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도(生死島) 1-20
『이, 있소. 그 분은 두달 전 신임 성주로 부임해 왔소... 그런데 당신
은 누구요?』
『초유성.』
사나이의 검이 비정하게 그어졌다.
『끄으... 당신이... 우객...』
목을 꺾고 넘어지는 관병의 입에서 고통과 경악의 신음이 흘러 나왔다.
무심하게 그를 바라보던 사나이가 죽은 자의 젖은 옷깃에 검을 닦고 돌
아섰다.
우객(雨客) 초유성(楚流星). 이 이름은 최근에 중원 천하를 떠들썩하
게 하고 있는 한 암살자의 이름이었다. 무슨 까닭인지 그는 명조의 이름
난 장군이거나 고관대작들만을 골라 암살하고 있었다. 그의 손에 죽어간
명의 대신들만 해도 벌써 십여 명이나 되었다. 모두 비가 내리는 날에
이루어진 암살이었다.
관부와 도찰원(都察院)에서는 그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우객(雨客). 어느덧 사람들은 그를 그렇게 부르며 제각기 다른 눈으로
그의 움직임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썩은 관리들은 두려움으로 떨
었고, 민초들은 은근한 기대감으로 그를 보았다.
비가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신비의 암살자. 그가 오늘은 삭
주성 외곽의 마흡현 상건강가에 나타난 것이다.
* * * *
칠흙 같은 어둠 속에 삭주성의 성곽이 거대한 괴물처럼 웅크리고 있었
다. 여전히 밤을 적시며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 속에서 가볍게 성을 타
넘는 검은 그림자 하나가 있었다. 가볍고 조용한 몸놀림이 마치 흐르는
물 같이 유연했다. 막히면 돌아가고, 돌아갈 수 없으면 뛰어 넘었다.
삭주성의 삼엄한 경계와 순찰조의 이목을 그는 전혀 의식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한 줄기의 물이 소리 없이 스며들 듯, 그렇게 성 깊숙이 스며든
그의 신형이 다시 어둠으로 변해 버렸다.
『몽여란은?』
『으으... 제발... 성주님의 거처는 저기 북쪽 화정각... 흐윽!』
쓰러진 순찰무사의 옷자락에 검날을 씻으며 북쪽을 바라보는 사내의
눈빛이 우울하게 젖어 있었다.
『수련(水蓮), 지켜봐 주시오. 그 자가 저곳에 있다 하오.』
낮게 웅얼거리는 그의 어조에서 축축한 어둠이 배어 나왔다.
성주 몽여란의 측근 호위 무사들은 모두 일백 인이었는데, 그들이 오
늘밤 화정각(和政閣)의 경비와 순찰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삭
주성 내 일만의 정병들 중에서도 가리고 가려 뽑은 용사들이었다. 십 보
의 간격을 두고 화정각을 돌고 있는 그들의 형형한 눈빛이 어둠 속에서
횃불처럼 빛났다.
일조(一助) 다섯 명의 순찰대가 황국 화원 앞을 지나간 순간, 그들의
뒤를 소리 없이 스쳐 지나가는 한 줄기 바람이 있었다. 다섯 장 간격을
두고 뒤따르고 있던 또 하나의 순찰조가 밤비에 젖어 흔들리는 황국의
이파리에 잠시 시선을 빼앗긴 순간이었다.
* * * *
황촉불이 일렁이는 화려한 불 그림자 속에서 여인은 파도가 되어 출렁
이고 있었다. 천장에 가득한 연꽃 무늬가 여인의 몽롱한 눈 속에서 어지
럽게 맴돌았다. 불빛을 받아 은은히 반짝이는 도화 빛 휘장을 움켜쥔 여
인의 고운 손이 파르르 떨렸다. 신음 같기도 하고, 웅얼거림 같기도 한
단 숨결이 열락(悅樂)의 화원(花園)을 떠도는 바람처럼 불어갔다.
창 밖의 어둠 속에서는 그칠 줄 모르고 비가 내리는데, 장지문에 젖어
드는 조용한 빗소리와 습기처럼 침상을 적셔 가는 그녀의 신음이 점차
거세지고 있었다.
『조금 더 기다려라 추추. 좋은 밤이 아니냐...』
구름이 되고, 비가 되고, 파도가 되어 함께 출렁이던 사내가 여인의
귓밥을 깨물던 머리를 들고 낮게 속삭였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높아질
수록 여인의 얼굴에 떠오른 환희는 고통에 가까운 황홀함으로 커져갔다.
그것을 바라보는 사내의 얼굴이 땀과 격정으로 뒤엉켜 번들거리고 있었
다.
온몸을 가늘게 경련하며 몸부림치던 여인의 손가락들이 사내의 건장한
등줄기에 파고든 순간이었다.
『몽여란, 나는 더 기다릴 수 없다.』
그 달구어진 호흡을 끊어 버리는 우울한 목소리가 있었다.
