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권
제 8장 강호제일보(江湖第一步)
-1
장경각(藏經閣).
장격각의 한 선방 안에서 현수는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의 앞에
는 사륜거에 몸을 의지한 천기선사가 침중한 안색으로 그를 내려
보고 있었다. 문득 천기선사가 신음을 흘렸다.
"으음....... 현수."
"네."
"너를 이렇게 부르는 것도 오늘로서 마지막이 되겠구나."
"사숙님......."
현수의 음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동안 얼마나 정(情)이 든
천기선사인가?
천뢰선사는 냉혹무비할 만큼 혹독한 수련을 시키며 두터운 정을
느끼게 했지만 천기선사는 정반대로, 현수는 지난 일 년 간 자애
롭기 그지없는 천기선사에게 친조부 이상의 따뜻한 정을 느꼈던 것
이다.
그런데 이제 헤어져야 하다니.......
천기선사는 무릎에 놓여있던 가죽주머니를 건네주었다.
"자, 현수, 이것을 받아라."
현수는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것은 네가 소림에 들어왔을 때 갖고 있던 물건들이다."
그의 준미한 눈썹이 미미하게 떨렸다.
'내 물건.......'
"그 물건들은 모두 긴히 쓰일 용도가 있는 것들이다. 잘 간수해
라."
천기선사는 가죽주머니를 주고 나서 고개를 들었다.
"현수, 사륜거를 밀어라. 밖에 나가고 싶구나."
현수는 공손히 일어나 사륜거를 밀고 나갔다.
"콜록! 콜록......."
천기선사는 갑자기 심한 기침을 했다.
그의 기침은 요즘 들어 특히 심해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얼굴
의 주름살도 더욱 늘어 났으며 안색도 극히 초췌했다.
현수는 내심 탄식을 했다.
'아! 사숙님께서는 요즘 와서 더욱 건강이 말이 아니시니, 걱정스
럽기만 하구나.'
천기선사는 간신히 기침을 진정시키고 나서 말했다.
"흠, 이렇게 지내는 것도 오늘이 끝이 되겠군."
사륜거는 장경각을 벗어나 화원에 들어섰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천기선사는 탄성을 발했다.
"허어! 기이한 일이로다. 네가 처음 이 장경각에 올 때도 눈이 오
더니 오늘도 눈이 오는구나. 그러고 보니 꼭 일 년이 지난 셈이
군."
현수는 멍하니 잿빛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눈발을 바라보았고
천기선사는 눈을 맞으며 담담히 말했다.
"현수, 너는 이미 노납이 알고 있는 것을 모두 터득했다."
'사숙님.......'
"노납이 장담하건대 현 무림에서 너를 당할 자는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현수는 묵묵히 사륜거를 밀고 있었다.
칠흑같이 검고 윤기나는 그의 긴 머리는 여전히 허리 뒤로 넘겨져
단정히 묶여 있었고, 회의승포와 묘한 조화를 이루어 탈속한 기품
을 자아냈다.
떨어지는 눈송이가 그의 준미한 얼굴을 스치는 순간 천기선사는
여전히 담담하되 약간 침중하게 덧붙였다.
"그러나 강호란 원래 험난하기 그지없는 곳이다. 결코 무공만으
로 통하는 곳이 아니다. 더구나 수많은 기인이사(奇人異士)와 괴
인들의 드러나지 않은 무학은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그는 눈가에 수심을 담으며 현수를 돌아다 보았다.
"현수."
"네, 사부님"
그의 음성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너는 소림을 내려가는 즉시 두 사람을 찾아가라.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온갖 지혜를 동원하여 그 두 사람의 모든 것
을 배워라."
현수의 고요하던 눈빛이 현기를 발하고 있었다.
"첫 번째 인물은 호북성 대홍산(大洪山) 천화곡(天火谷)에 살고
있는 광검절심(狂劍絶心) 유무심(有無心)이다. 그로부터는 불영구
검(佛影九劍)의 일곱 군데 헛점을 메울 검도(劍道)를 배워야 한
다."
