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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게릭병으로 10년째 투병중 이원규·이희엽 부부의 감동 스토리
감기 한 번 걸린 적 없던 나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말을 할 수도 몸을 움직일 수도 없는,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병과 사투를 벌이는 한 남자와
그 곁을 지키는 아내의 눈물 나는 러브스토리.
조영재 기자 / 사진 김현숙 / 디자인 김효정 [주부생활 2009년 10월호]
퇴근하고 나서도 꽤 시간이 흐른 뒤였는데도 아내 이희엽씨는 분주해 보였다. 집에 도착해 아직 옷도 갈아입지 못한 듯 보였다. 남편의 점심을 챙기고 배변을 도운 다음 샤워를 시키는 데만 해도 2~3시간은 족히 걸린다고 했다. 그렇다 보니 아직 손님 맞을 채비도 못했다며 급히 주스를 챙겨 내온다.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얘기를 듣고 미리 보내 놓은 질의서에는 그녀의 남편이 왼발 엄지발가락으로 작성했을 답변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어렵게 사진 촬영을 마치고 거실에 앉아 그의 아내와 인터뷰를 시작할 즈음에는 어느덧 창밖으로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감기처럼 찾아온 뜻밖의 병마
수년 내에 사망이라니 도대체 루게릭병이 뭔데
20년 동안 교단을 지켰던 이원규씨가 루게릭병 진단을 받은 것은 1999년 말이었다. 처음엔 혀가 굳고 다리에 힘이 빠지더니 차츰 몸의 이곳저곳이 마비되어 갔다. 당시 그는 혜화동에 있는 동성고등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재직 중이었고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도 다니고 있었다. “코가 막히고 목 안이 답답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감기 증세로 생각하고 동네 이비인후과 병원을 찾았죠. 그러나 치료를 받아도 증세가 나아지지 않았어요. 오히려 목소리에 자꾸 비음이 섞이고 영어 발음도 자연스럽게 되지 않는 느낌이었죠.”
그저 피곤해서 그렇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감기 한 번 안 걸릴 정도로 건강한 체질이었던 그가 나이 마흔에 선고받은 병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희귀병이었다. 아직까지 발병 원인이나 치료 방법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루게릭병. 어안이 벙벙해진 그는 이튿날부터 며칠 동안 퇴근길에 종로로 나가 대형 책방의 의학서적과 건강서적 코너를 샅샅이 뒤지며 루게릭병에 대한 내용을 찾아보았다. 자료는 많지 않았지만 하나같이 비관적인 내용들뿐이었다. 책을 뒤적이며 새롭게 알게 된 내용은 이런 것들이었다.
“환자에 따라 병의 진행 속도에는 차이가 있으나 말기에는 대부분 두 눈만 깜박거릴 수 있을 뿐 언어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전신마비가 되어 손가락 하나 제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된다. 그러나 환자의 지적기능 등 의식과 시각 · 청각 · 미각 · 후각 · 촉각 등의 감각은 끝까지 명료하게 남아 있다. 결국 의식은 멀쩡하나 인공호흡기 등 각종 의료기기를 부착해야 하고 24시간 주변의 간병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른바 식물인간과는 정반대의 상태가 되어 뚜렷한 의식과 두 눈으로 자신의 죽음을 끝까지 생생하게 지켜보게 된다.”
그리고 그가 살펴본 책들은 모두 ‘아직 치료제가 개발되지 않았다’는 말로 끝을 맺고 있었다.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실감할 수 없는 얘기들뿐이었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자신이 루게릭병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한 가닥 실낱같은 희망이 있었다. 그 희망을 품은 채 그는 이듬해인 2000년 연초에 일주일간 병원에 입원해 정밀검사를 받았다. 결과를 알아보러 서울대병원을 찾았을 때, 쉽게 말문을 열지 못하는 의사의 진료카드에는 ‘A.L.S’라는 병명이 적혀 있었다. 루게릭병이었다. 아내는 병명을 전해 듣자마자 곧바로 그의 품에 쓰러져 울기 시작했고 그 역시 눈물을 흘렸다. 마지막까지 믿고 싶지 않았던 일이 현실이 돼버렸다.
