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2일 연중 제8주간 수요일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마르코. 10,32-45)
"If one of you wants to be great, he must be the servant of the rest."
말씀의 초대
집회서 저자는 흩어진 야곱의 모든 지파를 다시 모아들이셔서 그들의 땅에 살게 하시며, 당신 백성이 보상받는 날이 오기를 하느님께 기도한다(제1독서). 제자들이 자리다툼을 벌이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사람들을 섬기며 사는 것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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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어제 복음에서 베드로가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마르 10,28)라고 예수님께 말씀드린 것을 기억하시지요?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의 진심은 당장 들통이 나고 맙니다. 모든 것을 버렸다고 하면서 자리 때문에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자신들을 예수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 주십사고 청하자, 다른 열 제자가 불쾌해하며 화를 냅니다. 자리를 청하는 제자들이나 이 말에 화를 내는 나머지 제자들이나 자리에 연연해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모든 것을 다 버렸다고 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당신께서 겪으셔야 할 수난의 이야기를 들려주어도 제자들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들은 그들이 받게 될 영광에 집착할 뿐, 자신들이 져야 할 십자가는 염두에도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옛말에 ‘염불보다는 잿밥’이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에 꼭 맞는 표현입니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서 비슷한 경우를 보게 됩니다. 분명히 주님께 기꺼이 봉사하겠다고 하면서도, 자존심을 앞세우고 때로는 자리다툼까지 합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있고 싶어서 봉사를 한다면, 오늘 복음 말씀에서 보듯이 그 방법은 간단합니다.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가면 됩니다. 섬김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이 되면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자리다툼’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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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섬길 줄 모르기에 섭섭한 감정을 지닙니다. 섬기려고만 하면 손해 본다는 생??앞섭니다. 그런 삶이 기쁠 리 없습니다. 남을 섬기면 하늘이 도와줍니다. 하늘의 섬김을 받습니다. 체험해 본 사람은 압니다. 하늘이 돌보아 주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외면합니다.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일이건만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섬기는 문제에서는 우리 대부분은 분명 소경입니다. 섬겨야 할 사람이 많은 것은 아닙니다. 가까운 가족부터 섬겨야 합니다. 도움을 준 사람을 섬겨야 합니다. 출세를 위한 억지 섬김이 아니라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섬김입니다. 그런 섬김이어야 축복이 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은 훗날 요한과 야고보 사도가 됩니다. 그들은 스승님의 죽음을 종말로 받아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임금이 되시는 새로운 나라가 곧 오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기에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 달라고 합니다. 어이없는 청원을 듣고, 스승님께서는 조용히 설득하십니다. 아직은 믿음이 깊은 사람들이 아님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섬김을 받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먼저 다가가 섬겨야 합니다. 가족 안에서 먼저 실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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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앞을 볼 수 없는 시각 장애인 한 사람이 물동이를 머리에 인 채 손에는 등불을 들고 우물가에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와 마주친 마을 사람들은 모두 비웃었습니다. “정말 어리석은 사람이군! 앞도 보지 못하면서 등불은 무엇 때문에 들고 다니지?” 이 말을 들은 시각 장애인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이 등불은 내가 아니라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당신이 나와 부딪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섬기고 배려하도록 자신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비난을 받고 자존심이 상하며 바보 취급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섬기는 자세가 궁극적으로는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임을 깨닫고 이웃을 섬기는 자세로 살아가도록 노력합시다. 그것이 신앙인의 바른 자세입니다
어제는 서울의 어느 본당으로 강의를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강의를 하러 가기 위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는데 커다란 문제에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글쎄 강의 할 본당까지 갈 차의 열쇠를 도저히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전날 입었던 옷을 다 꺼내서 확인을 해 보아도, 또 책상 위, 거실 의자 밑, 그리고 서랍 속까지도 다 찾아보았지만 차 열쇠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혹시 길을 가다가 주머니에서 떨어진 것이 아닐까 싶어, 시간을 되돌리면서 제가 움직인 동선을 쫓으며 땅 바닥만 쳐다 보았지요. 하지만 차 열쇠는 없었습니다.
더 이상 지체했다가는 제 시간에 강의를 할 수 없을 것 같았지요. 다행히 보조키를 찾을 수 있어, 이 보조키로 운전해서 강의를 다녀왔습니다. 그러나 강의를 다녀오면서도 도대체 차 열쇠를 어디에 두었는가만 생각하게 되더군요. 그리고 몇 번의 수색 작업 끝에 어젯밤 드디어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새벽, 그렇게 찾을 수가 없었던 차 열쇠를 너무나도 쉽게 찾았습니다. 가장 눈에 잘 보이는 위치에 차 열쇠가 걸려 있더군요. 아마도 사무실 직원이 제 책상 위를 청소하다가 바로 옆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차 열쇠를 걸어 놓았나 봅니다. 살짝만 눈을 돌리면 그대로 보이는 곳, 그러나 저는 엉뚱한 곳만 찾고 있었던 것이지요.
잃어버렸다고 포기했던 차 열쇠를 가장 찾기 쉬운 곳에서 발견했던 것처럼, 어쩌면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 역시도 가장 쉬운 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엉뚱한 곳만을 바라보며 그 사랑을 찾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사실 우리들은 특별한 곳만을 바라보려 합니다. 높은 지위, 많은 재산, 남들이 근접할 수 없는 명예 등을 통해서만 주님의 사랑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과연 이렇게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곳에서 주님의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일상 삶 안에서 특별히 어렵고 힘든 곳에서 주님의 사랑은 더욱 더 환하게 비춰지는 것입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청합니다.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그들은 주님의 판단이 아닌 세속의 판단 기준으로 이렇게 말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제자들 역시 세속의 판단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렇게 말한 야고보와 요한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하느님 나라의 기준을 강조하셨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세상의 기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느님 나라의 기준을 내세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높은 사람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타인의 결점을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에게도 그런 결점이 있기 때문이다.(르나르)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양승국신부-
<올라가시는 예수님>
특별제자교육에 여념 없으신 오늘 예수님의 목소리에는 비장함이 담겨져 있습니다.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는 유다 본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안락한 생활? 따뜻한 보금자리? 높은 직책? 군중들의 큰 박수갈채와 환호?
