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라진다는 것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누구나 그러할 것이다. 나도 가끔 사라짐에 대해 생각해 본다.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증명하고 인정받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이라면, 이따금씩 그런 보편적 욕망의 틈새를 흔적 없이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비집고 들 때가 있다. 그것도 욕망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런 욕망의 정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자존감의 부족이나 자기모멸감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아니면, 어차피 이 세계에 영원한 건 없음을 알면서도 영원을 추구하는 욕망을 아이러니하게도 지니고 있는 인간 존재에 대한 반발 같은 것일까? 어쩌면 이것 또한 영원성에 대한 또 다른 방식의 추구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원한 존재를 꿈꾸듯 그 반대급부로 영원한 소멸을 꿈꾸는 것 말이다. 그 근저에는 일종의 허무주의 내지는 염세주의가 흐르는 것 같기도 하다. 무(無)로 돌아간다는 생각, 또는 세상에 대한 지독한 환멸 같은 것. 한편으로는 일종의 염결성이 작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더러운 세상에 적극적으로 맞서 세상을 바꿔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 조용히 사라지고 싶어 하는 심리가 내면에 흐르는 것일 게다.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에 나오는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라는 발화의 심층에 작용하는 마음 상태도 그런 것이 아닐까? 더러운 세상 따위 버리고 사랑하는 여인 ‘나타샤’와 ‘흰당나귀’를 타고 먼 산골의 ‘마가리’(오막살이)에 가서 살고 싶다는 바람은 더러운 세상과 자신을 격리시키려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사라지는 것을 꿈꾸는 것일 게다. 아무도 자신을 아는 이가 없는 곳에 가서 살고 싶다는 바람도 이와 비슷한 심리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존재함 못지않게 사라짐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해온 듯하다. 특히 시라는 장르에서는 그래 왔다. 대체로 주변적이었고 중심의 담론과는 거리를 유지해온 시의 화법은 늘 사라짐의 매혹에 빠질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죽음 충동과 통하는 것이기도 하며, 자기 존재의 부정을 통해 오히려 존재의 의의를 찾고 싶은 특별한 욕망이기도 하다. 지난 계절의 시를 읽으면서 유독 눈길을 끄는 시들은 그런 사라짐에 대해 개성적인 발상이나 시선을 보여주는 시들이었다.
2. 지리멸렬한 일상과 증발의 욕망
지리멸렬한 일상을 받아들이고 견디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 어쩌면 일상이 지리멸렬해지는 바로 그 순간부터 우리는 나이를 먹기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은 물리적인 나이와는 다른 문제이다. 오래 전에, 지금처럼 봉준호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 전에 그가 만든 단편영화 <지리멸렬>을 보고 나는 그 이름 석 자를 기억하게 됐다. 세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그 영화는 그야말로 지리멸렬한 우리네 일상을 기가 막히게 잘 보여주고 있었다. 서로 물고 물리는 세 개의 에피소드를 통해 봉준호는 나름대로 고귀하고 권위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존재들을 여지없이 허물어뜨린다. 그 무너짐은 웃음을 동반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의 지리멸렬함을 확인하게 해줌으로써 씁쓸함을 남겼다. 생각해 보면 지리멸렬한 일상이야말로 ‘사라지고 싶다’거나 ‘떠나고 싶다’는 욕망을 부추긴다. 지리멸렬한 일상이 끝없이 반복된다고 할 때 그 반복을 견디기는 쉽지 않다. 변화를 꿈꾸는 영혼은 지리멸렬한 일상을 어떻게든 벗어나고자 애쓸 것이다.
