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를 전후로 더욱 활발한 활동을 보이는 것으로 보이는 정진홍 교수의 글과 언어는 품이 넓은 종류의 것입니다. 이는 구체적으로 '질문'이나 '회귀'와 같은 '단단한' 한자어를 '물음', '되돌아감'과 같은 우리말로 '풀어서' 쓰는 데에서 오는 것인데, 여기에 '~것이지요.' '아닐까요'와 같은 나긋나긋한 대화체의 어투가 덧붙여지면서 그 말의 정확한 의미에서 uncanny (Unheimlich)한, 즉 ‘더 이상 편안하지 않은, 우리집이라고 부르기 어색한 우리집’의 효과가 생겨납니다.
이 어색함은 ‘우리’가 잘 쓰지 않는 ‘우리’말의 ‘학술적’ 사용에서 오는 것인데, 이것이 단순한 수사에 그치지 않는 것은 -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황당한 일이지만- 유학 오기 전 서강대에서 길희성 교수의 주관으로 열린 종교학 월례 발표회에 선생님께서 발표하신 글이 ‘학술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두 번이나 반려, 수정요청 되었다는 (제게만 허락한) 그 자신의 사적인 고백을 통해 ‘입증’된 바 있습니다. 이는 학부 4학년 때 이기상 교수가 번역한 하이데거의 [기술과 전향]을 읽고서 들었던, 어색함을 넘어선 (무지에 기초한) 분노와는 언뜻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하이데거 철학의 ‘심오함’과 어려움이 역설적으로 너무나 쉬운 보통사람(Volk)들의 일상 독일어를 철저하게 철학적인 개념어로 사용하려는 데에서 온 것처럼 양자 모두 근본적으로는 같은 수맥에 물줄기를 대고 있는 것입니다. (‘존재자’와 구분되는, 끊임없이 돌아’와’야만, 혹은 돌아’가’야만 할 것으로 정의되는 ‘존재’의 개념과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그의 유명한 표현은 정확하게 이런 맥락에서, 다시 말해 그 ‘표면’으로서의 일상어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후기 하이데거 철학의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인 Gestell을 위의 책에서 이기상 교수가 ‘닦달’이라고 번역할 때 들어서는 ‘철학적’ 효과와 정진홍 선생이 이미 30여년 전에 엘리아데의 주저인 [우주와 역사(영원회귀의 신화)]를 번역한 뒤 쓴 일종의 해제에서 “사실, 오늘의 현실에서 필요한 것은 해답이 아니라 물음이다.”(258)라고 썼을 때 이루어지는 두 겹의 자리이동, 다시 말해 해답(answer)에서 질문(question)으로의 이동과 한자(로서의 ‘해답’)에서 한글(로서의 ‘물음’으)로의 이동은 구조적으로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정진홍 선생은 한글전용론자가 아니며, 그의 글 역시 순수한 한글에 대한 집착과는 거리가 멉니다. 이번에 출간된 그의 산문집 제목([잃어버린 언어들])에서도 상실의 정서는 반복되고, 예를 들어 그의 종교론에 대한 가장 압축적인 시론이자 알레고리라고 볼 수 있는 한 글에서 그는 여전히 ‘물음’과 ‘되돌아감’, ‘머무름’과 같은 단어들을 부지런히 꺼내 들지만, 이들은 ‘‘귀향의 언어’([마당에는 때로 은빛 꽃이 핀다](강, 1997))라는 글의 제목과 ‘더불어’ 살 뿐이고, ‘결국 제목은 한자말이 아닌가’라는 비판 역시 본문 차원에서 이러한 한글단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일종의 내파(implosion)를 고려하지 못하는 한 비판을 위한 비판에 머무를 뿐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풀어- 혹은 묶어- 얘기한다면, ‘되돌아감’이라는 기의 차원의 