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의역사
조선시대 : 존립의 위기 극복과 재 도약기
위화도회군과 사전(私田)개혁을 통하여 정치·경제적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李成桂) 세력은 정몽주(鄭夢周) 등의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공양왕(恭讓王)의 선양(禪讓)을 받아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당시 최고의 합의기관이고 정무기관이었던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의결을 거치는 형식을 거치고 왕위에 즉위하였다. 조선의 건국은 고려의 구신(舊臣)세력을 제거하고 등장한 새로운 정권으로써 정치주도 세력의 교체를 가져왔다. 아울러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전환은 단순한 왕조교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사회사상 등 여러 면에 걸쳐서 변화·발전을 초래하였다. 조선의 성립은 중세사회의 내부적 변화와 근세사회로의 이행과정으로 이해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논외를 하더라도 여러 측면에서 변화를 초래하였다.
조선 건국세력은 새로운 왕조의 개창과 함께 민심의 동요를 우려하여 전왕조인 고려의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였으나 곧 전왕조의 지배계층을 제거하고 새로운 왕조의 질서체제 수립을 도모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왕조 개창 주체세력들은 왕조의 개창과 동시에 곧 구세력인 고려왕실의 후손에 대한 인적 청산조치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태조실록(太祖實錄)]권 1, 태조 원년 7월 기해에는「사헌부 대사헌(大司憲) 민개(閔開) 등이 고려왕조의 왕씨(王氏)를 밖에 두기를 청하니 임금이“순흥군(順興君) 왕승(王昇)과 그 아들 강(康)은 나라에 공로가 있으며, 정양군(定陽君) 왕우(王瑀)와 그의 아들 조·관(琯)은 장차 고려왕조의 제사를 받들게 할 것이니 논하지 말고, 그 나머지는 모두 강화(江華)와 거제(巨濟)에 나누어 두게 하라”라고 말하였다.」라고 하여, 조선 태조는 즉위한 원년(1292) 7월부터 고려왕실의 후손인 왕씨(王氏)를 강화도와 거제도에 분산·유배시키고 예상되는 정치적 저항에 대비하여 특별 관리하였다. 이 과정에서 거제지역은 고려에 이어 또 다시 변방의 유배지로써 역할을 지속하게 되었다. 아울러 태조 3년 3월 임자 이후에는 왕씨 모반사건에 연루된 승려 석능(釋能) 등을 거제지역으로 유배를 보내었다.
그리고 태조 3년 4월 기축에는 손흥종(孫興宗) 등이 왕씨(王氏)의 일족을 거제의 바다에 던져 죽였다. 이처럼 거제섬은 조선 초기부터 고려왕족의 비참한 유배지로 전락하였던 것이다. 한편 조선 태조 때부터 거제섬으로 유배를 온 고려왕조의 왕족들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둔덕면 거림리 기성( 岐城), 즉 폐왕성(廢王城)에 거주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성은 고려시대에 이미 의종(毅宗)의 유배지로써, 그 당시에 석축하였던 성곽이다. 또한[태종실록(太宗實錄)]권 12, 6년 12월 경자에는 문가학의 옥사에 연루된 자주(慈州)사람 조수(曹守)를 거제현으로 귀양을 보내어 봉졸(烽卒)로 삼았다. 여기서 거제섬의 유배대상이 왕족과 중앙관료 및 대덕고승에서 그 하층민에까지 확대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이같은 현상은 거제섬의 역할과 위상이 고려시대에 비하여 더욱 약화되어 갔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조선 초기에는 거제섬과 함께 인근 내륙지역으로 옮겨간 거제현 및 그 속현 등도 그 독립적 존립기반이 크게 위축되어 갔다. [세종실록(世宗實錄)]권 150, 경상도, 진주목, 진성현(珍城縣) 및 거창현(居昌縣)에는 「명진현(溟珍縣)은 원종 신미년에 왜적을 피해 육지로 나와서 진주(晋州) 임내(任內)인 영선현(永善縣)에 붙어 살았다. 본조(本朝, 조선) 공정왕(恭靖王, 定宗) 원년 기묘에 두 현(江城縣과 溟珍縣)을 합하여 진성(珍城)이라 이름하였다.」「거창현은 본조 태종 갑오년에 거제(巨濟)와 합하여 제창현(濟昌縣)으로 일컫다가 을미년에 다시 나누어 거창 현감(居昌縣監)으로 하였다.」라고 하여 거제현의 속현으로 고려 원종 12년이래 진주목의 영선현에 붙어 살았던 명진현은 조선 정종(定宗) 원년(1399)에 강성현(江城縣)과 병합되어 진성현(珍城縣)이 되었으며, 거제현은 조선 태종 14년(1414)에 거창현과 병합되어 제창현(濟昌縣)이 되었다. 그런데[태조실록(太祖實錄)]권 15, 태조 7년 12월 임술에는 명진과 강성의 병합 시기를 정종 즉위년(1398) 12월로 기술하고 있어 위의[세종실록]권 150, 지리지에 기술된내용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진성(珍城)으로 병합한 연유까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데 진주의 남쪽 변방인 영선현으로 옮겨온 명진현은 그 땅이 협소하고 백성이 적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와 함께[태종실록(太宗實錄)]권 28, 태종 14년 8월 신유에는 경외(京外)의 용관(冗官)을 도태시키는 즉 행정조직 체계를 조정하는 과정에서 거제와 거창을 병합하여 제창으로 삼았다고 하여 양 지역의 병합은 거제현이 거창에 오랫동안 붙어살았기 때문인 것이었다. 이같은 인위적인 병합은 거제현과 그 속현의 독립적 행정단위로서의 존립과 거제 현민들의 독자적 자립의지를 크게 약화시키는 것이다.
이에 병합된 거제 현민들의 불만이 따랐던 것이다. 이는 거제현이 병합된 이듬해인 태종 15년 3월 계해에 처음 하교하기를“각 고을[官]을 병합한 것을 백성들이 모두 원망하니, 종전대로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하고, 이어서 거제(巨濟) 등 8개 읍(邑)을 다시 세우는 조치를 취한 데서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이처럼 거제 현민들은 정치지배층에 대해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킴으로써 거제현의 독립위상을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려 원종대 인근 내륙지방으로 옮겨간 이래 그들의 생활터전과 독립적 행정단위를 아직 완전하게 회복하지 못하였으며, 특히 강성현과 병합한 명진현은 태종대까지 분리되지 못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명진현의 경우는 인구가 적고 땅이 협소하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거제 현민들이 환도(還島)하지 못한 연유는 그 당시 거제도 등과 같은 남해 연안지역의 섬들이 왜구침략의 최일선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거제 현민들은 조선왕조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왜구의 침략이 진정된 틈을 이용하여 개별 분산적으로 거제섬으로의 입도(入島)를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한편 태종대에는 조선의 회유로 많은 왜구들이 투항함에 따라 태조 때보다 훨씬 감소하였으며, 그 규모도 작았다. 특히 태종 9년(1409) 무렵에는 국내의 군제가 확립되어 갔고 왜구에 대한 군사적 대책도 강화되어 국방시설도 충실해졌으며, 병선의 개발과 함께 수군의 전투력도 향상되어 갔다. 이러한 군비강화는 이후 태종 18년(1418)까지 왜구의 침략횟수를 크게 감소시켰으며, 그 빈도와 규모도 현저하게 줄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 시기는 왜구에게 직접 영향을 가진 구주탐제(九州探題) 대내의홍(大內義弘)과 대마도주(對馬島主) 종정무(宗貞茂)가 조선과 협조적이었기 때문에 왜구의 침략이크게 줄어들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기간의 9년동안 왜구의 침략횟수는 10회도 넘지 않았고, 그 규모도 무시할 정도로 줄어 들었으며, 특히 경상도의 침략은 태종 9년 3월에 2척의 왜선, 7월 왜선 1척에 불과하였다.
이같은 왜구침략의 급격한 감소는 인근 내륙지역에 옮겨간 거제 현민들에게 알려졌을것이며, 이에 그들의 생활 터전이었던 거제섬으로 입도(入島)하여 생산활동에 종사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세종실록(世宗實錄)]권 1, 세종 즉위년(1418) 8월 병신에는 거제와 남해의 두 섬은 왜적이 지나다니는 곳으로 근년 이래로 왜적의 침략이 좀 가라 앉았음으로 인민들이 나라의 구실을 피하여 두 섬으로 들어갔으며, 이미 360여 호(戶)가 거제섬으로 옮겨가서 기름진 땅에 농사를 지으면서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여기서 거제현민의 거제섬에로의 입도(入島)조건은 왜적침략의 약화였으며, 그 규모는 360여 호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는 인리(人吏)와 관노비(官奴婢)는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그 호수의 규모는[세종실록(世宗實錄)]권 150, 지리지, 경상도, 진주목, 거제현에 기록된 세종대 거제현의 호수(153호), 인구(423명), 현 수호군(縣守護軍, 103명 ; 이상의 수치는 진성의 명진현 인구를 제외함)과 일치하지 않고 오히려 본 지리지의 호수보다 더 많다.
또한[세종실록(世宗實錄)]권7, 세종 2년 윤 정월 병신에는 경상도내의 거제(巨濟)·남해(南海)·창선(昌善) 3개 섬에 개간한 토지가 모두 1,130결이나 되었고, 이들 섬에는 부근의 각 고을 인민들이 몰래 들어가서 농사짓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였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세종 즉위년에 파악된 360여 호의 규모속에는 거제현민 이외 거제 주변지역의 남해연안 군현민도 포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세종 2년까지 거제도에는 많은 농토가 개간되어 농업 생산 기반으로 운영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세종 2년까지 거제도를 비롯한 남해연안의 섬지역이 개간될 수 있었던 연유는 태종대이래세종 즉위년까지 왜구 격감현상과 함께 곧 설명할 세종원년에 이루어진 대마도(對馬島)정벌의 성공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거제 현민들이 원래의 생활터전인 거제도로 복귀함에 따라 조선의 국왕과 관리들은 왜구의 침략에 따른 피해를 우려하여 입도(入島)한 백성에 대한 조치방안이 제시되어 실행에 옮겨 지기도 하였다. 세종 초기에는 입도한 백성을 다시 섬에서 소개시키거나 거제도에 목책(木柵)을 설치하여 농민과 그들의 생업을 보호하는 방안이 제기되었으며, 그 가운데 목책의 설치방안이 실천에 옮겨졌다. 이로써 거제 현민들의 생활터전으로의 복귀와 생산활동은 조선 정부로부터 공식적으로 보장을 받게 되었으며, 이와 함께 군사적 보호도 받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곧 거제현민의 독립 지방행정 조직단위를 복구시키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한편 세종대에는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對馬島) 정벌이 실행되면서 그 해상교통의 거점인 거제도가 군사상의 역할에서 주목되기 시작하였으며, 거제섬이 군사적으로 안정되어 감에 따라 거제현민의 입도(入島)가 확대되어 토지개간이 이전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1418년 조선에 협조적이었던 대마도주 종정무(宗貞茂)가 죽고 그의 아들종정성(宗貞盛)이 뒤를 이었으나 나이가 어려 실권은 해적두목인 조전좌위문태랑(早田左衛門太郞)이 장악하게 되었고, 대마도는 심한 기근이 들어 경제생활이 어렵게 되었다. 이에 대마도의 왜구들은 식량조달을 목적으로 조선 해안지역이나 조선을 거쳐 중국에서 침탈하는 행위가 잦아졌다.
세종 원년(1419) 5월부터 서해 연안지역에서의 왜구출몰이 다시 본격화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5월 충청도 비인현(庇仁縣) 도두음곶(都頭音串)의 왜선 50척과 해주 연평곶(延坪串)의 왜구병선 38척이 침략한 사건은 조선정부의 대왜구(對倭寇) 정책을 근본적으로 전환시켜 적극적인 무력 토벌대책을 강구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어 5월 중순에는 상왕(上王)인 태종과 좌의정 박은, 병조판서 조말생(趙末生) 등 강경세력의 주장이 관철되어 대마도의 무력정벌이 실행되었으며, 당일로 정벌군을 편성하여 이종무(李從茂)를 삼군 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로 삼아 정벌군을 총지휘하게 하였다. 세종 원년 6월 경인일(17일)에는 경기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병선 총 227척, 정벌군 총 17,285명이 65일의 양식을 준비하여 싣고 거제도를 출발하였으나 마파람때문에 다시 거제도로 돌아왔다. 6월 임진일(19일)에는 거제도의 남쪽에 있는 주원방포(周原防浦)에서 다시 대마도로 향하여 발진하였으며, 계사일(20일)에는 대마도의 두지포(豆知浦)에 도착하였고 군사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대마도 정벌을 성공한 이종무는 세종 원년 7월 병오일(3일)에 돌아와 거제도에 머물고 있었다. 곧 대마도 재정벌이 논의되기도 하였으나 준비과정에서 중단되었다. 이러한 대마도정벌은 왜구의 침략을 근본적으로 종식시켰으며, 조선의 통치체제를 정비·강화함과 동시에 문화적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전환점이 되었다. 아울러 대마도주 종정성(宗貞盛)에게‘종씨도도웅와(宗氏都都熊瓦)’라는 인신을 주었고, 그의 도선증명서(渡船證明書)를 가진 자만이 조선과의 무역특권을 보장하는 등 조선의 대대마도(對對馬島)정책을 전환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세종 원년(1419) 5월 대마도 정벌과 관련하여 이 시기 전후에는 거제도의 역할과 위상이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거제도가 이 시기에 왜구침략의 군사적 안전지대로 보장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세한 전력을 보유한 정벌군이 거제도를 대마도 정벌의 거점으로 삼음으로써 거제도를 포함한 남해연안 지역에서 왜구의 출몰을 최소화시켜 왜구침략의 안전지대로 남겨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거제현민들이 거제도로 입도(入島)하여 생활터전을 가꾸고 생산에 종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세종 2년(1420) 거제도를 포함하여 남해·창선의 3개 섬에서 개간한 토지가 모두 1,130결이나 될 수 있었던 연유는 태종대 왜구침략의 약화 이외 거제도가 대마도 정벌의 거점으로 군사적 안전지대였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로써 거제현민이 중심이 되어 전개하였던 거제현의 환도(還島) 분위기는 크게 성숙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거제도가 대마도 정벌의 군사적 집결지인 동시에 거점으로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대마도 정벌과정에서 거제도는 정벌군의 집결·출발지역이었으며, 정벌군의 회군(回軍)지역이 되었다. 이러한 군사적 해상교통의 역할은 거제도가 삼국시대 이래로 한·일 해상교류에 있어서 교통거점으로 주목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역할과 위상변화는 집권자들에게 해상에 있어서 거제도의 군사적·교통적 중요성을 각인시켰을 것이다. 이는 세종 3년 전후 대마도의 왜에 대비하여 거제도의 군사방어를 강화시키는 대비책이 논의·실행되었던 사실에서 충분하게 짐작할 수 있다.