“정밀진단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설마 하는 마음이 컸어요. 루게릭병이 그렇게 심각한 병인 줄도 몰랐어요. 당시만 해도 이 병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았으니까요. 확진 전에 병원에서 받아온 약 겉봉에 ‘이 약은 수년 내에 사망하는 A.L.S 환자에게 수명연장이나 기관절개를 늦추는 미국 식품의약국에서 인정한….’ 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어 살짝 충격을 받긴 했지만 그때까지도 설마 싶었죠. 그런데 남편이 정말 루게릭병에 걸렸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그날 둘이 부둥켜안고 많이 울었어요. 하도 오래된 일이라 지금은 생각이 잘 안 나는데 그러고도 한동안은 매일 울었던 것 같아요. 그때부터는 기도하는 나날의 연속이었어요. 남편이 아깝고 불쌍해요. 똑 부러지고 욕심 많은 사람이었는데…. 한 순간도 헛되이 살지 않은 것 같은데….”
발병 후 10년 목소리 잃어버린 지 오래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건 왼쪽 발 엄지발가락뿐
서울 풍납초등학교 교사로 있는 아내 이희엽씨는 아직 건강했을 때의 남편을 유머러스한 달변가였다고 회상한다. 18년 전 마지못해 나간 선 자리에서도 그녀는 남편의 입담에 끌렸다. 그렇게도 말을 잘했던 사람이라 지금 이렇게 목소리를 잃어버리고 누워 있는 모습이 더욱 안타깝다.
그의 몸은 점점 마비되어 갔고 발병 후 4년이 지나서는 칠판에 글씨 쓰기가 어렵고 아이들에게 의사를 전달하는 것조차 힘들어져 결국 학교를 그만두었다. 천직으로 생각하고 20년 가까이 지키던 교단을 떠날 때는 정말 가슴이 아팠다고 한다. 그러나 뒤늦게 시작한 학업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휠체어에 몸을 싣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인 결과 투병 6년째이던 2004년 8월에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논문은 2001년 여름부터 대략 3년 정도 준비했는데 마무리 단계에서는 온몸에 마비가 진행되어 고생을 많이 했다. 특히 2003년 말부터는 두 팔을 거의 쓸 수가 없어 자료들을 방바닥에 펼쳐놓고 발로 책장을 넘기거나 누가 옆에 앉아서 책장을 넘겨주어야 할 정도였다. 논문을 작성할 때는 컴퓨터 모니터에 화상 키보드를 설치하여 오른쪽 집게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을 사용했는데 2004년 초부터는 그나마 마비가 더 많이 진행돼 주로 가운뎃손가락 하나만을 사용했다.
“손가락 한 개로 마우스를 조작해 글을 쓰려니 비장애인들이 10분이면 될 분량을 작성하는데 저는 2~3시간은 걸려야 했어요. 그나마 이제는 오른쪽 가운뎃손가락마저 전혀 움직일 수 없게 됐지만 말입니다. 올해 5월부터는 방바닥에 마우스를 내려놓고 그나마 미세하게 움직일 수 있는 왼쪽 발 엄지발가락 하나를 사용해 마우스를 움직여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간 병원이며 한약방이며 잘한다고 소문난 데는 안 다녀본 곳이 없었다. 또 좋다는 음식도 구할 수 있는 것은 다 먹어본 듯하다.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말하기는 더욱 불편해지고 왼쪽 팔의 근육이 빠져 눈에 띄게 가늘어지더니 이윽고 오른팔도 마찬가지가 됐다. 얼마 있지 않아서는 걸을 때 다리에 불편이 느껴지기 시작하는 등 병세는 날로 악화돼갔다.
“지금은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는 것들은 다 끊고 한 가지 약만 먹고 있어요. 웅담 성분 약인데 간과 위, 뇌를 오가면서 죽어가는 세포를 살리는 작용을 한대요. 성균관대학교에서 도움을 주고 계세요. 그나마 지금 먹고 있는 약 덕분에 남편이 잘 버티고 있는 것 같아요. 물론 본인 의지력도 대단하지만요.”