절대적 모티브가 우리말이라는 기표 차원에서도 작동하지만, 이는 잡종화된 지금의 ‘우리말’과의 대면과 대화를 통해 어색함을 유지하는 한에서만, 즉 완벽하게 되돌아’가’지 않고 다시 지금으로 되돌아’옴’을 통해서만 기능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학술적이지 않다’라는 의미에서 (학술적) 대화라는 상황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 수도 있었던, 대화에 근본적으로 내재하는 말 그대로의 어색함을 통해 그의 ‘대화’ 개념은 미국을 중심으로 안전하게 ‘방법론화’된 바흐친의 대화주의(Dialogism)나 다성성(multivocality) 개념과는 분명한 거리를 유지합니다. 왜냐하면 대화란 결국 대화 자체의 불가능성과 함께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가 “’상실’은 내 존재의 의식을 결정한 뿌리이고 틀이고 모두였는지도 모른다. 상실로부터 비롯된 ‘되찾음에의 지향’, 그것이 내 삶의 모습이었다고 말해도 좋다."('귀향의 언어', 136)라거나 "새집 어디에서도" "집에 가야지, 해가 지기 전에 집에 가야지"라고 되뇌이며 그가 "집에 돌아가야한다고 다짐"하면서도(138-9) 표제작이자 '집' 연작의 아홉번째 시인 '마당에는 때로 은빛 꽃이 핀다'에서 "아무도 살지 않아 너만 사는 삶이 집을 짓는다"고 쓰고 쉼표로 호흡을 고른뒤, "부러운 넘침"(22)에 대한 자신의 심정을 겹쳐놓는 이유일 것입니다.
‘회귀’의 모티브에 대한 정진홍 선생의 이러한 미묘한 변주는 엘리아데의 단순한 소개자로 소개, ‘정리’되는 정진홍 교수의 작업에 대한 학계의 이해를 넘어서는 보다 섬세한 분석을 요하는 것입니다. 종교라는 현상을 보다 일상적인 문화현상 일반의 관점에서 바라보려는 그의 프로젝트는 이처럼 일종의 회귀점으로서 기능하는 우리말, 혹은 일상언어에 대한 접근과 뗄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하이데거와 닿아있고, 다른 한 편으로는 엘리아데와 하이데거가 공유하는 의사 종교적인(pseudo-religious) ‘근원으로의 회귀’라는 모티브와도 겹쳐집니다 (물론 이는 여전히 엘리아데의 종교론이 ‘전세계에 편재하는 우주의 중심으로서의 배꼽(omphalos)’이라는 공간적 역설과 ‘언제건 반복될 수 있는 원초적 시간으로의 회귀’라는 시간적 역설로 이루어진다고 보는 전제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젊은 시절 루마니아의 젊은 천재로서 과격한 우파 기독교 민족주의에 깊이 몸담았던 엘리아데의 전력과 (최근에 읽어본 이에 대한 가장 흥미로운 연구서로는 융과 엘리아데, 그리고 조셉 캠벨의 종교, 신화론이 갖는 정치적인 맥락을 파헤친 [The Politics of Myth]입니다) 그의 소위 ‘성숙한’ 학문 사이의 거리, 그리고 널리 알려진 하이데거와 독일민족주의 간의 외밀한 (extimate) 관계와 그의 종교현상론이 맺는 낯설은 (unheimlich) 관계가 제겐 더 흥미로와 보입니다. 다시 말해, ‘회귀’와 ‘우리말’과 그의 종교현상론이 맺는, 혼성과 잡종성에 대한 학술적 유행과는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는, 따라서 언제든지 위험해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관계가 예를 들어 드 만(Paul de Man)이 – 결국은 나치주의와 연루된 그 자신의 젊은 시절에 대한 코멘트이겠지만- 루소에 대한 ‘낭만주의적 오해’를 언급하면서 지적했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과 근원을 향해 시선을 돌리는, 혹은 바라보는 것 사이의 미묘한 차이와 -데리다를 빌자면- 얼마나 닮은 것인지를 밝혀내는 것.