나아가 조선의 정권 담당자들은 거제현의 복구방안을 본격적으로 제기하여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이로써[세종실록(世宗實錄)]권 15, 세종 4년 2월 임자에는 류정현(柳廷顯) 등이 함께 의논하여 아뢰기를“거제 고현(巨濟古縣)의 인민과 그 전부터 왕래하면서 전지(田地)를 경작하던 연변(沿邊) 고을의 백성들을 모두 섬 안으로 옮겨서 그 영전(營田)을 개혁하여 그들에게 나누어 주어 농사짓게 하고, 그 조세(租稅)를 면제해 줄 것이며, 또 병선(兵船) 66척으로 하여금 이 곳을 지켜 외적을 막게 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라고 하여 거제 현민들이 옛 섬으로 복귀함으로써 거창현에 더부살이하였던 거제현은 다시 환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때에는 거창현에 붙어 살았던 인리(人吏:아전) 15명과 관노비(官奴婢) 30여 명이 함께 돌아왔다. 또한[세종실록(世宗實錄)]권 150, 지리지, 경상도, 진주목, 거제현에는,“ (거제현을) 금상(今上, 세종) 4년 임인에 다시 옛 섬으로 돌아가게 하여, 4품이상을 지현사(知縣事)로 충당하였다.”라고 하여 독립적인 지방군현 조직체계도 환도하여 복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 32, 경상도(慶尙道), 거제현(巨濟縣), 성곽(城郭)에 인용되어 있는 이보흠(李甫欽)의 기문(記文)에는 거제의 백성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원해서 이에 성을 쌓아서 살게 하고, 또 민을 지키어 보호하니 흩어졌던 백성들이 모두 모여 들었다고 하여 거제현의 환도는 거제 현민의 요구를 조선의 지배층이 수용하여 이루진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거제 현민들의 적극적인 요구와 조선정부의 군사적·교통적 필요성이 상호 일치한 결과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이전부터 거제 현민들이 거제도에 들어 와서 생활의 터전을 일구어 생업에 종사하는 등 환도의 요구와 실천을 옮기고 있었으며, 대마도 정벌과정에서 거제도의 군사상·교통상의 역할이 정권 담당자에게 주목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양자의 노력과 인식전환이 상호 일치함으로써 거제도는 옛 섬으로 환도할 수 있었던 것이며, 이 시기 왜구침략의 약화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던 것이다.
거제현의 복구와 함께 세종대에는 생산기반과 국방 및 군현체계의 정비작업도 적극으로 실행되었다. 토지를 나누어 주어 농사를 짓게 하고 그 조세의 감면과 함께 외적 방어를 위한 군사력의 강화도 이루어졌다. 아울러 새로 이주한 사람들에게 종자와 식량을 분급해 주었으며, 문무겸전(文武兼全)한 사람을 현령(縣令)으로 파견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세종대에는 거제현의 군사방위를 강화하고 농업생산의 발전을 도모하여 군현민의 생활기반을 안정시켜 갔다. 뿐만 아니라[세종실록(世宗實錄)]권 27, 세종 7년 2월 정묘에는 거제현의 수호군을 증원함과 동시에 다음과 같이 거제현의 치소이전도 논의·시행되었다.
「병조에서 계하기를“…현재의 거제현 관청 소재지는 진실로 불가한 곳입니다. 농장이 협소하여 사람들이 모여서 살 수 없고, 지대가 낮고 습하며, 3면에 산이 압림(壓臨)하고 있어 수호하기에 곤란합니다. 또 적들의 배가 쉽게 들어올 수 있어 예측하지 못하는 변란이 예측됩니다. 이로 인하여 사람들이 안심하지 못하고 있고, 조석 사이에도 보장되기 어렵고 보니 자못 이 곳은 장구한 땅이 못됩니다. 오직 고읍(古邑)의 지형은 읍(邑)을 설치할 만 하옵니다. 오로지 농장이 넓고 기름질 뿐 아니라 왜적(倭賊)도 역시 돌입할 수 없어 사람들이 모여 사는데 실로 이익이 있을 것이오니 청컨대 금년 가을철에 성을 쌓고 고을 청사(廳舍)를 옮기도록 하소서.”…하니“논의하여 얻은 계책대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세종 4년 환도(還島) 직후의 거제현 치소(治所)는 수월리(水月里)로 목책을 설치하였으나 현민들의 거주와 농업생산에 있어서의 입지조건, 그리고 군사적 지형조건 등에서 불리하였다. 그래서 세종 7년(1425) 2월에는 거제현의 치소를 그 조건상에서 유리한 고읍(古邑)으로 옮겨가는 방안이 검토·의결되었으며, 가을부터 시행하기로 되어 있었다.
여기서 고읍의 읍성은[세종실록(世宗實錄)]권 30, 7년 10월 신사에서 사월포(沙月浦)에 위치하는 것으로 지칭하고 있으며, 지금의 사등(沙等)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거제와 관련한 공간저서인[거제지명총람]과[거제향토지]등에는 세종 7년에 쌓은 고읍(古邑)의 읍성을 고현(古縣)에 있는 고정의 읍성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이는 고읍(古邑)을 고현(古縣)으로 연결시켜 해석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이 고읍은 고현과 일치시켜 해석함에는 문제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문종실록(文宗實錄)]권 7, 원년(1451) 5월 계묘에는「본읍(本邑: 거제현)이 예전에는 섬 안의 수월리(水月里)에 목책을 설치하였으나 지난 병오년(세종 8년, 1426)에 사등리(沙等里)로 옮겨서 관사(館舍)를 설치하고 성지(城池)를 수축(修築)하는 일이 무진년(세종 30년, 1448)에 이르러 끝났는데 이제 도체찰사(都體察使)정분(鄭)의 심정으로 말미암아 또 고정리(古丁里)로 옮기려고 합니다.」라고 하여 세종(世宗) 4년 거제현이 공식적으로 환도하는 시점에 있어서 그 치소는 현재 장승포와 고현(古縣)사이에 위치한 수월리였으며, 세종 7년 쌓아 8년에 옮겨간 거제읍성은 사등리에 설치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사월포에 위치한 사등의 거제읍성은 문종(文宗)∼단종(端宗) 연간에 읍성을 다시 쌓아 옮겨간 고현의 고정 읍성(古丁邑城)과차이가 있음이 분명해 진다.
세종 7년 10월에는 군사적·농업적 입지조건이 유리한 거제현 사등의 사월포(沙月浦)에 읍성(邑城)을 쌓는 제안이 수용되어 시행단계에 돌입하였다. 그리고[문종실록(文宗實錄)]권 7, 원년(1451) 5월 계묘의 기사에서는 세종 8년(1426)에 사등리(沙等里)로 옮기고 세종 30년에 이르러 관사(館舍)의 설치와 성지(城池)의 축조가 마무리되었으며, 인리(人吏)와 관노비(官奴婢)도 이미 토착하여 번성하였다라고 하여 세종 연간에는 거제도로 복귀한 거제현의 관사 건축물과 지방행정 조직체계가 정비되고 재향 토착세력의 기반도 안정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세종 7년 8월 계미에는 지현사(知縣事) 손이순(孫以恂)의 청에 따라 거창의 가조현으로 옮겨갔던 거제현의 오양역(烏壤驛)도 환도하여 복구되었다. 그럼에도 아직 거제현의 속현으로 강성현과 병합하였던 명진현(溟珍縣)의 복귀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세종 9년 정월 임인에는 거제현민이 장계(狀啓)로써 아뢰어 강성현에 소속되어 복귀하지 못하는 명진현 사람들을 거제현으로 돌려 보내주도록 청하였으나 본현(本縣), 즉 거제현이 번성할 때까지 명진현 사람들을 돌려 보내는 것이 유보되어 시행되지 못하였다. 그런데 세종 18년 2월 경자에는 이미 명진현의 사람들이 거제현으로 옮겨 소속되어 있었음으로 명진과 병합하였던 강성(江城)의 명칭을 분리하여 단성(丹城)으로 고치게 하였다라는 내용이 있다.
이로써 세종 18년(1436) 2월경에는 고려시대 원종 12년(1271) 삼별초의 항쟁과 왜구의 침략으로 인하여 인근 내륙지역으로 옮겨간 거제현과 그 속현 및 역·원이 거제섬으로 환도하였으며, 그 명칭과 관사조직 등도 복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기간은 166년으로 1세기 반 이상이라는 오랜 시간이 경과한 것이다. 아울러 세종 30년에는 관사(館舍)와 성지(城池)까지 설치됨에 따라 그 완전한 복구가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오랜 기간이 경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거제현이 거제섬으로 환도하여 지방의 독립행정 조직체로 복구될 수 있었던 연유는 군사상·해상교통상에 있어서 거제도의 지리적 조건이 중요 거점이라는 국가적 필요성이 제기·실행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되어야할 사실은 거제 현민들이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복구하고 왜적을 격퇴하여 민족적·지역적 자긍심과 자기의 전통문화를 수호하려는 지속적인 실천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이런 점이 거제 현민들이 가지는 민족적·지역적인 저력인 동시에 실천의지를 대변하는 것이다. 특히 이 시기 이전부터 거제지역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과 민족적 자긍심을 수호하기 위하여 당대의 사회·경제적인 모순구조에 대하여 저항하여 왔으며, 민족적 종속과 그들의 삶의 수탈을 강요하는 왜적의 격퇴에 적극적으로 항거함으로써 민족의 자긍심과전통문화와 더불어 지역문화와 그들의 생명 및 삶의 터전을 수호하고 이를 발전시켜 왔다.
이같은 거제 사람들의 전통의식과 실천노력은 응집된 저력으로 작용하여 거제현의 복구를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음이 분명할 것이다. 거제의 이러한 역사적 환경은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양 난을 겪은 이후인 조선후기 숙종 37년(1711)에 도호부(都護府)로 승격하는 토대로 작용하였음이 분명하다.[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숙종 37년 3월 11일에는 거제부(巨濟府)의 승격이 한 섬(거제도) 안의 여덟 진보(鎭堡)를 통솔하여 해로(海路)를 방어하기 위함에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즉 거제가 지니는 해상 군사방어상의 요해처로서의 역할은 거제가 부로 승격하는 주요조건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여지도서(輿地圖書)], 김해진관 거제부(金海鎭官巨濟府), 건치연혁(建置沿革) 등을 비롯한 조선후기에 편찬된 읍지류에도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환도(還島)한 거제현의 기반과 체제를 안정시킨 이후 그 발전을 위한 새로운 대안이 모색되었다. 사등 수월리의 읍성을 고현(古縣)의 고정리(古丁里), 즉 고정부곡(古丁部曲)으로옮겨가는 논의가 그것이다. [문종실록(文宗實錄)]권 4, 문종 즉위년(1450) 10월 무술에는 도체찰사(都體察使) 정분(鄭)이 치계(馳啓)하여 사등의 사월포에 있던 거제의 읍성은 낮고 좁으나 고정부곡은 지세가 넓고 평평하며 골짜기가 깊고 은밀하며 또 우물과 샘이 있어 경작할 수 있고 주거할 수 있는 땅이 많아 유리함으로 읍성을 옮겨갈 것을 제안하여 수용되었다고하였다. 이 조치에 대하여 문종 원년 5월 계묘의 기사에서는 거제현 사람이 상언(上言)하여 이전부터 반대하였으며, 해당 관서도 유보적 입장을 취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박가대(博加大)·일기주(一岐州)의 왜인이 거제를 침략한다는 글을 접함으로써 이전문제를 재론하여 고정리의 이전을 결정하였던 것이다.
이 때 고정리로의 이주반대명분은 인리(人吏)와 관노비(官奴婢)가 이미 토착하여 번성하며, 새로운 영선(營繕)에 따른 민생(民生)의 불편을 제시하고 있으나 그 현실적 이유는 이주에 따른 인리(人吏)들의 재향 토착적 기반이 약화될 것을 우려한데 있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반대 주도층의 실체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주의 배경은 논의과정에서 제기된 고정부곡의 거주와 농업생산 기반에 있어서 지형적 조건과 함께 거제도 각 포(浦)의 중앙을 연결하는 요충으로써 해상교통의 거점이라는 조건, 국방상의 방어전략지라는 조건이 유리하여 영구한 터로 삼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 32, 경상도(慶尙道), 거제현(巨濟縣), 성곽(城郭)에 인용되어 있는 이보흠(李甫欽)의 기문(記文)에는 문종대에 시작된 고정의 읍성축조에 경상하도(慶尙下道)의 백성 20,000여 명을 동원하였고, 영천군사(永川郡事) 정차공(鄭次恭), 진주 판관(晋州判官) 양연(楊淵), 곤양군사(昆陽郡事) 최성로(崔性老), 청도군 사(淸道郡事) 이의(李椅), 사천 현감(泗川縣監) 장오(張俉), 진해현감(鎭海縣監) 김한진(金漢珍)에게 공역을 분담하여 감독하게 하였으며, 거제 현령 이호성(李好誠)에게 관사와 부고(府庫)를 세우도록 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원근의 백성이 다 모여 마음을 다하였고, 성 3,600여 척과, 집 40여 간이 이달을 넘기지 않고 완성되었다고 하였다. 물론 이 기문의 내용은 과장된 표현이 없지 않으나 고정 읍성의 축조가 거제현민과 그 주변 군현민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없이는 불가능하였음을 알려 주는 것이라 하겠다.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 거제현, 읍성에는 고정리(古丁里)의 읍성 석축이 문종(文宗) 즉위년(1451)에 되었으며, 그 이주가 1455년에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문종실록(文宗實錄)]권 10, 원년 11월 갑자에는 이 달에 경상도 거제현의 성을 쌓았다라고 하였다. 또한[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 32, 경상도, 거제현, 성곽에는 읍성이 석축이며, 둘레가 3,038척, 높이가 13척, 성안의 샘이 셋, 못이 둘이라 하였다.
