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十二章 冷面無敵
똑똑!
철군악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눈부신 햇살이 창문을 통해 방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들어오시오.”
끼익!
철군악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방해가 되지 않았나 모르겠군요.”
철군악의 얼굴에 의외의 빛이 떠올랐다. 새침한 얼굴로 말을 꺼내는 사람은 다름 아닌 송난령이었기 때문이다.
“괜찮소.”
철군악은 침상에 걸터앉으며 송난령에게 의자를 권했다.
송난령은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서도 눈을 내리깐 채 자신의 옷소매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철군악은 약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불안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송난령의 태도에서 평소의 쾌활한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할 말이 있소?”
송난령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해보시오.”
“저……”
송난령은 용기가 나지 않는지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사실은 사과를 드리러 왔어요.”
“……?”
힘겹게 고개를 들어 철군악을 바라보는 송난령의 눈이 기이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저번에 무턱대고 화를 낸 것, 제 잘못이에요. 당신이 설마 그렇게 강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거든요.”
철군악은 피식 실소를 흘렸다.
송난령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꽤나 심각한 일인 줄 알고 있었는데, 듣고 보니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지 않은가.
하나, 철군악의 생각과는 달리 송난령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사실 그녀가 이처럼 철군악에게 사과를 하기까지는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했다. 그녀는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오늘 아침에야 마음을 굳게 먹고 철군악을 찾아 나선 것이다.
자존심이 상해 그냥 모른 척 지나갈까도 생각해 보았다. 어차피 그냥 모른 척한다면 그까짓 거야 아무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왜 그런지 알 순 없었지만, 어느새 꼭 사과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그녀의 의식을 지배한 것이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오.”
잔뜩 심각한 표정으로 철군악의 입술을 뚫어져라 보고 있던 송난령의 얼굴이 그제서야 밝아졌다.
“그럼…… 제 사과를 받아 주시는 건가요?”
“받아 주고 말 것도 없소.”
철군악이 무뚝뚝하게 대꾸했지만, 송난령은 환한 얼굴로 재잘거렸다.
“고마워요. 당신은 어떨지 몰라도 사실…… 저는 많이 고민했어요. 당신이 사과를 받아 주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얼마나 속을 썩였는데요.”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환한 표정으로 쫑알거리는 송난령의 모습이 오늘따라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철군악은 왠지 알 수 없는 흥겨움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는 그런 일이 있어도 고민하지 마시오. 나는 그렇게 속 좁은 위인이 아니오.”
철군악의 농담에 송난령이 짐짓 샐쭉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피이…… 당신은 언제나 냉막한 얼굴로 있는데, 당신이 화가 났는지 안 났는지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철군악이 가만히 실소만 흘리고 있자 송난령이 참지 못하고 깔깔거렸다.
“푸훗……!”
“왜 웃소?”
“그냥…… 당신의 웃는 모습이 귀여워서요.”
철군악은 어이가 없는지 송난령을 빤히 쳐다보았다.
“허, 참! 말만한 처녀가 외간남자보고 귀엽다니, 정말……”
분위기가 금세 부드러워졌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만난 연인처럼 서로 마주보며 담소를 나누느라 여념이 없었다.
한참 깔깔거리며 얘기하느라 정신이 없던 송난령이 갑자기 정색을 하며 철군악을 바라보았다.
“내 정신 좀 봐! 당신께 긴히 할 말이 있어요.”
철군악은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부께서 당신을 보고 싶대요.”
“검제 냉좌기 대협을 말하는 것이오?”
“예! 사부께서 꼭 보잔다고 당신에게 은밀히 전하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흠……!”
그는 검제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물론 검제 또한 그를 알지 못할 것이다.
한데, 왜 난데없이 철군악을 보려 하는 것일까?
철군악은 마음 한구석에 진한 의문이 피어올랐으나, 송난령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검제가 그를 보고자 하는 데는 분명히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고, 모든 궁금증은 만나 보면 자연히 풀릴 것이다.
그로서는 서두르거나 조바심을 낼 이유가 전혀 없었다.
철군악이 승낙의 표시를 하자 송난령은 예의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화제를 바꾸었다.
“오늘이 대회 마지막 날인데 당신은 자신이 있나요?”
“글쎄……”
“그런 대답이 어디 있어요?”