Cf. 참고로 한국어에 대한 민감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흥미로운 비교의 대상은 김진석 교수와 김상환 교수입니다. 자신의 전공영역인 니체와 하이데거의 말놀이 철학이 갖는 토착화 가능성을 다소 추상적으로 탐색하던 전기(특히 탈(mask)을 탈(脫)하고 (배)탈나는 과정에 집착했던 [탈형이상학과 탈변증법])의 궤적에서 보다 구체적인 언어로서의 문학에 개입하는 ‘문학평론가’이자 사회현상에 구체적으로 개입하는 사회평론의 주간으로 몇 년 전부터 자신의 활동영역을 설정하기 시작한 전자와 텍스트에 대한 (때로는 지나치게) 매끈한 이해력과 압축력, 그리고 발군의 한국어 문장 감각을 바탕으로 전통적인 철학담론 내부에 머무르면서 최근에는 동서양 철학을 말 그대로 이어주는 ‘계사존재론’을 시안적으로 내놓은 후자간의 거리는 여전히 '가장 구체적인 것으로 이해되는 (철학적) 언어'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을 통해 측정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무엇이 가장 구체적인 것인가, 존재의 집인 언어인가(문학), 우리가 발붙이고 있는 현실인가(사회평론), 아니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동양'의 철학자라는 인식인가?라는 것. 물론 이에 대한 분석은 다른 지면을 필요로 하겠지요.
첫댓글대학 1학년 첫학기에 (소광희 교수님의 '철학개론' 대신에) 들었던 강의가 정진홍 교수님의 '종교학개론'이었는데, 그 학기에 가장 많이 듣고 배운 강의였죠. 작년인가 퇴임강연도 가서 들었으니까, 제 대학생활도 끝날 만했습니다^^ The Politics of Myth란 책에 대한 정보는 유익하군요...
제가 들었던 수업은 4학년 2학기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었던 선생님의 '신화론'이었습니다. 들어갔더니 아무런 실라부스도 없이 '요즘들어 특히 제가 정말 제대로 아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여러분께 배우려고 합니다'라고 하시더군요. 그리고는 기억도 나지 않는 산문 한 문단을 읽어주셨는데, 이걸 학기 마지막
때 다시 읽어주셨을 때 (그때서야 그게 첫시간에 읽었던 것과 같은 문단이라는 걸 알게 됐지요) '와, 헤겔이다'라는 감탄사를 떨구었던 기억이 납니다. 한 학기동안 '우리'가 살을 채운 수업 전체가 그 안에 모두 담겨 있었다는 충격! (그 글이 위에서 언급한 '귀향의 언어'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 역시 훨씬 나중이었구요)
전 그 수업을 위해서만 30권에 가까운 책을 읽었고 선생님께서는 갓 복학한 학부생의 글에 '새로운 글쓰기를 보여주었다'는 (부푼) 상찬을 내려주셨습니다. '나도 공부를 할 수 있겠다'는 심각한 환상을 심어주시긴 하셨지만 선생님은 제가 학부 시절을 통틀어 기억할 수 있는 유일한 '스승'입니다. 잘 지내시는지...
