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은 먼저 유기를 찾아보고
유표의 죽음을 조상한 뒤 손권이 보낸 예물을 전했다.
유기는 그 자리에 유비를 불러들여 노숙과 서로 만나보게 했다.
예를 다한 뒤 후당으로 옮겨 술자리에 앉게 되자마자 노숙이 유비에게 말했다.
"황숙의 크신 이름을 들은 지 오랩니다만 인연이 없어 만나 뵙지를 못했습니다.
이제 다행이 이렇듯 뵙게 되니 실로 기쁘기 짝이 업습니다.
요사이 듣자니 황숙께서는 조조와 여러 번 싸우셨다는 데 어땠습니까?
반드시 적의 허실을 잘 아시리라 믿어 감히 묻습니다.
도대체 조조의 군사는 얼마나 되는 것 같습니까?"
유비는 미리 제갈량에게 들은 말이 있는지라
바로 말해 주지 않았다.
"저는 군사가 적고 장수가 모자라 조조가 온다는 말만 들으면
바로 달아났기 때문에 그 허실을 알지 못합니다"
"듣기에 황숙께서는 제갈량의 꾀를 빌려 두 번이나 조조의 군사를 불태움으로써
조조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는데 어찌 모른다고 말하십니까?"
노숙이 알 수 없다는 눈길로 유비를 보며 다시 물었다.
그러자 유비는 대답을 슬쩍 공명에게 넘겨 버렸다.
"공명에게 물으면 자세한 걸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공명은 어디 계십니까 ? 바라건대 한번 만나보게 해주십시오"
궁금한 것부터 알아낼 욕심으로 노숙이 그렇게 청했다.
유비는 못 이긴 체 공명을 불러들이게 하여 노숙과 만나도록 해주었다.
노숙은 공명과 처음 보는 예를 끝내기 무섭게 물었다.
"선섭의 재주와 덕망을 오래 사모해 왔으나
여지 것 뵙지 못하다가 이제야 겨우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바라건대 이제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천하의 큰일에 관해
선생의 말씀을 좀 듣고자 합니다.
그 위태로움과 평안함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조조의 간사한 꾀는 이 양이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다만 한스러운 일은 우리 힘이 그에게 미치지 못해
그때그때 피하기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갈량이 탄식처럼 그렇게 대답했다.
☆☆☆
노숙이 무얼 생각했는지 문득 물음을 바꾸었다.
"황숙께서는 앞으로도 이곳에 머물러 계실 작정이십니까?"
"우리 주공과 창오 태수 오신은 전부터 아는 사이라 하니
다음에는 그리로 의지해 가볼까 합니다"
공명은 유비도 처음 듣는 소리를 해댔다.
노숙이 속을 드러내게 만들려고 짐짓 둘러댄 말이었다.
그러나 노숙도 얼른 속을 드러내지 않고 넌지시 물어올 뿐이었다.
"오신은 양식도 넉넉하지 못하고 군사도 적어 스스로를 지켜 가기도 힘드는데
어찌 다른 사람까지 받아들이겠습니까?"
"오신의 땅이 비록 오래 있을 곳은 못 되나 이제 잠시 기댈 만은 하겠지요.
뒷일은 따로 좋은 길이 날 것입니다"
제갈량은 여전히 시치미를 떼며
마치 유비가 오래 전부터 창오로 갈 뜻을 정해 놓은 듯 말했다.
그러자 마침내 노숙이 먼저 제 속을 드러냈다.
"우리 손장군께서는 강동 여섯 군(郡)을 범처럼 걸터타고 계시는데,
군사는 날래고 양식은 넉넉합니다.
거기다가 또 우리 손장군께서는 어진 이를 우러르고 선비를 예로 맞으시니,
강동의 영웅들이 모두 그리로 모여들고 있습니다.
지금 선생께서 주군(主)을 위해 베풀 수 있는 계책으로는
믿을 만한 이를 보내 동오와 약조(約條)를 맺고
함께 큰일을 도모하는 것이 가장 나을 것입니다"
바로 공명이 기다리고 있던 말이었다.
공명은 속으로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한번 더 뜸을 들였다.
"우리 주공과 손장군은 예부터 서로 가까이 지낸 바가 없으니
가봤자 공연히 언설(言說)만 허비하게 되지 않을는지요?
거기다가 동오로 보낼 만큼
믿을 만한 이도 따로 없으니 걱정입니다"
"선생의 친 형님께서 지금 강동의 모사로 계시지 않습니까?
모르긴 해도 틀림없이 선생을 만나고 싶어하실 것입니다.
따로 믿을 만한 이가 없다면 선생께서 몸소 가보도록 하시지요.
제가 비록 재주 없으나 선생을 모시고 동오로 가서
손장군과 함께 큰일을 의논할 수 있도록 주선해 보겠습니다"
공명 쪽에서 발붙어야 할 일을
오히려 노숙 쪽에서 열을 올려 권한 셈이었다.
