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온 인류의 아버지를 기리는 미사> 물바람 보조교사 증언(01:06:53)
(성호경)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주님의 기도로 시작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
사랑하는 아버지,
이 증언을 통해 아버지 홀로 찬미와 영광을 받으소서.
안녕하세요.
물바람 정세훈 헬레나입니다.
이제 9월이면 제가 거내영에 가입한 지 3년이 됩니다.
증언하라는 연락을 받고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나는 어떤 풍월을 읊을 수 있나를 생각했습니다.
겨우 입을 떼는 서당개라 많이 부족함을 전제하고요.
그러나 내맡김 전과는 너무나 다른 삶을 살고 있기에
저를 변화시켜 주신 사랑하는 아버지께 영광 드리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저는 2020년 9월 23일에 무형의 성전에 가입했고,
2021년 1월 30일에 봉헌했습니다.
보조교사 직은 1년 전인 2022년 8월 16일에 받았습니다.
저에게 이런 증언의 기회를 허락하신 아빠 아버지께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증언을 준비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60여 년의 신앙 여정을 되돌아보았습니다.
제가 거내영을 통해 크게 깨달은 것 중에 하나가
내 안에 ‘내 뜻’과 ‘하느님 뜻’이 공존한다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는 세상 언어로 내 안에 천사와 악마가 있다,
자아와 초자아가 있다, 사회적 자아와 내적 자아가 있다는 등의 용어로
내면 세계를 짐작하고 있었는데,
거내영 공부를 통해 내 안에 ‘내 뜻’과 ‘하느님 뜻’이 함께한다는 사실과
그 두 뜻의 구체적인 실체를 알게 되면서 새로운 세계로 명오가 열렸습니다.
그를 기초로 해서 제 삶을 돌아보니까 3기로 나누어지더라구요.
제1기는 가라지인 ‘내 뜻’과 밀인 ‘하느님 뜻’이 뿌리를 내린 청년기까지의 25년,
제2기는 밀과 가라지가 삶 속에서 열매를 맺어간 중장년기 40년,
제3기는 가라지를 베어내고 밀만을 수확하는 내맡김 시기로 분류가 되었습니다.
이 순서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밀과 가라지가 뿌리를 내린 제1기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1957년에 충북 진천군 덕산면 산수리 248번지,
진천 읍내를 가려면 한 시간 이상을 걸어야 하는 깡촌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생 촌년입니다.
동생의 죽음이 계기가 되어 1965년
할머니 할아버지를 비롯한 온 가족 아홉 명이 진천성당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부모님이 분가한 후 청주에서 살았습니다.
그리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았던 1남 3녀의 맏딸로,
약간은 광적이라 할만큼 성당 일에 열심인 엄마와
착하고 자상한 교사인 아버지 밑에서 평범한 유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냈습니다.
중고등학교 때는 성당이 집이며 놀이터였습니다.
학교가 끝나면 성당부터 들릴 정도로 엄마는 집보다 성당에 더 많이 계셨고,
세 딸이 모두 수녀되기를, 외아들까지 신부되기를 원하셨지만,
아무도 엄마의 소원을 들어드리지 못했습니다.
성전 초코렡색 벽을 보며 저 벽이 진짜 초코렡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미사를 드렸고,
대학에 가서는 신앙의 자유를 외치며 미사도 안 가겠다, 판공성사도 안보겠다고 선언을 해서
엄마가 우셨던 기억이 납니다.
성당 친구들이 다 들어가는 가톨릭대학생회도 안 들어갔고,
엄마에게 어깃장을 놓으며 주일이면 혼자서 성당 안 가는 자유를 한껏 누리던
악당이었습니다. 그때는 제게 믿음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얼만큼 나이가 들어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니
놀기만 한 것 같던 그 시절 그곳이 제 믿음의 본향이었습니다.
삶이 힘드니까 너무도 당연하게
어릴 때 놀던 그곳, 하느님께로 달려가더라구요.
또한 이 시기는 ‘내 뜻’ 즉 에고가 자란 시기이기도 합니다.
학교를 다니면서 삶의 다양한 자양분을 키웠고,
‘내 뜻’의 대표주자인 생각을 키웠습니다.
소설을 좋아해서 연애소설부터 세계문학전집, 장편대하소설까지
보이는 족족 읽어댔습니다.
그러면서 형성된 사고가 어짜피 죽을 건데 왜 살아야 하는지,
고통스런 세상에 태어난 것이 왜 축복인지가 늘 의문이었고.
이렇게 늘 정답없는 생각에 쌓여 회색빛 청춘을 보냈습니다.
제2기는 밀과 가라지가 삶의 현장에서 이삭을 피우며 열매를 맺어가는 시기였습니다.
대기업에 다니던 남편이 사업을 하겠다고
패기롭게 사표를 던지고 시작한 몇 번의 사업이 실패에 실패를 거듭했고,
일찍 장만한 집을 팔고도 제 월급으로 이자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빚더미에 앉게 되면서 제 내면의 밀과 가라지가 함께 성장했습니다.
대부분의 빚은 교사였기에 대출이 쉬웠던 제 명의였고,
제 명의의 가게수표를 만들어주면서 ‘오늘 4시까지 입금 안되면 부도처리된다’는
은행의 전화를 시도 때도 없이 받았습니다.
그때마다 샘들 카드를 빌려 돌려막기로 혼비백산이 되었고
가슴은 완전히 쪼그라들대로 쪼그라들었습니다.
그때는 전화벨 소리만 들려도 가슴이 콩닥거리며 머리가 하애졌어요.
이렇게 엄청난 빚만 남기고 남편은 공부하겠다는 명목으로 칩거생활에 들어갔습니다.
저도 한동안은 남편이 하는 공부에 희망을 걸기도 했었지요.
그러나 이것저것 자격증은 땄지만 직업이나 경제하고는 연결이 안 되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모든 것으로부터 손을 놓아버렸습니다.
아이들 양육도, 생활비도, 집안 살림도, 빚 갚는 것도,
가끔씩 터지는 남편의 감정 쓰레받이도 모두 제 몫이었습니다.
결국 심한 우울증에 걸렸고,
퇴근해 집에 오면 감당할 수 없게 허허롭고 불안해서
장롱 속에 들어가 있거나 책상 밑에 들어가 있으면 좀 안정이 되곤 했어요.
삶은 피폐할대로 피폐해져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정말 죽고 싶었어요.
어떻게 하면 아이들과 함께 고통없이 죽을까를 많이 생각했어요.
그래서 아이들 데리고 죽는 부모들 심정이 어떤 것인지 잘 압니다.
아마도 하느님께서 조금만 늦게 부르셨어도 저도 그런 선택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죽음의 골짜기를 헤매고 있을 때
아래층에 사는 자매가 철야기도를 가자고 했어요.
그때 철야기도를 가자했던 자매가 저기에 있는 언제나감사인데,
저에게 거내영을 소개한 자매도 언제나감사입니다.
언제나감사는 아버지께서 제게 보내주신 신앙의 방향키예요.
그래서 자주 표현은 안했지만 언제나감사께 언제나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감사의 마음 전합니다.
첫날밤 철야기도에서 하느님께선 저를 강하게 만나주셨습니다.
모든 말씀이 모든 성가가 절절히 가슴에 와 닿으면서 밤새 울고 울었어요.
근데 참으로 신기한 것이 철야기도가 끝나고 밖으로 나왔는데
몸이 날아갈 듯 가쁜했어요. 그리고 세상이 달리 보였어요.
모든 게 다 빛이 났어요. 하늘도, 땅도, 길가의 나뭇잎도, 땅바닥의 풀들도,
건물들도 다 반짝반짝 빛이 났어요.
집에 갔는데 잠자는 아이들에게도, 거실의 화분에서도, 벽에 걸린 액자에서도 빛이 났어요.
화분한테도 액자한테도 그냥 막 존댓말이 나오더라구요.
학교에 가니 학생들에게도 빛이 났어요.
이때가 교직 10년 차 정도였는데, 학생들 하나하나를
귀한 영혼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 사실은 이때부터였습니다.
그 빛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도, 그렇게 깊던 어둠도 우울도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 뒤 15년 정도 철야기도를 다녔지만 그 빛을 다시는 보지 못했어요.
그때 제 상태가 너무도 심각하니까 아버지께서 급처방을 하셨던 것 같아요.
첫날밤의 아버지와의 찐한 만남으로 저는 아버지를 향한 열정으로 불타 올랐습니다.
얼마 전 언제나감사와 그때 이야기를 하다가 저는 기억에 없는데,
제가 학생들을 데리고 철야기도엘 왔었다네요.
아마도 힘들어하는 학생들을 철야기도에 데려고 다녔었나봐요.
늦둥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두 아들을 데리고 철야기도를 다녔어요.
내적 치유 은사가 있는 신부님이 오실 때면
학교를 안 보내고 피정에 데려가곤 했습니다.
아들들이 유치부 주일학교를 다닐 때 주일학교 교사를 자청해 들어갔고,
아들들이 복사를 하면서는 매일 데리고 아침 저녁 미사를 다녔고,
주중엔 교사회합, 금요일엔 철야기도, 토요일엔 주일학교,
발바닥에 불이 나는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육적으로 아무리 힘들어도 철야기도를 다녀오면 일주일을 살아낼 힘이 생겼어요.
토요 휴무가 없던 때라서 금요 철야기도가 새벽 4시쯤 끝나면
집에 와 두어 시간 눈 붙이고, 아들들 깨워 등교 준비시키고 출근을 해요.
그날의 출퇴근길은 늘 졸음과의 전쟁이었어요.
어디서든 잠시 눈을 붙여야만 오고 갈 수가 있었어요.
갓길에 잠깐 눈 붙이고 출근하고, 길가에 잠깐 눈 붙이고 퇴근해서는
집에 와 아이들 데리고 주일학교 갔다가 늦은 저녁에 귀가해서는
일요일까지 죽은 듯이 늘어져 충전하고 다시 한주일을 시작하곤 했습니다.
‘내 뜻’으로 살 때는 모두가 내 짐인 무거운 삶이
억울하고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는데,
하느님과의 찐한 첫날밤을 지내고 나니 모든 게 그냥 감사했습니다.
제게 일이 있음도 감사했고,
일이 있어 집안을 건사할 수 있음도 감사했고,
일이 있어 피곤할 수 있음도 감사했고,
무엇보다도 아들들을 키워낼 수 있음이 너무도 감사했습니다.
이렇게 감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하느님 한 분이면 족하다고
하느님 사랑이 정점을 찍고 있을 때 덜컥 임신이 되었어요.
‘진짜 니가 나를 사랑하니?’ 꼭 하느님께서 시험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임신이 되고 나니 그동안 찬미 찬양했던 하느님은 온데 간데 없고,
현실이 올라오기 시작했어요.
두 아들을 키우면서 힘들었던 기억과
우유값도 끌어낼 수 없는 현재의 경제 상황이 떠올려졌고,
근래에 먹은 감기약과 친정아버지 생신 때 먹었던 술까지도 떠올려지며
에고는 아이를 낳지 못할 타당한 요인을 정신없이 찾아내고 있었습니다.
정말로 낳고 싶지 않았어요. 양쪽 부모님 도움 없이
혼자서(남편도 방관자) 두 아들을 키우면서 가슴에 피멍이 든다고 생각했어요.