"광검절심......."
현수가 나직이 되뇌이자 천기선사는 부언했다.
"광검절심, 무림에서 그를 아는 자는 거의 없다. 실상 그로 말하
면 천하무림에서 검법으로 가장 뛰어난 삼 인 중에 으뜸이나 그의
존재는 거의 안개에 가려 있다. 그러나 광검절심 유무심, 너는 그
에게서 불영검법을 완성시킬 수 있을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사부님."
현수의 가슴 속에는 이미 광검절심 유무심이란 존재가 깊이 들어
와 박히고 있었다.
"두 번째 인물은... 콜록! 콜... 록......."
천기선사는 다시 기침을 했다.
"사숙님... 바람이 차니 안으로......."
"강서성(江西省) 남창(南昌)의 만경루(萬京褸)를 찾아 만사귀재
(萬事鬼才) 호불귀(胡佛鬼)를 만나라. 너는 그에게서 무공을 전혀
모르고도 무림을 헤쳐나갈 수 있는 수많은 수법을 터득할 것이다."
이어 천기선사는 품속에서 두 개의 고전(古錢)을 꺼냈는데 그것은
녹이 슬고 매우 오래된 동전이었다.
"그들을 만났을 때 이것을 보여 줘라."
현수는 묵묵히 두 개의 고전을 받았다.
사륜거는 눈 위를 스르르 굴러갔고 천기선사는 아쉬운 듯 쏟아지는
눈발을 손으로 받으며 말했다.
"현수, 오늘 밤 너는 이곳을 떠나라."
현수의 얼굴이 굳어졌다.
"대사형은 찾아볼 필요가 없다. 이미 대사형과 이사형은 폐관에
들어갔다."
"아!"
"소림의 산문 오백 리 밖을 벗어나기 이전에는 절대 너의 본 모습
을 타인에게 보이지 마라."
천기선사의 얼굴은 다소 어둡게 변했다.
"천려일실이라고 했다. 무엇이든 조심하는 게 좋지."
눈은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사륜거는 함박눈 속을 지나 장경각
안으로 들어갔다.
그날 밤은 폭설이 쏟아졌다.
폭설에 묻힌 소림사를 뚫고 한 줄기 섬전(閃電)과도 같은 인영이
날아갔다. 그 인영은 소리도 없이 소림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하후성.
그것은 바로 천하제일의 기재인 그가 무림에 나간 순간이었다. 눈
보라를 뚫고 그가 첫 출도를 한 것이다.
호북성(湖北省) 무창(武昌).
호북 제일의 성도(省都)이자 장강(長江)의 수로(水路)가 활발히
발달된 대성(大城)으로 번화하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한 명의 백의 기청년(白衣奇靑年).
눈이 그친 무창성에 표표히 입성한 그는 이십여 세 정도의 나이로
실로 비범하고 기이한 신태의 미청년이었다.
눈같이 흰 백삼에 머리에도 역시 백건(白巾)을 둘렀으며 얼굴은
관옥같이 희고 깨끗하여 그 준수함이 선인을 방불케 했다. 온화하
고 부드러운 기품이 은연중 그의 전신에서 풍겨 나와 탈속함을 느
끼게 하는 것이었다.
특히 물같이 고요한 눈은 보는 이로 하여금 평화로움을 느끼게 하
고 있었다. 또한 그는 매우 특이한 머리모양을 가지고 있었는데
칠흑같이 검고 윤기 나는 긴 머리칼을 뒤로 모아 흰 띠로 묶고 허
리까지 늘어뜨렸다.
이 같은 모양은 그야말로 옥골선인(玉骨仙人)의 풍모로써 보는 이
마다 찬탄을 금치 못했다.
이 절세의 기청년, 그는 바로 사 년 반 동안 소림사에서 현수란 법
명으로 무공을 익혀온 하후성(夏侯星)이었다.
마침내 무창성에 입성함으로써 하후성의 강호 출도는 그 일보(一
步)를 내딛게 된 것이었다.