이런 점으로 보아 고정리의 읍성은 문종연간에 축조가 일단락되었으며, 관사와 부고(府庫), 집 40여 간, 둘레 3,000여 척, 높이 13척, 샘 3, 못 2곳과 같은 규모를 갖추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로써 거제현은 국방상의 안정, 거주의 편리성, 농업 및 어업생산력의 발전기반, 해상교통의 원활성을 확보함으로써 거제지역의 영속적인 발전을 위한 새로운 토대를 구축할 수 있었으며, 그 중심지는 현재 고현의 고정리가 되었던 것이다. 나아가[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 32, 경상도, 거제현, 연혁에는 현종 5년(1664) 치소(治所)를 명진(溟珍)의 옛 현[古縣] 서쪽 3리로 옮겼다고 하여 고현(古縣)이 이 시기 거제지역의 행정중심지로 역할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복구와 발전이 모색되었던 조선시대에 있어서 거제현의 구조적 모습은[세종실록(世宗實錄)]권 150, 지리지, 경상도, 진주목 거제현을 비롯한[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 32, 경상도, 거제현 등과 같은 지리지나 읍지에 서술되어 있다.
우선 인적자원은 세종대(명진현의 경우 제외)에 153호 423명이며, 군정(軍丁)이 현수호군(縣守護軍) 103명이었다. 그리고 나말여초 이래 거제지역에 토착하면서 지배적인위치에 있었던 유력한 씨족, 또 거제를 본관으로 하면서 읍사(邑司)를 구성하였던 거제현의 토성(土姓), 주로 고려시대 거제지역의 인근 군현의 토성에서 이속되어온 내성(來姓), 여말선초 이래로 거제현의 향리가 부족하여 이를 보충내지 열읍간(列邑間) 조정한 결과옮겨와서 형성된 속성(續姓), 거제지역 촌락지배의 성단(姓團)으로서 거제현의 성립시에 참가한 읍내(邑內)의 인리성(人吏姓)과 함께 토성이된 백성성(百姓姓), 토성이 확정된후에도 거제현의 관내(管內)에서 독자적인 구역을 보유한 채 임내(任內)와 병열해 있던 촌락의 성단인 촌성(村姓), 그리고 거제현의 세 속현인 아주현, 송변현, 명진현과 그 하부단위인 향(鄕)·부곡(部曲)의 토착 지배적인 성씨집단을 이루었다. 위의 내용에 따르면 우선[세종실록(世宗實錄)]지리지에 거제현의 백성성으로 분류된 손(孫)·조(曹)의 성씨집단은[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토성으로 분류되어 있어 거제현의 경우는 토성과 백성성이 동일한 이족(吏族) 성씨집단을 지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양 지리지의 토성에는 정(鄭)·반(潘)으로 기재된 순서가 반·정으로 바뀌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세종연간에서 성종 연간에 이르면서 거제현에 있어서 토착 성씨집단의 세력판도가 변화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세종연간에우세하였던 정씨집단이 성종 연간에는 반씨집단으로 변화되어 갔다는 것이다. 이들 성씨집단은 내성과 속성을 제외하면 나말여초 이래로 조선전기까지 거제지역의 토착세력이며, 내성과 속성은 고려시대와 여말선초에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 와서 향리의 역할을 한 세력집단이다. 이들 성씨집단 가운데 고려말 이래로 중앙의 사족(士族)으로 성장한 경우는 반씨(潘氏)와아주 신씨(申氏)가 있다. 반씨는 고려말 폐행(嬖幸)으로 출세한 반복해(潘福海)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고려사(高麗史)]권 124, 반복해전(潘福海傳)에는 반복해는 거제사람으로 우왕 때 폐행으로 여러 벼슬을 거쳐 밀직승지(密直承旨)로 승격하였다고 한다. 우왕이 왕(王)씨를 사성(賜姓)하였으며, 양자로 삼고 그의 아버지 반익순(潘益淳)을 우시중(右侍中)으로 승진시킬 만큼 총애가 대단하였다. 또한 그의 조부인 반부(潘阜)는 고려의 사절로 일본『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갔으며, 문형(文衡)을 주관하여 좋은 인재를 등용했다. 반복해는 당시의 권신인 임견미(林堅味)의 딸에게 장가들고, 후에는 전의 주부(典儀注簿) 류분(柳芬)의 사위도 되었다. 결국에는 우왕에게 임견미 등과 함께 죽음을 당하고 재산도 몰수되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반복해가 폐행으로 분류·기록되어 부정적 측면이 강조되고 있으나 그의 조부 때부터 거제 반씨집단이 중앙의 사족화 과정을 밟고 있으며, 문(文)과 대일(對日)외교능력으로 중앙관료로 진출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거제반씨 가문이 대일 외교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배경은 거제지역이 대일 해상교통의 거점으로 일본의 사정에 밝았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반제로(潘悌老)는 조선 태종 때에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은 감찰(監察)까지 되었고 이 가문은 안동지방에 이주하여 재지 사족(在地士族)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권지 호장(權知戶長) 신영미(申英美)를 시조로 하는 아주신씨(鵝洲申氏)는 거제에서 거창으로 나가서 더부살이를 하다가 5대에 상주(尙州)로 이주하였고, 6대 때에 다시 의성지방으로 옮겨 갔으며, 이곳에서 족세(族勢)가 번성하여 조선후기에는 사족(士族)과 이족(吏族)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고려말 왜구의 침략으로 거제를 비롯한 연안 도서지역의 토성집단은 본관지를 떠나 다른 군현으로 전전함에 따라 본관지에서의 자기 성장의 기회를 놓쳤지만 거제 반(潘)씨와아주 신(申)씨는후일 영남사림파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을 배출하는 가문으로 성장하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조선시대 거제지역의 생산기반과 생산물은 다음과 같다.[ 세종실록(世宗實錄)]권 150, 지리지, 경상도, 진주목 거제현에는 거제현의 땅이 기름지고 기후는 따뜻하며, 간전(墾田)이 709결이며 논이 조금 많다고 한다. 토산생산품은 벼·조·콩·메밀이며, 토공(土貢)은 대구·문어·생포·미역·우무·표고버섯·세모이다. 염소(鹽所)는 네 곳으로 둘은 모두 현 동쪽에 있고 하나는 현 서쪽에 있으며, 다른 하나는 현 남쪽에 있다고 하였다.
또한[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거제현의 목장에는 구천동(九千洞, 둘레 119리250보, 말 1,115필), 산달도(山達島, 둘레 15리 7보 2척, 소 89두), 칠천도(漆川島, 둘레 51리 60보, 말 176필), 한산도(閑山島, 둘레 54리 100보, 말 173필), 용초도(龍草島, 둘레 32리, 말 58필), 영등곶(永登串, 둘레 50리 170보, 말 67필) 등이 있으며, 염분(鹽盆)에는 사목리(沙木里, 사등), 오양포(烏壤浦), 산달포(山達浦: 지금의 둔덕), 한다포(閑多浦: 명진), 명진포(溟珍浦), 산촌포(山村浦), 오비포(吾非浦: 연초), 가이포(加耳浦), 하청포(河淸浦), 사외포(絲外浦:하청), 황포(黃浦)가 있다고 하였다.
이처럼 거제지역은 생산기반은 농업과 함께 수산업까지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섬이라는 지형적 조건, 남해연안의 한류와 난류의 이상적인 흐름이라는 자연적 조건은 거제지역 사람들이 풍부한 해양 수산자원을 획득할 수 있는 기반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생산기반은 이미 조선 이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거제현민들의 경제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토대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 다음으로 거제현의 향촌구조는 다음과 같이 편재·구성되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 32, 경상도, 거제현, 고적에는 세 속현인 아주현·송변현·명진현과 함께 하청 부곡(河淸部曲), 고정 부곡(古丁部曲), 죽토 부곡(竹吐部曲)과 같이 부곡(部曲) 3개소, 말근향(末斤鄕), 덕해향(德海鄕)과 같이 향(鄕) 2개소, 연정장(練汀莊)처럼 장(莊) 1개소를 기록하고 있다.
먼저 명진현을 제외한 아주현과 송변현은 세종 때에 이미 거제현의 직촌으로 재편되고 있었다. 이같은 사실은[세종실록(世宗實錄)]권 150, 지리지, 경상도, 진주목, 거제현에, 두현(아주현과 송변현)의 인물이 모두 없어져서 지금 직촌(直村)으로 삼았다는 내용을 통해서 확인된다. 그리고[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 32, 경상도, 거제현, 고적에는 명진현이 폐현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이 사실은 곧 성종대에 이미 환도(還島)한 명진현도 폐현이 되어 거제현의 직촌으로 재편되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또한 향과 부곡은 통일신라시기 군현의 하부단위로 편제되어 한국사에 처음으로 등장 하였으며, 고려시대의 부곡제는 농경지 개간을 통하여 형성된 신생촌락으로 인구와 토지가 적은 곳, 반왕조적인 집단의 구성원이나 근거지를 재편하는 등 두 가지 방향에서형성되었던 것이다. 부곡제 영역은 하나의 행정구획이었음으로 토착 지배세력인 장리(長吏)가 존재하고 있어 부곡사(部曲司)·향사(鄕司)에 모여 그 지방의 행정업무 처리에관여하고 있었다.
부곡제의 주민은 잡척층(雜尺層)이라 하였으며, 농업 등에 종사하면서 국가에 대하여 각종 조세와 역역을 부담하는 한편, 특정의 역을 추가로 부담하였다. 아울러 그 거주민은 국학(國學)의 입학이나 과거의 응시, 승려로서의 출가가 금지되었으며, 자손의 귀속에서도 천인의 대우를 받기도 하였다. 따라서 부곡과 향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군현의 백정 농민층에 비하여 그만큼 사회·경제적으로 열악한 존재들이었다. 물론 부곡제는 군현으로 승격하거나 반대로 군현이 부곡제로 강등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군현으로의 승격은 대개 국가적인 공을 세운 인물을 배출하거나 고위관인을 배출하는 경우로 한정되었다. 강등은 반왕조내지 반국가 행위를 한 반역인물의 출신지 경우에 해당되며, 이 경우 그 주민들은 군현으로의 복귀를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이는 부곡제지역이 사회·경제적 처지에서 지극히 불리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12세기 이후민의 유망과 군현제의 해체, 생산력의 발달에 따라 고려 전기의 부곡제지역은 해체, 소멸되기 시작하여 부곡제 기능이 상실될 수 밖에 없었으며, 14세기 후반에는 부곡지역을 주현에 폐합시켜 현실적인 군현 병합책을 시행하여 부곡지역은 현으로 승격하거나 주현에 내속(來屬), 또는 주현의 직활촌 등으로 재편되었다. 이로써 여말선초에는 군현제와 부곡제가 복합적이고 계서적인 성격을 띠는 고려시대 특유의 군현체제가 해체되어 갔다. 이처럼 거제현의 부곡·향·장도 마찬가지로 이미 고려시대에 존재한 특유의 부곡제로 조선시대에는 해체되었으며, 조선의 새로운 군현제로 재편되었던 것이다. 세종연간인 15세기 전반기에 편찬된[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거제현의 관련기록에서 하청(河淸)·죽토(竹土)·고정(古丁) 부곡, 말근곡(末斤谷)향, 연정장(鍊汀莊)에는 모두 사람들이 없다고 한 사실은 이 시기에 거제의 부곡제도 해체되어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넷째로 거제지역 역시 교통 및 통신을 담당하는 역(驛)·원(院), 포(浦)와 함께, 봉수도 존재하고 있었다. [세종실록(世宗實錄)]권150, 지리지, 경상도, 진주목, 거제현에는 육로교통과 통신을 담당하는 역 1개소로서 오양역(烏壤驛), 해상 교통·운송의 기능을 맡은 포(浦) 3곳으로서 오아포(烏兒浦:수군 도안무 처치사가 수어)·영등포(永登浦,수군 만호가 수어)·옥포(玉浦: 가배량 도만호와 견내량 만호가 수어), 군사 행정적 통신체계로서 서쪽 고성(固城) 미륵산(彌勒山)에 응하는 가라산(加羅山) 봉수대 1개소를 각각 기록하고 있다. 아울러[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 31, 경상도(慶尙道), 거창군(居昌郡), 고적(古跡)에서는 고려시대 거제현에 원(院)도 설치되었다고 하였으나 그 명칭은 보이지 않는다. 거제현에는 신역(新驛)·오량역(烏壤驛)의 두 역이 있었으나[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 31, 경상도(慶尙道), 거창군(居昌郡), 고적(古跡)에는 고려 원종 때 거제현이 거창의 가조현에 더부살이를 하면서 오양역과 원을 설치 운영하였다고 하였으며,[ 세종실록(世宗實錄)]권 29, 7년 8월 계미에는 중앙정부가 지현사(知縣事) 손이순(孫以恂)의 청을 수용하여 오양역을 복구하였다고 하고, 아울러 거제현과 고성(固城) 송도역(松道驛)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고 그에 따라 송도역의 말이 많이 시달려 죽기때문에 설치하였다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 32, 경상도, 거제현, 역원에서는 연산군 6년(1500) 오양역에 석축 보루(堡壘)를 설치하였으며, 성 둘레가 2,150척, 높이가 15척으로 권관(權管)을 두어 방수(防守)하게 하였다고 하여 그 기능을 강화시켰음을 알 수 있다.