불덩이처럼 끓는 아이를 놔두고 출근하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던지,
이른 출근으로 놀이방 건물 앞에 떨궈 놓고 가면서
놀이방 문 열기까지 지켜주시라고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했던지,
아들들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그런 맘고생으로부터 벗어났는데,
(그 때가 큰 아들이 12살, 작은 아들이 10살이었거든요.)
또 다시 그 삶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정말 지옥으로 끌려가는 것 같았어요.
이게 그냥 꿈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너무도 간절하게 했어요.
그러면서 하느님 사랑한 것을 후회했습니다.
적당히 믿을 걸, 개신교 다닐 걸... 그러면 낙태가 쉬울 것 같았어요.
그런 와중에 뱃속 아이의 정체를 생각케 하셨어요.
열 달 후면 두 아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태어날텐데,
그때 그 아이를 죽일 수 있을까? 못할 것 같았습니다.
그럼 뱃속 아이와 태어난 아이의 차이는 뭘까를 생각하니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뿐이더라구요.
보이지 않는다고 자기 자식까지 죽이는 여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낙태는 지금까지 몇 년간 밤 잠 안자고 드렸던 철야기도가,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다녔던 매일 미사가
모두 헛짓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14년 같은 2주일이 지났을 때,
(그때 정말 하루가 1년 아니 10년 같았어요.)
함께 근무하던 대녀가 “하느님도 선생님 처지 아시니까 용서해 주실 거예요.
내일 병원 가요.”
이 말이 얼마나 달콤하던지, ‘그래 맞아 하느님도 내 처지 아시니까 용서해 주실거야,
아니 용서해 주셔야 돼!’ 낙태를 결심하고 토요일 연가를 냈어요.
그날 밤 꿈을 꾸는데 전쟁통이었어요. 거리는 쫓고 쫓기는 사람들로 아수라장인데,
단발머리 아가씨가 칼 든 남자한테 쫓기고 있었어요.
도망을 가다가 건물로 들어가 지하로 들어갔는데 막다른 곳이었어요.
바짝 따라붙은 남자가 칼을 들이댈 때, 아가씨가 돌아서더니 칼 든 남자의 손목을 붙잡고
울부짖는 거예요. ‘제발 살려달라’고, 그때 칼이 툭하고 떨어졌어요.
그 소리에 놀라 깨어보니 아침 6시였어요.
그냥 무릎을 꿇고 “주님 잘못했습니다. 제 목숨 내놓고 낳겠습니다.
내 딸이어도 남편 딸이어도 안 낳습니다. 당신의 딸이기에 낳겠습니다”
이 꿈을 통해 뱃속 아이가 딸임을 알았습니다.
이렇게 오묘한 방법으로 아버지께선 당신 딸을 죽음에서 구해내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으로 태교를 하도록 이끌어 주셨어요.
성경을 읽고 묵상 태교 일기를 쓰는데 그 시간들이 정말 꿀처럼 달았어요.
수업하고 나와 쉬는 시간 10분도 성경을 읽었어요.
방학 때는 9~10시간씩 앉아 성경을 읽고 묵상 일기를 썼는데,
그 시간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어요.
아이를 낳기까지 신구약을 3번 통독하고 묵상일기 8권을 썼더라구요.
성경에 푹 빠져 현실을 잊도록 이끌어가신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임신을 하고 방학 때 반 모임엘 갔어요.
이런 과정을 이야기하면서 순명은 했지만 어떻게 키워야 할지 모르겠다고,
답이 안보인다고 했더니 반장님께서 걱정 말라고 자기가 키워주겠다고 하시는 거예요.
정말로 그 자매님 전 가족이 반 정도 육아비를 받고,
그것도 아이를 위해 다 쓰면서 지극한 사랑으로 5살까지 키워주셨어요.
그래서인지 늦둥이가 엄청 긍정적이고 밝아요.
모든 것이 정말 ‘야훼 이레’였어요.
아버지께선 다 준비해 놓고 계셨더라구요.
내 뜻으로는 분명히 불가능했는데,
불가능도 가능케 하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풀어가셨어요.
우유값도 없었던 현실이 아이를 낳고 나서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는데 더 풍요로와졌어요.
임신은 고난이라는 포장지에 쌓인 축복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축복의 실체는 더욱 더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내 뜻’은 포장지의 고난만 바라보게 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그 안에 든 축복까지 바라볼 수 있도록
오묘한 방법으로 저를 이끌어 가셨습니다.
그런데 고난이란 포장지에 쌓인 축복은 여기가 끝이 아니었어요.
늦둥이를 낳고 백일 쯤 되었을 때
청주에서 치매인 시아버지를 돌보던 시어머니가 쓰러지셨어요.
시아버지 혼자 둘 수 없어 먼저 서울 집으로 모셔 왔고,
1년 반 정도 병원에서 재활치료를 하던 시어머니도 모셔오게 되었습니다.
돈도 없고, 요양보험도 없던 시절이라서 집에서 모실 수밖에 없었어요.
퇴근해 집에 오면 하루종일 똥오줌 싸고 누워계신 어머니 씻겨 드리고,
시아버지 저지른 일들 처리하고, 산더미처럼 쌓인 설거지 빨래 청소하고,
7식구 밥 챙기고, 학교에서 가져온 일처리하고, 그때는 정말 죽을 시간도 없었어요.
어머니는 한 자리에 누워 계셨지만,
치매인 시아버지는 온 집안을 돌아다니며 저지레를 하셨어요.
김치통에 똥을 누기도 하고, 계란 한 판을 이불 속에 넣어 구더기가 들끓게도 하고,
10kg 귤 한 상자를 하루에 다 드시고 온 집안을 설사로 도배하기도 하고,
집 나가 못 찾아오셔서 일 주일 만에 수십 km 떨어진 곳에서 찾아오기도 하고,
함께 산 10여 년의 세월은 책으로 써도 몇 권이 나올 거예요.
어머니가 오시면서 늦둥이 낳고 못 가던 철야기도를 다시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더라구요.
철야기도를 다녀오면 마약 먹은 것처럼 모든 걸 감당할 수가 있었어요.
어머니를 씻기면서도, 설거지를 하면서도, 시아버지 저지레를 처리하면서도
제 영혼과 아이들의 영혼을 만져주시라는, 죄를 씻어주시라는,
나는 자녀들에게 이런 짐이 되지 않게 해 주시라는,
이런저런 청원기도를 하면서 해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약발은 딱 일주일 갔어요.
한 주라도 철야기도를 빠지면 그 다음 주는 완전 지옥이었습니다.
어머니를 씻기는 손은 화가 붙어 매질에 가까웠고, 설거지통은 깨진 그릇들이 속출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요일이면 무거운 몸이 밤길을 나서기까지
가자와 가지 말자로 내 뜻과 하느님 뜻은 끊임없이 시소게임을 했습니다.
이 시점에 두번째 포장지에 싸인 축복을 꺼내야 하겠네요.
시부모님을 모시고 산 시간이 약 10년이었어요. 두 분이 6개월 사이로 돌아가셨어요.
저는 그 기간을 10년 터널이라고 저 스스로 명명했는데,
돌아가시고 나서 보니 세상적인 축복의 열매가 많이 맺혀 있더라구요.
큰 아들은 서울대경영대에 입학해 있었고, 둘째 아들은 신학교에 입학해 있었고,
저는 교감이 되어 있었습니다.
금요일 밤이면 내 뜻과 하느님 뜻이 시소게임을 하다가
결국은 ’내 뜻‘이 주는 강력한 마약에 걸려들고 말았습니다.
하느님을 잊고 세상이 주는 재미에 빠져버렸어요.
이 마약 이야기를 하려면 직장과 승진 이야기로 넘어가야 합니다.
어려움은 또 다른 힘을 길러내는 것 같아요.
빚더미에 앉았을 때 가장 힘들었던 것이 내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무능감이었습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월급 말고는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없더라구요.
아버지께선 제게 큰 돈 버는 달란트는 안 주신 것 같아요.
이렇게 내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을 경험하고 나니
시간 투자하고 정신 집중해서 해결되는 일은 다 ‘그까짓거’ 였어요.
학교일은 시간 투자하고 정신 집중하면 안 되는 일이 없거든요.
그때 장동민이 ‘까이꺼 뭐“라는 코미디 프로를 하고 있었는데 정말 격하게 공감했어요.
학년 초가 되면 힘든 업무는 피하고, 수업은 1시간이라도 덜 하려고 눈치싸움이 심해요.
그럴 때면 ’내가 할께‘ 기피업무를 맡아하곤 했답니다.
제가 40년 동안 교직에 있다가 2년 반 전에 정년퇴임을 했는데,
26년은 국어교사로, 7년은 교감으로, 또 7년은 교장으로 근무를 했습니다.
교직에 들어와 17년까지 제가 교감 교장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랬던 제가 교감이 되고 난 뒤 어떻게 내가 이 자리까지 왔지?
지난 시간을 되짚어 보니까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이고 섭리였더라구요.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다 계획하시고 이끌어가신 ’야훼 이레‘였어요.
교직 경력 15년 때. 시와 군을 함께 관장하는 교육청으로 발령이 났어요.
그때 친구가 전화를 해서 00장학사에게 5만원만 넣어 봉투를 갖다 주래요.
그러면 집에서 20분 거리의 시로 발령을 내준대요. 그때 집이 서울 송파였거든요.
진짜 죽기보다 싫더라구요. 그래서 안 갔더니 1시간 거리인 군으로 발령이 났어요.
이게 교감이 된 첫 관문이었습니다.
발령 난 학교 옆에 성당이 있었어요.
공강 시간이면 성전에 가 하루에 1시간 정도 머무르곤 했는데,
그 시간이 너무 행복했어요.
그런데 1년 후에 수업 시수 조정으로, 보통 5년은 근무해야 옮길 수 있는 시로
이동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어요. 근데 성당 때문에 가기가 싫더라구요. 안 갔어요.
그것이 교감이 된 두 번째 관문이었습니다.
그러고 1년 후에 승진 항목에 군에만 주어지는 농어촌 점수가 생기면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승진 점수가 쌓여갔어요.
승진을 할 때 또 필요한 항목이 현장 연구보고서를 내서 등급을 받는 거예요.
이 고개를 넘지 못해 승진을 포기하는 선생님들도 많아요.
그런데 시로 가는 것을 포기한 그해에 젊은 교감샘이 오셨는데, 완전 연구통이셨어요.
그분을 통해 승진이라는 개념이 처음 머릿속에 들어왔고,
승진에 군 점수가 쓰인다는 것도, 연구를 해야 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어요.
그때까지 눈 뜨면 학교가고, 수업하고, 퇴근해 식구들 건사하고, 성당가고,
철야기도 가는 것이 제 삶의 전부였거든요.
결국 그 교감샘의 강력한 푸쉬로 현장 연구라는 것을 하게 되었고,
두 번째 쓴 연구보고서로 2000년도에 대통령상을 받았습니다.
대통령상을 타고 현장연구방법에 대한 교사들 연수에
사례발표자로 강의 요청을 받았을 때. 강사 대기실에서 만난 교수님을 통해
저를 대통령상으로 강력하게 밀었던 교수님의 이름을 듣는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이 교수님 이론이 제 연구의 기본 뼈대였거든요. 그때 또 확실히 알았습니다.