『으헉! 누, 누구...』
막 폭풍이 되어 몰아치려던 사내의 입에서 놀람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순간, 그는 여인을 밀쳐버린 채 바람개비처럼 돌아 침상 건너로 내려섰
다. 흥분이 가시지 않은 충혈된 눈으로 두리번거리는 그의 얼굴에 놀람
과 당황의 빛이 떠올랐다. 휘장 건너의 어둠 속에서 우수에 젖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아름다운 사내 하나가 있었던 것이다.
『아아..』
밤비처럼 젖어 있는 사내의 음울함과 그 아름다운 모습에 나신의 여인
추추의 입에서 깊은 탄성이 흘러 나왔다.
『자객이냐!』
문득 정신을 차린 몽여란이 그렇게 소리치며 어느새 한 자루 장검을
뽑아 후려쳐 왔다. 수많은 전쟁터를 누벼왔던 백전의 노장답게 그의 검
은 빠르고 힘이 있었다.
쨍-!
맑은 검명(劍鳴)이 울렸다. 가볍게 몽여란의 일검을 받아넘긴 사내의
얼굴이 더욱 창백하게 굳어졌다. 몽여란의 얼굴에 언뜻 공포가 어렸다.
『너, 네놈은... 우객?』
피이잉-
대답 대신 초유성의 일검이 휘파람 소리를 내며 날아들었다. 미처 그
것을 느끼기도 전에 싸늘한 검인이 벌써 몽여란의 목줄기를 눌렀다. 그
는 이처럼 빠르고 깨끗하며 가벼운 검격을 본 적이 없었다. 몽여란의 눈
에 빠르게 절망과 두려움과 체념의 빛이 스쳐갔다.
가만히 그것을 들여다보던 초유성이 속삭이듯 말했다.
『한 가지만 묻자.』
이미 넋을 빼앗긴 몽여란이었다. 그가 정신 없이 턱을 끄덕였다. 그 바
람에 목줄기가 차가운 검인에 베어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몽여란은
그것도 느끼지 못했다.
『수련이라는 여인을 알고 있겠지?』
『으... 그녀를 어찌...?』
『묻는 말에만 대답하면 된다.』
검인보다 차가워진 초유성의 눈이 몽여란의 흔들리는 눈길을 붙들었다.
그것 앞에서 몽여란은 다시 정신 없이 턱을 끄덕였다.
『아, 알고... 있소...』
『좋다, 말해라. 그녀에 대해 네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격정으로 초유성의 음성이 가늘게 떨려 나왔다. 몽여란은 더욱 음울하
게 젖어들고 있는 초유성의 눈을 바라보며 정신 없이 말하기 시작했다.
-- 강소 순무로 있을 때 장극하라는 자로부터 한 여인을 상납 받았소.
남쪽 해안의 진장(津將)에 불과한 자였는데 그가 데려온 수향이라는 여
인은 다시 볼 수 없는 미인이었소이다. 나는 기꺼이 그녀를 애첩으로 삼
았소. 그 대가로 장극하가 고달픈 진장의 처지에서 도독부의 참장으로
승진할 수 있도록 모든 힘을 다 써 주었으니 충분한 대가를 치른 셈이요.
나는 그녀에게 미쳐 버렸소. 그 아름다움에 눈이 멀었고, 그 현숙함에
넋을 빼앗겼소. 내 생전에 처음 보는 여자였고, 앞으로도 다시 보지 못
할 여자가 틀림없었소이다.
그런데 육 개월 전, 휴가를 받아 강소성에 내려온 병부상서 양처랑이
나의 집에 들렀다가 그녀를 보게 되었소. 그 또한 한 눈에 그녀에게 마
음을 온통 빼앗겼소이다. 그 뒤로 그는 끊임없이 나에게 그녀를 달라고
요구해왔소. 나는 완곡히 거절했지만 거듭되는 그의 요구를 무시할 수가
없었소. 그는 병권을 장악하고 있는 최고의 대신이었던 것이니 내가 어
찌 그의 청을 뿌리칠 수 있었겠소이까.
나는 울면서 그녀를 양처랑의 마차에 태워 보냈고, 그 대가로 얼마 전
삭주 성주로 영전하여 부임해 온 것이요. --
몽여란의 말을 듣는 동안 초유성의 눈은 더욱 어둡고 우울하게 젖어들
었다.
『그녀.. 그녀는 그렇게 너희들의 노리개가 되어 이리저리 팔려 다녀서
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탄식하며 말한 그가 망설임 없이 몽여란의 목을 그었다.
『그녀를 농락한 자들은 그게 천자라고 해도 용서하지 않는다.』
『아아악-!』
초유성의 말이 끝났을 때 몽여란의 목이 덧없이 꺾였다. 왈칵 솟구쳐
나온 피가 몸을 적시며 뿌려지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여인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터뜨렸다. 힐끗 그녀를 바라본 초유성이 천천히 몸을 돌렸
다.
『자객이다!』
호각 소리와 함께 관병들의 어지러운 발자국소리가 새벽을 뒤흔들며
쏟아져 나왔다. 의식을 잃어 가는 여인의 눈에 가볍게 창문을 뛰어 넘어
사라지는 초유성의 뒷모습이 담겨졌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즐독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
다녀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히 잘봅니다
감사 즐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