무창성은 대단히 번잡하고 커다란 성도(城都)였다.
하후성은 이렇게 큰 도성은 처음 대해본 것으로, 그는 그때까지의
세월을 오직 저 북방의 한적한 하란산과 숭산의 소림사에서만 보
내왔으므로 무창성의 번화함이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음, 굉장히 크고 복잡하구나.'
하후성은 내심 놀라며 어깨를 부딪는 인파를 헤치고 무창성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나 그의 곁을 지나던 행인들은 한결같이 하후
성을 보자 크게 경탄하며 발걸음을 멈추고 있었다.
'오! 세상에 저토록 멋진 청년이 있었나?'
행인들은 모두 공통된 생각에 탄성을 발했다.
회웅루(會雄樓).
무창성에서 꽤 알려진 커다란 객점이었다.
하후성은 붉은 현판에 금빛 글씨로 씌어진 회웅루를 발견하자 문
득 시장기를 느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결심하고 회웅루의 계단
으로 올라섰다.
회웅루는 이 층의 객점으로 안에서 술 마시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
나왔다. 그가 계단에 올라서자 안에서 점소이로 보이는 젊은 장한
이 황급히 나와 맞았다.
"헤헤헤... 어서 오십시요. 공(公)......."
점소이는 말을 끊고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는 멍청히 하후성의 얼굴을 바라보며 넋을 잃어버렸다. 하후성
의 투명할 정도로 흰 얼굴과 너무나도 준수한 용모에 정신을 빼앗
기고 만 것이었다.
점소이는 내심 더듬거리며 중얼거렸다.
'세, 세상에... 이렇게 잘 생긴 사람이 있었다니... 내 예전에 호
북제일의 기녀(妓女)인 염교월(艶嬌月)을 보고 반한 적이 있었지
만, 염교월도 이 공자 옆에 서면 당장 빛을 잃고 말 것이다.)
하후성은 점소이가 멍청히 자신을 바라보며 서 있자 담담하게 웃
으며 온화한 음성으로 물었다.
"안에 자리가 있소?"
점소이는 그제서야 정신을 번쩍 차리며 어색하게 낯을 붉혔다.
"아, 네네! 있고말고요. 공자님,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점소이는 하후성을 이 층으로 안내하기 위해 앞장서며 속으로 자
신을 나무랐다.
'이런... 정초(正初)부터 정신도 없지, 여자도 아닌 남자에게 넋
을 뺏기다니.......'
한편 하후성은 객점이라면 난생 처음 들어온 것이었다.
그는 일 층이 왁자지껄 빽빽한 것을 신기한 눈으로 보며 점소이를
따라 이 층으로 오르고 있었다.
"헤헤... 공자님, 일 층은 온통 잡인들이 우글거려 공자님같은 점
잖은 분이 음식을 드실 곳이 못됩니다. 이 층은 비교적 조용 합
죠. 헤헤......."
"고맙소."
하후성은 부드럽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이 층에 오르니 사람도 드문드문 앉았을 뿐 아니라 분위기도
한결 품위가 있게 꾸며져 있었다. 이 층은 비교적 부자나 신분이
높은 자들이 이용하기 때문이었다.
하후성이 점소이를 따라 이층에 오르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
제히 그에게 집중됐다.
손님들의 얼굴에는 한결같이 경탄의 기색이 떠올랐다. 그들은 모
두 신비로운 정도로 풍모가 비범한 하후성에 대해 강렬한 호기심
을 느끼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후성은 천천히 걸어 창가 쪽에 있는 빈 자리로 가 앉았다. 그
가 자리에 앉자 중인들은 모두 조그만 소리로 저마다 수군거렸고
그 소리들은 모두 하후성의 귀에 똑똑히 들려왔다.
"허어! 정말 잘 생긴 청년이군. 장노이(張老二), 자네 저렇게 잘
생긴 공자를 본 적이 있나?"
걸쭉한 음성에 이어 다소 탁한 장한의 응답이 들려왔다.