실상 정 반대의 끔찍한 것들이었습니다. 체포, 사형선고, 조롱, 침 뱉음, 갖은 모욕, 채찍질, 십자가 죽음...
그런데 제대로 된 영적인 눈을 뜨지 못했던 제자들, 예수님을 통해 팔자 한번 펴보려던 제자들은 아직도 분위기 파악하지 못하고 오른쪽이니 왼쪽이니 대놓고 밝히고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비애감이 얼마나 컸겠는가, 생각해봅니다. 나는 지금 빤히 내다보이는 예정된 수난 때문에 정말 죽겠는데, 그 수난이 너무나 혹독한 것이어서 어떻게 하면 좀 피해볼까, 하는 생각에 뒷골이 다 당기는데, 제자들이라는 것들은 자기들 밥그릇 챙기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괴로움 중의 큰 괴로움이 이해받지 못할 때의 괴로움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이 큰 걱정, 내 이 큰 두려움, 내 이 큰 상처, 내 이 억울한 사정, 누군가가 좀 들어주고, 고개 끄덕여주고, 얼마나 힘드냐고 이야기해주면 정말 그 무게가 줄어들 텐데...다들 자기 문제로 바쁩니다. 내 이 기가 막힌 사연에는 손톱만큼의 관심도 없습니다. 그런 순간의 괴로움은 참으로 큰 괴로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평지를 떠나 고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의 심정도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참으로 외롭고 쓸쓸하고, 정말 ‘거시기’했을 것입니다. 그 두렵고 혼란스런 마음을 위로해주기는커녕 물 좋은 자리 한 자리 부탁한다는 제자들의 말에 기가 다 막혔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미성숙과 몰이해 앞에서도 개의치 않습니다. 앞장서서 성큼 성큼 두려운 예루살렘 길, 차마 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십자가의 길을 올라가십니다. 그 길은 바로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길, 인류구원사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올라가야 하는 길이기에 묵묵히 그 길을 올라가십니다.
그리고 그 참담한 심정 중에도 당신의 해야 할 도리, 특별제자교육을 소홀히 하지 않으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머지않아 다가올 끔찍한 수난에 대한 걱정으로 발길이 떨어지지 않을 예루살렘길이지만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길이자 인류 전체를 위하는 길이기에 용기를 내셔서 발걸음을 옮기시는 섬김의 예수님, 우리의 종이 되어주신 예수님께 그저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릴 뿐입니다.
주님께 속한 공동체
-신대원 신부-
주님과 제자들의 공동체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에게는 거룩한 도시, 평화의 도시일지 모르지만, 주님의 공동체에게는 수난의 도시요, 배반의 도시요, 이별의 도시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제자들 앞에 서서 당당하게 걸어가십니다. 주님께서 가시는 걸음걸음 모두 제자들에게는 놀라움과 두려움의 연속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화려한 도시 서울의 거리를 동경하지만, 주님과 주님께 속한 공동체는 두려움의 도시입니다. 경제와 문화, 정치와 교육과 산업이 한데 어우러져 최첨단을 자랑하는 서울의 거리는 분명히 뭇사람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속한 공동체는 오히려 그것들에 의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것들이 사랑과 진리, 정의와 평화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그곳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곳으로 올라가는 까닭은 왜곡되고 편견으로 가득한 세상과 맞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맞서서 사랑과 생명,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세상으로 되돌려 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유시찬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는 장면입니다. 그 가운데 야고보와 요한의 에피소드가 곁들여집니다. 다소 긴 복음이긴 하나 벌어지는 내용은 비교적 단순합니다. 덕분에 관상하기에 그다지 어렵지 않겠습니다.
먼저 살펴볼 부분은 제자들과 또 다른 이들과 함께 걸어가는 예수님 모습입니다. 당신께서 수난과 부활에 대해 벌써 세 번째 예고를 하시는 장면인 만큼 그분의 표정 · 음성 · 분위기 등을 잘 살펴보면 얻는 바가 많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 예수님은 고난에도 초연하시다는 등 선입견에 사로잡혀 바라볼 것은 아닙니다. 단순히 성령께서 이끄시며 보여주시는 바를 따를 일입니다. 다음으로 볼 것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특별 간청을 드리는 장면입니다. 주위엔 다른 제자들도 있습니다. 이 분위기 전체를 총체적이고 직관적으로 살펴보며 머물렀으면 합니다. 가톨릭 새성경에는 ‘출세와 섬김’ 이라는 소제목을 달아놨습니다. 물론 그런 내용이 주를 이루긴 합니다만, 좀더 섬세하고 자상한 눈길이 필요하겠습니다. 두 제자의 속마음도 더듬어 보고, 그들의 눈빛이나 표정에서 드러나는 여러 가지 함축된 의미도 읽어보고, 그들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눈빛이나 표정도 주의 깊게 살필 일입니다. 물론 이런 일을 곁에서 바라보는 다른 제자들의 움직임이나 분위기 등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좋을 것입니다.
관상기도를 할 때는 이처럼 주변 상황을 잘 살피고 더듬는 가운데 얻는 영적 유익이 큽니다. 주변을 건드리면서 핵심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얌체
-김찬선신부-
“새로운 표징을 보여 주시고 다른 기적을 일으켜 주소서. 처음처럼 그들 각자에게 상속 재산을 나누어 주소서. 주님, 당신 이름을 지닌 백성을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안식처인 예루살렘에 자비를 보이소서.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보답을 주소서. 당신 백성에 대한 호의로 당신 종들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
손님으로 온 외국 형제들이 우리와 함께 기도한 다음 거의 공통적으로 묻는 것이 있습니다. "What is the meaning of the 'so so'?" 기도할 때 보면 자주 ‘-소서’라고 하는데 그것이 무슨 뜻이냐는 질문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최고의 존경이 담긴 겸손한 기도의 끝말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렇습니다. ‘-소서’는 최고의 존경이 담긴 겸손한 기도의 끝말이고 그래서 말끝마다 우리가 하는 기도 말입니다.