철군악은 투정을 부리는 듯한 송난령의 모습을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당신도 잘 알겠지만, 이번에 겨루게 될 사람은 하나같이 백년에 한 번 볼까말까 한 절세의 기재들이오. 물론, 나 또한 그들에게 지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결과는 나와 봐야 아는 것이오. 함부로 단언할 수 없소.”
송난령이 빛나는 눈으로 철군악을 올려다보며 대꾸했다.
“당신이 꼭 우승하길 빌겠어요.”
“고맙소.”
마주보는 두 사람의 눈이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 * *
철군악은 아침식사를 가볍게 마친 후 연무장으로 나갔다.
그가 송난령과 함께 연무장에 막 도착했을 때, 마침 혈우마검과 정인도장이 피 튀기는 혈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미 시간이 꽤 지났는지 싸움은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팽팽한 접전을 벌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철군악은 정인도장이 조금씩 밀리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송난령이 눈살을 약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역시 정인도장이 혈우마검을 상대하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는 것 같군요.”
“그런 것 같소.”
그러나 철군악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상한 생각이 드는 것을 금치 못했다.
정인도장은 혈우마검에게 밀리면서도 싸움에 집중하지 못하고 참관인석에 앉아 있는 정풍도장에게 자꾸 눈길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의 눈길이 하도 은밀해 다른 사람은 모두 눈치 채지 못했지만, 철군악의 눈만은 피할 수 없었다.
거기다 더욱 이상한 것은 정풍도장의 태도였다.
그는 정인도장의 눈길을 받자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미미하게 고개를 가로 젓는 것이 아닌가?
정풍도장의 행동에 정인도장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
그것은 어찌 보면 실망의 기색 같기도 했고, 또 어찌 보면 안도의 표정 같기도 했다.
철군악이 기이한 눈으로 그들 사형제를 살펴보고 있을 때, 드디어 혈우마검이 삼절마검을 펼치기 시작했다.
끼이이이`─`
심장을 갉아먹을 듯한 호곡(號哭) 소리가 터져 나오며 천지가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칠성회두(七星廻斗)!”
정인도장이 놀라 시퍼레진 안색으로 검을 크게 휘둘렀다.
하나, 악마의 이빨처럼 덮쳐 오는 붉은 검기는 그에 아랑곳 않고 정인도장의 몸뚱어리를 집어삼켰다.
쿠콰쾅!
천지를 집어삼킬 듯한 폭음과 함께 정인도장의 입에서 뼈저린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으윽……!”
온몸에 검상을 입은 채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나는 정인도장의 얼굴은 고통과 수치심으로 인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에 반해 혈우마검은 얼굴 가득 오만한 미소를 머금은 채 비틀거리는 정인도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인도장은 패배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잠시 멍한 얼굴로 있더니 어느 순간 씁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가 패했소.”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천천히 비무대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와아아……!”
군웅들은 정인도장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얼굴 가득 흠모의 빛을 띤 채 혈우마검에게 환호를 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여태껏 내로라하는 고수들과 싸우면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은 혈우마검의 놀라운 무공에 감복하는 빛이 역력히 떠올라 있었다.
송난령의 입에서 탄식 같은 소리가 새어나왔다.
“정말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검법이군요.”
“삼절마검은 고금십대검법 중에서도 가장 기괴하고 위력적인 검법이오. 칠성검법(七星劒法) 정도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지.”
송난령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맞는 말이에요. 더군다나 그는 삼절마검을 거의 완벽하게 익힌 것 같군요.”
철군악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검의 수발이나 위력을 보건대 혈우마검은 송난령의 말처럼 삼절마검을 거의 대성(大成)한 것 같았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혈우마검을 상대할 만한 고수는 당금 천하에서 손가락으로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철군악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잠시 상념에 빠져 있을 때, 송난령이 그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뭐 하세요? 당신 차례잖아요.”
철군악은 상념에서 깨어나 고개를 들었다.
비무대를 쳐다보니 상대인 학초명은 이미 올라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실례로군.”
철군악은 중얼거리며 비무대로 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송난령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운(武運)을 빌어요.”
철군악은 그녀를 힐끔 바라본 후 비무대 위로 올라갔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송난령은 무심하기 짝이 없는 그의 두 눈에서 알 수 없는 자신감을 읽을 수 있었다.