"없네. 과거 천풍보(天風堡)에서 당금무림의 중원사룡(中原四龍)
중 한 명인 옥면가람(玉面伽藍) 남궁수(南宮秀)를 본 적이 있네만
그도 저 청년과는 비교도 되지 않네."
그 자의 입맛 다시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쩝! 정말 내가 저 청년의 반만큼이라도 생겼으면 천하의 미녀란
미녀는 모두 후릴 수 있겠는데......."
"클클클... 왕팔(王八), 동경에 낯짝이나 비쳐보고 그런 소리하
게. 자네는 그저 지금 있는 호박 같은 여편네의 엉덩이나 두들기고
사는 게 분수에 맞으니까."
처음 음성의 비웃음에 왕팔이라는 장한은 투덜댔다.
"빌어먹을! 그렇게 말하는 너는 얼마나 잘 났느냐? 여편네가 그러
는데 너보다는 내가 훨씬 낫다더라!"
하후성은 가만히 그들의 말을 듣다 입가에 고소를 지었고 점소이
는 잔뜩 기대를 품고 정중히 물었다.
"공자님, 무엇을 드실까요?"
하후성은 그 말에 일시지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는 객점에 무
슨 음식이 있는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점소이가 묻지도 않
았는데 곧 떠벌이기 시작했다.
"헤헤... 저희 회웅루에는 여러 가지 산해진미가 있습죠. 먼저 연
자삼정탕(蓮子三精蕩)에다 상어의 지느러미를 볶은 일급요리, 죽
순 삶아 데친 것, 오리 혓바닥 볶음, 진귀한 설삼(雪參)에 잉어를
고은 삼리탕(蔘鯉蕩), 어수육(魚水肉), 백빙전(白氷全)에 또 그
밖에도......."
점소이의 수다는 끝없이 이어졌고 하후성은 그만 멍해지고 말았다.
'모두가 처음 듣는 이름인데... 더구나 나는 육식을 하지 않으
니.......'
"나에게 소채 한 접시와 국수 한 그릇만 갖다 주시오."
점소이의 안색이 확 변했다.
"소, 소채하고 국수요?"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이 휘둥그레졌으나 실망하지 않고 다
시 물었다.
"그럼 술은 뭘로 하실까요? 산동명주(山東名酒) 죽엽청(竹葉靑)에
천일향잔(千日香棧), 녹각비류주(綠角秘柳酒), 여아홍(女兒紅),
금병산(金甁散)......."
하후성은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오. 나는 술을 못하니......."
그 순간 주위에서 왁자하게 폭소가 터져 나왔다.
"핫핫핫... 생긴 것은 멀쩡한데 술도 못 먹다니 정말 웃기는군!"
"프흐흐... 왕팔! 혹시 저 친구 여자 아닌가? 남자치곤 너무 반
반하단 말야. 더군다나 술도 못하니!"
크게 떠드는 자들은 바로 장삼과 왕팔이라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하후성은 그들의 야유에 전혀 개의치 않았고 점소이는 기
어코 실망한 듯 투덜대면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하후성은 담담한 신색으로 주위를 살펴보았다. 잠시 후 그의 고요
하던 눈이 무엇을 발견했는지 이채를 발했다.
그와 반대쪽에 있는 구석진 자리에서 한 명의 흑삼(黑衫)을 입은
중년문사가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
다.
그는 대략 삼십오륙 세 쯤 되어 보였는데 새카만 흑의에 머리에는
문사건을 쓰고 있었으며 두 눈은 담담하고 용모도 청수하기 그지
없었다.
한 눈에도 보통 인물이 아님을 느낄 수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치자 중년 흑의문사의 담담하던
눈에서도 역시 기이한 빛이 일어났다.
그는 곧 하후성에게 호감어린 미소를 보냈고 하후성도 온화한 미
소로 답했다.
이윽고 하후성이 주문한 소채 한 접시와 국수가 나왔다. 그것은
주위에서 식사하는 손님들과 크게 대조를 이룰 정도로 조촐하고
보잘 것 없는 음식이었으나 하후성은 사 년 반 동안 소림사에서 이
런 식사마저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맛있게 음식을 들고 있었
다.