오늘 집회서도 보면 ‘-소서’투성이입니다. 그런데 형태를 보면 존경과 겸손의 청원 형태이지만 내용을 보면 ‘이걸 원하니 이것 좀 하시오!’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겸손하게 청하는 투로 기도하지만 사실은 내 말 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면 화를 내고, 원망하고, 어떤 때는 내 기도 들어주지 않는 하느님 믿지 않을 거라고 삐지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기도는 종종 내 기도 안 들어주면 당신 안 믿을 거라는 협박성 기도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자들 중에는, 특히 신학을 공부했다는 신자들 중에는 나는 이런 기도 하지 않는다고 얘기합니다. 다시 말해서 달라는 기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저에게는 그런 태도가 올바른 것으로 읽히지 않고 그런 말투에서 저는 대단한 교만을 느낍니다.
감사와 찬미와 흠숭은 드리지 않고 달라고만 하는 것이 염치없고 얌체 같기도 하지만 그런 것이 본래 우리 인간이 아니던가요?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영원한 얌체입니다. 일생 그리고 다 주시고 이제 뼈만 남은 늙은 부모의 등골까지 빼먹는 염치없고 얌체인 것이 우리 자식들이듯 우리는 하느님 사랑 앞에서 영원한 얌체입니다. 저는 이런 우리를 겸손하게 인정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 교만한 것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실상 사랑의 하느님은 달라는 기도 하지 않는다는 우리의 말이 몹시 서운하게 들리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주고 싶으신데 우리는 달라지 않겠다니 사랑이신 하느님의 존재 이유를 박탈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 괘씸하고 못된 것은 받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받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하느님으로부터 받지 않고 한 순간인들 살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받아 챙길 것은 다 챙기고 안 받았다고 시치미 떼는 것이고, 나는 달라지 않을 테니 당신이 주지 않고는 못 배기겠으면 알아서 주슈 하는 것입니다.
오늘 집회서는 그런 면에서 이스라엘의 겸손한 청원입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처음서부터 끝까지 달라는 것이지만 “이 세상 만민이 당신께서 영원하신 주 하느님이심을 깨닫게 하소서.”하고 깨달음을 달라는 청원기도도 할 줄 아는 겸손한 기도입니다.
어제는 참으로 당황스러운 날이었습니다. 어떻게 한 시간 동안 교통사고를 두 번이나 당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이 교통사고를 통해서 한 가지 느낀 것이 있어서 이렇게 새벽 묵상 글에 적어 봅니다.
저는 아침마다 자전거를 타고 수영장을 다닙니다. 그런데 어제는 자전거를 타고 가기가 싫은 것입니다. 사실 10분 정도면 갈 수 있는 길이지만, 언덕길이 많아서 조금 힘들거든요. 그래서 편하게 가려고 자전거가 아닌 자가용을 끌고서 수영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던 중 제가 가고 있는 차선으로 갑자기 택시가 끼어든 것입니다. 저는 재빨리 브레이크를 밟았고, 다행히 택시와 부딪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택시 기사에게 인상한번 쓰고는 얼른 수영장으로 갔지요. 하지만 부딪히지 않았다는 것은 저의 생각뿐이었습니다. 수영장 주차장에서 제 차를 보니, 차의 앞부분 도색이 벗겨진 것입니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합니까? 벌써 지나간 일이니까요.
아침운동 열심히 하고서 다시 차를 몰고서 집으로 가는데, 갑자기 어떤 차가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제 차를 뒤에서 들이 박습니다. 어떻게 아침에만 두 번이나 교통사고가 날 수 있습니까? 더군다나 택시로 인해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충격을 느낄 정도의 접촉사고까지 난 것입니다. 저는 보통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목을 잡고 내렸습니다. 이번만큼은 보상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지요. 그런데 상대 운전자가 저를 보더니만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신부님~!”
예전에 어떤 본당의 보좌 신부로 있을 때, 활동하던 청년이었습니다(물론 지금은 아줌마가 되어 있었지요). 정말로 오랜만에 만난 것이지요. 따라서 이 청년에게 “내 차가 망가졌으니까 수리비 내놔!”라고 차마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신부님”이라고 아는 체를 하지 않았으면, 혹시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이라는 말에 저는 “괜찮으니까 얼른 가”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지요.
어쩌면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평소에 끊임없이 주님을 아는 척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야 어렵고 힘들 때, 주님을 부르면서 주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해서만 지극한 관심을 보이면서 가장 중요한 주님과의 관계는 맺는데 소홀히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제베대오의 두 아들이 예수님께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라고 부탁을 드립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라고 반문하시지요. 그만큼 주님과 일치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위해 지금 우리가 할 일은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주님과의 만남을 더욱 더 많이 해야 하며, 평소에도 끊임없이 주님을 부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나의 구원을 위해서 말이지요.
예수님을 따르는 길
-조명준 신부-
오늘 복음에서 자신들의 청을 들어주기를 바라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라고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을 통하여 우리가 주님께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요?
어쩌면 야고보와 요한처럼 세상으로부터 오는 영광만을, 축복만을 바라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영광에 대해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꽃과 같다”고 제1독서는 전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다른 방식으로 물으십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예수님의 잔과 세례는 세상의 영광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시는 잔은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잔이었으며,
그분께서 받으신 세례는 세상에 대해 죽어 하느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부활의 세례였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은 우리도 또한 자신을 죽이고
다른 사람을 섬김으로써 주님의 잔을 마실 때 주님께서 받으신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네, 주님, 마실 수 있습니다!