식이요법도 병행하고 있다. 별다른 비법이 있는 것은 아니고 남편이 정보를 모아 아내에게 전달하면 그대로 만들어 주는 식이다. 모든 음식은 믹서에 곱게 갈아 만든다. 그래야 그나마 좁아진 식도를 통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편이 웹사이트 같은 데 들어가서 다른 환자들은 어떻게 하나 둘러보면서 저한테 얘기를 해줘요. 녹즙이 좋다든가 홍삼이 좋다든가 복숭아가 좋다든가 하면서. 본인이 연구해서 이것저것 해달라고 하니까 저는 편하죠. 얘기하는 대로 해주기만 하면 되니까. 먹어 보고 좋으면 인터넷을 통해 다른 환자들과 정보를 공유하기도 하고요.”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이 숨 막히는 현실
더는 못 하겠다고 남편 앞에 주저앉아 울던 아내
남편이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 ‘루게릭병 네트워크’에는 하루에 500여 명 정도가 방문하고 있다. 회원 수는 3,000명 가까이 되는데 주로 환자의 보호자들이다. 10년 가까이 곁에서 간병을 하다 보니 아내도 루게릭병에 대해서라면 반 전문가가 다 되었다. 부부는 한 달에 한 번 한양대 병원에서 투병기를 발표하고 있고, 일 년에 한 번씩 루게릭병 네트워크 회원들과 정기모임을 여는 등 같은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에도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남편은 하루의 대부분을 컴퓨터 앞에서 보내요. 남편의 아침을 챙기고 소변기까지 갈아 준 다음 저는 출근해요. 가끔은 점심시간 이후에 조퇴할 때도 있고 오후 수업 중간에 집에 들러 늦은 점심을 주고 소변기를 확인한 다음 다시 나갈 때도 있죠. 제가 학교에 가 있는 동안 남편은 글도 쓰고 자료도 올리면서 제가 퇴근해 돌아오기만 기다립니다. 목소리를 잃기 전엔 출근하는 제 등에다 대고 ‘일찍 와’ 했어요. 기다리겠다는 말이었겠죠.”
전신마비 환자가 간병인도 없이 혼자 있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로 인해 빚어질 수 있는 불행한 일 중 몇 가지는 그에게도 여지없이 찾아왔다.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온종일을 견뎌야 하는 것은 그래도 참을 만하다. 어쩌다 마우스에서 손가락이 미끄러져 내리면 손을 올릴 힘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 후부터는 그냥 멍하니 앉아 있어야만 한다. 그러다 의자에서 몸의 중심을 잃게 되면 양팔이 의자 팔걸이 아래로 떨어져 대롱거리고 목이 등받이 옆으로 젖혀져 뒤로 꺾여버린다. 이럴 때는 꼼짝없이 식구들이 돌아올 때까지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을 홀로 견뎌내는 수밖에 없다.
이제 그는 침대에 반듯하게 누워 두 다리 쭉 펴고 잠자는 것도 어렵게 되었다. 반듯하게 누워 있으면 입 안 가득 고여 있는 침이 기도로 흘러 들어가 숨이 막혀버리거나 사래가 들어 심하게 재채기를 하기 때문이다. 또한 튀어나온 등뼈는 침대바닥에 닿아 박히고 강직현상이 심한 두 다리는 잘 펴지지도 않을뿐더러 펴더라도 금방 다시 오그라든다. 무엇보다도 호흡 근육이 약화돼 폐가 횡격막을 밀어내는 힘이 약해져서 가슴이 곧 답답해지며 호흡곤란이 온다. 호흡보조기의 도움을 받든지 아니면 옆으로 누워 새우처럼 등을 바짝 구부리고 있어야 겨우 잠을 청할 수 있다.
“곁을 비울 수가 없어요. 잠깐만 눈을 떼도 목이 아래로 떨어지니까요. 특히 밤에 제일 힘들어요. 두세 시간에 한 번씩 자세를 바꿔 줘야 하거든요. 몸을 반듯이 하고 자면 침이 넘어가니까 옆으로 웅크리고 자는데 몸에 뼈만 남아서 배기고 아픈가 봐요. 그러면 다른 쪽으로 다시 눕혀 줘야 하고 중간에 소변도 받아내야 하죠. 그게 처음엔 너무 힘들었는데 이제는 적응이 돼서 금방 다시 잠들곤 해요.”