우당탕! 우지-- 끈!
아래층에서 갑자기 요란하게 탁자 따위가 부서지는 소리가 울렸다.
"어이쿠!"
누군가의 비명에 이어 앙칼진 소녀의 뾰족한 힐책이 들려왔다.
"이 바보같은 놈아! 저리 썩 비키지 못해!"
그 뿐만이 아니었다.
찰싹!
"아이쿠우!"
뺨을 치는 소리와 더불어 듣기에도 무참한 비명이 터졌다.
그리고 잠시 후 계단을 쿵쿵 밟으며 올라오는 음향이 중인들의 관
심을 온통 집중시켰다.
이 층에서 식사하던 중인들은 큰 호기심을 보이며 이 층 입구를
향해 시선을 집중시켰고 두 명의 여인들이 올라왔다.
그 두 명은 각기 새빨간 홍의와 눈같이 흰 백의를 입은 절세의 미
소녀들이었는데 그 중 홍의소녀는 전신에 찰싹 들러붙은 홍의를
입고 있어 육체의 굴곡이 완연히 드러나 몹시 도발적인 느낌이 들
었다.
특히 백설같은 피부에 살구같이 또렷한 눈은 매우 앙칼지면서도
매혹적인 미색을 풍겼다.
반면 백의소녀는 고귀하고 내성적이며 기품 있는 용모였다. 큰 눈
은 깊은 지혜를 담은 듯 했으며 눈같이 흰 피부와 고운 아미(峨眉
) 등은 말할 수 없이 그윽함을 느끼게 했다.
두 소녀는 모두 십칠팔 세 정도의 절세 미녀들로서 홍의소녀가 조
금 어려 보였다. 그러나 홍의소녀는 왼손에 채찍을 감아쥐고 있었
으며 중인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몰리자 살구씨 같이 야멸찬 두 눈
을 부릅뜨며 매서운 살기를 드러냈다.
그 바람에 중인들은 그만 찔끔하여 모두 고개를 돌리거나 숙이고
말았다. 실로 기(氣)가 당당하고 오만한 소녀였다.
하후성도 그녀들을 보게 되었다. 그는 두 소녀의 아름다움에 매우
감탄했다.
'정말 아름다운 소녀들이구나.'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단순한 감정일 뿐이었다. 그는 그저 두
송이의 아름다운 꽃(花)을 보는 기분이 들었을 뿐 담담한 그의 마
음은 물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그런 표정을 유심히 바라보는 눈길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흑의를 입은 중년문사로써 그는 기이한 미소를 지으
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홍의소녀는 오만한 눈초리로 주위를 둘러보다 하후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
그녀는 탄성을 발하는 표정을 지으며 눈빛이 야릇해졌다.
마침 하후성이 그녀와 눈길이 마주치자 담담하게 미소를 지어 보
였다. 그러자 홍의소녀의 얼굴에 은은한 홍조가 떠오르며 자신도
모르게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살짝 웃었다.
그녀의 옆에 있던 백의소녀가 주위를 살피다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말했다.
"영매(鈴妹), 저곳이 자리가 좋은 것 같으니 앉아서 식사하자."
그제서야 홍의소녀는 정신을 퍼뜩 차리고 대답했다.
"아! 네, 언니......."
그녀는 백의소녀가 걸어가는 대로 따라가 자리에 앉았다.
그 자리는 하후성과 중년문사의 꼭 중간지점으로 홍의소녀는 자리
에 앉은 이후에도 힐끔힐끔 하후성을 응시하곤 했다.
백의소녀는 그녀의 태도에 이상한 느낌을 받고 내심 중얼거렸다.
'영매가 오늘따라 왜 이러지?'
그녀는 다시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 또한 하후성이 천천히 식사하는 모습을 발
견하고는 내심 탄성을 발하고 말았다.
'아! 정말 대단한 미공자(美公子)구나!'
그녀는 내심 짚히는 것이 있었다.
