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에 ‘이태원묘지 무연분묘 합장비(1936년)’가 남아 있는 사연
이른바 ‘문화주택지’의 등장으로 흔적 없이 사라진 서울 주변 공동묘지들
예로부터 서울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를 구분 지을 때 사용하는 용어의 하나로 ‘성저십리(城底十里)’라는 표현이 있었다. 이를 달리 ‘경성십리(京城十里)’라거나 ‘도성십리(都城十里)’ 또는 ‘성외십리(城外十里)’라고 적기도 한다. 일찍이 『세종실록』 「지리지(地理志)」의 ‘경도한성부(京都漢城府)’ 대목에도 ‘성저십리’ 항목이 등장하는데, 여기에는 그 범주를 “동쪽으로 양주 송계원(楊州 松溪院) 및 대현(大峴)에 이르며, 서쪽으로 양화도(楊花渡, 양화나루) 및 고양 덕수원(高陽 德水院)에 이르고, 남쪽으로 한강(漢江) 및 노도(露渡, 노량진)에 이른다”고 정의하고 있다.
이곳은 사산금표(四山禁標)가 적용되는 구간이며, 무엇보다도 금장(禁葬)과 금송(禁松) 등의 규칙이 엄격하게 집행되는 공간이었다. 조선 철종 때의 문헌자료인 『경조부지(京兆府誌)』에는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한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一, 도성십리(都城十里) 안에서는 투장(偸葬, 몰래 묘를 쓰는 것)을 금단(禁斷)한다. 대보동(大菩洞) 유현(踰峴)의 북쪽으로부터 우이천 하류(牛耳川 下流)로 들어가 남쪽으로 상하벌리(上下伐里), 장위(長位), 송계교(松溪橋), 신촌(新村)에 이르고, 두모포(豆毛浦)에 이르러서는 시내[川]로써 한계로 삼는다. 두모포로부터 서쪽으로 용산(龍山)에 이르기까지는 강(江)으로써 한계로 삼는다. 북쪽 대보동 서쪽으로부터 보현봉(普賢峯)을 거치고 저서봉(猪噬峯)의 한 갈래인 묘락(卯落)에 이르러 저서현[峴]이 되며, 서쪽으로 아미산(峨嵋山)에서 일어나 굽이쳐 흘러 서쪽으로 연서구관기(延署舊舘基)가 되니 대조리(大棗里), 석관현(石串峴)을 거쳐 두 시내가 합류되는 곳까지는 산등성이[山背]로써 한계로 삼는다. 서쪽으로 석관현 서남에 두 시내가 합류하는 곳에서 서남으로 시위동(時威洞) 남쪽, 사천도(沙川渡)에 이르면 골짜기 길[谷路]이 있으니 길[路]로써 한계로 삼고, 사천도에서 남쪽으로 흘러 성리(城里)를 지나고 또 서쪽으로 꺾어 망원정(望遠亭)에 이르면 시내로써 한계로 삼고, 망원정으로부터 마포(麻浦)에 이르기까지는 강으로써 한계로 삼는다.
一, 경성십리(京城十里) 내에 입장(入葬; 죽은 이의 장사를 지내는 일)을 하면 원릉(園陵)의 수목(樹木)을 훔치는 율(律)에 의해 논죄(論罪)하며, 기한을 정해 억지로 파서 옮기도록 한다. 본부(本府)에서는 송사(訟事)로 인해 발각된 것과 특교(特敎)로 적간(摘奸)하여 옮기도록 한 것 이외에 투장(偸葬) 등의 일은 군문(軍門)과 사도(四道)에 이속(移屬)하여 이를 거행토록 한다.
이러한 원칙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일관되게 유지되었고, 특히 대한제국 시기에도 도성 주변에다 밤에 몰래 묫자리를 쓰는 행위에 대한 단속이 이뤄진 흔적은 어렵잖게 확인이 된다. 예를 들어, 『대한매일신보』 1904년 11월 21일자에 수록된 「투장가중」 제하의 기사에는 이러한 내용이 남아 있다.
서서 금계정은 자래로 분명한 금산자내어늘 준준한 무식지배가 승야 투장하여 북망산을 만드니 그 형세가 그저 둘 수 없는 지라, 불가불 파 옮기려니와 진즉 금지치 못한 죄책으로 해서 경찰관도 또한 반드시 벌이 있으니라 하더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1905년 5월 29일에 제정 공포된 『형법대전(刑法大全)』을 보면, ‘장매위범률(葬埋違犯律)’ 항목에 “제448조 경성십리내(京城十里內)에 입장(入葬)한 자(者)는 징역 3년(懲役 三年)에 처(處)함이라” 라는 처벌규정이 엄연히 적용되고 있던 사실이 눈에 띈다. 이러한 상황이다 보니 성저오리 구역 내에서는 — 적어도 법률상으로는 — 무덤 하나 들어서는 것이 애당초 불가능한 판국이었고, 하물며 공동묘지(共同墓地)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할 여지는 더더욱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엄격한 법령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근대시기에 이르러 서울 주변 일대가 무덤들 천지로 변모한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정확히 어느 시점에, 그 무엇이 단초가 되었는지는 가려내기 어렵지만, 아무래도 외세가 밀려드는 와중에 대한제국 정부의 행정 통제력이 크게 약화한 틈바구니를 비집고 이러한 현상이 벌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특히, 1902년 5월에는 점차 득세하고 있던 일본인 거류민들에 의해 광희문(光熙門) 바로 외곽에 화장장이 설치된 일이 있었는데, 이것이 아마도 서울도성 인접지역에 화장장과 공동묘지가 들어서는 가장 이른 시기의 흔적인 듯하다. 이 과정에 대해서는 경성거류민단역소(京城居留民團役所)에서 편찬한 『경성발달사(京城發達史)』 (1912), 105~106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남아 있다.