-이상각 신부-
고통스럽고 절박한 상황 속에서 나에게 기도를 요청해 오는 형제자매들을 많이 만난다. 어떠한 방법으로도 해결할 수 없고, 무엇으로도 위로받을 수 없을 것 같은 절망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는 그들을 만날 때, 나는 과연 그들이 어떻게 그 난관을 극복하며 무슨 힘으로 슬픔과 괴로움의 잔을 마실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바로 그들한테서 문제에 대한 가장 적절한 대답을 듣는다. “만일 제게 신앙이 없었다면, 제가 이렇게 주님 앞에 나와 주님의 성체를 모시고 기도할 수 없었다면 아마 한순간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요한과 야고보는 그 말의 의미를 잘 알지 못했지만, “마실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결국 예수님의 잔은 그들의 잔이 되었고, 또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우리의 잔이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 잔은 원래 우리 몫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예수님은 몸소 그 잔을 받아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고 고통 받으시며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받을 고통을 축복해 주시고 고통의 의미를 부여해 주셨다. 우리가 겪는 그 어떠한 고통도 예수께서 겪지 않으신 것은 없다. 예수님은 당신이 마시는 잔 안에 인류가 겪을 모든 고통과 슬픔과 상처를 담았다. 예수님도 당신의 잔을 앞에 두고 “지금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하셨지만 사랑으로 그 잔을 끝까지 기쁘게 마셨다.
신앙이 우리에게 위로와 힘을 주는 이유는 예수님이 우리의 고난과 고통을 대신 겪으심으로써 완전히 제거해 주셨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께서 직접 그 모든 고통의 일부가 되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고통과 고난에 당신이 함께하기를 원하셨다는 데 있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예수님한테서 완전히 분리되어 홀로 고통 받지 않는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그분의 말씀을 듣는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의 잔이다. 받아 마셔라. 그리고 나를 기억하여라.” 우리는 예수님의 잔을 받아 마시며 그분의 삶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기억은 나에게 내 삶의 쓰디쓴 잔을 기쁘게 마실 힘을 준다. “네, 주님, 마실 수 있습니다!”
참된 겸손, 참된 섬김을 배우자. -김종규 신부-
+ 찬미 예수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이십니다.
예루살렘은 하느님이 머무르시는 거룩한 성전이 있는 곳이었지만, 사람들의 이기심과 질투, 죄악으로 인해 더 이상 하느님의 현존이 머무시는 거룩한 곳이 아니라, 그저 껍데기에 불과한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더군다나 예루살렘은 참 말씀과 진리를 전하여 살아계신 하느님을 보여주시는 예수님에게는 많은 적대자들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런 예루살렘을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올라가십니다. 그리곤 제자들에게는 특별히 예루살렘에서 당신께서 겪으셔야 하는 그 모든 것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맞이하실 운명은 제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사형선고를 받고 조롱과 채찍, 그리고 십자가에서의 처참한 죽음과 부활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중요하고 엄숙한 분위기 가운데 꼭 눈치도 없이 불쑥 두 제자, 제배대오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한 가지를 청을 올립니다.
“선생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때 저희를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 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청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그들이 과연 그것을 감당해 낼 수 있는 지 의구심을 느끼셨고 재차 그들이 그것을 할 수 있는 지를 물으십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두 제자는 냉큼 “예”라고 대답합니다.
제자들이 생각하는 그 영광의 자리란 높은 왕좌에 앉으신 예수님 옆에서 어깨 힘주어 호령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인사를 받는 고위 관리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지 모릅니다.
하지만 사실 예수님의 그 영광된 자리란 바로 가장 비참하게 처참하게 죽어가는 십자가의 높은 자리였습니다. 세상에 버림받고 멸시 받는 가장 낮은 곳, 하지만 세상 어떤 곳보다 가장 영광된 자리인, 인류의 구원을 가져다 준 그 영광의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우스운 일이지만 사실 예수님께서 매달리신 십자가 그 옆은 오늘 예수님께서 영광의 자리 앉게 되는 순간 그 옆에 서게 해달라고 청을 올린 두 제자도 아니요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겠다는 그 어떤 제자들도 아니였고, 그저 죄를 짓고 처형당하는 두 죄수 였습니다.
물론 그 죄수들은 아무 죄도 없으신, 그저 인류를 사랑하신 죄밖에 없는 예수님과는 전혀 다른 이들이었지만, 그들은 예수님께서 가장 위대한 영광의 순간에 그 옆에 서있었던 유일한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 모두에게 가장 낮은 자,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섬기는 자만이 예수님의 그 영광된 자리 옆에 설 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신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많은 이들로부터 경배를 받기 위함이 아니라, 스스로 낮추인 자, 섬기는 자의 모습으로 오셨음을 말씀하시면서 우리 또한 당신 그 모습을 따르라 하십니다.
교만과 이기심은 그것이 자신의 안위와 세상의 높은 자리를 가져다 줄 지 모르지만, 그것은 결코 영원할 수 없는 것일 뿐... 예수님이 주시는 그 영원하고 참된 영광의 순간에 참여할 수 없는 가엾은 영혼이 될 뿐입니다. 우리는 진정 예수님으로부터 참된 겸손, 참된 섬김을 배워서 우리가 진정 추구하는 진리에 이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왔다”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삶 안에 늘 떠올려지길 청해봅니다. 아멘...............◆
참된 겸손, 참된 섬김 -박명제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이십니다. 예루살렘은 하느님이 머무르시는 거룩한 성전이 있는 곳이었지만, 사람들의 이기심과 질투, 죄악으로 인해 더 이상 하느님의 현존이 머무시는 거룩한 곳이 아니라, 그저 껍데기에 불과한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더군다나 예루살렘은 참 말씀과 진리를 전하여 살아계신 하느님을 보여주시는 예수님에게는 많은 적대자들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런 예루살렘을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올라가십니다. 그리곤 제자들에게는 특별히 예루살렘에서 당신께서 겪으셔야 하는 그 모든 것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맞이하실 운명은 제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사형선고를 받고 조롱과 채찍, 그리고 십자가에서의 처참한 죽음과 부활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중요하고 엄숙한 분위기 가운데 꼭 눈치도 없이 불쑥 두 제자, 제배대오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한 가지를 청을 올립니다. “선생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때 저희를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 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청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그들이 과연 그것을 감당해 낼 수 있는 지 의구심을 느끼셨고 재차 그들이 그것을 할 수 있는 지를 물으십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두 제자는 냉큼 “예”라고 대답합니다.