공명은 어지간히 됐다 싶었으나
이번에는 유비가 또 능청을 부렸다.
"공명은 내게 스승이나 다름없는 분이니 잠시라도 떨어져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어찌 그 먼 곳까지 보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고는 노숙이 두 번 세 번 권해도 공명이 동오로 가는 걸 않았다.
실로 공명과 손발이 잘 맞는 능청떨기였다.
"일이 급합니다.
바라건대 명을 받들어 강동을 한번 다녀오게 해주십시오"
이윽고 공명이 스스로 나서
유비에게 맡긴 체 공명이 가는 것을 허락했다.
☆☆☆
노숙은 곧 유비와 유기를 작별하고
공명과 더불어 동오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그로부터 60년 가까운 세월을 반복, 무상하게 이어갈
유씨와 손가의 동맹이 첫걸음을 내디딘 셈이었다.
뒷날 조조는 단가행 또는 횡삭부시라고 불리는 노래를 지었는데
거기에 이런 구절이 있다.
달은 밝고 별 드문데 까막 까치는 남으로 나네.
어떤 사람은 그 구절을 단순히 조조가
그 노래를 짓던 밤의 우연한 풍경 하나를 을은 것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대개는 달리 풀이한다.
곧 달은 조조 자신이요.
달 속에 가리워 드물어 희미해진 별은 점차 사라져 가는 군웅(群擔)들이며
남쪽으로 날아가는 까마귀와 까치는 유비와 손권을 가리키는 것이란 풀이이다.
☆☆☆
이제 와서 조조의 원래 뜻을 밝히는 것은 어려우나
적어도 당시의 형세로 보면 조조의 엄청난 군세에 놀라
유비에게 다급하게 사람을 보낸 손권이나
그런 손권에게 황망하게 달려간 유비는
달 속에 깨어 밤하늘을 나는
까마귀나 까치에 견주어질 법도 하다.
사상으로 가는 배 위에서 공명과 노숙은
손권을 만나기 전에 먼저 두 사람의 의논부터 맞추었다.
"선생께서는 우리 손장군을 뵙더라도
결코 조조의 군사가 많고 장수가 흔한 걸 바로 말씀하셔서는 아니 됩니다"
혹시라도 조조의 군세에 놀라
손권이 항복하려 들까봐 두려운 노숙이 공명에게 미리 주의를 주었다.
겉으로 나타내지는 않아도 속으로는 일이 그렇게 되는 게
노숙보다 열 배 백 배나 더 두려운 공명이 빙긋 웃으며 노숙을 안심시켰다.
"자경(子敬)의 당부가 아니라도 이 양에게는 미리 생각해 둔 말이 있습니다.
그 일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자 노숙도 마음이 놓이는 듯 그 일로 더 당부를 하지 않았다.
이윽고 배가 시상(柰桑) 에 이르자 노숙은
공명을 역관에서 잠시 쉬게 하고 혼자서 만 먼저 손권을 보러 갔다.
그때 손권은 문무(文武)의 여러 관원들을 모아 놓고 당상에서 의논 중이었다.
노숙이 돌아왔다는 말을 듣자 급히 불러들여 물었다.
"그래. 자경(子敬)께서 강하로 가서 허실을 알아보니 어떴소?"
"대략은 알아봤습니다만 천천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노숙이 그렇게 대답하자 손권은
조조에게서 온 글 한 통을 가져오게 하여 노숙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어제 조조가 사신을 통해 이 격문을 보내왔소.
나는 먼저 그 사신을 돌려보내 놓고 앞일을 의논중인데
아직 어떻게 해야할지 정하지 못했소이다.
자경께서도 한번 읽어보시오"
노숙은 손권이 내미는 격문을 받아 읽어보았다.
거기 담긴 뜻은 대략 이러했다.
<나는 천자의 명을 받들어 조칙을 앞세우고 죄 있는 자를 치러 왔소.
우리 군사의 깃발이 한번 남쪽에 나부끼니 유종은 스스로 두 손을 묶어 항복했고,
형주, 양양의 백성들도 바람에 쓸리듯 모두 귀순하였소.
이제 내게는 사나운 군사가 백만에 뛰어난 장수만도 천(千)이나 있소이다.
장군께 바라는 바는 강하(江夏)에서 나와 만나 사냥을 하면서 함께 유비를 치자는 것이오.
그런 연후 그 땅을 나누고 길이 화친을 맺는다면 그 아니 좋은 일이 있겠소이까?
부디 멀리서 보고만 계시지 말고 속히 좋은 회답을 내려주시기 바라오>
한편으로는 겁을 주고 한편으로는 달래는 글이었다.
읽기를 마친 노숙이 손권에게 물었다.
"주공의 뜻은 어떠하십니까 ?"
"여럿과 의논해 보았으나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소"
손권이 무거운 어조로 그렇게 대답했다.
적잖이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기색이었다.