화장장(火葬場)은 우리(즉, 일본인) 거류지(居留地) 다년(多年)의 문제였지만, 마침내 본년(本年, 1901년) 4월에 들어 우리 미마스 영사(三增領事)는 한성부윤(漢城府尹)과 교섭의 결과, 수구문외(水口門外)의 송림(松林) 사이에 70여 평(坪)의 땅을 차수(借受)하고, 와다(和田), 야마구치(山口), 야마자키(山崎), 코죠(古城), 모리(森) 등의 제씨(諸氏) 발기(勃起)로 주선인(周旋人)으로 삼아 1,200원여(圓餘)의 기부금(寄附金)을 모집하여 화장장의 건축을 했다.
…… 이 화장장은 본년에 착공하고 익(翌) 35년(1902년) 5월에 낙성(落成)했다. 이 화장장이 없었던 금일(今日)까지는 우리 거류민(居留民)의 사자(死者)는 혹은 남대문(南大門) 밖이거나 혹은 한강 하반(漢江 河畔)에서 타비 일편(陀毘 一片)의 연기로 보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화장장이 생겨나 사자(死者)를 대접하여 예(禮)를 다할 수 있게 된 것은 거류지민(居留地民)이 가장 만족하는 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묘지(墓地)의 제정(制定)이 없으므로 화장(火葬)에 붙인 뒤에는 그 유골(遺骨)을 각자 신봉(信奉)하는 바대로 경성(京城)에 있는 우리 사원(寺院)에 봉납하거나 또는 향리(鄕里)의 묘지(墓地)로 보낼 수밖에 없음은 유감(遺憾)이다.
여기에는 아직 광희문 밖 공동묘지(통칭 ‘신당리공동묘지’)는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로 묘사되어 있으나, 그 직후의 시점인 1906년이 되어 “삼판통(三坂通, 지금의 후암동) 1, 2번지와 그 부근의 갈월리(葛月里)에 3,067평의 땅을 사들여 일반 내지인(內地人, 일본인)에게 대여했다가 1914년 3월 31일 일본거류민단(日本居留民團)이 해체(解體)될 때 이를 폐지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와는 별도로 러일전쟁 직후 장차 일본군대가 영구 주둔할 후보지로 이른바 ‘용산군용지(龍山軍用地)’를 징발 수용할 당시에 이 구역 안에서만 무려 1만여 기(基)에 달하는 무덤이 잔뜩 포진하고 있었다는 얘기도 있다.
이에 관해서는 『황성신문』 1905년 8월 8일자에 수록된 「중민호원(衆民呼冤)」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채록되어 있다.
용산 등지(龍山 等地)에서 한강연변(漢江沿邊)까지 한성판윤 박의병 씨(漢城判尹 朴義秉氏)가 내부훈령(內部訓令)을 승(承)하여 일작(日昨)에 측량기사(測量技師)를 대동(帶同)하고 가옥전답(家屋田畓)과 분묘(墳墓)를 일병조사(一幷調査)하였다더니 재작일(再昨日)부터 시역(始役)하는데 분묘(墳墓)가 만여총(萬餘塚)이라. 유주총(有主塚)은 각해주(各該主)가 굴이(掘移)하고 무주총(無主塚)은 일병평토(一幷平土)하는데 기 경황(其景況)이 참측(慘惻)함은 불가형언(不可形言)이라. 해지인민(該地人民) 수백명(數百名)이 재작일(再昨日) 한성소윤 박승조 씨가(漢城少尹 朴承祖氏家)에 회동(會同)하여 기 일조(其一朝)에 유리환산(流離渙散)함과 굴총원억(掘塚冤抑)한 정상(情狀)을 호소(呼訴)하나 소윤(少尹)이 여하결처(如何決處)를 부득(不得)하여 작일 한성부(漢城府)로 내소(來訴)하면 판윤(判尹)으로 상의조처(相議措處)하마 하기로 …… (하략)
또한 『황성신문』 1907년 7월 5일자에 게재된 인명의숙 창립자 정재홍(仁明義塾 創立者 鄭在洪)의 장의안내광고(葬儀案內廣告)를 보면, “…… 하오(下午) 1시에 정동교당(貞洞敎堂)에서 장의(葬儀)를 거행하고 동(同) 3시에 남문외 아현공동묘지(南門外 阿峴共同墓地)에서 매장(埋葬)하올 예정이오니 …… 운운”하는 구절이 남아 있다. 요컨대, 적어도 법률상의 제한과 처벌조항이 여전히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저십리 구역 내에서의 금장(禁葬) 조치는 불과 수년 사이에 완전히 효력을 상실하여 사실상 사문화(死文化)의 상태에 들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조선시대 내내 도성 내의 모든 상여(喪轝)는 광희문(光熙門, 통칭 ‘시구문’)과 소의문(昭義門, 통칭 ‘서소문’) 두 곳을 통해서만 나올 수 있었던 제한을 철폐하고 모든 성문을 통해 자유통행을 허용한 것도 역시 이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뤄진 조치였다. 이에 관해서는 『대한매일신보』 1909년 3월 27일자에 수록된 「시체통행(屍體通行)」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한성내(漢城內)에 무론관민간(無論官民間) 시체(屍體)가 한성(漢城) 각문내문외(各門內門外)로 통행(通行)을 유래 엄금(由來 嚴禁)하는 것이 불가(不可)하다 하야 당국자(當局者)의 협의(協議)한 결과(結果)로 근경(近頃)에는 각 시체(各屍體)가 각문(各門)으로 자유통행(自由通行)하기로 결정(決定)하였다더라.
아무튼 ‘경술국치’로 인해 일제에 의한 식민통치가 본격적으로 개시되던 그 시점에는 이미 서울 도성의 사방이 모두 공동묘지의 군락으로 포위되어 있었는데, 『조선총독부관보』 1913년 9월 6일자에 게재된 「(경성부 지역) 공동묘지 설치허가」를 살펴보면 그 명단들이 망라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는 미아리공동묘지, 이문동공동묘지, 수철리공동묘지, 신당리공동묘지, 이태원공동묘지, 아현리공동묘지(봉학산), 염리공동묘지(쌍룡산), 신사리공동묘지 등 제법 익숙한 명칭의 공동묘지가 두루 나열되어 있다.
