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를 사랑합니다.
서울의 어느 달동네.
70년이 넘는 평생을 이름도 없이 살아 온 송씨 할머니와 암으로 세상을 떠나 부인에게 평생 단 한 번도 잘해주지 못하고, 부인이 떠나기 전 마지막 부탁이었던 우유를 사다주었지만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영원한 이별을 한 탓에 새벽마다 우유 배달을 하는 김만복 할아버지, 하루종일 두 평이 채 되지 않는 주차장 사무실에서 치매에 걸린 아내를 집에 홀로 두고 지내는 장군봉 할아버지와 치매에 걸려 할아버지만을 알아보며, 하루 종일 좁은 집에 갇혀 사는 할머니.
연극의 시작은 우유 배달을 하는 김만복 할아버지와 폐지를 주우며 살아가는 송씨 할머니가 달동네 오르막길에서 첫 만남을 갖는 것으로 시작된다.
연극으로 만들어지기 전 강풀 작가의 인터넷 만화로 먼저 접했다. 하루 하루 새롭게 올라오는 만화를 읽다가 마지막 편이 올라오던 날 뭔가 가슴 한 구석이 텅 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유년시절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 할아버지와 둘이 살아 온 탓에 노인이 등장하는 소설이나 연극, 영화, 드라마에 많은 관심을 있고 즐겨 본다.
만화 연재가 끝나고 책으로 사 보았다. 3권으로 된 만화책. 교육용 만화책 말고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 본 만화책이다.
인터넷으로 이미 읽은 내용이지만 만화에 푹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다 읽고 나서 이전과 똑같이 가슴 한 구석이 텅 빈 것 같았다.
어느 날 신문에서 ‘그대를 사랑합니다.’가 연극으로 제작되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올 해 공연을 할 것이라는 소식과 내년에 드라마로 방영이 될 것이라는. 하루하루 인터넷을 뒤지며 연극이 무대에 오르기를 기다렸다.
작은 소극장 무대.
만화에서 본 모습 그대로 무대는 내 눈앞에 있었다. 송씨 할머니도, 김만복 할아버지도, 장군봉 할아버지와 치매 걸린 할머니도.
황혼의 다시 찾아 온 사랑. 첫 사랑보다 더 가슴 설레이는 사랑. 세상 사람들이 노망이니 주책이니 떠들어댈지 모르지만, 70이 넘은 황혼에 찾아 온 사랑은 아름다웠다. 송씨 할머니와 김만복 할아버지의 애틋한 사랑도, 장군봉 할아버지의 할머니에 대한 눈물겨운 사랑도 아름다웠다. 연극에서는 만화의 결말부분이 다소 빠져 있었지만, 그래도 노년의 아름다운 사랑을 보여주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송씨 할머니를 위해 매일 우유를 몰래 갖다 주는 김만복 할아버지와 새벽마다 김만복 할아버지 우유배달 오토바이 소리를 기다리는 송씨 할머니. 이름도 없는 할머니에게 ‘송이뿐’이라는 이름과 주민등록증을 선물할 고집불통 김만복 할아버지.
그러나 황혼의 아름다운 사랑은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못하고 슬픈 사랑으로 끝을 맺는다.
치매와 치매에 따른 복합증세에 시달리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할머니와 함께 이 세상의 마지막 인연을 맺은 장군봉 할아버지. 어릴 적 떠나 온 고향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김만복 할아버지와의 행복한 인연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간 송이뿐 할머니. 송이뿐 할머니를 죽는 날까지 그리워하다 마지막 약속처럼 웃으며 이 세상을 떠나는 김만복 할아버지. 어쩌면 이것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노년의 사랑이 보여주는 모습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연극에서는 노년의 사랑을 방해하는 것이 가족도 아니도, 사회의 편견도 아닌 것으로 그려졌지만, 가족의 방해나 사회적 편견보다 더 무서운 것이 노인들의 인식이라고 생각을 한다.
우리나라 평균수명이 79.1세라고 한다. 2010년이면 80세가 넘을 것 같다. 신문기사를 보면 지난해까지 거의 보이지 않던 80세 노인들의 성폭행이나 성추행 사건 기사들이 눈에 띤다. 평균 수명이 80을 바라보는 시대이지만, 아직도 우리는 노인들에 대해서는 편견을 지니고 있고 자세히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점점 노인 인구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많은 사회문제가 발생을 할 것이다. 취업 문제도 중요하고, 노인 학대 문제도 중요하지만, 노인 성문제가 크게 증가할 것이다. 그러나 사회나 국가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대비책을 거의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노인 성교육이 절실히 필요하고, 노인뿐만 아니라 곧 노인이 될 예비노인들을 위한 성교육이 필요하고 이러한 성교육을 위한 프로그램이 필요하지만, 몇몇 개인에 의해서만 성교육이 진행되고, 노인의 성문제의 중요성이 강조되지만 아직까지 사회 전체의 합의된 프로그램도 없고 국가에서 주도하는 교육도 거의 없다.
아직도 눈앞에 김만복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과 김만복 할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송이뿐 할머니의 모습이 어른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