제자들이 생각하는 그 영광의 자리란 높은 왕좌에 앉으신 예수님 옆에서 어깨 힘주어 호령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인사를 받는 고위 관리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사실 예수님의 그 영광된 자리란 바로 가장 비참하게 처참하게 죽어가는 십자가의 높은 자리였습니다. 세상에 버림받고 멸시 받는 가장 낮은 곳, 하지만 세상 어떤 곳보다 가장 영광된 자리인, 인류의 구원을 가져다 준 그 영광의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우스운 일이지만 사실 예수님께서 매달리신 십자가 그 옆은 오늘 예수님께서 영광의 자리 앉게 되는 순간 그 옆에 서게 해달라고 청을 올린 두 제자도 아니요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겠다는 그 어떤 제자들도 아니였고, 그저 죄를 짓고 처형당하는 두 죄수 였습니다. 물론 그 죄수들은 아무 죄도 없으신, 그저 인류를 사랑하신 죄밖에 없는 예수님과는 전혀 다른 이들이었지만, 그들은 예수님께서 가장 위대한 영광의 순간에 그 옆에 서있었던 유일한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 모두에게 가장 낮은 자,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섬기는 자만이 예수님의 그 영광된 자리 옆에 설 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신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많은 이들로부터 경배를 받기 위함이 아니라, 스스로 낮추인 자, 섬기는 자의 모습으로 오셨음을 말씀하시면서 우리 또한 당신 그 모습을 따르라 하십니다.
교만과 이기심은 그것이 자신의 안위와 세상의 높은 자리를 가져다 줄 지 모르지만, 그것은 결코 영원할 수 없는 것일 뿐... 예수님이 주시는 그 영원하고 참된 영광의 순간에 참여할 수 없는 가엾은 영혼이 될 뿐입니다. 우리는 진정 예수님으로부터 참된 겸손, 참된 섬김을 배워서 우리가 진정 추구하는 진리에 이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왔다”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삶 안에 늘 떠올려지길 청해봅니다. 아멘................◆
새벽을 열며
어제는 서울의 어느 성당에서 강의가 있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그 성당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를 몰랐습니다. 알고 있는 유일한 정보는 제가 있는 간석4동 성당에서 그 성당까지 50분정도면 갈 수 있다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저로써는 그 정보만 믿고서 정확하게 50분 전에 떠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첫 강의가 10시 30분인 관계로 여유 있게 2시간 전인 8시 30분에 출발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출근 정체 시간도 예상했어야 하니까요.
역시 경인고속도로는 출근하는 차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아주 느린 속도로 때로는 한참을 정지한 후에나 조금씩 진행할 뿐이었지요. 조금 답답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일찍 출발하여 여유가 있었기에 음악을 들으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화나는 일이 생깁니다. 글쎄 저와 앞 차 간격이 조금이라도 벌어지면 신호도 하지 않고 끼어드는 차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는 다짐했습니다.
‘아니 저렇게 얌체가 있을까? 자기만 바쁜가? 빨리 가면 또 얼마나 빨리 간다고. 저런 차들에게는 절대로 양보하지 않으리라.’
그러면서 앞차와의 간격을 전혀 두지 않고 운전을 했습니다.
잠시 뒤 고속도로를 벗어나서 그 성당 근처까지 거의 온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성당의 이정표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걱정입니다. 지금 있는 자리는 2차선인데, 성당으로 들어가려면 우회전을 해야 하기 때문에 4차선으로 옮겨야 하는 것입니다. 오른쪽으로 진입하겠다는 신호를 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앞차와의 간격을 오히려 좁힙니다. 저는 천천히 앞으로 가면서 간격이 조금 생기자마자 얼른 차선을 바꿨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지요.
‘정말로 너무한다. 양보 좀 하면 얼마나 좋아?’
바로 그 순간 고속도로에서 양보하지 않은 제 모습이 떠올려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 역시 똑같은 사람이었지요. 아니, 지금 제가 욕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저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처럼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세도를 부리려고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섬기는 사람, 즉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요.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어제의 체험을 통해서 조금 알 것 같습니다. 바로 나를 끝없이 낮추는 이는 다른 사람에 대해 판단과 단죄를 하지 않을 것이고, 그만큼 주님께서 명하신 사랑의 길을 걸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삶, 모든 이의 종이 되는 삶. 때로는 능력이 없는 약자의 삶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승리자는 영원한 생명이 보장된 하느님 나라에서 판결이 난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주님이 보여주신 사랑의 길을 걸어야 할 것입니다.
빠다킹신부
섬기고 종이 되는 길
-김동하 신부-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선포하십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고난의 잔과 세례를 약속하며 영광스런 자리를 함께 차지하기를 청합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다른 제자들은 이 형제를 불쾌하게 여깁니다. 그분께서는 제자들 사이에 갈라진 마음을 말씀으로 어루만지시며 영광으로 나아가는 길을 알려주십니다.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종이 되어야 한다.” 그분께서는 영광스럽게 부활하셔서 당신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십니다. 모든 이가 손쉽게 당신 옆에 앉아서 영광을 차지하도록 상을 차려놓으십니다. 살아가도록 먹을 것을 주시고 사랑을 나누도록 이웃을 맺어주시고 당신을 알아보도록 자연을 선물하십니다. 차려진 상은 보시기에 좋은 것이지만 잘 먹고 잘 나누고 잘 알아보기까지는 때때로 아픔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신 것처럼 영광은 고통을 지나야 맛볼 수 있습니다. 섬기는 사람은 종이 되어 먹고 나누고 알아가는 도중에 만나는 고통에 참여해야 합니다. 섬기고 종이 되는 길은 영광으로 나아가는 길이기에 쓰고 매운 맛을 품고 있습니다.