'훗! 그러고 보니 영매가 바로 저 사람 때문에.......'
백의소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저 사람은 무공을 모르는 것 같으니, 좀 아쉬운 느낌이
드는구나.'
홍의소녀는 백의소녀가 자신의 내심을 눈치 챈 것을 느꼈다. 그
녀는 그만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숙여 버렸다. 조금 전까지의 오
만무례하고 방자했던 모습과는 퍽이나 대조적이었다.
하후성은 식사를 끝내고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창성의 번화가는 아직도 그의 눈에 신기하게만 보였다. 층층누
각의 커다란 저택의 지붕들이 첩첩이 보이고 그 지붕 위에는 눈이
하얗게 덮여 있었다.
'정말 이곳은 매우 큰 곳이구나.'
하후성이 내심 이렇게 중얼거릴 때 문득 그의 귓전에 담담하고 냉
랭한 음성이 들렸다.
"공자, 합석을 해도 되겠소?"
하후성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고 그의 눈 앞에는 흑의중년문사가
미소를 띈 채 서 있었다. 하후성은 아까부터 그에게 호감을 느끼
던 터였기에 빙그레 웃어 보이며 정중히 말했다.
"앉으십시오."
중년문사는 사의를 표하며 앉았다. 이어 그는 청수한 얼굴에 미소
를 지으며 다소 차가운 어투로 말했다.
"소협의 기우가 워낙 헌앙하여 소생이 감히 합석을 청한 것이니
너무 허물치 말아주시오."
하후성은 빙긋 웃었다.
"너무 과찬이십이다. 오히려 제가 송구스럽습니다."
흑의문사는 담담한 눈에 기이한 광채를 발하며 자기소개를 했다.
"소생은 위전풍(韋全風)이라 하오."
하후성은 자신도 모르게 합장을 했다.
"아! 위형이셨군요. 소제는 하후성이라 합니다."
"하후성!"
갑자기 흑의문사, 즉 위전풍은 크게 놀란 듯 부르짖었다.
그의 눈빛이 기이하게 변하며 안색이 굳어지더니 곧 경외지심을
나타내며 포권하는 것이었다.
"아! 실례 했습니다. 설마하니 소협께서 대명이 쟁쟁한 환영신룡
(幻影神龍) 하후성 소협이신 줄은 꿈에도 몰랐소이다."
실로 뜻밖의 일이 벌어지자 하후성은 그야말로 어리둥절해지고 말
았다.
'이게 무슨 말인가? 환영신룡이라니?'
하후성은 의혹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반면 위전풍은 정중히 말하
고 있었다.
"보통 분이 아닌 줄은 알았으나 설마 꼬리를 보이지 않는다는 신
룡, 환영신룡이신 줄은 몰랐소이다."
하후성은 어이가 없었다.
"아뭏든 하후소협같은 기인을 만나게 되어 정말 반갑소이다."
위전풍은 하후성이 뭐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계속 말했다.
몇 번씩이나 입을 열려다 말을 하지 못한 하후성은 그만 쓴 웃음
을 짓고 말았다.
'아무래도 나와 동명이인인 고수가 있는 모양인데, 그만 나도 모
르게 그의 이름을 빌린 꼴이 되고 말았군.'
하후성은 뒤늦게 자신의 존재를 부인해 보았자 상대가 믿을 것 같
지도 않아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객점 안은 아주 조용해져 있었다.
그것은 주루 안에 있던 무림인들이 모두 위전풍이 말한 것을 들었
기 때문이었다.
"아아, 환영신룡!"
중인들은 대경하여 안색이 변하고 있었고 특히 얼마 전 하후성을
비웃던 장삼과 왕팔 두 장한은 안색이 잿빛이 되어 슬금슬금 눈치
를 보며 벌써부터 줄행랑을 치려는 중이었다.
조금 떨어진 탁자에 있던 홍의소녀와 백의소녀도 크게 놀란 눈치
였다.
'음. 저들의 태도를 보니 황영신룡이란 자는 정말 보통 인물이 아
닌 모양이구나. 대체 누구이길래?'