개인적으로 전 김진석과 김상환은 별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이들이 번역을 좀 했으면) 하지만, 이기상 교수에 대해선 몇마디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존재와 시간> 번역이 그것입니다. 사실, 이 번역서는 소광희 교수의 <존재와 시간>과 비교가능한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전 이기상 번역을 더 높이 평가
합니다. 다만, 문장의 차원에서 볼때, 너무 원문에 끌려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 문장이 길어지면 글 자체가 꼬여 무슨 말이 정확히 파악하기가 힘든 면이 있습니다. (이점에서 때론 완벽한 가지치기를 하고 있는 소광희본이 이해하기 쉬운 경우가 있습니다) 즉, 개념 번역어의 선택에는 성공했다고 보지만
문장장악에 실패했다는 느낌이 듭니다. 서구철학의 우리말화는 단지 몇몇 주요 개념어 번역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논리(문장 구조) 자체를 우리말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해서, 전 이점까지 엄두에 둔 이기상 본 <존재와 시간>의 개정판이 나왔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엘리아데에 관한 두 가지 생각. 예전 고려원이 망했을 때 우연히 발견한 박사학위논문 <요가>를 그날 당장 3000원이 없어 사지 못했던 기억(일테면 희귀본이죠)과 지금 그의 라이프워크라고 해야 할 대저 <세계종교사>(총 4권중에 마지막 권은 미완으로 끝났지만)을 살까말까하는 망설임
소광희 교수의 [존재와 시간] 번역본은 제가 아끼던 엘리아데의 [상징, 신성, 예술]과 함께 태평양을 건너는 과정에서 알 수 없는 여인의 하이힐과 뒤바뀌어 어딘가로 사라져버린 수십권의 책들 중 하나입니다. (한 중국 유학생의 유기화학 책도 덤으로 섞여있었죠) 개인적으로는 엘리아데가 자신의 인도 체류 경험을 바탕
으로 루마니아에서 25세에 쓴, 이제는 절판된 [벵갈의 밤] 번역본 (세계사, 이재룡 옮김)을 아끼는 편입니다. 종교학자로만 알려져있지만 엘리아데는 몇 편의 소설을 남겼고 그 중 [벵갈의 밤]은 바슐라르의 극찬을 받은 바 있지요. 또 엘리아데는 유명한 발자크 애독자로 그의 작품을 읽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글을 썼습
그리고, 김진석, 김상환 교수에 대한 평가가 '번역이나 해라'니 우리 나라 철학과 교수중 자기 책 내고 쿤데라님께 욕 안먹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 하지만 위에서도 썼듯이 보다 제 관심을 끄는 것은 그들의 최근 궤적이 드러내는 구체성, 혹은 언젠가 코멘트를 달았던 '단독성'에 대한 열망입니다. 즉, 어떻게 하면
교수를 벗어나는 것은 간단합니다. 교수를 그만 두면 됩니다. 즉, 전략적 이야기처럼 생각됩니다. 자기변호의 알리바이같은 거. 현실을 맞붙되 함물되지 않는다니, 그것은 '탈' 어쩌구 하는 것보다 더 이상한 이야기입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올갈데 없는 제자들의 모습은 안중에도 없는 현실이라... 함몰될 필요가 있씀^^
'탈'에 관한 이야기는 제가 알기로 김지하가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논의한 것 같은데, 일본에서도 이 '탈'에 대한 인식이 비슷합니다. 바꿔말해, 김진석 이전에 김진석과 비슷하게 '탈'논의를 한 책을 발견하고, 설마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짐직하건데, 70년대에 일본지식인들이 받은 김지하의 영향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맞습니다. '모 아니면 도'라는 이런 쿤데라님 특유의 '현실' 논리는 익숙한 것이죠. 탄핵시위한다는 사람들도 다 똑같은 겁니다. 어차피 시위 끝나고나서 미팅가고, 다음날 presentation준비할거고, 귀가 길에 딸내미 피아노 학원비 낼 생각이나 하고 있다면, 즉 정치'적' 대학생, 회사원, 아버지 밖에 될 수 없다면,