섬김의 리더십
-김민수 신부-
요즘은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리더십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여러 가지 리더십이 있지만 남을 '섬기는 리더십'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남을 섬기는 리더는 함께하는 사람들의 말을 겸손하게 경청하고, 자기 주장만 내세우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며, 자기 이익만을 챙기지 않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도움을 주려고 할 것이다. 신자들은 사제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 중의 하나로 섬김의 자세를 요청한다. 예수님을 닮은 사제는 함께하는 신자들을 섬겨야 한다. 하지만 사제들이 독선적이고 권위적이며, 이기적이라는 말을 신자들한테서 가끔씩 듣는다. 그럴 때면 '나도 신자들에게 그러한 모습으로 비추어졌을 때도 있었겠다.'라는 반성을 하게 된다. 어쩌면 나 자신도 '나는 가르치는 사람이고 신자들은 배우는 사람이다.'라는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는데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지 않나 싶다. 이런 그릇된 인식은 급기야 양들은 목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존재한다는 위험한 생각에 빠지게 할 수도 있다. 이런 사제를 어느 누구도 가까이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예수님을 닮은 사제로 살아가려면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듯이 무릎을 꿇고 겸손한 태도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내가 나중에 하느님 앞에 가서 마지막 시험을 치를 때 예수님과 함께 무엇을 했는지, 내가 하느님께 받은 탈렌트를 어떻게 활용했는지 제대로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양승국신부-
<차마 가기 싫었던 형극의 길>
지난 성목요일 밤, 세족례 예식 때의 일이 기억납니다. 늘 해오던 세족례 예식이었지만, 올해는 좀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아이들 앞에 허리를 굽혀 발을 씻겨주던 순간, 아이들의 발을 수건으로 감싸 닦아주던 순간 2000년 전 똑같은 모습으로 제자들 앞에 허리를 굽히신 예수님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느님께서 한 부족한 인간의 발을 씻어주시던 그 모습, 그 발에 입을 마주시던 모습이 떠올라 눈물이 다 나오려고 했습니다.
제발 좀 겸손하라고, 끊임없이 낮아지라고 그렇게도 강조했지만 그저 한쪽 귀로 듣고 다른 쪽 귀로 흘려버리던 제자들이 너무도 안타까웠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최후의 수단으로 제자들 앞에 무릎을 꿇으신 것입니다. 아무리 말해도 도통 말귀를 못 알아듣는 우리를 위해 최후의 방법, 극단적인 방법을 쓰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두 제자들(제베대오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 역시 마찬가지로 아직도 갈 길이 멀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핵심제자단에 속해 있던 두 사람이었지만, 하는 말들 좀 보십시오.
“선생님, 소원이 있습니다. 꼭 들어 주십시오. 선생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때 저희를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
보십시오. 두 사람이 예수님께 지금 청하고 있는 것은 어리석게도 이 세상의 권력입니다. 예수님께서 정권을 잡으시면 국무총리나 당 대표 정도를 시켜달라고 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승께서는 지금 죽어도 가고 싶지 않은 곳이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장소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시는데, 진정 살 떨리는 공포의 골고타 언덕을 서서히 올라가고 계시는데, 철없는 두 제자는 ‘물 좋은 자리’ 운운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승께서는 아버지께서 주실 고난의 잔 때문에 괴로워 죽겠는데, 개념 없는 두 제자는 앞으로 연봉이 얼마가 될 것이며, 골프장은 어디가 좋으며... 이딴 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진리는 참 진리이지만 어쩌면 제자들에게 있어 생각조차 하고 싶지도 않은 진리, 회피하고 외면하고 싶은 진리, 따르고 싶지 않은 진리였는지 모르겠습니다.
환호 속에 걸어가는 영광과 승리의 메시아만 선호했지 수난 받는 메시아, 참혹하게 사람의 손에 죽어간 고통과 순명의 메시아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수난 당하시는 하느님, 겸손하신 예수님, 봉사하고 섬기는 데 전공이신 그리스도를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진정한 권위는 이웃의 이익을 위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것이란 생각 말입니다. 이를 가르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일평생 끊임없이 낮은 곳으로 내려가신 것이겠지요. 한평생 지속된 겸손의 삶,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일생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메시아를 기다립니까?
혹시라도 우리가 기다리는 그분은 다분히 이기적인 욕구들을 우리가 청할 때 마다 즉각적으로 들어주시는 나만의 메시아가 아닌지요?
혹시라도 우리가 기다리는 그분은 잠시 스쳐지나가는 이 세상 것들에 모든 것을 걸라고 속삭이는 가짜 메시아는 아닌지요?
우리에게 오신 메시아는 군림이나 명령과는 거리가 먼 메시아셨습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나 권력과는 거리가 먼 메시아셨습니다. 현세적 축복이나 안녕만을 지속적으로 보장해주는 마술사 같은 메시아가 절대 아니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오신 메시아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호화찬란한 왕궁은 고사하고 초라한 여인숙으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해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겸손의 왕이셨습니다. 쓰디쓴 고난의 잔을 기꺼이 받아 마셔야 했던 고통의 왕이셨습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눈물을 머금고 차마 가기 싫었던 형극의 길을 걸어가야 했던 슬픔의 왕이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하나하나 씻어주셨던 섬김의 왕이셨습니다.