또한[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 32, 경상도, 거제현, 산천 및 봉수에는 사등포(沙等浦), 탑포(塔浦: 송변현이 있음), 오비포(吾非浦), 가이포(加耳浦), 하청포(河淸浦: 하청부곡에 있음), 사외포(絲外浦), 황포(黃浦), 한다포(閒多浦), 명진포(溟珍浦: 명진현에 있음), 산촌포(山村浦), 오양포(烏壤浦: 오양역에 있음) 등과 같은 포와함께 남쪽으로 가라산에 응하고 서쪽으로 고성현 미륵산에 응하는 계룡산(鷄龍山) 봉수, 북쪽으로 계룡산에 응하는 가라산 봉수를 각각 기재하여[세종실록(世宗實錄)]지리지에 비해 더 많은 포와 봉수를 파악하고 있다. 특히 섬이라는 거제현은 지형적 조건으로 인하여 포(浦)가 많이 분포되어 있으며, 이는 거제지역이 조선시대에도 해산물의 생산, 해상운송 및 교통의 거점으로 지속적인 발전을 하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제도에 위치한 봉수시설은 왜구 및 일본의 침략이나 그 상황을 신속하게 알려주는 변방의 중요한 군사통신 기능을 담당하였음이 분명하다.
다섯째, 거제현과 관련하여 매우 주목되는 점은 군사 방어시설의 설치이다. 여말선초 남해 연안지역이 왜구침략의 최일선에 노출됨에 따라 거제현은 군사적 거점으로서의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초기의 지방군은 육수군(陸守軍)과 기선군(騎船軍)으로 크게 구분된다. 육수군은 도절제사(都節制使)가 파견된 거점인 영(營), 철절제사(僉節制使)가 파견된 연안 요새지역인 진(鎭)의 방어를 담당하여 영진군(營鎭軍)이라고도하는 육군이었다. 기선군은 연안지역의 요새인 포(浦)를 거점으로 배를 타고 나가 해상에서 적을 방어하는 수군이었다. 거제도와 직접 관련한 군사조직은 육군의 진군과 수군의 기선군이므로 이들을 중심으로 먼저 개괄하기로 한다. 진군은 왜구방비를 목적으로 남방의 방어기지에 설치된 육군이며, 태조 6년(1397) 병마도가 일시 폐지될 때도 그 도의 요새지역에 진을 설치하고 첨절제사를 두면서 성립되었다.
이때 경상도지역에는 합포, 강주, 동래, 영해에 진이 설치되었다. 진군은 해안의 요충지에 위치하면서 왜구들이 육지로 상륙하면 이들을 격퇴하는 임무를 띠었으며, 각 포(浦)에 배치된 수군과 협공작전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이후 진의 소재지와 진군의 수적 증감에 약간의 변화는 있었으나 그 기본골격은 변화지 않고 해안방어의 역할을 담당하였다.조선초기 이래 해안의 거점요새인 포(浦)에는 수군과 전함을 배치하여 해상침투 적을 방어하였다. 태조 때부터 수군의 사기앙양과 정예화에 힘을 기울였으며, 태종과 세종도수군을 증강하여 수군의 비중이 군정(軍丁)의 절반가까이 차지하였다. 또한 태조이래전함의 건조도 활발하여 태종대에는 조선의 전함 수가 613척에 달하였으며, 병선의 종류도 목적에 따라 분화되어 해상에서 다양한 작전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조선 초기이래 각 포에는 정예수군과 성능이 뛰어난 전함이 배치되어 왜구 침략을 격퇴할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태조 2년 3월에는 전라·경상·양광 3도에 수군절제사를, 경기좌우도에 수군도절제사를 각각 임명·파견하였고, 태조 7년 6월 신묘에는 수군의 관직체계를 확립하였으며, 태종 13년(1413) 7월 병술에는 수군(水軍)의 직제를 개편하는 등 군제의 변화를 통한 수군의 지휘체계를 확립함으로써 조선의 수군은 점차적으로 정비되어 갔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조선전기 거제지역의 군사 조직을 살펴보자. [태조실록(太祖實錄)]권 3, 태조 2년 5월 경오에는 거제 병마사가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는 태조대부터 거제지역의 군사조직이 설치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 2년 윤 정월 병신에는 백성들이 거제 등지의 섬에 무기를 가지고 들어가서 농사를 짓고 방어를 하며, 또한 부근 항구에 있는 병선으로 백성을 수호하게 하였다. 세종 3년 2월 을미에는 경상도 우도 수군도절제사의 건의를 수용하여 도내에 사는 만호(萬戶)나 천호(千戶)를 역임한 사람으로 배타는데 익숙한 자와 한량(閑良)을 뽑아서 모두 거제도로 보내어 방어하게 하였다. 특히 세종 4년 2월 임자에는 이 이전부터 거제지역에 시위군과 배타는 군사 및 영전(營田)이 있었으며, 이 때에 이르러 영전을 개혁하여 환도(還島)한 백성에게 나누어 주어 농사짓게 하고 그 조세를 면제하며 또 병선 66척으로 지키게 함으로써 거제현의 복구와 함께 군사방어 능력도 강화시켜 갔다.
아울러 세종 4년 12월 계사에는 경상도 관찰사의 의견을 수렴하여 방어가 심히 긴요한 거제현의 현령을 문무겸전(文武兼全)한 사람으로 삼았다. 이와 함께 세종 7년 2월정묘에는 거제현의 사람과 물화가 크게 성할 때까지 거제현의 수호군(守護軍)을 종전 100명에서 200명으로 증강하고, 그 200명은 부근 각 고을의 신백정(新白丁)을 육군과 상호 교환하여 정속시키고 4번으로 나누어 부방(赴防)하도록 시행하였다. 세종 13년 7월 기축에는 경상도 감사가 올린 거제도 외곽인 율포의 전토는 하청과이슬포에 사는 사람들이 경작하게 하고 옥포(玉浦)·영등포 만호(永登浦萬戶)에게 수호하도록 하였으며, 세종 26년 8월 신미에는 경상도 관찰사·도절제사·수군처치사 등에게 거제 등의 고을에 대한 왜적방어를 철저히 대비하도록 지시하였다.
한편, 세종 30년12월 갑술에는 거제현은 방수가 긴요함으로 백성들의 전세를 현창(縣倉)에 바로 바치게 하여 군수(軍需)의 비축으로 삼았다. 이처럼 세종 대에는 대 왜구(對倭寇)정책과 관련하여 거제지역의 군사적 중요성이 부각됨에 따라 군사 수의 증강, 군비의 확대, 조직체계의 재편, 강화 등과 같은 형태로 군사 방어체계를 크게 강화·확립시켜 나갔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거제현의 오아포는 수군 도안무 처치사가, 영등포는 수군 만호가, 옥포는 가배량 도만호와 견내량 만호가 각각 수어하는 체계로 편제되어 있었다. 특히 대마도 정벌과 거제현의 복구과정에서 거제현의 군사적 기능 및 현민의 보호가 재인식되어 군사력 증강은 보다 확대되어 갔다.
세조연간에는 전국의 방위체제를 진관체제(鎭管體制)로 재편 강화하면서 거제현의 군사체계도 변화되어 갔다. 세조 원년(1455) 9월 계미에는 거제진이 사천진, 세조 3년 10월 경술에는 창원진에 각각 속하고 있었다. 세조 3년에는 이미 거제현의 중요한 각 포에 군사와 병선 및 성보가 갖추어져 있었으며, 영등포·옥포·지세포·조라포·오아포가 그것이다. 세조 4년 2월 을묘에는 거진(巨鎭)을 설치하였고, 5년 7월 을묘에는 거제현 수군의 주진(主鎭)을 거제 가배량에 두었고, 제포(지금의 진해 웅천)에 거진을, 9개포에 제진(諸鎭)을 두었다. 거제의 각 포가 세조 5년 7월 을미에는 제진체제(諸鎭體制)로 재편되어 갔다. 거제수군의 주진은 오아포 등지, 제진은 옥포·지세포·영등포·조라포 등지에 설치되었다.
그 규모와 이후의 연혁변화 등은[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 32, 경상도, 거제현, 진보 등을 비롯한 지리지나 읍지 등에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또한 거제지역은 세조 13년 군사 요충지로서 특수지역에 설치된 유방군(留防軍)이라는 군사가 배치되어 있었는데 이는 거제지역이 군사적 요충지임을 재확인하게 한다. 1469년 이후 주진체제가 폐지되고 영(營)으로 바뀌면서 거제섬도 재편과정을 겪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 32, 경상도, 거제현, 관방에는 우도 수군절도사영, 영등포영, 옥포영, 조라포영, 지세포영 등이 거제지역에 설치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 규모와 위치 및 연혁변화는[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등에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아울러 성종 16년(1485) 3월 병오에는 영마다 보루를 설치하여 군사 방어시설을 강화시켜 나갔다.현재까지 거제지역에서 확인되거나 곳곳에 산재하고 있는 읍성(邑城), 관방성(關防城·營·鎭·堡), 산성(山城)은 거제지역이 왜적방어의 관문이었으며, 왜구침략에 대한거제사람들의 피해와 방어의지를 알려 주는 역사·문화적 흔적이다. 또한 임진왜란 직후 왜군이 남해연안 지역에서 장기 주둔을 목적으로 쌓은 왜성(倭城)도 그 당시 거제지역이 군사적 해상 요충지였으며, 거제 지역민들이 왜군의 침략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읍성은 주로 평지에 쌓은 평지성으로 고현성(古縣城), 사등성(沙等城), 아주성(鵝洲城)과 같이 거제군 또는 영현의 치소가 있었던 곳, 구율포성(舊栗浦城, 栗浦堡), 옥포성(玉浦城), 오양성(烏壤城)과 같이 관방(關防)시설로 보(堡), 진(鎭), 영(營), 역(驛)이위치하였던 곳에 분포하고 있다. 또 가배량성(加背梁城), 구영등포성(舊永登浦城), 구조라포성(舊助羅浦城), 지세포성(知世浦城)은 야산의 계곡을 성내(城內)로 삼은 포곡성(包谷城)이며, 역시 군사적 목적으로 쌓여진 진·영에 해당하는 관방성(關防城)으로 주로조선시대에 축조된 것이다. 그리고 산성은 전쟁 때 평성에 대비하여 쌓은 성이 대부분이나 읍성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었으며, 당산성(堂山城), 중금산성(中金山城), 다대산성(多大山城), 탑포산성(塔浦山城), 율포산성(栗浦山城), 옥포금성(玉浦金城) 등이 그 예이다. 비교적 소규모의 석성이나 다대산성과 옥산금성의 경우는 일반 산성과 달리 송변현(松邊縣) 치소 또는 거제군 치소와 관계깊은 것이며, 축조시기가 평지에 있는 읍성보다 빠른 것이 대부분이다. 아울러 폐왕성도 산성처럼 산위에 있으나 내부구조는 평지와 같아 행정적인 읍성과 같은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예상되며, 조선시대에도 이용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거제지역에 소규모의 산성이 많은 연유는 전쟁의 시작과 함께 주민들을 산성보다 곧장 육지로 옮기는 방어책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 밖에 왜성은 장목면(長木面) 장목리(長木里)와 구영리(舊營里), 그리고 사등면(沙等面) 덕호리(德湖里)에 각각 위치하고 있다. 또한 거제지역에는 조선시대 성지(城址)를 비롯하여 분청사기(粉靑沙器)와 백자요지(白磁窯址)가 곳곳에 분포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서도 이 당시 거제지역이 국방상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조선 전기동안 거제지역은 왜구 및 일본침략의 최일선에 노출됨에 따라 거제 현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군사방어를 강화시키려는 노력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는 거제지역이 한일 교통중심지로써 일본이나 왜와의 충돌이 일어날 경우 최일선에서 피해를 입는 지리적 조건에 기인한 것이다. 이로써 거제지역민들은 조선시대에도 자신의 삶과 그 물적기반, 민족적 자긍심과 지역문화를 수호하기 위한 실천 노력을 지속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조선시대 거제지역에도 문화적 공간이 설치·운영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 32, 경상도, 거제현에는 거제의 누정으로는 견내량 동쪽 벼랑에 무이루(撫夷樓), 오아포에 위치한 만경루(萬景樓)·청해루(靑海樓)·임해정(臨海亭)과 함께 객관 북쪽의 황취루(黃翠樓)와 오아포의 해안정(海晏亭), 진남루(鎭南樓)·운주루(運籌樓)·제승정(制勝亭)·대변정(待變亭)이 있다고 하였는데 그 명칭에서 거제지역 사람들이 왜구내지 일본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의식체계와 성격, 해양에 대한 의식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
무이(撫夷), 해안(海晏), 진남(鎭南), 제승(制勝)의 용례에 반영하고 있는 의미는 거제지역민의 독특한 기원의식이나 성격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현 서쪽에 있는 향교는 거제지역민의 유교적 소양과 문화를 확대시키는 공간으로 역할하였다. 고려말 이후 존속되어온 향교는 조선시대 적극적인 흥학정책에 힙입어 다시 복구 재건되거나 창건되었다. 목민관으로 부임하는 수령들은 자연히 국가의 정책에 부응하여 지방 사족들과 힘을 합쳐서 향교를 일으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국가에서는 여러 특전을 베풀어줌으로서 전국에 향교가 확산되어 나갔는데[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각 군현지역의 학교에 기재된 향교는 성종 17년(1486)까지 전국에 일읍일교(一邑一校)의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향교는 거제현에도 존재하였으며, 세종 14년 일운면 고현리에 창건된 거제향교가 그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고현성이 함락되었을 때 소실되었고, 현종 5년(1664) 현령 이동구(李東耉)가 고현에서 계룡산 기슭의 서정리로 이전하여 중수하였다.