이 자료에는 이들 공동묘지의 ‘허가연월일’이 일괄하여 ‘1913년 9월 1일’로 표시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하지만 이는 1912년 6월 20일에 제정된 조선총독부령 제123호 「묘지, 화장장, 매장 급 화장취체규칙(墓地, 火葬場, 埋葬 及 火葬取締規則)」의 시행일(경성부 지역)이 바로 이날이기 때문에 그렇게 나타난 것으로 풀이되며, 이 규칙의 부칙에 “본령 시행할 때 현존하는 공동묘지는 본령에 의해 설치한 것으로 간주함”이라는 구절이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실제로는 각각의 묘지가 개설된 날짜가 이보다 훨씬 앞선 시기였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한편, 『매일신보』 1926년 12월 13일자에 수록된 「문제중(問題中)의 공동묘지(共同墓地), 장의사원(葬儀社員)의 의견(意見), 어느 곳이 과연 낫겠는가?」 제하의 기사를 보면, 흥미롭게도 여러 공동묘지에 대한 장의사들의 평판이 수록되어 있는 것에 눈에 띈다.
경성부민의 공동묘지를 어느 곳에 다시 늘리겠느냐? 작보한 바와 같이 수철리(水鐵里)와 길음동(吉音洞) 두 곳을 가지고 시새는 터이라. 이제 공동묘지와는 밀접한 관계를 가진 장의사 관계자의 말을 소개한다.
◇ 돌 많고 좁은 미아리(彌阿里)는 불가(不可), 보응사(普應社) 주무(主務) 신홍균(申洪均)
미아리(길음동)는 돌이 많은데다 땅이 좁습니다. 개인의 일족묘지(一族墓地)로 묘지를 한 장이나 또는 두 장만 묻는다고 하면 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만은 적어도 경성시민이 공동묘지라고 하면 미아리는 소용없을 듯합니다. 수철리도 별도리는 없지만은 미아리보다는 나을 것이오, 경성공동묘지로 제일 낫기는 이태원(梨泰院)이외다.
◇ 처음 몇 분만 미아리(彌阿里)가 좋다, 주무(主務) 중앙장의사(中央葬儀社) 신경천(申敬天)
먼저 사용하시는 시민 몇 분에게는 미아리가 좋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지금 처음이므로 새 산에다가 처음 매장하시는 자질로는 좋을 듯합니다. 그러나 많이 사용할 편으로 보든지 또는 교통으로 보든지 수철리가 나을 듯합니다.
◇ 수철리(水鐵里)가 제일 좋다!, 주무(主務) 한성장의사(漢城葬儀社) 이덕인(李德仁)
수철리(水鐵里) 공동묘지도 별로이 좋지는 못하지만은 동소문 밖 '미아리'에다가 정한다고 하면 교통으로 보든지 기타 무슨 방면으로 보든지 수철리가 나을 것입니다. 미아리의 제일 결점으로는 지면이 좁아서 못쓸 것입니다. 일년도 못가서 모자랄 터이니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저의 의견으로는 수철리가 매우 좋을 줄 생각함.
그런데 이러한 서울 지역 공동묘지의 변천사를 죽 훑어보면 몇 가지 특징적인 측면이 포착된다. 우선은 그것들의 수명(즉, 사용연한)이 생각만큼 길지 않다는 것이 그 하나이다. 예를 들어, 신당리묘지는 1928년 11월에, 이태원묘지는 1931년 4월에, 아현리묘지는 1932년 5월에, 수철리묘지와 염리묘지는 1937년 4월에 더 이상 무덤을 쓸 자리가 없다는 이유로 각각 매장이 금지되거나 묘지 자체가 폐지되는 수순을 밟았던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니까 이들 공동묘지의 수명이란 것이 아무리 길게 잡아도 20여 년 남짓에 불과했던 셈이다.
이와 아울러 — 지극히 당연한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 공동묘지의 위치가 서울도성의 인접지에서 점점 더 외곽으로 밀려나는 추세를 나타내는 것도 또 다른 특징의 하나이다. 경성부의 인구팽창과 더불어 성외지역(城外地域)으로 계속 주거지의 확장이 필요한 상황이었고, 더구나 경성부청(京城府廳)의 입장에서는 각종 시책사업에 투입되는 예산액의 부족사태를 타개하기 위해서라도 기존의 공동묘지 지역을 주택지(住宅地)로 전환하여 이를 방매처분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애당초 공동묘지 자체를 죽은 이들의 영원한 안식처라기보다는 재원마련을 위한 하나의 수익창구로 간주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에 따라 가장 규모가 컸던 이태원공동묘지(梨泰院共同墓地)와 같은 곳에서는 일찍이 1930년을 전후한 시기에 벌써 이 지역 전체를 문화주택지(文化住宅地)로 전환하려는 시도가 구체화한 흔적이 눈에 띈다. 이에 관해서는 『조선신문』 1930년 11월 22일자에 수록된 「세키미즈 전 부윤(關水 前府尹) 치토산(置土産, 오키미야게)의 남산 산록(南山 山麓) 2천여 만평(萬坪), 머지않아 총독부(總督府)에서 불하결정(拂下決定), 신경성(新京城)의 문화주택지(文化住宅地) 출현(出現)」 제하의 기사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앞서 경성부(京城府)가 협의회(協議會)의 정식자문(正式諮問)을 거쳐 총독부(總督府)에 평당(坪當) 1원(圓) 50전(錢) 이내(以內)로
