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힘은 그리스도를 방해함(시편2편)
세상을 움직이는 힘에 대해 말씀 했는데,
들으면서 생각난 것이 있어 간증을 했었다.
지혜를 얻어서 속은 것에서 벗어나야 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내 몸뚱이까지도 속은 것이다.
이것도 벗고 갈 것인데, 내 것도 아닌데, 나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맑고 밝은 사람이 되겠는가? 눈에 보이는 모든 것도
다 속은 것이다. 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보면 신통하다.
우리 교회도 듣고 보니까 괴로워서 평안을 찾으려고 온 사람이 있다.
교회를 왜 오는가? 자기 인생이 괴로우니까 평안을 찾아보려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다는 안 되겠지만 우리 교회에 오면 좀 편안해진다.
왜냐하면 율법의 짐을 주는 것도 아니고,
세상 짐도 벗겨주니까 편안해진다. 그런데 이 평안만 추구하는 사람은
평안만 찾고 가버린다. 또 있어도 더 이상 발전이 안 된다.
자기 평안, 그것이 끝이다. 이 사람은 괴로워서 왔던 사람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 잘 이해가 안 된다.
인생이 뭐가 그렇게 괴로운가? 나는 돈이 없어서
궁지에 몰렸을 뿐이지 인생이 괴롭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환경이 달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인생이 괴롭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을 잘 이해를 못하겠다.
우리 교회에 와서 말씀도 좀 알아들으면 반 도사는 된다.
세상에 나가면 살기 편하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속은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 속은 것이 아니라 사탄에게 속았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다.
사탄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런 종류의 신이다.
우리는 천사라고 말하지만 그런 종류의 신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신 그분을 대적하는 어떤 신이다.
우리는 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그분과의 싸움에서
사람을 놓고 쟁탈전을 벌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예수님 비유 가운데서도 밀을 뿌렸는데 가라지가 났다.
밀을 뿌렸는데 왜 이렇게 되었느냐고 하니까
원수가 와서 이렇게 했다고 한다. 그러면 지금 뽑아버리자고 하니
그냥 두어라, 지금 뽑으면 밀까지 같이 뽑히니 놔두었다가
추수 때 열매로 구분해서 갈라놓으면 된다고 말씀 하신 적이 있다.
그것을 보면 씨 뿌리는 자가 둘인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사탄과 하나님 사이에 놓여있는 전쟁터다.
내가 나에게 속은 것이 아니고 내가 지혜가 없어서 속은 것이 아니다.
지혜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이것은 똑같다.
우리와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았다면 속은 것 자체도 모르는 것이다.
사탄이 와서 선악과를 주어서 하나님 같이 되게 한다고 속였는데, 이것을
성경을 봐서 아는 것이지 만일 성경을 보지 못했다면 아무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이 문제 안에 있다. 사람이 지혜가 있느냐 없느냐,
선하냐 악하냐, 이런 차원이 아니라 전혀 나와는 상관이 없는
씨 뿌리는 자의 문제이다. 씨가 뿌리는 자에 의해서 지배를
받으니까 모른다. 내가 속았는지 안 속았는지도 모르고 속은 것이다.
그런데 사탄이 있어서 사람을 속였다는 것이다.
성경의 해답은 사탄의 속임수를 어떻게 해결하고 하나님이 원래 창조 때
계획한 이것을 회복하는 이 문제이다. 이것은 아주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여기서 오는 것이 구속이다.
구속이 다른 것이 아니고 이것을 해결하는 것이 구속이다.
인간이 잘못되는 그런 차원에서 해결하는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사람이 다른 데로 팔려갔다는 것이다.
종살이를 하는데 어쩔 수 없이 종살이가 된 것이다. 누구도 헤치고
나올 수가 없다. 그런데 누가 와서 자기를 건져주었다, 끄집어내주었다. 그
래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본래 위치를 찾게 되었다는 이것이 구속이다.
이스라엘은 그 해의 첫날을 유월절로 정했다고 하고,
그 해의 첫 달을 그 달로 정했다. 자기들의 시작이고,
제2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달력까지 바꾼 입장이다.
거듭났다는 말은 거기서 나온 말인데,
도덕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더 많다. 거듭났다고 하면
그 사람 요즘 거듭났더라, 생활이 참 달라졌다고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도덕적인 차원이 아니다.