‘아~~ 모든 것 다 하느님께서 하셨구나~~!’
뇌물에 굴복하기 싫었던 것도, 성당 때문에 많은 이득을 포기한 것도,
그 시점에 농어촌 점수를 만들어 주신 것도, 연구통 교감님을 보내 주신 것도,
하물며 심사 교수까지 선정하여 상을 타게 하신 것도,
마지막에 스트레스 1도 없이 근평을 받게 하신 것도
모두가 아버지의 섭리이셨음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대통령상을 타고 나니 갑자기 실력자로 급포장이 되더라구요.
학교 밖 여러 곳에서 일을 하자고 불러댔고,
일을 해 보니 그 성취감이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블랙홀에 빠진 것처럼 일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결국 일중독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때가 시부모님 모시던 10년 터널의 중간 지점이었는데,
교장이 되기 전까지 12~3년 동안 250여 장의 위촉장을 받으며
성취감이라는 블랙홀에 빠져 허우적댔습니다.
교감이 되고 가톨릭상담심리학회에서 상담공부를 한 것이 계기가 되어
학회장 수녀님과 2년 동안 개인 상담을 했어요.
그때 저의 화두가 남들은 일을 안 해도 행복한데
‘저는 왜 일을 해야만 행복합니까?’였어요.
수녀님 진단이 상담 용어로 ‘사회적 자아’는 한없이 커져 있는데,
‘내적 자아’가 쪼그라져 있기 때문이라고,
이런 사람들이 대부분 퇴직하고 심한 우울증에 걸리거나 심하면 자살도 한다고,
2년 동안 내적 자아를 키우는 미션을 수행했는데
그것이 결국은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을 만나는 작업이었습니다.
수녀님을 통해 얼마만큼 내적 자아를 키우고 혁신학교 초빙 교장으로 갔습니다.
초빙교장제는 학교가 학교장 초빙공고를 내면
지원자가 4년 동안 학교를 어떻게 경영할 것인지에 대한 청사진(학교경영계획서)를 제출하고,
학부모, 교사, 교육관계자들이 서류와 면접 등을 통해 교장을 선정하는 제도입니다.
일 중독에 걸려 있을 때 했던 작업들이 변화하는 미래사회에 대처할 교육의 방향과
프로그램들을 개발했기에 혁신학교에 맞는 청사진은 쉽게 제시할 수 있었습니다.
초징교장으로 발령을 받고는 하느님께 학교의 교장 자리를 내어드렸습니다.
아침이면 아버지와 함께 커피를 마시며
오늘도 이 학교의 모든 이들을 만져 주시라고 기도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학교 경영의 키워드는 따뜻함이었습니다. 따뜻한 학교,
위에서 지시 감독하는 교장이 아니라 밑에서 불쏘시게 역할을 하는 교장이 되라 하셨어요.
샘들이 ‘하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도록 하는데 중점을 두게 하셨고,
믿고 지지하고 들어주고, 학부모의 방패막 되어 주면서 진정성을 끌어내게 하셨고,
그 진정성이 학생 하나 하나에게 미치도록 방향키를 조정해 주셨습니다.
정말 샘들이 감동스럽게 열심히 하셨어요.
방학 때 정동진에서 학교까지 270km를 걷는 국토대장전을 10일간 진행했는데,
그것도 샘들이 하자고 제안했어요.
샘들의 50%가 자발적으로 참여해 학생들과 함께 하셨어요.
고생한 만큼 보람도 컸지요. 학부모들 만족도도 높았구요.
주변 교장샘들의 반응은 목숨이 두 개냐고,
왜 그리 위험한 짓을 하느냐고 저를 걱정하기도 했고,
세월호 다음 해라서 모든 체험활동이 중지되어 있던 때였거든요.
요즘 세상에 어떻게 그런 학교 분위기가 가능하냐고,
자기네 학교에서 이런 행사를 하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샘은
한 명도 없을 거라고 신기해하면서 부러워도했어요.
제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모두가 아버지의 손길이며 섭리이셨습니다.
4년 초빙이 끝나고 분당으로 근무지를 옮겼을 때
초빙교장 때 부장이었던 샘한테 전화가 왔어요.
텐션이 높은 아주 적극적인 샘이었거든요.
“교장선생님, 저 오늘 장학사 면접 봤는데요.
문제 중에 하나가 가장 기억에 남는 교장샘과
그 교장샘한테 배운 것이 무엇인가? 였는데,
갈등 없이 교장샘 이름을 댔구요.
학생들 하나하나를 인격적으로 보는 눈을 배웠다고 대답했어요.”
이 전화 받고 제가 심쿵했잖아요. 제 이름을 대서가 아니라
학생들 하나하나를 인격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배웠다는 말에 감격했어요.
아버지께선 다양한 교육 활동을 통해 샘들에게 그것을 심어주고 싶어 하셨어요.
학생들 하나하나를 귀한 영혼으로 바라보며 성장을 돕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라는 것을,
그것이 이 샘한테 뿌리를 내리고 있음에 아버지께 무한 찬미를 드렸습니다.
이렇게 저의 신앙2기 40년은 ‘하느님 뜻’과 ‘내 뜻’이 각각의 열매를 맺으며
에고의 성취와 성령의 은사가 반복되며 냉온탕을 오가던 시기였습니다.
제 안에 성령의 은사가 열매를 맺을 때는 기쁨과 평화로 행복했지만,
에고가 영글 때는 끊임없는 성취 욕구와 인정 욕구로 늘 허덕였습니다.
거내영을 만나면서 제 신앙 여정은 제3기라는 새로운 세계가 열렸습니다.
< 완전히 100%!, 0.00001%, 한치의 오차도 없는 완전한 맡김,
‘내 뜻’을 완전히 포기하고 ‘하느님 뜻’만 남은 상태,
하느님 뜻을 완전히 소유한 상태, 그것이 거룩한 내맡김 영성이다. >
제3기는 내 뜻의 가라지를 몽땅 베어버리고,
‘하느님 뜻’에 위탁해 오로지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신앙의 추수기, 천국으로의 진입입니다.
거내영을 몰랐다면 내 뜻과 하느님 뜻을 들락거리며
영원히 냉온탕의 2기를 살다가 죽었겠지요.
거내영으로 이끌어 주셔서
신앙 여정 3기를 살아갈 수 있게 하신 아버지하느님께,
이제서야 가슴 벅차게 내 아빠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신 그 아버지하느님께
엎디어 뜨거운 감사를 드립니다.
거내영을 만나 변태 되어가고 있는 저의 내맡김의 수준은
아직도 갈 길이 먼, 너무도 부족한 상태이지만,
이 모습 역시 아버지께서 손질해 가시는 작업 중인 작품이라 여기며
겸손한 자부심으로 거내영을 만나 변화되어가는 저의 삶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거내영을 만난 것은 퇴임을 6개월 앞둔 때였습니다.
퇴임 후엔 죽는 날까지 하느님 일만 하겠다고 결심하고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할까’를 탐색하던 중이었어요.
추석을 앞두고 손녀들 설빔도 살 겸(큰아들한테 손녀 둘 있어요, 9살, 7살)
언제나감사가 근무하는 쇼핑센터에 들렀어요.
오랫동안 못 봤거든요.
근무 중이라 서서 잠깐 이야기를 하는데,
그 짧은 시간에 거내영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듣는 순간 느낌이 와서 그 자리에 서서 카페에 바로 가입을 했어요.
그리고 ‘창화살’과 ‘딸랑’, ‘내맡김 영성’과 ‘내맡긴 영혼’을 읽고는
‘와~~ 대박이다!’ ‘찾던 것이다~~!!!’
‘야훼 이레’를 외쳤습니다.
여기에 지금까지 찾아다니던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다 들어 있었어요.
마치 들고 다니던 시험지의 정답지를 구한 느낌이었습니다.
먼저 가슴을 때린 것은
한 사제의 겸손함과 솔직함이었습니다.
‘내가 해 보니까 되더라.’ ‘나같은 사람도 되더라.’ 본인의 경험을 토대로
하느님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을 구원하고 싶은 간절함과 안타까움이
‘나같은’이라는 겸손함에 너무도 강렬하게 묻어났어요.
신부님께서 하라시는 대로만 따라하면 되겠구나~~!!!
100%의 신뢰로 스폰지처럼 빨려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스폰지처럼 빨려드는 것이
아버지의 특별한 은총임을 거내영을 전하면서 알게 되었어요.
몰라서 못 왔지 알면 누구나 다 올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구요.
특별한 은총으로 눈과 귀를 열어주신 사람만이 알아들일 수 있는 거였어요.
너무도 쉽고 간결하게 쓰여진 문장인데,
그 속에 담겨진 너무도 타당한 논리와 깊이에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저의 가치관이 송두리째 무너졌습니다.
처음에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생각은 하는 것이 아니다’와 ‘네가 하지 말라’는 것이었어요.
사고력과 자생력은 세상을 살아가는 핵심 동력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이것을 하지 말라는 말씀은 거대한 댐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이었습니다.
성전의 다양한 게시글들과 내맡김 영성을 공부하면서
‘내 뜻’의 가치관과 ‘하느님 뜻’의 가치관은 정확하게 대척점에 있다는 것과
내 뜻으로 살아올 때는 다이아몬드였던 것이
하느님 뜻 안에서는 모두 쓰레기가 된다는 것이 너무도 놀라웠습니다.
< 완전히 100%!, 0.00001%, 한치의 오차도 없는 완전한 맡김,
‘내 뜻’을 완전히 포기하고 ‘하느님 뜻’만 남은 상태,
그것이 거룩한 내맡김 영성이다. >
< 티끌 하나라도 하느님과 다른 것이 남아 있다면,
반드시 그 티끌을 털어 낸 다음에라야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티끌을 털어내는 곳을 ‘연옥’이라 부른다. >(창화살 p.31)
거룩한 내맡김을 통해 연옥을 거치지 않고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말이
처음엔 다가오지 않았는데,
어느 날 이것이 너무도 큰 것으로 다가왔어요.
‘내 뜻’의 티끌을 털어내는 장소가 연옥인데,
거내영에서 하는 것이 ‘내 뜻’의 티끌을 털어내는 작업이잖아요.
연옥이나 천국은 죽어서나 가는 곳인 줄 알았는데,
이 배움을 통해 살아서도 연옥을 거쳐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이
어느날 훅~~하고 제 가슴에 들어왔어요.
지금까지 살면서 ‘하느님 뜻’을 몰랐기에 ‘내 뜻’으로만 살아 왔잖아요.
거내영을 모르고 죽었다면 ‘내 뜻’의 티끌을 털어내기 위해
얼마나 긴 연옥의 정화 과정을 거쳐야 했을지 생각만으로도 끔찍했어요.
40여 년 동안 해왔던 신앙 행위들조차도 하느님의 뜻이 아닌
내 뜻이 행한 내 뜻의 욕망과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행위들이었고,
열심히 했다는 내 뜻이 주는 성취감으로 내적 교만을 키운 행위들이었음을 알게 되면서
신앙에 대한 인지구조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0.00001%도 남김없이 내 뜻을 온전히 하느님께 드리는 내맡김의 삶은
지금까지 거룩하다고 믿어왔던 신앙 행위들까지도 다 갈아엎어야 하는,
인생 리셋이 되어야 가능한 삶이었습니다.