△ 13만 평(坪)의 불하(拂下) 처리를 신청중(申請中)인 남산 남산록 불하(南山 南山麓 拂下)의 건(件)은 세키미즈 전 부윤(關水 前府尹)이 총독부 산림부(山林部)와 최후적 교섭(最後的 交涉)의 결과(結果), 산림부 당국도 대경성 건설(大京城 建設)을 적극적 원조(積極的 援助)하는 의미(意味)로 고양군 한지면 소재(高陽郡 漢芝面 所在)의 국유임야(國有林野), 즉 남산 남산록 13만 평을 평당 99전여(錢餘, 입목을 포함)로 경성부에 불하하는 것으로 결정하여 목하(目下) 총독부 내무국(內務局)에 회송(廻送)하고 기본재산(基本財産)으로서의 축적방법(蓄積方法) 기타를 심의중(審議중)이며, 머지않아 부민(府民)의 요망(要望)과 같이 99전 남짓의 안치(安値, 싼 가격)로써 기본재산으로 하여 불하를 주는 것으로 되었는데, 부(府)에서는 우(右) 국유임야의 불하에 보다 이상가치(以上價値)를 부여하고자 이곳에 인접(隣接)한 이태원(梨泰院)
△ 부유묘지(府有墓地)를 이전개장(移轉改葬)하고 그 적지(跡地)의 10만 평(坪)을 주택지(住宅地)로 개방(開放)하여 새로 불하를 받을 남산 산록 13만 평(坪)과 아울러 23만여 평(坪)의 신시가지 건설(新市街地 建設)에 착수하는 것으로 결정(決定), 더구나 목하(目下) 총독부에 신청중인 남산 남측(南山 南側)
△ 국유임야(國有林野)를 공원지(公園地)로서 무상대하(無償貸下)하는 건(件)도 총독부의 양해(諒解)를 얻은 모양(模樣)이므로 이것과 서로 어울려서 신경성(新京城)의 출현(出現)도 점점 더 머지않아 다가올 것이다. 우(右)에 대하여 세키미즈 전 부윤은 말하길
“남산 산록 13만 평의 불하문제도 총독부 및 경기도청의 원조에 따라 불하를 받을 것으로 결정되어 나의 함흥(咸興) 부임 전까지에는 정식의 법령(法令)이 발(發)해질 것으로 생각되며, 부협의회(府協議會)에서는 평당(坪當) 1원(圓) 50전(錢) 이내로 불하를 받을 것처럼 자문(諮問)하였으나 부협의회 측에서는 1원(圓) 이내로 불하를 받도록 노력하리라는 희망(希望)이 있어서 종종(種種) 접척(接捗)의 결과, 평당 1원 이내로 불하를 받는 것이 가능해져 그 무엇보다 기뻤었고, 게다가 목하(目下) 총독부랑 도측(道側)과 교섭중(交涉中)인 행정구획(行政區畫)의 확장(擴張)에 동반하여 접속지역(接續地域)의 편입실현(編入實現)이 하루라도 빨라지길 기원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1년 3월 28일에는 경성부 고시 제19호를 통해 “고양군 한지면 이태원동, 한강동, 보광리 소재 이태원묘지에 있어서 매장은 소화 6년(1931년) 4월 1일 이후로는 이를 인허(認許)하지 않음”이라는 내용이 공표되었다. 이와 아울러 이에 대한 대체공간으로 삼고자 시급히 마련된 곳이 바로 ‘망우리공동묘지(忘憂里共同墓地; 1933.9.8일 신설)’였다.
그런데 새롭게 마련된 공동묘지라고 하는 것은 기존의 공동묘지를 완전히 철폐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는데, 이 역시 경성부가 재정결핍을 타개하는 돈벌이 수단의 하나로 고안한 방책이었다는 점은 『매일신보』 1931년 5월 9일자에 수록된 「망우리 전 도유산림(忘憂里 前 道有山林) 불하운동(拂下運動)에 주력(注力), 미아리묘지도 불원하여 충만, 공동묘지(共同墓地)로써 이용(利用)」 제하의 기사에도 잘 드러나 있다.
재정결핍(財政缺乏)이 절정에 달한 오늘에 있어서 이에 타개책(打開策)으로는 오직 국유임야(國有林野)를 불하하여 사업을 일으키어 돈벌이를 하는 것이 다만 하나의 첩경로(捷經路)이라고 생각한 경성부 당국자들은 이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며 제1차로 주택지(住宅地)의 계획을 세워가지고 불하운동에 착수하였던 남산(南山) 뒤 대국유임야의 불하도 성공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제2단으로 불하운동에 착수한 경춘가도(京春街道) 망우리(忘憂里)에 있는 도유림(道有林) 75만여 평의 불하운동도 이미 도당국의 양해도 성립되며 한 평에 약 8전씩 6만 원 가량에 불하하기로 되었다.
그리하여 그 용도(用途)에 대하여 숙고(熟考)한 나머지 무럭무럭 자라나는 대경성의 백년대계(百年大計)로 현재 사용하고 있는 다만 하나의 미아리(彌阿里) 공동묘지도 불과 수년이면 이 역시 만원(滿員)이 될 것이다. 그와 함께 이것도 공동묘지로 사용하기로 하는 동시에 일방으로 구 공동묘지이던 시외 이태원(梨泰院)의 105,120평, 아현리(阿峴里) 40,020평의 분묘를 철폐하고 이 역시 주택지를 건설하여 재정완화에 이바지하기로 되었다.
이러한 결과로 이태원공동묘지는 “불원(不遠) 다른 곳으로 이전 개장(移轉 改葬)이 부득이”하다는 이유를 내세워 우선 1935년 4월 6일부터 9월 30일까지 기한을 정하여 묘지내 분묘의 관리인 또는 연고자로 하여금 분묘신고용지(墳墓申告用紙)를 제출토록 하였다. 그리고 해를 바꿔 1936년 4월 1일이 되자 “도시계획 탓에 이태원공동묘지의 이전 개장이 결정되었으므로 그해 10월 10일을 기한으로 삼아 개장인허증(改葬認許證)을 발급받아 분묘을 이장할 것”을 종용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물론 이 기간 내에 개장이 이뤄지지 않으면 잔존 무덤을 전부 무연분묘(無緣墳墓)로 간주하여 경성부에서 직접 개장 집행을 할 것이라는 예고도 함께 곁들여졌다. 그리고 관리인 또는 연고자에 의해 묘지 이장이 이뤄지는 경우, 각 무덤에 대해 피장자(被葬者)가 대인(大人)이면 6원, 소인(小人)이면 3원의 비용을 지불하여 다른 공동묘지로 옮겨가거나 화장 처리의 방식으로 택하도록 했다.