사정이 이렇다 보니 아내도 몸에 병이 나고 말았다. 팔다리에 힘이 다 빠져 아침에 일어나기도 힘들 지경이고 온몸이 다 아파왔다. 서럽게 울면서 더 이상은 못 하겠다고 남편 앞에 주저앉아 하소연을 했다.
“쪽방 하나 구해주면 나가서 혼자 살겠다고 했어요. 몸이 아프니까 정말 못 견디겠더라고요. ‘나 힘들어 죽겠어’ 하고 남편한테 투정을 부렸어요. 저는 속으로 삼키고 뒤에서 울고 그러지 않아요. 어떤 것들이 어렵고 힘들다고 얘기하는 편이죠. 제 성격상 어쩔 수가 없어요(웃음). 남편도 받아줄 만하면 받아 주고 아닐 땐 아니긴 한데. 받아 주든 안 받아 주든 일단 상대방도 알아야 하니까요. 그만큼 남편이 편하니까 그럴 수 있는 거겠죠.”
백화점에서 직접 옷 골라 주던 자상한 남편은
지금도 없어서는 안 될 집안의 든든한 브레인
여전히 남편은 집안의 기둥이다. 집안 대소사를 최종 결정하는 것은 여전히 남편이다. 발병 후 경제권을 넘겨주겠다는 것도 아내가 마다했다. 은행업무나 가계부를 책임지는 일은 처음부터 꼼꼼하고 정확한 남편 몫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머리 아픈 일 저는 잘 못하거든요. 지금도 남편이 잘하고 있어요. 돈 보내야 할 곳이 있으면 본인이 인터넷뱅킹으로 보내고 돈 찾아오라고 하면 저는 돈 찾아오고 그래요. 남편의 진두지휘로 저희 집이 다 돌아간다고 보면 돼요. 특히 값이 좀 나가는 물건을 살 때는 반드시 허락을 받아야 해요. 최근에 텔레비전을 바꿨는데 저는 거실이 좁으니까 작은 사이즈여도 상관없다고 했지만 남편이 이왕이면 큰 걸로 사는 게 좋겠다고 해서 그렇게 했죠. 혼자 가면 바가지 쓴다며 오빠랑 같이 가라고 해서 옆동에 사는 친정오빠랑 같이 가서 사온 거예요.”
건강할 때는 백화점에 함께 가서 아내 옷까지 골라 주던 남편이다. 어디서든 리드하는 걸 좋아하고 준비성도 철저해 남편이 이끄는 대로만 하면 손해 보는 일은 없었다. 남편이 주도해 가족여행도 자주 다녔다. 여름방학이면 여행을 서너 차례는 다녀오곤 했다.
“동성고등학교 선생님들하고 부부동반 여행도 많이 다녔어요. 가족 여행도 자주 했고요. 아프고 나서도 어머님이 계시는 대천에 다녀온다거나 하는 식으로 가끔씩은 기분 전환을 했어요. 작년까지는 근처 남한산성도 다녀오곤 했는데 올해 들어서는 못 다니고 있어요. 브레이크를 밟을 때마다 자꾸 남편 목이 떨어지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 카시트를 신청했어요. 그게 오면 이제 또 여행을 가야죠.”
최근 휠체어도 새 것으로 바꿔 주문했다. 500만원이 들었다. 보조도구 구입하는 비용이 만만치가 않다. 안구 마우스도 수입품이라 그런지 가격이 1,500만원이나 한다. 의료보험 혜택으로 본인 부담금의 10%만 부담하면 돼 의료비 걱정은 크게 안 하지만 보조도구를 갖추는 일은 여의치가 않다.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부부는 성당을 돌아다니며 책을 판매하고 있다. 지난 2005년 그간의 투병기를 에세이로 엮어낸 <굳은 손가락으로 쓰다>가 그것이다. 매일 여덟 시간 이상을 컴퓨터 앞에 매달려 완성한 책이다. 그간의 힘겨운 시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성당 신부님과 신자들의 도움이 큰 힘이 되고 있다.
