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시국기고 ‘젊은 벗들…’ 파문 확대
“오적의 김지하는 죽었습니다.” 시인 김지하씨가 지난 5월5일자 〈조선일보〉에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라는 제목의 시국관련 기고를 발표하자 ‘평범한 한 사회인’은 〈한겨레신문〉(5월7일자)을 통해 위와 같이 반박하고 나섰다.
“지금 곧 죽음의 찬미를 중지하라. 그리고 그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로 시작되는 ‘젊은 벗들!…’에서 김씨는, 현 시국이 민족이 패망하는 극한 상황은 아니라고 지적하고 “다만 뼈를 깎는 기다림과 겸허한 모색이 있을 뿐”이라고 진단하면서 시위학생들을 일방적으로 질타한 것이다. 강경대군 치사사건에 항의하는 대학생들의 잇따른 분신사태를 ‘젊은 벗들’ (운동권 학생들)의 분명한 잘못이라고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선 김지하씨의 글이 발표되자 이 글은 문단과 대학가, 지식인 사회에 즉시 여러 겹의 파문을 그려나갔다.
시인 김형수씨는 ‘우리 그것을 배신이라 부르자’ 제하의〈한겨레신문〉(5월8일자) 기고에서 김지하씨의 글을 강하게 비판했다. 김씨는 “그는 지금 세상을 두 눈이 아닌 한 눈으로 보고 있다”고 지적하고 “그가 민중의 편에서 권력의 편으로 자리를 옮겨 앉은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밝혔다. 고 강경대군의 누나 강선미씨도 같은 신문에서 김지하씨를 비난했다. 대학가에도 “저항시인 김지하, 마침내 민중에게 저항하다”라는 내용의 대자보가 나붙었고 서울의 일부 서점은 “김지하씨의 책은 판매하지 않는다”고 써붙이기도 했다.
이처럼 김지하씨의 ‘젊은 벗들!…’을 ‘배신’이나 ‘변절’로 비판하는 시각이 있는 반면, 권력층과 일부 기성세대들 사이에서는 ‘김지하의 용기있는 소신’이라고 평가하고 나섰다. 노태우 대통령은 5월6일 청와대에서 20여개 신문·방송·통신사 사회부장과 오찬을 갖는 자리에서 김지하씨의 〈조선일보〉 기고가 “매우 돋보였다”고 언급한 것으로 보도됐으며, 윤형섭 교육부장관도 방송사의 한 토론에서 김지하씨의 글을 높이 평가했다. 김지하씨 기고 파문은 비슷한 시기에 나온 서강대 박홍 총장의 ‘분신 배후세력 조종설’과 연세대 김동길 교수의 사직서 제출과 맞물리면서 이른바 ‘보수 대 혁신’ ‘민주 대 반민주’등 갈등구조의 첨예한 이슈로 떠올랐다.
김씨의 기고 파문은 민족문학 작가회의(이하 작가회의·회장 고은)의 ‘김지하 회원 자격정지’결정으로 이어졌다. 작가회의는 5월9일 오후2시 임시 이사회의를 열고 작가회의 이사였던 김지하 회원의 자격정지를 결의했다. 작가회의는 “김지하 회원이 5월5일 〈조선일보〉에 기고 발표한 ‘젊은 벗들!…’이라는 제하의 글에 대한 토의 결과 본 회의 정관 제2조(목적)를 현저하게 위배하는 내용이었다”고 발표했다.
작가회의측은 “김씨가 비록 개인적 입장에서 발표한 글이지만, 이 글이 발표된 이후 독자들로부터 많은 항의전화가 있었고 회원들 내부에서도 김씨의 글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 이사회의를 소집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자격정지 사실이 보도되자 김지하씨는 “작가회의에 가입한 사실이 없으므로 제명 결정은 나와 무관하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고은씨는 “작가회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때부터 김지하 구명운동이 있었고 출옥 후 ‘자실’ 주최 강연회에도 참석했으며 작가회의로 바뀐 뒤에도 행사에 참여했었다”면서 입회 사실을 부인하는 처사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작가회의 회장 고은씨는 “김지하는 상식에 의해 살고 있는 사람이며, 이번 일로 본래의 자기로 돌아간 것 같다”면서 “그동안 그에 대한 일반의 허상이 너무 컸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문단 일각에서는 김지하씨의 생명운동이나 최근의 고백운동에 대한 역기능을 비판하는 시각이 있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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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김지하, 저항 자체 비판한 것 아니라 죽음 만류한 것"동료 문인들 애도…황석영 "사회와 불화한 채 떠나 안타까워"
사상계 前편집장 "다 잊고 훨훨 떠나길"…나태주 "쇄빙선 같았던 분"
원주에 마련된 시인 김지하의 빈소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등의 작품을 남긴 김지하(본명 김영일) 시인의 별세에 동료 문인들은 1970년대를 대표하는 저항시인으로 기억하며 안타까워 했다.