이태원공동묘지의 무연고 분묘 처리 과정에 관한 연혁 정리
일자 | 내용 | 비고 |
1931.3.28 | 이태원공동묘지(이태원동, 한강동, 보광리 소재)에 대한 매장금지조치(4월 1일 이후) | 경성부 고시 제19호 |
1933.9.8 | 망우리묘지(양주군 구리면 망우리, 동 교문리 및 고양군 뚝도면 면목리 소재)의 신설 | 경성부 고시 제118호 |
1933.12.16 | 망우리공동묘지의 가족묘지 사용허가 | 경성부 고시 제156호 |
1935.4.1 | 이태원공동묘지(이태원리, 보광리 소재)의 이전을 위한 개장 예정에 따라 분묘관리인 또는 연고자 신고접수개시(4월 6일부터 9월 30일까지) | 경성부 고시 제33호 |
1936.4.1 | 경성부의 구역확장에 따른 신규편입지역의 공동묘지 명칭에 따라 ‘이태원공동묘지’를 ‘이태원 제1묘지(이태원정, 보광정, 한남정 소재)’와 ‘이태원 제2묘지(보광정, 한남정 소재)’로 구분 | 경성부 고시 제51호 |
1936.4.1 | 이태원공동묘지(이태원리, 보광리, 한강리 소재)의 분묘개장개시(10월 10일 기한) 및 무연분묘 개장집행예고 | 경성부 고시 제72호 |
1936.8.27 | 망우리공동묘지의 보통묘지 사용허가(지도표시지역) | 경성부 고시 제168호 |
1936.9.1 | 이태원 제2공동묘지 중 보광정 지역에 대한 매장금지조치 | 경성부 고시 제167호 |
1936.10.11 | 이태원공동묘지의 무연분묘(망우리공동묘지로 이전) 개장 착수에 앞서 위령법회 집행 | - |
1937.4.8 | 이태원 제1묘지의 분묘(유연 무연 일괄) 이장 완료 | 망우리공동묘지 |
1937.4.10 | 이태원 제2묘지(한남정 소재)에 대한 매장금지조치 | 경성부 고시 제45호 |
1937.4.15 | 이태원 제1묘지(이태원정, 보광정, 한남정 소재)의 폐지 | 경성부 고시 제61호 |
1937.6.9 | 이태원묘지 무연분묘 합장묘비(망우리공동묘지 소재)의 건설 준공과 더불어 위령법회 집행 | - |
(*) 자료출처 : 『경성휘보(京城彙報)』에 수록된 내용에서 발췌 정리 |
그런데 문제는 역시 이러한 절차를 밟아 정상적으로 묘지를 수습하여 옮긴 것보다 주인 없는 무덤으로 남겨진 이른바 ‘무연분묘(無緣墳墓)’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하여 『동아일보』 1935년 4월 26일자에 수록된 「이태원(梨泰院)이 4만(四萬) 분묘(墳墓), 무연묘(無緣墓)가 7할여(七割餘), 아총(兒塚)만이 2만 7천 5백 여(餘), 주택지(住宅地) 만들려고 굴총공고(掘塚公告)」 제하의 기사에는 그 이유가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이승을 버리고 저승의 손이 되어 척신이 부외 이태원공동묘지에 파묻혔던 4만여 명의 시체는 주접한 한줌의 흙도 제 것이 못되어 어디로 이장케 될 운명에 당면하고 있다. 그는 4년 전 공동묘지가 대만원을 이루어 매장을 폐지한 이후로 그의 인접지는 날로 주택지로 화하여 이를 소유한 경성부로서는 장차 그를 주택지로 팔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라 한다. 그의 이전개장은 경성부와 또는 연구자의 손에 장차 집행될 모양이라는데 경성부는 방금 그의 준비로 연고자의 유무를 조사하는 중 그 중에는 상당히 유명한 사람들의 시체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의 시체는 대정 3년(1914년) 10월 이 땅에 공동묘지를 개설한 이래 소화 6년(1931년) 3월 말일까지 공동묘지를 폐지한 때까지 전후 17년 동안에 그에 파묻힌 시체는 대인이 13,764, 소아가 27,557이다. 그 중에는 연고자가 있는 것은 겨우 2할 5푼밖에 아니 되고 그밖에 7할 5푼 가량은 거의 연고자가 없는 무연묘(無緣墓)라 한다. 그의 생전 이승에서도 의식이 곤란하여 주접할 안주지가 없어 넓은 이 땅 위에 유랑하는 한과 고독의 불쌍한 사람들과 또는 세상에 나와 철도 나기 전에 애달프게도 이 세상을 떠난 아이들이 더욱 많은 까닭이라 한다. 봄도 저물어 가 모춘, 구천지하에서 오래 눈 감고 있던 그들의 수난은 그들의 유족들에게 애도의 정을 이끌어 마지않는 중이다.