하느님 뜻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삶이었습니다.
< 분명한 것은,반드시 누구나 '철부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철부지가 되지 않는다면 절대로 그 길로 들어설 수 없습니다.
그 길이 바로 '내맡김의 삶'입니다. >(창화살 머리글)
신부님께서 그렇게 강조하시는 철부지 앵앵이가 되라는 말씀이 이거였구나~~
내맡김은 걸음마부터 다시 배워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래 전에 차동엽 신부님의 글에서 인간 안에는 하느님의 자리가 있어,
그 자리는 하느님으로 채워져야 하는데,
그 자리가 늘 비어 있어 인간이 외로운 것이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거내영을 모를 때는 그 자리를 발바닥에 불이 나는 심신 행위가 채우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젠 그 자리의 주인을 확실하게 압니다.
그 자리의 주인은 하느님의 뜻이었어요.
그 자리가 어마어마하게 넓다는 것도 알게 하셨어요.
정말 하느님을 몰라도 너무도 몰랐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하느님을 모르면서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다.”(창화살, p.20)
정말 하느님의 사랑을 몰랐기에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 뜻이 행하는 에고의 사랑과 심신 행위에
하느님께선 ‘아니다. 그게 아니다. 그건 역겹다.’ 하시는데도
알아 듣지 못하고 꾸역꾸역 내 뜻으로 미저리식 사랑을 해댔습니다.
종교와 과학을 넘나드는 다양한 게시글들을 통해
우주만물에 대한 인식과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인지가 넓혀지면서
성 아우구스티노의 "그대가 이해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아니다'라는 말씀을 알아들으면서
40여 년간 만났던 하느님도 제 좁은 인지가 만들어 낸 우상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앎을 통해 저는
제 틀에 갇혀 계시던 하느님 아버지를 하느님의 원 자리로 꺼내 드렸습니다.
그 아버지께서
지금 현재 여기서 저를 사시며
‘내 뜻’의 속박으로부터 조금씩 때론 왕창 저를 꺼내 주십니다.
먼저 시간의 속박에서 저를 건져 내시며
매 시간 안에서 ‘나 여기 있다.’하시며 저를 만나주십니다.
< 시간을 통해서만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시간을 잃어버리면 하느님을 만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시간의 주인은 하느님이다. >(창화살 p.236)
시간을 쪼개고 쪼개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제게 시간은 정말 돈보다 소중했습니다.
‘멍 때리기~~’ 이런 화두도 노년기에 들어서야 수긍이 갔습니다.
한참 일에 미쳐 있을 때는,
1시간이면 처리할 수 있는 일을 하루종일 붙들고 있는 샘을 보면서
저 일을 가져다 대신 해주고 나머지 시간을 내가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많이 했었어요.
그러다 보니 삶은 늘 동동거렸고 무엇엔가 쫓겼고,
머릿속은 다음 처리할 할 일들로 늘 꽉 차 있었습니다.
이런 삶의 태도가 퇴임을 하고도 남아 있더라구요.
어느 날 아버지께서 그리 바쁠 것도 없는데,
아직도 무엇엔가 쫓기듯 시간에 매여 동동거리는 저를 보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알아차리면서 아버지의 이끄심에 따라 살아보기로 작정하고
제 모든 계획을 아버지께 내어드렸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아버지께서 운영하시는 시간이 너무도 정확한 거예요.
약속이나 일이 중복될 때도
내맡겨 드리고 기다리면 한 쪽이 자동적으로 캔슬되면서 정리해 주시더라구요.
이런 경험이 거듭될수록
‘정말 아버지께서 나를 살고 계시는구나’
제 안에서 저를 살고 계시는 아버지를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형제들과 함께 진천 부모님 산소를 거쳐 청주 삼촌집을 들렀다가
6시 수원 회의에 참석하는 3건이 잡힌 일정이었어요.
일정이 예상보다 늦어지면서 그날 꼭 참석해야 하는 6시 회의는
끝날 시간에 가거나 엄청 지각이겠구나 짐작하고 있었는데
한식인데도 길이 뻥뻥 뚫리면서 회의 장소에 도착하니
그나마 양호한 6시 30분이었습니다.
그런데 회의실로 들어갔는데 시작기도를 하는 거예요.
제가 회의 시간을 잘못 알고 있있어요. 6시가 아니라 6시 30분이었어요.
그때도 ‘와~~ 우리 아버지~~!!’ 전율했습니다.
한번은 앱으로 버스 시간을 확인하고 엘리베이터를 타러 나갔는데,
층층이 묶여 엘베가 안 내려오는 거예요. 아마도 택배 작업을 했던 것 같아요.
순간 ‘버스 놓치면 안 되는데’ 하는 조급함이 살짝 올라오더라구요.
그때 머릿속에 ‘내가 똥 누는데 니가 왜 힘을 주냐?’ 이 말이 떠올려졌어요.
‘아~~ 그치, 시간의 주인은 아버지시지~!’
알아차리고 아버지께 도로 주인 자리를 내드리고 느긋하게 기다렸어요.
지각도 아버지께서 허락하시는 거라면 받아들여야지 했는데,
그날도 정확한 시간에 도착하게 하셨어요.
댓글을 쓰다가도 외출할 시간이 되면 느낌을 주셔요.
‘이제 그만 일어나라~~’ “아~~ 네~~!”
일어나 세수를 하고 외출 준비를 한답니다.
< 하느님께 내맡긴 영혼은 하느님께서
그 영혼 안에 직접 생각을 떨어뜨려 주시고 계획까지 세워주시므로
그 영혼은 오로지 그분의 도구로써, 그분의 계획에 따라, 그분의 뜻대로
기쁘게 이끌려 드리기만 하면 된다. >(창화살 p.46)
아멘~~!!!입니다.
내맡겨 드리니 생각을 떨어뜨려 주시고, 시간을 조정해 주시면서
‘니 안에 나 있다’ 하시며 당신의 존재를 알려주십니다.
제 안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공간과 율법의 속박으로부터도 저를 꺼내 주셨습니다.
내맡김 전에도 하느님이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요.
그런데 성전이나 성지, 성체조배실처럼 특정 공간에 대한 관습을 놓치는 못했어요.
은혜와 축복이 쏟아지는 영험한 곳을 찾아다녔어요.
그런데 이렇게 ‘니 안에 나 있다’고 실시간으로 알려주시는 아버지를 만나니
이젠 아버지를 찾아 공간 이동을 할 필요가 없어졌어요.
아버지 함께 하시니 일상의 공간이 성전이며, 아버지께서 역사하시는 성지가 되었어요.
아버지께서 주시는 마약은 철야기도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어요.
그 마약은 태어나기 전부터 내 안에 가득 차 있었건만,
눈 멀고 귀 먹어 찾아 먹지 못했던 거지요.
생수를 찾아 이곳 저곳을 헤매던 사막의 여인이
이젠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오아시스, 거내영을 만났습니다.
게다가 그 오아시스의 주인이 바로 저의 생부라는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저는 찐 아빠아버지를 만났습니다.
그 아버지께서
‘이젠 집 나가 생고생, 개고생 하지 말고 내 안에만 머물러 있으라.’ 하십니다.
아버지의 딸이 되고 나니 많은 것이 저절로 해결되었습니다.
종인 줄 알았을 때는
주인 눈에 들기 위해 눈치기도, 의무기도를 드리면서
그 댓가로 떨어뜨려 주시는 축복에 눈독을 들였는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버지의 상속자로서 아버지의 모든 것이 다 제 것이라 하십니다.
이젠 진정 아버지 집에서 누리는 일만 남았습니다.
끊임없는 화살기도와
매일매일 아버지께 드리는 사랑편지가 마중물이 되어
일상이 아버지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집니다.
가만히 있어도 주변이 꽉 차 오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이런 삶이 제 삶이라는 것이 너무도 감사해 수시로 울컥 울컥합니다.
아버지의 손길은 평생 억압이었던 돈의 속박으로부터도 저를 건져내 주셨습니다.
저는 돈에 대한 욕망이 그리 강하진 않았어요.
어릴 때부터 부자가 되겠다든가,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어요.
빚더미에 있을 때도 처음 몇 년간은 카드 돌려막기에서 건져달라고 기도했고.
또 다음 몇 년간은 마이너스 통장 잔고가 0이 되길 기도했고,
형편이 좀 핀 후부터는 통장 잔고가 100만 원만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지금까지 꽁돈을 만져 본 적이 없어요.
일해서 월급 받고, 강의해서 강의료 받고, 심사해서 심사료 받고,
평생 모든 수입은 노동의 댓가로 받는, 날 것 그대로의 수입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면서 뿌리 깊게 박힌 생각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먼 돈은 없다는 것
철저한 내돈 내산, 수입 안에서 계획성 있게 사는 것이 저의 경제관이었습니다.
기부와 헌금도 계획 안에서 이루어졌지요.
내맡김을 살면서도 이 부분은 내어드리지 못하고 있었어요.
저의 모든 것을 내어드렸기에 제 집의 경제도 아버지께서 주인장이시고,
저의 모든 것이 아버지 것이라고 머리로는 내어드렸지만
예전과 똑같이 계획하고 계산하고 있며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저를 보게 하셨습니다.
이걸 깨닫게 하신 분이 신부님과 거내영 선배님들이셨습니다.
‘이런 세상이 있구나~~!’ 꼭 이상한 나라에 온 엘리스가 된 기분이었어요.
이제는 제 돈이 아닌 아버지 돈이기에,
아버지 통장에서, 아버지께서 느낌 주시면,
계획에 없는 지출도, 때론 왕창 감행하고 있답니다.
또 ‘느낌’과 ‘아님 말구’로 지식과 경험의 속박으로부터 건져내 주셨어요.
<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면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의 6하 원칙이 사라집니다.
그리하여 ‘느낌’이 생겨납니다. ‘아님말구’가 생겨납니다.
영감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하느님만 바라보는 바보가 되어버립니다. >
처음엔 연습하기로 시작했어요.
일상에서 아버지께서 주시는 느낌을 따라가는 연습을 해 보았어요.
설거지를 하다가도 빨래를 건조기에 넣으라는 느낌이 떠올려지면
설거지를 멈추고 건조기 돌려놓고 다시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다가도 우유를 사야겠다는 느낌을 주시면 우유를 사러 슈퍼로 나가고,
제가 집중형이라 한가지 일에 집중하면 다른 일을 못했어요.
한 가지에 집중해 있으면 다른 것은 감지가 잘 안 돼요.
공강 시간에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 그 다음 시작 종소리를 못 들어 수업을 못 들어가요.
이 문제로 교감샘한테 여러번 혼났어요.
일에 집중해 있으면 카톡도 못 봐요. 2~3일 못볼때도 있어요.
그래서 카톡 안보는 사람, 연락 안 되는 사람으로 낙인도 찍혔습니다.
내맡김을 살면서 ‘원래 집중형이라 그렇다’는 합리화가
얼마나 큰 교만이며 황금률에 어긋난 것인지를 깨닫게 하셨고,
‘원래’가 내가 깨어야 할 단단한 ‘내 뜻’의 질기디질긴 껍질이라는 것도 깨닫게 하셨습니다.
한 번은 단체 카톡에 급히 도움이 필요하다는 메시지가 떴어요.
