는데 저한테 그러시더라고요. ‘자네가 내 덕분에 서울대 교수가 됐구만’ 대통령상을 받아 외국으로 유학을 갔으니 맞는 말이긴 하죠. 하하하. 고 노무현 대통령은 뭐랄까 인간적인 매력이 느껴지는 분이셨어요. 광복절 60주년 행사 때 제가 애국가를 불렀어요. 식이 끝나고 잠시 앉아 있는데 대통령께서 일부러 제 자리까지 오셔서 ‘애국가가 정말 좋다’며 인사를 해주셨어요.”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가감 없이 솔직한 인생담을 들려줬던 김인혜 교수는 인터뷰를 진행했던 두 시간 동안 인생의 필름을 다시 한 번 되돌려 영사(映寫)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아름답게 빛나고 있을 그녀의 인생에 명장면을 상상해본다? 김인혜 교수의 은사인 다니엘페로 선생님이 그러셨단다.
What a varied repertoire! 그녀의 삶에는 참 다양한 레퍼토리가 흐른다.
/ 여성조선
취재 장혜정ㅣ사진 신승희
첫댓글 아들이 성악을 하는 관계로 성악가로 서울대 교수인 김인혜교수에게 친근감을 느꼈습니다.
요즘 언론의 뭇매를 맞고 있어서 기사를 검색하다가 보니.. 이 기사가 있네요.
이렇게 온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던 교수님이 학생들을 매로 다스렸다는 생각에 염려가 큽니다. 그렇게 힘든 공부를 해서 따낸 교수직을 잃게 생겼으니.. 안타깝습니다.
결국..교수직을 잃게되긴 했는데...
사람맘을 어떻게 다 알 수 있겠냐만은..
평소의 미운털이 이해를 오해로 바꿔놓았나봅니다.
성악과의 수업은 대체로 다 비슷합니다. 남학생들은 뺨맞는 일도 .. 그래도 그냥 넘어가지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김인혜교수가 타켓이 된 것입니다. 주차 여러 대 시켜도 다 위반스티커 붙지는 않지요. 드러나면 문제가 되지요. 이번 사건으로 예능수업과 관례처럼 된 여러 사안들이 어느정도 정화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