특히 조선 후기의 향교는 춘추석전(春秋釋奠), 삭망분향(朔望焚香)과 성황제·여제·사직제·기우제 등 제전의 의전을 봉행하고 향약 및 향사례를 실시하며, 사문(赦文)의 반포 및봉독(奉讀) 등의 제반 행사를 주관함으로써 향교의 사회교화의 기능이 오히려 전기보다 강화되었다. 또한 향촌의 유림들은 향촌에서의 일정한 위치를 보장받고 세력권을 유지하기 위해 향론의 조정과 풍속교정의 필요성을 내세워 공적인 기구이면서도 자치적인 운영이 가능했던 향교를 그들의 세력 거점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므로 향교는 향촌사회에 있어서 유림들이 공론을 조성하는 모체가 될 수 있었고, 전통적인 지역문화의 거점으로도 작용할 수 있었다. 한편 거제지역에는 사직단, 문묘, 성황사, 여단도 있었으며, 이는 지역민의 공동체 결집공간과 정신적 의지처로 기능하였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불교의 정치·사회적 역할이 크게 약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제의 견암사(見庵寺)는 조선 전기까지 그 기능과 역할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태종실록(太宗實錄)]권 27, 14년 2월 경술에는 이관(李灌)에게 전지(傳旨)하여 거제의 견암사(見庵寺) 등에서 매년 2월 15일에 행하던 수륙재(水陸齋)를 금후부터 정월 15일에 행하는 것으로 항식을 삼으라고 하였다.
그리고[세종실록(世宗實錄)]권 24, 세종 6년 4월경술에는 불교의 혁파과정에서 선·교 양종으로 나누고 36개소의 사원을 남겨 두면서, 교종에 소속된 거제의 견암사(見巖寺)를 남겨 두고 원속전 50결에 100결을 더 주고 거승 70명을 머물게 하였다. 이처럼 견암사가 조선 전기에도 국가적 불교의례를 행하고, 사원전을 분급받는 등 국가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은 고려시대에도 마찬가지로 그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음을 의미한다. 아울러 견암사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거제지역의 불교문화 발전과 함께 지역민의 불교의례와 신앙의 의지처로 작용하였음이 분명하다. 또한 고려 중기이후 조선시대까지 거제지역은 국왕을 포함한 왕족, 중앙관료, 대덕고승을 비롯한 중앙의 유교적·불교적 소양을 가진 사람들의 유배지로 역할함에 따라 중앙의 고급문화를 수용할 수 있는 기회를 자주 접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조선시대에는 이들 중앙의 고급문화를 거제지역의 문화로 소화시켜 내륙문화를 일본에 전달하는 교량적 역할을 지속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점이 또한 거제지역이 가지는 독특한 문화의 성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 거제지역에 있어서 이상과 같은 사회·경제적 생활모습과 함께 또 하나의 요소를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조선시대 거제지역에 살았던 왜인문제와 그들의 생활모습이다. 건국 초기부터 조선의 대왜구(對倭寇)·대일(對日)정책은 교린의 원칙에 따라 사신을 파견하거나 외교적 교섭을 통하여 왜구의 금지를 꾀하는 한편, 출몰하는 왜구를 직접 회유하기도 하였다. 투항 왜구에게 벼슬, 토지, 가옥 등을 제공하여 향화(向化)시키게 되자 조선 태조 말년에는 투항 귀순한 왜구가 많았다. 이들 투항 귀순왜구를 항왜(降倭), 투화왜(投化倭), 향화왜(向化倭)라고 지칭하였으며, 거주를 희망하는 왜인을 항거왜인(恒居倭人)이라 하여 일정한 지역에 거주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조선과 교역을 원하는 흥리왜인(興利倭人), 또는 상왜(商倭)에게 무역을 허락하였다. 또한 표류민 송환이나 진화를 바친 왜인, 양국의 외교교섭에 있어서 특별한 공적이 있는 왜인, 특수한 기능이나 예능을 보유한 왜인은 수직왜인(受職倭人)이라 하여 벼슬을 주어 회유하였으며, 성(姓)을 주고 이름을 바꾸는 것을 허락하여 내국인과 구분하지 않고 거주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또한 일본의 여러 지역에 분산되어 있었던 정치세력의 사신이라는 명의로서 내조하는 것을 허락한 왜인을 사송왜인(使送倭人)이라 하였다.
그런데 투항 왜인의 수적 규모가 확대되면서 그에 비례하여 폐단도 발생하였다. 왜인들의 경제적 점유비중이 증가하였고, 조선인과의 교환(交歡)하는 자도 발생하였으며, 군사기밀을 일본에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에 태종대에는 왜인들을 통제하여 흥리왜인에게 일정한 포소(浦所)에서 무역하도록 제한하였다. 조선 태종은 만호(萬戶)가 주둔하는 부산포와 내이포(제포)를 개항하여 입항을 한정시켰다. 그러나 왜인들의 불만과 요구가확대되고 그 폐단이 계속 일어나므로 부득이 태종 18년(1418)에는 염포와 거제도의 가배량에도 항거왜인을 제한적으로 거주하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태종 18년 이후 거제도 동부면의 가배량 등지에도 일정한 거주지를 설정하고 제한된 범위내에서 왜인들이 생활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태종 18년 3월에는 병조가 경상도 수군도절제사의 첩증에 의하여 계장하였는데 그 내용 가운데는 좌도(左道)염포이외 우도(右道) 가배량에 각각 왜관(倭館)을 설치하고 항거왜인을 쇄출(刷出)하여 나누어 안치·거주하여 살도록 하자는 건의가 있다.
고려시대 : 변방 해안지역으로의 재편기
후삼국의 분열을 극복한 고려는 태조(太祖)이래 중앙정치 조직과 함께 지방제도도 정비하였다. 고려의 지방제도는 태조·성종·현종·예종대를 거치면서 개편 정비되었고, 그 이후에도 많은 변동을 겪었다. 고려 군현제는 소수의 주·부·군·현에 외관을 파견하여 영군·영현으로 삼고, 외관을 파견하지 않은 다수의 속군·속현을 편재하는 형태를 띄었으며, 대읍 중심으로 재편하였다.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속군·속현은 재향토착세력인 향리(鄕吏)가 관장하였으며, 주군현(主郡縣)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중앙과 연결되고 있었다. 예종 때부터는 속군·속현에 감무(監務)가 파견되기 시작함으로써 속군·속현에 대한 중앙의 직접적 통제가 강화되어 갔으며, 상대적으로 향리의 대민 지배력도 약화되어 갔다. 고려시대 대읍 중심의 군현제는 대읍으로의 권력 집중현상을 초래하였고, 당시 가장 큰 대읍격인 수도 개경의 권력집중은 그로 인한 필연적인 결과였다.
고려시대 거제지역의 군현체계도 재편되었다. 12목(牧)이 설치된 성종 2년(983년)에는 기성현(岐城縣: 지금의 둔덕면 巨林里)으로 개칭하여 성을 쌓고 12목 가운데 하나인진주목(晋州牧)에 편입되었으며, 당시 본도(本島)의 칠천도(七川島)와 가조도(加助島)는 목장(牧場)으로 상마(上馬)의 공급처가 되어 있었다. 성종 14년이래 개편된 12절도사(節度使)체제에서는 거제지역이 산남도(山南道)에 속하여 진주(晋州)절도사의 통제하에 속하였다.
5도 양계체계로 재편되기 시작하는 현종 9년(1018년)에는 지금의 통영과 고성지역인 자고현(自固縣)을 거제현의 임내에 두고 현령(縣令)을 파견하면서 경상도(慶尙道)의 진주목(晋州牧)에 소속시킴으로써 거제현이 주현(主縣)으로 됨과 동시에 그 행정규모가 확대되었으나 뒤에 고성현이 분리됨으로 인해 다시 그 규모가 줄어 들었다.
원종 12년(1271)에는 왜구의 침략과 진도의 삼별초 항쟁군이 거제지역을 내습함으로인하여 거제현과 명진현 등의 속현 백성을 인근 내륙지역인 거창현(居昌縣)의 가조현(加祚縣) 등지와 진주목의 임내인 영선현(永善縣)으로 분산·이주시켰다. 이어 충렬왕(忠烈王) 때에는 관성(管城)에 병합하였다가 곧 복구하였다. 우왕(禑王) 때에는 서해도 도관찰사(西海道都觀察使)인 조운흘이 황폐화된 거제섬의 농업·어업의 산업 생산력과 군사적 기능을 복구하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통일신라 이래 고려시대까지 거제지역은 진주목의 관할 아래에 있었으며, 중앙정부의 지방통치 관철, 정치·군사적 상황에 따라 중앙정부로의 종속적 재편을 겪었고, 군현의 존립적 위기까지도 맞이하게 되었다. 고려왕조의 전개과정에서 거제지역과 관련하여 우선 주목되는 현상은 한국사에 있어서 그 역할과 위상이 약화되는 일대의 변화를 초래하였다는 것이다. 고려왕조의 성립이후 경주 및 경상도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수도와 경기(京畿)의 개념은 개경(開京) 및 그주변지역인 한반도 중부지역으로 공간적 이동을 가져 왔다.
개경과 그 주변의 근기(近畿)지역은 강력한 중앙 집권체제의 확립과 더불어 모든 정치권력과 경제력이 집중되고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 고려왕조의 특권층인 왕족과 귀족 및 승려 등이 살면서 활동하는 주된 근거지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이같은 조건의 변화는 경상도지역의 역할과 기능이 약화되어 변방으로 전락되었음을 의미하며, 특히 경상도 남해연안 지역사회에 위치한 거제지역의 위상도 크게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을 것이다.
이와 함께 고려시대 대외 교류에서도 중부 서해안을 중심으로 하는 대중국(對中國) 교류가 부각되고 대일(對日) 교섭이 극히 미미함에 따라 대일 해상교통의 거점으로 역할을 해왔던 거제지역의 위상은 더욱 위축되었을 것이다. 특히 12세기 이후부터는 그 가시적 현상이 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다. 12세기 이후 거제지역이 해적의 활동거점, 변방의 유배지, 왜구침략의 다발지역, 여·몽(麗蒙) 연합군의 일본 동정(日本東征) 준비, 삼별초 항쟁군의 내습지역 등과 관련한 기사가 문헌기록에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이러한 역할과 현상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12세기 초기 거제지역은 해적의 주요 활동거점이었다.[ 고려사(高麗史)]권 15, 인종(仁宗) 6년 4월 정사에는“남쪽 경계에 해적(海賊)이 많이 일어남으로 어사 중승(御史中丞) 정응문(鄭應文)으로 선문사를 삼아 가서 효유(曉諭)하게 하였다.”라는 내용과 함께 권 15, 인종 6년 10월 임자에는「임자 초하루에 동남해 안찰사(東南海按察使) 정응문(鄭應文)이‘명진(溟珍)·송변(松邊)·아주(鵝州) 세 현(縣)의 해적인 좌성(佐成) 등 820명이 투항하여 복속하였음으로 이에합주(陜州)의 삼기현(三岐縣)에 귀순(歸厚)·취안(就安)의 두 장(場)을 설치하고 진주(晋州)의 의령현(宜寧縣)에 화순장(和順場)을 두어 거처하게 하였습니다.’라고 아뢰니 여러 신하들이 하례를 하였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인종 6년(1128)에 활동한 남쪽 경계의 해적은 거제현의 속현인 명진현·송변현·아주현이 그 중심지역이었음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중앙 정부에서 선문사를 파견하고, 6개월이상 항전하였으며, 해적의 투항에 여러 신하가 의종에게 하례하였던 사실은 곧 거제지역을 거점으로 삼은 해적활동이 국왕을 비롯한 개경의 귀족 관료층에게 큰 타격을 끼칠만큼 활발하게 전개되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들 해적은 남부지방에서 수취한 세곡(稅穀)을 집결하고 있었던 남해 연안지역의 조창(漕倉), 그리고 각 지역의 조창에서 남해연안 해로를 통해 개경의 경창(京倉)으로 운송하는 조운(漕運) 선박을 주로 탈취하였을 것이며, 그 결과 중앙정부의 재정운용과 귀족관료들의 경제활동에 대해 경제적으로 크게 타격을 입혔을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이들 저항세력이 투항한 이후의 거취에서 짐작할 수 있다. 동남해 안찰사(東南海按察使)로 파견된 정응문(鄭應文)은 저항세력의 두목인 좌성(佐成) 등을 비롯한 820명이 투항함에 따라 내륙지방인 합주(陜州: 현 합천)의 삼기현(三岐縣: 현 삼가)과 진주의 의령현(宜寧縣)에 분산·거주시켰다. 그 조치는 투항한 저항세력에게 토지를 분배하고 경작권을 보호해 준다는 의미도 있을 것이나 그 근본적인 목적은 이들을 해안으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한 사민(徙民)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들이 다시 결집하여 저항할 수 있는 지역의 공간적 근거를 약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국왕과 관료들은 이들 해적활동을 크게 우려하였으며, 그에 따라 적극적인 안정대책을 마련하여 실천에 옮김으로써 투항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인종 당시에는 왜구의 침입사실이 사료에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들 해적 항쟁세력의 실체는 고려왕조 내부출신의 몰락 농·어민층이었을 개연성이 높다.