허울좋은 말뿐일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욕스런 항복이나
죽기 아니면 살기의 싸움이 아닌 또 다른 길이 있다는 게 그 까닭인 듯했다.
그 자리에 모여있던 뭇 사람들 속에서
문득 장소(鬪)가 일어나 말했다.
"조조는 백만의 무리를 거느린 데다
천자의 이름까지 빌려 사방을 평정해 오고있습니다.
거기에 맞서는 것은 천명(天命)과 이치에 따르는 일이 못 됩니다.
거기다가 주공께서 큰 세력으로 조조에게 맞설 수 있게 해준 것은 장강(長江)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조조가 이미 형주를 얻었으니,
장강의 험난함은 그와 우리가 함께 하게 되어 맞 싸우기 어렵게 되고 말지 않았습니까?
어리석은 계책일지 모르나
지금으로서는 항복하는 게 가장 나을 듯합니다"
동오의 원로로서 손책의 고명(顧命) 까지 받은 장소가 그렇게 말하자
그때 것 눈치만 보고 있던 다른 모사들도 속을 드러냈다.
"자포의 말씀이 바로 하늘의 뜻에 맞습니다. 그대로 따르십시오"
그러나 손권은 무겁게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다.
부형(父兄) 3대에 걸친 창업의 어려움이 말할 수 없는 무게로
그를 짓누르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장소가 그런 손권에게 다시 말했다.
"주공께서는 지나치게 깊이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조조에게 항복하는 것이 곧 동오의 백성을 평안케 하고
강남의 여섯 군(郡)을 보전하는 길입니다"
그래도 손권은 깊게 머리를 수그린 채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 서른도 안 된 나이로는 드문 침착함과 아울러 만만찮은 수성(卞成)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윽고 말없이 일어난 손권은
갑자기 옷을 갈아입겠다며 방을 나갔다.
노숙이 얼른 그런 손권을 뒤따랐다.
아무도 없는 딴 방에 둘만 있게 되자 손권이 문득 노숙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경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어느 정도 노숙의 뜻을 짐작하고 있는지
손권은 무언가 다른 말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노숙이 결기 어린 목소리로 물음에 대답했다.
"지금 여러 사람들의 얘기를 들으니
주공을 그르쳐도 크게 그르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모두 조조에게 항복할 수 있어도
주공께서는 결코 항복하실 수 없습니다"
"그건 무슨 뜻이오?"
반가운 중에도 영문모를 소리라는 듯 손권이 다시 물었다.
☆☆☆
노숙이 열올려 까닭을 설명했다.
"이 노숙 같은 무리가 조조에게 항복한다면
조조는 저의 벼슬을 올려 고향으로 돌려보낼 것입니다.
곧 주도 군(郡)도 잃지 않게 되는 셈이지요.
그러나 주공께서 조조에게 항복한다면 다릅니다.
어찌 주공께서도 돌아가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작위랬자 겨우 후(侯)에나 봉해질 것이고,
수레 한 대에 말 한 필, 시중들며 따르는 자라야 서넛일 것입니다.
남면(南面)하고 앉아 스스로를 고라 부르기는 영영 틀린 일입니다.
저 사람들의 말은 모두 자기만을 위한 것 아니 결코 들어서는 아니 됩니다.
주공께서는 어서 대계(大計)를 정해
저들이 딴소리를 못하게 하셔야 합니다"
☆☆☆
그러자 손권이 탄식하듯 말했다.
"저들의 말이 내 바람에 크게 어긋나는 것도 사실이오.
자경(子敬)께서 말씀하신 대계(大計)가 바로 내가 생각하는 바와 같소.
아마도 하늘이 내게 자경을 내려 주신 것 같소......
그러나 조조는 얼마 전에 원소가 이끌던 무리를 모두 얻은 데다
이번에는 또 형주의 군사들까지 아울렀소.
그 세력이 너무 커서 맞 싸워도 당해내지 못할까 실로 두렵소"
노숙이 그런 손권을 격려하듯
그때 것 미루었던 일을 얘기해 주었다.
"그 일은 지나치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이번에 강하에 갔다가 제갈근의 아우인 제갈량을 이곳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에게 물으시면 조조군의 허실을 쉽게 알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면 와룡선생이라 불리는 그 제갈량이 여기 와 있단 말이오?"
손권도 제갈량의 소문을 이미 들었는지 반갑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지금 역관에서 쉬고 있습니다"
노숙이 그렇게 대답하자 손권은 기쁜 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제갈량을 보는 일만은 그리 서둘지 않았다.
"오늘은 이미 날이 저물어 가니 불러 볼 수가 없겠소.
내일 문무의 관원들을 모두 모아
장하(帳下)에서 먼저 우리 강남의 빼어난 이들을 만나보게 한 뒤에
그를 당상으로 불러 일을 의논해 봐야겠소"
어떤 면에서는 나이든 노숙보다 더 신중한 태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