즉 '자퇴, 퇴사, 가출'해서 진짜 '정치'만 할 수 없다면 '냉정'을 지키는 게 낫다'는, '모든 쭉정이, 모사물, 1등을 제외한 그 아랫것들'에 대한, 즉 '비이데아'적'인 것들에 대한, 들뢰즈의 비판대상으로서의 플라톤주의. 제가 (거짓된) '텍스트 (내의) 정치 아니면 유나바머(textual politics or unabomber)'라고 이름붙
인 이러한 '비현실적 현실주의 이데올로기'를 Sloterdijk은 하나의 '시대정신(zeitgeist)으로서의 냉소주의'라고 불렀죠.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부터 최근의 [Organs Without Bodies]에 이르기까지 현실주의를 가장한 냉소주의를 최대의 적으로 삼는 지젝의 태도도 그가 인정하듯 Sloterdijk을 벤치마킹한 것입
다) '자기변호의 알리바이'라는 의심(즉 정치'적' 교수, 실천'적' 이론 등등)은 그 대상이 누구이건 피해갈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러한 의심'만'을 직업'적'으로 생산하는 이들이 많을 때에는 (즉 '너희들 다 가짜지?') 바로 그들에게 되돌려지는 게 더 급선무라고 생각합니다. 즉, '냉정'은 0도, 무채색, 무행동이 아니라
이미 하나의 감정(affect)이고, 색깔이며, 움직임이라는 것. 흰색은 바탕으로서의 캔버스가 아니라 검은색과 같은 레벨에 있는, 일개 색에 불과하다는 것. '전략적 이야기'라는 의심은 후자를 전자로 되돌리려 하는 자들에게 가장 먼저 되돌려져야 합니다. 물론 이는 김진석 '교수' (김상환 '교수'는 아예 제외하지요)의 작
업이 '정말로 정치적인 개입을 이뤄내고 있다'라는 평가와는 별개의 것입니다. 저의 잠정적인 견해는 'textual politics or unabomber'라는 이분법 자체가 (비 바디우적 의미에서) 플라톤적이며, 관념론적 거짓이라는 비판에 근거합니다. 쌍둥이빌딩을 폭파한다고 해서 미제국주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치
란 교수직을 사퇴한다거나 자퇴, 가출하고 곧바로 국회의사당을 점거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저기,' 손만 내밀면 쥘 수 있는 구체적인 것으로 정의되는 의사헤겔주의적 현실주의는 이미 로티(특히 [미국 만들기(Achieving Our Country)]에 의해 모범적으로 '실현'되고 있지요. ^^/ 김지하가 맞습니다.
첫댓글 대학 1학년 첫학기에 (소광희 교수님의 '철학개론' 대신에) 들었던 강의가 정진홍 교수님의 '종교학개론'이었는데, 그 학기에 가장 많이 듣고 배운 강의였죠. 작년인가 퇴임강연도 가서 들었으니까, 제 대학생활도 끝날 만했습니다^^ The Politics of Myth란 책에 대한 정보는 유익하군요...
제가 들었던 수업은 4학년 2학기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었던 선생님의 '신화론'이었습니다. 들어갔더니 아무런 실라부스도 없이 '요즘들어 특히 제가 정말 제대로 아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여러분께 배우려고 합니다'라고 하시더군요. 그리고는 기억도 나지 않는 산문 한 문단을 읽어주셨는데, 이걸 학기 마지막
때 다시 읽어주셨을 때 (그때서야 그게 첫시간에 읽었던 것과 같은 문단이라는 걸 알게 됐지요) '와, 헤겔이다'라는 감탄사를 떨구었던 기억이 납니다. 한 학기동안 '우리'가 살을 채운 수업 전체가 그 안에 모두 담겨 있었다는 충격! (그 글이 위에서 언급한 '귀향의 언어'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 역시 훨씬 나중이었구요)
전 그 수업을 위해서만 30권에 가까운 책을 읽었고 선생님께서는 갓 복학한 학부생의 글에 '새로운 글쓰기를 보여주었다'는 (부푼) 상찬을 내려주셨습니다. '나도 공부를 할 수 있겠다'는 심각한 환상을 심어주시긴 하셨지만 선생님은 제가 학부 시절을 통틀어 기억할 수 있는 유일한 '스승'입니다. 잘 지내시는지...