인종대에는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이 일어나 국왕의 정국주도 위치가 흔들리게 되었고 정치운영도 혼란하였으며, 대규모 토목공사에 따라 백성들의 역(役)이 극심하였고, 문신귀족들의 대토지 소유와 토지점탈, 농민에 대한 지방관원의 가혹한 수탈현상도 심화되고 있었다. 또한 12세기에는 지방관이 파견된 주읍(主邑), 즉 주군현이 파견되지 않은 속읍(屬邑), 즉 속군현에 대한 수탈현상도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었다.
이로써 많은 농민이 유민(流民)으로 떠돌아 다니게 되었으며, 유망농민들 가운데는도적의 무리가 되어 사회·경제적인 모순에 저항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이같은 역사적 조건을 고려한다면, 거제현의 세 속읍인 명진현·송변현·아주현을 중심으로 남해 연안지역 사회 일대에서 직접 저항한 해적세력은 생산을 포기한 유망 군현민층(郡縣民層)이었으며, 당대의 정치적 혼란과 사회·경제적 모순을 극복하고 자신의 생계를 잇기 위하여 저항운동을 전개하였을 것이다.
특히 이들의 활동은 남해연안의 해상조운을 방해함으로써 개경정부의 원활한 재정확보와 중앙 귀족관료의 안정적인 경제생활에 일대의 타격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기록 그대로 해적(海賊)으로 취급하기 보다는 당대의 구조적 모순을 극복하고 자신의 활로를 모색하기 위하여 수탈구조에 대한 저항세력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 거제지역을 중심으로 6개월이상 활동할 수 있었던 요인은 거제지역이 남해 연안지역의 교통 거점으로써 경상도 남부지방의 중요한 해상 조운로(漕運路)였고, 섬이라는 군사·지리상의 유리한 조건과 함께 이자겸의 난이라는 지배세력 내부 분열로 인하여 국가의 지방통제력이 약화되어 중앙의 권력이 곧 바로 미치기 어려운 변방지역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개연성이 높다.
고려 중기이후 거제지역은 국왕을 포함한 왕족, 중앙관료, 고급 승려층의 변방 유배지가 되었다.[ 고려사(高麗史)]권 13, 예종(睿宗) 7년(1112) 6월 을미에는 부여공(扶餘公) 왕수(王遂)가 거제현의 유형지로 옮겨가는 도중에 죽었으며, 8월 병오에는 왕족인 도생 승통(道生僧統) 왕탱이 반란을 도모한다는 고발을 당하여 거제현에 귀양을 오게 되었다. 인종비(仁宗妃) 공예 태후(恭睿太后)의 매서(妹壻)로서 문예에 능통하고 인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고향인 동래 유배지에서 연군(戀君)의 정(情)을 표현한「정과정곡(鄭瓜亭曲)」을 지었던 정서(鄭敍)는 의종(毅宗) 11년(1157) 거제현으로 유배지를 옮겼다.
무신정변의 직후인 의종 24년(1170) 9월에는 의종이 폐위되어 거제 둔덕면 거림리의 폐왕성으로 추방되었다가 명종 3년(1173) 8월 경주로 옮겨가서 살해될 때까지 살았으며, 고종(高宗) 15년(1228)에는 직학(直學) 경유(景儒)가 무인 최씨정권에 대해 정치를 비방했다는 무고를 당하여 거제로 귀양가게 되는 등 거제지역은 고려 중기이후국왕을 비롯한 왕족이나 대덕 고승 및 중앙관료의 변방 유배지로 역할하고 있었다.
이러한 유배지로서의 역할은 거제지역이 변방으로의 전락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중앙의 고급문화, 특히 왕실과 귀족문화, 중앙의 불교와 유교문화를 수용하여 거제지역 사람들의 의식을 자각시키고, 또한 지역문화를 발전시키는 계기로도 작용을 하였을 것이다. 특히 의종(毅宗)의 추방은 거제지역의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으며, 그에 따른 의식전환을 초래하였을 것이다.
의종은 기존의 관료집단과 당대에 중용된 무신(武臣)조차정계에서 축출하거나 정국 운영에서 배제하고, 일부 관료집단과 환관·복자(卜者)·관노(官奴) 등 측근세력을 중용하여 정국을 파행적으로 운영함으로써 파국을 초래하여 무신정권의 성립을 가져 왔다.
이같은 의종의 파행적인 정치운영과 함께 문벌 귀족사회 아래에서 무반에 대한 차별대우와 그에 따른 문·무반의 갈등 및 무반의 불만이 정변발생의 주요 원인이 되었으며, 이와 더불어 일반 군인들의 정변에 대한 적극적인 협조가 성공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정변의 주동인물은 주로 하급장교, 특히 국왕의 시위군인 견룡군(牽龍軍) 출신이었으며, 이들은 50여 명의 문신을 일거에 살해하고 국왕인 의종을 교체하여 거제도로 추방하였다.[ 고려사(高麗史)]권 19, 의종 24년(1170) 9월 기묘 및 권 128, 정중부전(鄭仲夫傳)에는「정중부(鄭仲夫)가 왕[毅宗]을 단기(單騎)로 거제현(巨濟縣)으로 사피(辭避)하고, 태자(太子)를 진도현(珍島縣)으로 내쳤다. 이 날 정중부, 이의방(李義方), 이고(李高) 등은 군사를 거느리고 왕의 아우인 익양공(翼陽公) 왕호(王皓)를 맞아다가 왕위에 앉혔다.」「정중부가 왕[毅宗]을 핍박하여 군기감(軍器監)에 옮기고 태자는 영은관(迎恩館)에 옮겼다가 마침내 왕을 거제현에, 태자를 진도현에 추방하고 태손(太孫)을 죽였다. 왕의 애희 무비(無比)는…왕을 따라 갔다.」이라 하여 정중부·이의방·이고 등은 의종을 폐위하여 거제현으로 추방하고 태자를 진도현으로 귀양보냈으며, 그 손자를 살해하였다. 익양공(翼陽公) 왕호(王皓)를 명종(明宗)으로 옹립하여 왕위를 교체시켰다.
또한[고려사(高麗史)]권 19, 명종(明宗) 3년(1173) 8월 경진 및 권 128, 정중부전에는「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 간의대부(諫議大夫) 김보당(金甫當)은 동계(東界)의 군사를 일으켜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을 토벌하고, 전왕(前王: 毅宗)을 복위(復位)시키려 하였다. 동북면 지병마사(東北面知兵馬事) 한언국(韓彦國)이 군사를 일으켜고 이에 호응하였으며, 장순석(張純錫) 등을 거제현(巨濟縣)으로 보내어 전왕(前王)을 모시다가 계림(鷄林: 경주)에 나가 머물게 하였다.」
라고 하여 의종(毅宗)은 명종(明宗) 3년 8월 경진에 계림, 즉 경주(慶州)로 옮겨갈 때까지 거제지역에서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그 기간은 의종 24년(1170) 9월부터 명종 3년(1173) 8월까지 만 3년이었다. 그 구체적 위치는 거제 둔덕면 거림리에 있는 폐왕성(廢王城)으로 파악하고 있다. 폐왕성이라는 명칭은 무신정변으로 의종(毅宗)이 폐하여 유배되어 한 때 머물렀음으로 붙여졌으며, 육지와 근접한‘견내량(見乃梁)’은 의종이 거제도로 유배되면서 건너 왔다고하여‘전하도(殿下渡)’로도 부르고 있다. 이 성은 둔덕면과 사등면의 경계지점에 위치한 야산 정상(野山頂上, 해발 326m)의 남서 사면(南西斜面)을 중심으로 평면 타원형에 가까운 형태를 띤 자연석 석축산성(石築山城)이며, 거제도 내에서는 육로교통과 국방상의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다.
또한 성채에는 입구가 열린 3곳의 문지(門址)가 있고, 성 안의 중앙에는 동서(東西)로 축대가 놓여 있으며, 남쪽에는 건물터와 우물터가 있다. 아울러 성 밖에는 서남쪽으로 토축(土築)의 나성(羅城) 흔적이 있다. 성의 축조수법이 전형적인 고려시대 산성축조형태를 나타내고 있고, 성곽의 안팎에서는 대부분 고려시대로 편년(編年)되는 기와(器瓦) 조각이 발견되었으며, 남쪽 성벽아래에 있는 경작지에서는 당시의 건물지와 함께 청자조각 등의 유물이 채집되었다. 또한[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비롯하여 후대의 많은 지리지나 문헌자료에서도 둔덕기성(屯德岐城)을 고려 종성(高麗宗姓) 또는 의종(毅宗)이 유배를 왔던곳으로 기술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 32, 경상도, 거제현, 고적(古蹟)에는 「둔덕 기성(屯德岐城)은 현(縣)의 서쪽 37리에 있으며, 석축(石築)의 둘레가 1,002척(尺)이고 높이가 9척이다. 성 안에는 못이 하나 있다.‘
본조(本朝, 朝鮮朝) 초기에 고려 종성(高麗宗姓)이 유배를 와서 머문 곳이라’고 세상에 전한다.」라고 하였고,[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권 4하, 경상도, 거제현, 고적에도 같은 내용이 기술되어 있으나 다만 석축의 둘레가 1,000척이라 하였으며,[ 여지도서(輿地圖書)]경상도, 거제부, 고적에는 부(府)의 서쪽 30리에 있다는 내용만 차이를 보이고 있다.[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11책, 거제, 고적에는「기성(岐城)의 유사(遺事)에‘고려 의종(高麗毅宗)이 정중부(鄭仲夫)에게 폐위되어 이 곳에 거처하였다.’고 한다.[ 려사(麗史)]에 나타난다.」라고 하였으며, [영남읍지(嶺南邑誌)]25책, 거제 고적조과[경상도여지집성(慶尙道輿地集成)]거제읍지, 고적에도 동일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그리고[한국근대읍지(韓國近代邑誌)]32, 경상도, 통영군지(統營郡誌), 성곽에는[고려사(高麗史)]의 의종 및 거제관련 기사까지 함께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거제의 둔덕면에 위치한 기성(岐城)은 두 가지의 관련 기록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는 조선 초기에 고려왕실 왕족(王族)의 유배지로 기술하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고려 무인집권기 의종의 유배 터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 두 내용은 거제지역사(巨濟地域史)와 모두 관련되는 사실이다. 조선초기 고려왕족의 유배사실은 다음의 조선시대 부분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겠지만, 조선 태조 즉위부터 고려왕조(高麗王朝)의 왕족을 거제섬으로 유배를 보내고 있었으며,[ 태조실록(太祖實錄)]과 같은 관찬서에서 이 내용이 확인된다. 이와 함께 앞서 언급된 것과 같이 고려 의종(毅宗)의 유배사실도[고려사(高麗史)]에서 확인되는 내용이다.
이같은 점을 고려한다면, 위에 언급된 읍지류의 내용은 이 두 가지의 역사적 사실을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 무인정권 초기에는 의종이 거제현으로 유배되어 이곳 둔덕의 기성에 머물렀으며, 조선 태조 때에는 거제섬으로 유배된 고려왕실의 왕족들이 이곳에 머물렀다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전자에 소개된 읍지류에 대하여 후자의 읍지류가 오해한 사실로도 파악될 수 있다. 조선 태조때 고려 왕족이 유배하여 기성에 머물렀던 사실을 후대의 읍지에서 고려 의종의 유배 터로 잘 이해하였을 개연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앞서 설명한 것처럼 기성이 의종의 유배지라는 사실이 연결되고 있음으로, 둔덕면의 기성은 의종의 유배지와 조선 태조대 고려왕족의 유배 터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더 합리적인 해석이 아닌가 생각한다. 따라서 둔덕면 거림리의 우두봉 중허리에 위치한 기성은 고려 의종이 유배되어 머물렀던 폐왕성(廢王城)이라고 추단할지라도 별 무리가 따르지 않을 것이다. 의종의 폐위와 유배, 문벌귀족의 살해와 숙청, 그리고 정중부·이의방·이고 등 무인정권의 내분과 정중부의 파행적인 정권운영은 의종 복위운동을 표면화하는 등 반무인정권의 정변을 일으키게 하였으며, 개경주변의 사원세력도 이 정변에 동참하였다.
의종복위정변 당시 거제지역에 유배되어 있었던 의종의 동태는 위에서 소개한[고려사(高麗史)]권 19, 명종(明宗) 3년 8월 경진 및 권 128, 정중부전에 기술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김보당은 남로 병마사(南路兵馬使) 장순석(張純錫)과 류인준(柳寅俊)을 거제도로 보내어 의종을 모시고 계림, 즉 동경(東京: 慶州)에 모셔다가 머물러 있게 하였다. 그러나 이 복위운동은 김보당 등이 잡히어 죽음을 당함으로써 실패로 돌아가고 10월에는 천민 출신인 이의민(李義旼) 등이 계림으로 출정하여 곤원사(坤元寺)에서 의종을 무자비하게 시해하였다. 의종의 시해사건은 정중부·이의방 무인정권의 정당성 내지 도덕성에 일대의 타격을주었으며, 이후 저항세력의 항쟁을 불러 일으키게 하는 요인으로도 작용하였다.
의종이 시해된 1년 이후인 명종 4년(1174)에는 서경 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의 난이 있었으며, 이 저항에는 서북지방의 많은 농민들도 참가하였다. 조위총의 세력이 평정된후에도 그 나머지 무리들은 명종 9년(1179)까지 저항을 계속하였다. 이와 함께 명종(明宗) 5년(1175)에는 남부지역에서도‘남적(南賊)’의 농민항쟁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으며, 그 대표적인 항쟁은 명종 6년 정월이래 공주 명학소(鳴鶴所)의 망이·망소이, 충남 서산 가야산의 손청(孫淸)과 이광(李光), 전북 익산의 미륵산적의 봉기였다.