그가 비무대 위로 올라오자 군웅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너무도 무심해 오히려 쓸쓸해 보이는 눈빛과 표정의 변화를 찾아볼 수 없는 얼굴, 그리고 무엇보다 당요나 신행자를 상대할 때 보여 주었던 폭발적이고 가공스러운 검법.
그는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 준 것이다.
그가 대 위로 올라오자 학초명이 부드러운 얼굴로 먼저 말을 건넸다.
“학초명입니다. 절세의 고수인 철 대협과 이렇게 비무를 하게 되어 영광이오.”
철군악이 손을 맞잡으며 대꾸했다.
“학 대협과 같은 무인과 겨루게 되어 오히려 본인이 영광이오. 철군악이라 합니다.”
철군악이 예상외로 겸손히 말을 받자 학초명의 얼굴에 기이한 빛이 떠올랐다.
철군악이 이처럼 얌전(?)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탓이다.
두 사람은 인사를 건넨 후 곧바로 자세를 가다듬었다.
장내가 순식간에 쥐죽은 듯 조용해지며 오직 수많은 눈동자만이 호기심과 열기를 담은 채 반짝거렸다.
죽음 같은 적막이 싫어서였을까?
먼저 움직인 사람은 학초명이었다.
쐐애액!
희뿌연 검기가 구름처럼 일어나며 무언가 희끗한 것이 철군악의 어깨를 향해 유성처럼 날아들었다.
철군악이 재빨리 검을 들어 막았지만, 학초명의 검은 너무도 빠르고 날카로웠다.
카카캉!
“으음!”
철군악은 신음을 토해 내며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어깨 부분의 옷이 마치 걸레처럼 찢어진 채 그 사이로 피가 터져 나왔지만, 그는 상처를 돌볼 사이도 없이 다시 몸을 움직여야 했다. 어느새 다가온 학초명이 바로 코앞에서 검을 찌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이이잉`─`
기괴한 소리가 터져 나오며 학초명의 검이 엄청난 압력을 동반한 채 철군악을 향해 곧바로 짓쳐 들었다.
쇠꼬챙이에 달랑 손잡이만 달아 놓은 것처럼 볼품없어 보이는 검이었으나, 이제는 누구도 그것을 우습게 볼 수 없었다.
그것은 철군악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눈을 빛내며 검을 종횡으로 어지럽게 움직였다.
우우우웅!
맑은 검명이 터져 나오며 희뿌연 검막(劒幕)이 철군악의 전신을 물샐틈없이 에워쌌다. 흡천십이검 중 최고의 수비초식인 검막밀밀(劒幕密密)이었다.
철군악은 이번에야말로 충분히 학초명의 검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기이잉`─`
철군악의 혼신을 다한 방어에도 불구하고 학초명의 검은 여전히 가공할 기세로 검막밀밀의 한쪽을 허물며 날아들고 있었다. 이대로 간다면 철군악은 또다시 낭패를 볼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철군악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학초명의 검이 어느새 코끝까지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철군악은 재빨리 검을 회수한 후 마구 그어대기 시작했다. 일순,
과아아아……
실로 소름 끼칠 만큼 무지막지한 검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천지를 집어삼킬 듯 요동쳤다.
이것이 바로 고금십대검법 중 하나인 광해삼검(狂海三劒)의 광해일령(狂海溢靈)이었다.
철군악은 다급한 나머지 여태껏 익히기만 하고 한 번도 펼쳐 본 적이 없는 광해삼검을 전개한 것이다.
학초명은 실로 어마어마한 검기가 자신을 덮쳐 오자 검을 똑바로 들고 무려 아홉 번을 연달아서 찔러댔다.
괘괘괭……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르고 날카롭던지 마치 아홉 명이 한꺼번에 검을 찌르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한데, 막 아홉 번째 검을 찌르고 난 학초명의 얼굴이 휴지처럼 구겨지는 것이 아닌가?
‘하필 이때에……!’
학초명은 이를 악물었다.
진기(眞氣)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하나, 그는 계속 검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절대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학초명은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있는 힘을 모두 짜내 검을 찔렀다. 하나,
꽈앙!
굉량한 폭음이 터짐과 동시에 학초명은 혼신의 힘으로 펼친 자신의 검법이 허물어지며, 해일과도 같은 검기가 자신을 덮쳐 오는 것을 느꼈다.