때론 설탕이 녹아내리고 때론 기적처럼 찻잔이 엎어진다
식탁 위에 눌어붙는 설탕
설탕은 남는다
초인종을 하나하나 누르다가 멈춘 여호와의 증인처럼
나는 서 있다 새카만 결정이 내 앞에 놓여 있다
증발하라 증발하라 속으로 외치며 낮과 밤으로 뒤엉킨 전선과 기울어진 전신주와 깨진 가로등을 믿으면서
정수리를 두 쪽으로 가르는 바람을 맞으며 갔지
수백 페이지 중 한 장이 넘어갔지 두꺼운 양장본에 발등을 찍혔지
설탕에 절여진 석양빛 그 아래 고인 흙탕물과 방치된 자동차와 다닥다닥 붙은 집들
대개 이렇게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김승일, 「설탕과 여호와의 증인」(서정시학, 2008 여름호) 전문
그날이 그날 같은 일상을 기습하는 초인종이 울릴 때가 있다. 지치지도 않고 집집마다 찾아드는 저 신념에 찬 발걸음. ‘여호와 증인’의 저 굳건한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얼마나 완강한 믿음이기에 수많은 냉대와 무관심을 무시하며 끝없이 초인종을 누를 수 있는 것일까? 꾸벅꾸벅 졸거나 음악을 듣거나 문자 주고받기에 열중한 사람들의 틈새를 흔드는 여호와 증인들의 목소리가 지하철에 울려 퍼질 때도 있다. 누구 하나 관심을 보이지 않고 하던 일에 계속 열중하고 있지만 그래도 저들은 끄떡하지 않는다. 저들의 신념에 찬 소음은 이미 지하철 풍경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저 완강함은 대체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지독한 공포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의 <미스트>라는 영화를 뒤늦게 보면서 그런 생각을 잠시 했었다. 원래 지리멸렬한 일상과 죽음의 공포의 틈을 파고드는 것이 사이비 종교가 아니겠는가? 여호와 증인들의 저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강변도 그 근원은 공포에 가 닿아 있을 것이다. 김승일의 시가 주목하는 것은 “여호와의 증인”이 “초인종을 하나하나 누르다가 멈춘” 바로 그 순간이다. 단단해 보이는 그들의 믿음에도 잠깐의 망설임의 순간이 있다고 시인은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역시 “새카만 결정”이 앞에 놓여 있을 때 그런 멈춤을 경험한 적이 있다. “증발하라 증발하라 속으로 외치며 낮과 밤으로/ 뒤엉킨 전선과 기울어진 전신주와 깨진 가로등을 믿으면서” “정수리를 두 쪽으로 가르는/ 바람을 맞으며” 그는 갔다. 사라짐에 대한 욕망을 지닌 채 저 지리멸렬한 일상과 그것의 깨트림을 한편으로 믿으면서 그는 살아온 것일 게다. “때론 설탕이 녹아내리고/ 때론 기적처럼 찻잔이 엎어”지기도 하는 것. 그것이 인생이다. 설탕은 녹아내리다 식탁에 눌어붙기도 하고, 눌어붙은 설탕은 끈적끈적한 흔적을 남긴다. “새카만 결정”은 의외의 곳에서 마주치게 되기도 한다. “고인 흙탕물과 방치된 자동차와 다닥다닥 붙은 집들”의 지리멸렬함. 그 속에서 “대개 이렇게 영원히 사는 것”, 그런 삶을 믿는 것. 그것이 우리네 일상이지만, 그 일상으로부터의 증발을 꿈꾸는 것 또한 우리의 숨길 수 없는 욕망일 것이다. 누구나 완벽한 사라짐을 꿈꾸기도 한다.
3. 구름의 욕망, 혹은 거울 속으로 사라지는 나
이민하는 일요일의 한가로움과 사라짐에 대해 노래한다. 그녀가 그리는 풍경은 아름다우면서도 기이하다. 저 푸른 초원이 펼쳐져 있고, 목자와 양떼와 늑대가 그 풍경을 완성한다. 그리고 익숙한 ‘양치기 소년’의 이야기가 그 풍경에 삽입된다. “풀 뜯는 소리와/ 풀 밟는 소리”만이 들리는 그곳. “저 푸른 초원 위에”(「풀밭의 율법」) 동화 같기도 하고, 동화 바깥의 냉혹한 현실 같기도 한 풍경이 펼쳐진다.