-도희찬신부-
우리는 각자 자신의 인생을 나름대로 실처럼 엮어가며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인생은 나그네길’이라는 진부한 유행가 가사처럼 인생이라는 것은 하나의 기나긴 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길 위에서 우리들은 여러 가지 사건을 겪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과 만나기도 합니다. 이런 인생의 길에서 어떤 사건을 마주 대하고 어떤 만남을 지니는가에 따라서 그 길이 곧고 편하기도 하지만 또 험하고 굴곡이 심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 길이 어떠한가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내가 그 길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고 다른 이들의 길을 어떻게 수용하고 있는가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길고 험난할지라도 그 안에서 어떤 보람과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힘겨운 것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내가 걷는 인생의 길이 다른 이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희망과 미래를 던져주는 것이 된다면 더욱 그럴 수 있기 때무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당신이 걸어가시고자 하는 그 길에서 당신의 수난에 대한 가르침을 펼쳐 보이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길 위에서 주님은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과 사람들을 만나고 계십니다. 만약 주님이 당신의 길만을 중요시하고 다른 이들의 길에 별 관심이 없으셨다면 그분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앞만 보고 자신의 길만을 꿋꿋이 걸어가셨을 겁니다. 하지만 그분은 당신의 길을 멈추시고 다른 이들을 끌어당겨 주십니다. 주위를 돌아보고 한눈을 팔고 있는 이들에게 함께 앞으로 나아갈 것을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길이 아무리 바쁘고 중요하다 할지라도 다른 이의 길을 결코 외면하거나 잊지 않고 계시는 모습을 그분이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런 그분의 멈춤은 바로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분의 모든 가르침과 사명은 의무에서가 아니라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었기에 주님은 사람들이 멈출 때마다 함께 멈출 수 있으셨다는 말입니다.
신앙인은 흔히 주님을 따라 십자가를 지고 자신의인생길을 걷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십자가의 길은 결코 혼자서 걸어가는 외로운 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 기도와 묵상으로만 점철되어진 죽은 길이 되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바로 언제나 다른 이들과 함께 걸어 나가고자 하는 사랑의 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주위의 사람들이 힘들고 고통스러워 넘어지려 할 때, 그 손을 잡아주는 길이 되어야 합니다. 또 그들이 다른 생각에 빠져서 멈추고 서 있을 때, 앞을 밝혀 줄 수 있는 빛의 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때 우리가 걸어가고자 하는 십자가의 길이 나의 길이 되고 그분처럼 살아있는 인생의 이정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마음에 담아 둘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박종수-
오늘 독서는 유대인에 대한 안티오쿠스 4세의 대박해가 일어나기 전 20년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나라와 백성이 이방인의 지배를 받은 수세기가 지난 다음 어려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 말씀을 통해 형제애가 넘치는 정의로운 사회 건설을 절실하게 바라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사회가 이스라엘 생활 초기에 존재했음을 10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언자들이 과거의 그런 사회를 끊임없이 기억하도록 해 주었음을 14-15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 생애와 활동의 결과로서 맞이할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그런데도 야고보와 요한은 권력과 영예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서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했던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우리의 권세가 아니라 하느님의 다스리심이 관건입니다. 하느님께서 중심이시지 인간은 중심이 아닙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를 사람들이 소유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 나라를 세속적으로 이해하고, 그 나라를 차지하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 청합니다. 그런 말로 다른 제자들 사이에 불화와 경쟁심을 부추기게 됩니다. 일이 이쯤 되자 예수님께서는 이를 계기로 교회 공동체 내에서 권세가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분은 먼저 부정적 실례로서 권세를 남용하는 두 가지 예를 말씀하십니다. 다스리는 자들은 백성을 내리누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위대함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 백성을 내리누르고 보잘것없이 취급합니다. 그리고 권력자들은 사람들에게 폭력을 마구 행사하기 위해 권력을 남용합니다. 그들은 권력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혀야만 자신들이 권위 있게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는 달리 다스림의 다른 방식을 보여 주십니다.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권력행사는 이 세상과는 다른 모습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지도자는 생명에 기여하고, 생명을 자라게 돌보아야 합니다. 지도자는 주님이신 예수님과 결합되어 있음을 명심하고, 다른 사람들을 다스리는 주인으로 행세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주님의 위임으로 행동하며, 봉사하려는 마음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올바른 다스림과 섬김에 관한 논쟁을 계기로, 당신 자신의 삶을 제자들에게 살아가야 할 삶의 척도로 제시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당신 생애 전체의 본질적 의미,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라는 말씀을 통해 당신의 삶과 죽음의 본질적 동기를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의 권위 있는 활동은 사람에게 봉사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분은 사람들을 악마의 권세에서 해방하시고 생명을 베풀어 주심으로써 사람들에게 봉사하십니다. 그리고 이미 세 번 예고하셨던 당신의 수난이 목전에 다가왔음을 의식하십니다. 이제 그분은 당신 죽음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밝히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어떻게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실 수 있는가? 우리는 이를 사랑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존재 전체로 나를 받아들인다면, 나를 조건 없이 사랑한다면, 그는 자기 자신을 내게 바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헌신적 사랑은 죽음으로 완성됩니다. 위대한 사랑은 저마다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사랑은 죽음으로 자신의 참된 본질에 이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은 그분께서 “우리를 위한 존재”이시며, 이타적 실존임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이런 “나를 위한 존재”는 나를 속박하는 존재로부터 나를 해방시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나의 모든 희망을 포기하게 하는 하나의 실패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오히려 나와 깊은 친교를 원하시는 그분 사랑의 심오한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나를 위해 죽으신다면, 나의 삶과 죽음에 나를 그분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당신의 죽음이 그분과의 친교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어떤 것도 파괴할 수 없을 정도로 당신과의 친교가 더욱 깊어질 것임을 약속하십니다.
제자의 길
-강영구신부-
+너희 사이에서 누구든지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대에게
생명의 계절 5월도 막바지에 접어들었습니다. 곧 더위와 장마를 몰고 올 6월을 맞이하게 됩니다. 몸과 마음이 다 함께 건강하기를 기도합니다.