개인적으로 전 김진석과 김상환은 별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이들이 번역을 좀 했으면) 하지만, 이기상 교수에 대해선 몇마디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존재와 시간> 번역이 그것입니다. 사실, 이 번역서는 소광희 교수의 <존재와 시간>과 비교가능한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전 이기상 번역을 더 높이 평가
합니다. 다만, 문장의 차원에서 볼때, 너무 원문에 끌려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 문장이 길어지면 글 자체가 꼬여 무슨 말이 정확히 파악하기가 힘든 면이 있습니다. (이점에서 때론 완벽한 가지치기를 하고 있는 소광희본이 이해하기 쉬운 경우가 있습니다) 즉, 개념 번역어의 선택에는 성공했다고 보지만
문장장악에 실패했다는 느낌이 듭니다. 서구철학의 우리말화는 단지 몇몇 주요 개념어 번역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논리(문장 구조) 자체를 우리말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해서, 전 이점까지 엄두에 둔 이기상 본 <존재와 시간>의 개정판이 나왔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덧붙여, 소광희 번역은 지금 일본에서 읽히고 있는 일어본 4종류 중 한 종류와 개념어 선정이나 문장구조에 있는 상당히 유사합니다. 물론, 중역을 했다고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기상 교수만큼 자의식이 없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엘리아데에 관한 두 가지 생각. 예전 고려원이 망했을 때 우연히 발견한 박사학위논문 <요가>를 그날 당장 3000원이 없어 사지 못했던 기억(일테면 희귀본이죠)과 지금 그의 라이프워크라고 해야 할 대저 <세계종교사>(총 4권중에 마지막 권은 미완으로 끝났지만)을 살까말까하는 망설임
소광희 교수의 [존재와 시간] 번역본은 제가 아끼던 엘리아데의 [상징, 신성, 예술]과 함께 태평양을 건너는 과정에서 알 수 없는 여인의 하이힐과 뒤바뀌어 어딘가로 사라져버린 수십권의 책들 중 하나입니다. (한 중국 유학생의 유기화학 책도 덤으로 섞여있었죠) 개인적으로는 엘리아데가 자신의 인도 체류 경험을 바탕
으로 루마니아에서 25세에 쓴, 이제는 절판된 [벵갈의 밤] 번역본 (세계사, 이재룡 옮김)을 아끼는 편입니다. 종교학자로만 알려져있지만 엘리아데는 몇 편의 소설을 남겼고 그 중 [벵갈의 밤]은 바슐라르의 극찬을 받은 바 있지요. 또 엘리아데는 유명한 발자크 애독자로 그의 작품을 읽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글을 썼습
니다. 1947년 9월 4일 자 일기의 한토막. "지난 밤, 나는 더이상 [신성한 시간]에 대한 장을 계속할 의욕이 없어 새벽 3시까지 [고리오 영감]을 다시 읽었다. 난 이 비범한 소설을 8번인가 9번째 읽는다."
그리고, 김진석, 김상환 교수에 대한 평가가 '번역이나 해라'니 우리 나라 철학과 교수중 자기 책 내고 쿤데라님께 욕 안먹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 하지만 위에서도 썼듯이 보다 제 관심을 끄는 것은 그들의 최근 궤적이 드러내는 구체성, 혹은 언젠가 코멘트를 달았던 '단독성'에 대한 열망입니다. 즉, 어떻게 하면
철학과 '교수'를 벗어나 철학'자'로 불릴 것인가라는 것(김상환). 혹은 '철학'자를 벗어나 '현실'과 맞붙되 어떻게 현실에 '함몰'되지 않을 것인가라는 것(김진석). 그것은 맥락은 다르지만 저를 포함한 이곳의 많은 이들에게도 함의를 갖는 질문이라는게 제 생각입니다.