바람의 목소리로 속삭여줄게 사라짐과 일요일에 대하여 풀 뜯는 소리와 풀 밟는 소리 저 푸른 초원 위에
늑대들이 살금살금 발꿈치를 들고서 주섬주섬 양들을 장바구니에 담을 때
목자(牧者)께서 가라사대 그대로 멈추라 양떼 사이에 잔뜩 천사채처럼 깔아놓은 기절염소들 목장의 오후
늑대들이 엉금엉금 천년을 기어다니며 풀썩풀썩 고꾸라지는 기절염소들의 나무다리를 주워 막대사탕처럼 입에 물 때
장바구니에서 뛰쳐나온 양들은 구름처럼 흩어져 목장의 평화
갓 태어난 목동들은 석양이 뚝뚝 떨어지는 요람에 누워 늑대다 늑대가 온다 까르르까르르 옹알이를 시작하고
뻗정다리로 휘청휘청 어둠의 끝까지 달려도 검게 깔린 늑대밭과 귓가의 지뢰들 그대로 멈추라 몸뚱이에 입력된 목소리는 누구 꺼니 아빠 꺼니 엄마 꺼니 맨발의 늑대들과 양치기 소년 너는 누구니
늑대들이 야금야금 갉아먹어도 피 한방울 나지 않는 사방연속무늬 유리풀밭
멋진 역사야 신기하게 맛있게 무릎이 녹아 거울 속으로 나는 자꾸 사라져 ―이민하, 「풀밭의 율법」(창작과비평, 2008 여름호) 전문
‘율법’과 ‘목자’와 “그대로 멈추라”라는 주문은 기독교적 상상력에 기반을 둔 것이다. 그것은 사라지는 양떼를 지키려는 주문이기도 하다. 양떼 사이에 “천사채처럼 깔아놓은 기절염소들” 사이를 늑대들이 헤매고 다닐 때 양떼들은 “장바구니에서 뛰쳐나”와 “구름처럼 흩어”진다. 그것을 시인은 “목장의 평화”라고 부른다. 그러나 평화로워 보이는 목장의 이면에는 거짓말과 금기와 “맨발의 늑대들”과 “양치기 소년”이 있다. 갓 태어난 목동들은 요람에 누워 옹알이도 “늑대다 늑대가 온다”라고 한다. 그들의 몸뚱이에는 목동으로서의 목소리가 입력된다. 그리고 “너는 누구니”라는 정체성을 묻는 물음이 이어진다. 양치기와 늑대와 양떼에겐 그들에게 요구되는 목소리가 입력되고 그렇게 길들여지는 것이라고 시인은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고 보면 ‘풀밭의 율법’은 풀밭만의 것은 아닌 것 같다. 우리 역시 입력되어진 목소리에 의해,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이라 믿으며 ‘매트릭스’ 위를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늑대들이 야금야금 갉아먹어도 피 한방울 나지 않는/ 사방연속무늬 유리풀밭”은 그렇게 조작된 가상현실, 일종의 ‘매트릭스’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체성을 알 수 없거나 조작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곳에서 “나는 자꾸 사라”진다. 누군들 ‘이것이 바로 나다’라고 자신 있게 선언할 수 있을까? 자기 자신도 자신을 알 수 없게 만드는 세상. 그 속에서 우리들은 저마다 그렇게 사라져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민하의 시가 포착한 지점이 흥미로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4. 아우라의 소멸, 또는 진본의 사라짐
일찍이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에는 예술에서 아우라가 사라질 수밖에 없음을 지적하였다. 그런가 하면 에릭 홉스봄은 현대미술을 예로 들면서 카메라의 발명이 미술의 방향성을 급변하게 했음을 솔직히 인정하기도 했다. 진본에 대한 추구와 확정이 중요한 시기도 있었지만, 현대 예술에서 진본은 더 이상 존귀하고 독보적인 가치를 갖지 못한다. 그것은 현대 예술의 비극이자 태생적 운명 같은 것이다. 문학 역시 다르지 않다. 진본의 유일무이한 절대적 가치를 인정하는 것은 근대적인 태도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희중의 시는 이런 사태에 대해 흥미롭게 그린다.