소설가 김훈은 9일 연합뉴스와 한 통화에서 고인이 1991년 5월 조선일보에 쓴 칼럼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치워라'(원제 :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를 먼저 언급했다.
당시는 명지대생 강경대 씨가 경찰에 맞아 숨지자 이에 항의하는 분신자살이 잇따르던 시절이었다. 생명사상을 강조하던 고인은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민주화 시위를 '저주의 굿판'에 비유하며 "죽음의 찬미를 중지하라. 소름 끼치는 의사 굿을 당장 걷어치워라"고 했다. 이 사건으로 고인은 진보 진영과의 관계가 틀어졌다.
김훈은 "이 칼럼은 학생들의 저항 자체가 잘못됐다고 비판하는 게 아니다. 주된 흐름은 죽음을 만류한 것"이라면서도 "운동권에 의해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시국에 대한 감수성과는 맞지 않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운동권에서는 이 칼럼을 크게 받아들여 당시 반(反) 김지하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며 "그 일이 김지하 선생 입장에서도 평생의 상처가 됐고 한국 정신사에서도 갈등으로 남았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척분'(滌焚·불사른 것을 씻어냄)이라는 고인의 시를 언급했다.
'스물이면/
혹/
나 또한 잘못 갔으리/
품안에 와 있으라/
옛 휘파람 불어주리니, 모란 위 사경(四更) 첫이슬 받으라/
수이/
삼도천(三途川) 건너라'
는 내용의 짧은 시다. 고인은 칼럼 이후 논란이 커지자 이 시를 썼다고 한다.
김훈은 "죽은 원혼들을 달래는 짧은 시인데 시국 속에 매몰돼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며 "그때는 이 시의 메시지를 경청할 만한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돼 있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김지하의 생애에 관련해서는 이 시가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며 "민주화 운동과 관련한 그 시대의 갈등에 대해서도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선생은 말년이 가까워져 오면서 사람들이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너무 많이 하셨다"며 "본인도 상당히 소외감을 느꼈을 것 같은데 시 '척분'처럼 첫 이슬을 받고 쉬이 삼도천을 건너시길 바란다"고 전했다.
시인 김지하 별세
1970년 국가 권력을 풍자한 고인의 시 '오적'을 실었다가 고인과 함께 구속됐던 김승균 당시 사상계 편집장(민족사랑방 대표)은 "모든 걸 다 잊고 훨훨 떠나라고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다.
김 대표는 "학생 때부터 잘 아는 사이인데 대단히 총명하고 용기 있었던 사람"이라며 "칼럼 논란으로 변절한 모습을 봤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서운했던 사이이기도 했다. 안타까운 일이다"라고 회고했다.
소설가 황석영은 "1970년대 유신 독재 하에서 표현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등 상징적인 역할을 많이 했다"며 "또래이자 반세기 이상 같이 지낸 친구이고 여러 현장에서 문화 운동도 같이하며 생각과 뜻이 같았다"고 말했다.
또 "오랜 옥살이로 고문 내지 후유증을 앓았는데 우리 사회가 아픈 사람을 잘 보살피지 못했다"며 "언론이나 정치권에서도 시인을 이용하기만 한 측면도 있다. 사회와 불화한 채로 세상을 떠나게 돼 참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나태주 시인은 "바다 위 빙하를 뚫고 나가는 쇄빙선 같은 분이었다"며 "앞에 서서 횃불을 들었기 때문에 내려놓을 수도 없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삶이었다. 평범한 삶을 살 수 없어서 한편으로는 불행하고 힘들며 고달팠을 것"이라고 추모했다. 그러면서 "전쟁을 끝낸 뒤 칼을 내려놓고 눈을 감은 장수의 모습이 떠오른다"고 했다.
(나태주 시인을 좋아한다. 그의 시에서는 폭력성 혹은 이분법적인 언어가 절대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대 시인은 '맨숭맨숭하다' 고 폄하 한다. 그러나 오래 나태주 시인의 시를 접하면서 그의 시가 하나도 싱겁지 않고 외려 내외 참 조화를 이룬다는 것을 '내'가 알았다.
상기 나태주 시인의 김지하 시인의 일대기 평가를 읽으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이것은 무슨 의미망일까..