하후성은 의혹에 싸여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일 층 계단 쪽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어우러져 들
려왔다.
"핫핫핫......."
다시 새로운 인물들이 계단 위로 올라섰는데 그들은 한 명의 칠순
(七旬) 가량 되어 보이는 백발노인과 두 명의 청년이었다.
백발노인은 칠십이 넘은 나이였으나 정정한데다 눈빛이 섬뜩할 정
도로 예리했으며 두 팔이 유난히 긴 데다 입고 있는 마의를 간편
히 걷고 있어 무척 활달한 인상을 주었다.
두 명의 청년은 모두 비범한 모습으로, 우측의 청년은 황의를 입
고 있었으며 약간 각이 진 얼굴에 피부빛은 건강한 화색(和色)을
띄고 있었다. 인중지룡(人中之龍)을 방불케 할 준수하고도 비범한
모습이었다.
좌측의 청년은 갈의를 입고 있었으며 얼굴이 다소 검은 빛을 띄었
으나 오관이 단정하고 두 눈이 뚜렷하여 역시 비범하고 준수해 보
였다.
세 사람 중 마의노인(麻衣老人)을 발견하자 위전풍의 안색이 갑자
기 가볍게 변했다. 그는 슬쩍 얼굴을 그의 반대쪽으로 돌리더니
몸을 일으켰다.
"하후형, 소생은 볼 일이 있어 먼저 가보겠소. 우리는 천풍보(天
風堡)에서 어쩌면 다시 만나게 될 것이오."
하후성은 그의 갑작스런 태도에 어리둥절해졌으나 위전풍은 그의
답도 듣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바삐 밑으로 내려가 버렸다.
'위형(韋兄)이 갑자기 왜 저럴까?'
하후성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저었으나 곧 느끼는 것이 있
었다.
'음. 아마 저 노인과 무슨 관계가 있나 보군.'
하후성이 이렇게 생각할 때 자리에 앉아있던 홍의소녀와 백의소녀
가 백발노인을 보더니 모두 반색을 지으며 벌떡 일어났다.
홍의소녀가 먼저 명랑하게 외쳤다.
"숙부님! 이쪽이에요."
백발노인은 곧 그녀를 발견하고는 껄껄 웃으며 그녀들에게 다가갔
다.
"허허허... 이 계집애야! 도대체 그동안 어디에 가 있었기에 이
숙부로 하여금 찾지도 못하고 애먹게 만들었느냐?"
홍의소녀는 생긋 웃으며 교소를 날렸다.
"호호호... 미안해요, 숙부님. 오는 길에 그만 황보 언니를 만나
게 되어 약속을 못 지켰지 뭐예요."
그러나 그 말에 얼굴이 거무스레한 갈의청년이 눈살을 찌푸리며
나무랐다.
"소령(素鈴)아! 너는 우리가 걱정하는 것도 상관치 않았단 말이
냐?"
백의소녀가 얼굴을 붉히며 청아한 음성으로 말했다.
"팽소협, 영매만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이 일은 제게 책임이 있
어요."
그러자 팽이라 불리운 갈의청년은 그만 머쓱해져 입을 다물고 말
았다. 그는 백의소녀를 전부터 알며 또한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
았다.
황의청년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핫핫핫... 팽형, 이제 됐으니 그만 하고 자리에 앉읍시다."
황의청년의 말에 일행은 모두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홍
의 소녀는 하후성을 힐끗 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일행에게 뭐라고
소곤거렸다.
그들 일행은 모두 깜짝 놀란 듯 일제히 안색이 변했고, 이어 백발
노인은 갑자기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성큼성큼 하후성에게 다가갔
다. 하후성은 이미 홍의소녀가 그들에게 무슨 얘기를 했는지 듣고
있었으나 모르는 척 창 밖만 바라보았다.
마의노인은 그의 옆까지 다가와 헛기침 했다.
"험! 소협, 좀 실례해도 되겠소?"
하후성은 고개를 돌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네. 앉으십시오. 노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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