교수를 벗어나는 것은 간단합니다. 교수를 그만 두면 됩니다. 즉, 전략적 이야기처럼 생각됩니다. 자기변호의 알리바이같은 거. 현실을 맞붙되 함물되지 않는다니, 그것은 '탈' 어쩌구 하는 것보다 더 이상한 이야기입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올갈데 없는 제자들의 모습은 안중에도 없는 현실이라... 함몰될 필요가 있씀^^
'탈'에 관한 이야기는 제가 알기로 김지하가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논의한 것 같은데, 일본에서도 이 '탈'에 대한 인식이 비슷합니다. 바꿔말해, 김진석 이전에 김진석과 비슷하게 '탈'논의를 한 책을 발견하고, 설마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짐직하건데, 70년대에 일본지식인들이 받은 김지하의 영향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맞습니다. '모 아니면 도'라는 이런 쿤데라님 특유의 '현실' 논리는 익숙한 것이죠. 탄핵시위한다는 사람들도 다 똑같은 겁니다. 어차피 시위 끝나고나서 미팅가고, 다음날 presentation준비할거고, 귀가 길에 딸내미 피아노 학원비 낼 생각이나 하고 있다면, 즉 정치'적' 대학생, 회사원, 아버지 밖에 될 수 없다면,
즉 '자퇴, 퇴사, 가출'해서 진짜 '정치'만 할 수 없다면 '냉정'을 지키는 게 낫다'는, '모든 쭉정이, 모사물, 1등을 제외한 그 아랫것들'에 대한, 즉 '비이데아'적'인 것들에 대한, 들뢰즈의 비판대상으로서의 플라톤주의. 제가 (거짓된) '텍스트 (내의) 정치 아니면 유나바머(textual politics or unabomber)'라고 이름붙
인 이러한 '비현실적 현실주의 이데올로기'를 Sloterdijk은 하나의 '시대정신(zeitgeist)으로서의 냉소주의'라고 불렀죠.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부터 최근의 [Organs Without Bodies]에 이르기까지 현실주의를 가장한 냉소주의를 최대의 적으로 삼는 지젝의 태도도 그가 인정하듯 Sloterdijk을 벤치마킹한 것입
다) '자기변호의 알리바이'라는 의심(즉 정치'적' 교수, 실천'적' 이론 등등)은 그 대상이 누구이건 피해갈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러한 의심'만'을 직업'적'으로 생산하는 이들이 많을 때에는 (즉 '너희들 다 가짜지?') 바로 그들에게 되돌려지는 게 더 급선무라고 생각합니다. 즉, '냉정'은 0도, 무채색, 무행동이 아니라
이미 하나의 감정(affect)이고, 색깔이며, 움직임이라는 것. 흰색은 바탕으로서의 캔버스가 아니라 검은색과 같은 레벨에 있는, 일개 색에 불과하다는 것. '전략적 이야기'라는 의심은 후자를 전자로 되돌리려 하는 자들에게 가장 먼저 되돌려져야 합니다. 물론 이는 김진석 '교수' (김상환 '교수'는 아예 제외하지요)의 작
업이 '정말로 정치적인 개입을 이뤄내고 있다'라는 평가와는 별개의 것입니다. 저의 잠정적인 견해는 'textual politics or unabomber'라는 이분법 자체가 (비 바디우적 의미에서) 플라톤적이며, 관념론적 거짓이라는 비판에 근거합니다. 쌍둥이빌딩을 폭파한다고 해서 미제국주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치
란 교수직을 사퇴한다거나 자퇴, 가출하고 곧바로 국회의사당을 점거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저기,' 손만 내밀면 쥘 수 있는 구체적인 것으로 정의되는 의사헤겔주의적 현실주의는 이미 로티(특히 [미국 만들기(Achieving Our Country)]에 의해 모범적으로 '실현'되고 있지요. ^^/ 김지하가 맞습니다.
재작년쯤 그 관계를 추적하는 글을 하나 쓰려다가 흐지부지되어 버렸는데, 쿤데라님이 추임새를 좀 넣어주시지요.^^
항상 준비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