가야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하던 일을 멈추고 세수를 하는데,
갑자기 며칠 전 그 자매로부터 받은 불편했던 감정이 떠오르는 거예요.
‘가지 말까?’ 하는 생각이 올라왔는데, 첫 느낌이 아버지께서 주시는 거라는 믿음으로
나갔는데 아버지께선 그날 그 자매와의 좋지 않은 감정들을 눈 녹듯이 녹여 주셨어요.
이번에 갑자기 다녀온 해외 성지순례를 통해서도
아버지께선 묶여 있던 사슬에서 저를 건져내셨습니다.
순례 일정 중에 코로나에 걸렸어요. 그것을 아는 순간 많이 황당했습니다.
지금까지 한번도 안 걸렸거든요. 백신을 5차까지 맞았고,
집에 환자가 생겼을 때도 저는 비켜갔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아버지를 찾아간 이 일정 안에 코로나?
습성처럼 몽키마인드가 잠시 올라왔지요.
그런데 금방 알아차리고 일어나는 모든 일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인데
이 순례 시기에 주신 코로나의 의미를 곰담묵하며 여쭈어 보았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답이 ‘나만 바라보라!’였어요.
아버지의 사랑에 흠뻑 취하겠다는 목적으로 출발한 성지 순례였는데
아버지보다 함께 간 사람들에게 관심을 쏟는 저를 보게 하셨습니다.
코로나로 판명되고 나니 나름의 분리가 일어났어요.
밥도 혼자 먹고, 차도 맨 뒷자리에 혼자 앉고, 순례길도 혼자 걷고, 잠도 혼자 자고,
다른 이들은 혼자 있는 제게 측은지심을 보냈지만,
저는 혼자가 아닌 왕 오빠 예수님과 둘이서 그때 그 시절을 돌아보며 아주 행복했답니다.
가는 곳마다 왕오빠 예수님의 속삭임이 들리는 듯 했어요.
가는 곳마다 머릿속에서 많은 이야기들이 올라왔어요.
그러면서 ‘코로나로 이런 행복을 느끼는구나’ 저도 신부님 따라쟁이 되어 외쳤답니다.
‘아~~ 복된 병이여~~!!!’
아픈 사람들이 하나 둘 생겨나면서
제가 꼭 병균의 전파자인 것 같아 미안하고 괴로웠어요.
기침 소리를 들을 때마다 간장이 녹아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건 네가 아파해야 할 몫이 아니다.’라는 말씀을 주셨어요.
순간 너무도 자유로와졌어요.
제겐 책임감에 대한 과잉 반응, 내탓증후군이 있어요.
어디서부터 형성된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누군가 잘못되면
‘혹시 내 탓인가?’ ‘내가 뭘 잘못했나?’
자동반사적으로 저를 들여다보며 괴로워하는 습성이 있어요.
긴 세월 살면서 남편한테 바른 소리, 큰 소리 한번 못한 것도
혹시라도 모를 내 탓을 만들지 않으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있었어요.
남편과 소리내어 싸워 본 적이 한번도 없어요.
서로가 얼음처럼 차갑게 돌아서 있었지요.
이 내탓 증후군은 그동안 깊은 내면에서
저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고 조종하던 어둠의 세력임을 보게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불가항력인 것 니 책임 아니라고,
이젠 모든 것 다 니 책임 아니라고,
내가 책임진다고,
너는 당당하고 자신있게 살라 하십니다.
내맡김을 살면서 가장 많이 변화된 것은 남편이에요.
남편은 결혼할 때부터 저나 아이들이 성당 다니는 것은
절대 반대하지 않겠으니 자기에게는 강요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리고는 이 문제는 한동안 각자 마이웨이했지요.
아들 신학교 입학식이 끝나고,
서품 받기 전에는 세례를 받겠다고 하더니 그것도 공수표였어요.
제가 푸쉬를 하면 더 엇나가는 것 같았어요.
어느 날 아들이 ‘엄마 애쓰지 말고, 아빠 그냥 놔 두세요’ 하더라구요.
그 이후로 남편의 입교는 제 힘으로는 안 되는 것으로 포기했어요.
그동안 남편을 많이 미워하고 원망했어요.
시부모님 모실 때도 남편은 철저한 방관자였거든요.
제가 에고의 성취감에 취해 살아갈 때였는데,
출근을 하는데 배를 드러내 놓고 자고 있는 남편에게 갑자기 살의가 느껴지는 거예요.
저 배를 찌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데 몸이 막 부엌 쪽으로 딸려가는 것 같았어요.
순간 너무 놀랬지요. 사람들이 이렇게 살인을 하는구나.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때 제 자신이 너무 무서워서 목사님한테 마귀를 쫒아낸다는 안찰기도도 받았어요.
안찰기도를 받으면 온 몸이 시커멓게 멍이 들어요.
고등학교에 근무할 때라 아침저녁 보충과 야자 감독으로
철야기도도 매일미사도 못 가던 때였어요.
그래서 집 앞에 있던 순복음교회 송파성전으로 새벽기도와 철야기도를
몇 개월 다니기도 했어요.
긴 세월 냉온탕을 오가며 남편을 미워하고 용서하고를 반복하면서
미움은 어느 만큼 사라졌지만 긁으면 언제든지 올라올 앙금은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내맡김을 살면서 어느 날 남편에 대한 앙금이 싹 사라진 것을 느꼈어요.
남편의 언행에 반사적으로 뛰어나왔던 불편한 감정들이 미동을 안하는 거예요.
아빠의 언행을 비판하며 투덜대는 딸에게
‘그래서 귀엽잖아!’ 역설로 받아치는 여유도 생겨 있더라구요.
제 마음이 이렇게 변하니 남편도 따라 변하는 것 같았어요.
엄청 착해졌어요. 그렇게 꿈쩍도 안 하더니 집안일도 알아서 해요.
행동도 말도 아주 많이 부드러워지고 환해졌어요.
딸이 ‘사람이 변하면 죽는다는데 아빠 어떻게 되는 거 아니야?’ 농담 섞어 걱정할 정도로요.
거내영에 들어온 지 1년 반 쯤 지났을 때
“성당에 예비신자 모집한다는 플랭카드 걸렸던데 가볼까?” 그러는 거예요.
내심 놀랬지요. 근데 또 과잉 반응하면 엇나갈까봐
무관심한 척 “생각 있으면 가 보고...” 시쿵둥하게 대답을 했어요.
며칠 뒤 신청서 내고 왔다고 하더니
6개월 동안 주일 아침이면 목욕하고 꼬박꼬박 잘 다니더라구요.
저는 조용히 감사기도와 내맡김기도만 드렸습니다.
그래서 작년 9월, 결혼하고 42년 만에, 아들 서품 받고 10년 만에 세례를 받았어요.
올해 5월에는 견진도 받았구요.
제가 하려고 할 때는 그렇게 안 되더니 포기하고 내맡겨드리니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때에, 아버지 방법으로 하시는 것을
남편의 세례와 견진을 통해서도 다시 한번 깨우쳐 주셨습니다.
견진성사 선물이라며,
내 삶을 통째로 바꿔 놓은 책이니 하루에 한 챕터씩 읽으라고
‘창화살’ 책을 줬더니 이렇게 떠들어보더니 왜 편지가 없느냐고 편지도 써서 달래요.
이런 캐릭터 절대 아니었거든요.
쇠심줄보다 더 딱딱한 남자였는데, 이렇게 귀엽게 바뀌었어요.
이런 남편의 변모를 통해 아버지께서는 근 30여 년 만에
‘사랑하는’으로 시작하는 손편지를 쓰도록 이끌어 주셨답니다.
제가 풀어지니 남편도 풀어지는 것을 보면서
결국 남편을 이렇게 쇠심줄보다 더 딱딱하게 만든 것이
제가 들이댄 쇠심줄이었다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남편의 부정적인 모습은 거울에 비친 부족한 제 모습이었습니다.
거내영을 살면서 아들도 가슴으로 온전히 내맡겨 드렸습니다.
저의 둘째 아들이 서울교구 사제인데요.
환경이 바닥을 칠 때 아버지께선 또 다른 숨구멍을 내주셨는데 그게 아들들이었어요.
아들들만 보면 젖먹던 힘까지 났어요.
그렇게 열악한 환경인데도 불평 한마디 없이 너무도 착하고 성실했어요.
아버지께서 아들들에게 좋은 머리를 주셨어요.
중학교 1학년 때 IQ검사에서 둘 다 150 정도로 그 학년에서 가장 높게 나왔다고 했어요.
사교육 한번 못 시켰는데 둘 다 공부도 너무나 잘했어요.
큰 아들이 한영외고를 나와 정시로 서울대 경영대를 갔는데,
(그 때가 대입에 내신이 반영되면서 외고생들이 무더기로 자퇴하던 시절,
외고생들에겐 서울대 문이 수시 빼고는 닫혀 있던 시절이었어요.)
이 아들에게 서울대 문을 열어주신 아버지의 섭리도 풀면 한 보따리예요.
정말로 넘치는 손길로 불가능을 가능케 하셨어요. 이 이야긴 다음 기회에......
첫영성체 하면서 둘 다 신부가 되겠다고 하더니
첫째는 6학년 때 안 하겠다고 돌아서고,
둘째는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변하지 않는 거예요.
친정 남동생이 고3 1학기 때까지도 신학교에 간다고 하다가
2학기 때 돌아선 것을 보았기에 저는 그저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배명고에 입학해 첫 시험에서 전교 1등을 하는데 욕심이 생기더라구요.
그땐 이태석 신부님을 모를 때였는데도,
어짜피 둘 다 봉사직인데 의사 신부님 되자고 의대부터 가자고 2년 동안 꼬셨어요.
들은 척도 안 하고 수석으로 신학교엘 입학했어요.
그래서 저는 유학을 가서 박사 학위를 받고 교수 신부님이 되거나,
명상록을 쓴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학자 신부님이 될거라고 기대하고 있었어요.
이 아들이 정말 책을 좋아하고 많이 읽었거든요.
저도 눈팅만 하고 끝낸 로마인 이야기 6권을 초등학교 3학년 때 읽었어요.
얼마나 이해했는지는 모르지요.
학교에서도 읽으니까 담임샘이 하도 신기해서 ‘너 진짜 이 책이 재밌니’하고 물어보셨다고
학부모 면담 때 말씀하시더라구요.
그랬던 그 아들 사제가 어느 해 추석 때 와서,
해외 선교를 가고 싶은데 엄마 괜찮겠느냐고 묻는데,
유학이 아닌 선교? 처음엔 잘못 들었나 했어요.
이때 이태석 신부님이 한참 회자 되던 때라
선교하면 수단의 그 열악함이 먼저 떠올려졌거든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아 아무 대답도 못했어요.
그때는 내 뜻과 하느님 뜻을 몰랐기에
인간적인 에미의 마음과 하느님의 계획을 놓고 갈등했어요.
당신이 뽑아가신 아들이니
당신 마음대로 쓰시라는 고백이 나오기까지 몇 개월이 걸렸습니다.
덜 위험한 곳으로, 덜 힘든 곳으로 보내주시라는 기도를 삼키기까지도
또 몇 개월이 걸렸습니다.
칠레에서 6년 현지인 사목을 마치고 올 4월에 귀국했어요.