“이야압……!”
학초명이 시퍼레진 안색으로 다시 검을 움직였으나, 한번 기울어진 승부를 다시 되잡을 수는 없었다.
콰콰쾅`─`!
“으윽!”
학초명은 엄청난 검기가 자신의 온몸을 갈가리 찢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정신없이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그는 입에서 분수 같은 피를 뿜어내면서도 몸의 중심을 잡기 위해 정신을 가다듬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수습한 학초명은 멍한 눈으로 자신의 몸에 난 상처를 쳐다보았다.
“……!”
그는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패배에 할 말을 잊은 듯 도무지 말문을 열지 못했다.
겨우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는 그의 망막으로 이미 검을 집어넣은 철군악이 묵묵히 서 있는 모습이 투영되었다.
철군악은 기이한 눈으로 학초명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학초명이 마지막 아홉 번째 검을 찔러 올 때, 갑자기 검법의 위력이 줄어든 것을 알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학초명은 제대로 실력 발휘를 하지 못하고 어이없이 패한 것이다. 결과를 다시 번복할 수는 없었으나, 철군악은 떳떳한 승부를 하고 싶었다.
학초명을 직시하며 조용히 입을 여는 그의 모습에선 승자의 기쁨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다시 도전하고 싶다면 언제든지 받아 주겠소.”
학초명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더니 천천히 비무대를 내려갔다. 아무 말 없이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이 그렇게 쓸쓸해 보일 수 없었다.
철군악은 학초명의 뒷모습을 기이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져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그제서야 비로소 비무대에서 내려왔다.
송난령이 반가운 얼굴로 철군악을 맞았다.
“축하해요. 드디어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혈우마검과의 대결이 이루어지게 되었군요.”
철군악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상대가 정상이었다면 내가 패자가 될 수도 있었소.”
송난령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는 정상이 아니었소.”
“예?”
철군악은 의혹에 가득 찬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송난령을 힐끔 쳐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가 조금 전 펼친 검법이 무엇인지 아시오?”
“통천삼관(通天三貫)이 아니던가요?”
“맞소. 그는 고금십대검법 중에서도 가장 신비하다는 통천삼관을 익힌 절대의 검객이오. 나는 설마 그의 무공이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가 하마터면 크게 낭패를 당할 뻔했소. 한데 그는 나를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도 왠지 그것을 살리지 못하고 어이없게 내게 패했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까 구검(九劒)을 쳐낼 때도, 팔검(八劒)까지는 그 기세가 대단했었는데, 마지막 일검은 눈에 띄게 위력이 없었소. 아마…… 몸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 같소.”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왜 불편한 몸을 이끌고 고생스럽게 비무대회에 나왔을까요? 명예욕에 사로잡힌 사람 같지는 않아 보이던데?”
“글쎄……”
“어쨌든 이제 혈우마검만 이기면 당신은 십일회 비룡승천대회의 우승자가 되는 거예요. 어때요, 소감이?”
철군악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혈우마검이 소문처럼 대단한 자였으면 좋겠소.”
너무도 의외의 대답에 송난령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철군악을 쳐다보았다.
세상에 상대가 강했으면 좋겠다는 사람이 있다니?
비록 비무대회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생사대전(生死大戰)은 아니더라도 잘못하면 평생 불구로 살아 가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철군악은 그런 것쯤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강한 상대를 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가 진정한 무인이기 때문에? 아니면 무슨 다른 이유가 있어 송난령은 순간적으로 철군악에 대해 많은 의문과 호기심을 느꼈지만, 그것을 말로 표현할 수는 없었다.
그저 애꿎은 돌멩이만 걷어차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행동의 전부였다.
발 디딜 틈 없이 꽉 들어찬 군웅들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마치 여름에 못 속의 개구리들이 울어대는 소리처럼 넓은 비무장에 소란스럽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들은 두 눈 가득 호기심과 알 수 없는 열기를 담은 채 비무대를 주시하고 있었다.
마침 대회의 진행을 맡아 보고 있는 괴모가 올라와 철군악과 혈우마검 두 사람을 호명했다.
“여러분, 드디어 비룡승천대회의 최종 승자를 가리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철 공자와 단 대협은 어서 비무대로 나오시기 바라오.”