“가만히 보면 주변에 따뜻한 분들이 참 많아요. 얼마 전에는 아파트에 휠체어 길을 만들었어요. 외출할 때면 늘 난감했는데 덕분에 얼마나 편해졌는지 몰라요. 그전에는 아파트 현관을 나서려면 저하고 경비아저씨말고도 한 사람이 더 필요했어요.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부탁하곤 했는데 없을 경우는 난감했죠. 혼자서 부축해보겠다고 낑낑대다가 한 번은 남편이 고꾸라질 뻔한 적도 있어요. 아파트 통장에게 휠체어 길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얘기했어요. 이 아파트에서 오래 살기도 했고 아이들 학교 문제가 있어서 이사하기도 어렵다고 제 사정을 이야기했죠. 주민회의 대표가 열 명인데 거기서 승인을 받아야 한다더라고요. 다행히 모두 찬성했고 통장이 저희 아파트 동을 일일이 돌면서 주민들 도장 받는 일도 맡아 주었어요. 얼마나 고마운 일이에요. 그래서 휠체어 길이 만들어졌는데 결과적으로는 주민들 모두 편해졌어요. 바퀴 달린 장바구니나 자전거, 유모차들이 편리하게 다닐 수 있어서 다 좋아하시더라고요.”
혼자서도 잘할 수 있는데
남편이 있으니까 더 잘하는 거예요…
남편의 울타리 안에서 온실 속 화초로만 살아온 아내는, 지난 10년 동안 남편을 간병하며 자신에게도 당찬 면모가 있음을 새삼 발견하곤 했다. 예전에는 남편이 했을 법한 일을 이젠 혼자서도 척척 해낸다. 아파트 휠체어 길만 해도 관리사무소며 통장에 주민대표들까지 일일이 찾아다니며 설득해 결국 일을 성사시킨 것은 그녀였다.
“다 저희 남편이 뒤에서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코치해준 거예요. 몸이 말을 안 듣는 것일 뿐이지 사고능력은 멀쩡하니까요. 제가 말했잖아요. 남편은 저희 집 브레인이라고(웃음). 어디 여행을 갈 때도 제가 확인해야 할 게 뭔지 꼼꼼히 체크해서 알려줘요. 예를 들면 장애인 휠체어를 가져가는 환자가 있다고 꼭 얘기를 하라든가 하는 것들이요. 제가 깜빡할지도 모를 것들을 남편이 다 알려주죠.”
그녀는 ‘남편 없이는 못 살겠다’고 했더니 남편이 그런 말 말라며 ‘내가 당신 없인 못 산다’고 했다며 밝게 웃어 보인다. “혼자서도 잘 할 수 있는데 남편이 있으니까 더 잘하는 거예요….”라고 말하는 그녀의 음성이 웃는 듯 떨렸다.
“환자들 가운데 사정이 딱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부부 중 한쪽이 병을 갖고 있으면 간병에 지쳐 이혼한 경우가 부지기수예요. 그건 그럴 수 있다고 해도 부모가 자식을 버리기도 하니 어쩌면 좋아요. 그런 경우 보면 마음이 아파요. 뇌 기능은 멀쩡한데 움직일 수가 없고 통증이 너무 심하니까 환자들이 굉장히 예민해져요. 그걸 이해 못 하면 가족들이 견디기가 힘들죠. 그래서 포기하면 결국 가족이 남남이 되는 겁니다. 저는 다행히 힘든 건 금방 잊어버리는 성격이라서요. 또 남편이 제 부족한 점을 많이 메워 주니까요.”
어느 날 잘하던 숟가락질이 안 되고 또 어느 날 포크질이 안 되더니 언제부터는 걷지도 못하게 됐다. 그렇게 조금씩 상태가 안 좋아지기 시작한 지 10년째. 알고 지내던 같은 병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그사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발병 이후 수개월에서 2~3년 내에 사망한다는 정설을 뛰어넘은 그를 보며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말한다. 그는 오늘도 기적을 기대한다.