또한 중앙의 문신 및 하급관료, 동정직 소유자들은 망이·망소이의 항쟁세력과 연계하여 무인정권을 타도하고자 하였다. 정중부·이의방 무인정권 아래에서의 농민항쟁은 외관에 임명된 집권무신의 부하나 문객(門客)이 오직 자신과 집권무신의 입지 및 경제적 기반의 구축과정에서 나타나는 외관간의 갈등, 무인정권 이전보다 더욱 가중된 민(民)에 대한 수탈이 그 핵심적인 요인으로 작용을 하였음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천민출신 장군인 이의민에 의한 의종의 시해충격과 그에 따른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신분질서의 동요 현상도 그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거제지역의 사람들은 이 남적의 농민항쟁에 직접 참여하였는지 분명하게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반정중부·이의방 무인정권의 경향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이는 거제지역 사람들이 의종이 거제의 둔덕면 거림리 기성, 즉 폐왕성에 머물 때까지 그 안전을 보장하였고, 그 성곽수축에 적극 동참하였으며, 거제에서 계림으로 옮겨갈때도 저항내지 방해보다 해상이동에 협조하였을 개연성이 높다는 점을 통해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견내량(見乃梁)’을 의종이 건너 왔음을 의미하여‘전하도(殿下渡)’라 부르며, 당시 거제사람들이 의종을 공경내지 경외하는 의식을 나타내고 있었다는 점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고려사(高麗史)]권 19, 명종(明宗) 5년11월 임자에 기록된“어떤 사람이 중방(重房)에‘조관(朝官)들이 남방의 적들과 변란을 일으킬 음모를 하고 있다.’고 허위보고를 하였다. 이날 도교승(都校丞) 김윤승(金允升)등 7명을 섬으로 귀양보내고 병부 상서(兵部尙書) 이윤수(李允修)를 거제 현령(巨濟縣令)으로 강직시켰다. 조관이란 문반(文班)을 가르키는 말이다.”라는 내용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무고(誣告)로서 허위 보고이지만 명종 5년에는 정중부 무인정권에 대한 견제 세력으로써 정치적으로 희생된 병부 상서 이윤수를 거제현의 수령인 현령으로 강직시킨 사실은 무인정권이 이 시기 거제현을 소외 군현지역으로 인식하였으며, 거제지역에서 반정중부 무인정권의 의식이 나타날 수 있는 소지를 제공하였음을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
[고려사(高麗史)]권 101, 송저전에는 명종대에 문관의 지방관 임명과 관련하여 탄핵을 받은 송저가 거제 현령(巨濟縣令)으로 강직되었으며,[ 고려사(高麗史)]권129, 최충헌(崔忠獻) 부 최이전(崔怡傳)에는 고종 10년(1223) 모든 문반을 살해하려는모의를 주동하였던 상장군(上將軍) 최유공(崔愈恭)이 거제 현령으로 강직되고, 그 다음에최이를 살해하려고 도모하였다는 내용이 있는데서 알 수 있듯이 정중부 무인정권부터최씨 무인정권까지도 거제섬은 변방지역 내지 소외지역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이다.
한·일 해상교통 거점이었던 거제지역은 고려말 왜구의 침략이 빈번해짐에 따라 보다 황폐화되어 갔다. 왜구(倭寇)라는 용어는 고려말부터 조선초에 걸쳐 우리나라와 중국 연안에서 구도(寇盜)행각을 범하던 일본인 해적집단에 대한 총칭으로 사용한다. 왜구는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에 침략하기 시작하였고, 고려시대에는[고려사(高麗史)]권 22, 고종(高宗) 10년 5월 갑자에“왜(倭)가 금주(金州: 지금의 김해)에 침구(侵寇)하였다.”라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고종 10년(1223)인 13세기 초엽부터 나타나고 있으며,[ 고려사(高麗史)]권 37, 충정왕(忠定王) 2년 2월 초에는‘왜구의 침입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라는 내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충정왕 2년(1350) 2월부터 본격화되었다. 고종 10년부터 시작된 왜구의 침략은 공양왕(恭讓王) 4년(1392)까지 169년간 총 529회에 이를만큼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특히 공민왕(恭愍王)·우왕(禑王) 때에 는 총 493회로써 침략빈도가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다. 초기 왜구의 침략 대상지역은 대개 경상도의 남해 연안지역에 집중되어 있었으나 공민왕대 이후에는 삼남지역을 비롯하여 경기·강원지역을 비롯하여 그 이북인 평안·함경지역까지 확대되는 등 전국의 연안지역과 내륙지역까지 횡행하였다.
[고려사(高麗史)]권 39, 공민왕 6년 5월 무자에는 왜구가 개경부근의 승천부(昇天府)와 강화(江華) 교동(喬桐) 예성강(禮成江)까지 침략함으로써 개경에 계엄령을 내릴만큼 고려의 전 지역을 위협하고 있었다. 고려시대 왜구의 침략이 빈번한 지역은 경남지역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연유는 경남지역이 왜와 가장 근접하고, 대일 해상교통의 거점이라는 지리적 조건과 함께 곡창지대로 직결하는 거점로이며, 남해연안의 중요 조운로(漕運路)라는 경제적 조건때문이라 하겠다.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對馬島)와 일기도(壹岐島) 및 그 주변의 5개 섬의 지형적 조건은 농업에 적합치 못하여 식량난이 심화되었으며, 이에 따라 우리나라와 중국 연안지역을 빈번하게 침략하여 인민(人民)과 식량을 노략질하였던 것이다. 인민의 노략은왜구의 부족한 노동력을 확보하거나 노예로 팔거나, 고려로 송환 때에 그 대가를 받기위한 목적이었다. 이처럼 왜구침략의 일차적 목적이 미곡과 인민의 약탈에 있었음으로 이들은 각 지방의 조세(租稅)가 집결되는 조창과 이를 운송하는 조운선박을 빈번하게 탈취하였다.
이로써 그들의 침략은 지리적·경제적으로 유리한 경상도 남해연안에 집중되었던 것이다. 왜구의 침략은 고려의 인적·물적 손실, 즉 생명과 경제적 피해를 심각한 상태로 만들었다. 민들은 경제적 약탈과 함께 생명의 위협이라는 이중고초를 겪어야 하였고,그 결과 생업을 잃고 유리 걸식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였으며, 그 가운데는 축성(築城)의 역사(役事)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거나 관군과 공조하여 항왜(抗倭)전선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13세기 이후 고려가 망할 때까지 거제지역에는 총 5차례의 왜구침략 기사가 나타나고있다.[ 고려사(高麗史)]권 22, 고종(高宗) 13년 정월과 권 37, 충정왕(忠定王) 2년 및권 39, 공민왕(恭愍王) 10년, 그리고[고려사(高麗史)]권 41, 공민왕 18년 및 권 137,신창(辛昌)에는 각각「(고종 13년) 왜인(倭人)이 경상도 연해의 주군(州郡)을 침략하였다. 거제 현령(巨濟縣令) 진용갑(陳龍甲)이 수군을 거느리고 사도(沙島)에서 교전하여 적의 목을 베었더니 적들이야간에 도망하였다.」합포(合浦: 현 마산) 천호(千戶) 최선(崔禪)과 도령(都領) 양관(梁琯) 등이 이를 격파하고 300여 명의 적을 죽였다. 왜구가 우리 나라에 침입한 것이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공민왕 10년) 여름 4월 병신에 왜적이 고성(固城), 울주(蔚州), 거제(巨濟)에 침입하였다.」「(공민왕 18년) 가을 7월 신축일에 거제(巨濟)·남해현(南海縣)에 있는 귀화한 왜인(倭人)들이 배반하여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신창) 8월 왜적이 거제도(巨濟島)에 침입하였다. 진무(鎭撫) 한원철(韓元哲)이 적선 1척을 노획하고 적 18명을 죽였다.」라고 하여 고종 13년(1226)부터 창왕(昌王) 연간(1389)까지 총 5차례만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횟수는 거제지역과 직접 관련된 기록에 불과하며, 거제지역이 대일 해상교통 거점이므로 이 지역을 경유하는 경우까지 고려한다면 그 횟수는 훨씬 많았을 것이다. 또한 충정왕 2년(1350)에는 300여 명의 왜구가 사살될 만큼 대규모의 침략도 나타나고 있다.
이런 사실은 곧 거제지역의 피해상황도 그에 비례하여 다른 지역 못지않게 심각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로써 거제지역은 군현민의 포로 및 사상(死傷)과 같은 인적 기반, 연안어업 자원 및 농업생산과 같은 경제적인 생산기반이 크게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이후에 왜구의 피해를 입은 거제현민의 실체는 원종 12년(1271) 인근 내륙 군현으로 옮겨가지 않았던 사람들과 옮겨 갔으나 거제지역을 왕래하면서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던 거제현민, 그리고 거제주변의 군현민으로 본섬을 거점으로 생업을 영위해 간 군현민들이었을 것이다.
아울러 이로 인하여 남해연안의 조운 운영에서도 큰 방해를 받았을 것이다. 거제지역은 고려시대 경상도지역의 핵심적인 해상 조운로이었다.[ 세종실록(世宗實錄)]권 150,지리지, 경상도에는“도내(道內, 경상도)의 공부(貢賦)는 각각 가까운 곳에 따라 김해(金海)의 불암창(佛巖倉), 창원(昌原)의 마산창(馬山倉), 사천(泗川)의 통양창(通洋倉)등으로 나누어 수송하여 해안을 따라 전라(全羅)·충청도(忠淸道)의 해로(海路)를 거쳐서 서울에 송달한다.”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해상 운송체계는 이미 고려시대에 마련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남해연안의 해상교통 중심지였던 거제지역은 조운의 중요 거점지역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이 시기 거제지역은 왜구침략의 중요 대상지역이 되었으며, 그에 따른 인적·물적 기반이 많은 피해를 입었음이 분명하다. 이와 함께 불교문화재와 같은 문화유산의 탈취도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에 거제지역에 침략한 왜구(倭寇)에 대해 고려정부와 거제섬에서 생업에 종사하였던 사람들은 적극적인 대응전략을 구사하였다. 위의 자료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우선적극적인 실전으로서의 교전(交戰), 왜구의 귀부(歸附)정책을 구사하였으며, 교전에는 관군과 함께 주변지역의 토착세력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이와 함께 거제지역이나 주변지역의 하층 군현민들도 성곽의 축조나 실전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여 그들자신의 삶의 터전과 민족적 자긍심을 수호하고 있었을 것이다. 한편 공민왕 18년의 기사 내용처럼 귀화한 왜구를 거제섬을 비롯한 남해지역에 거주시키기도 하였다.
이같은 응집된 힘을 통한 적극적인 대응전략도 고려말 왜구의 빈번한 침략을 완전 격퇴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게 되었으며, 그 결과 거제지역의 피해가 막대하여 황폐화가가속되고 왜구의 내륙 기지화처럼 되었다. 이에 고려정부는 거제의 군현민을 인근 내륙지역으로 집단 이주시키는 조치를 취하기에 이르렀다. 거제현의 관사조직과 그 공간의이주, 현민들의 사민(徙民)조치는 왜구의 침략이 본격화되는 충정왕 2년(1350)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취해졌다.
[고려사(高麗史)]권 57, 지리지, 경상도(慶尙道), 진주목(晋州牧), 거제현(巨濟縣)에는「원종(元宗) 12년 왜구로 인하여 땅을 잃었음으로 거창현(居昌縣)의 가조현(加祚縣)에 붙어 살았으며, 충렬왕(忠烈王) 때에 관성(管城)에 병합하였다가 곧 다시 원래대로 복구하였다.」라고 하여 원종 12년(1271)에 왜구의 혹독한 피해로 인하여 거제현의 관사조직과 거제 현민(巨濟郡民)을 거창현의 속현인 가조현으로 옮겼다고 하였다. 또한[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 31, 경상도(慶尙道), 거창군(居昌郡), 고적(古跡) 및 권 32, 경상도(慶尙道), 거제현(巨濟縣), 고적(古跡)에는「아주촌(鵝洲村) : 거제(巨濟)가 가조현(加祚縣)에 붙어 살았을 때 본도(本島) 안의 속현(屬縣) 및 역(驛)·원(院) 등을 가조현 경내에 아울러 임시로 설치하였다. 아주현은 군(郡·거창군)의 동쪽 10리 지점에 있고, 송변현(松邊縣)은 무촌역(茂村驛)의 남쪽 5리 지점에 있으며, 오양역(烏壤驛)도 가조현의 서쪽에 있었다. (그리하여) 사는 백성들이 지금도 그대로 일컫는다.」
「명진폐현(溟珍廢縣) : … 원종 때에는 왜(倭)를 피해, 육지에 나와서 진주의 영선현(永善縣)에 우거하였다. 본조 공정왕조(恭靖王朝)에 강성현(江城縣)과 합병하여 진성(珍城)이라하였고, 세종조에는 본 섬(거제도)에 다시 내속(內屬)시켰다.」라고 하여 거제현이 옮겨 가면서 그 소속의 속현과 역·원 등을 함께 옮겨 설치하였다. 그리고 거제현의 치소, 그 속현인 아주현(鵝洲縣)·송변현(松邊縣), 오양역(烏壤驛)을 비롯한 역(驛)·원(院)은 가조현의 경내에 임시로 설치하였으며, 명진현은 진주목의 속현인 영선현(永善縣)으로 옮겨 갔다. 이 때는 거제현의 토착세력인 토성 이족(土性吏族)과 함께 하층 군현민까지 포함되어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처럼 원종 12년 거제현과 그속현 및 역·원을 인근 내륙지역인 거창군의 속현인 가조현과 진주목의 속현인 영선현에 옮긴 배경은 왜구의 침략에 따른 거제 현민들의 생명과 재산피해를 방지하고, 남해연안 지역에서의 왜구침략의 기지화를 차단함에 있었다. 그런데 그 근본적인 연유는 거제지역의 사람들이 삼별초 항쟁세력과 연대할 수 있는 소지를 차단함에 있었던 것이다. 이는 우선, 원종 12년 경에는 아직 왜구의 침략이 빈번하지 않았으며, 본격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고종 10년부터 시작되어 충렬왕대까지 이르는 왜구의 침략은 간헐적으로 지속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 시기까지 지속된 왜구의 침략은 그 침입규모나 횟수, 그 피해상황에 있어서 크게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이 시기에 있어서 고려와 일본은 진봉무역(進奉貿易)이라는 형태의 교역관계를 통하여 일본의 경제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왜구의 침략은 국지적인 형태에 불과하였으며, 고려정부로서 크게 우려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또한 이 시기 왜구의 침략규모나 형태도 계획적인 약탈이나 조직적인 전투수행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나라와 거제지역에 있어서 왜구의 침략이 본격화되고 피해규모가 크게 나타나는 시기는 충정왕 2년 이후이다. 그러므로 거제지역이 옮겨 가는 원종 12년(1271) 전후에는 우리 나라 및 거제지역에는 왜구의 침략사실이 나타나지 않았으며, 그 피해도 거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시대적 조건을 고려한다면 원종 12년 거제현을 인근 내륙지방으로 이주시킨 직접적인 연유는 위의 자료에서 나타나고 있는 내용과 같이 왜구의 침략이라는 기록을 그대로 인정하기 어려운 점이 있을 것이다.