이윽고 철군악과 혈우마검이 비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내자 장내의 열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와아아아……!”
군웅들은 제각기 마음에 있는 사람을 응원하며 긴장된 눈길로 비무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철군악과 혈우마검!
일세에 보기 드문 두 명의 천재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우승을 다투는 광경을 생각해 보라!
어찌 더운 심장이 고동치지 않겠는가?
하나, 군웅들이 환호하는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또 하나의 커다란 이유.
그것은 바로 그들이 익히고 있는 검법 때문이었다.
고금십대검법(古今十大劒法)!`
수천 년 무림 역사상 가장 강하고 위대하다고 알려진 열 가지 검법. 범인(凡人)은 백년을 노력한다 해도 깨달을 수 없고, 제아무리 뛰어난 기재라 하더라도 각고의 노력이 없다면 결코 익힐 수 없다고 알려진 신의 검학(劒學).
그것을 두 사람이 익히고 있는 것이다.
군웅들의 시선을 받으며 두 사람의 절세고수는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혈우마검이 쏘는 듯한 시선으로 상대를 직시하고 있는 데 반해 철군악은 억만(億萬) 장(丈) 깊이의 무저갱(無底坑)처럼 깊은 눈길로 혈우마검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 철군악을 노려보던 혈우마검이 문득 조용히 입을 열었다.
“천하에 적수가 없는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군.”
어찌 들으면 매우 오만하게 들릴 수도 있었지만,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 누구도 그의 말에 불만을 나타내거나 토를 달지 못했다. 그는 충분히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었다.
철군악은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참관인석에 앉아 있는 자전신검 남궁룡이나 검제, 정풍도장이 흥미롭다는 눈길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또한 비무대 아래에는 수많은 사람들과 송난령이 빛나는 눈으로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누구도 그가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일을 막지 못할 것이다.
누구도!
철군악은 서서히 검을 치켜 들었다.
스르릉……
상쾌한 쇳소리와 함께 무적인이 그 신비한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혈우마검도 애검인 한상(寒霜)을 검집에서 빼냈다.
두 사람은 검을 뽑아 든 채 번쩍이는 눈으로 서로를 노려보았다. 터질 듯한 긴장감이 주위를 휘감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주위가 조용해지며 바늘 떨어지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바야흐로 비룡승천대회 최고의 영웅을 가리는 일전이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과연 누가 승자가 되고 누가 패자가 될 것인가?
한 사람은 이미 오래 전부터 마도제일검이라 불리며 적수를 찾아보지 못한 절세의 검객, 또 한 사람은 혜성처럼 등장한 후 수많은 절정고수들을 연파하고 올라온 무적의 검수(劒手).
아무도…… 아무도 승패를 예측할 수 없는 일전이었다.
두 사람은 검을 눈앞에 세운 채 여전히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고수들 간의 싸움에서는 한 순간의 실수가 바로 패배로 연결되기 때문에 신중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누구도 쉽게 선공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지루한 시간이 계속되었다.
잔뜩 긴장된 표정으로 그들을 지켜보던 군웅들의 눈에 지루한 빛이 떠오를 즈음, 한참 동안 서로를 응시하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타앗……!”
끼이이이……
혈우마검의 애병인 한상이 검붉은 빛으로 변하며 엄청난 검기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그는 감히 방심하지 못하고 처음부터 삼절마검(三絶魔劒)을 펼친 것이다.
철군악 또한 상대가 상대인지라 평범한 검법으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음을 깨닫고 광해삼검(狂海三劒)으로 응수했다.
쿠아아아……
비무대는 두 사람이 내뿜는 엄청난 검기로 인해 순식간에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해 버렸다.
쿠콰쾅!
꽈르릉……
순식간에 십여 초(招)가 흘렀지만, 두 사람 중 누구도 쉽게 우위를 점할 수 없었다.
‘이러다간 끝이 없겠군!’
한참 격전이 계속되는 와중에 돌연 혈우마검이 눈을 빛내며 슬쩍 사(四) 검(劒)을 쳐냈다.
끼이잉……
일순, 혈우마검의 검이 엄청난 위력을 동반한 채 철군악의 정면으로 짓쳐 들었다.
철군악 또한 추호도 주저함 없이 눈을 빛내며 검을 종횡으로 그어댔다.
쭈아`─`악!