쇄빙선 같은 분이었다' 보다 더 얼마나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가. 마지막 부분에 "전쟁을 끝낸 뒤 칼을 내려놓고 눈을 감은 장수의 모습" 의 표현을 어느 누가 떠올릴 수 있는가!
시인은 역시 다르구나... 그 탄식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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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삼도천 꽃밭 마음껏 걸어가세요
김지하 시인을 추모하며
홍용희 문학평론가
입력 2022.05.10 03:00
홍용희 문학평론가
선생님, 삼도천의 꽃밭을 마음껏 걸으며 가세요.
선생님, 창밖 신록의 가로수 사이로 붉은 연등이 고즈넉하게 불을 밝히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엄혹한 시절, 서대문 형무소 높은 담벼락 안에서 인왕산을 밝히는 연등을 보며 이렇게 노래하셨다지요.
‘꽃 같네요./
꽃밭 같네요/
물기 어린 눈에는 이승 같질 않네요/
갈 수 있을까요/
언젠가는 저기 저 꽃밭/
살아 못 간다면 살아 못 간다면/
황천길에만은 꽃구경할 수 있을까요/
삼도천을 건너면 저기에 이를까요/
벽돌담 너머는 사월 초파일’
(시 ‘초파일 밤’)
저는 이토록 아름다운 꽃밭을 노래한 시는 세상에 다시 없을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어의 세월 속 갈망하던 자유이고 평화이고 생명이었습니다.
바로 그날의 꽃밭이 다시 지상을 밝히는 초파일, 저는 선생님께서 운명하셨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너무도 황망했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영면하실 줄은 상상도 못했기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마침, 코로나 방역 규제도 풀리고 있어 오랜만에 찾아뵙고 팬데믹, 기후 위기, 문명적 균열 같은 지구적 대변동기의 현상에 대한 예찰을 마음껏 들어보고 싶다는 기대에 들떠 있던 중이라 더욱 그러했습니다.
선생님의 수묵 화첩을 가만히 펼쳐봅니다. 지본수묵 ‘매화’ 연작입니다. 그 첫 번째 작품에서부터 새삼 숨결이 멈추어집니다. 기굴창연(奇崛蒼然)이라 했던가요. ‘기이하게 검고 구불구불한 가지 위에 은은하게 피어난 고요한 꽃’. 마침, 선생님은 매화 옆에 ‘늙은 등걸 하얀 꽃’이라고 적어 놓고 있습니다. ‘늙은 등걸 하얀 꽃’을 한참 응시하고 있자니, 어느새 선생님의 모습이 어둑어둑 겹쳐 나오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선생님은 이 땅의 질곡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돌파하면서 누구보다 오랜 수난과 고통을 전면에서 감내해왔습니다. 선생님의 문학적 삶은 전반기에는 불온한 지배 세력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에서 점차 불온한 세력까지 순치시켜 포괄하는 살림의 문화, 생명의 문명을 재건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그것은 변절이 아니라 변화이고 발전이었습니다.
저는 함께 『김지하평론선집』(2015)을 편찬하며 누구보다 선생님을 자주 뵈면서 많은 대담의 기회도 갖고 훈육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개인적으로 소중하고 영광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선생님을 자주 찾아 뵙기 시작한 것은 선생님 문학 세계를 다룬 첫 박사 논문을 썼던 것도 한 계기가 되었지만, 그보다 선생님을 뵈면 항상 또렷하게 깨어날 수 있었고, 세상의 크고 작은 의문들을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동양과 서양, 논리와 초논리, 직관과 영감, 과학과 종교, 경제학과 미학 등에 걸친 가없는 식견 속에서 굽이치는 선생님의 논리와 어법은 깊은 동굴 속에서 나오는 울림처럼 웅장하고 유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선생님은 세상에 없습니다. 어느 겨울날 선생님의 전화 목소리가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여기 치악산 중턱의 꽃밭머리 찻집인데, 눈 내리는 풍경이 참 좋아! 이런 날 홍 형과 통화할 수 있어 나는 참 좋아.”
그때 제가 가서 뵙지 못했던 것을 이렇게 후회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선생님, 지금 어디쯤 가시고 계세요. 황천길과 삼도천의 꽃밭을 마음껏 걸으면서 가세요. 언제나 시대의 전위에서 숨 막히게 걸어왔던 이승의 시간들은 모두 잊으시고 부디 자유와 평화와 생명의 환희만을 영원히 누리세요.
아래는 원주 행구공 카페거리 '꽃밭머리' 카페
눈이 오는 날
그곳에 가보고 싶어서~ 옮겨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