「항차 지금 역적들(三別抄:항쟁군)이 날이 갈수록 번성하여 그 피해가 금주(金州:지금의김해), 밀성(密城:지금 밀양)에까지 미치었고, 게다가 또 남해(南海), 창선(彰善), 거제(巨濟), 합포(合浦: 지금 마산), 진도(珍島) 등 해변 부락에는 모두 습격·약탈을 당하였기 때문에 일체의 곡물 징발사업은 보장하기 힘들게 되었다.」라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어 원종 12년 3월에는 역적으로 표현·기술된 삼별초(三別抄)항쟁군이 거제현을 비롯한 서·남해 해안 및 내륙지역을 그들의 세력권에 편입시키고 있었다.
또한[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 31, 경상도(慶尙道), 거창군(居昌郡) 속현 가조현(加祚縣)에는「원종 때에 거제현(巨濟縣)이 삼별초(三別抄)의 난을 피해서 관아도 여기(加祚縣)에 우접하고 그대로 거제라 일컬었다. 우리 세종조(世宗朝)에 와서 거제는 본래 섬으로 돌아가고 현도 또한 거창으로 도로 예속되었다.」라고 기록하여 원종 때에 거제현을 거창군의 속현인 가조현에 옮긴 연유는 삼별초 항쟁세력의 침략을 피하기 위함에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원종 12년 거제현과 그 속현 등의 관아와 관사조직의 이주 및 사민정책은 삼별초 항쟁세력과 직결되어 있음이 분명하다고 할 것이다.
원종 11년(1270) 5월 어사 중승(御史中丞) 홍문계(洪文系)와 직문하성사(直門下省事) 송송례(宋松禮) 등이 임유무(林惟茂) 등의 무인집권을 종식시키는 정변이 일어나 왕권회복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 왕권회복은 몽고의 후원하에 이루어짐으로써 몽고에 대한 고려의 항복과 종속성은 점차 분명한 현실로 대두되었다. 아울러 몽고에서 귀국한원종이 개경환도를 선언하였고, 무인정권에 의하여 설치되고 대몽항전의 유력한 무력기반이 되었던 삼별초군의 조직체계는 혁파되었으며, 이에 삼별초는 그 수용을 거부하였다.
몽고와의 굴욕적인 강화교섭과 개경환도에 불만을 품고, 몽고에 대한 지속적인 항전, 개경환도 정부의 부인(否認), 고려왕조의 정통성 및 자주독립국의 고수를 주창하면서 강화경(江華京)에서 일어난 삼별초 항쟁군은 왕족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을 황제로 추대하고 전남 서해안의 진도(珍島)를 거점으로 삼아 진도정부(珍島政府)를 수립하였다. 이들 삼별초 항쟁군은 민족적 모순의 극복과 정치체제의 개혁을 통한 변혁의지를 뚜렷이 하였던 유망 농민층의 요구에 부응하고 있었다.
이들이 수립한 정부는 고려왕조의 정통성을 계승한 정통 고려정부로 자칭하였는데, 이는 당시 개경정부와 대응하며 일본 등 국제 교린관계의 수립에 따른 필요성과 함께, 우리 민중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함이었다. 이들은 대몽항쟁의 지속의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원종 12년에는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여 자신의 정부가 정통 왕조임을 표명하고 몽고에 대한 공동전선의 구축을 타진하기도 하였다. 이들 진도정부는 우수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남해 및 서해 연안지역을 확보하여 연안의 해상 조운로를 차단시켰으며, 개경까지 출몰하여 개경정부와 몽고를 크게 위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원종 12년 진도가 여·몽연합군의 치밀한 공격으로 함락되고, 잔존 세력이 제주도로 옮겨 항전을 지속하였으나 원종 14년(1273) 이들마져 진압되고 말았다. 이로써반몽세력은 일거에 제거됨으로써 고려의 종속화는 심화되었던 것이다. 여·원 연합군의 일본동정이 추진되었고, 그에 따른 삼남지역의 경제적·군사적 동원이라는 고역은 현실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삼별초의 항쟁세력은 유망 농민층의 참여와 적극적인 협조를 받았으며, 지방의여러 주현을 통괄하기도 하였다. 삼별초 항쟁세력은 진도를 비롯하여 제주·나주·전주등 전라도의 도서해안과 내륙지역 및 거제·남해·마산·동래·김해·밀양·청도·상주등 경상도의 도서해안과 내륙지방까지 자신의 세력권을 확대시켜 나갔다. 특히 원종 12년 1월에는 밀양·청도 등지를 비롯한 경상도 지역과 개경 등에서 삼별초 항쟁세력을호응하는 봉기가 일어났으며, 그 지방의 토착세력과 군현민 및 유망 농민층이 가담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지방 주군의 관원 가운데는 삼별초 정부를 지지하는 수가 늘어나고 있었으며, 삼별초에 호응하지 않는 지방관은 군현민에 의해 피살을 당하거나 삼별초 항쟁군에게 체포되어 철저한 응징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같은 역사적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원종 12년 전후에 있어서 개경정부가 직면한 최대의 과제는 삼별초 항쟁세력에 대한 대응문제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남해연안의 해상교통 거점인 거제현이 삼별초 항쟁군의 세력권에 편입되어 있었으며,그에 따라 해상조운의 방해를 받아 재정의 약화를 초래하고 있었다. 특히 원종 12년에는 밀양지역에서 삼별초 호응봉기가 발생하여 거제지역의 주변인 김해지역까지 확대되고 있었으며, 또한「고려첩장 불심조조(高麗牒狀不審條條)」라는 고문서의 기록 내용에서 확인되듯이 삼별초 정부가 일본과 공동전선을 구축하기 위한 교섭을 타진하고 있었다.
이로써 개경정부 내부에서는 한·일 해상교류의 거점이었던 거제지역을 비롯한 남해연안지역을 삼별초 항쟁군의 세력권에서 분리시키기 위한 필요성과 긴박성이 크게 대두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개경정부는 거제현을 비롯한 주변 남해연안 군현민을 인근내륙지역으로 옮기게 함으로써 남해 연안지역에서 있어서 삼별초 항쟁군의 호응세력을 약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고려사(高麗史)]권 27, 원종(元宗) 13년(1272) 11월에는「원종 13년 11월에 삼별초(三別招)가 거제현(巨濟縣)에 쳐들어 와서 전함(戰艦) 3척을 불 태우고 현령(縣令)을 잡아갔다.」라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거제현을 인근 내륙지역으로 옮긴 다음 해인 원종 13년에는 삼별초 항쟁군이 거제지역으로 쳐들어 와서 전함 3척을 불태우고 현령을 잡아갔다. 이같은 군사행동은 원종 12년 거제를 인근 내륙지방으로 옮기는 개경정부의 정책을 거제현의 지방관이 동조하고, 삼별초 항쟁군에 대한 진압군의 군사적 거점을 제공하는 등삼별초 항쟁군에게 보인 비협조적 태도에 대한 응징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짐작할수 있다.
삼별초 항쟁기에 있어서 거제지역은 일정 기간동안 삼별초 정부의 세력권에 편입되어 있었다. 이들 가운데는 적극적으로 호응한 세력들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 시기에는 원(元)나라의 과중한 군량요구와 개경정부의 가혹한 수취에 따라 합포·고성·거제를 비롯한 남해연안 지역에 있었던 군현민들의 생활상이 피폐화되어 갔다. 이같은 조건으로 인하여 다른 동조지역과 마찬가지로 거제지역의 토착세력과 하층 군현민들도 삼별초 항쟁군에게 적극적으로 호응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거제현을 인근 내륙지역으로 옮긴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삼별초 항쟁군이 여·원 연합군을 심한 곤경에 몰아넣을 정도로 강력한 해상군사력을 가지고 개경정부를 위협하면서 지속적인 항몽투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거제지역을 비롯한 남해연안 지역사회의 토착세력과 하층 군현민이 적극적으로 호응·협조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도 거제지역이 전통적으로 해상교통의 중요 거점이었다는 사실과 함께 사회·경제적 모순과 민족적 모순을 극복하려는 의식과 실천노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다.
물론 원종대에는 몽고의 강력한 요구였던 일본의 귀부문제가 제기됨에 따라 한·일해상교통의 거점이었던 거제지역이 일시 주목되기도 하였다.[ 고려사(高麗史)]권 26,원종 8년 정월의“송군비(宋君斐), 김찬(金贊)이 몽고의 사신과 더불어 거제도 송변포(松邊浦)에 이르러 풍파가 험한 것을 보고 두려워서 드디어 돌아왔다.”라는 내용이 그것이다.
그러나 삼별초 항쟁군이 와해된 이후에도 거제현은 원래대로 복귀하지 못하고, 그 존립의 위기는 지속되어 갔다. 이 시기이후 지속적인 왜구의 침략과 함께 여·원(麗元) 연합군의 일본동정(日本東征) 준비에 소용되는 막대한 인적·물적 자원은 고려정부, 특히 삼남(三南)지역이 부담하였다. 이 과정에서 거제현을 비롯한 남해연안 지역사회의 군현민들은 대거 몰락하였으며, 거제지역도 더욱 피폐화되어 갔던 것이다. 또한 충렬왕 때는 옮겨갔던 거제현이관성(管城)에 병합됨으로써 그 독립적인 행정체계의 존립기반이 일시적으로 해체되기도하였다.
그러나 곧 혁파되어 복구됨에 따라 그나마 독립 지방행정 군현 단위로써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려말까지 거제섬은 크게 황폐화되어 있었다. [고려사(高麗史)]권 112, 조운흘 전「우리나라는 바다로 왜국(倭國)과 가깝고 육지로는 오랑캐 땅과 인접되고 있으니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경은 서해(西海)로부터 양광(楊廣), 전라(全羅), 경상(慶尙)까지 바닷길이 거의 2,000여 리가 됩니다. 바다에는 사람이 살 수 있는 큰 섬은 대청(大靑), 소청(小靑), 교동(喬桐), 강화(江華), 진도(珍島), 절영(絶影: 현재 부산시 영도구), 남해(南海), 거제(巨濟) 등의 큰 섬이 20곳이나 있으며, 작은 섬들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 섬들은 토지가 비옥하고 어염(魚)의 자원이 있는데 지금은 모두 황폐되어 경영하지 않으니 한심한 일입니다.」라고 하여 고려말 우왕(禑王) 때까지 거제섬은 황폐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서해도 도관찰사(西海道都觀察使) 조운흘은 고려의 군사적 전략과 연결시켜 거제섬의 농업생산을 바롯한 산업생산력을 복구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였으며, 우왕(禑王)이 이 방안을 수용하여 도당에 회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시행이 불투명하여 거제섬의 복구는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 같다. 그 결과 옮겨간 거제현과 그 속현의 관아 및 지역 사람들은 고려말까지 거제섬으로 복귀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고려시대에 있어서 거제지역은 남해연안의 변방지역으로 재편됨으로써 민족사에 있어서 그 역할이 크게 약화되어 왕족와 관료 및 고승의 변방유배지, 반정부의 항쟁지역, 빈번한 왜구의 침략지역, 삼별초 항쟁의 관련지역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특히 고려의 성립과 더불어 대일교섭이 소원해짐에 따라 한·일 해상교류의 거점 교통로로서의 기능이 크게 축소되었다. 12세기 초기이후 무인집권기에도 이들 지역은 변방지역으로 인식되고 있었고, 고려후기 삼별초 항쟁군의 세력권과 왜구침략 및 여·원 연합군의 일본동정(日本東征)에 있어서 최일선에 노출됨에 따라 거제섬의 피폐화가 가속되었고, 거제관아와 그 지역민들은 인근 내륙으로 옮겨가서 더부살이를 하였으며, 일시적이나마독립적인 지방행정 단위의 존립도 위기를 맞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같이 열악한 조건에서도 거제현민들은 민족사와 지역사의 전개과정에 있어서 그들의 역할을 유지하면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남해 연안지역의 해상조운로, 한·일 교섭의 거점지역으로서의 역할은 그나마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개경정부의 사회·경제적인 모순구조에 저항하고, 왜구나 몽고의 침략에 대한 민족적 독립성을 수호하기 위한 의식을 가지고 실천하면서 지역사와 민족사의 발전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유배의 땅이라는 변방의 입지 조건을 오히려 중앙의 고급문화를 수용하여 자기지역 문화와 의식을 발전시키기는 계기를 삼기도 하였다. 이런 점이바로 고려시대 거제현민들의 저변에 흐르던 역사·문화적 성격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