순간, 혈우마검의 막강한 검기가 좌우로 쫘악 갈라졌다.
혈우마검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몸을 뒤로 빼내더니 한 순간에 무려 삼십이(三十二) 검(劒)을 쳐냈다.
끼이이이이`─`
소름을 돋게 하는 호곡 소리와 함께 그의 검이 순식간에 서른두 개로 변한 채 철군악의 전신 대혈(大穴)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혈우마검은 평범한 방법으로는 도저히 철군악을 꺾을 수 없음을 깨닫고 임기응변을 발휘한 것인데, 과연 그의 의도대로 철군악의 눈에 순간적으로 당황하는 빛이 떠올랐다.
서른두 개의 검 중 실초(實招)는 단 하나였다.
나머지 서른한 개의 검은 단지 상대의 눈을 어지럽히는 허초(虛招)에 불과했다.
하나, 그 하나의 실초는 실로 무시무시한 위력을 담고 있어 그것에 격중된다면 제아무리 단단한 피부를 지닌 자라 할지라도 죽음을 면할 수 없었다.
혈우마검의 이번 공격은 너무도 시기 적절하여 누가 보아도 철군악은 커다란 낭패를 면치 못할 것 같았다.
‘끝났다!’
혈우마검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득의의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철군악이 이번의 일초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음을 확신했다.
하나, 그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채 지워지기도 전에 실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번쩍! 번쩍!
느닷없이 땅으로부터 수십 가닥의 찬란한 번개가 피어오르더니 혈우마검이 펼친 검법을 모조리 와해하는 것이 아닌가?
“아……!”
너무도 엄청난 광경에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군웅들은 물론이고 당사자인 혈우마검조차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철군악은 칩광구뢰를 순식간에 네 번이나 전개하여 공격을 차단한 후, 여세를 몰아 재빨리 혈우마검에게 다가갔다.
쿠아아아……
엄청난 검기가 마구 요동치며 혈우마검의 전신을 집어삼킬 듯 덮쳐 갔다.
혈우마검은 절세의 고수답게 재빨리 정신을 수습하고 검을 휘둘러댔으나, 이미 주도권은 철군악에게 넘어가 있었다.
꽈꽝!
“으윽!”
폭음이 터지며 압력을 이기지 못한 혈우마검이 연신 뒤로 물러나는 모습이 보였다.
철군악은 아예 여기서 끝장을 보려고 생각했는지 득달같이 달려들며 검을 마구 그어댔다. 일순,
우우우우우……
검이 마구 떨리며 사방으로 엄청난 검기가 미친 듯이 퍼져 나갔다. 그 모습이 어찌나 무시무시하던지 꼭 수만 개의 벼락이 대지(大地)를 산산이 찢어발기는 것 같았다.
이것이 바로 광해삼검의 절초인 노도광란(怒濤狂亂)이었다.
혈우마검은 너무도 엄청난 검기가 자신을 덮쳐 오자 이를 악물고 삼절마검 최후의 절초인 만귀출세(萬鬼出世)를 펼쳤다.
끼아아아아……
귀를 쥐어뜯고 싶을 만큼 음산한 호곡 소리가 허공 가득 울려 퍼지며 천지가 온통 붉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두 사람이 내뿜은 무지막지한 검기는 곧바로 허공에서 충돌하고 말았다.
꽈꽈꽈꽝!
“크윽!”
지축이 갈라지는 듯한 폭음과 함께 미약한 신음 소리도 들려왔다. 동시에 비무대 한쪽이 엄청난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콰르르르……
장내가 고요의 늪에 빠진 듯 갑자기 조용해졌다.
군웅들은 호기심이 가득 담긴 눈으로 비무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철군악과 혈우마검은 마치 지진을 만난 듯 온통 폐허로 변한 비무대 위에 서 있었다.
철군악은 전신에 수많은 검상을 입은 채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심한 부상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에 반해 혈우마검의 모습은 처참할 정도였다.
마치 난도질을 당한 듯 온몸에 성한 곳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고, 배와 가슴은 쩍 벌어진 채 폭포 같은 피를 쏟아 내고 있었다.
그는 항상 오만한 미소를 짓고 있던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불신이 가득 담긴 눈으로 철군악을 노려보고 있었다.
“삼절마검이 깨지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 나오고 있었다.