어쨌거나 이 와중에 이들 무연분묘 3만여 기(基)에 대해서는 1936년 10월 11일에 위령법회(慰靈法會)가 집행된 것을 신호로 하여 경성부 당국에서 일괄 개장 작업에 착수하였고, 특히 이들 가운데 전혀 형적도 없는 무덤으로 연고자가 전연 없을 듯한 것에 대해서는 망우리공동묘지에 합장(合葬)처리하는 것으로 결정되고 말았다. 이러한 무연분묘 처리의 흔적으로 남은 것이 바로 ‘이태원묘지무연분묘합장비(梨泰院墓地無緣墳墓合葬碑;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산34번지 망우리공원)’이다.이 묘비석의 뒷면에는 “소화 11년(1936년) 12월, 경성부(昭和十一年 十二月 京城府)”라는 표시가 남아 있지만, 실제로 이 비석이 건립 제막된 것은 그 이듬해인 1937년 6월 9일의 일이다. 이에 관해서는 『매일신보』 1937년 6월 9일자에 수록된 「역려인생(逆旅人生)의 간 자취, 적료무연(寂廖無緣)의 일배토(一坏土)들, 망우리(忘憂里)에 개장(改葬)된 무연분묘(無緣墳墓) 2만 8천 기(基), 경성부(京城府)에서 위령제(慰靈祭)」 제하의 기록을 통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경성부 위생과에서는 이태원공동묘지(梨泰院共同墓地) 제1묘지에서 무연분묘와 유연분묘를 지난 4월 8일까지 전부 양주군 구리면 망우리(楊州郡 九里面 忘憂里)묘지에 개장(改葬)을 필하였으므로 9일 오후 2시부터 망우리묘지 안에서 전기의 이태원으로부터 개장되어 온 분묘에 대하여 위령제(慰靈祭)를 성대하고도 엄숙하게 거행하리라는데 연고자가 있는 분묘 4,778기는 망우리에 개장된 것도 있고 다른 지대로 개장된 곳도 있지마는 연고자가 없는 28,338기는 전부 망우리에 개장되었으므로 이들의 영혼은 9일의 위령제를 받으면 다시는 술 한 잔도 부어줄 사람이 없는 무연고총(無緣故塚)의 가련한 영혼들이라 한다.
[저주(咀呪) 받는 도시(都市), 조취모산(朝聚暮散)이 주원인(主原因)]
전기의 이태원공동묘지는 대정(大正) 3년(1914년) 7월 6일 즉 지금부터 24년 전에 창설된 것으로서 전기한 바와 같이 무연고총이 28,338기나 된다는 것은 그 가운데 행려병 사망자(行旅病 死亡者)와 유치아의 백골도 있다는데 도시에 오는 사람도 많지마는 도시를 저주하고 떠나가는 사람도 상당히 많은 것을 알 수가 있고 또 그들의 대부분은 일정한 곳에서 주거하지 못하고 유리하는 사람들이 되고만 것도 알 수가 있는 것이 전기의 개장문제는 오래 전부터 광고와 갖은 수단으로 연고자를 찾았어도 종내 이와 같은 무연고총이 있었다는 데서 짐작되는 배라고 한다.
그렇다면 4만여 기가 넘는 무덤들이 몽땅 사라진 ‘이태원공동묘지’는 그 이후 어떠한 모습으로 바뀌었을까? 폐허지(廢墟址)로 남은 이곳은 당초 경성부 당국에서 의도한 바와 같이 장차 부촌(富村)의 상징이 될 거대한 문화주택지(文化住宅地)로 서서히 변모되어 갔는데, 예상대로 다수의 분양업자들이 이곳을 주목하여 불하(拂下)요청이 쇄도하는 통에 자연히 땅값마저 크게 올라가는 결과를 불러왔던 것이다.
이로 인해 불과 수년 사이에 이 일대는 문화주택과 상점 건물이 속속 들어서게 되었지만, 그곳의 소유자는 절대다수가 이른바 ‘내지인(內地人, 일본인)’의 몫으로 돌아갔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조선일보』 1938년 11월 29일자에 수록된 「세궁민(細窮民)은 쫓겨나고 문화주택(文化住宅)만 격증(激增), 남산주회도로 부근(南山周廻道路 附近)에」 제하의 기사는 당시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경남(京南)] 남산주회도로의 개통을 목전에 두고 경남 일대의 발전상은 괄목할 것이 있는데 금번 이 도로는 주택구로 설정된 전 공동묘지 터와 기타 남산 부근에 산재한 약 60여만 평의 경성부의 유일한 자원인 부유지를 활용코자 하는 계획에서 개척하는 특설도로인데 이 부근은 또한 지력이 전부 풍광명미한 관계로 신축가옥이 나날이 늘어가고 있다. 지난 8월부터 금 11월까지의 신축가옥을 조사해 보건대 이태원정(梨泰院町)에 17호를 비롯하여 삼각지와 신당정에 4개월 간에 132호이다. 건축물을 보건대 대개가 이층 문화주택과 상점 건물로 그 중 조선 사람의 집은 이태원정에 불과 16호에 지나지 않으며 나머지는 전부가 내지인의 소유이다. 그리고 이 틈바귀에 있던 세민들은 할 수 없이 집을 팔고 부외로 뚝 떨어져 속속 이주하는 정경에 있는 것이 많다 한다.
그러고 보면 망우리공원에 남아 있는 ‘이태원묘지무연분묘합장비’는 일제가 새로운 문화주택지를 확보하는 동시에 이를 통해 재정결핍을 해소하려는 방책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더구나 그 재원이란 것이 모두 죽은 이들의 안식처를 파헤친 댓가로 나온 것이니만큼 — 좀 억지스럽게 말하자면 — 이것이야말로 글자 그대로 ‘백골징포(白骨徵布)’의 전형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 이 글은 『민족사랑』 2024년 6월호에 게재하였던 것을 수정 보완하였다.
각주 01) 『세조실록』 세조 7년(1461년) 2월 27일 기사를 보면 “한성부에서 아뢰기를, 경중 오부(京中 五部) 밖의 성저십리(城底十里)는 본디 소관처가 없어서 권농관(勸農官), 이정(里正) 등이 일의 크고 작은 것이 없고 시비(是非)를 가리지도 않고 임의대로 본부(本府, 한성부)에 장고(狀告)하니 대체(大體)에 어그러짐이 있으므로 청컨대 각기 그 부근을 각부(各部, 오부)에 분속(分屬)시켜서 항상 검찰(檢察)을 가하도록 하소서 라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자료를 통해, 바로 이때부터 ‘성저십리’ 구역이 제각기 한성 오부의 편제로 편입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단순히 ‘성외(城外)’로만 일컫던 이들 지역에 방(坊)의 명칭이 생겨난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었는데, 예를 들어 영조 27년(1751년)의 기록인 『어제수성윤음(御製守城綸音)』에 수록된 「도성삼군문분계지도(都城三軍門分界之圖)」와 「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에는 성외지역(城外地域)으로 서강방(西江坊, 서부), 용산방(龍山坊, 서부), 둔지방(屯之坊, 남부), 한강방(漢江坊, 남부), 두모방(豆毛坊, 남부) 등의 5개방이 이때 신설된 흔적이 나타난다. 또한 『정조실록』 정조 12년(1788년) 10월 16일의 기록에는 흥인문 밖의 성외지역 일대가 인창방(仁昌坊, 동부)과 숭신방(崇信坊, 동부)으로 일괄 편입되었으며, 이와 동시에 창의문과 돈의문 밖의 성외지역에 걸쳐 3개의 방이 새로 설치되어 여기에 각각 상평방(常平坊, 북부), 연은방(延恩坊, 북부), 연희방(延禧坊, 북부)이라는 명칭이 부여되었다고 전해진다.