노예되었던 사람이 풀려났다는 말이고,
뺏겼던 것을 도로 찾아왔다는 말이다.
지금 성경의 지론은 우리를 어디서 찾아오는 것이고 건져오는 것이다.
남에게 갔던 것을 다시 찾아오는 것이고 회복하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의 구속이 필요하다.
새로운 씨로 새로운 출발을 해야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아브라함을 많이 알고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이삭은 아브라함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많다.
아무것도 한 일이 없이 아버지가 물려준 것을 그대로 받아서 산 것이다.
아브라함은 수단이고 방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칠 수 있다.
그런데 이삭은 고칠 수가 없다. 씨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결국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기 보다는 이삭의 후손이다.
여기서부터 회복의 역사가 불거졌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팔려간 인간을 찾아오는데 있어서 어떤 방법으로
찾아오셨는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는 방법으로 찾아왔다. 우
리 인간의 어떤 방법으로도 사탄의 속임수에서 나올 수가 없다.
아무리 지혜를 깨달아도 안 된다.
새로운 씨가 오는데 지혜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씨가 새로워지는데.. 개선한다면 지혜가 필요하지만, 고친다면
지혜가 필요하지만 새로운 씨를 받는데 무슨 지혜가 필요하겠는가?
거기에는 생명 밖에는 아무것도 필요한 것이 없다.
아들을 낳아야 되는데 지혜가 있다고 아들을 낳고,
지혜가 없다고 아들을 낳지 못하겠는가? 아들을 낳는 것은 지혜로
낳는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낳는 것이다. 지혜로는 아들을 낳지 못한다.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후사가 될 것이다. 오늘 우리는
이삭으로부터 난 자로서 그의 후사가 된다. 그래서 예수가 필요하다.
왜 십자가에 못 박혔는가? 왜 뛰어내릴 수 없는 자리에 갔는가?
이삭을 얻기 위해서다. 아브라함도 돌이킬 수 없는 자리에까지 갔다.
100살이 되었으니까 돌이킬 수가 없다. 사라도 90살이니까 돌이킬 수 없다.
자기들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거기서 이삭을 얻었다.
예수님도 뛰어내릴 수 없는 자리는 돌이킬 수 없는 자리다.
나는 죽은 나사로를 살린 사람이라고 해보았자 소용 없는 일이다.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였다는 것도 지금 소용 없는 일이다.
단지 거기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뛰어내릴 수 없는
한 사람이 있을 뿐이지 아무것도 없다.
거기서 우리는 새로 시작하는, 새로운 씨가 오는 것을 보게 된다.
새로운 것, 전혀 새로운 것!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한다.
우리가 무엇을 개선시켜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 회복의 목표는, 하나님 회복의 목표는 우리가 인격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원래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왜? 그래야 새로운 씨가 뿌려지게 된다.
밭으로 비유한다면 엉겅퀴 밭은 다 정리하고, 포도를 다시 심는 것과 마찬가지다.
씨로 말한다면 옛날 그 씨를 다 뽑아버리고 새로운 씨를 주는 것이다.
부르심이 있는 사람! 우리는 지금 부름 받은 사람들이다.
우리를 왜 불렀는가? 하나님의 근원적인 위임 안으로 부르셨다.
그리스도 안으로, 위임 안으로, 기름부음 안으로 부르셨다.
우리를 기름 부어 놓았다. 기름 부음 안에서 창조를 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1:26).”는 이것이 기름 부음이다.
이것이 근원적인 기름 부음인데 우리가 사탄에게 속아서
무엇을 잃어버렸는가? 이것을 그 위임을 잃어버렸다.
하나님의 위임을 사람에게서 빼면 동물만 못하다.
우리가 위임을 회복한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른다.
그것은 평안에 관계된 문제가 아니다.
위임을 이행하는 문제는 평안하냐 평안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평안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 괴로우면서도 이행할 수 있고
평안하면서도 이행할 수 있기 때문에 평안이냐 평안이 아니냐가 아니다
우리의 목표는 위임을 회복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모아서 무엇을 하는 것인가? 위임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 위임을 회복시키지 못하면 그냥 수양관 밖에 되지 못한다.
우리는 세상을 지배하는 힘, 마귀의 힘에서 벗어나야 된다.
이것을 세상 기독교에서 죄를 벗겨준다고만 생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