혈우마검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태껏 누구도 받아 보지 못한 삼절마검이 너무도 어이없게 무너진 것이다.
더구나 상대는 이제 처음 강호에 나온 무명의 청년이었다.
혈우마검의 얼굴에는 오만한 미소 대신 쓰디쓴 웃음이 걸려 있었다. 그가 십 수 년 동안 쌓아 온 명성이 단 한 번의 패배로 허물어지고 말았다.
이제 누구도 그를 최고의 기재라 부르지 않을 것이다.
잠시 실성한 사람처럼 멍청히 서 있던 혈우마검이 돌연 미친 듯이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핫!”
그는 한참 동안 허공을 올려다보며 웃어대더니 돌연 웃음을 뚝 그치고는 철군악을 노려보았다.
그의 두 눈이 마치 횃불처럼 번쩍거리고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너와 나의 싸움은 지금부터다!”
혈우마검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천천히 비무대에서 내려갔다.
철군악은 그저 무심한 눈으로 사라져 가는 혈우마검의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최후의 승자가 되었건만 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비룡승천대회에서 우승한 것이 너무 감격스러워 오히려 아무 표정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우승이 전혀 기쁘지 않은 것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하나, 군웅들은 달랐다.
“와아아아……”
“천하 제일검이다……!”
그들은 목이 터져라 함성을 지르며 마치 자기가 우승을 한 것처럼 열광하기 시작했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의외의 인물이 무적의 고수라는 혈우마검을 꺾고 당당히 우승한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기쁨에 겨워 미친 듯이 좋아하겠지만, 철군악은 승자가 된 것이 하나도 흥이 나지 않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그저 묵묵히 있을 뿐이었다.
철혈(鐵血)의 피를 갖고 있다면 이럴까?
무표정한 얼굴에 아무런 광채도 나지 않는 눈빛, 그리고 누구도 당할 수 없을 만큼 가공스런 검법.
군웅 중 누군가가 돌연 미친 듯이 외치기 시작했다.
“냉면무적(冷面無敵)이다!”
그것이 신호가 된 듯 군웅들은 한 목소리로 외쳐댔다.
“냉면무적, 냉면무적……!”
“천하 제일검은 냉면무적이다!”
“와아아아……!”
장내는 더욱더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 들었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냉면무적이라고 외치며 박수를 쳐댔다.
냉면무적(冷面無敵) 철군악(鐵君岳)!
이제 그 이름은 경외의 대상이 되어 사해(四海)를 떨어 울릴 것이다. 마치 폭풍노도(暴風怒濤)처럼……
* * *
“내가 자네를 보고자 한 것은 긴히 할 말이 있어서네.”
“……?”
“흠…… 자네는 나를 잘 모르겠지만, 나는 사실 오래 전부터 자네의 사형인 단소(旦昭)를 알고 있었네. 그들이 하는 일을 암중으로 도와주고 있었던 게지.”
“대정회를 도와주고 있었단 말씀입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내가 자네를 만나고자 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원래 난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그들을 도와 주고 있었는데, 일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바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네. 나야 어차피 홀몸이라 거리낄 것이 없지만, 어릴 적부터 친딸처럼 애지중지 키워 온 령아(玲兒)가 계속 마음에 걸려 고민하던 중 자네 이야기를 듣게 되었지. 어떤가? 자네가 괜찮다면 잠시 동안 령아를 자네에게 부탁하고 싶네.”
“……!”
“안 되겠는가?”
“아닙니다. 단지 저 또한 할 일이 많은지라……”
“그런 이유라면 조금도 걱정할 게 없네. 자네도 어느 정도 알겠지만, 령아는 내 무예를 모두 이어받아 결코 나보다 못하지 않네. 자네에게 도움이 되면 되었지 방해는 되지 않을 걸세.”
“……”
“……?”
“알겠습니다.”
“허허허, 고마우이. 그리고 더불어 한 가지 알려 줄 게 있는데, 성검문(聖劒門)과 제마궁(帝魔宮), 그리고 사천당가(四川唐家)는 실질적으로 연합을 맺은 거나 진배없네. 첩보(諜報)에 의하면 자네를 해치기 위해 삼(三) 파(派)의 고수들이 강호에 나왔다고 하니 특히 조심해야 할 걸세.”
“……!”
“그럼 나는 자네만 믿겠네.”