각주 02) 근대개항기에 ‘양화진외국인묘지(楊花津外國人墓地)’가 형성되는 과정도 바로 여기에 나오는 성저십리 이내의 매장금지조치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1890년 7월에 서양인 의료선교사이자 제중원(濟衆院)의 원장으로 있던 헤론(John W. Heron; 惠論)이 숨지자 그의 장지문제가 불거졌을 때, 처음에는 도성 주변 지역의 금장(禁葬) 원칙이 적용되어 매장이 불허되었다가 ‘성저십리’ 구역의 맨 끝자락에 해당하는 양화진에 겨우 묘역이 마련되기에 이른 것이 바로 ‘양화진외국인묘지’의 창설 기원이다. 이와 관련하여 알렌(Horace N. Allen)이 정리한 『연표(A Chronological Index)』 (1901), 27쪽을 보면, “[1893년 10월] 양화진 묘지규칙(Yang Wha Chin Cemetery Regulations)이 제정되었다. (그 후 1896년 11월 12일과 1901년 1월 8일에 각각 개정)”이라는 구절이 남아 있는 것이 눈에 띈다.
각주 03) 이에 관한 것으로 『황성신문』 1901년 3월 25일자에 「화장설장(火葬設場)」 제하의 기사에 “주경일영사(駐京日領事)가 한성부(漢城府)에 조회(照會)하되 한성내 거류(漢城內 居留) 일본인(日本人)의 사시(死屍)를 종래(從來)로 수구문외(水口門外)에서 화장(火葬)이온 바 우(右) 화장장(火葬場)에 상당(相當)한 설비(設備)가 무(無)하여 참상(慘狀)을 불인견(不忍見)뿐더러 차(且) 취기(臭氣)가 발산(發散)하여 위생상(衞生上)에 불소(不少)한 해(害)가 급(及)하오니 해 부근지 일구(該 附近地 一區)를 획정시명(劃定示明)하라 하였더라”는 내용이 남아 있다.
각주 04) 이와 관련하여 『대한매일신보』 1907년 8월 3일자에 수록된 「무주시체화장(無主尸躰火葬)」 제하의 기사에는 “재작일(再昨日) 한병전사자(韓兵戰死者) 68명(名)을 광희문외 묘지(光煕門外 墓地)로 수용각치(收容刻置)하였는데 한성부(漢城府)에서 각인 시체(各人 尸軆)를 멱거(覓去)하라고 반포(頒布)하였는데 약과기일(若過幾日)이면 무주시체(無主尸體)는 화장(火葬)한다더라” 라는 내용이 남아 있다. 이를 통해 적어도 1907년 군대해산(軍隊解散) 당시의 시점에는 이미 신당리 공동묘지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각주 05) 이에 관한 내용은 오무라 토모노죠(大村友之丞), 『경성회고록(京城回顧錄)』 (1922), 236쪽과 경성부 편찬, 『경성부사(京城府史)』 제2권 (1936), 891쪽에 각각 수록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이들 자료에는 “대정 2년(1913년) 총독부로부터 묘지로 만들 목적으로 하부(下附)를 받은 광희문외(光熙門外; 신당리)의 신묘지(新墓地) 118,600여 평(坪), 마포 봉학산(麻浦 鳳鶴山)의 만리재 신묘지(萬里峴 新墓地) 41,400여 평(坪)은 두 곳의 화장장과 더불어 이를 경성부(京城府)로 인도(引渡)하여 동부(同府)의 소관으로 옮기게 되었다”는 구절이 추가되어 있다.
각주 06) 참고로, 이 조선총독부령 제123호 「묘지, 화장장, 매장 급 화장취체규칙」(1912.6.20일 제정)은 부칙의 규정에 따라 이 규칙의 시행지역과 시행일자를 조선총독이 따로 정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그 결과 별도의 조선총독부령을 통해 경성부(1913.9.1일), 경기도 및 충청북도(1914.3.1일), 경상남도(1914.3.20일), 함경남도(1914.5.10일), 평안남도(1914.6.1일), 전라북도(1914.7.10일), 강원도(1914.9.10일), 경상북도(1914.9.10일), 함경북도(1914.10.20일), 평안북도(1914.11.10일), 황해도(1915.1.1일), 전라남도(1915.1.1일), 충청남도(1915.3.1일)의 순서로 이뤄지게 되었다.
각주 07) 참고로, 『동아일보』 1933년 9월 8일자에 수록된 「지하(地下)에도 주택난(住宅難)! 경성부의 6개처가 부족해서 공동묘지(共同墓地) 필경 확장(畢竟 擴張)」 제하의 기사에 따르면, 이 당시의 시점에서 사용이 금지된 6개 공동묘지에 묻힌 시체의 규모는 모두 합쳐 10만 인을 돌파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를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그 수치는 ▲ 이태원 묘지(梨泰院墓地) = 41,321인 ▲ 수철리 묘지(水鐵里墓地) = 41,554인 ▲ 신사리 묘지(新寺里墓地) = 12,054인 ▲ 홍제내리 묘지(弘濟內里墓地) = 202인 ▲ 미아리 제1묘지(彌阿里 第一墓地) = 6,986인 ▲ 동 제2묘지(同 第二墓地) = 1,224인에 달하였다.