참다못해 알린다. 최근 10년 동안 지구에 이른바 디카가 지나치게 늘어나 사람들이 저마다 몰래 집에서 각종 모니터로 사진을 들여다보는 통에 사진을 보고 돌리는 실상을 우리 조직이 알 길이 없어져 바야흐로 사진 세상이 대혼란에 접어드는 사태를 비통한 심정으로 지켜봐 왔다. 옛날에는 사진에 접근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사진관에 현상과 인화를 맡겼으므로 우리는 필름과 현상액과 인화지의 경로를 추적함으로써 사진의 유통 양상을 점검해 왔다. 그러나 지금 겨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온라인의 몇몇 사진 사이트를 살피거나 정체를 숨긴 채 온라인 사진관을 직접 운영함으로써 사진을 통제하는 것일 뿐인데, 그 수가 워낙 적어 표본의 의미밖에 지니지 못하는 것이어서 한숨만 나온다. 지금까지 우리는 진실과 진상을 관리하는 공익 비밀 조직이었다. 우리의 존재 이유는 진실과 진상을 소중하게 관리하려는 데 있다. 그런데 진실을 베끼는 사진과 복사기, 스캐너까지 쏟아져 나옴으로써 진실은 전례 없이 함부로 다루어지게 되었다. 그동안 진실은 소수의 훈련 받은 사람이 관리하도록 되어 있었다. 지금은 어떤가. 너도나도 디카와 폰카를 들고 마구잡이로 낭비하고 있다. 자세히 말해서 이해할 리도 없겠지만, 너희들은 사진을 아무리 찍어도 대상은 손실이 없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얼토당토않은 소리다. 생각해 보아라, 어떻게 세상일이 그렇겠느냐. 주는 것이 있으면 받는 것이 있고,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는 법. 문자에 치중하지 않고 직관을 키워 온 몇몇 족속들이 오래전 사진의 위험성을 경고한 바 있으나 너희들은 귀 기울이지 않았고 급기야 그들과 그들의 문명을 절멸시키고 말았다. 진실을 이렇게 허비하면, 지구에서 진실은 점점 더 희미해지고 허술해질 것이다. 진실이 위축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자리를 거짓이 채우게 될 것이다. 벌써 너희들은 느끼고 있지 않느냐. 좋은 풍광이 사라지고 의로운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지 않느냐. 너희들이 함부로 사진기를 갖고 돌아다니며 좋은 풍광이라 찍어대고 훌륭한 사람이라 함께 찍어대고 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느냐. 부디 사진을 함부로 찍지 말거라. 몇 년 동안 대책을 두고 고심하면서 모여 논의하다가 지구진실기구 산하 실행 조직인 지구사진협회에서 경고한다. 기왕 얼굴을 드러내고 입을 열었으니 앞으로 종종 자잘한 일로도 경고할 것이다. ―이희중, 「지구사진협회에서 알림-序」(너머, 2008 여름호) 전문
‘지구사진협회’라는 곳에서 알리는 글의 형식으로 쓰여진 이 시는 최근 디카와 폰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급속도로 증가하면서 우리 사회에 일어나게 된 변화를 진술하고 있다. 이 시의 진술에 따르면, ‘지구사진협회’는 “진실과 진상을 관리하는 공익 비밀 조직이었다.” 그들의 존재 이유는 “진실과 진상을 소중하게 관리하려는 데 있다.” “그런데 진실을 베끼는 사진”은 물론이고 “복사기, 스캐너까지 쏟아져 나옴으로써 진실은 전례 없이 함부로 다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진짜와 가짜, 원본과 복제가 구분되지 않고 마구잡이로 다루어지게 됨으로써 진실이 허비되고, 결국 그에 따라 “지구에서 진실은 점점 더 희미해지고 허술해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지구사진협회의 이 경고는 주의 깊게 들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실제로 우리 주위에서는 진실이 위축되고 그 자리를 거짓이 채우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화자의 말마따나 벌써 우리는 느끼고 있다. 좋은 풍광이 사라지고 의로운 사람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희중의 시는 이렇게 다른 관점에서 진실의 사라짐을 경고하고 또한 안타까워하고 있다. 이미 오래 전에 벤야민이 지적했듯이 복제가 횡행하는 시대에 ‘아우라’는 사라졌고, 이제 거기에 더해서 진실이니 진상이니 하는 것들이 점점 소홀히 취급되고 사라져가고 있다. 이러다가는 지구상에 진실이라는 말이 영영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거짓만이 횡행하고, 거짓끼리 진짜를 다투는 이상 현상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아니, 이미 우리 사회의 곳곳에서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니 사진 좀 찍는다고 풍경이 닳겠냐고 더 이상 함부로 말하지 말자. 시인의 말마따나 우리는 함부로 사진 찍는 행위에 의해 진짜 풍경과 진실이 닳아 없어질 수 있음을 이미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지 않은가. “부디 사진을 함부로 찍지 말거라.” 시인의 이 경고를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따지고 보면 어디 사진뿐이겠는가? 진본의 사라짐에 대해 경고하는 이희중의 시는 우리 사회에 대한 일종의 풍자의 성격을 띠고 있기도 하다. 짐짓 걱정하고 경고하는 “지구진실기구 산하 실행 조직인 지구사진협회”의 공식적인 경고가 한편으로는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그 뒷맛은 솔직히 쓰다. 문명의 이기가 가져다 준 편리함과 거리를 두며 그것이 무엇을 사라지게 하는지에 대해서도 이제는 눈 돌릴 때이다. 그것은 분명 이 시대의 시가 감당해야 할 몫이기도 할 것이다.
이경수 | 1999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으로 등단. 주요 저서로 불온한 상상의 축제, 바벨의 후예들 폐허를 걷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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