지금은 세계청년대회 인솔자로 포르투칼에 가 있는데,
모래 9일날 귀국해 17일에 다시 선교 사제로 과테말라로 떠납니다.
두어달 전에 전화를 하더니 엄마 나쁜 소식이 있는데
지금 들으실래요? 아니면 다음에 말씀드릴까요? 하는 거예요.
지금 듣겠다고 했더니 오늘 주교님 만나 과테말라로 다시 나가기로 결정했다고 하는데,
제가 그랬어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데 기쁜 소식이지 그게 왜 나쁜 소식이야’
아들 목소리가 밝아지더라구요.
자녀는 양육하여 하느님께 도로 돌려드리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내맡김을 통해 그 앎이 가슴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이젠 정말 아들 사제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형태일지라도
‘아멘’과 ‘감사’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내공이 내맡김의 또 다른 이름인 듯 싶어요.
이쯤되니 늦둥이 딸이 어찌 되었는지 궁금하시지요?
28살 됐어요. 임신 했을 때의 고뇌가 벌써 28년 전이네요.
저를 두고 친정 어머니가 수녀되기를 원하셨던 것처럼
저 역시 이 딸이 뱃속에 있을 때부터 수녀되기를 기도했지만
성경 말씀처럼 아버지의 뜻은 제 뜻과 다르게 더 높은 곳에 계신가봐요.
올해 임용 시험에 합격해 중학교 상담교사로 근무를 시작했어요.
아들들하고는 또 다른 아버지의 손길과 섭리로 이 딸을 이끌어 가고 계십니다.
일 중독이었던 엄마를 잘 아니까
퇴임하면 우울증에 걸릴 것 같아 걱정했던 엄마가
거내영을 통해 평화롭고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엄마를 이끌어가시는 아버지의 손길과 섭리를 느끼며 체득하고 있습니다.
이 딸도 아버지께 되돌려드리며
창조하신 목적대로 쓰시도록 온전히 내맡겨 드렸습니다.
처음엔 내맡김이 단순하고 쉬워 보였습니다.
그러나 보조교사로 산 1년 동안
신부님의 세심한 영적지도를 받으면서 쉽지 않음을 알았어요.
신부님께서 날카롭게 지적해 주지 않으면 알지 못할 정도로
벗겨내야 할 내 뜻은 삶과 한덩어리가 되어 있더라구요.
< 내맡김은 ‘내 뜻’이라는 껍질을 벗고, ‘하느님의 뜻’으로 갈아입는 하나의 변태다.
‘내 뜻’이라는 질기디질긴 껍질을 스스로 뚫어 찢고 벗어나야 한다.
거기에는 큰 고통이 따른다. >(창화살 p.166)
저는 지금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보조교사들을 대상으로 하는
신부님의 장교 훈련을 통해 질기디질긴 ‘내 뜻’의 껍질을 벗겨내고 있습니다.
이 과정이 죽은 후에 반드시 거쳐야 할 연옥의 정화 과정이기에
제 뜻의 티끌 하나까지도 녹여 없애려고 정화되는 고통을 감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도 아버지 때에 아버지의 방식으로 정화시키실 것을 믿기에
힘주라 하시면 힘주고, 찢으라 하시면 찢으며 아버지의 뜻에 이끌려 드리고 있습니다.
잘하고 싶은 마음, 있는 것보다 포장하고 싶은 마음,
이것이 평생 저를 지배한 제 뜻이 살아가는 방식이었는데,
이젠 발가벗고,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놓고도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의 세계를, 아버지의 사랑으로 새롭게 창조하며 천국의 삶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복된 시간으로 이끌어 주시는 아빠 아버지께
진정 깊은 감사와 사랑을 드립니다.
하느님을 향한 외골수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는 신부님과 선배님들,
그리고 함께 하는 모든 식구님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긴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증언으로 이끌어 주신 아빠아버지,
부족한 저를 통해 무한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첫댓글
< 알림 >
오직
무형의 성전에서만 시청하시기 바랍니다!
외부로 나가지 않도록 당부 부탁드립니다.
수고해 주신 끊기모 부회장 무척님께 감사드립니다~~~ ^ ^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 잘하고 싶은 마음, 있는 것보다 포장하고 싶은 마음,
이것이 평생 저를 지배한 제 뜻이 살아가는 방식이었는데,
이젠 발가벗고,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놓고도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의 세계를, 아버지의 사랑으로 새롭게 창조하며 천국의 삶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
딱 제가 살아왔던 방식과 비슷하게 사셨네요.
저도 그렇게 잘하고 포장하고 싶은 마음으로 살았었습니다.
그래서 들으면서 공감이 많이 되었습니다.
스스로 노력하고 노력하고 노력하여
지옥으로 직행한다면 얼마나 허무한 일이겠습니까.
하마터면 그렇게 살 뻔 했습니다.
<거내영>을 만나고 아버지께 내맡긴 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인생 최대의 기회였습니다.
참으로 감사 또 감사한 은총입니다.
아버지께 모든 것을 내맡기면
스스로 무엇을 하지 않아도
내 안의 아버지가 모든 일을 하시어
천국 문으로 이끌어 주시니 참으로 신비합니다.
이제는 아버지만 사랑하고 신뢰하여
부족한 모습이라도 그대로 철부지처럼 살아가려 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부족한 저희의 모든 것을 맡기오니
거룩하신 뜻대로 이끌어 주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물바람 보조 교사님 참으로 장하십니다.
처음에 증언하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꽃길만 걸으신 분에게 무슨 증언이 나올까? 무척 궁금했지요.
그러나 대 반전이 일어났지요.
아버지를 말 그대로 증언하신거지요.
고통이라는 포장지에 싸인 보물을 인내와 눈물과 한숨을 승화시켜 끊임없는 기도로 캐내셨네요.
우연은 없고 오직 아버지를 갈망하였기에 획득할 수 있었던 선물이었겠지요.
참으로 대단하신 분!
욕봤습니다.
우리 경상도의 찬미 찬사 입니다.
이제 남은 여생도 아버지 뜻대로 잘 이끌려 사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사랑합니다.
많이 많이요.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아빠아버지, 아버지께서 변화 시켜 주신 삶을 함께 하게
해 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무척님, 감사히 잘 보았습니다.
수고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물바람님~.
< 하향외 >(하느님을 향한 외골수) 되심을
진심으로 축하, 축하 드립니다!
넘 넘 감동입니다.
우아하고 고운 모습 안에 이리 큰 역경을 건너온 시간들이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얼마나 < 아버지 >를 뜨겁게 갈망하셨을 지가 느껴졌어요.
그 갈망으로 < 내맡긴 영혼 >으로 불림 받으셨음을 알았습니다.
나눠주셔서 정말 감사하고,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함께 가는 이 천국의 삶이 정말 감사하네요!
사랑하는 아버지,
찬미합니다, 사랑합니다. 흠숭합니다!
베풀어 주시는 모~~~든 것에 아버지의 섭리가 계심을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물바람과 부족한 저희 모두가 죽도록 뜨겁게 아버지만을 사랑하게 하소서.
부족한 저희 모두와 우주만물을 사랑하는 아버지께 내맡겨 드립니다.
< 거내영 >을 통하여 무한찬미영광 받으시며
거룩하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 ■ 내맡김 영성 ■
< 후속 > 13. 내맡김의 힘 ( 괴테의 詩 ) 해설
moowee 10.03.24 20:42
"내맡김"에는 엄청난 능력이 숨어 있습니다.
나의 모든 것을 완전히 100%를 하느님께 내맡겨드렸기 때문에,
나의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소유"가 됩니다.
나의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이 되었기에
"나"는 없어진 것입니다.
내가 사라지고 "하느님만" 남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만 남았으니 내가 곧, "하느님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을 소유하게 되었으니 그 힘이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다만,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일에서만 그 능력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허락하신 일에서는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있다면, 그 어떤 일에도,
그것이 비록 "죽음의 길"이라 하여도 절대로 멈춤이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첫 능구 3개월 막바지에 이른 새내기입니다.
선배님 증언을 보며 몇 번의 전율이 느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려움, 고통이라고 표현하기에도 부족한 온 생애 굽이굽이마다
하느님께 매달리시고 내맡기셨던 모습이 영화처럼 생생하게 와닿습니다.
감사와 감동의 눈물이 나네요.
왜 이름 없이 죽어간 순교 성인들이 생각날까요?
선배님들 따라 더 열심히 곰담묵 하며 따라가겠습니다.
아버지 이 모든 영광 받으소서. 아멘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 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무척님, 감사하게 잘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물바람님~~
아버지께서 당신을 통하여 보여주신 사랑과 은총 이끄심의 손길을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동 감동입니다.
한영혼 한영혼을 통하여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멋진 하느님 아버지.
감사와 사랑을 세세에 받으소서.
사랑하는 아버지,
물바람님의 모든것을 통하여 아버지 홀로 찬미와 영광을 받으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영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오늘은 물바람님의 증언이 제 마음을 가득 채울것 같네요.
참으로 장하십니다.
내 뜻으로 살았다 하지만 지나고 보면 순간순간이 하느님의 이끄심이었다 라고....
하느님에 대한 열망이 하느님 아니시면 못견디겠다는 그 열망이 지금의 물바람님이
되시지 않았을까요? (제 생각)
참으로 모범적으로 잘 살아오신 님의 증언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식구들의 마음을?
저의 마음을 감동으로 더더욱 뜨겁게 우리의 아버지를 사랑해 드리고픈 마음으로
이끌려 주시네요.
사랑하는 신부님!
보조교사님!
식구님들!
정말로 사랑하고 감사합니다.
<거내영>의 한 식구가 되어 자랑스럽습니다.
하느님아버지!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아빠아버지, 하느님 때문에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고운 영혼의 증언을 함께 하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무척님,
수고로 올려주신 증언 감사한 마음으로 잘 들었습니다..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물바람님,
< 거내영 >을 통해 참 신앙인으로 거듭나
하느님의 외골수 되심을 축하드립니다.
고통을 통해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그 어려운 고비들을 넘기고 넘기며 살아오시느라
넘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증언을 들으며
내가 똑같은 입장이었다면? 생각해봤습니다
힘들 때 하느님을 찾을 생각도 해보지 못하고
지쳐 떨어져 나가지 않았을까 싶네요.
물바람님 안에 자리하고 계셨던 하느님이
님의 외침(갈망)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위기 때마다 손 잡아 일으켜 주셨으며 그것들이 바탕이 되어
결국 < 거내영 >으로 이끌어 주셨음을 믿습니다.
쉽지 않았을 내면의 이야기들을 나눠주셔서 넘 감사합니다.
고맙고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감사합니다.
물바람의 모든 것을 통하여 무한찬미영광 받으소서.
물바람과 저희 모두가 아버지만을 죽도록 더욱 뜨겁게 사랑하게 하소서.
문 밖에 서성이는 많은 이들을 내맡겨 드립니다.
< 거내영 >과 모든 사제와 아버지께 내맡긴 영혼들을 통하여
무한찬미영광 받으시며 거룩하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 100% 완전히 내맡긴 영혼들은 외적인 모습부터
달라지기 시작한다. 잘생겨지거나 못생겨지는 것이 아니라
얼굴이 편안하고 거룩한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내적으로는 '하느님께 감사함'으로 수시로
뜨거운 눈물의 감사를 올리게 되며, '하느님에 대한 앎'을
위해 끊임없이 하느님의 말씀에 접근하게 되고,
그래서 그 영혼의 입에서는 하느님을 향한
’감사‘와 ’찬미‘가 떠날 날이 없다.