각주 08)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지역이었던 상봉리, 중화리, 묵동리, 망우리, 신내리가 1963년 1월 1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고, 1980년 4월 1일에 양주군에서 남양주군이 분리 신설되면서 기존의 구리읍은 남양주군 관할로 변경되었다가 다시 1986년 1월 1일에 남양주군 구리읍이 구리시로 분리 승격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각주 09) 현재 ‘이태원묘지 무연분묘합장비’ 앞에 설치된 안내판의 설명문안을 보면 “이태원공동묘지는 1935년부터 미아리와 망우리로 이장이 개시되어 1936년 4월 8일에 완료되었는데 …… 운운”하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이장 개시 시기 ‘1935년’은 ‘1936년’의 잘못이고 완료시점도 ‘1936년 4월 8일’이 아니라 ‘1937년 4월 8일’이라고 수정되어야 하는 것이 맞다.
각주 10) 이와 관련하여 『경성휘보』 1937년 7월호, 57쪽에 수록된 「이장(移葬)의 무연분묘 위령제(無緣墳墓 慰靈祭)」 제하의 기사에는 “…… 가까스로 본년(本年) 4월 8일 양주군 구리면 망우리묘지로 이장을 완료하여 합장묘비(合葬墓碑)의 건설준공(建設竣工)을 기화로 삼아 6월 9일 오후 2시 묘전(墓前)에서 위령의 법회를 집행하였다”는 구절이 채록되어 있다.
각주 11) 행려병 사망자에 관한 기록으로는 『조선신문』 1933년 6월 5일자에 수록된 「무연불(無緣佛)을 위한 공양탑 건립(供養塔 建立)」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내용이 남아 있는 것이 눈에 띈다. “경성불교자제회(京城佛敎慈濟會)에서는 행려병인구료(行旅病人救療)를 개시한 지 벌써 16년이 되어 그 사이에 구료인원(救療人員)은 3,500여에 달한 가운데 1,700여 명이 사망(死亡)하여 이태원 경성부공동묘지(梨泰院 京城府共同墓地)에 매장(埋葬)했으나 전부 무연(無緣)이므로 누구 한 사람도 조문하는 일이 없으므로 금회(今回) 자제회(慈濟會)에서는 동소(同所)에 1기(基)의 공양탑(供養塔)을 건립(建立)하고 오는 6일 오후 4시부터 동소(同所) 관계관민(關係官民) 다수 참렬(多數 參列)하여 공양탑의 개안법요(開眼法要)를 올릴 예정이라고.”
01 『형법대전(刑法大全)』 (1906)에는 “경성 10리 내에 묘를 쓰는 자는 징역 3년에 처한다”는 구절이 엄연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1900년을 막 넘어가는 시점에서 불과 몇 년 사이에 서울도성 주변은 사방이 온통 공동묘지의 군락으로 포위된 형태로 바뀌고 말았다.
02-1 『조선총독부관보』 1913년 9월 6일자에는 조선총독부령 제123호 「묘지, 화장장, 매장 급 화장취체규칙」의 경성부 지역 시행에 따른 「공동묘지 설치허가」 내역이 게재되어 있다. 여기에는 미아리, 이문동, 수철리, 신당리, 이태원, 아현리 등 제법 익숙한 공동묘지의 명칭이 두루 망라되어 있다.
02-2 『매일신보』 1913년 9월 7일자에 수록된 ‘경성부내 공동묘지 사용지역’에 관한 도표이다. 『조선총독부관보』 1913년 9월 6일자에 게재된 「공동묘지 설치허가」 내역과는 허가번호 등은 동일하나, 각각의 묘지를 사용하는 주체나 지역이 따로 표시되어 있다는 점이 참고할 만하다.
03 한식날 성묘 광경이 포착된 이태원공동묘지의 풍경이 담긴 『매일신보』 1934년 4월 7일자의 보도사진이다. 이 당시는 더 이상 무덤을 쓸 자리가 없다는 이유로 이태원공동묘지에 대해 매장금지조치(1931.4.1일)가 내려져 있던 상태였다.
04 『일본지리풍속대계』 제17권 (1930)에 수록된 ‘경성부근지도’에는 이태원공동묘지의 위치가 표시된 내역이 눈에 띈다. 이곳은 이태원리, 보광리, 한강리 일대의 구릉지에 걸쳐 묘지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1936년 4월 1일에는 경성부 구역확장과 함께 이를 ‘이태원 제1묘지’와 ‘이태원 제2묘지’로 구분하여 부르기도 했다. (개인소장자료)
05 『경성휘보』 1936년 5월호에 수록된 ‘경성부 고시 제72호’의 내용이다. 여기에는 이태원공동묘지에 대해 도시계획으로 인해 이전 개장이 결정되었으며, 특히 기한 내에 개장하지 않으면 무연분묘로 간주하고 경성부에서 이를 개장 집행한다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06-1, 06-2 망우리공원에 남아 있는 ‘이태원묘지 무연분묘합장비’의 현재 모습이다. 왼쪽 너머에는 ‘유관순 열사 분묘합장 표지비(2018.9.7일 설치)'가 보이는데 무연고분묘로 간주된 28,338기 속에 유관순 열사의 유골도 함께 포함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비석의 뒷면에는 “소화 11년(1936년) 12월, 경성부”라는 표시가 남아 있지만, 실제 이 비석은 1937년 6월 9일의 시점에 준공 제막된 것으로 드러난다.
07 ‘이태원묘지 무연분묘합장비’가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는 지점에 노고산장택지경영주식회사에서 건립한 ‘경서노고산천골취장비(京西老姑山遷骨聚葬碑, 1938년 9월)’란 것이 남아 있다. 이 역시 건립주체는 비록 조선인들이었지만, 경성 인접지역의 공동묘지를 파헤치고 문화주택지를 건립하면서 생겨난 부산물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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