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래 목사와 대구교회를 비판하는 이유
종규 형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도입부에서 “박해하는 자”가 저를 연상시키는 것이라면 참으로 유감스럽습니다. 저는 교회를 박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복음을 바로 세우려는 데 그 의도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다음 문장에서도 대구교회에 대해서는 “교회 생활에서 경험한 실제적인 인격”이라고 자찬하는 반면, 그 반대 생각에 대해서는 “교리적으로 말씀을 배운 종교인”이라고 임의적 사형선고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자유토론장에서는 다른 생각에 대해서 이러한 극단적 이분법(extreme dichotomy)은 배타적, 독점적인 사고방식으로 보여질 수 있고, 특정 언어를 선점함으로써 주인담론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의도로 보여질 수 있습니다. 대구교회가 이단 재판을 받은 것은 신 교수님 말씀처럼 단지 정치적인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교리적으로 심각한 문제들을 끊이없이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리에 매몰된 종교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대구교회의 인격의 가치를 신봉하는 자도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제 3자”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 것은 근본주의자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어떤 신학적 입장을 취하더라도 기독교를 가능케 하는 가장 최소의 조건은 바로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고신”에서 자랐고,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을 배웠으며, 수 년 동안 기장과 통합에서 전도사를 했습니다. 결국 교회가 제 체질에 맞지 않아 떠났습니다만, 어쨌든 보수신학과 진보신학을 다 맛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입장이든, 성경을 전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고 부분 첨삭을 하다 보면 여러 이방 사상들과 혼합, 가감되는 과정을 거쳐 일종의 철학으로 진화할 가능성이 높고, 결국 그 종착지는 사이비나 무신론으로 귀결되는 것이 교회사의 교훈입니다.
워치만 니의 사상을 잘 관찰해 보면, 중국의 대동사상과 복음이 부분적 교집합으로 탄생되었고, 이 사상과 이현래의 개인적 경험의 합집합이 현재 대구교회입니다. 생명을 살린다는 그럴 듯한 가치를 내걸고 있지만 이 생명은 기독교가 말하는 생명과는 다릅니다. 대구교회의 생명이 물리적, 육체적인 생명에 집중되어 있는 반면, 기독교의 생명은 육체적인 생명과 영적인 생명을 포괄하는 존재의 근원적 생명을 가리킵니다.
어제 대구교회 교리에는 관심이 없지만 먹고 놀고 어울리는 것이 좋아서(자기 말) 대구교회에 머물고 있는 한 자매로부터 충고의 메시지가 저에게 왔습니다. 그 내용은 이현래 목사를 너무 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목사가 어떤 주장을 하더라도 하나님에게 맡겨야지 우리가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엄마도 그렇게 살았는데 인생이 잘 풀리지 않았고, 자기도 다니던 교회 목사와 좋지 않게 나온 후, 사업에 실패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그녀의 입장은 미신적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사실 단순한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면 시간과 수고를 투자해서 그렇게 할 필요가 전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생명 사랑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해 주셔야 할 것이며, 이 자리에서 제가 왜 이현래 목사를 비판하는지 그 이유를 좀 밝혀야겠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의 입장은 신학적 이유는 당연히 포함되지만, 저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바로 정신분석의 프리즘을 통해서 이현래 목사를 보는 것입니다. 표층적 차원에서 보면, 그는 초라하고 비실비실하여 언제라도 넘어질 것 같은 노인의 형색은 측은지심을 발휘하게 하지만, 심층적 차원에서는 그가 수많은 사람들을 현혹하여 만들어가고 있는 세계가 인간을 사회의 일원으로 정상발육 시키는 것이 아니라 유아기적 모-자관계처럼 발육하지 못한 채, 상상계에 머물러 있다는 점입니다. 그의 주장 역시 시시각각으로 달라져서 일목요연하게 정의하기가 어렵지만 그가 지향하는 세계는 분명 지금도 살아 역사하는 “예수님”이 아니라, 2,000년 전에 살다 죽어버린 인간 “예수”처럼, 자신을 중심으로 제자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함께 살아가는 갈릴리 구조를 모방함으로써, 모든 인류를 자기의 품으로 와서 안식하라는 망상적 퍼포먼스를 통해서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묘사하는 트라우마의 재현적 성격이 짙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러한 표층적 차원에서 드러나는 그의 모습을 통해서 몇몇 사람들은 “이현래 공동체” 또는 “그가 새시대를 열었다”라고 과찬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에 자신에 의해서 새시대를 열었다고 추앙받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재록, 이만희, 정명석, 안상홍, 문선명, 박태선 등 모두 그럴듯한 명분으로 이 반열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탄은 표층적 차원을 공략하기보다는 심층적 차원의 틈을 뚫고 들어온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제가 대구교회를 바라보는 진단 키트는 바로 라캉의 정신계의 세 질서인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입니다. 이 관점에서 대구교회를 바라보면 너무 선명하게 그림이 그려집니다. 냉정하게 말씀드리면, 현재 대구교회는 엄마의 젖가슴에 안긴 아기처럼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 엄마만이 유일한 세계로 인식하면서 이 땅에는 없는 에덴의 꿈을 꾸며 상상의 세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가장 강조하는 것이 오갈데 없는 소외된 자들을 위로한다는 명분입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소외와 결핍으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그렇게 살도록 처형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대구교회는 결코 소외와 결핍을 치료할 수 없으며, 있다하더라도 모든 인간의 욕망이 그렇듯이 그것은 일시적일 뿐입니다. 이러한 욕망은 금새 저러한 욕망으로 옮겨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세계는 특수한 소수그룹 안에서 동질감을 느끼는 세계가 아니라 모든 사람과 함께 어우러지면서 하나님의 자녀들에 의해 만들어가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러나 대구교회는 얼핏보면 개방적인 사회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문화의 세계로 진입하지 못한 자연상태에 머물고자 하는 사회입니다. 기존교회의 교리를 비판하지만 그들 역시 불문의 교리가 엄연히 존재하고, 기독교의 전통과 역사의 혜택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그것들을 단칼에 전복, 해체시키고, 예수보다는 한 사람을 본(model)으로 삼고 놋뱀으로 치켜세우는 것이 문선명, 박태선, 이만희 집단과 무엇이 다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마지막 복음”의 인간관계는 조건반사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가령, 저하고 아주 친했던 S형님은 요즘 저의 전화나 문자를 받지도, 보지도 않습니다. 그 이유를 제 3자를 통해서 확인해 보니 제가 대구교회를 떠났고 자기가 높이시는 이현래 목사를 비판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예상한 대로였습니다. 이것은 개인적 성향이라고 취급할 수 도 있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이 교회의 보편적 양식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 자유토론장은 예외가 되겠지만.
사실 놀라운 것은 실재계인데 이것은 보다 영적인 차원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갈릴리 예수처럼 행동하는 것은 교회를 하나로 연합시키는데 하나의 카텍시스(cathexis)를 극대화시킬 수 는 있겠지만 자신도 모르게 십자가를 지신 예수의 자리를 찬탈하여 그가 그 영광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서 동영상 자료를 하나 올리겠습니다. 처음에는 일부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경과 할수록 대구교회 사람들의 보편적 양식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만일 이것이 아니라면 왜 제대로 교육시키지 않습니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비디오를 보시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feedback을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