시간이 깊어질수록 하느님을 향한 사랑으로
그 영혼은 불타오르게 된다.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이끄심에 탄복을 하며
하느님의 신비 속으로 더욱 깊이 빠져들게 된다.
그 신비 속에서 도저히 빠져나올 수가 없다.
아니, 빠져 나오기가 도무지 싫은 것이다.
다 하느님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해 주시는 것이다.
한마디로 한없이 부족한 인간의 몸으로
이 현세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것이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 -창화살 제1부 08 -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 육적으로 아무리 힘들어도
철야기도를 다녀오면 <일주일을 살아낼 힘>이 생겼어요.
임신이 되고 나니
<그동안 찬미 찬양했던 하느님은 온데 간데 없고>,
현실이 올라오기 시작했어요.
철야기도를 다녀오면
마약 먹은 것처럼 모든 걸 감당할 수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 약발은 딱 일주일 갔어요.>
한 주라도 철야기도를 빠지면 그 다음 주는 완전 지옥이었습니다. ]
[ 아버지께서 주시는 마약은 철야기도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어요.
그 마약은 태어나기 전부터 내 안에 가득 차 있었건만,
눈 멀고 귀 먹어 찾아 먹지 못했던 거지요.
<생수를 찾아 이곳 저곳을 헤매던 사막의 여인이
이젠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오아시스, 거내영>을 만났습니다.
게다가
그 오아시스의 주인이 바로 저의 생부라는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저는 찐 아빠아버지를 만났습니다.
그 아버지께서
‘이젠 집 나가 생고생, 개고생 하지 말고 내 안에만 머물러 있으라.’
하십니다.
아버지의 딸이 되고 나니
많은 것이 <저절로> 해결되었습니다. ]
아멘~!
사랑하는 물바람님, 감사히 잘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무척님, 감사합니다.
응급실만 헤매던 갈급한 영혼이
아버지의 크신 은혜로
영혼육을 전인 치료해 주는 종합병원을 찾으셨군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영혼의 오아시스~!
사랑하는 아버지, 감사합니다.
거내영을 통하여 무한찬미영광 받으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무화.보조.고문단
【 [ 병원엔 응급실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이곳을 *종합병원*으로 만들겠습니다.
영혼육을 *전인 치료*하는 종합병원으로 만들겠습니다.
그곳 응급실엔 <의사>가 없었던 것입니다.
참치유자이신 <예수님을 닮은 의사>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말은
빈 소리가 되어 허공으로 날아가버렸습니다.
자칭 의사라는 사람들은
누가 더 뛰어난 자격증(은사)을 갖고 있냐로
서로 다투기가 일쑤였습니다. ]
[ 어두운 밤의 *달*은 밝습니다.
달은 가르키는 *손가락*도 빛나야 합니다.
그리고 손가락은 분명 달을 가르켜야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적지 않은 손가락들이 빛을 잃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가르킵니다.
손가락이
스스로를 달에게 내맡겨 *달처럼*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 마음의 병이든, 육신의 병이든
모든 것을 아버지께 내맡겨드리고
아버지만 바라보며 아버지를 사랑하면
그 모든 병에서 해방될 수 있는데, ]
[ 사실 이곳에는
오랜 기간 짙은 우울증.불면증 등으로 고생하시던 분들이
사랑하는 아버지의 은혜로
<완전치유(전인치유)> 받으신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하느님께 여러분의 모~~~든 것을
정말 완죠~~~오니 <100%>를 다 내맡기신다면
여러분의 우울증은 <완전치유> 받으실 것을 저는 아주 확신합니다.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모~~~든 것을,
당신 생명까지도 완전 <100%> 다 바치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99%>를 바치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100%로
100%의 <완전구원>을 이룩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듯이
하느님은 완전 그 자체이신 분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하시는 일은 모두 <완전> 그자체가 됩니다.
제가 왜 그토록 <100%>를 계속 외칩니까?
하느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우리가 하느님께 100%를 다 내맡겨드리면 100%를 아니,
200%, 300% ~ 그 이상을 베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저를 보십시오!
저는 저의 병들고 죄스런 저의 모든 것을
완전 100% 다 내맡겨드렸을 뿐인데
저에게 천% , 만%,
그 이상의 엄청난 은총을 베풀어주고 계십니다.
이 기회에 저는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하내영 중 우울증을 벗어나지 못한 하내영은
100%를 완전 다 내맡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100%를 내맡겨 하느님을 소유했는데,
우리 안에 오신 하느님이 99%만 찾아오셨습니까?
완전(100%) 자체이신 하느님이 당신의 1%를 다른 곳에 감추시고
99%만 우리에게 찾아오셨겠습니까?
★하느님은 완전기쁨, 완전행복★이십니다.
★완전기쁨 안에는 <단 1%의 우울>도 허용될 수 없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치유가 어떠하셨는지를!
병자들을 ★<완전치유>★해 주셨습니다! ]
[★ <거내영의 치유>는 부분치유가 절대아닙니다.★
★완전치유, 전인치유★입니다.
완전자체이신,
불가능이 없으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 내맡겼기 때문입니다! ] 】 위무위
모든 이들의 구원자이신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찬미와 경배를 바쳐드립니다.
사랑하는 무척님,
수고로 올려주신 소중한 증언, 감사한 마음으로 잘 들었습니다..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굽이굽이 돌고 돌아온 삶의 모든 여정들을
물바람님의 뜨거운 열정과 함께,
이끌어 주셨던 아버지의 자비하심과 크신 은총에 감사드립니다.
모든 삶의 발자국을 통하여 아버지의 거룩하신 계획과 섭리가 포함되어 있기에,
함께 공감하며, 아버지의 자비하심은 각자의
믿음의 정도에 따라 베풀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사랑의 이끄심으로 베풀어 주시고 계심을 믿기에,
오랜 세월들의 거친 파도와 모진 비바람 속을 헤치며 지나올 수 있는 힘을 얻어,
살아오실 수 있었음을 압니다
사랑하는 물바람님~
지나온 시간들을 모두가 아버지의 거룩하신 섭리와 계획안에 이끌어 주셨음에 감사를 바쳐드리며.
앞으로의 모든 삶 안에, 아버지의 거룩하신 뜻을 통하여 이루어내시는 놀라우신 은총의 꽃길만을 걸어가시길 기도 드립니다.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이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아빠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아빠, 내가 믿는 아버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분, 만질 수도 없으신 분.
마음으로 뵙고 가슴으로 안아 뜨거운 눈물짓게 하시는 분!
아버지, 물바람님의 삶 안에서 아버지의 짙은 그림자를 봅니다.
그 삶에 동행하시고 사랑하는 자녀를 단련시켜 아버지의 더 큰 영광을 드러내시기
시작하셨음에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오묘하신 방법으로 저희를 살리시고 이끄시는 아버지,
지난 온 물바람님의 고통 안에 아버지의 뜨거운 사랑이 가득 하나이다.
감사와 찬미를 드리나이다!
이제 물바람님을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으로 깊이 초대하셨으니
당신께서 시작하신 일을 마치시어 아버지의 참자녀로 사는 천국의 길로 인도하소서.
< 완전히 100%, 0.00001%,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전한 맡김
'내 뜻'을 완전히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만 남은 상태
그것이 거룩한 내맡김 영성이다.>
아멘.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잘하고 싶은 마음, 있는 것보다 포장하고 싶은 마음,
이것이 평생 저를 지배한 제 뜻이 살아가는 방식이었는데,
이젠 발가벗고, 임는 그대로를 드러 내놓고도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의 세계를, 아버지의 사랑으로 새롭게 창조하며 천국의 삶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물바람.보조교사님!
감명깊은 증언 보고. 다시 들으며 많은 공감과 아픔을 벗어던질 용기를 주셨습니다.
물바람.보조교사님,
깊은 감사와 사랑의 마음 드립니다~
제 뜻의 에고, 제 뜻의 티끌 하나도 남김없이 녹여내는 고통을 이곳 "무형의 성전"에서 연옥의 정화 과정을 보내게 이끌어 주신 아버지의 크나큰 사랑에 감사와 감동의 눈물 흘리나이다.
지겨봐 주시고 기다려 주시며 자비로운 사랑으로 이끌어 가시는 아버지께 부족하고 불완전한 저의 모든 것을 내맡겨 드리옵니다...
"하느님을 향한 외골수"로 새롭게 변화되어 아빠 아버지 만을 뜨겁게 뜨겁게 사랑하게 하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 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물바람님,
님의 구비구비 삶의 역사에 함께 하시고
거내영까지 님을 불러주셔서 이 거룩한 증언을 선포하게 해주신
아버지를 뜨겁게 사랑하고 찬미합니다.
얼마나 그동안 힘드셨어요.
여기까지 오느라고 참으로 수고 많으셨어요.
꼬~~옥 안아드립니다.
성령기도회를 통하여 응급실 마약 처방으로 하루하루 견디던 신앙이,
이끌어 주신 모든 것이 아버지의 섭리였음을 뒤늦게서야 깨닫던 신앙이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아버지의 이끄심을 실시간으로 깨닫는
거내영으로 이끌어 주셨으니 아버지 만만세!!!입니다.
연옥의 정화를 살아서 받느라
신부님의 장교훈련으로 미리 겪게 하신다는데
아버지가 '없는' 연옥과
아버지와 '함께' 누리는 지금여기는 비교불가지요^^
정년 후 아버지 일만 하고 싶으셨다던
귀한 님과 함께 거내영의 사도로 불림 받았음에
너무나 뜨겁게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저도 사랑하는 님을 따라
아버지만을 죽도록 뜨겁게 사랑하는 이 길을 충실히 걸으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감사합니다.
물바람의 증언을 통하여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크게 드러내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 moowee 17.04.07. 07:45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100% 다 내맡긴 영혼들은 절~~~대로,
그곳 <연옥>에 갈 수 없습니다, 가고 싶어도 절~~~대로 갈 수 없습니다.
왜?
100%를 다 내맡겼고
내맡긴 영혼을 맡아주신 분이
<전능하시고 자비하시고 거룩하신 내맡긴 이의 참아버지이신 하느님>
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분께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맡겼고
내맡긴 영혼을 책임 맡고 계신 그분께서
맡긴 이의 모든 것을 깨~~~끗이
티끌 하나도 남지 않도록 아주 깨~~~깨끗이
정화시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승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 51)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진실입니다, 진실!
<생명의 주인>이신,
전능하시고 자비하시고 거룩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께 자신의 모~~~든 것을 100% 다 내맡긴 영혼들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는 그 순간, 바로 즉~~~시,
<죽음을 맛 볼>시간조차 없이
그 영혼을 당신 품에 꼬옥~ 안아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뿐만 아니라
그 어느 성인들보다 더 당신 가까이에 데리고 가시어
그곳에서 당신과 함께 영원히 사시게 해 줄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그곳이 바로 그토록,
우리가 바라오던 그곳 <하느님 나라>입니다.