스승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스승 예수를 닮고 그분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고 스승이 걸었던 길을 걷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제자가 스승보다 더 높을 수 없고 종이 주인보다 더 높을 수 없다. 제자가 스승만해지고 종이 주인만해지면 그것으로 넉넉하다.”(마태10,24)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스승 또는 주라고 부른다. 그것은 사실이니 그렇게 부르는 것이 옳다. 그런데 스승이며 주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요한13,13-14) 높고 낮음이 문제가 아니라 더도 덜도 말고 스승 예수님만 해지면 그것으로 됩니다.
높은 자리에 앉으면 떨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낮은 자리에서는 떨어질 위험은 없지만 걸려 넘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낮은 자리에서도 엎드리면 걸려 넘어질 위험은 없습니다. 그러나 복지부동(伏地不動)은 곤란합니다.
스승 예수님은 엎드려서 섬기고 사랑하고 헌신(獻身)하였습니다. 당신도 엎드려서 섬기고 사랑하고 헌신하는 제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낮은 자리에서 복(福) 받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정복례 수녀-
◆예수님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렇게 오랫동안 데리고 다니며 가르친 제자들이 이렇게 철부지 티를 벗지 못했으니`…. 오늘 복음에서 지탄의 대상이 된 야고보와 요한만이 예수님의 말씀을 못 알아들은 것이 아니다. 다른 열 제자도 마찬가지다. 다만 그들은 야고보와 요한처럼 대담하고 용기있게 터놓고 자기들의 간절한 바람을 고백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의 두 제자가 주님의 양편에 앉게 해 달라고 했을 때 그렇게 화를 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제까지 제자들에게 무엇을 가르쳐 온 것일까? 천상의 논리를 말씀하시는 스승과 세상의 논리에 익숙한 제자들 사이에 통교의 문제가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시대의 위대한 교황 요한 23세는 당신을 ‘종들의 종’이라고 표현하셨다. 종들의 종! 이 얼마나 가슴 뭉클한 표현인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노라고 말씀하신다. 세상의 지도자들은 섬김을 받고 권세를 누린다. 천상의 논리는 주인이 종들을 섬긴다. 예수님도 그랬고 교회 장상들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 교회 지도자들은 사실 당신 종들을 섬기라고 선택된 하느님의 종들이다. 착한 목자를 닮아 사랑과 자비로 당신 종들을 위해 봉사할 때 비로소 그들은 종들의 자발적인 섬김을 받게 될 것이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주님의 겸손을 본받을 때 진정 섬기는 삶이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천상의 논리를 알아듣기 위해서는 세상의 논리를 뒤집어야 한다. 세상 뒤집기! 이 말은 반란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언젠가 「기독교 뒤집어 읽기:예수는 없다」는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이 말은 언뜻 예수님을 모독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으나 사실은 정반대다. 진정 예수님을 알아뵙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교회에서 제시하고 가르쳐 온 예수님의 틀에서 과감히 벗어나야 한다는 내용인데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우리가 서로 섬기는 삶을 살 때 비로소 우리는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섬기는 자가 다스린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참다운 신앙인의 의식
-조욱현 신부 -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생각과 제자들의 생각이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 준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제자들처럼 주님의 뜻과는 전혀 다를 수도 있다 는 것을 말해 준다. 지금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십자가의 길을 향해 나아가시는 중에 계시고 그 마음은 인간적으로 참으로 답답한 때라고 할 수 있는데, 야고보와 요한 같은 제자들이 "선생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때 저희를 하나는 선생님 오른 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주십시오!"(37절)라고 하고 있으니 말이다. 또 이것을 본 다른 제자들은 화를 내고 있다. 이 제자들 역시 그 두 제자와 같이 제사보다는 젯밥에만 관심이 있는 자들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구원의미와 제자들이 예수 님을 생각하며 꿈꾸는 것은 전혀 다른 방향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어떠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 참다운 신앙행위가 무엇인지 묵상하며 노력하여야 한다.
예수님은 물으신다. "너 희는 내가 마실 잔을 마실 수 있느냐 ?"(38절), 즉 "너희는 내가 통과하지 않으면 안될 무서운 운명의 시 련을 감당할 수 있느냐 ? 내가 당해야 할 증오, 고통, 죽음에 이르는 치욕 등을 다 감당할 수 있느 냐 ?"는 것이었다. 그들은 "예, 할 수 있습니다"(39절)하였다. 사실 그들은 그렇게 되었다.
성서에 보면 야고보는 헤로데에게 참수형을 당하였고(사도 12,2) 요한은 갖은 고생을 해가며 요한 복 음, 묵시록을 쓰면서 초대교회의 산 증인으로서 믿음의 초석을 다졌던 분이다.
세상의 지위와 안 락을 위해서도 희생과 노력이 요구되지만(입시, 입사, 경주), 오늘 복음은 하늘나라 에서의 높은 지위,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치러야 할, 걸어야 할 길이 어떤 것인가를 일러주고 있 다.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에는 제자들이 전혀 그분을 이해하지 못하 였다. 오늘 복음의 수난예고가 세 번째인데 아직도 자리다툼을 하고 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 활을 체험하고 나서야 그분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고 하 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종이 되어야 한다 고 하셨다. 참된 권위는 힘이 아니라, 아름다운 봉사를 통해서 나오는 것이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부부간에 표현할 수 있는 서로에 대한 배 려는 나의 위신을 조금도 손상치 않는다. 오히려 그것으로 더욱 나와 내 배우자가 선명히 드러날 것이 다. 그리고 그 안에 완전한 사랑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이 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주님께 나를 따르시라고 하는 때가 많 다. 이 모습은 바로 주님을 나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분으로 만들고, 오늘 복음에서 현세적인 이익만 추구 했던 그래서 예수님과 마음이 아직은 멀었던 제자들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생각할 수 있다. 이제 는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그것을 실천하고 십자가의 길을 통하여 그분을 닮아갈 수 있는 우리 되도록 노력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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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며칠 전 부터 강론모음의 팬이 되었네요~~ 푸른솔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