이제 그의 몸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게릭병은 그의 몸을 조금씩 더 마비시키며 여전히 진행형이다. 하지만 그는 반드시 병을 극복하고 건강을 되찾으리라 믿고 노력하고 있다. 왜냐하면 생명이 있는 한 희망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평범한 일상을 최대한 가치 있게 살아가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루게릭병으로 전신이 마비된 영국의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내 생애 최고의 업적은 바로 현재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하루하루를 살아내기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런 말을 했을까요. 하지만 생명이 있으면 희망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희망을 버리지 않고 노력하며 살아간다면 남아 있는 제 삶이 그리 헛되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는 시인이다. 1993년 박재삼 시인 추천으로 문예지에 ‘매미’, ‘강물이 어두워져’ 등의 시를 발표하여 데뷔했고 ‘내일의 시’ 동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내년 가을에는 그간 써놓은 시들을 모아 시집을 출간할 수 있을 것 같다. 명색이 시인인데 시집 한 권은 남겨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다. 지금까지 모인 시가 50여 편. 그는 요즘도 매일 컴퓨터 앞에 앉아 시상을 떠올린다.
내 사랑 크리스티나
이원규
병들고 가난한 내가
지조 높은 그녀를 사랑해서
나 자신과 그녀에게 죄를 지었다.
꿈길로 이어진 하늘에서 내려와
내 곁에 날개를 접은 천사 같은 그녀는
오늘도 환한 미소로 나의 하루를 밝혀주고 있다.
말문이 막히고 숨통이 막히고
손가락 하나 까닥일 수 없는 나는
그녀 앞을 무작정 가로막고 둥지를 틀어
먹이를 날라 오는 어미 새를 대하듯
그녀의 땀방울을 쪼아 먹고 있다.
사랑한다면 진정 사랑한다면
찬란한 비상의 하늘로 훨훨 보내야 한다는데
나는 도리어 사랑이란 이름으로
그녀의 날개에서 깃털을 뽑아내며
오늘도 나 자신과 그녀에게 죄짓고 있다.
루게릭병으로 10년째 투병중 이원규·이희엽 부부의 감동 스토리 (주부생활 2009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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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희망이 보입니다. 먼 곳이 아닌 아주 가까이에 희망이 보입니다. 이원규님도 추석명절 잘 보내세요^^*
희망의 보름달처럼 풍성한 한가위 지내시고 가정안에 축복과 평화 함께 하소서~
환우같지 않은 여유로운 모습.멋지십니다.11월4일 서울대 이광우교수님 예약진료일인데.어쩌지요
홍병희 선생님의 가정에 평화가 항상 함께 하시기를 비오며 행복하고 즐겁고 편안한 가을 되세요^^*
늘 소식 잘 듣고있습니다..... 저희 아픈신랑이 조금더 조금만더 버텨주었으면 좋겠어요,속상한맘 표현할길이 없네요...박사님하고 저희는 같은 하늘아래 있으니 그걸로 위안이 됩니다..저희 신랑은 송파구 방이동에 있어요.박사님과 가까이 있죠?? 점점 말라가고 힘이없어지는 신랑을 대하는게 가슴이 찢어지게 아픕니다.위루술도 안하겠다고 ㅠ고집을 피우구요..정말 힘든데 하루빨리 획기적인 치료제가 개발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즐가운 명절 보내세요~
육영미 님의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슴 깊이 전해져옵니다. 결국 부부밖에 없습니다. 힘내세요~!! 좋은 날이 꼭 오리라 믿습니다. 가까이 사시는데 언제 우리집에 오시면 큰 기쁨이겠습니다. 좋은 가을 되세요^^*
두 분의 미소가 정말 아름답습니다. 사진처럼 따스하고 환한 가을 되시길요.
선생님의 가정에 평화가 가득하시기를 비오며... 좋은 가을 되세요^^*
람께 힘냅시다. 박사님의 강단에서 강의하는 소망도 이루어지길 바라며...
감사합니다. 좋은 시월, 좋은 가을 되세요^^*
진흙탕길 먼저걸으며 많은정보 감사드립니다.늦게 시작된 저로서는 마음에 위안이되며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해 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치유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맙시다. 힘내세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김미성 님의 건승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