<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 예수님을 100% 믿고 그래서 당신처럼 100% 내맡긴사람 >은
< 죽음을 보지 않 >을 뿐 아니라,
< 영원히 죽지 않을 것 >을 저는 굳게 믿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긴 영혼에게 있어서의
< 죽음 >은 죽음이 아닙니다,
죽음이라 말할 수 없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맛볼 0.0000~~~1초의 틈새도 없이,
생명의 주인께서 데려가셨는데
그 어찌 그것을 죽음이라 할 수 있겠는지요?
생명의 주인이신 사랑하는 아버지,
당신께 자신의 모~~~든 것을 완죤~~~히
100% 다 내맡긴 영혼들을 통하여 무한찬미영광 받으소서, 아멘! ]
증언으로 이끌어 주신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사랑하는 물바람님~
거룩한 증언 가슴벅차게 눈시울 적셔가며
손바닥 불나게 박수치며 온 몸으로 전률하며 들었답니다.
물바람님의 지금의 얼굴을 보면
그런 삶의 풍파는 전혀 겪지 않은 사람처럼
그저 평온하고 정말 물처럼, 바람처럼 살아온 사람같은데
지금의 얼굴은 <거내영>화 된 얼굴이였군요. ㅎㅎ
늘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그러나
그 존재감은 확실한 물바람님의 증언을 들으며
물바람님의 삶의 곳곳에 늘 함께 해온
아버지 숨결이 느껴져 참으로 감사한 시간이였습니다.
어려운 중에도 물바람님 주변에 항상 도움주는 천사들이 있었고
세상 이익을 향해 달리지 않았던 선택이 오히려
물바람님에게 큰 기쁨의 부메랑이 되어 다시 돌아 오는 것을 보니
역쉬 아버지께서는 세세히 하나하나 다 살피시고 계셨나 봅니다.
사랑하는 물바랍님~
거룩한 증언 참으로 감사합니다.
물바람님의 말씀처럼
<이 증언을 통하여 아버지 홀로 찬미영광 받으소서.>
정말정말 이 거룩한 증언을 통하여
아버지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이 크게 드러나길 바래봅니다.
아버지의 완사완영을 위하여!!
하느님아버지, 아름다운 영혼을 알게 해주심에 참으로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무척님,
물바람님의 증언과 증언글을
다시 듣고 보게 해주심에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물바람님,
저는 물바람님이 들꽃내음 닉네임으로 가입했을 때 부터
댓글이 너무 아름다워서 팬 이었습니다.
나중에 교장선생님으로 재직하셨다는 말씀에
다소 무난하게 신앙생활을 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물바람님의 생활나누기 글들을 읽으면서
점점 더 물바람님을 더 알고 싶었습니다.
그런 제 바람을 아시듯이
물바람님의 증언을 선물로 받는 것 같습니다.
그간 겪은 일들을 관통하시는
아버지를 만나게 해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이
아버지의 이끄심이시며 섭리이지만
인간적으로 참으로 참으로 잘 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의 물바람님의 얼굴을 뵈오면
아버지의 사랑이 느껴집니다.
거내영안에서 더욱 더 아버지만을 사랑하시어
아버지를 꼭 닮은 아름다운 영혼이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사랑하는 물바람의 모든 것을 통하여
아버지 마음껏 무한찬미영광 받으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물바람님,
<아버지 미사>를 통해 생생한 증언을 들었지만,
증언 글로서 읽으니 더 더 진한 감동을 주시네요!
사랑하는 물바람님의 전 생애가
아버지의 거룩하신 섭리의 이끄심이었음을.
바로 내맡긴 영혼, 한 영혼을 향한
아버지의 뜨거운 손길이었음이 느껴지네요~
얼마나 고통스럽고 얼마나 슬프고
얼마나 가슴 절절이 감내해야만 했을지요!
그 모든 것이 완전히 아버지만을 향하게 하시어
아버지를 향한 뜨거운 갈망이 심어진 것이지요!
참으로 이제 그렇게 진정으로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발길을 잘 돌리셨습니다.
제대로 된 방향키를 쥐어 주시었기에...
너무나 진하게 축하드려요~
<거내영>을 통해,
아버지 증언을 통해
진정한 <하느님을 향한 외골수>로 거듭나심을요.
함께 그 길로 잘 이끌려드립시다.
사랑하는 아버지!
물바람의 모든 것을 통하여
아버지의 뜻을 이루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아버지의 참진리를 살도록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으로 이끌어 주시어 공동체의
사랑안에서 기쁨으로 살아가는 거룩한 영혼들을 내맡겨
드립니다.
사랑하는 무척님의 수고에 감사 드립니다.
또다른 감동으로 다가오네요.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물바람님,
참으로 잘 살아 오셨네요.
박수를 보냅니다.
아버지를 끊임없이 부르 짖으며 살아 오시며 기도하신 결과로 거내영을 보너스로 선물 받으셨네요.
축하드립니다.
다시 한번 진솔하고 멋지고 완벽한 증언에 감사 드리고 축복하고 존경합니다.
참으로 좋으신 몫을 택하셧고 아버지의 이끄심에 잘 이끌려 오셔서 감사 드립니다.
저는 언감생심 흉내도 낼수없는 삶을 살아 오셨음에 더욱 큰 박수를 보냅니다.
아버지미사 에서의 증언의 감동이
되살아 나며 정말 최고의 영과 육의 훈련을 잘 받으시고 훌륭한
삶을 거내영으로 이끌어 주시어 최고의 영적인 삶으로 열매 맺게 이끌려 가는 삶을 살아가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거내영의 보물로 이끌어 주신 하느님아버지 찬미드립니다.
자비하신 아빠아버지,
물처럼 바람처럼 살아가는 삶으로 이끌어 주시는 물바람을 통하여 무한찬미영광 받으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무척님,
수고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물바람님,
다시 들어도 감동 그 자체입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고,
참 좋은 몫을 택하시어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셨으니 (루카 10,42)
이렇게 아버지 영광의 도구되어 많은 영혼들에게 아버지 영광을 증언하는 복된 영혼이 되셨네요.
'끊임없는 화살기도와 매일 매일 아버지께 드리는 사랑 편지가 마중물이 되어
일상이 아버지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진다'는 고백에 너무나 공감하면서
아버지를 만남으로써 완전한 기쁨과 행복을 거머쥐시어
아버지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충만한 삶을 살고 계심에 감사드립니다.
나눠주셔서 정말 감사하고,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기적은 결코 멀리 있지 않지요!
사랑하는 아버지,
베풀어주시고 이끌어주시는 모든 은총에 감사드립니다.
< 거내영 >과 물바람과 부족한 저희 모두가 죽도록 뜨겁게 아버지만을 사랑하게 하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무척님,
귀한 증언을 다시 듣게 해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물바람님,
질곡의 삶 안에서 오직 아버지만을 찾고자 아버지 뜻에만 이끌려 드리려
온 영혼을 다바쳐 달려오신 간절한 날개짓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나의 그 고요와 평화가
부족한 제 영혼에 공명되어 옵니다.
그 평화 속에 용광로의 그것처럼 결코 꺼지지 않을
아버지의 사랑과 님의 사랑이 하나되어 세상을 덮습니다.
이토록 귀한 증언을 듣도록 허락하신 아버지께
무한 감사와 찬미와 흠숭을 드립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아버지 사랑앞에 온전히 벌거벗은 물바람의 모든 것을 통하여
아버지 홀로 마음껏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아버지만을 죽도록 죽기까지 뜨겁게 사랑합니다!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무척님,
귀한 증언을 듣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물바람님,
거룩한 증언 감사드리고 너무나 감동입니다.
물바람님을 처음뵙을때 교장선생님이 아니셨을까 하는 느낌이 왔었는데
정말 교장선생님이셨군요
언제나 겸손하시고 모든것을 다 품어 안아 줄것만
같은 따뜻하고 사랑많으신 분이신것 같았는데 맞네요
참으로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시면서 아버지를 놓치지 않고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을 통하여 진리를 찾아서
아버지만 꼭 안고계신 물바람님 존경합니다.
아버지께 맡기고 아버지의 일을 할때 모든것을 아버지께서
다 해주신다는 것을 물바람님의 증언에서도 알게 되네요.
아버지께 내맡긴 그 힘으로 모든 역경을 기쁨으로 승화시킨 물바람님의
삶자체가 증언이고 아버지께 완전한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이네요
모든것을 아버지의 뜻을 따르시며 정말 아버지와 하나되어
늘 기쁘게 아버지의 일을 하시고 정말 물처럼 바람처럼 사시는
사랑하는 물바람보조교사님 정말 사랑하고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물바람의 모든것을 통하여 무한찬미영광 받으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사랑으로 이끌어 가시는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아버지 때에 아버지의 방식으로 정화시키실 것을 믿기에 힘주라 하시면 힘주고, 찢으라 하시면 찢으며 아버지의 뜻에 이끌려 드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물바람님,
어쩜이리도 감칠맛나고 감동적인 증언을 선물해 주시는지요.
그 힘든 과정의 파도들을 거뜬히 아버지의 품안에서 넘기시는 그 과정에서 자국마다 함께하신 아버지를 봅니다.
한점 거리낌없는 그런 깨끗하고 고귀한 삶이니 아버지께서 사랑을 아끼지 않으셨나봅니다.
저에게는 양심에 거리끼는 일들이 물바람님께서는 아버지의 임재하심으로 선으로 해결해 가심들이 돋보입니다.
저에게 여러가지로 가르침과 양심찔림을 주신 보조교사님, 벌거벗고 보여주신 가르침들의 선물들 잘 받아서 자양분으로 두고두고 우러먹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물바람의 모든 것을 통하여 아버지의 거룩하신 사랑을 크게 드러내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이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한사람의 삶은 온통 아름다움으로 재탄생
시켜주시는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자식이면 자식 남편이면 남편 시부모님이면
시부모님,
모든 삶의 고통을 통째로 짊어지고 가신
님의 그 길이 수난의 예수님이의 길이었네요.
저도 같이 조마조마 마음 졸이면서 들었네요.
너무 버거워서 마음놓고 울 시간도 없이
숨도 쉴 여유도 없이 살아오신 삶인것 같아 눈시울이 뜨거워 졌습니다.
감사하고 감사드립니다.
사랑하고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아빠아버지,
물바람의 그 모든것을 통째로 드립니다.
수난의 예수님께서 <거내영>을 만나
부활의 예수가 되신것 같읍니다.
사랑하고 감사,감사드립니다.~♡♡♡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이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이 증언을 읽는 동안 가슴이 먹먹하고 무거웠습니다.
저라면 거부하고 미친듯이 울부짖었을 삶의 무게를 오직 아버지를 붙잡고 살아내셔서 아버지께서 살아주셔서 감당해 내셨군요!
하느님아버지 찬미드리고 또 찬미드립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물바람의 모든것을 아버지께 맡기오니 이끌어주소서!
물바람을 통해 무한찬미영광 받으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이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하느님 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
제가 작은 휴대폰화면만으로는 눈이 피로해서 카페를 이리저리 둘러보지 못한 채 지냈었는데, 드디어 노트북을 하나 장만하여 수월하게 물바람의 간증을 듣고 읽을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작은 자신을 주장하기 보다는 오로지 전능하시고 자비하시고 거룩하신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긴 물바람의 아름다운 간증을 통하여 찬미와 영광을 받으셨나이다.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